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은 여의도 촛불집회장에서 인사동으로 호출되었다.
인사동에서 김명성씨와 화가 최울가씨를 만나기로 했다.

최울가는 유목민처럼 떠도는 작가라 쉽게 만날 수도 없지 않은가..

같이 간 동지는 어디로 갔는지 연락이 끊겨, 나 혼자 지하철 타고 ‘이모집’으로 갔다.




‘이모집’은 위치만 바뀐 게 아니라 주인까지 바뀐 건지,
예약한 게 없다며 불친절 했다.
뒤 따라 두 사람이 들어왔는데, ‘여자만’으로 자리를 옮겼다.




최울가는 70년대 후반, 내가 서울 올라 올 무렵 상경했다.
부산에서 비슷한 시기에 올라 온 화가로는 박광호, 이존수씨도 있다.
이존수씨는 대학로에서 빨래집게 전시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는데,
대관절 그 놈의 돈이 무엇인지, 돈이 생기니 사람이 변하더라.
한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뒤늦게 죽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생선 뼈만 줄창 그리던 박광호도 지난 달 쓸쓸하게 세상을 하직했다.

그렇게 낙엽처럼 떨어졌다. 이제 세 사람 중 최울가만 남은 것이다.




최울가는 20여 년 넘게 유목민처럼 떠돌아 다니며 작업해 왔다.
파주 헤이리 작업실에서는 아시아권, 파리에서는 유럽권,
그리고 뉴욕에서는 북미 지역을 넘나들었다.




원시성을 띤 그의 그림들은 순수하고 자유롭다.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 같다.
요즘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했는데, 곧 강남에서 전시를 한단다.




최울가는 요즘 잘 나가는 몇몇처럼 스타 반열에 오른 작가다.
오랜 만에 쌍팔 년도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다 백만원짜리 수표 한 장을 내 놓았다.




날 더러 쓰라기에 두 눈이 번쩍 뜨이기는 하나
분에 넘치는 돈이라, 돈이 돈 같아 보이지 않더라.
그의 말로는 “40여년 전 부산에서 ‘한마당’할 때 준 삼 천원을 갚는다”는 것이다.

예전에도 그 말을 하며 작품을 준적도 있지만, 난 오래되어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다.




그 때는 라면도 마음대로 끓여 먹을 돈이 없었다고 했다.
모처럼 라면이라도 끓여 먹으면, 물끄러미 쳐다보는 개가 눈에 밟혔다는 것이다.
그 어려울 때 쌀을 살 수 있는 삼천 원이 너무 고마웠던 것 같았다.
아픈 시절이지만, 그 시절이 그리운 듯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단다.
처음 서울 올라 와 그림 둘 곳이 없어 박광호씨 셋방에다 맡겨두었는데.
‘집에 불이나 작품이 다 타버렸다’는 연락을 받았단다.
그래서 초기의 그림이 하나도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사실, 나도 스폰서 나타나기만 기다린 일이 하나 있었다.
몇 달 전 안경을 잃어버려, 눈에 맞지 않는 안경을 빌려 쓰고 다니니,
세상 모든 게 흐리게 보였다.
더구나 밤에 운전하다 위험한 고비를 많이 넘겨, 염체 없지만 챙겨 넣었다. 


 

김명성씨가 이차를 가자며 데려 간 곳은 박인식씨가 운영하는 ‘로마네꽁티’였다.
모처럼 박인식씨를 비롯하여 박성식씨도 만났다.
와인에 젖는 기분 좋은 늦가을의 밤이었다.




울가 덕에 다음날 다초점 렌즈를 장착한 30만 원짜리 안경을 맞추었더니 세상이 거울처럼 밝아졌다.
밀린 과태료도 내고 어려운 동지도 도와주며 고맙게 잘 썼다.



언젠가 갚아야 할텐데, 그 날이 언제가 될지...
인천부두에 라이타돌 실은 배 들어오는 날 말이다
그 배만 오면 백배로 갚아 줄 텐데, 기별이 없다.

사진, 글 / 조문호























20여년 동안 인사동에 둥지 틀었던, 음유시인 송상욱 선생께서 전주로 떠나신다.
인사동 풍류와 낭만도, 정들었던 벗들도 하나 둘 사라져,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제 누가 인사동을 지키며 선생의 빈 자리를 메워 줄 수 있을가?
부디, 가시더라도 건강이나 잘 챙기시고, 인사동을 향한 마음만은 변치마시길...






전남 고흥이 고향인 송상욱(79세)선생은 27년간 국어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쳐 왔으나, 

시작에 전념하려 갈현동의 선정고등학교를 명퇴한 후, 98년도에 인사동에 입성하였다.

인사동에 셋방 하나 얻어 작업실로 쓰며, 그동안 ‘백지의 늪’, ‘무무놀량’, ‘광대’ 등 일곱 권의 시집을 펴냈고,

1인 무크지인 ‘송상욱 시(詩)지’ ‘멧돌’을 꾸준히 펴내어, 시 나눔 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쳐왔다.

노래하는 음유시인으로, 인사동 골목골목을 풍미하는 등, 돈 안 되는 일만 골라 해온 것이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창예헌’과 산삼 심는 모임인 ‘농심마니’ 맴버로 어울리며,

인사동에서 열리는 만찬이나 연회 때마다 그 만의 노래로 향수를 불러 일으킨 분이었다.

진주기생 산홍이를 애절하게 그리는 ‘세세연연’이나 요절한 누이를 그리는 시 ‘부용산’ 노래도 더 이상 들을 수 없고,

밤새도록 이어지는 가요반세기의 메들리도 이제 끝나버렸다.






송선생은 45년 전, 아내가 가출한 이후 오래 동안 독신으로 지내다 10년 전 지금의 아내 김미옥(57세)씨를 만났다.

당시 ‘툇마루’가는 골목 초입에 있던 ‘아라가야’라는 이름의 전통의상가게에 우연이 함께 들린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가게를 운영하고 있던 지금의 아내와 눈이 맞았다고 한다.

18세 연하의 꽃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게 될 줄이야 꿈엔들 알았으랴! 인사동이 선생께 드린 선물 아닌 선녀였다.






이번에 연고도 없는 전주로 갑자기 이사하게 된 것도 아내의 뜻을 따른 것 같았다.

아내의 고향은 공주지만, 전주서 학창시절을 보내며 무용을 배우는 등, 추억이 많은 곳이라는 이유였다.

감히, 꽃 따라 나비 가는 이치를 어찌 거역할 수 있으리오.






송상욱 선생을 떠나보내는 송별 만찬이 지난 10일 오후7시 인사동 ‘툇마루’에서 있었다.

송상욱선생을 비롯하여 김명성, 박인식, 송성묵, 정채은, 김각환, 김시인, 강성몽, 서길헌씨 등 열 명이 모인 조촐한 자리였지만,

새벽 두시까지 자리를 옮겨가며, 술과 노래로 아쉬움을 달랬다.

‘툇마루’에서 송성묵씨 작업실로, ‘로마네꽁티’에서 이름도 모르는 주막에 이르기까지 엄청 퍼 마셔댔다.

그 날 선생께서 목이터져라 부르는 ‘비나리는 호남선’이 술취한 이들을 더 슬프게 만들었다.


“목이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사진 , 글 / 조문호
















































여태 핸드폰, 컴퓨터, TV, 신용카드 없는 농심마니 두령


로마네꽁티 대표
농심마니 창립자
소설가

1951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연세대를 졸업했다.
월간 「山」 기자를 거쳐 월간 「사람과 산」의 발행인 겸 편집인을 지냈고, 한국소설가협회 회원이다.
1985년 장편 소설 <만년설>을 발표한 이후, 인상파 미술기행 <햇살속에 발가벗은>
중국 기행산문집 <나는 아직도 그 악어가 그립다> 장편대하소설 <백두대간> 등을 펴냈다.

그외 지은 책으로 <사람의 산> <서문동답> <대륙으로 사라지다> <방랑보다 황홀한 인생은 없다>
<북한산> <독도> <고갱이 고호를 만났을 때> <인사동 부르스> 등이 있고,
1997년 방영된 MBC 창사 특집 미니시리즈 <山>의 원작을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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