백기완 선생께서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랫말처럼 홀연히 떠나셨다.

다 같이 잘사는 '노나메기 세상'을 꿈꾸었으나, 먼 길을 앞서 떠나셨다.

 

사회장으로 진행된 백기완 선생 '영결식은 19일 오전 8시 서울대병원 발인식을 시작으로 엄수되었다.

대학로 '통일연구소' 앞에서 노제를 지내고 종로를 거쳐 서울광장까지 거리행진을 했다.

오전 11시 30분 무렵 서울광장에서 영결식을 갖고, 하관식은 오후 3시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먼 길 떠나시는 선생을 배웅하기 위해 새벽부터 설쳤으나,

순간적인 실수로 차 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안달을 했다.

문제는 거리두기로 승용차를 끌고 간 게 탈이였다.

창경궁 앞에서 서울대병원까지 가는데, 한 시간이 더 걸렸다.

결국 발인식도 보지 못하고, 멀리서 이동하는 운구행렬만 지켜보아야 했다.

 

운구행렬이 대학로 소나무 길로 접어들며 차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노제가 끝날 때까지 다시 꼼짝할 수 없었다.

 

운구 행렬에 백기완 선생을 형상화한 검은 두루마기 차림의 대형 한지 인형도 등장했다.

꽃상여와 만장, 여러 명의 풍물패를 앞세우고 노제 장소인 '통일문제연구소'와 '학림다방' 앞에 멈춰섰다.

길에다 차를 버려두고 현장에 달려 갈 수밖에 없었는데, 제일 먼저 신학철선생이 눈에 띄었다. 

 

소나무 길 노제는 박래군 상임집행위원장 사회로 시작되었다.

김세균 상임장레위원장은 조사를 통해 “선생님은 평생을 노동자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동지로 삼고” 살았다고 회고하며 고인을 보내는 아쉬움을 달랬다.

뒤이어 박석운 상임장례위원장도 “백기완 선생은 함석헌, 장준하, 문익환, 계훈제로 이어지는

재야의 마지막 어른이셨다”고 회상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이형숙 대표 또한 백기완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며

장애인의 친구와 동지로 살아온 고인을 추억했다.

비정규직 공동투쟁의 김수억 대표는 비정규직 없는 노동해방을 꿈꾼 고인을 애도했다.

 

장례위에는 사회 각계 인사와 562개 단체 및 시민 6천104명이 참여 했다는데,

‘노나메기 세상’이라 새겨진 마스크를 쓴 장례위원 머리에는

선생께서 남긴 글귀 '노동해방'이 적힌 머리띠를 둘렀다.

가슴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노랫말 '남김없이'라 쓰인 리본을 달았다.

 

노제가 끝나고야 운구행렬을 따라 갈 수 있었는데,

왜 가까운 주차장에 주차할 생각을 못했는지 모르겠다.

거리 행진은 물론 장례식 조차 제대로 찍지 못했는데,

운구행렬을 따르는 조문객의 차량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온 종일 백기완 선생만 생각하며 추모하는 시간이 된 것만은 틀림없다.

시청 가까이 당도해서야 차를 '프레스센터'에 주차할 수 있었다.

일단 갈증과 허기부터 메우기 위해 물과 빵부터 사들고 영결식장 주변을 맴돌았는데,

최명철씨와 딸 보라양, 박재동, 곽대원, 양시영, 김가영씨 등 반가운 분도 여럿 만났다.

 

영결식장은 코로나 방역수칙에 따라 출입자 방명록 작성과 체온 측정을 한 후

99명만 띄엄띄엄 앉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종로와 광화문을 거치는 사이 추모객 수가 점차 불어나

영결식이 거행되는 '서울광장'에 천명 가까이 몰려들었다.

시민들이 광장 주변으로 몰려들어 거리두기가 지켜질 수 없었다.

 

 운구행렬은 11시 20분경 광장에 도착했는데,

김소연씨의 사회로 신학철, 신철영씨의 초 밝히기로 영결식이 시작되었다.

416합창단, 이소선합창단과 평화의나무 합창단 등 연합합창단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시민들과 함께 불렀다.

이어 양기환 대변인의 고 백기완 선생의 약력 보고가 있었다.

 

약력 보고 후 문정현 신부,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 송경동 시인,

김미숙 김용균 재단이사장, 명진 스님 등의 조사가 이어졌다.

백선생의 오랜 동지인 문정현 신부는 “백 선생 옆자리가 내 자리인 줄 알고 살았는데,

이제 내 자리가 없어졌다"며 울먹였다. 그리고 "앞서서 나아갔으니 산 저희들이 따르겠다.

다시 만나 뵐 그 날까지 선생님 자리를 지키겠다"며 다짐했다.

 

'서울광장' 영결식에는 수백 명에 달하는 노동자들도 함께했다.

조사를 맡은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은 "생전에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과 '김진숙 복직'이었다"며 마지막까지 노동자의 삶을

걱정해주신 선생님의 격려에 부끄럽지 않은 '민주노총'이 되겠다"고 말했다.

 

이날 영결식에서 가수 정태춘씨가 백기완 선생을 추모하는 노래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불렀다.

영결식에 함께한 시민들은 백기완선생께서 생전에 좋아한 '민중의 노래'를 함께 합창했다.

 

백기완선생의 딸 백원담씨는 영결식 말미에 진행된 유족 인사에서 "어머니가 오시지 못했다'면서

 어머니가 아버지를 향해 쓴 마지막 편지를 대독했다.

 

백기완 선생님,

봄이 지나가기 전에 '불러보세, 우리의 봄노래'를 함께 부르려 했는데

이제 부를 수가 없으니 다음에 다시 만나면 꼭 같이 불러요.

언제나 기억할 거 같은 우리 남편 만나 나는 행복했어요.

멋진 목도리 휘날리며 바위고개 그 언덕에서 기다리세요.

잘잘(백기완 선생이 생전에 만든 말, 잘있어요 잘가요 줄임말), 우리 신랑 백기완씨"

-아내 김정숙-

 

서울광장에서 영결식이 끝날 무렵 장지로 먼저 출발했는데, 이미 많은 분들이 와 계셨다.

다들 마스크를 쓰고 있어 알아 볼 수 없었으나 박불똥, 장순향, 류연복, 임정희,

강제욱, 김봉규, 곽명우, 손병주, 정영철, 성기준씨 등 일부만 알아 볼수 있었다.

 

뒤늦게 출발한 운구행렬은 오후 3시 20분 무렵에야 장지에 도착했다.

'모란공원'에는 오후 2시부터 자리를 지킨 추모객 100여 명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투쟁하자던 백기완 선생님의 외침을 기억합니다‘ 

적힌 현수막으로 고인을 맞이했다.

운구행렬에는 김세균, 이수호, 임진택, 양기환씨도 보였다.

 

운구 행렬이 전태일 열사의 묘지 옆에 마련된 묘소까지 이동하는 동안

이성호씨의 풍물패가 소리굿으로 백 소장을 잃은 유족과 추모객의 마음을 위로했다.

하관식이 시작되자 유족들은 잠시 '아버님'을 외치며 흐느끼기도 했다.

큰 아들 백일씨는 “아버님의 마지막 유언”이라며

추모객과 노동해방, 해방통일, 노나메기를 세번 외쳤다.

 

신학철 상임장례위원장은 추모사에서 ‘백기완선생께서 앞길을 잘 닦아 놓아

우리가 편하게 갈 수 있게 되었다’며 고인의 죽음을 슬퍼했다.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는 추모사를 통해 “백기완 선생님은 권력과 유혹 앞에서

초심을 버리지 않는 분이셨다.”며 “선생님에게 배운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우직한 진정성이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장례식이 모두 끝나고 나오는 길에 정재안, 박세라, 박불똥, 김윤기씨등

반가운 분을 한꺼번에 여럿 만났다.

급히 언덕을 내려가다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카메라까지 메모리 저장공간이 부족하다며 작동되지 않았다.

사진 그만 찍고 빨리 가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평생 민주화를 위해 싸우며 잘못된 세상을 바로 잡으려 애쓰신

백기완 선생은 이제 이 세상을 떠나 또 하나의 별이 되어버렸다.

선생님! 이제 편히 쉬십시요.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5일 오후3시, '서울광장'에서 열린 2차 민중총궐기 투쟁대회에는 5만여명의 군중이 모였으나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경찰이 시위대를 자극하지만 않으면 얼마든지 평화적인 대규모 시위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대부분 참가자들은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의 초록색 바람개비와 각시탈이나 동물 모양, '가이 포크스' 등 여러가지 가면을 쓰고

퍼포먼스를 벌였다. 대통령이 시위대 복면을 IS에 견주며 복면금지법을 만들려니, 개소리 말라며 모두들 쓰고 나온 것이다.

 

'서울광장'에서 집회를 마친 시위대는 오후 440분쯤부터 백남기씨가 입원한 혜화동 '서울대병원'까지 평화행진을 벌였다.

시청 앞에서 출발한 선두가 대학로에 도착해서야 마지막 행렬이 출발할 만큼, 많은 분들이 함께해 서울도심은 마치 축제장을

방불케 했다.

   

지난달 14일 집회는 경찰이 차벽으로 막아 폭력시위를 유도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여론을 뒤집어려, 정말  못 된 짓만 배웠다.

국민들의 목소리는 귀 틀어 막고, 밀어 붙이는 걸 보면 꼭 박정희가 하던 그대로다. 아마 똑 같이 총맞아 죽고 싶은 모양이다.

  

오후 730분부터 대학로 서울대병원 앞에서 진행된 백남기 농민 쾌유 기원 촛불문화제에서 주최 측은 카네이션 1만송이를

나눠주며 쾌유를 빌었지만, 가망 없는 듯 했다. 간신히 연명케 하는 산소 호흡기를 거두는 날이 바로 박근혜의 제삿 날이다.



사진,글/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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