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적 물음으로서 얼굴성 Ⅰ Faciality as an ontological question Ⅰ
김상표展 / KIMSANGPYO / 金相杓 / painting
2018_0627 ▶ 2018_0715



김상표_얼굴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초대일시 / 2018_0627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윤갤러리

YOON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10길 7

Tel. +82.(0)2.738.1144

blog.naver.com/yoon_gallery



"나는 그림을 모른다. 그림은 규정지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얼굴은 더욱 그렇다. 내가 나의 얼굴을 그리는 순간 그것은 나의 얼굴이 아니다. 왜냐하면 규정되는 순간 얼굴에 대한 수많은 다른 규정성들이 빠져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얼굴이란 얼굴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다름 아니다. 물음 그 자체로서 얼굴성에 대해서 사유하고 명상한 단상들이 그림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그래서 나의 그림은 연구노트이다." (작가노트)


김상표_자화상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김상표_자화상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그림이 그리고 싶어져 잠시 화실에 다니면서 주로 정물 데생을 배웠다. 기계적 훈련을 반복시키는 화실의 교육방식이 맞지 않아 이내 그만두고 연필, 목탄, 볼펜, 유화물감, 아크릴물감, 수채화물감 등 여러 가지 재료를 가지고 혼자서 초상화를 더 그려보았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의 사진을 보고 그리다가 '나'를 그리게 되었다. 항상 자아 찾기에 목말라했던, 그리고 여전히 찾아 헤매고 있는 '나'를 그리고 싶었다. 경영학을 전공해서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늘 본질에 대한 갈증으로 철학에 매달렸지만, 그래도 해소되지 않고 가슴에 얹혀 있는 무엇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절집 언저리를 서성이며 살아온 '나', 그림을 그리면서부터 그 '나'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이런 심정을 1회 전시회 작업노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 "철학과 경영에 대한 고민을 할수록 보편적 범주들의 자아에 대한 독재에, 오히려 내 몸은 파닥거릴 뿐이었다. 모든 행위의 과정과 결과물은 내 자아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었다. 존재의 결여에 시달렸다. 어느 날 캔버스와 마주하고 나를 그리기 위해 숨가쁘게 형태를 잡고 색을 칠했다. 다음 날에도, 또 그 다음 날에도 ... 내 안에서 우글거렸던 수많은 애벌레 주체들이 하나씩 토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존재가 내 몸을 빌려 열리고 드러나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토록 채워지지 않던 결여의 공간에 드디어 충만함이 자리잡기 시작했나 보다. 점점 더 자유로워지면서 형상의 자리에 색들이 가득 채워졌다. 자아 찾기의 도정에서 비로소 벗어나는 순간,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내 모습을 아내가 발견했다. 아름다움의 구원이 내게도 찾아온 모양이다." (작가노트)



김상표_얼굴_캔버스에 유채_40.9×31.8cm_2018


김상표_얼굴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김상표_얼굴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1회 개인전이 끝나고 반야심경을 행서로 쓰며 지내다가 얼굴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 또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란 화두에 다름 아니지 않을까 생각하며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 색즉시공 공즉시색. 얼굴 형상을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그리다가 추상으로 향하는 해체 욕구가 처음 발동했을 때는 붓으로 내 몸을 찢어 발기는 느낌이었다. 심지어는 마음까지 아프고 지성도 무력해지는 듯했다. 다시 구체적인 형상이 그림에 나타났을 때는 하나의 규정성만으로 특정되는 얼굴이 진짜 얼굴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 같은 나선형 궤적의 마법에 걸려들어 양 극단을 오가며 저 멀리 발산되어 갔다.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고, 또 있음이기도 하고 없음이기도 하다면, 없음 가운데 있고, 있음 가운데 없는 것, 그것이 얼굴이 아닐까? 진공묘유(眞空妙有).



김상표_자화상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김상표_얼굴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내 얼굴을 6호 크기의 캔버스에 담아내다가 점점 답답함을 느꼈다. 20호 캔버스를 상대하면서 내 안의 내가 나를 더욱 닦아세웠다. 이제 나는 또 다른 나의 포로가 되어 몰아 상태의 춤꾼이 되었다. ● "작업실 문을 들어서는 순간 숨이 차다. 어쩔 땐 양쪽 양말을 찾는 시간이 급해 한쪽 발에만 양말을 신은 채 정신 없이 캔버스에 색을 칠하고 형상을 잡아간다. 떠오르는 것을 시간을 두고 정리해 그림으로 구체화하기 보다는 느낌이 시키는 대로 손을 움직인다. 느낌의 흐름을 방해할까 봐 팔레트에 물감을 짜는 시간조차 아깝다. 작업이 심화되어 갈수록 너무 급해져 왼손으로 물감을 짜고 그것을 바로 붓에 찍어서 캔버스에 바른다. 그래서 의도하지 않았지만 물감이 지나치게 두껍게 발리거나 덩어리가 그대로 캔버스에 남아 있는 경우가 빈번하다. 날 것의 내 감각이 형상에 그대로 생생하게 묻어있다. 평소에 그토록 이성으로 무장해 있는 내가, 이성을 무력화하고 싶은 욕구에 강박적으로 집착한 듯 틈을 주지 않고 느끼는 대로 즉발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붓을 휘두른다. 붉은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작가노트)



김상표_얼굴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그린다는 행위는 새로운 물음이 일어나고 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의 반복에 다름 아니었다. 물음에 대해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그것이 비록 즉발적이기는 했지만 전 우주의 모든 여건들을 나의 주체적 지향으로 포섭하며 새로운 창조적 합생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합생 과정을 거쳐 만족된 물음은 완성된 작품으로 또 다른 물음을 불러왔다. 그때그때 새로운 물음에 응답하며 모험에 나섰던 아름다운 시간들, 거기에는 청춘의 꿈과 비극의 결실이 함께 담겨있다. 그 시간들을 견디며 사건의 흔적으로 작품들이 연구노트로 남았다. ● 차창 밖에는 4월의 봄비가 내린다. 생명이 약동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림을 그릴 때면 어김없이 잠자고 있던 수많은 나의 애벌레 주체들이 깨어나서 뛰쳐나왔다. 혼란스럽고 무질서하며 종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가 휩쓸고 지나간 뒤에 평화가 찾아오고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그리는 것이 행복하다. ■ 김상표



Vol.20180627a | 김상표展 / KIMSANGPYO / 金相杓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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