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의 전진기지 ‘광화문광장’에 무허가 철공소 하나 들어섰다.

박근혜 잡을 무기 공장이 아니라 촛불시민들에게 예술적 결기를 다지게 하는 환경미술가 최병수의 현장 작업실이다.

이제 광화문광장은 부패 정치를 예술로 치유하는 블렉리스트 작가들의 창작공간이 되어버렸다.






최병수는 이한열열사의 대형걸개 그림으로 잘 알려진 작가다.

그는 작가이기 이전에 안 해 본 일이 없는 잡기에 능한 사람이다.

노동판의 잡부에서 선반공, 용접공, 보일러공, 목수 등 다양한 직업으로 기능을 닦아왔는데,

그 장인적인 기질을 무기로 그림, 판화, 조각, 설치미술 등 다양한 예술 영역으로 확장시켜,

사회 실천적 창작활동에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그가 작가의 길을 걷게 된 동기도 재미있다. 학력이라고는 중학교 2학년 중퇴가 전부다.

80년대 중반 우연히 신촌 벽화사건에 연루되어, 미술판에 발을 들인 것이다.

홍대생들이 그리는 진달래꽃 벽화작업(상생도)에 쓸 작업받침대 짜러 가 북한의 국화인 진달래 꽃 작업을 돕게 되었는데,

이적성 표현물 작성의 죄목으로 경찰에 붙들려 갔다.

그는 목수로 참여했지만, 경찰이 그의 직업을 화가로 붙여주어 또 하나의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된 것이다.

좌우지간 그의 예술적 재능은 타고 난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항상 칼을 갖고 다니며 무엇이던 만드는데 재미를 부쳤고, 반항아적인 기질이 강했다고 한다.

학교 선생 뿐 아니라 그 누구의 말도 사리에 맞지 않으면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학교에서는 물론 집안에서 내침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옳다고 믿으면 자기 몸까지 던지는 정직하고 강한 사람으로, 직설적이고 다혈질에다 단순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목공소나 철공소의 기능공으로 일 할 때도 자신의 창의성이 주인의 장사 속에 밀리면 그 자리에서 그만 두었다고 한다.

 





이한열 열사가 생전에 활동했던 동아리 ‘만화사랑’과의 인연으로 내놓은

그의 첫 대형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노동해방도' '장산곶매' 등으로 진보 운동 판에서도 유명세를 떨쳤다.

그러나 그런 작가의 유명세나 재능보다 초지일관 지켜온 예술의 사회 실천적 헌신에 더 무게를 둔다.






최병수 씨는 작가였지만, 환경운동가로 더 유명하다.
해창 갯벌이나 북한산, 고봉산, 새만금, 사패산, 강정마을, 평택 대추리, 팽목항에서 부터

노동현장까지 생명평화의 외침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지구온난화, 빈곤, 전쟁 등 생명과 평화가 파괴되는 곳에는 늘 그가 있었다.







나약한 생명들이 짓밟히는 현실 폭로성 작품을 만드는 것만으로 모자라, 작품들고 현장에 가서 싸워야 했다.

전쟁터의 대포대신 예술적 조형물로 생명파괴자들의 머리을 공격하는 투사로 살아 온 셈이다.

반문명과 싸워 온 환경운동의 뿌리에는 삶의 근거가 되는 노동이 어김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이 먼저 라는 근본을 외면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긴 세월 환경운동과 노동운동을 해오며 동지들의 인간적 배신에 실의를 느낀 적도 많았다고 한다.

모순과 불의를 참지 못하는 그의 성격이 더 힘들게 했을 것으로 본다.






그렇게 돈 안 되는 짓거리만 해왔으니 사는 꼴은 보나마나다.

13년 전에는 위암 3기 판정을 받아 위를 3분의2나 잘라 내면서도 하던 일을 멈추지 않은 악바리였다.

다행스럽게도 5년 전 교사를 아내로 맞으면서 입에 풀칠하는 데는 지장 없게 되었지만,

대형 조형물을 만드는 작업비를 충당하기는 어림없었다.





그런데, 세월호와 연관되어 박근혜 국정농단이 터지면서 또 한 번 사단이 나고 말았다.

블랙리스트 사건까지 겹치면서, 지난 12월 중순경 광화문광장으로 공구들을 싸들고 올라와 철공소를 차린 것이다.

여수 배개도 촌사람이 서울 광화문광장으로 진출하여 텐트 집이라도 마련했으니, 출세했다면 출세한 셈이다.

허구한 날 여수에서 실어 온 철재들을 잘라 붙여 광장 곳곳에 조형물을 세워 광장은 자연스럽게 야외 조각 미술관이 되어버렸다.

블랙리스트 예술가들의 상징처럼 돼 버린 도루코 면도날도 그가 만든 작품이다.






탄핵, 퇴진, 민주, 꽃 등, 낱말의 조형미를 철판으로 잘라 광화문 공중에 우뚝 세웠는데,

다양한 글자체와 갖가지 형상물의 조화는 황량하기 그지없는 광장에 숨통을 턴 것이다.

물론, 캠핑촌예술행동위원회, 비주류예술가, ‘광화문미술행동’에서 활동하는 많은 작가들의 예술행동이

광화문광장을 예술광장으로 변신시켰지만, 설치미술을 이용해 역동감 있는 현장분위기로 이끈

최병수의 도드라진 예술행동이 일조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젠 숙소로 사용하던 텐트마저 틈틈이 가져 온 각종 공구들로 가득 차버려,

주변에 있는 찜질방으로 전전하며 노숙 아닌 노숙자신세로 전락하였다.

아직도 그가 광장에 조형물을 얼마나 더 만들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 박근혜가 물러날 때 까지 이어질 것 같다.

설치작품 제작비를 마련하려 시작했다는 그가 만든 악세사리 용품도 제법 잘 팔릴 것 같았다.

블랙리스트라는 글귀가 새겨진 면도날 목걸이에서부터 뺏지, 그리고 꿈을 조형화한 열쇠고리 등,

매사에 본질을 꿰뚫어 보는 그의 통찰력은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장사 속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촛불광장을 예술광장으로 이끈 현장예술가들의 피와 땀이 베인 투쟁사는 역사의 한 현장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박근혜는 하루빨리 퇴진하여 모든 작가들이 제자리에서 정상적인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라.

더 이상 가난한 예술가들을 힘들게 하지마라.


사진. 글 / 조문호





















[스크랩] 서울문화투데이 2016년 11월16일

▲조문호 사진가



요즘 어처구니없는 일을 너무 많이 본다.

하루가 다르게 터져 나오는 박근혜 정권의 갖가지 부정과 비리에 차마 입을 다물 수 없다. 그중 문화예술인을 탄압한 블랙리스트 파문으로 문화예술계가 일파만파 들끓고 있다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탄압은 군사정권 때부터 내려 온 오래된 짓거리다. ‘예술인총연합회’란 단체가 태어날 무렵, 배후에서 조종한 세력이 있었던 것도, 그 조직을 통해 예술인들을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아부 잘 하는 예술가는 승승장구했고, 입바른 예술가들은 사정없이 밀려났다. 그 독재에 저항해 온 예술가들이 ‘민족예술인총연합회’를 만들었다. 민중미술과 더불어 탄생한 ‘현실과 발언’ 동인들의 직설적인 표현은 매서웠다. 바꾸어 생각하면 군사정권이 우리나라 민중미술을 꽃 피웠다 할 수도 있겠다.

69년에는 신상옥감독의 ‘내시’란 영화가 음란하다는 이유로 입건되기도 했고, 1970년에는 김지하시인이 ‘오적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었다. 75년에는 공연 정화대책이란 걸 발표하면서 수백 곡의 대중가요를 금지시킨 일이 벌어졌다. 문제는 별 것도 아닌 가사에 제동을 걸었다는 점이다. 이장희의 ‘그건 너“는 책임전가로, 송창식의 ’왜 불러‘는 반말이라는 이유로, 한 대수의 ’물 좀 주소”는 물고문을 연상시키는 이유라는데,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던가?

그리고 87년에는 신학철화백의 ‘모내기’그림이 북한 찬양죄로 압수, 입건된 일도 있었다. 그런데, 요즘 터져 나온 블랙리스트 명단 역시, 그처럼 슬픈 코메디에 다름 아니다. 블랙리스트란 독일 히틀러나 일본제국주의에선 학살예비자명단이 아니던가. 과거 군사정권에서나 있을 법한 이런 치졸한 예술인 탄압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하기야!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례들이 쏟아져 나온 걸 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겠다는 생각이 든다. 문화예술에 대한 각종 지원 사례를 보며 진작부터 낌새는 차렸으나, 설마 그렇게 몰상식한 짓을 하진 않을 거라는 위안도 마음 한구석에 깔려있었다. 그러나 그게 현실로 드러나며, 모든 예술인들이 충격 받고 말았다.

그 뿐 아니었다. 부당한 예술 검열 사례도 수없이 쏟아져 나왔다, 문체부의 치욕적인 인사 조치와 주요 문화정책사업의 예산 몰아주기 등 문화행정의 갖가지 파행이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 안에는 강남아줌마란 여성이나 더럽혀진 이름의 운동선수와 CF감독, 최순실, 차은택, 김종 문체부 차관의 인맥으로 분탕질 된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일이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나 묵인 없이 진행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제 입맛에 따라 예술인을 낙인찍어 문체부로 내려 보냈으나, 예술인 관리를 제대로 못했다는 이유로 차관이 날아갔다는 증언까지 나왔다. 문체부 전·현직 공무원의 증언으로는 “청와대에서 재작년 중반부터 문화계 인사들을 분류한 명단을 문체부 예술국에 내려 보내 좌파 인사에 대한 지원을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지난 10월12일 공개된 예술인 블랙리스트 명단으로 예술인들은 분노해 일어났고, 18일에는 ‘예술행동위원회’에서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 예술가다”란 기자회견을 열며 광화문 광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어 11월 4일에는 문화예술인들이 시국선언에 나서며, 광화문광장을 캠핑촌으로 만들었다. 끊임없이 ‘블랙리스트 페스티벌’과 시국 좌담회를 열며, ‘허수아비 박근혜를 풍자한 그림들을 그리는 등 갖가지 행위예술로 저항하지만, 알고도 모른 채, 묵묵부답이다.

문화융성이란 기치를 문화파탄으로 이끈 박 정권은 이제 그만 내려와야 한다. 하잘 것 없는 모리배들의 농간에 문화융성은 공염불이 되고 말았지만, 농단에 의해 중단될 성질이 결코 아니다. 관련자 처벌과 함께 새로운 적임자를 찾아 개혁해야 할 우리의 당면 과제이고, 기회이기도 하다.

더 이상 광화문 캠핑촌에 웅크려 자는 예술가들과 거리에서 퇴진을 외치는 예술가들의 외침을 외면하지마라. 그만 고생시켜라, 문화파탄의 주체인 조윤선 문체부장관과 정관주 국민소통비서관을 처벌하고, 그 중심에 있는 박근혜 대통령은 즉각 퇴진하라.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 예술가다


예술인들이 모인예술행동위원회는 지난 18일 오전10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현 정권이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문화예술인들을 통제·관리해온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게되

이번 사태는 과거 군사정권 시절 우리가 맞닥뜨린 문화예술계 탄압과 같은 사건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블랙리스트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박명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하며

문화예술인들 답게 풍자그림전과 양혜경씨의 깃발 넋전춤, 장순향씨의 춤, 성효숙씨 퍼포먼스 등

다양한 공연으로 목소리를 높혔다.

 

송경동 시인의 사회로 진행된 기자회견에 첫 발언에 나선 시인 백기완 통일연구소장은

블랙리스트란 우리말로 학살 예비자 명단이라며, 이 땅의 일만여 명의 문화예술인들을

학살 예비자 명단에 넣는다는 것은 유럽의 히틀러, 동양의 일본의 제국주의 시대,

한반도에서는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 때나 있을 법한 얘기라고 말했다.


화가 임옥상씨는 블랙리스트로 살다보니 굉장히 쪼잔해졌다며 내가 왜 전시를 못하느냐 따져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 건 쪼잔한 일로,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단다.
만화가 박재동씨는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

 

나도 한마디 해야겠다.

저 년은 지 애비보다 더 독하다. 어떻게 저리 무식하고 뻔뻔한 인간을 뽑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그래서 ‘87민주항쟁사진 사려는 역사박물관 손목을 잡았나?

아무리 지랄발광해도 30주년 되는 내년에는 책도 만들고 전시도 할 거다.

그마, 당장 내려 온나. “


이날 기자회견장에서 강민시인을 비롯하여 김창규, 장경호, 이시백, 이인철, 류연복, 김이하, 배인석, 김해진,

이인휘, 임정의, 서정화, 박몽구, 이수경, 홍명진, 안상학, 정세학, 유순애, 성기준, 김사빈, 노순택, 이수환,

현 린, 원용진, 정우영, 손병휘, 맹봉학씨 등 많은 예술인들을 만났다.

 

사진,/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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