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부산 구포장


 

부산 최대 5일장, ‘구포국수’ ·가축시장 유명
만세운동·한국전쟁 추억 ‘오롯’

 





장터에서 봄소식을 전하는 것은 봄꽃이 아니라 봄나물이다. 겨우내 얼어있던 땅을 작디작은 새싹으로 비집고 나와 찬바람을 견뎌낸 것들이다. 달래와 냉이를 비롯한 온갖 봄나물이 난장에서 얼굴을 내밀며 웃고 있다.

 선산을 가꾸며 산나물과 약초를 캐는 박기성 할아버지(76)는 장에 나와 이것저것 파는 것도 좋지만 사람들 만나는 것이 더 좋다고 한다. “이기 사는 재미 아이가. 장에 나오마 살맛이 난다카이.” 박씨 할아버지는 “자연이 보물창고”라며 손수 캔 칡 한쪽을 내준다.

 우리 조상들은 봄이 오면 매운맛이 나는 갖가지 나물을 희고 검고 노랗고 붉고 파란 다섯 가지 색으로 맞춰 오신채(五辛菜·매운맛이 나는 다섯 가지 채소로 만든 생채 요리)를 해 먹었다고 한다. 봄을 맞은 구포장은 그 오신채를 통째로 차려놓은 듯 날것 그대로의 싱싱한 봄나물 냄새가 가득하다.

 1919년 3월29일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구포장(부산 북구 구포동)은 1972년부터 상설시장이 됐다. 하지만 지금도 오일장의 명성이 더 높아 3일과 8일로 끝나는 장날에는 계절 따라 나오는 온갖 농수산물과 이를 사고파는 사람들로 걸어 다니기도 힘들 정도다.

 장에 들어서면 가축 골목을 시작으로 채소·과일 골목, 수산물 골목, 의류 골목, 약재 골목, 먹거리 골목이 있을 뿐 아니라 주택을 낀 골목에는 농산물 보따리를 갖고 나온 할머니들이 난전을 펼쳐놓아 과거와 현재가 마주 서 있는 것 같다. 구포가 낙동강 입구의 요지에 자리해 예부터 각종 물산의 집산지였기에, 지금도 장날이면 김해·양산·밀양·창원뿐 아니라 경북·전남 지역에서도 숱한 장돌뱅이들이 몰려온다.

 구포장은 조선 시대에는 이 일대 물류의 중심지였다. 장이 처음 들어선 17세기에는 곡물이나 가축, 소금, 수공업품 등을 물물교환으로 거래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는 피란민들이 장터에서 싼값에 먹을 수 있었던 ‘구포국수’가 유명해졌다. 구포국수는 그 시절 추억이 가미된 맛이라고 한다. 하기야 어떤 이는 ‘맛의 절반은 추억’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주택가 골목길에 선 난전으로 들어서자 양산시 물금읍에서 온 최해식 할아버지(84)가 직접 농사지은 연근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팔고 있었다.

 “이거 무마(먹으면) 치매도 안 걸리고 머리도 조아집니더. 연근 좀 사 가이소.”

최씨 할아버지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연근 자랑에 열을 올린다. 젊었을 때는 아는 사람 만날까 봐 숨고 싶을 때가 많았다는 최씨 할아버지. 지금은 천원짜리 하나를 팔더라도 진심을 다한다며, 그런 마음으로 정직하게 장사하다 보니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며 웃는다. 그러면서 연근을 사 가는 강씨 할머니(76) 봉지에 잘생긴 놈을 하나 골라 덤이라며 넣어준다. 요즘 제철인 연근은 비타민C와 비타민B가 많아 피부미용과 해독에 좋단다.

 구포장은 부산에서 가장 큰 장이다. 매년 10월 말이면 ‘정이 있는 구포시장 장터축제’도 열린다. 주택가 골목에서 신문지 한 장 깔고 난전을 펼치고 있는 할머니들 앞은 봄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북적거려, 사람 사는 냄새와 더불어 따뜻한 정이 장터에 가득하다. 가장 유명한 가축전에서는 삶과 죽음이 한자리에 놓여있는 것도 더러 볼 수 있다. 연신 죽어가는 가축의 속내야 어찌 알까마는 삶의 무상이 느껴지는, 조금은 스산한 풍경이다.

 42년째 떡을 팔고 있는 주씨 할머니(81) 쟁반 위에는 ‘천원’이라는 굵은 글씨가 떡과 함께 얌전히 앉아 있다. 떡을 참 잘 썬다는 말에 할머니는 “한석봉 엄마가 살아 와도 내보다는 못할 끼다”라며 옛날에 장바닥에서 불렀던 노래를 들려준다.

 “낙동강 칠백리에 배다리 놓아놓고 물결 따라 흐르는 행력진 돛단배에 봄바람 살랑살랑 휘날리는 옷자락 구포장 선창가에 갈매기도 춤추네.”

 구포장 외에 부산에서 열리는 오일장은 오시게장·하단장·월내장(2·7일), 사덕장·녹산장(1·6일), 덕두장·좌천장(4·9일), 송정장(5·10일) 등이 있다.

 

                                         구한말 동래읍내장이 사람들로 가득찬 모습. 부산박물관 제공


- 1682년 조선정부 '감동창' 설립
- 세곡 보관해 물류 집산지 되고
- 육해로 수송 유리 조건 힘입어
- 상인과 배 몰려오며 시장 발달

- 배고픈 각설이들도 기웃기웃
- 타령으로 흥겨움 만들면
- 상인들 곡물 한 움큼 주거나
- 구포국수 한 그릇 말아줘

- 1932년 강변서 現 장소 이전
- 야시장 개설로 큰 장터 발전
- 이윤 안따지고 주는 덤 등
- 훈훈한 인심 아직도 남아

■전통과 현대가 조화된 구포시장

부산에는 시장이 '천지삐까리'다. 비릿한 내음이 물씬한 자갈치시장부터 새로운 밤의 명소로 떠오른 부평시장까지 부산은 시장의 바다다. 요새 화두가 전통시장이다. 거대 자본으로 무장한 대형마트에 맞서 전통시장을 살리자는 운동이 부산에서도 한창이다.

그런데 전통시장은 단지 상품과 화폐가 교환되는 경제적 장소가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이 교류하는 사회적 장소이자 놀이와 예술이 펼쳐지는 문화적 장터였다. 이는 전통시장이 거대 자본의 밀림을 헤쳐나가기 위해 반드시 되새김해야 할 교훈이다. 아울러 소비자를 위해 전통시장의 현대적 변용과 젊은 감각을 갖추는 일도 필요하지 않을까. 상설시장과 오일장을 겸하는 구포시장은 현대와 전통이 잘 어우러져 본보기가 될 만한 장터이다.

■각설이 장타령에 실린 구포장



상설시장과 오일장을 겸하는 구포시장은 현대와 전통이 잘 어우러진 장터다.
오랫동안 구포에서는 오일장이 열렸다. 닷새에 한 번씩, 즉 3일과 8일에 열리는 구포장을 찾는 사람은 장돌뱅이뿐만이 아니었다. 남루한 옷차림에 바가지와 숟가락을 들고 구포장에 온 그들은 바로 부산의 각설이다. 각설이는 '거지' 혹은 '동냥아치'라 부르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신 예인으로서 자부심이 있다. 그들은 동냥하면서도 각설이 타령을 불러 시장을 흥겹게 할 수 있었다. '각설이 떼에서는 장타령밖에 나올 것이 없다'는 속담은 각설이를 하찮은 존재로 보면서도 각설이의 정체성이 장타령에 있음을 일러준다.

장타령은 "얼씨구나 잘한다, 품바나 잘한다"로 시작하는 각설이 타령 중의 일부이다. 이 장타령에는 내로라하는 부산의 전통시장이 등장한다. 각설이가 부른 장타령에는 부산 오일장의 특징이 잘 담겨있다.

"샛바람 반지 하단장 엉덩이가 시러버서 못 보고, 골목골목 부산장 길 못 찾아 못 보고, 꾸벅꾸벅 구포장 허리가 아파 못 오고, 고개 넘어 동래장 다리가 아파 못 보고…."

부산의 여러 시장 중에서 구포장이 최고였는지 끝은 이렇게 맺는다.

"이장 저장 못 보고 장타령만 하는구나, 품 품 각설아 이장저장 다 다녀도, 우리 구포장이 제일일세."

■부산의 오일장을 떠도는 각설이들

시장에 못 오고 못 본다는 각설이의 타령은 믿을 게 못 되는 역설이다. 언제나 오일장과 잔칫집을 기웃거리는 게 그들의 생리이기 때문이다.

장타령에는 부산 각설이들이 찾아가는 시장의 노정이 잘 드러나 있다. 그들은 엉덩이가 시리도록 바람 찬 하단장을 거쳐, 행상과 좌판으로 뒤범벅된 복잡한 부산장을 통과했다. 부산장에서 구포까지 제법 먼 길이므로 꾸벅꾸벅 졸음이 오고, 짐 때문에 허리도 아팠지만, 구포장을 놓칠 수 없었다. 다시 만덕고개를 넘어 동래장에 가는 노정은 험하디험한 길로 팍팍한 발병쯤은 견뎌야 했다.

이처럼 각설이들이 유명한 시장을 돌아다니는 이유는 오일장 체계가 구축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만 하더라도 지방의 향시(鄕市)가 오일 간격으로 서지 않았다. 중기 이후로 장시가 많이 늘어나면서 서로 개시 일자가 겹치지 않도록 오일 주기를 갖게 되었고, 서로 30~40리 정도의 거리를 두게 되었다. 17세기 이후에는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과 인구의 증가로 시장이 1000곳까지 늘었으며, 우리나라 전역에 오일장 체계가 잡혔다.

부산 지역에서는 동래 읍내장을 비롯해 부산장, 구포장, 하단장, 좌수영장, 독지장 등이 대표적 오일장으로 자리 잡았다. 오일장을 따라 움직이는 보부상들의 상업 관행과 각설이들의 걸립 풍속도 이렇게 생겨났다.

■구포는 포구다

구포는 배가 드나드는 포구였다. 구포 나루터에는 물건을 선적한 상인들의 배들이 모여들었다. 그 시절, 보부상들이 불렀다는 '구포 선창노래'가 돛단배에 실려 구포 나루터까지 흘러왔다.

"낙동강 칠백리 배다리 놓아 놓고, 봄바람 살랑살랑 휘날리는 옷자락, 물결따라 흐르는 행렬 진 돛단배에, 구포장 선창가엔 갈매기만 춤추네."

조선시대 구포는 물류의 중심지였다. 1682년 조선 정부가 세곡을 보관하고 수송하기 위한 창고를 구포에 세우자 이곳은 곧 물류를 집산하는 근거지가 됐다. 이 창고를 '감동창(甘東倉)' 혹은 '남창(南倉)'이라 했다. 혹은 전세(田稅), 대동미, 군포 등 세 가지 조세를 징수하는 곳이라 하여 '삼세조창'이라 불렀다. 조선의 재정과 군정에 관한 책인 '만기요람(萬機要覽)'에서는 "감동창은 양산에 있으니 본래 통영과 수영, 각 진포(鎭浦)의 사포량(射砲糧)을 위하여 설치한 것"이라고 했다. 사포량은 수군 진영에서 근무하는 사수와 포수에게 나눠주는 식량이다. 감동창에 모인 세곡은 경상도 해안가의 수군에게 지급되는 봉급으로 주로 쓰였다.


낙동강 하류에 위치한 구포는 양산과 동래, 김해에 이르는 교통의 결절점이자 남해로 쉽게 다다를 수 있는 수운의 시발점이었다. 이런 지리적 조건으로 구포에 감동창을 세웠다. 창고가 들어서고 뱃길이 열리자 구포에는 상인과 배들이 몰려들었으며, 시장이 크게 발달할 수 있었다.

■구포장터, 구시장에서 신시장으로

조선시대 구포장터는 바로 남창 주변 강변에서 시작돼 안쪽 동네의 큰 마당과 골목까지 이어졌다. 강변에는 생선전과 젓갈전이 있었고, 안쪽에는 짚신전, 포목전, 잡화전을 비롯해 우시장이 있었다. 이 장터에서는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1932년 구포장터는 현재 덕천역 건너편으로 옮겨왔다. 당시 구포 면장이던 장익원이 저습지를 매립한 뒤 공설시장 만드는 일을 주도했다. 장터의 이전으로 명암이 엇갈렸다. 구시장 부근 상권은 몰락했고, 평당 20원씩 하던 땅값이 1원 밑으로 폭락했다. 신시장 일대 땅값은 수십 배 폭등했다. 구포 신시장 상인들은 시장번영회를 조직하고 시장 발전을 모색했다. 이때 신시장 홍보 이벤트가 야시장 개장이다. 1934년 구포 신시장 상인들은 경부선 선로 부근에서 장터까지 70여 개 전기등을 설치하고 야시장을 개설해 손님을 끌어모았다. 구포 신시장은 일대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발전했다.

40여 년이 지난 1972년, 구포시장 상인들은 상설시장을 개설하고 콘크리트 건물을 세웠다. 당시에는 생선을 취급하는 선어구와 곡물을 취급하는 곡물구 등 2개 구역으로 나뉘었으며 점포 수는 100여 개였다.

현재 구포시장은 750여 개 점포가 있으며, 오일 장날에는 1500여 개로 늘어난다. 하루 5만여 명의 손님이 찾는다.

■삶의 희망을 주는 구포장터




어려운 일에 부딪혀 절망할 때면 장날에 맞춰 구포시장에 가보라. 구포시장에는 없는 것이 없다. 많은 물건 속에서 삶의 희망도 행복도 찾을 수 있다. 구포시장은 잡화, 야채, 과일, 생선을 파는 구포시장길 외에도 약초거리, 야채거리, 패션거리, 묵자거리, 가축거리 등 10개의 거리로 나뉘어 있다. 이 거리마다 취급하는 상품이 다르다.

구포장터에서는 흥정과 덤도 볼 수 있다. 상인과 손님이 흥정하는 한편으로 이윤을 따지지 않고 모른 척 얹어주는 덤도 있다. 장터의 훈훈한 인심은 팍팍하고 어려운 삶까지 따뜻하게 해준다. 배고픈 각설이들이 구포시장을 비롯해 부산의 오일장을 떠도는 이유이다. '일자나 한자나 들구나 보니' 하고 각설이 타령을 부르면 곡물 한 움큼을 주는 싸전 상인도, 구포국수 한 그릇을 말아주는 국숫집 주인도 있었다. 이 뜨거운 정은 부산의 장터를 다시 찾게 하는 희망이 아니었을까.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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