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 가까워 오면 정영신씨 따라 대목장 보러 다닌 지도 꽤 오래되었다.

올해도 설날을 며칠 남겨두고 김포장을 비롯하여 칠곡 동명장 등 몇몇 장을 돌아다녔다.

삼년 째 이어지는 전염병에 주눅들어 수도권의 장을 제외한 면소지 장들은

장사꾼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장보러 온 주민은 보이지도 않았다.

 

노인들만 지키는 시골 오일장들이 기능을 서서히 잃어간 지는 오래되었으나,

거리두기로 노인들 발길마저 끊기니, 문 닫기 직전에 있다.

 

어디 세상 이치 따라 바뀌지 않는 것이 있겠냐마는,

정겨운 시골오일장 풍정은 빛바랜 사진처럼 기억 속에서나 남아 있다.

 

사람 없는 장보다 인근 사찰이나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김포장에서는 덕포진에 들리고, 선산에서는 도리사와 구미 문화마을을 돌아보고,

칠곡에서는 동화사를 돌아보는 등 한가로운 시간을 가졌다.

 

직지사 말사인 도리사는 아도화상이 창건한 신라 최초의 절로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8대 적멸보궁이다, 

가끔 선산에 오거나 이 지역을 경유할 때면 30년 전에 보았던 .도리사가 생각났는데,

절집의 구성이나 다른 것들은 기억나지 않는데, 도리사 석탑만 선명하게 떠올랐다.

 

모전석탑 처럼 돌을 쌓아 올린 탑의 조형이 특이해서일 것이다.

도리사 석탑은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같은 유형을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식이다.

석탑의 높이는 4.5m인데, 얕은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장대석을 세워 기단을 만들었다.

판석으로 갑석을 덮고 갑석 위에 방형의 작은 석재를 3층으로 쌓아 탑신을 세웠다.

맨 위층 정상에는 노반이 있고 연꽃이 조각된 보주가 있다.

 

태조선원 맞은 편 나무에는 색색의 작은 등이 과일처럼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도리사에서 구미 일선리 문화재마을로 발길을 옮겼다.

이곳은 1987년 안동 임하댐 건설로 수몰지역에 들어갔던  전주 류씨 양반세거지인데,

이 곳 해평 일선리로 옮겨온 것이다.

 

본래 일선리는 태조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가 낙동강으로 너르게 퍼진 구릉 산지였다.

‘밤이면 흙을 던지며 사람을 해친다는 개골강지가 출몰하는 외지고 무서운 산골’이었다고 한다.

 

일선리에 안동 전주 류씨 양반세거지가 옮겨오며 약 80여개의 집이 반듯하게 들어서게 되었는데,

그중 70여 채가 유씨 양반의 가옥이란다.

그 중에는 문화재급 고택도 10여 채나 있어, 기왓장과 기둥 하나 빠트리지 않고 고스란히 옮겨왔다고 한다.

 

박실마을 전주 유씨를 이끌었던 수남위 종택과 용와종택, 침간정, 마령의 호고와 종택,

무실마을의 근암고택과 임하택, 그리고 만령초당, 삼간정, 동암정, 대야정 등의 누정들이 그것이다.

 

높다란 옹벽위에 기와를 얹은 흙돌담이 기다랗게 뻗어있다.

대개의 고택마을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많으나 이 곳은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다.

 

다음 행선지는 칠곡의 동명장이었다.

오후라 그런지 좌판을 벌인 할머니 몇 분만 지키고 있었다.

 

텅빈 장터에는 ‘동명장터이야기’로 시작되는 벽화를 그려놓았다.

봇짐이나 등짐에서 손수레로 바뀌듯이 장터 풍정도 서서히 바뀌는 것이다.

 

머지않아 오래된 장터의 풍정은

정영신의 사진집 속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다.

 

칠곡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동화사를 찾아 나섰다.

조계종 제9교구의 본사인 동화사는 통일신라시대의 절로

금산사, 법주사 와 함께 법상종 3대 사찰의 하나이다.

 

임진왜란으로 동화사 전체가 불타버린 후 여러 차례의 중창을 거쳤는데,

조선 영조 때 중건된 대웅전과 극락전을 비롯하여 20여 채의 건물이 남아 있다.

 

보물로 지정된 당간지주와 금당암3층석탑,·비로암3층석탑,·비로암석조비로자나불좌상,·

동화사입구마애불좌상,·석조부도군 등 가볼 곳이 한 두 곳이 아니었으나, 시간이 없었다.

 

해가 넘어가기 직전의 동화사 경내는 고요한 적막에 휩쌓여 있었다.

빵처럼 앙증맞게 생긴 꽃창살을 살펴보며 대웅전을 기웃거리는데,

저녁 불경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성불하여 모든 중생을 구제하라는 저녁종성을 뒤로하며 발길 돌렸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5일 전북 장수장과 임실 오수장 갔다.

 

명절 대목장마다 빠짐없이 나서는 정영신씨 장터 순례 길에 따라 나선 것이다.

코로나 때문에 나들이를 삼가하라지만, 거리두기 시국의 장터도 기록해야 했다.

장터 사람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근에 있는 유적지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지방으로 다니다보면 의례 고속도로 휴게소를 들리게 되는데,

유행가 테입 장사꾼이 들려주는 트롯 음악을 싫으나 좋으나 듣게된다.

얼마전에는 송가인 노래가 판을 치더니, 이젠 임영웅이 노래가 판을 친다.

 세상물정 어두운 나로서는 고속도로 휴계소에서 가수 인기순위를 알아차린다.

 

 

장수장은 손님보다 장사꾼이 더 많았다.

자식들이 명절에 오지 않으니, 음식 장만할 마음도 사라진 듯했다.

 

지역 농산물과 전통시장을 활용하여 지역경제를 살리자는

피켓들이 농촌 실상을 대변하는 듯 했다.

 

장터 안에 자리 잡은 대장간에는 농기구 손보러 온 농민이 더러 있었다.

대장쟁이 박석진씨의 쇠달구는 솜씨에 호미와 낫이 날렵하게 변신했다.

 

정선에 망가진 연장들을 챙겨왔으면 하는 아쉬움이 생겼다.

요즘은 대장간이 없어 연장이 무디어지면 대부분 버리게 되는데,

정선장터에도 이런 대장간 하나 생겼으면 좋겠다.

 

정영신씨 일 끝날 때 까지 장터 맞은편 한적한 데서 기다렸는데,

장터에 어울리지 않는 ‘TOP'이란  멋진 커피숍도 있고,

’콩나물순두부‘집 앞에는 깨끗한 흡연석까지 만들어 놓았다.

 

요즘 어디를 가나 천대 받는 흡연자로서 너무 반갑고 고마웠다.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 담배 한 대 피우니, 마음까지 넉넉해졌다.

 

장수읍내 있는 의암송과 향교도 돌아보고,

장계면에 있는 ‘의암 주논개 생가지’도 가보았다.

 

주논개는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에서 태어났단다.

왜장을 끌어안고 진주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고향이 이곳이란 것도 처음 알았다.

 

그러나 생가가 있던 마을 전체가 수몰되어 저수지 근처에 생가만 복원해두었다가

주촌 일대 2만평 부지에 1996년부터 4년에 걸쳐 다시 조성했다고 한다.

 

의암 논개생가지에는 생가뿐 아니라 논개기념관을 비롯하여 의암루가 있었다.

동상을 비롯하여 주논개비,·최경회비,·주논개 부모묘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 수해로 묘지의 축대가 무너져 복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를 몰아 장수군 계내면과 함양군 서상면 사이에 있는

백두대간 육십령으로 올라갔다.

 

옛날에는 도둑 떼가 많아 고개 아래 주막에 육십명 이상 모여야

산을 넘을 수 있다고 해서 육십령이란 이름이 생겼다고도 하고,

이곳에서 안의 감영까지 거리가 육십 리요 장수 감영까지의 거리가

육십 리라고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돌아오는 길에 임실 오수장도 들렸다.

장꾼들 끼리 잡담이나 나누는 한가한 장터풍경인데,

장사할 시간이 남았는데도 짐 싸는 장꾼도 있었다.

 

사라져가는 오일장의 현실에 다름 아니다.

 

장국밥 한 그릇 사 먹고, 우리도 보따리 쌌다.

하루 쉰 다음 날에는 김포장으로 간다.

고속도로나 밀리지 않아야 할 텐데...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0일은 포천에 있는 신읍장을 찾아갔다.

지난주에는 포천에 있는 유적 찾아 갔는데, 이번에는 신읍장 간다네.

장날을 찍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역병에 문 닫은 장터를 찍으러 간다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듯, 장터 닫기는커녕 대목장이 섰다.

이달 말까지 민속장을 잠정 개장한다는 현수막이 걸린 걸 보니, 갑자기 열린 것 같았다.

사람이 많이 모여 불안하기는 했으나, 대목장이라도 찍을 수밖에 없었다.

 

포천은 물이 밖으로 흘러 생긴 이름이라는데,

포천 시내를 가로지르는 구읍천 따라 펼쳐지는 포천장은 경기 북부에서 가장 큰 장이다.

성남의 모란시장과 일산시장, 김포시장과 함께 경기도 4대 전통시장으로 꼽히는 장이다..

정기적으로 끝자리 5,10일에 열리는 신읍장은 포천시청과 포천경찰서 중간의 뚝방에서 열려

마치 난민촌을 연상시키는 재미있는 장터다.

 

신읍장은 농민들의 농산물보다 장돌뱅이들이 실고 온 상품이 주를 이루는데,

포천하면 이동갈비를 떠 올리듯, 장터에도 갈비 굽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장터 나온 사람들은 다들 마스크를 쓰고 왔으나,

음식점에서는 벗을 수밖에 없는데, 거리두기는 공염불이었다.

나 역시 숨쉬기가 힘들어 잠시 마스크를 벗었더니, 겁이 덜컥 났다.

시장상인들의 생계도 외면할 수 없으나, 이러다 문제 생기면 어쩔가?

 

난, 이년 전부터 폐 기능에 문제가 생겨 심한 호흡장애를 겪고 있다.

죽을 때까지 약과 흡입기를 달고 살아야 하는 나로서는 코로나가 더 징그러울 수밖에 없다.

마스크를 쓰면 숨 쉬기가 힘들어 대중교통은 물론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피해 다녀야 하니,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다.

 

시장을 순찰하듯 휭 돌고는 차에 돌아와 마스크를 벗어버렸다.

차에서 한 참을 쉬고 있으니, 정영신씨는 사진을 찍고 바리바리 사들고 왔다.

사진도 찍고 대목장도 보는 셈인데, 도랑치고 게 잡는 격이다.

 

정선 산골의 좋은 공기에 마스크 벗고 살면 좋으련만,

무슨 놈의 역마살이 끼었는지 사흘이 멀다 하고 나온다.

 

빨리 역병이 물러갔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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