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윤리학: 몸, 에로스, 그리고 타자

The Ethics of Love: Body, Eros, & Other

 

김상표展 / KIMSANGPYO / 金相杓 / painting 

2022_0822 ▶ 2022_0901

 

김상표_Eros-Two Dancers1-4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2

 

초대일시 / 2022_0827_토요일_11:00am

관람시간 / 10:00am~06:00pm

 

주관 / 월전미술문화재단주최 / 사단법인민족통일이천시협의회

 

 

한벽원미술관

HANBYEOKWON ART MUSEUM

서울 종로구 삼청로 83(팔판동 35-1번지)

Tel. +82.(0)2.732.3777

www.iwoljeon.org

 

사랑은 "최소한의 코뮤니즘"이다. ●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나는 남이 되어야 한다. 내게서 떠나와 남들 사이에서 나를 찾아야 한다. 남들이란 결국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 그 남들이 나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없다. 항상 우리다. 삶은 항상 다른 것, 항상 거기 있는 것, 멀리 있는 것. 우리의 삶을 앗아가고 우리를 타인으로 남겨 놓은 삶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 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옥타비아 빠스, 태양의 돌, 류시화 재인용)

 

김상표_사랑예찬-우리_캔버스에 유채_162.2×390.9cm_2021

우리의 생명은 새로움을 무한히 생성할 수 있는 잠재적 힘을 내장하고 있다. 이 잠재적 힘이 억압되지 않고 새로운 삶의 차이를 생성하는 흐름을 형성해갈 때 우리는 기쁨과 행복을 느낀다(피어슨, 싹트는 생명, 2005).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자본주의적 교환관계 체계 속에서 계산가능성과 예측가능성을 목표로 하는 합리성이 우리의 몸과 마음 모두를 전면적으로 도구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것을 대상화하고자 욕망하는 동일자의 시선이 우리 시대의 풍속화를 구성한지 오래다. 인간의 생명에너지가 가장 자연스럽게 분출되어야 할 에로스적 사랑의 공간마저도 이러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시대적 현상에 대해 예술은 어떠한 질문을 던져야 할까? 그것은 나와 타자 그 사이, 즉 관계의 문제로 귀착된다. 이 시대의 철학도 예술도 심지어는 경영도 '타자와 관계'의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 ● 공동체를 형성하는 인간이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결국 '관계' 속에서 구원되는 길 이외에 다른 구도의 길은 없다. 그렇다면 타자를 도구화하면서 나의 비대칭적 우위 속에 동일성의 폭력을 휘두르는 세태에서 우리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이성 자체가 동일화를 보편적 원리로 삼아 작동하는 것이라면 이제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론적 가정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그 길은 봉쇄되어 있다.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구원의 길은 정녕 불가능하다는 것인가? 레비나스는 역발상으로 타자를 나보다 우위에 놓는 비대칭적 관계 설정이라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그런데 우리가 탐색해 들어가는 에로스적 사랑의 경우에도 이러한 관계 설정이 유효할까? 이것이 가능하려면 나에게서 출발하는 지향적 구조를 갖고 있는 타자에 대한 능동성으로서 주체성에 대한 인식이 그와는 정반대로 타자에 대한 수동성으로서 주체성에 대한 인식으로 전화되어야 한다. 에로스의 현상학에 대한 레비나스의 주장을 직접 들어보자. "사랑함이 사랑받는 이가 내게 품은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사랑함은 또한 사랑 속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여 자기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사랑은 양의성 없이 초월하지 않는다. 사랑은 함께 하는 만족이다. 사랑은 쾌락이고 둘의 에고이즘이다. 그러나 이 만족 속에서 사랑은 꼭 그만큼 자기에게서 멀어진다. 사랑은 어떤 의미작용도 명확히 밝히지 못하는 타자성의 심오함 – 노출되고 세속화된 심오함 – 위에서 현기증을 겪는다(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404쪽)." 레비나스의 이 언급에서 보듯이, 사랑이 양의적이고 둘의 에고이즘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더라도 에로스적 주체를 근본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사랑받고 있다'는 수동적 상황이며, 주체(사랑하는 이)의 사랑은 타자(사랑받는 이)의 사랑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향유된다. 이때 사랑의 주체는 자기동일성을 사랑받고 있다는 수동성으로부터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다(우치다 타츠루,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278쪽). 주체의 수동성을 초래하는 타자의 속성에 대해 좀더 알아보자. 어떤 의미작용도 명확히 밝히지 못한다는 점에서 나라는 동일자로는 결코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타자성의 심오함, 그것이 사랑받는 이가 갖고 있는 절대적 타자성이다. 그저 있음의 익명적 웅웅거림 한편의 에로틱함 속에서 세속화된 채 아토포스로서 사랑받는 이가 등장한다. 아토포스적 연인의 타자성이 나의 확실성을 흔들며 주체를 현기증나는 불확실성 속으로 몰아간다. 무한을 담은 외재성으로의 타자, 그 아토포스적 타자의 사랑에 수동적으로 감염되어 사랑의 주체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타자의 주체에 대한 비대칭적 우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에로스적 사랑의 구조를 더욱 분명하게 해명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에로스적 사랑에서 주체와 타자의 사랑은 불가사이한 순환구조 안으로 휘감겨 있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각자가 사랑하고자 하는 것은 '상대방(연인)의 나에 대한 사랑'인데 그 '상대방(연인)의 나에 대한 사랑'을 활성화하는 것은 '상대방(연인)에 대한 나의 사랑'이다(우치다 타츠루,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278쪽). 요컨대 나와 상대방(연인)의 사랑은 타자의 사랑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서로 되먹임되는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박준상은 이러한 사랑의 구조를 낭시의 공동-내-존재에 대한 논의와 접속시켜, 공동-내-존재를 다음과 같이 새롭게 정의한다. 공동-내-존재는 '우리'의 실존('우리'의 있음 자체)의 분유의 전-근원적(전-의식적) 양태로서 가시적인 것의 공유가 아니라 타인이 '나'를 향해 다가옴, '내'가 그 다가옴에 응답함, 즉 '내'가 타인을 향해 건너감, 타인을 향한 외존, 관계 내에 존재함, 어떠한 경우라도 비가시적동〮사적 움직임들의 부딪힘, 접촉이다(박준상, 떨림과 울림, 179-180쪽). 그의 입장은 레비나스에 대한 다음과 같은 헌사로 이어진다. "레비나스의 글쓰기는 타자로 향해가는 영혼의 움직임, 타자와 함께 하는 영혼의 숨결을 담은 시로서 그 시는 도래할 시간에 우리의 행동을 기다리고 있다(박준상, 떨림과 울림, 170쪽)." 궁극의 윤리적 가치에 대한 레비나스의 주장이 앞으로 탄생할 사랑의 주체들의 영혼에 떨림과 울림을 선물할 것을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김상표_우리는어디서와서어디로가는가 일부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0

아토포스적 타자에 대한 에로스적 매혹에서 사랑은 시작된다. 바르트의 지적처럼 타자의 실존에 관한 근원적 경험으로서 사랑은 나의 지배영역에 포섭되지 않은 아토포스적 타자를 향한다. 진정한 사랑은 어떠한 동일성으로도 포섭되지 않는 차이에서 시작된 새로운 사랑의 공간을 구축하는 것이다. '하나'의 관점이 아닌 '둘'의 관점에서 형성되는 하나의 삶(무대)이, 사랑의 주체들에게 펼쳐진다(바디우, 사랑예찬, 51쪽). 차이의 창조적 놀이를 통해 반복적으로 세계를 재발명해 나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그런데 사랑의 주체들은 각자 다른 배경을 바탕으로 한 고유의 정체성을 가진 욕망의 주체들이라는 점에서 서로의 차이를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충돌과 뒤섞임이라는 두 힘이 사랑의 전과정에 배태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충돌할 때는 고통스럽고 뒤섞일 때는 황홀하다. 둘 사이의 불협화음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환희와 고통, 이것이 사랑의 모순적 본성이다. 그 사이에서 사랑의 주체들은 둘의 새로운 무대를 구축하기 위해 유영한다. 주체와 타자 사이에서 새롭게 생겨난 사랑의 공간 만큼 계속적인 자기 파괴가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은 자아의 죽음과 함께 찾아오는 환희다. 자기 동일화의 경향성을 거스른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루틴을 새롭게 재정립해야 하는 고통을 사랑의 주체들에게 요구한다. 환희 속에서 이 고통을 단번에 뛰어넘는 사랑의 도약을 해내는 연인들을, 동서고금의 문학 작품들에서 발견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죽음 속에서까지 삶을 긍정하는 것이 에로티즘이라는 바타유의 주장을 이런 맥락에서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에로스적 사랑은 일회적인 사건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우연은 결국 고정된다."는 말라르메의 말은 사랑에도 적용된다.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위험들을 무릅쓰고 그 모험과 놀이를 지속하겠다는 선언과 충실성 없이 진정한 사랑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사랑의 공간 만큼 타자를 내 안에 자기 차이로 간직한 채 사랑을 위협하거나 방해하는 모든 사회적 제약을 과감하게 뛰어넘으려는 모험적 시도가 윤리적 주체들에게 요구된다. 자아의 정체성과 동일성을 파괴하면서 동시에 사회의 정체성과 동일성을 해체하는 양 측면에서의 모험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을 갖지 않으면 사랑의 윤리적 주체들의 탄생은 불가능하다. 사랑은 위대하지만 힘겨운 모험이다. 랭보의 말처럼 사랑을 재발명하려면 바로 삶의 재발명을 끊임없이 재발명하려는 사랑의 추체들의 지속적인 노력과 역량을 요구한다(바디우, 사랑예찬, 44쪽). 이렇게 둘 간의 차이를 하나의 삶의 무대로 재창조해내려는 사랑은 화이트헤디안적 의미에서 말 그대로 미적 조화를 추구하는 과정이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한 현실적 계기의 합생에 있어서 객체적 내용의 통합에 내재하는 대비(contrasts)와 리듬(rhythms)에 대한 정서적 평가"가 아름다움을 가져온다(김영진김〮상표, 화이트헤드와 들뢰즈의 경영철학, 92-93쪽). (잠정적으로 패턴화되는) 대비와 리듬은 다양한 이질적 요소들을 그 사이에서 결합시키는 방식인데, 사랑의 주체들도 이와 같은 방식을 활용하여 삶의 기쁨, 생명의 충만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사랑에 대한 수행적 움직임을 계속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사랑의 공간이 바로 사랑의 윤리적 주체들이 발명한 연인들 고유의 아름다움의 공동체인 것이다.

 

김상표_우리는어디서와서어디로가는가 일부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0

두 연인들만의 공동체에 대한 사유는 둘 이외의 다수의 공동체에 대한 사유로 확장될 수 있다. 만약 사랑의 재발명이 둘만의 무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세계로의 열림이 시작되는 지점이라면 에로스적 사랑은 혁명적인 것이 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바디우의 생각에서 우리는 그 단초를 읽어낸다. "사랑 안에는 우선 유아론의 하나(일자)가 있다. 이는 말의 무한한 반복 속에서 코기토와 존재의 회색 어둠이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만남이라는 사건 속에서 그리고 그것을 명명하는 계산 불가능한 시 속에서 도래하는 둘이 있다. 그리고 마침내, 둘이 가로지르고 펼쳐내는 감각적인 것의 무한이 있다. 여기서 둘 자체의 진리를 조금씩 해독한다. 하나, 둘, 무한이라는 수적 성격은 사랑의 절차에 고유한 것이다(바디우, 베케트에 대하여, 68쪽)." 사랑의 주체들이 연인공동체 속에서 사랑을 재발명하면서 세계의 무한을 감각할 수 있는 능력을 길렀을 때 극단적인 모든 차이들을 공동체로 통합해낼 가능성도 생겨난다. 사랑의 주체가 아토포스적 타자인 연인에게서 존재의 무한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순간들 없이는 둘의 차이가 공존하는 하나의 새로운 무대의 연속적인 창출은 어렵다. 연인에게서 느끼는 존재의 무한은 다수의 타자들, 즉 우리 밖의 무한한 세계로 사랑의 주체를 열리게 한다. 그동안 감각되지 않았던 것들, 심지어는 생멸하는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 꽃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악으로 규정하고 미웠던 것들 마저도 녹아내리며 사랑으로 뒤덮인다. 신비의 몸, 무한을 담은 사유체로서의 몸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환희 속에서 흐르는 눈물이 세계의 지속을 온전히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며 타자를 무조건적으로 환대하는 결정적 순간을 선물한다. 이와 같은 진정한 사랑의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 사랑의 주체들에게 세계의 모든 차이들은 차이들을 간직한 채 차이들을 넘어서는 것으로 다가온다. 바디우는 사랑이 동반하는 이러한 신비에 매혹된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병철이 쓴 『에로스의 종말』에 대한 서평(12쪽)에서 "어쩌면"이라는 단어에서 머뭇거리면서도 둘에서 출발한 에로스적 사랑이 모두를 위한 세계 기획의 전망을 열어갈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피력했을 것이다. 진정한 사랑 속에서 깨어나는 다수를 향한 열림의 감각의 획득과 함께 사랑의 모험 그 자체에서 생겨나는 탈중심적 감각의 획득 또한 에로티즘과 공동체주의 사이에서 미래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얘기할 수 있게 한다. 사회적 공간에서 자유와 해방을 위한 실천적 삶과 사랑의 주체들이 나누는 에로티즘 속에는 공통적으로 기존의 낡은 것(동일성과 정체성)을 중단시키고 해체하려는 창조적 에너지의 불꽃이 내장되어 있다. 사랑하는 그 만큼 자아의 동일성을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아가 동일자의 세계를 중단시키는 우발적 사건으로서 진정한 사랑이 둘의 경계를 넘어 사회의 재생산 구조와 만나게 될 때 사회적 동일자의 시선 또한 극복해야만 한다. 개인과 사회 두 공간에서의 동일성을 전복하는 모험을 거치면서 탄생한 사랑의 윤리적 주체들은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고 구멍을 내는 방식으로 다수의 차이를 수용하는, 심지어는 극단적 차이마저 수용하는 새로운 삶의 양태를 갖게 된다. 이제 사랑의 윤리적 주체들은 새로운 공동체를 실험하는데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설 용기를 획득한다. 사랑의 모험을 가능케 하는 에로티즘이 다수의 차이가 공존하는 무대 창출을 위한 창조적 에너지로 전화할 가능성을 바디우와 한병철은 믿고 있는 것 같다. 불가능한 혁명의 불꺼진 씨앗이 정말로 에로스적 사랑의 불꽃으로 지피어질 수 있을까? 21세기는 우리에게 공동체주의(communism)와 에로티즘(erotism), 이 둘을 함께 사유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김상표_전쟁과사랑_캔버스에 유채_193.9×651.5cm_2022

이러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차이의 공동체를 구축해 나가려면 존재 사이의 깊은 어둠의 심연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낭시에게 그 어둠은 사랑의 주체들 사이에 놓여 있는 존재론적 공백이다. 연인들의 공동체, 나아가 다수의 공동체는 아토포스적 타자를 향한 사랑의 유토피아이다. 그 유토피아는 어쩌면 불가능하다. 주체와 타자 사이에 제거될 수 없는 존재론적 공백이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면서 동시에 해체시킬 수도 있는 힘으로 작용하면서 사랑의 주체들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이 역설적인 상황은 피할 수 없는 압력으로 반복적으로 다가온다. 낭시의 얘기에 귀기울여 보자. "공동이 함께 하는 것이라면, '함께라는 것'은 절대전능의 힘과 전적인 현전이 배제된 공간을 가리킨다. '함께'하면서, 상호 간의 유희로 인해 서로 마주하고 있는 힘들만이, 서로 간격을 두고 있는 현전만이 있을 뿐이다. 서로 간격을 두고 있는 현전들, 왜냐하면 그 현전들은 단일하고 순수한 현전들(주어진 대상들, 스스로에 대한 확실성 가운데 강화된 주체들, 무기력과 엔트로피의 상승에 지배되고 있는 세계)과는 언제나 다른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서로 마주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정면으로 생각해보고, 우리의 벌어진 틈을 어떻게 정면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그것도 우리가 벌어진 틈에 빠져 함몰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기에서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직시하면서 우리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힘을 어떤 일이 있어도 길어내기 위해서, 그게 아니라면 마주한다는 것은 혼잡하고 맹목적인 혼란만을 가져올 뿐이다(낭시, 밝힐 수 없는 공동체마〮주한 공동체, 108-109쪽)." 마주함의 가능성이 공동-내-존재의 가능성 또는 함께-있음의 가능성까지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 이것을 틈 속에서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를 사랑의 주체들이 갖게 되어야 만, 도래할 사랑의 공동체에 대한 꿈을 꿀 수 있다. 사랑의 공동체 또한 공동-내-존재의 이와 같은 위험을 공유하지 않을 수 없다면, 거기에 어떠한 실체적 규정을 부과해서는 안 된다. 사랑의 공동체는 잠재적인 사건들로 가득찬 미규정적이고 불확정적인 결합체(nexus)일 뿐이다. 사랑의 공동체에 대한 일시적 성공이 다음 순간 곧바로 실패로 이어질 수 있으나 사랑의 주체들이 그 실패를 딛고 일어나 준안정적인 사랑의 공동체를 또다시 재창조해 나가려는 움직임, 그 자체를 '되기로서의 사랑의 공동체'라고 명명해야 하지 않을까? 이상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설정할 수 있다. 사랑의 유토피아는 '사랑의 공동체-되기'를 향한 무한한 수행적 움직임으로서 일종의 '과정공동체(process community)'이다(김영진김〮상표, 화이트헤드와 들뢰즈의 경영철학, 2020). 우리는 함께 다시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으로서 사랑과 공동체. "불모의 땅, 그러나 완전히 그렇지는 않은(바디우, 베케트에 대하여, 73쪽)." 이쯤에서 우리는 블랑쇼의 비인칭의 에고이즘, 에고 없는 에고이즘을 불러내야 하지 않을까? 사랑은 경이에서 시작되는 신비이다. 사랑의 윤리학에 대한 어떠한 설명 이후에도 경이는 남아 있게 된다. 정말로 사랑과 공동체를 얘기하기에 나의 사유는 너무 옅고 나의 감성은 너무 메말라 있다. 사랑의 윤리학에 대해 잠정적인 결론조차 내릴 수 없다. 단지 어디서 중단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조차 무수한 타협을 필요로 한다. 베르그송의 다음과 같은 신비주의에 대한 게송으로 이 글을 마친다. "존재들은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도록 운명지어진 존재로 불리어졌으며, 창조적인 힘은 사랑에 의해 정의되어야 한다(베르그송,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276쪽)."

 

김상표_We Exist 일부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2
김상표_We Exist 일부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2
김상표_We Exist 일부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2

이제 이번 전시의 의미를 물어야 할 때가 되었다. 랭보의 말처럼 사랑을 재발명하는 것은 차이가 가능한 새로운 삶의 무대로서 세계를 재창조하는 것이다. 바디우와 한병철의 바람대로 에로스적 사랑은 연인들의 공동체에 머무르지 않고 다수의 차이가 인정되는 열린 공동체에 대한 욕망으로 확장될 수 있다. 결국 사랑의 재발명을 위해서는 예술적 몸짓, 실존적 몸짓, 정치적 몸짓 이 셋 모두를 포함하는 모험을 떠나야 한다(바디우, 사랑예찬, 88쪽). 이번 '사랑의 윤리학' 전시도 이런 맥락 위에서 이루어졌다. 먼저 사랑의 주체로서 나는 지금까지 사랑의 윤리를 붙잡고 어떠한 실존적 몸짓을 해왔는지를 물었다. 사랑예찬-나와 너, 사랑예찬-우리, Eros, Eros-Two dancers 등 100호 이상 20여점의 작품들에 에로스적 사랑에 대한 나의 그동안의 경험과 실존적 고민들을 담아냈다. 사랑의 주체인 나는 격정과 고독, 환희와 눈물로 뒤범벅된 채 불가능한 무언가를 향해 몸부림쳐 왔던 것은 아닐까? 낭시와 블랑쇼를 떠올려 본다. 근원적으로 타자를 향해서 열려 있는 나와 너의 몸이 히스테리적으로 서로 충돌하고 뒤섞일 때 둘 사이(접촉 공간)에서 우리라는 새로운 무대가 창조될 수 있으며 그 우리의 가능성이 소통가능성으로 남아 있기를 절규하는 몸짓들. 박준상(2005)에 의하면, "이 소통은 유한성과 죽음을 드러내지만 또한 그 가운에 빛나는 불꽃 같은 생명을 드러내는 숨결, 그 숨결의 나눔을 지향한다(블랑쇼, 밝힐 수 없는 공동체마〮주한 공동체, 95쪽)." 이러한 나의 몸짓들이 에로스적 사랑에 대한 20점의 작품들에서 느껴질까? 인간의 궁극적 지향성이 구원이라고 할 때, 에로스적 사랑이 그 구원의 출발점이라는 생각에 나는 동의한다. 에로스적 사랑은 주로 춤을 소재로 선택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내려고 시도했다

 

김상표_Eros-Two Dancers1-1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2

다음으로 둘의 무대를 넘어 다수를 향한 세계로의 열림 속에서 사랑의 주체들인 나와 너, 우리는 어떠한 정치적 몸짓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를 물었다. 장애인의 문제를 'we exist'라는 제목으로 5점의 연작으로 다루었다.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공통의 리듬을 창출하며 차이를 생성하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러한 가능성에 대해 나는 김영진교수와 함께 쓴 『화이트헤드와 들뢰즈의 경영철학』에서 아름다움의 공동체인 사회복지법인 무소의 사례를 들어 입증한 바 있다. 우리 모두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상호 존재(inter-being)라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차별적 구분은 동일성의 폭력 속에서만 가능한, 상상적인, 심지어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에 불과할 뿐일지도 모른다. 통일과 전쟁을 다룬 작품도 100호 이상 8점이 출품된다. 남북은 물론이고 전세계를 언제든 파국으로 몰고갈 국지전이 발발할 위험이 상존하는 현실에서 '생명, 사랑, 평화'의 가치를 묻는 것으로 에로스적 사랑에 대한 문제의식이 확장되었다. 남북 지도자들의 평화전도사 같은 몸짓에는 각 국가의 이해관계를 둘러싼 갈등과 타협의 속성이 담겨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남북의 진정한 평화는 그 구성원들 각자인 우리가 서로를 보듬어 껴안을 수 있는 사랑의 주체들이 되었을 때만 가능하다.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평화는 보편적 사랑에 의해서만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다. 화이트헤드에게 평화는 자아가 상실되고 흥미가 인격성보다 넓은 조정으로 전이되었다는 의미에 있어서 자기 제어를 말하는데, 이것은 평화가 인류의 사랑 그 자체라는 것을 뜻한다(김영진김〮상표, 화이트헤드와 들뢰즈의 경영철학, 437쪽). 다음으로 아나키즘을 표현한 작품들도 출품되었다. 저항과 불복종의 아나키즘 정신이야말로 사랑의 재발명을 위한 실존적 몸짓과 정치적 몸짓의 바탕이라고 믿기에 이를 100호 3점의 작품에 담아냈다. 연인들의 공동체도, 다수로 구성된 공동체도 사랑의 주체들의 자유와 해방을 향한 저항의 몸짓들 없이는 불가능하다. 저항을 담은 기쁨의 몸짓, 그것을 춤이라는 소재로 풀어냈다.

 

김상표_통일은 비즈니스다_캔버스에 유채_162.2×390.9cm_2020

마지막으로 이러한 실존적 몸짓과 정치적 몸짓을 담을 수 있는 예술적 몸짓을 어떻게 해나가고 있는지도 작품들에서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둘 사이의 차이에서 시작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에로스적 사랑에서 출발하여 차이를 인정하는 다수의 세계를 향한 꿈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전시회를 기획하고 이를 작품으로 구현해 가는 전 과정은 예술적 몸짓에 다름아니다. '주제' 측면에서 사랑의 재발명을 위한 예술적 몸짓을 바로 실존적 몸짓과 정치적 몸짓의 그림들에서 드러낸 셈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회화의 새로운 '스타일'을 창안했다. 나의 예술적 모험은 코드화된 체계에 사로잡힌 회화를 해방시키고 촘촘히 짜여진 권력의 그물망에 포섭된 나의 몸을 자유롭게 하는 것을 지향한다(김상표, 아나키즘: 회화의 해방, 몸의 자유, 2021). 이를 위해 퍼포먼스 회화를 통해 그림과 그림아닌 것의 경계에서의 그리기를 시도했다. 이와 같은 '수행성으로서 화가-되기'의 결과물인 40점의 그림들은 관람객들에게 원초적 몸에 배태된 아나키즘적 리비도의 떨림이라는 경험을 선물함으로써 그들에게 삶과 사랑을 재발명하고 싶은 의욕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주제'와 '스타일' 양 측면에서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예술적 몸짓들. 이것이 이번 전시를 통해 보여주는 예술의 아나키즘을 향한 나의 모험이다. I AM ANARCHISM. ■ 김상표

 

Vol.20220822a | 김상표展 / KIMSANGPYO / 金相杓 / painting

Destruction = Creation

김상표展 / KIMSANGPYO / 金相杓 / painting 

 

2022_0617 ▶ 2022_0717 / 월요일 휴관

 

김상표_디오니소소춤2_캔버스에 유채_162.2×260.6cm_2020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료 / 2,000원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자하미술관

ZAHA MUSEUM

서울 종로구 창의문로5가길 46(부암동 362-21번지)

Tel. +82.(0)2.395.3222

www.zahamuseum.org

 

김상표-아나키즘에 기반 한 회화 ● 김상표는 자신의 작업이 아나키즘 사상을 기반으로 한 그리기라고 설명한다. 나는 그가 쓴 비교적 긴 작가론, 자기 작품에 관한 논리를 접했다.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고 동시대 미술과 사상에 관한 전방위적인 관심이 폭넓게 드리워진 글이었다. 그는 자신의 논리를 그림을 풀어내고자 한다. 여기서 그의 생각과 주제는 선험적으로 드러나 있고 이후 그림은 그것을 표상하는 차원에서 사후적으로 몸을 내밀고 있는 것 같다. 다분히 선언적인 그의 회화론을 보여주는 그림은 인간의 몸과 얼굴을 암시하는 격렬한 선, 몸짓만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사각형 화면의 틀을 따라 선이 이동하는 모종의 흐름을 안겨준다. 그리고 그것은 즉흥적인 감정의 발산이나 순간적인 몸의 충동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그래서 마치 몸과 감정을 그대로 찍어내는 듯한 그리기에 가까워 보인다. 작가는 자신의 몸을 화폭에 실제 낙관하듯이, 온몸을 휘둘러 흔적을 남긴다. 그것은 기존 그림의 일반적인 모드에서 다소 비껴나 있는 편이다. 사실 무의식에 맡겨 그림을 그린다거나 기존의 제작방식에서 벗어나려는 다양한 시도는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너무나 흔하게 접해온 것들이다. 20세기 초 현대미술의 속성 자체가 탈전통, 탈재현이었고 이후 미술은 지속적으로 기존의 미술 개념과 방법론을 끊임없이 반성, 부정해오면서 매 순간 미술작품의 의미와 가치를 질문해온 역사였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은 지금도 지속되는 한편 많은 작가들은 그러한 새로움을 어떻게 독특한 방법론과 단단하면서도 매력적인 조형의 힘으로 주물러 놓을 수 있을까를 고민해오고 있다고 본다. 그것이 없으면 부정이나 새로움은 사실 설득력을 갖기 힘들다.

 

김상표_운명교향곡_카산드라 베델 1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20

김상표는 자신의 신체의 흐름을 통해 단숨에 그리며 지우거나 덧칠을 하지도 않는다. 붓을 부분적으로 사용하긴 하지만 대부분 손가락에 물감을 묻혀 그리는데 온몸을 주어진 화면에 투기하듯, 퍼포먼스를 하듯 그린다. 이른바 핑거페인팅이자 액션페인팅 내지 마치 화면 안에서 춤을 추거나 검도나 태극권을 하듯 화폭 위에 물감을 문지르고 다닌 형국이다. 물론 그것은 결국 물감을 묻힌 손가락 힘의 강약에 따른 차이로 인한 여러 표정들이다. 읽을 수 있는 문자의 체계가 지워진 채 위에서 아래로, 혹은 사선 방향으로, 혹은 원형으로 돌린 선들의 교차만이 남아있는 혁필화를 보는 듯도 하다. 혁필화는 근래와 와서 부르는 이름이고, 본래 이름은 비백서였다. 이는 비로 쓴 자국처럼 희끗희끗하게 붓 자국이 드러난 글씨체를 지칭한다. 붓끝이 잘게 갈라지고 필세가 비동飛動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본래는 버드나무나 대나무로 쓰는 비백서는 근대에 와서 가죽이나 두꺼운 천 조각에 여러 가지 색의 안료를 묻혀서 그림이나 문양과 함께 그린 혁필화로 발전했다고 한다. 보통 납작한 죽필竹筆을 종횡으로 자유자재로 사용하여 곡선, 파선波線, 직선을 자유롭게 구사한 것인데 먹색 하나만으로도 풍부한 농담과 색의 차이, 선의 온갖 형세를 다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하여간 순간적으로 그어나간 혁필화 선의 자취를 유심히 보면, 선과 색의 풍부한 변화상을 만끽할 수 있다. 김상표의 그림에서 어느 부분이 그런 인상을 강하게 준다. 하여간 손가락으로 캔버스 화면에 빗질을 하듯, 할퀴듯, 긁어대듯 그리고 있다. 물감을 칠해서 덮거나 채워 넣는 게 아니다.

 

김상표_NIRVANA-교장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20

"서예필법과 검법이 녹아든 붓질과 열 손가락의 본능적인 할큄이 캔버스를 훑고 지나가는 가운데 선과 색이 얼기설기 얽혀서 불규칙한 흐름이 형성된 패턴이 나의 공감각과 공명하는 어느 순간, 내 몸이 스스로 그리기를 멈춘다. 이처럼 리좀적 접속을 통해 도달하려는 목적지는 사전에 설정되어 있지 않고 과정을 통해서 늘 잠정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결국 나의 회화는 수행성으로서의 퍼포먼스에 다름아니다." (작가노트) ● 작가는 특정 동작을 취하고 있는 인간의 몸, 그러니까 춤을 추거나 격렬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신체 내지 커다란 얼굴을 형상화하고 있다. 색과 선이 한 몸으로 이루어지고 그리기와 칠하기의 구분이 없다. 물론 재현회화는 아니다. 물감을 그대로 화폭에 문지르고 다니거나 북북 그어대거나 휘젓고 다니는 등 다양한 방향과 강약의 조절을 통해 선의 풍부한 표정을, 물감의 물성이 지닌 색다른 표정을 보여주는 편이다. 그렇다고 완전한 추상도 아니다. 여전히 인간의 흔적이 어른거린다. 작가의 손가락, 몸의 움직임 혹은 붓을 부분적으로 이용해 신속하게 칠해놓은 흔적이 선, 색채, 물감의 질료성 그리고 인간의 몸과 얼굴을 동시다발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바탕칠이 되어 있지 않은 하얀 캔버스 천은 그 위에 올려지는 손가락의 힘과 속도, 압력을 버티면서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에 발생 되는 여러 자취를 생생하게 기록한다. 나로서는 얼굴을 보여주는 그림이(418코뮨-PJL) 흥미로웠는데 핑거페인팅이 지닌 맛을 보다 적절히 통어해서 추려낸다면 묘한 에너지를 지닌 얼굴이 불현듯 떠오르는 그림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봤다. 무엇보다도 조형의 예리한 추려냄이 필요해 보인다.

 

김상표_앤솔러지 1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20
김상표_사랑예찬-꿈_캔버스에 유채_162.2×521.2cm_2021

작가의 얼굴 그림은 많이 그려지지 않은, 그리다 만 얼굴, 그리고 이내 지운 얼굴, 그릴 수 없는 얼굴이다. 마치 사라져가는 인간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도 같다. 이리저리 쓸려 다니는 듯하는 손가락과 붓질에 의해 얼굴을 그리고 있기보다는 얼굴을 자해하고 두들겨대고 있다. 보여주기보다는 삭제하고 은폐시키는 것도 같다. 여기서 재현 대상과 이미지의 고리가 끊어지고 있다. 얼굴은 온통 뭉개져 있거나 물감과 거칠게 짓이긴, 문지른 흔적뿐이어서 다분히 모호하다. 몇 번의 격렬한 신체의 움직임, 손가락의 운동은 얼굴과 인간의 형체를 가까스로 만들어 보이다가 이내 지워내고 있다. 그 얼굴은 무엇이라 규정하기 어렵다. 누군가를 연상시키다가 이내 좌절하고 인간의 얼굴을 보여주다가도 그저 맥없이 사라져 버린다. 사실 모든 이미지란 그런 것이다. 이미지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것은 실제가 될 수 없다. 실제를 보여주다가도 이내 사라져 버리고 실제에 가 닿지 못하고 추락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가 없이는 세계를 재현할 수 없다. 김상표의 그림은 바로 그러한 미술의 경계와 운명 안에서 작업을 하고자 하는 것 같다. ■ 박영택

 

Vol.20220617b | 김상표展 / KIMSANGPYO / 金相杓 / painting



김상표씨의 ‘나르시스 칸타타’전이 ‘이즈 갤러리’ 1,2,3층에서 열리고 있다.



작가는 연세대를 졸업한 경영학박사로, 경남과학기술대학교 교수다.

이년 전 인사동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후 다섯 번째 개인전을 갖는 열혈 작가다.



다소 아리송한 작품들이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은 미술에 대한 기존 형식을 과감하게 던져버렸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초벌그림을 그렸으면 어느 정도 마르고 난 후 그리는 게 원칙이지만, 기다리지 않고 덧칠을 한다 던지,

붓을 칼처럼 휘두르는 등 모든 게 파격적이었다.

자신 안에 넘실대는 감정의 기복을 격식 없이 과감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전시장에 들어 선 첫 느낌은 일렬로 도열해 선 사천왕상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한 오늘의 시대상이 연상되기도 했다.



그의 그림에서는 야생의 힘이 꿈틀거렸다.

프레임에 갇힌 죽은 초상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적인 욕망과

이글거리는 분노가 뒤섞인 살아 꿈틀거리는 날 것의 실체였다.



아무런 격식 없는 원시성이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모방에 뿌리 둔 현대미술보다 은유에 뿌리 둔 원시 미술이었다.



3층에 걸린 작품들은 무위당 장일순선생의 모습이라 했다.

모심과 살림의 형이상학적 욕망을 ‘수행성으로서 그리기 행위’로 끌어들여

새로운 생명들이 피어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무위당의 얼굴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정신을 그린 것이었다.



김상표씨의 작업은 얼굴성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을 제기하고 있었다.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마음속에 도사린 여러 가지 감정이 때로는 괴물로 때로는 악귀로 드러나기도 했는데,

어찌 보면 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인간군상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작가가 반복적으로 그려내는 자화상이 스스로를 비워내는 수행 방식이라고도 했다.



작품의 완성도가 낮고 다소 주관적이라 객관성을 잃은 작품도 있지만,

미친 듯 몰입해 덧칠한 붓 자욱이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김종길씨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상표의 회화에서 주목할 것 중의 하나는 '나'의 술수적 변태로서의 자화상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그가 미륵을 그리면서 '미륵자화상'이라고 표현한 것은 '미륵'과 '나'를 서로 빗대어 마주 보게 한 것인데,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의 표현대로 광대무변의 실체를 그리기 위해서이다.”



인사동에 볼만한 전시가 여럿 열리고 있으나, 코로나 바이러스 광풍에 전시장은 텅텅 비었다.

마침 작가 김상표씨를 만나 기념사진도 찍고, 도록을 선물받는 횡재를 했다.

사람이 없으니 코로나에 감염될 염려도 없지만, 조용하니 작품 감상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3월24일까지 열리는 ‘나르시스 칸타타’전을 놓치지 마시길...


사진, 글 / 조문호









 






























































나르시스 칸타타 NARCISSUS CANTATA


김상표展 / KIMSANGPYO / 金相杓 / painting
2020_0311 ▶︎ 2020_0324


김상표_Nirvana-자화상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19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80915f | 김상표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20_0314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이즈

GALLERY IS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2-1(관훈동 100-5번지)

Tel. +82.(0)2.736.6669/737.6669

www.galleryis.com



얼의 무늬 - 김상표의 '얼굴성'을 위한 9개의 아포리즘

"오랫동안 나는 펜을 칼처럼 생각했다. 이제야 나는 우리의 무기력함을 알았다. 그래도 상관없다. 나는 책을 쓰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장 폴 사르트르  "붓을 칼처럼 휘두르며 발작적으로 그림그리기를 하는 나를 발견했다."- 김상표


● 이미지의 역사는 문자보다 오래다. 말의 상상을 덧대어 이미지는 생성되었고, 초상은 그 이미지들 사이에서 잉태되었다. 동굴벽화와 암각화에 새긴 초상은 날 것이어서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나 그 초상은 단순하고 소박해서 얼굴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수천 년이 지나 이제 회화는 극사실주의에서 표현주의는 물론, 개념적인 추상에 이르기까지 표현의 한계를 갖지 않는다. 김상표의 초상화는 그 무경계의 어디쯤에서 시작된 듯하다. 그는 시작과 함께 곧장 작품을 쏟아 냈으므로 시간의 연대기로 작가론/작품론을 구성하는 것은 부질없다. 또 미술의 형식을 학습한 적이 없어서 미술사 방법론을 사용하는 것도 맞지 않아 보인다. 그는 그동안 제작하고 발표한 작품 이미지들을 보내왔고, 스스로 궁구하고 있는 '얼굴성'이란 글도 첨부했다. 그와 한 번 만났고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생각 끝에 아홉 개의 열쇠 말을 뽑아서 아포리즘 평론을 구성했다. 이 열쇠 말들은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서로를 잇고 보완하는 김상표 회화론의 알고리즘이라 할 것이다. 각각의 아포리즘마다 그의 글을 붙였다.


1. 얼빛 자화상 ● 불현듯, 아니 느닷없이 그는 붓을 들어 자기 존재의 페르소나(persona)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이며 자아의 어두운 얼굴, 페르소나를. 그러면서 '껍데기는 가라!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는 스스로의 언명을 외쳤다. 그는 제나(ego)를 벗고 얼나[眞我]를 회화로 궁리했다. 그림이 시작되자 마음의 깊은 우물에서 '나'의 얼빛이 솟구쳤다. "지극한 기운이여 내 안에 지피소서(至氣今至)" 마음속 얼빛 모신 자리가 밝달이었다. 얼빛 어린 얼굴이 너른 밝달에 솟았는데, 거기 '참나'가 있었다. 그는 '참나'를 붙잡았다. 그의 자화상(自畵像)은 그렇게 탄생했다. 배우고 익혀서 시나브로 깨달아 그린 게 아니라, 당돌하게도 바로 들어갔다. 지금, 여기, 얼빛 밝은 참나가 섰는데 무얼 고민한단 말인가! 그 실체를 엿보았는데 성긴 붓질이 무어 대수란 말인가! 그는 마치 맨몸으로 뛰어들 듯 붓을 들고 캔버스로 달려들었다. 캔버스는 광야였다. ● "본질에 대한 갈증으로 철학에 매달렸지만, 그래도 해소되지 않고 가슴에 얹혀 있는 무엇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절집 언저리를 서성이며 살아온 '나', 그림을 그리면서부터 그 '나'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2. 정신의 실체 ● '나'를 회화로 온전히 모시기 위해서는 지극히 묘사하되(形似) 정신을 파고들어야 한다(神似). 정신이 닮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傳神寫照). 옛사람들은 얼굴의 묘사로 정신을 드러냈으나 그는 묘사의 기술을 학습한 바 없었다. 그는 회화에 길들여진 적이 없다. 붓을 든 순간 그의 회화는 야생의 사고로 치달았다. 수시로 변화하는 얼굴과 그 얼굴 뒤의 어떤 근본적인 내적 형상은 '잘 그리기[익힌 것]'에 있지 않았고, 오히려 '표현하기[날 것]'에 있었다. 그의 집요한 그리기는 그래서 야생의 회화였고 날 것의 구조로 드러난 '정신의 실체'였다. 그의 회화에서 때때로 어떤 프리미티비즘적인 이미지가 이글거리거나 거친 붓의 소란을 엿보는 것은 그런 이유일 테다. 그것이 창조성의 발현이다. 현대미술이 모방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원시미술은 은유에 뿌리에 두고 있지 않은가! 그는 초상의 동일한 주체인 '나'를 반복적으로 그리는 동안에도 그 스스로를 모방하지 않는다. ● "내 안에 우글거리는 자아들, 그런 수많은 놈이 그냥 계속 야생적으로 살아 있는 거예요. 날것으로 말이예요. 어렸을 적부터 나이가 들 때까지 퇴화하지 않고 내 안에 살고 있거든요."


3. 마음우물 ● 나르키소스는 물면[거울]에 되비친 얼굴에 빠졌으나 김상표의 얼굴은 심연(深淵/마음우물)에서 솟났다. 물에 어려서 되비친 얼굴은 껍데기다. 마음우물에서 솟난 얼굴은 '속알(persona)'이다. 내 속의 씨알이다. 씨알을 엿보는 것이 중요하다. 윤동주는 「자화상」에서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고 했다. 또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되비치고 솟난 '한 사나이'의 얼굴을 그리며 성찰한다. 초상이란 그렇게 되비치고 솟난 두 개의 이미지가 하나로 기화(氣化)되었을 때 온전해진다[내유신령(內有神靈) 외유기화(外有氣化)]. 얼을 담은 골(骨), 얼골, 얼굴. 김상표는 얼에 기대어 숱한 형(形)의 모양을 따졌다. '얼나'를 쫓아 본성의 그릇인 얼굴에 가닿는 '그리기'의 여정을 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그리는 '얼나'를 회화로 모시는 과정이었으리라(侍天主). ● "구체적인 형상이 그림에 나타났을 때는 하나의 규정성만으로 특정되는 얼굴이 진짜 얼굴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 같은 나선형 궤적의 마법에 걸려들어 양 극단을 오가며 저 멀리 발산되어 갔다.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고, 또 있음이기도 하고 없음이기도 하다."


4. 얼의 무늬 ● 시간은 몸에 무늬/결을 새긴다. 얼굴은 가장 진실한 몸의 나이테다. 초상화는 얼굴에 새긴 시간의 무늬를 몽타주 하는 것이며, 수십 개 가면의 변검(變瞼)에 가린 '무늬의 진면목'을 불러내는 것이다. 김상표는 그동안 얼굴만을 그렸고 특히 자화상에 집중했다. 스스로 그리는 스스로의 형상은 카오스다. 미궁이다. 나(화가)와 너(모델) 사이의 간격이 없어서 무늬를 확인하기 어렵고 어딘가에 되비친 모습은 좌우가 달라서 뒤틀리기에 십상이다. 그가 선택한 것은 눈을 감고 마음을 뜨는 것이었다. 보지 않아야 잘 보였으므로. 마음눈은 깨우기 어려우나 한 번 깨워서 뜨면 안팎이 환하다. 우리 안에 잠재된 생명과 영혼, 우주 에너지는 똘똘 감겨있다[Kundalini/산스크리트어]. 위아래로 쉼 없이 회오리치면서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그것이 멈추면 죽는다. 무늬로 새긴 그의 초상들이 붓춤을 추듯 현란한 것은 바로 그 회오리, 쿤달리니 때문이다. ● "행위로서의 회화와 결과로서의 회화와 나 자신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 이 셋 사이에는 분명 간극이 존재한다. 그 간극은 글을 쓰고 칼을 휘두르고 몸을 그리고 마침내 붓을 쥐어 든 내가 쉬지 않고 겨냥할 '거기'이다."(양효실)


5. 구토 ● 소갈머리가 없으면 얼간이다. 얼이 빠져나갔다. 얼빛이 꺼져서 껍데기만 남았다. 그 빈껍데기에 쌓이는 것이 그늘이다. 탐욕이다. 잿더미다. 불씨 하나 찾을 수 없는 암흑이다. 삶도 죽음도 그 안에선 무의미하다. 마음보마저 말랐으니 본성의 씨알 하나 심을 수 없다. 초상을 그리는 것은 그런 그늘로 파고드는 것이다. 깊이 파고들어 탐욕을 뒤집고 잿더미를 흩으려 속을 완전히 배배 꼬아서 토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오장육부를 뒤틀어서 검붉은 핏빛 소갈머리의 허상을 토해내야 한다. 김상표의 몇몇 초상들은 거짓 없이 토해낸 어두운 실존의 일그러진 형상이다. 샤먼의 청동거울에 비친 민낯의 투명한 속내다. 사실 예술은 때로 황폐의 공간이고, 미술은 그런 폐허의 공간에서 시작된다. 그의 초상화들은 회화의 근대성이 쌓아 올렸던 미학의 이념 더미를 태우고 그 더미들이 타고 남은 잿더미를 보여준다. 아카데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초상들은 역설적으로 그 잿더미에서 피어 올린 작은 불씨인지 모른다. ● "내 안에서 우글거렸던 수많은 애벌레 주체들이 하나씩 토해지기 시작했다. 존재가 내 몸을 빌려 열리고 드러나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토록 채워지지 않던 결여의 공간에 드디어 충만함이 자리 잡기 시작했나 보다."


6. 가난한 자 ● 영혼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영혼이 가난한 자의 미학은 풍요롭다. 얼굴에 깃든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의 얼굴로 가난하지 못하니 복이 없다. 얼굴에 깃든 아내의 아들의 친구의 학생의 얼굴들로 가난하지 못하다. 가난은 굶주림일 터. 예수가 광야에서 굶주렸고 싯다르타가 보리수나무 밑에서 굶주렸다. 굶주림 끝에서 그들은 진리를 깨달았다. 그들의 굶주림은 육체의 굶주림이 아니다. 싯다르타는 숱한 마귀들을 잠재우고 선정에 들었다. 예수는 숱한 유혹을 물리쳤다. 그 '숱한 마귀'는 내 안의 여러 얼굴이다. 내 안의 괴물들이다. 유령들이다. 그것을 비우고 잠재워야 진리에 가 닿을 터. 남편의 얼굴로 아버지의 얼굴로 아들의 얼굴로 스승의 얼굴로 친구의 얼굴로 새겨진 얼굴의 무늬는 사실이고 한 삶의 역사이나, 오롯한 '나' 자신은 아닐 것이다. 헤아릴 수 없는 얼굴의 얼굴들을 그려내는 것. 그려서 비워내는 것. 바로 그것이 현재 김상표가 수행하는 방식이다. ●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고 불교의 법명은 여연이에요. 종교적인 것을 떠나서 무엇인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어떤 기억이나 아픔들이 다 이 그림에 담겨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살아온, 또 전생의 업들을 다 토해낸 것 같은 느낌이랄까."


7. 환(幻) ● 예술의 몸은 예(藝)가 본래 뜻하는 '심다 ․ 기예 ․ 궁극'의 생태적[심다], 창조적[기예], 철학적[궁극] 환(幻)의 술수(術數)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의 미학적 화두로 이뤄져 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술이란 '예'의 생태성 ․ 창조성 ․ 철학성이 '술수'로 드러나는 실체적 환(幻)이라고 할 수 있다. 술수와 환의 사유는 도교의 방술[方術:방사(方士)가 행하는 신선의 술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옛 중국에서는 선인(仙人), 방사, 술사를 모두 진인(眞人)이라고 생각했다. 20세기 서구 모더니즘의 유입으로 동아시아의 예술은 '예'만 강조하고 '술/술수'는 괴이하게 생각하거나 미신 따위로 몰아버리는, 그러니까 유물론으로서 '작품'이라는 '예'의 물성에 사로잡힌 꼴이 되었다. 초현실과 비현실의 샤먼 미학은 완전히 저급하고 저속한 것 따위의 문화로 치부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술'이 없이 어떻게 작품의 판타지가 가능하고 영적 교감이 가능할 것인가? 김상표의 회화는 환(幻)의 술수(術數)로 가득하다. 물성 너머의 판타지를 보아야 한다. ● "물성을 통제한 후부터는 내 안의 자아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어요. 얘네들이 튀어나오면서부터 제가 조금씩 자유로워지기 시작했어요. 숨을 쉬기 시작했어요. 뭐라 할까? 아름다움에 의해서 인간이 치유되고 구원될 수 있다는 것, 예술과 종교가 하나 될 수 있다는 것, 예술철학을 공부할 때 어려웠던 테제들이 체험적으로 이해가 됐어요."


8. 너/나, 우리, 서로주체 ● 어제, 오늘, 아제(來日)에서 어제는 과거, 오늘은 현재, 아제는 미래 시제를 갖는다. 'ㅓ'와 'ㅏ'에 시제가 있다는 사실. 어제처럼 '너'는 과거요, 아제처럼 '나'는 미래의 의미가 깃들어 있다. 어제가 아제의 과거이듯이 '너'는 '나'의 과거다. 아제가 어제의 미래이듯이 '나'는 '너'의 미래다. 우리말에서 '너나'는 구분되어서 말할 수 없는 연속 시제의 시간성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우리'라는 말을 쓴다. 너의 눈, 나의 눈에 서로가 어려 있는 모습을 '눈부처'라고 한다. 내 눈 속의 네가 나의 부처인 것처럼, 네 눈 속의 내가 너의 부처이니 우리는 서로에게 하나의 부처인 셈이다. 이렇듯 너와 나, 나와 너라는 우리는 '서로주체'의 상징성을 갖는다. 철학자 김상봉은 이것을 '서로주체성'이라고 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만남'이다. 김상표의 초상은 '너/나'를 하나의 시선으로 그린 것이다. 내 안에 과거 현재 미래로 존재하는 얼굴들의 서로주체와 만났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 "나를 그린다는 것은 사실 너를 보는 것이고 너를 만나는 것이며 나와 너의 관계를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사회적 실존을 마주하는 문제이잖아요. 사회적 실존을 마주한다 할지라도 제 안에 있는 나, 누구나 자기 안에 자기를 응시하는 또 다른 자기를 갖고 있잖아요."


9. 미륵 ● 이무기가 용이 되는 것을 '기화'라고 하고 또 '운화(運化)'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말의 뿌리는 혜강 최한기(崔漢綺, 1803~1879)의 기학(氣學)에서 온 것이다. 그는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을 기(氣)로 보았다. 우주에 가득 찬 바로 그 기가 끊임없이 활동운화, 즉 운동하고 변화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기를 '천지지기', '운화지기'라고도 불렀다. 그리고 또 그 기는 모든 존재의 형체와 질료를 이루고 있는 것이어서 '형질지기'라고도 하는데, 정리하면 "기학의 핵심은 만물의 근원적 존재이자 인간과 만물 속에 들어 있는 생명이 기운인 운화기(運化氣)의 활동운화(活動運化)다. 활동운화란 살아 있는 기가 항상 움직이고 두루 돌아 크게 변화하는 것이다.(『신기통』)" 미륵은 미르에서 왔고 미르는 '용(龍)'의 순우리말이다. 김상표의 회화에서 주목할 것 중의 하나는 '나'의 술수적 변태로서의 자화상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그가 미륵을 그리면서 '미륵자화상'이라고 표현한 것은 '미륵'과 '나'를 서로 빗대어 마주 보게 한 것인데,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의 표현대로 광대무변의 실체를 그리기 위해서일 터이다. ● "미륵 그림에 와서는 반추상 형태로 바뀐 거예요. 거기다가 미륵의 뒷모습을 그리면서부터는 저도 놀랍게도 완전히 추상적인 형태로 급격히 진행한 겁니다. … 어쩌면 미륵이라는 것이 결국 민중들의 수많은 아픔을 다 담아내야 하고 소망을 품어내야 하니까 광대무변한 모습으로 그려져야 되잖아요.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그려지면서 결과적으로 미륵자화상의 앞뒤 모습이 형태적으로도 닮게 되었어요."

김종길



김상표_Nirvana-보컬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19


히스테리증자의 의심슬픔그러므로평화 ● 지난 번 전시와 이번 전시까지 나는 김선생의 전시에 2회에 걸쳐 리뷰를 쓰게 되었다. 김선생은 미술 평론가인 내게 전시에 대한 평문을 부탁한 게 아니다. 그는 내 책, 『불구의 삶 사랑의 말』에 소개된 얼터너티브 록 밴드 너바나의 음악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고 그걸 연유로 내게 연락을 했다. 말하자면 그는 내가 먼저 매혹된 너바나에게 두 번째로 매혹된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번 전시 「나르시스 칸타타」에 들어갈 비평문을 위해 그가 전시 준비 중에 적어간 문장들을 읽게 되었고 나는 그걸 연유로 그가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러한 서로가 서로를 알아봄을 나르시시즘적 투사라고 말해도 좋다. 우리는 둘 다 자기 분야의 전문가들, 선생들, 그럼에도 전문가들의 세계를 나름 못견뎌하면서 다른 것을 타진해온 사람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나는 그의 그림이 아닌 글에서 그를(나를?) 더 분명하게 알아보았고, 그렇게 일시적으로 '우리'가 발생했다.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히스테리적 주체이다. 믿고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의심하고 해체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의식적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과의 대결이 전체 구조, 억압적 구조와의 대결이기도 한 사람들이다. 나는 그의 '화가-되기'가 자기-소진을 통한 타자에의 자기-허여라고 보았고, 그것은 나 역시 이미 하고 있는 실천, 노력, 수행이라고 생각했다. 무리한 동일시나 투사일 수 있겠지만, 서로를 알아봄―그가 먼저 나를, 이번에 내가 그를―에 근거한 이번 글쓰기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자기궤도를 열어 보이게 된다.


# 1 ● 나는 의심한다. 의심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부류다. 그 의심은 무엇보다 나에 대한 것인데, 가령 강연자로서 무대에 오르면 나는 앉아 있는 청중을 상대로 무엇인가를 전달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나를 상대로 싸우는 전사다. 내게는 일방적으로 말할 수 있는, 일종의 내 말의 '진리'를 이미 선점한 사람의 자격, 권위―나는 연단 위에 설 자격을 부여받았다―가 주어진 셈이고, 청중은 그런 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수용해야 하는 의무, 태도가 있다. 동시에 나는 내 말이 너무 그럴듯해지지 않도록, 그 말이 절룩거리도록, 그 말이 거의 미친 상태에 이르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강연자(일반)의 진리와 그 진리를 부식시키려는 '나'(특수)의 진리가 대결한다. 전자를 위해서라면 나는 주어진 말의 논리에 복종해야 한다. 말은 나를 사용해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고 한다. 그래야 나는 강연자이다. 그럴 때 나는 말이 사용하는, 대체가능한, 누구나 들어와 앉을 수 있는 자리, 매체, 도구가 된다. 청중은 지식, 따라서 평온, 화해, 가능성을 얻기 위해 와 있다. 그럴 때 나는 진리를 전달하는, 이해와 소통을 위해 말의 권력에 복종하는 '대상'-주체가 된다. 말이 논리적일수록, 이해가능해질수록, 의미와 가치로 충만할수록 나는 언어의 권력을 이행하는 '노예'가 된다. 그러므로 나는 이해와 소통에 저항해야 하고, 논리적이며 이해가능한 언어에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나는 지금 대체가능한 강연자이면서 동시에 유일무이한 한 사람이다. 나는 공감과 동일시를 거부해야 한다. 나는 말을 꺾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한낱 말의 노예가 되어 그 말이 덮어가리고 대체한 사물들, 존재들, 사건들을 억압하고 소외시키는 데 공모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말은 나를 이용하고 착취하는 데 너무나 고도의 전략을 사용하기에(나는 사랑받고 인정받고 공감받고 박수를 받고 싶어하게끔 길러졌다!) 그런 말의 지배와 권력을 벗어나는 말하기를 수행하는 데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된다. 나는 이해와 공감과 동일시를 욕망하는 사람들/타자들의 박수를 받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동시에 나는 강연자로서 말한다. 따라서 나는 입을 여는 순간 말의 대리자가 되어 있거나 되려고 할 것이기에, 필사적으로 그런 말의 욕망을 알아차리면서, 그러나 그 말의 욕망을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노출시키지 않으면서(내부의 외부자는 그래야 한다), 이해와 공감과 동일시에 대한 청중의 욕망을 완전히 꺾지는 않으면서 계속 말해야 한다. 말이 성취하려는 '의미'를 전달하는 척하면서 그 의미를 꺾고, 말을 따르는 척하면서 그 말을 지우는, 이러한 이중의 수행은 '주체'(subject)인 내게는 내 의식과 '내' 신체 간의 싸움이기도 하다. 나는 말을 하면서 동시에 내 말을 듣는, 내 말에 동의하면서 내 말에 저항하는 사람이다. 내 말은 내 말이 아니고 그렇게 나를 통해 자신을 실현하는 내 말이 타자의 말임을 드러내면서 계속 말해야 한다. 내 말에 내가 속으면, 설득당하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한낱 종속(subjection)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나의 말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말하는 자인 나와 듣는 자인 청중 사이에서는 공감과 동일시에 불과한 (나르시시즘적)투사만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고 동시에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사람이다. 나는 말에 휘둘리면서 완전히 휘둘리지 않은 채로 말의 욕망과 싸운다. 나는 살아있다. 고로 나는 저항한다.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결론을 내릴 수 없는, 교훈이 없는 말을 어떻게든 불러내고 증명하려고 하면서 이미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는 끝―마침표와 결론과 교훈―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골목들, 우회로들, 급작스러운 암전, 침묵, 절규, 한탄을 계속 모색하고 수행한다. 그래서 가끔 어떤 청중은 나를 미친 사람 '같다'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내 욕망은 그때 무엇인가? 나는 내 말에 차이, 소음, 심지어 침묵이 들어와 있으면 좋겠다. 꽉 찬 말이 아니어서 비틀린 말이어서 비로소 다른 것들이 함께 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건 내가 '좋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내 신체의, 내 감각의 삶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나는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곧 의심하는 나를 소환한다. 나는 단지 말하는 사람이고 싶지 않다. 나는 동시에 내 말을 듣는 사람, 잘못 듣는 사람, 많이 듣는 사람, 딴 데 정신이 팔린 사람이려고 한다. 이러한 두 개의 욕망, 전달과 전복의 동시성에 헌정된 내 퍼포먼스에 볼모는 내 신체다. 이런 퍼포먼스를 하는 동안 나는 소진된다. 말에 복종하면서 말의 틈을 노리는 이 싸움에 나는 거의 쓰러질 정도가 된다. 입은 이미 너덜너덜하고 얼굴은 고열에 시달리고 몸은 방향과 중심을 상실한 상태이다. 〔…〕 이러한 자기-소진은 역설적이지만 자기-향유이다. 나는 살아있고 나는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있고 나는 완전히 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나는 지금 반복불가능한 단 한 번의 퍼포먼스를 펼쳤다. 나와의 싸움에서 나는 이겼는가 졌는가? 이것은 이기기 위한 싸움이 아니다. 이것은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하지 않은 나와 나, 둘의 싸움이다. 동시에 이것은 내가 내게 공손하면서 잔인한 세계와 벌이는 싸움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 소진이다. 나에 의한 나의 무화(無化)는 굳이 이야기하자면 도래할 나의 죽음이라는 어처구니없는(거기에는 '내'가 없다) 사건의 리허설이고, 이러한 나의 리허설들, 죽음을 길들이고 노래하고 방어하는 이러한 무대에서 나는 일종의 '신'적인/주권적인 지위까지 누리게 된다.


● "히스테리적 주체는 바로 그 존재가 근본적인 의심과 의문을 내포하는 주체이다. 그의 존재는 자신이 타자에게 있어 무엇인가에 관한 불확실성에 의해 지탱된다. 주체가 타자의 욕망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으로서 존재하는 한 히스테리적 주체는 탁월한 주체이다."(지젝)


# 2 ● 통상 지식인은 구체와 보편, 현실과 이론 사이에서 싸우는 사람이다. 지식인에게는 이미 항상 보편과 이론이 와 있기에 구체, 현실은 그런 총체화의 볼모나 알리바이일 경우가 농후하다. 지식인은 세계를 지식화하면서 상징계적 대타자, 혹은 질서를 보위한다. 지식인은 그래서 히스테리적 주체라기보다는 강박증자이기 쉬운데, 무질서한 혼돈의 세계, 작란하는 세계, 있는 그대로의 세계, 지식화에 저항하는 세계를 견딜 수 없어서 그 세계 위에 베일을 덮으려는 관성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세계를 평평하게 만드는데, 탈-감각화하는데 기여한다. 따라서 지식인이면서도 주변부적인 스탠스를 유지하려는, 구체와 현실의 다양성이나 모순 혹은 힘을 보유하려는 태도를 견지하는 이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그들은 그렇게 단지 보편도 단지 구체도 아닌 그 사이에서 어떤 유희, 어떤 실험, 어떤 삶을 모색하게 된다. '역설경영'이라든지 '기업공동체'라든지 '과정조직이론'과 같이, 경영학의 비전문가인 내가 봐도 불가능한 이념으로 보이는 '사이'를 모색해온 연구자 김상표가 "회화"를 건드리는 방식은 오랫동안 화가를 선망해온 아마추어의 꿈, 투사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 그는 회화라는 제도 안으로 들어가 또 하나의 화가로 인정받고자 하는 게 아니다. 그는 2차원의 평면 위에 탈-탈감각화된 세계를 출현시키려는, 그걸 위해 물감의 촉각적 물질성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그럼으로써 제도권 지식인 행세를 해온 자신이 배제하고 억압했던 이 세계의 '감각적 있음'에 다시 종속되려는, 말하자면 자신은 사실 주체였기에 종속이었음을 고백하면서 그 종속을 탈-종속화하려는 수행의 방편으로 회화를 사용·착취한다. 아는 주체, 즉 강박증적 주체인 그는 얼굴이 '주체성'을 드러낸다는 것을 받아들인다(그는 "히스테리와 강박증은 나의 자화상의 안과 밖이다"고 말한다). 그는 '나I'의 주체성은 "타자의 시선(욕망) 속에서 구성된 것"임을 알고 있다. '나'는 타자가/에 의해 찍힌 얼룩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우리가 정체성(동일성)으로서 알아보는 것은 잘못 보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본다는 것은 잘못 본다는 것이고, 이는 나인 타자를 안보는 것과 같은 것인데, 이러한 자아와 타자의 동시성, 혹은 중첩 혹은 타자의 선재성(先在性)을 이런 정체성의 수사 안에서 보유하려는 자, '얼굴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의심하는 자는 잘못보는 의식의 지배력을 최대한 잃어야 할 것이다. 김상표는 그러한 자기-소진, 자기-무화의 방편으로 "한 호흡에 그리기", "아무 생각이 없는 순간에 그리기"를 구사한다. 그는 칼로 긁건 막대기로 긋건 손가락과 손바닥으로 칠하건 극히 짧은 순간에 자신의 '얼굴성'을 수행한다. 그는 어쨌든 알아볼 수 있는 것, 얼굴, 자신과 자신의 가족, 혹은 자신을 투사한 장일순을 그린다. 그의 수행적 표면인 바 캔버스에서 우리는 그가 '무엇/누구'를 그렸는지를 알 수 있다.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최소한 그가 아는'사람들을 닮아있다. 그들은 김상표의 나르시스트적 자아,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존경하는 구체적 이름과 '얼굴'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동시에 그들은 그가 튜브에서 짜내고 곧장 캔버스에 바르는 색의 무차별적 혼융과 병치에 의해 해체되어 있다. 그들은 몇 번의 칠하기나 긁기, 긋기에 의해 자기-해체와 자기-구성에 포획되어 있다.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이라고 알려진 이들에게 김상표가 예의를 갖추는 방식은 그가 그들에게 덧씌운 의식적 이미지를 비우고 지우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소환하고 그들을 기괴하게, 강렬하게, 흉측하게 만듦으로써 혹여 그가 알아보고 이해하고 사랑하느라 오해하고 억압했을지 모르는 타자들을 다시 사랑하려고 한다(그는 "나약한 존재자인 나는 먼저 아내와 딸 아이에서부터 동일화하지 않고 타자를 영접하는 것을 배워가야만 한다"고 말한다). 가족만큼 이 세상에 내가 알면서 끝내 모르는 타인들이 어디 있겠는가? 사랑하고 행복하기 위해 타자의 '얼굴'(레비나스가 말하는!)을 지워야했던 그 폭력극장의 슬픔이나 고통 같은 것. 그는 자신의 자아의 폭력으로 인한 슬픔, 그와 그의 사랑하는 가족의 '행복'과 무사함이 요구한 폭력을 위로하려고, 자신의 끝 모를 슬픔을 비우려고 그린다. 그래서 그는 너무 많은 땀을 흘리고 유사 실신 상태에 이르는, 내가 자기-소진이라 불렀던 수행을 계속 이어갔다. 100호 크기의 캔버스를 한 호흡에 의한 칠하기·긁기·긋기로 채우는 것은 물리적으로나 글자그대로 고통이다. 이러한 마조히스트의 고통은 그러나 '자기'-창조의 행복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그는 의식이 개입하지 않은 채로 한 호흡에 의해 이뤄지는 이 퍼포먼스에 자신을 내맡기는 '학대'를 통해 '나르시시즘'에 빠져들었다고 고백한다. 자기 이미지와 사랑에 빠진 나르시스에게 이 세계의 차이, 모순, 역설, 틈으로 인한 히스테리적 주체의 고통(의 실존)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일순간의 행복은 곧 도래할 의식에 의해 더없는 고통으로 화하게 된다. 그는 의심하는 자의 자기-분열에 또 노출된다. 그래서 그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던 기존의 삶에서 일탈하여 새롭게 창조한 '화가되기' 조차도 주체와 동일성의 그늘에 놓여 있던 나르시스적 욕망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자책이 찾아들었다"고 한탄한다. 행복은 일순간이고 고통은 영원하다. 그는 자신이 그린 장일순이 결국 자신의 나르시시즘적 투사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의심한다―"무위당 장일순을 그리면서도 그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나의 기대를 그에게 기대어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면, 과연 나르시시즘과 타자성은 서로 분리될 수 있을까? 모든 욕망은 나르시시즘에서 출발해서 나르시시즘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지 모른다." 그는 타자의 타자성으로서의 얼굴성을 확보·획득하는 데 실패했을 수 있는 가능성을 자인한다. 따라서 이번 전시 제목 「나르시스 칸타타」는 자신의 이번 여정이 결국 동일한 것의 회귀에 먹혀버렸음을, 그럼에도 그런 실패를 고백하고 표식하는 자아의 '주권성'을 고지하는 이중적 운동을 공표한다. 그는 나르시시즘을 넘어서 절대적 타자에 이르려는 불가능한 시도에서 일시적 성공의 감각과 지속적 실패의 인식을 획득했고, 이러한 실패인지 성공인지 모르는 여정을 칸타타로서 긍정한다. "내 그림이 분리된 유한자가 절대적 타자성을 품어안고 쏟아내는 구원의 눈물방울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나르시스 칸타타'로서 음악처럼 향유되었으면 좋겠다. 나르시시즘과 절대적 타자성이 서로를 배반하지 않고 서로를 끌어안는 不二의 나르시스 칸타타." 물론 이것은 실패한 자의 문장, 예술가-되기에 실패한 지식인의 문장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나처럼 청중이 보는 데서 실패를 무대에 올린 자가 아니라 독방에서 캔버스를 놓고 자신의 지식과 나르시시트적 자아와 싸운 자의 문장이기에 체현된(embodied), 아니 물질성이 찍힌 문장이다. 그는 허약하면서도 단련된 신체, 무차별적인 수십 개의 캔버스, 되는대로 짜고 묻힌/찍은 물감, 그날그날의 슬픔과 공허와 상태, 자기자신을 포함해서 자신의 자아의 확장인 사랑하는 사람들을 섞어서 자신의 칸타타를 지휘했다. 

 

# 3 ● 김상표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내 삶의 스승"으로 모셔온 장일순을 "가장 높은 뜻을 지녔으면서도 언제나 가장 낮은 곳에 머물렀던" 분으로 묘사한다. 자신을 늘 내어준 사람 장일순을 화가-되기를 통해 반복하려는 김상표의 수행은 자아를 내어주는, 그럼으로써 타자를 품는 그리기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김상표의 회화 (재)전유는 수행, 반복, 신체성, 레비나스의 '얼굴'과 같은 키워드들을 통해 계속될 것이다. 우리와 같은 지식인의 얼굴을 한 사람들, 동시에 주변부에 머무르려는 지식인들에게 더이상 관념이나 의식의 폭정이 '없는' 사태, 사건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김상표가 평화라는 단어를 말할 때, 거기에는 굳이 자기-소진의 과정이나 매개가 없이도 일어나는 만남에의 희망이 내포되어 있을 것 같다. 분리도 의심도 차이도 건너뛰는 예술가의 평화, 사랑. 아마 이런 희망이 충족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의심의 주체에게 평화는 슬픔이나 사랑의 감정을 매개로 찍혀 있을지 모른다. 타자의 얼룩으로. ■ 양효실



Vol.20200311a | 김상표展 / KIMSANGPYO / 金相杓 / painting


NIRVANA

김상표展 / KIMSANGPYO / 金相杓 / painting 

2018_0915 ▶︎ 2018_1020

김상표_Nirvana-싱어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80716a | 김상표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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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의 존재론(얼굴성에 넣는 덧말) ● 통상 얼굴은 나의 정면, 네 눈에 나로 보이는 표피, 내 인격의 표징, 그리고 내가 너로부터 숨는 베일이다. 그래서 얼굴은 속절없이 노출된 것이고 자명하게 읽히는 것이지만, 동시에 얼굴의 가시적 형태는 비가시적 형상, 즉 가시적으로는 일그러짐이나 긁힘 혹은 짜부라짐 같은 것으로 명명될 형상을 위해서는 지워져야 하는 클리셰-이미지이다. 즉 보이는 얼굴은 안 보이는 얼굴, '진짜' 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안 보아야 하는 그러나 결국 말려 들어가서 (잘못)읽고 있게 되는 속임수, 매끄러운 이미지다. 물론 보인 얼굴만이 안 보이는 얼굴의 배경, 암시이기에 이 이중성 혹은 동시성이 시계(視界)에 동시에 기록/배치되어야 한다. 이것이 얼굴을 그리면서 지우는, 만들면서 훼손하는 예술가의 과제이다. 얼굴이 많이 보일수록 그 얼굴은 사회적 위신이나 사적 인격의 알리바이가 되어 있을 것이고 사라질수록 나의 타자성에 충실해질 것이다. 얼굴은 나를 보호하기에 나를 억압한다. 얼굴이 많을수록 나는 질식한다. 나를 알아보는 이들이 많을수록 나는 죽어간다. 얼굴은 당신이 나를 알아보고 그래서 당신이 안전해지는 당신의 일부이기에 나는 당신이 알아본 얼굴에 학대당한다(누가 내 얼굴 좀 치워줬으면!). 얼굴은 당신이 나를 통제하는, 그래서 '관계'를 이어가고 소유하는 데 필수적인 재현 이미지이다. 나의 얼굴은 내 것이 아니다. 당신이 알아보는 내게 나는 없다. 나는 당신이 알아보는 얼굴을 입고 나이지만, 그래서 그 얼굴과 나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지만 그 간극을 당신은 간과해야 한다. 얼굴은 내 쪽으로 침범한 당신의 호의, (무)관심이기에 내 얼굴은 결국 당신의 환영적 이미지이다. 나는 아버지, 어른, 교수, 남편과 같이 당신이 읽는 상징 기호나 역할이 아니다. 나는 그런 기호로 잘 불려질수록, 당신이 덜 불안할수록 내가 아니다. 내가 당신이 원하는 좋은 사람의 얼굴을 가질수록 나는 점점 나를 잃어간다. 그래서 나의 '나'나 물론 당신의 '나'도 시에 자주 등장하는 서랍이나 주머니와 같은 은유가 그렇듯이 상대가 모르는 비밀을 숨기고 있다. 그 비밀은 나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당신에게는 분노나 슬픔이겠지만, 내게는 무사한 저 이름들이 슬픔이다. 그래서 나는 내게 이름이 없었을 때, 이름이 붙지 않았을 때를 기억하고 욕망하고 그때로 돌아가려고 한다. 내가 한낱 소년이나 시시한 아이였을 때, 내가 최초의 어떤 행위들, 의미가 도착하기 전 도망가던/날라간 행위들이었을 때를 닮으려고 한다. 삶이 제스처, 즉흥, 사건만으로도 충분했을 때를 나는 반복하려고 한다. 나는 그래서 그리고 있었다. 나는 화가로서 그린 것이 아니라 행위로서, 하나의 즉흥으로서 캔버스와 물감에 몰입했다. 왜 유화였는지는 사후적으로 설명가능하다. 내가 해보지 않은 것이었고 내가 많이 봤던 것이었고 읽고 쓰는 데 능숙한 내가 해석-비평할 수 있는 대상이었고, 그만큼 내게는 가까이 있었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지지하던 행위였다. 이것은 나의 회화이다. 전혀 회화를 배우지 않았지만 회화를 두려워하지 않은 내게 회화는 내가 오랫동안 연마해온 태극권이나 검도의 자세로 다루되, 이번에는 허공이 아닌 캔버스를 상대로 이번에는 칼이 아닌 붓으로 채우면 되는 시·공간이었다. 나는 "붓으로 춤을 추는", "붓을 칼처럼 휘두르며 발작적으로 그림그리기를 하는" 사람이다. 나는 내 식의 회화를 발명했다. 나는 처음 그렸지만 나의 회화는 최초의 회화이다. 회화는 당신도 알고 있는 사회적 이름이지만 나는 그 이름을 내 식으로 최초로 채웠다. 나는 화가가 되려고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나를 수식하는 여러 이름들로도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이고, 이런 절대적 결여나 부재를 당신의 허락이나 이해를 바라지 않으면서 그러나 당신이 회화로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채우려고 했다. 누군가가 언명했듯이 나는 회화는 시각적 이미지와의 투쟁에서 획득한 형상을 위한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내가 나의 자화상을 그린 전시에 붙인 '얼굴성'이라는 이름은 회화에서 말해온 형상(성)에 대한 내 이름/버전이다. 인격적인(personal) 얼굴이 아닌 비인칭적인(impersonal) 얼굴, 신중한 의도나 계산된 구성이 개입할 수 없을 만큼의 짧은 시간에 "서예필법과 검법이 녹아든 붓질과 열손가락의 본능적인 할큄"이 캔버스에 남고, 그러면 그것은 나의 얼굴성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 내가 책임져야 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좋은' 사람이었던 것 같지만 그래서 나는 '나쁜' 나,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나, 나를 위한 나를 사랑하고 책임지려고 자화상을 그렸다고 할 수 있다. 예술은 아무 것도 아닌 인간-존재의 자유가 기록, 보존되는 장치나 의례이기에 나는 전시장에 걸려야 하는 회화의 오랜 존재방식을 따른다. 회화의 무의미는 회화의 사회적 기능 속에서만 존립한다. 얼굴의 무의미가 얼굴의 사회적 기능 속에서만 정당할 수 있듯이.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계속 물었고 나의 3회에 걸친 개인전은 그 물음의 미적 형식으로서 구현되었다. 3회 개인전 『얼굴성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을 통해 나는 인간의 역설적 상황, 즉 의미의 체제에서 살면서도 허무를 욕망하기 마련인 인간의 운명을 얼굴을 매개로 탐구했다. 행위로서의 회화와 결과로서의 회화와 나 자신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 이 셋 사이에는 분명 간극이 존재한다. 그 간극은 글을 쓰고 칼을 휘두르고 몸을 그리고 마침내 붓을 쥐어든 내가 쉬지 않고 겨냥할 '거기'이다(이 글을 쓴 '나'는 김상표가 아니다. 그러나 김상표가 화가가 아니면서 화가이듯이 나도 김상표가 아니면서 김상표일 수 있다).


김상표_Nirvana-자화상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자화상의 존재론(너바나의 나) ● Nirvana는 누군가에게는 열반과 해탈이고 누군가에게는 너바나이다. 김상표는 이번 개인전의 제목 『Nirvana』로 그 두 가지 의미를 포괄해 들였다. 직접적으로는 너바나의 「스멜스라이크틴스피릿」 유투브 공연 영상에 나오는 인물들―싱어, 드러머, 치어걸, 청소부와 같은―의 심리적, 물리적 변화, 즉 일상의 자기 자리나 배역을 충실히 따르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카오스 속 좀비나 유령처럼 변해가는 상황을 회화적으로 번역했다.


김상표_Nirvana-싱어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김상표_Nirvana-드러머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누구보다 자기자신이려고 했던 소년이었지만, 순식간에 밀어닥친 부와 명성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Doomed to Die Young'의 하나로써 '너머'로 사라진 커트 코베인의 살아생전의 허무주의나 무정부주의적 태도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물이다. 지금도 너바나의 팬들이 즐겨 찾아보는 동영상은 공연장이자 농구장인 무대가 정동(affect)의 장면으로 전치되고, 소년 소녀들이 모두 어디론가 사라진 뒤에는 청소부와 포승줄에 묶인 교장 선생만 남는다.


김상표_Nirvana-치어걸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김상표_Nirvana-싱어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젊어서 죽을 운명'인 예술가들은 어른이라는 사회적 이름을 거부하고 영원히 자기 젊음을 유지한다. 커트 코베인은 영원히 '27살'의 청년이다. 커트 코베인은 살아 생전 어떤 공연에서도 같은 모습이기를 거부했다. 독학자의 거칠고 즉흥적인 기타연주가 난무했고 목소리도 공연에 따라 제멋대로 사용했다. 자신에게 늘 타인이었던, 매번 새로 탄생했던 그가 남긴 유서의 문장, "점점 소멸되는 것보다 순식간에 타오르는 것이 낫다"는 그렇기에 '얼굴성'을 잃기를 거부한 자의 문장이다. 동일성이나 반복을 몰랐던 늘 차이로서 존립했던 커트 코베인, 즉흥과 사건으로서의 커트 코베인의 삶은 저 영상에서도 계속 증명된다. 보고 또 봐도 거기에는 계속 우리가 놀랄 장면들, 사건들이 존재한다.


김상표_Nirvana-드러머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김상표_Nirvana-교장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김상표는 이제 가족과 자기자신을 그렸던 3회까지의 개인전을 뒤로 하고, 이번에는 너바나의 공연 영상 속 등장인물들-기호들을 자기자신으로 끌어안았다. 20살의 김상표의 분신들이고 청년 김상표가 겪었던 어른들에 대한 회상과 재해석이다. 그들은 모두 김상표로 수렴한다. 이번에는 모두 그의 춤, 칼, 몸짓으로서의 열 손가락의 행위를 통해 형상화되었다. 우리의 번뇌는 내가 변별적인 하나의 고정태, 개체, 윤곽이라는 전제에서 유발된다. 번뇌로부터의 해탈은 그러므로 자아를 복수화하고 나와 타자를, 나와 이 세계를 구분불가능한 것으로 통째로 감각하는 것, 혹은 자아를 실체가 아닌 타자의 이미지로 받아들이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고 알고 있다. 영상 속 인물들이 너바나의 음악을 닮아가며 분별에서 흐름으로 넘어가듯이, 김상표는 니르바나를 욕망하는 영상 속 인간들에게서 자신을 보았고, 그럼으로써 그 이름들의 간극들을 지웠다. 허무는 충만이고 카오스는 전체이다. 김상표는 자아의 피로를 그렇게 씻고 정화된다. 음악이, 예술이 그런 의례를 책임진다. 이제 그의 자화상 연작은 나와 당신의 싸움에서 비롯되는 자아의 경계를 해체하는 쪽으로 확장되었다. 니르바나이고 너바나가 지향했던 상태이다. 물론 김상표는 그림을 그림으로써 "설명되는 부분이 있다. 따라서 그림은 설명불가능한 부분이 남는 과정"이라고 내게 말했다. 욕망이 없다면 행위는 없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욕망이 행위를 전부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내 욕망의 소멸 이후에도 남는 것, 설명불가능한 것, 놀라운 것, 어쩌면 '아름다운' 것이다. 누구보다 지적인, 직업인이 아니라 인간으로 읽고 체화하는 인간 김상표가 자신의 지성의 '실패'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자기를 내려놓는, 자기를 쉬게 하는, 자기를 모르는 타자로 인정하는 과정으로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성의 실패와 감각의'폭력'과 동물의 슬픔은 비단 김상표만이 아닌 우리 인간을 구성하는 진실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김상표_Nirvana-청소부_캔버스에 유채_60.6×72.7cm_2018


이번에 확인한 사실인데 커트 코베인의 자살 뒤에 드러머 데이브 그롤은 새로운 밴드를 만들어 지금까지도 활동하고 있다. 그는 결혼을 했고 가족과 친구들, 팬들에게 따듯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이번에 들어본 Foo Fighters의 음악은 신나고 경쾌하면서 폭발적이었다. 나는 김상표의 회화를 '이번'에 그가 꺼내든 방편으로 간주했다. 무엇으로 불려도 좋을 그것이 이번에는 회화였다고. 이름은 불려질 수 없는 것들을 가리면서 가리키는 얼굴이기에. ■ 양효실


김상표_Nirvana-싱어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불온한 자로서 NIRVANA ● "인간은 어떻게 그 절망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알 때, 절망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제 그 절망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럴 때 그의 절망적 삶은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침몰한다는 것은 언제나 사물의 근저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발터벤야민) 세속적 의미에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던 부자유한 자로서 너바나. 그들이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존재의 바닥이었을 것이다. 너바나는 그 바닥을 노래하며 불온자로서 이 세상에 왔었다.


NIRVANA와의 만남 ● 붓을 칼처럼 휘두르며 발작적으로 그림그리기를 하는 나를 발견했다. 정말로 그림그리는 태도가 매우 불량해져갔다. 일상적인 행동을 할 때조차 10대 반항아들처럼 건들건들거렸다. 그때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 동영상을 만났다. 동영상 속 너바나 그룹 멤버들의 몸짓과 표정 그리고 목소리가 나를 사로잡았다. 노래의 구절들도 내 저 밑바닥의 파토스를 자극했다. 첫 구절 '총을 장전하고', 마지막 구절 '부정, 부정, 부정, 부정', 이 두 구절이 특히 그러했다. 살아온 내내 죽음과 허무의 그림자를 안고 무의미함에 울면서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살아낼 수 없었던 나의 모습을 그 노래가 대변하는 듯했다. 너바나 그룹의 공연 모습이 이제까지의 나의 삶과 자연스레 겹쳐졌다. 너바나의 공연모습을 미친 듯이 그려댔다. 어느 날은 커트코베인이 되어 울부짖고 절규하며, 또 어느 날은 드러머가 되어 광란과 착란 속에서 그림을 그렸다. 다른 날은 치어걸이 되어 세속화된 몸짓으로 춤을 추면서, 또 다른 날은 그녀의 숨겨진 욕망을 폭발시키며 그림을 그렸다. 뒤이어 내게 폭력을 가했던 이들에 대한 분노 속에서 청소부를 그렸고, 마지막으로 위선으로 가득찼던 기성세대들에 대한 희롱으로 교장을 그렸다.


인생은 잔인하다 ● "인생은 잔인하다. 우연이 나를 여기 오게 했다. 떠나는 데는 선택을 요구한다. 결단을 미루는 주저함만이 지루하게 반복된다. 사이사이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린다. 언제나 마주하는 오늘, 벗어나려고 몸부림칠수록 생의 의지는 나를 더욱 옭아맨다. 겨울을 지낸 나목이 부끄러운 치장으로 생명주기를 연장하듯 오늘도 삶을 반복한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 살아내야 할까? 얼마나 많은 날들을 이렇게 마주해야만 하는가? 희망의 꽃을 피울 수 있을까? 희망마저 더 깊은 절망으로 나를 몰아가지 않을까? 어떻게 출렁거리는 이 원색적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자발적인 죽음, 생의 의지를 내던진 그 순간 나와 우주의 거리는 사라질까? 인생은 잔인하다." 이 글을 40대 중반에 써서 블로그에 올렸다가 "그런 글을 쓰면 엄마가 얼마나 슬퍼하겠어"라는 딸아이의 비난을 듣고 지웠었다.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너바나 그림을 그리면서 이 시를 떠올렸다.


NIRVANA와 나는 무엇이 닮았는가? ● 너바나를 위시한 펑크락 그룹은 노동자청년들의 문화를 대표한다. 펑크락 그룹은 그들의 사회경제적 조건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무너진 상태에서 그에 대한 저항을 예술적으로 표현했다. 나는 사회경제적 조건들에서는 그들과 다른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다른 측면에서 보면 닮았다. 나 또한 어린 시절과 젊은 날에 심리적 어둠과 무의미 속에서 기존의 코드화된 교육과 삶의 양식에 저항했기에. 내가 학부, 석사, 박사 과정에서 관심을 가졌던 연구주제들도 많은 부분 이러한 내 기질과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펑크락 그룹은 반미학의 미학을 목표로 삼는다. 거칠고 조잡한 음악을 연주하며 그룹멤버들을 선발할 때도 프로보다는 아마추어를 선호했다. 나도 회화를 전공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거칠고 본능적인 내지름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림과 그림 아닌 것의 경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우리 둘은 사회에 대한 저항에 바탕에 두고 반미학의 미학을 목표로 삼는다는 점에서 닮았다.


나의 NIRVANA되기 ● Smells Like Teen Spirit 동영상을 보면서 나는 너바나 공연에 서서히 감응되고 그 분위기에 전염되어 갔다. 점차로 나의 몸은 너바나 신체의 리듬과 강도와 속도에 공명하며 동기화되어졌다. 마침내 나는 너바나와 같은 감응으로 회화의 평면에서 무위의 춤을 추며 내 삶의 파토스들과 대면했었던 게 분명하다. 다시 말해 너바나 신체와 동조화된 감응으로 내 존재의 바닥, 어두운 심연 속에 있던 나의 충동들과 정념들, 그리고 끊임없이 내 자신으로 도래하는 비가시적인 삶과 소통하면서 그림을 그려냈다. '나의 비가시적 삶의 파토스'와 '나의 너바나 되기'가 서로를 포섭하면서 비로소 세계의 하나됨을 고백하고야마는 원융의 장소, 그곳이 바로 나의 회화적 평면이다.


그리기의 카오스모스 ● 세계는 카오스다. 나도 카오스다. 서로를 삼키고자 덤벼드는 카오스들 간의 싸움에서 잠시 적막이 흐르는 코스모스로 태어나지만, 늘 다시 카오스로 돌아갈 꿈을 꾸는 미완성의 코스모스일 뿐이다. 그것이 나의 그림에 담긴 이카로스의 날아오름이다. 서예필법과 검법이 녹아든 붓질과 열 손가락의 본능적인 할큄이 흩고 지나간 자리에는 원래의 모습을 상실한 형형색색의 물감덩어리가 '튀어오르기'와 '내려누르기'의 불규칙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아비규환의 전쟁터처럼 어지럽게 널려있는 마루와 골 위로 매끈한 물질덩어리가 언제든 흘러넘쳐날 것 같다. 한 장의 그림을 그리고나면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하다. 끝나지 않은...곧 다시 시작될 것 같은...긴장감 가득한 불안정한 평화.


비인칭적 그리기 ● 신체적으로 보면 분명 내가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자아 바깥의 그 무엇과 함께 그림을 그리게 되는 듯 싶다. 회화의 평면이 감당해낸 결과물에는 일상적 삶에서는 한번도 드러나지 않았던 내 몸의 리듬과 강도와 속도가 베어있다. 자아의 의식과 무의식 너머의 그 무엇, 난 감히 그것을 우주의 기억이라 부르고 싶다. 자아는 순간적으로 불러들이는 우주의 기억과의 교접을 통해 엄청난 에너지에 휩싸이고 곧이어 격렬한 그리기의 몸짓 속으로 빠져든다. 나는 비인칭적 그리기를 통해 주체를 망실한다. 그와 동시에 주체와 대상 그리고 캔버스 사이의 경계가 모호한 지점에서 새로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나도 대상도 캔버스도 그리기 과정에서 우주의 순수지속의 흐름 속으로 침수되어 늘 새로운 그림으로 솟아오른다.

무위의 춤 ● 나는 그리기 대상의 형태와 구조를 미리 확정하는 스케치를 하지 않는다. 최초의 선과 색을 칠하면서 이것과 접속하는 다른 선과 색을 찾아간다. 그리기 과정에서 특정한 선과 색은 다른 수많은 선과 색들에 열린 채로 리좀적 접속을 계속한다. 이질적인 선과 색의 리듬들에 의해 형성된 패턴이 나의 공감각과 공명하는 어느 순간 그리기를 멈춘다. 이처럼 리좀적 접속을 통해 도달하려는 목적지는 사전에 설정되어 있지 않고 과정을 통해서 늘 잠정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결국 나의 그리기는 프로그램화되고 루틴화되고 코드화된 우리의 삶에 대해, 배반하고 저항하는 유쾌한 무위의 춤이다.


NIRVANA의 역사적 현재성 ● 일찍이 암울한 미래가 온다는 것을 감지한 불안세대인 '88만원 세대'와 헬조선을 외치는 작금의 청년세대가 그 한참 이전 세대인 너바나와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그 당시 불온한 존재였던 너바나를 굳이 지금 여기에서 다시 소환함으로써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예술적 저항의 역사를 현재화하고 싶다는 욕망을 욕망해본다. 또한 존재의 바닥을 경험한 불온한 존재의 의미를 되묻고 우리 시대에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드러나지 않은 존재와 조우하기 위함이다. 너바나를 회화적으로 형상화낸 이번 실험이 작은 시작이었으면 하는 것이 스스로에 대한 바람이다. Amor Fati! ■ 김상표



Vol.20180915f | 김상표展 / KIMSANGPYO / 金相杓 / painting




존재론적 물음으로서 얼굴성 Ⅰ Faciality as an ontological question Ⅰ
김상표展 / KIMSANGPYO / 金相杓 / painting
2018_0627 ▶ 2018_0715



김상표_얼굴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초대일시 / 2018_0627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윤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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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림을 모른다. 그림은 규정지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얼굴은 더욱 그렇다. 내가 나의 얼굴을 그리는 순간 그것은 나의 얼굴이 아니다. 왜냐하면 규정되는 순간 얼굴에 대한 수많은 다른 규정성들이 빠져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얼굴이란 얼굴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다름 아니다. 물음 그 자체로서 얼굴성에 대해서 사유하고 명상한 단상들이 그림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그래서 나의 그림은 연구노트이다." (작가노트)


김상표_자화상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김상표_자화상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그림이 그리고 싶어져 잠시 화실에 다니면서 주로 정물 데생을 배웠다. 기계적 훈련을 반복시키는 화실의 교육방식이 맞지 않아 이내 그만두고 연필, 목탄, 볼펜, 유화물감, 아크릴물감, 수채화물감 등 여러 가지 재료를 가지고 혼자서 초상화를 더 그려보았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의 사진을 보고 그리다가 '나'를 그리게 되었다. 항상 자아 찾기에 목말라했던, 그리고 여전히 찾아 헤매고 있는 '나'를 그리고 싶었다. 경영학을 전공해서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늘 본질에 대한 갈증으로 철학에 매달렸지만, 그래도 해소되지 않고 가슴에 얹혀 있는 무엇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절집 언저리를 서성이며 살아온 '나', 그림을 그리면서부터 그 '나'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이런 심정을 1회 전시회 작업노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 "철학과 경영에 대한 고민을 할수록 보편적 범주들의 자아에 대한 독재에, 오히려 내 몸은 파닥거릴 뿐이었다. 모든 행위의 과정과 결과물은 내 자아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었다. 존재의 결여에 시달렸다. 어느 날 캔버스와 마주하고 나를 그리기 위해 숨가쁘게 형태를 잡고 색을 칠했다. 다음 날에도, 또 그 다음 날에도 ... 내 안에서 우글거렸던 수많은 애벌레 주체들이 하나씩 토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존재가 내 몸을 빌려 열리고 드러나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토록 채워지지 않던 결여의 공간에 드디어 충만함이 자리잡기 시작했나 보다. 점점 더 자유로워지면서 형상의 자리에 색들이 가득 채워졌다. 자아 찾기의 도정에서 비로소 벗어나는 순간,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내 모습을 아내가 발견했다. 아름다움의 구원이 내게도 찾아온 모양이다." (작가노트)



김상표_얼굴_캔버스에 유채_40.9×31.8cm_2018


김상표_얼굴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김상표_얼굴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1회 개인전이 끝나고 반야심경을 행서로 쓰며 지내다가 얼굴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 또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란 화두에 다름 아니지 않을까 생각하며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 색즉시공 공즉시색. 얼굴 형상을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그리다가 추상으로 향하는 해체 욕구가 처음 발동했을 때는 붓으로 내 몸을 찢어 발기는 느낌이었다. 심지어는 마음까지 아프고 지성도 무력해지는 듯했다. 다시 구체적인 형상이 그림에 나타났을 때는 하나의 규정성만으로 특정되는 얼굴이 진짜 얼굴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 같은 나선형 궤적의 마법에 걸려들어 양 극단을 오가며 저 멀리 발산되어 갔다.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고, 또 있음이기도 하고 없음이기도 하다면, 없음 가운데 있고, 있음 가운데 없는 것, 그것이 얼굴이 아닐까? 진공묘유(眞空妙有).



김상표_자화상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김상표_얼굴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내 얼굴을 6호 크기의 캔버스에 담아내다가 점점 답답함을 느꼈다. 20호 캔버스를 상대하면서 내 안의 내가 나를 더욱 닦아세웠다. 이제 나는 또 다른 나의 포로가 되어 몰아 상태의 춤꾼이 되었다. ● "작업실 문을 들어서는 순간 숨이 차다. 어쩔 땐 양쪽 양말을 찾는 시간이 급해 한쪽 발에만 양말을 신은 채 정신 없이 캔버스에 색을 칠하고 형상을 잡아간다. 떠오르는 것을 시간을 두고 정리해 그림으로 구체화하기 보다는 느낌이 시키는 대로 손을 움직인다. 느낌의 흐름을 방해할까 봐 팔레트에 물감을 짜는 시간조차 아깝다. 작업이 심화되어 갈수록 너무 급해져 왼손으로 물감을 짜고 그것을 바로 붓에 찍어서 캔버스에 바른다. 그래서 의도하지 않았지만 물감이 지나치게 두껍게 발리거나 덩어리가 그대로 캔버스에 남아 있는 경우가 빈번하다. 날 것의 내 감각이 형상에 그대로 생생하게 묻어있다. 평소에 그토록 이성으로 무장해 있는 내가, 이성을 무력화하고 싶은 욕구에 강박적으로 집착한 듯 틈을 주지 않고 느끼는 대로 즉발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붓을 휘두른다. 붉은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작가노트)



김상표_얼굴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그린다는 행위는 새로운 물음이 일어나고 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의 반복에 다름 아니었다. 물음에 대해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그것이 비록 즉발적이기는 했지만 전 우주의 모든 여건들을 나의 주체적 지향으로 포섭하며 새로운 창조적 합생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합생 과정을 거쳐 만족된 물음은 완성된 작품으로 또 다른 물음을 불러왔다. 그때그때 새로운 물음에 응답하며 모험에 나섰던 아름다운 시간들, 거기에는 청춘의 꿈과 비극의 결실이 함께 담겨있다. 그 시간들을 견디며 사건의 흔적으로 작품들이 연구노트로 남았다. ● 차창 밖에는 4월의 봄비가 내린다. 생명이 약동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림을 그릴 때면 어김없이 잠자고 있던 수많은 나의 애벌레 주체들이 깨어나서 뛰쳐나왔다. 혼란스럽고 무질서하며 종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가 휩쓸고 지나간 뒤에 평화가 찾아오고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그리는 것이 행복하다. ■ 김상표



Vol.20180627a | 김상표展 / KIMSANGPYO / 金相杓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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