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3일은 동자아파트에 사는 이준기씨 댁을 방문했다.
한 번 찾아가겠다는 말은 한 적 있지만, 예고 없는 방문이었다.
가보니 다른 쪽방에 비해 넓고 잘 정리된 방이었고, 모자와 바지가 가지런히 걸린 게 눈에 띄었다,

그때 사, 준기씨가 한 쪽 다리가 없는 불구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일전에 만났을 때는 의족 때문인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바지에 유달리 신경 쓰는 것 같았다.

느닷없는 침입에 반갑게 맞아주었고, 술상까지 차려 왔다.
그가 살아 온 지난한 삶의 여정이 궁금해 이 것 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는데, 자신의 취부까지 다 들추어냈다.

그는 경남 양산에서 태어났으나, 다섯 살에 부모님이 이혼하는 바람에 혼자 떠돌게 되었다고 한다.

올해로 예순 셋이지만, 아직도 결혼을 못했다는 것이다. 아직이 아니라 영원히 못 할 것 같았다.

한 때는 어느 여인과 동거하여 애까지 낳았지만, 모두 뿌리가 없다보니, 쉽게 헤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열다섯 살에는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한 쪽 다리를 잃고 들어 간 양동에서의 부랑 세월은

착한 사람이 악마가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 주는 바로미터였다.

온 몸은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세상에 안 해 본 짓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 믿음의 신의는 한 번도 저버리지 않았다고 했다. 의리 하나만은 그의 생명줄과 같았던 것이다.

사회적 불만이 극에 달했던 젊은 시절에는 기물파괴나 폭력으로 경찰서를 제집 드나들 듯 했다고 한다.

자존심 하나로 버틴 그의 자존심을 망가트려, 어느 날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결국 끔찍한 살인을 저지러고 말았다.

칠년 형을 받고 감옥살이를 하였으나, 그 기간이 원래의 이준기로 다시 태어나게 한 전화위복의 시기였던 것이다.

교도소에서 천주님의 교화를 입은 것이다.

요즘은 장애3급이라 한 달에 칠십 여 만원이 나오니, 혼자 사는 데는 지장 없어 보였다.

그러나 의리 하나로 살아 온 그의 주변에 친구들이 끊이지 않으니, 여유가 생길 겨를이 없다고 한다.

그 날도 이야기를 듣는 중에 술친구가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문규도, 이성구, 신동원, 김진석씨가 차례대로 나타나 술자리가 늦게까지 이어진 것이다.

찾아 온 친구들에게도 한 번 물어 보았다.
“당신들이 볼 때, 이준기의 제일 좋은 점이 뭐라고 생각합니꺼?”랬더니,

기다렸다는 듯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의리 빼면 시체지요”
그렇다! 그는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사나이였다.

시름시름 마신 술에 취해, ‘인천의 성냥공장’ 노동가 한 곡 부르고, 보따리 쌌다.
집을 나선 거리는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하고, 동자동에도 서서히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어둠이 지나면, 또 다시 밝은 아침은 돌아 올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평등의 세상은 언제 올지 기약이 없다.


착한 사람이 못 살고, 나쁜 사람이 잘 사는, 이 더러운 세상을...


사진, 글 / 조문호



















 

 

세상을 하직 한지 어언10년이 넘은 김진석화백의 유작을 찾아 길을 떠났다.
미망인 강고운시인과, 절친이었던 신학철화백, 그리고 후배 장경호화백과 미술평론가 최석태씨,

무예가 하태웅씨 등 가까운 몇 명이 조를 맞추어, 흐릿해져 가는 그의 혼 불을 찾아 나선 것이다.

길을 떠난 22일은 윤주영선생의 사진전과 민미협 ‘역사의 거울전’ 개막식이 동시에 열리지만,

오래전부터 나들이 약속을 잡아둔 터라 펑크 낼 수가 없었다.

더구나 강고운씨는 인사동 가게 문까지 걸어 닫고 떠날 준비를 한다는데...

사실 김진석화백의 유작전을 위해 작품들을 촬영하려는 이유였으나,
패밀리를 자처하는 이들 끼리 콧바람 한 번 쐴 계략도 한 몫 한 것이다.
아침 일곱시에 만나 작품들이 보관된 충청도로 떠났다.

현장 창고에 보관된 작품들을 훑어보니, 이게 장난 아니었다.
작품들도 많지만 100호나 되는 대작들을 밖으로 끌어내기가 만만찮았다,
유리 낀 작품들은 신경이 쓰였으나, 모두들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신학철선생의 지휘로 하태웅씨가 끌어내면, 강고운씨는 걸레로 닦고,

최석태씨가 규격과 내용을 메모해 두면 장경호씨가 정리하는 식인데, 셔터만 누르는 내가 제일 편했다.

최석태씨는 바닥에 쓰인 깨알 같은 글씨를 판독하느라 아예 땅바닥을 기었고,

장경호씨는 미술관장의 오랜 관록을 보여주듯 안전하게 작품들을 정리해 넣었다.

김진석화백은 80년 국전대상 수상작가로, 홍익대를 거쳐 전북대 미대교수로 재직하다 2004년 2월경에,

환갑도 넘기지 못한 나이로 아깝게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남편을 떠나보낸 아내 마음이야

그 그림들이 원수처럼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니 오랜 세월 창고에서 먼지만 쌓였던 것이다.

고인의 유작들은  황토 길을 헤집은 개미집 같기도 하고, 때로는 시멘트 바닥의 기포 같은 물질적 표상들을

패턴화하고 있었다. 작품마다 작가의 깊은 고뇌와 사유가 엿보였다.

그러나 창고 깊숙이 들어앉은 먼지 쌓인 작품일수록, 감성이 출렁였다.

학창시절이나 젊을 때의 작품들은 마치 물감이 캔버스 밖으로 밀려날 것 같았다.

김진석화백의 초창기 작품에서부터 마지막까지, 그 많은 작품들을 훑어보며 한 작가의 변천 과정도 읽을 수 있었다.

아무튼 오랜만에 외출하게 될 그의 혼 불이 재조명되어, 많은 영감을 주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너댓시간의 작업을 끝마친 후 계곡에 가서 토종 닭을 안주로 몸보신도 했다.

때로는 절집을 돌아다니기도 했는데, 자연 속에서 마시는 술은 잘 취하지도 않았다.

'앵두나무'에서 '오동동'으로 넘어가는 메들리로 시작하여 '성냥공장'에서 '봄날'까지 모조리 불러재꼈다.

얼마나 꼬라지가 불쌍하게 보였으면 팁으로 신사임당 지폐가 두 장이나 나왔겠는가?

 

술이 객기에 부채질 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너무 과해 제풀에 꺾여 잠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중계방송이 중단된 것이다. 이건 분명 직무유기로 파면감이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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