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따라 장대비가 쏟아졌다.

혜화역 1번 출구로 나오라는 지령에 따랐는데,

먼저 온 사람들은 신발가게 앞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다들 우산을 받쳐 들고 기국서씨를 따라갔다.

학림다방 옆길을 돌아 ‘청춘포차’에 안착했다.

 

기국서, 최정철, 박준석, 김문생, 권영일, 목수김씨가 먼저 자리 잡았고,

뒤이어 박근형, 정재진씨가 왔다. 이차에 간 ‘틈’에서는 기주봉씨도 합류했다.

 

다들 연극판에서 한 가닥 하는 분이었다.

술자리에 둘러앉은 분위기가 마치 쿠테타 모의하는 것 같았다.

 

평소 예술의 전당 개혁을 부르짖는 박준석씨는

예술의 전당에 어찌 예술가가 없냐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곳만이 아니라 전국 공연장 문제점으로,

개선을 위한 대책과 예술가들의 연대도 절실했다.

 

최정철씨는 붕어빵식으로 열리는 축제들을 탓했다,

그 곳만의 색깔을 가져야 한다며 대안도 말했다.

 

무사안일주의인 예술담당 공무원들의 문제도 있지만,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고, 접근을 달리 하라는 등,

예술계 전반의 고질적인 문제점이 나왔다.

 

두 번째로 따라 간 곳은 ‘틈’이란 술집이었다.

LP판이 벽을 채운 음산한 구석에 기주봉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술기운이 올라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기국서씨의 표정에 비장감이 감돌았다.

 

술 취한 독특한 비장감은 그만의 캐릭터다.

당장이라도 판을 갈아엎을 그런 분위기다.

 

시간이 지나니 한 사람 두 사람 일어서기 시작했다.

술이 취해 나 역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뚫고,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다.

그 이튿날 온종일 쥐약 먹은 듯 비실비실 방구석을 기었다.

 

뒤늦게 들었지만, 기국서씨도 무탈하지 않은 듯했다.

 

노장은 그냥 죽지 않는다. 다시 음모를 꾀한다.

 

그 날 기국서씨가 던 진 말이 기억난다.

“예술이기 전에 사람이 되어야한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일 오후3시부터 경찰 물대포 맞아 돌아가신 백남기선생의 추모대회가 대학로에서 열렸다.

삼만여 명의 추모인파가 “우리가 백남기다”, "국가폭력-살인정권 끝내자",“책임자처벌‘을 외쳐댔다.

단상에서도 많은 외침이 있었으나, 가장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작은 딸 백민주화의 울음섞인 호소였다.

‘물대포로 인한 사망이 분명하다면 왜 부검에 동의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사인의 증거가 넘쳐나는데

어느 자식이 아버지의 시신을 또다시 수술대에 올려 정치적인 손에 훼손시키고 싶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백씨는 “저희 아버지를 두번 세번 죽이지 못하게 할 것”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오후 5시부터 시민들은 대학로에서 종각 앞까지 3.5㎞를 박근혜 정부퇴진을 요구하는 팻말과 백남기 농민 영정을 들고 행진했다.

보신각 사거리부터 서대문구 경찰청 앞까지 행진하겠다고 투쟁위에서 신고했지만,

경찰은 추모대회 당일  ‘행진 구간은 주요 도로’라는 이유로 행진을 금지시켰다.

대학로를 출발한 시위대가 종각 사거리까지 왔지만, 경찰력에 가로막혀 더 이상 행진하지 못한 것이다.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자리에서, 헌화하기로 한 계획이 무산된 것이다.

시민들은 종각 앞에 임시분향소를 차리고 백씨의 영정사진 앞에 헌화하며 고인을 기렸다.

이 날 시위는 큰 충돌 없이 마무리되었으나, 많은 시민들이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백기완선생을 비롯하여 장경호, 김진하씨 등 많은 분들이 울분을 토해 냈으나,

장순향교수는 여자의 몸으로 경찰저지선을 뚫기 위해 온 몸으로 밀어 댔다.

나 역시 죽음을 불사하고 나왔으나 방법이 없었다. 그날따라 사진 찍을 의욕조차 잃었다.

오죽하면, 기자들이 다 기록하는데 사진은 찍어 뭐하겠냐는 생각까지 든 것이다.
현장에는 ‘한겨레’ 강봉규기자, ‘오마이뉴스’ 유성호기자 등 반가운 모습도 보였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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