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이십년이나 되었을까?
봉화 수식에서 있었던 일이다.
영주에서 신동여씨 전시를 끝내고,
봉화 수식으로 가다 차가 개울에 처박혔다.

막걸리와 전 부쳐 먹을 밀가루도 
차에 실은 것으로 기억된다.
차에는 저 세상으로 떠난 적음스님을 비롯하여,
도호스님, 신동여, 장 춘씨가 탔다.

그런데, 바탈진 시골길을 달리다,
그만 차가 개울에 전복해 버린 것이다.
죽었구나 싶었으나 정신을 차려보니,
안전밸트에 묶여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차에서 뿔뿔 기어나가 차안을 밝혀보니 가관이었다.
밀가루를 뒤집어 쓴 적음스님은 눈을 깜빡이며
“아이고! 중 살려~“라며 농담하고 있었고,
도호스님은 머리가 이상하다며 헛소리 해댔다.

사람은 별 탈 없는 사고인 것 같았으나,
갤로퍼는 완전 개 박살난 것이다.
그것도 새 차 뽑은 지 몇 달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차에서 내려 짐만 챙겨들고 작업실로 갔다. 

패잔병 꼴로 막걸리만 퍼 마셨는데,
도호스님은 계속 헛소리를 해댔고,

적음스님은 빠도 못하게 됐다며 너스레를 떨어댔다.

웃을려는 농담인줄 알았으나,
이튿날에서야 적음스님 팔 부러진 것을 알게 되었다.

아침 녘에 보험회사에 연락하고
차가 뒤집어진 현장을 확인하러 가는 중에,
사진 속의, 등교하는 두 소녀를 만난 것이다.
옷이나 머리가 엉망진창인 낯선 사내가 이상했던지,
연신 돌아보며 웃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메고 있던 카메라로 한 컷 찍었는데,
그 사진이 뒤늦게 책갈피에서 나온 것이다.
언젠가 전해 주려 프린트해 둔 모양인데,
그만 숱한 세월이 지나고 말았다.

지금은 어른이 되어 시집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에게는 좋은 추억이 될것 같아,
신동여 화백께 한 번 물어봐야겠다.
아마 가까운 동네에 살았으니, 아는지도 모르겠다.
 

사진, 글 / 조문호

 

 

 

나에게 다섯 번째 애마 코란도 밴을 기어이 떠나보내고 말았다.
3년 전 350만원에 사들인 애첩인데, 그동안 병원비만 몸값의 배가 들었다.
고속도로에서 애 먹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건만, 그래도 떠나보내고 나니 서운하다.

지난 6일 정영신씨의 장터사진전 준비하러 떠나는 춘천으로 따라 나섰다.
변속이 되지 않아 혼난 경험이 있는 정영신씨가 불안해했으나,
그 문제는 스스로 해결 방법을 찾았다며 안심시켰다.
크러치가 밟혀 올라오지 않으면 발등으로 끌어 올리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춘천 가는 국도의 가평 무렵에 이르러 차에서 타는 냄새가 났다.
그러더니 얼마 가지 못해 시동이 꺼져 버렸다.
다시 시동을 걸어 출발하기를 몇 차례 하였으나, 결국 퍼져 버렸다.
약속시간이 늦어버린 정영신씨는 남의 차 구걸해 먼저 보내고,
멈춰선 차를 견인시켜 갔더니, 엔진헤드를 바꾼다며 수리비 80만원을 내란다,

장례 날만 기다리는 차에 80만원이나 쳐 바를 수 없었다.
디젤 노후차 폐차에 지급하는 환경지원금도 움직이는 차에 한해서란다,
뒤늦게 돌아 온 물주 정영신씨와 의논해 울며 겨자 먹기로
고물 값 40만원 받고 춘천폐차장에 넘겨 버렸다.
차에 실린 짐 꾸러미를 챙겨 돌아오는 마음은 찹찹했다.
그동안 속을 많이 섞였지만, 전국 장터를 돌아다니며 정들었던 차다.
같이 끝내자고 했으나 결국 먼저 가버렸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애마에 얽힌 추억이 너무 많다.
제일 처음 애마를 만난 건 1982년도 였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버린 사우 윤재성씨의 '포니2'를 100만원에 산 것이 시작이다.
그 때는 드라이브에 재미를 느낀 초짜라 아무나 차를 태워주던 시기였다,

어느 날 인사동에서 모령의 여인을 만나 차 한 잔 하는 자리에서 
갑자기 그 녀가 겨울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다.
‘얼씨구나’ 하며 차에 태워 변산 바닷가로 출발했다.
막상 겨울바다에 도착하여 바닷가를 거닐었으나, 추워 오래 견딜 수가 없었다.
차 때문에 술도 마실 수 없어 그냥 돌아와야 했다.

밤늦은 무렵의 한가한 고속도로라 신나게 달렸는데, 앞에서 화물차가 걸리 적 거렸다.
추월하느라 폐달을 힘껏 밟았는데, 추월하고 보니 내리막길이었다.
“아차! 죽었다” 싶었다. 차가 공중에 붕 떠 핸들을 꽉 움켜잡았는데,
순간적으로 판단한 것이 가드레일에 의지해 미끄러지는 방법 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절묘하게 가드레일을 들이 받아 100미터 넘게 끌려가서야 차가 멈춰 섰다.

분명 기적이었다.


치명상을 입기 쉬운 옆자리 여인도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 보니 오른쪽 바퀴는 둘 다 날아 가버렸고, 휠만 쭈그러져 있었다.
견인차를 기다리는데, 고속도로 순찰차가 닥아 왔다.
망가진 차를 보더니, 가드레일 망가진 곳을 찾기 위해 두 번이나 돌아다녔으나 멀쩡했다,

하늘이 보살폈다“며 순찰하는 이가 구시렁거렸다.

대전 변두리 어느 정비공장에 차를 맡기고 가까운 여관에 들어 갔는데,
뜻밖의 뜨거운 밤을 보내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살이 끼여 이런 꼴을 당하니 살을 풀어야 한다는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 뒤로 연락 끊긴 하루 밤 풋사랑이지만, 잊을 수 없는 인연이었다.

그 당시는 종합보험만 가입했기 때문에 바퀴와 휠만 교체하고 끌고 가야했다.
그 뒤 전주에 갈 일이 있었다. 바디가 찌그러지고 심지어 오른쪽 문이 잠기지 않아
끈으로 칭칭 묶은 차에다 전시할 사진을 잔뜩 실고 갔더니
화가 류휴열씨와 도예가 한봉림씨가 기가 막혔는지,
어떻게 이런 차로 전주까지 올 수 있냐고 놀려댔다.

그런 수모를 당한 포니가 어느 날 화염에 휩싸여 장렬하게 전사했다.
어느 날 ‘환경관리공단’에서 실시한 환경사진공모전 심사를 위해 집을 나섰는데,
출근 시간에 걸려 차가 꼼짝을 않았다.
시간은 촉박한데, 고물차는 열 받아 엔진에서 연기까지 나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어 변두리에 세워두고 지하철로 내려갔다.

그런데, 일 마치고 돌아왔더니 그 자리에 차는 없고 그을린 흔적만 있었다.
주변 사람에게 물어 보니 내가 빠져나가는 순간 차에 불이 붙었고,
그 뒤 소방차가 출동하여 불을 껐는데, 불탄 차는 견인해 갔다고 했다.
환경사진 심사장에서 자연생태사진만 지겹도록 보고 왔는데,
이게 환경고발감이다 싶었다. 어떻게 이런 아이러니가 있을 수 있나?

그 뒤로 티코를 구입해 한 2년 동안 타고 다녔는데, 사고 한 번 없는 괜찮은 차였다.
덩치가 작아 잘 빠져 다니는데다 주차하기도 편했다.
그런데 휴지조각처럼 접힌 사고차량을 본 후로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서 큰 맘 먹고 갤로퍼 숏 바디 신형을 사기로 했다.
92년산 차 값이 1,900만원이었는데, 36개월 활부로 구입한 것이다.
그 무렵은 ‘이미지 라이프’라는 사진취재대행업을 할 땐데,
두 세군데 사보에 일해 주는 것으로 간신히 끌어가야 했다.
주 고객층인 잡지사들이 워낙 영세하다보니, 일을 맡길 사정이 아니었다.

그런데, 차 뽑은지 두 달도 되지 않아 대형 사고를 내고 말았다.
부여에서 사진행사가 있어 고속도로를 탔는데,
휴게소에서 아주 섹시한 여인을 보게 된 것이 원인이었다.
다시 운전대를 잡았지만 그 여인이 아른거려 견딜 수 가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그 여인을 생각하며 딸딸이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속도감에 더해 쾌감도 무르익어 갔다.

 

흔들어도 적당히 끝내야 하는데, 그게 되지 않았다.
갑자기 사정되어, “어~어~”하다 나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밟아버린 것이다.
‘찌이익~“ 차가 미끄러져 급정거하자, 갑자기 ’쾅‘하며 뒤통수를 쳤다.
뒤 따라 오던 2,5톤 화물차가 들이 받은 것이다.
급히 풀 묻은 거시기를 집어넣고 내려갔는데, 터럭기사가 발발 뛰었다.
왜 세웠냐고 캐묻는데, 어떻게 그 이야기를 할 수 있겠나?


좀 있으니 경찰이 달려와 안전거리 미확보라며 피해자를 나무랐다.

교통법규도 웃기는 짜장면이다.
내차는 뒷문이 박살났고 뒷 차는 앤진 룸에서 연기가 났지만, 둘 다 운행에는 지장이 없었다. ` 

서로 각자 수리하기로 합의했으나, 떠나가며 그 기사가 다시 물었다. 
”전방에 아무 것도 없었는데, 왜 세웠어요?“라기에
”미안합니더마는 그거는 죽어도 말 못합니더~“

그래도 2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찰을 기록하는데도 크게 기여한 차다. 

‘한국불교미술대전’이란 일곱 권짜리 화집은 나왔으나, 출판사인 ‘한국색채문화사’가 부도나 원고료도 받지 못했다.

 재수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이 딱 맞다. 거금 삼천만원이나 되었는데...

그 때 기록한 불교에 관한 슬라이드 필름이라도 남아있으니, 다행이다 싶다.

그 뒤 또 한 번 사고를 쳤다.
도예가 신동여씨가 영주에서 전시를 열 때다.
전시가 끝나고 봉화 수식으로 모두들 자리를 옮겼는데,
얼어붙은 내리막 시골길에 미끄러져 논바닥에 전복되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그 차에는 신동여씨를 비롯하여 지금은 열반한 적음스님과 산중에서 수행중인 도호스님,
불화가 장춘씨가 탔는데, 난 대롱대롱 안전벨트에 거꾸로 메 달려 있었다.

간신히 내려 손전등으로 뒷좌석을 비추어보니 정말 가관이었다.
집에서 먹기 위해 사온 막걸리와 술안주 만들려던 밀가루 봉지가 흩어져
적음스님 얼굴을 뽀얗게 뒤덮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중 살려~“라며 농담을 지껄이고 있었다.
도호스님은 머리에 이상이 생겼다며 헛소리를 해대고,
적음스님은 팔이 부러졌다며 낑낑거렸으나 모두 술이 약이었다.
차를 버려둔 채 집으로 몰려가 술만 졸라 축냈다.  

그런데, 이튿날 적음스님 팔에 진짜 문제가 생겼다.
골절로 팔에 깁스를 하였고, 입원하지 않는 조건으로 보험금도 좀 탔다.
보험금 받는 날 적음스님 더러 술 한 잔 사랬더니, 그 대답이 걸작이다.
“문디 코구중에 마늘을 빼먹지...”

그 차는 15년 동안 25만킬로를 같이 뛰었는데,
어느 날 일산 길가에 멈추어 서서 더 이상 같이 못 살겠다고 버텼다. 어찌하랴?

 

헤어지고 새로 만난 애마는 그보다 덩치가 큰 갤로퍼였는데, 일단 조가 잘 맞았다.
사진전에 필요한 자재를 실고 산골마을을 돌아다닌 순회전도 열심히 도와주었고,
아파트에 버려진 장롱까지 차 지붕에 실어 정선으로 옮겨 날랐던 것이다.
정영신씨와 전국 장터를 돌아다니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그도 눈 내린 평창 시골길에서 미끄러져 개울에 전복되어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나에겐 상처하나 입히지 않은 열녀다.

그 고마운 년도 몇 년전 천상병선생 기일 날 의정부 산소 가는 길가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가 떠나며 내게 붙여 준 년이 엊그제 폐차시킨 코란도였다.
착한 마누라가 있으면 악처도 있듯이, 코란도는 나에게 악처나 마찬가지다.
얼마나 속을 많이 섞였던지 꼴도 보기 싫지만 어쩌겠는가?
그래도 내가 데리고 놀며 정들었는데...

더 이상 악연을 만들지 않아야 하는데,
살아있는 동안은 그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이제 세상을 함께 떠날 진짜 애마를 만나고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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