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에 관한 보고서 2-산업유산 풍경

김인재/ KIMINJAE / 金仁在 / photography

2023_0801 2023_0815

김인재_문경 쌍용양회_피그먼트 프린트_40×50cm_202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 ,공휴일_11:00am~06:00pm

 

갤러리 브레송

GALLERY BRESSON

서울 중구 퇴계로 163

(충무로252-6번지) 고려빌딩 B1

Tel. +82.(0)2.2269.2613

gallerybresson.com

cafe.daum.net/gallerybresson

 

김인재, 굴뚝에 관한 보고서》 ● 어떤 것을 기록한다는 것은 때로는 사회과학의 일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문학의 일이기도 하다. 기록이라는 것은 사실을 그대로 남기는 의미도 있지만, 기록자의 시선을 배제할 수 없고, 그 시선에서 자신의 감정을 전적으로 소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에 의해 남겨진 기록을 읽는 것은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고, 그 해석 작업의 가장 우선적인 일은 그 기록을 남긴 사람의 시선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는 왜 이렇게 기록하였을까? 기록을 남긴 당시의 사회적 위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성장 과정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등이 의문을 풀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지점이다. 그런데 그 기록이 글이 아닌 사진 이미지로 남겨졌다면, 우리는 한 단계 더 깊은 의문을 가져야 한다. 그 의문은 사진의 생성 원리에서부터 찾아야 한다.

 

김인재_문경 쌍용양회_피그먼트 프린트_40×50cm_2021

사진 이미지를 만들 때 사진가는 그 과정에 직접 개입할 수 없다. 그래서 그 결과물인 사진 이미지는 독자적으로 아무 말을 하지 못한다. 사진은 과학의 산물인데도 동영상과는 달리 그 맥락이 단절 혹은 소거되어 있고, 그래서, 그 사이 사이를 독자의 해석으로 메꿔야 한다. 결국, 사진은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할 수 없다. 사진을 찍고, 독해하고, 감상하고, 전시하는 등의 여러 관련 행위의 중심에 인문학이 서 있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록자의 시선이 아닌, 기록 자체가 뭘 말하는지부터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김인재의 굴뚝에 관한 보고서라는 하나의 기록을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우선, 그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사진가 김인재는 굴뚝에 관한 보고서를 통해 어떤 것을 말하려 하는가? 그의 언어는 다변인가, 눌변인가, 웅변인가? 그는 독자가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는가 아니면 스스로 그 여지를 차단했는가? 사진은 모사에서 출발하지만, 재현함으로써 완성된다. 물리적 실재와 인간의 창의성이 만나서 이루어진 것이다. , 자연스러운 표현이 아닌 인간의 의지가 반영되는 재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진이 그림이나 글과 같이 창작의 가치가 확실한 것은 아니다. 사진을 느끼거나 읽거나 이해하는 방식이 미술의 미학으로부터 철저히 독립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게 현재의 위치다. 그래서 사진은 여전히 미술에 대한 강박증을 앓는다. 그래서 그림이 갖는 미학적 기준에 따라 한 장의 '' 찍은 사진 담론에 혹하는 것이고, 천편일률적으로 '빛이 좋은 시각''좋은 포인트'에 매달리는 것이다. 결국, 그러다 보니 사진은 소재가 다를 뿐이지, 그 재현된 것은 다분히 천편일률적이고, 독창성이라 것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김인재_연천 신중앙요업_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2021

그렇다면, 사진가 김인재는 무슨 사진을 어떻게 찍었을까? 그 작업 중에서 김인재는 시각의 연속과 단절 사이에서 일어난 변증법적 사건을 염두에 둔다. 사진을 찍는다는 일은 보는 일이고, 보는 일은 바라봄과 해석함이 연속되면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를 사진가 김인재는 작가 노트를 통해 상상이 현실을 창조한다는 것이라 말한다. 그가 지난 2년간 바라보는 대상으로 삼은 건 '근대산업문화유산'이다. 그는 '굴뚝'으로 상징되는 근대의 유산을 바라보았고, 그것을 자신의 상상으로 해석하여, 어떤 현실을 창조하려 한다. 굴뚝으로 상징된 그 흘러간 시간의 오브제를 바라보는 일이란, 누구나 보는 어떤 분명한 객관성을 가지지 않는다. ()이나 학문의 언어는 그것을 근대문화유산으로 일반화시키지만, 사진가는 그런 획일의 언어로 규정하려 하지 않는다. '산업유산(industrial heritage)'이라는 용어로 치환하여 사진으로 재현하는 것은 그 언어가 담는 품이 너무 좁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관이나 학문의 언어가 담지 못하는 어떤 상상의 세계를 사진가가 끄집어내고 독자가 그것을 자신 개인만의 기억과 이야기로 창조하였으면 하는 것이다.

 

김인재_연천 신중앙요업_피그먼트 프린트_40×50cm_2021

김인재 작업의 소재인 '근대산업문화유산'은 다른 말로 하면, '문명'이다. 그런데 그 문명이란 이분법의 소산이다. 어떤 것이 문명이면 그 안에 포함되지 않은 게 있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 그 문명의 이면에는 야만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문명과 야만을 경계 짓는 게 보는 이의 시각이다. 김인재는 부지불식간에 이분법 혹은 그에 기초하여 역사를 바라보는 과학적 혹은 진보적 시각에 관심을 둠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나는 그가 그 진보 담론에 비판적인지 우호적인지까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는 그 문명과 문화유산의 변주에 관심이 많음을 알 뿐이다. 그 이분법에 따른 존재론적인 의미가 사진술과 닮았다. 정해진 프레임에 들어가 있으면 이미지로 생성되는 것이 사진인데, 그 존재 여부는 철저히 사진가의 시각에 따라 달려 있다. 그 프레임 안에 들어가 있지 않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결국 배제되어 버림으로써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버린다. 결국 문명과 사진이란 결국 시각의 문제다. 그렇다면 그 이분법의 시각마저 벗어 던져버릴 수 있을까? 그것은 학문으로는 불가하다. 오로지 감성으로 할 수 있을 뿐이다. 사진은 적어도 절반 정도는 감성이니 사진가들이 각자 보는 문명의 존재들을 한 곳에 묶어 놓고 보면 문명에 대한 전혀 새로운 것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분법적이지도 않고, 우와 열도 없는, 생성과 소멸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어떤 운동과 같은 것이다.

 

김인재_예산 충남방직_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2021

어떤 장소와 거기에 있는 오브제가 산업유산이라고 규정하고 전하고자 하는 일은 기록 차원의 일이다. 그 기록을 영상(image)로 남기려면 아무래도 동영상이 더 효율적이다. 그러면 당신은 왜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가? 굳이 맥락이 소거되고, 상황이 은닉되고, 어떤 부분을 배제하면서 네모난 박스 안에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규격화하는 사진 행위를 한다면, 당신은 이미 기록을 넘어 해석의 세계로 들어가 있다고 본다. 이 대목에서 사진가 김인재는 매우 적극적인 해석의 지평 안으로 들어간다. 대상을 과학과 객관으로 범주화하여 그 안에서 어떤 분류와 분석이라는 과학의 일에 머무르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분류를 넘어 섞임의 세계를, 보이는 외형을 넘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분석을 넘어 해석을 향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굴뚝과 공장이 있지만, 그것들과 함께 낡고 손때 묻은 기계, 막힌 벽, 깨진 유리창 그리고 사용자와 노동자를 옭아맨 '태극기' 액자가 있다. 사람은 세월의 무게 바깥으로 다 사라져, 카메라로는 담아내지 못하였지만, 그가 담은 그 부재 안에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엄연히 존재한다. 그래서 김인재의 '굴뚝에 관한 보고서'는 기록을 넘어, 소재주의를 넘어, 기억으로 쓰는 사라져 버린 사람들의 역사를 재구성한 것이다.

 

김인재, 춘천 육림연탄 공장_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2021

카메라라는 기계로 대상을 재현하는 일이 기록을 넘어, 해석으로 가는 것은 그 대상이라는 것 자체가 입체적이고 맥락적인데, 그것을 한 평면의 이미지로 고착화해 버리는 무모함을 거부하는 것이다. 무엇이든 대상이라는 것은 인간의 어떤 시공간에서 행위 하는 속에 존재하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그것이 품는 매우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들이 켜켜이 쌓이는 것인데, 그래서 애매모호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막상 이미지로 드러나는 것은, '굴뚝'으로 대표한 지표가 주를 이루고, 간간이 그 시기의 공간이 재현된다. 다양한 형태로 재현되지만 '굴뚝'이라는 이미지로 대변할 수 있으니, 하나의 표상으로서 '굴뚝'은 탁월하다. 그런데, '굴뚝'으로 단순화한 지표는 당시 그것을 둘러싸고 벌인 사람들의 여러 행위와 그 여러 행위 속에서 차마 드러내지 못하는 여러 이야기들을 우리의 기억 속에서 끌어내지는 못하게 한다. '굴뚝'이라는 지표가 너무 문화유산이라는 문명적 이미지가 강하고 그 굴뚝 주변의 여러 표상된 지표도 거의 성격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김인재, 조치원 한림제지_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2021

사진가 김인재는 '굴뚝'이 담지 못하는 그 잡다한 이야기를 담고자 한다. 그래서 그것을 상상 속으로 연결하고, 그것을 뭔가를 창조하는 일로 연결하고자 한다. 이는 사진가가 벗어날 수 없는 커뮤니케이션의 세계다. 메타(meta)로서의 커뮤니케이션 말이다. 뭔가 분화되지 않는, 규정할 수 없고, 정돈할 수 없는 원초적 세계다. 광주 전남방직과 일신방직 공장, 목포 조선내화 벽돌공장, 문경 쌍용양회 공장, 서천 장항 제련소의 사택, 수원 영신연와 벽돌공장, 연천 신중앙요업 전곡공장, 예산 충남방직 공장, 오산 계성제지 공장, 의성 성광 성냥공장, 전주 쏘렉스 스폐공장, 조치원 한림제지 폐공장, 춘천 육림연탄 공장 ... 이미지에 달린 텍스트, 그 여러 고유명사가 이미지들 사이에서 단절된 역사의 기억을 메꿔줄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사진들에는 텍스트가 들어가야 한다. 이 공장들이 지내온 영욕의 시간의 숫자도 기재해야 한다. 짧고 굵게. 그 숫자들 속에서 우리는 그 '문명화'를 둘러싼 기억을 되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고유명사와 숫자로 된 캡션은 단지 역사적 기록성을 담보하는 것이라서 아니고, 그것이 얽힌 우리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김인재, 의성 성광성냥 공장_피그먼트 프린트_40×50cm_2021

기억이란, 대상이란 그 본질이 무엇이든지, 대상을 대하는 사람 앞에 나타날 때는 그 대상이 눔에 의해 다양한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그 대상이 자신의 과거를 공유하는 시간의 축적물이면, 기억의 서사와 흘러가 버린 시간의 슬픔을 자아낼 것이고, 자신이 믿는 어떤 신격체의 상()이라면 존귀와 숭례(崇禮)의 현현(顯現)으로 다가서게 할 것이고, 그래서 초월의 소통을 이루게 할 것이며, 그 대상이 자신과 별다른 관계를 갖지 못하는 존재라면, 그저 그렇게 그냥 무의미하게 지나쳐버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사진가 김인재가 재현하는 저 '굴뚝'으로 표지되는 저 시공 속의 여러 공장 혹은 근대문화유산으로 남겨진 피사체들은 무슨 의미로 기억되는가? 우선, 사진가에 의해 마치 어떤 행위자인 것처럼 위치하게 되고, 그것을 관찰하는 우리는 그 사진가에 의해 관중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렇다면, 카메라라는 기계로 우리 각자의 흘러간 기억을 어떤 형태로 박제하여 각 개인 앞에 내놓는 사진가는 기억의 슬픔을 끄집어내는 영매(靈媒)가 된다. 사진가는 무의미하듯 가만히 존재하는 피사체에게 어떤 의미의 옷을 입혀 그 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새로운 차원의 커뮤니케이터(communicator)가 되는 것이다. 당신은 사진가 김인재가 재현하여 제시하는 저 '굴뚝'들에 관한 보고서를 통해 무엇을 보는가? 이제 당신이 사진가의 '보고서'에 화답할 일이다. 당신의 화답은 그의 사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당신이 찾는 시간과 우주에 관한 당신의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이것이 사진가와 독자가 소통하는 일이다. 좋은 사진을 만드는 것은 사진가에게만 달린 게 아니고, 독자에게도 달리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이 사진의 세계다. 이광수

 

 
 

 

브레송 기획전,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아홉 번째 작가인 강제욱지난 21갤러리 브레송에서 개막되었다.

 

김남진 관장이 기획한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우리 시대의 다큐멘터리 사진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지난해 8월 양승우씨를 그 첫 번째 사진가로 내세우며 시작되었다.

 

사진비평가 이광수 교수가 작가론을 쓴 본 기획전에는 양승우씨를 비롯하여

강재구, 김동진, 김은주, 서준영, 최치권, 모지웅, 박찬호, 강제욱씨 등 모두 아홉 명이 선정되었다.

매월 한 차례씩 한 작가의 지난 사진에서 부터 현재 작업에 이르기까지 전체 작품을 재조명하는 전시다.

 

시대의 목격자로서 인간 중심의 기본적인 정신을 계승하며 사회 부조리와 인간관계의 불합리와 모순에 분노할 줄 아는 사진가에 초점을 맞췄다.

 

마지막 작가로 참여한 강제욱씨는 ‘The Lost Land’, ’‘민국(民國) 100’, ‘The Wall’, ‘The Planet’, ‘Thinguniverse’

20여 년 동안의 작업을 주제별로 보여주었다.

 

사진가 김영호씨의 사회로 시작된 강제욱개막식에는 부산에서 올라 온 이광수교수의 사진에 대한 비평이 있었다.

 

강제욱은 역사를 우주의 시간 속에서 찾는다. 이성과 논리가 아닌 우연과 감성의 시간 속에서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미 지나 버린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역사를 사진의 시간 속에서 재현하고 있다.”

명쾌한 이교수의 강의는 귀머거리에 가까운 내 귀에도 속속 들어왔다.

 

강의가 끝날 무렵, 사진가 김문호씨가 이번 기획전에 대한 전체 평가를 물었더니,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사진을 점검할 좋은 기회였다며, 사진이 너무 자극적이고 독한 사진이 많았다고 한다.

관객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변사가 우는 격이라고 말했다.

 

한바탕 웃고 넘어갔으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밋밋한 화면에 변화를 주어 시선을 끌기 위한 방법이겠으나,

마치 유행처럼 너도 나도 어둡고 자극적인 분위기로 몰아가는 것은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만의 어법에 고민하며, 진정성 있는 접근이 우선돼야 할 것 같다.

 

이어 강제욱 작가가 나와 작업에 대한 과정과 앞으로의 지향점을 들려주었고, 기획전을 마무리하는 김남진 관장의 소회도 들었다.

 

아무튼,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기획전은 우리나라 다큐멘터리사진의 얼개를 살펴볼 수 있는 장이었고,

왕성하게 활동하는 현역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두루 돌아보는 좋은 전시였다.

내 눈에는 첫 전시였던 양승우론과 두번째 강재구론, 그리고 마지막 전시인 강제욱론이 인상적이었다.

이 전시는 430일까지 이어진다.

 

김남진 관장의 노고야 말할 것도 없지만, 시종일관 작가론을 써가며 먼 길을 오간 이광수 교수의 노고와 열의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사진계에 보석 같은 존재다.

 

지난 2016년에는 매달 두 차례씩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국내 주요 사진가를 인터뷰하여 작가론을 쓰고 전시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이듬해 결과물로 한국현대사진가 열두 명의 작가론을 묶은 카메라는 칼이다눈빛출판사에 펴내기도 했다.

 

카메라는 칼이다1부는 시대와 시간을 기록하다로 강정효, 권 철, 신동필, 최영진이 참여했고,

2사람과 역사를 바라보다는 김문호, 김보섭, 문진우, 이재갑, 이영욱, 조문호가,

3부인 파인아트 에는 고정남, 이수철의 사진을 논했다.

 

그 외에도 인도 사진가 일곱 명과 최민식선생을 비롯한 한영수, 김기찬, 이주용, 이재갑, 노순택, 조문호 등

국내 사진가 일곱 명의 논문을 마무리하여, 곧 두 권의 논문집도 출판한단다.

 

중요한 것은 그동안 제대로 된 국내 사진가론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사진학자들이 잘 알려진 외국 사진가들만 반복해가며 짜깁기하지만,

정작 국내 사진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광수씨는 부산외국어대학에서 인도사를 연구하는 교수로 정년을 일 년 가까이 남겨두고 있다.

전공인 인도사는 물론 정치평론에서 사진 비평에 이르기까지 팔방미인인데,

사진으로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사진 비평에 힘을 쏟고 있다.

그의 그침 없는 바른 말에 주눅 들어, 이단아처럼 기피 하는 기득권 세력도 있다.

끼리끼리 사진판을 좌지우지해 온 그 자들의 짓거리가 더 웃긴다.

 

강제욱론 전시 개막식에 함께한 사진가는 김문호씨를 비롯하여 이윤기, 정영신, 김영호, 정윤배, 나인석,

김동진, 서준영, 모지웅, 최치권, 오철민, 고옥룡씨 등 많은 분이 참석하여 전시를 축하했다.

 

이광수씨는 인도사 유튜브 강의 동영상을 찍기 위해 일찍부터 왔다는데, 일이 끝난 후 나에게 페북 메시지를 보내왔으나, 또 뒷북을 쳤다.

페북은 컴퓨터에서만 볼 수 있어 밖에서는 볼 수가 없었다.

 

뒤풀이는 충무로 김삼보에서 했는데, 모처럼 반갑고 즐거운 술자리가 되었다.

이교주의 통쾌한 구라에 술이 술술 넘어갔다.

 

술자리에서 최민식선생 아카이빙을 위한 프로젝트를 맡았다는 반가운 소식도 전해 주었다.

모처럼 최민식 선생의 지난 일들을 회상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번에 마무리한 내 사진 논문은 철학자 니체와 관련이 있다는 말도 했다.

니체라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거나 신은 죽었다정도밖에 모를 정도로 무식한데, 어떻게 관련 있는지 공부 좀 해야겠다.

무려 2년에 걸쳐 논문을 썼다는데, 이 원수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부산행 열차를 타기 위해 밤 열시 무렵에야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몇몇은 맥주집으로 이차를 간단다.

매번 아무런 대가도 없이 먼 길을 달려와 애쓰시는 모습이 너무 고맙고, 안 서러웠다.

 

술이 취해 집으로 돌아와 습관적으로 컴퓨터를 열어보니, 페북에 이광수씨의 글이 올라왔다.

부산 가면서 취중에 올린 글 걑은데, “진짜 내가 오래살아야 한다.”란 열한 자가 적혀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맞는 말이다. 그가 없으면 한국 사진의 미래는 없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조문호

 

 

[2023.4.22작성]

 

 

낯선 도심 풍경을 사냥한 '도시 산책'전을 보러 갔다.

주인공이 누군지도 모른 채, 정 동지에 끌려 간 사진전에는

박순규, 이완순, 이한규씨 등 세 분이 참여하고 있었다.

 

갤러리 브레송에는 전시작가 외에도 김남진관장, 곽명우, 박설미, 김창주씨 등

아는 사진가들이 여러 명 있었는데, 전시작가 중 아는 분은 박순규씨 뿐이었다.

대전 사는 박순규씨는 마음씨 고운 아낙인 줄만 알았는데, 사진을 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다들 산책을 하다 건물에 비치거나 겹쳐진 도심 풍경들을 찍었는데,

어쩌면 세 사람이 작정이나 한 것처럼, 찍은 사진들이 대개 비슷했다.

사람마다 감성도 다르지만 도시를 걷는 감상도 다를 텐데, 다들 문명 비판적 시각이었다.

산책하다 만난 자연도 있을 것이고, 사람도 있을 텐데 말이다.

 

, 산책이라는 말만 들어도 질색하는 사람이다.

다리가 아파 조금만 걸어도 그다음 날 자리에 드러눕는 체질이다.

그러나 덜덜거리는 고물차를 휠체어처럼 끌고 어디든 찾아다닌다.

예전엔 사랑 없인 못 살았으나, 지금은 차 없으면 못사는 로봇이 된 지 오래다.

 

폐품이 되어버린 내 눈에 들어오는 도시 풍경도 변질되어 괴기하게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누구나 다 그렇지만, 특히 사진가들은 철저히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외눈박이인 것은 어쩔 수 없다.

 

운전하다 보이는 도심 풍경도, 걸어가다 보이는 거리풍경도 모두 절망적인 것들만 눈에 들어온다.

전신주 위에 이리저리 뻗어나간 전선 뭉치나,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 같은 부정적인 것에 더 눈길이 간다.

 

문명 비판적인 생각이 작용한 건지, 아니면 부정적인 심성이 작용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사진가의 잠재된 의식에 의해 현실을 보는 사실은 틀림없다.

 

그러나 전시된 사진은 마치 누구의 지령에 따른 것처럼 천편일률적이었다.

 

화려한 도시에 가려진 인간의 고독과 상실감을 말하고 있으나, 시각적 미감에 중점을 두었다.

 

욕심 같아서는 산책하다 만난 사람에서 느끼는 온기나 자연에 따른 안온한 느낌의 각기 다른 시선이었더라면,

도시에 대한 나의 부정적인 고정관념에 약이 될 수도 있을텐데 말이다.

 

전시작들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작가 마다의 개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인위적인 사진이나 일률적인 시각보다 작가의 마음이 담긴 진정성 있는 접근이,

좋은 사진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닌가 생각한다.

 

봄비가 보슬보슬 내려 술 생각이 간절한 저녁이었다.

차 때문에 소주 한 잔으로 달래는 뒤풀이지만, 반가운 분들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리는 도시 산책사진전은 오는 15알까지 열린다.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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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PORTFOLIO  01

神堂

SPECIAL PORTFOLIO  02

사진/ 정영신

전시작가 최치권 / 사진 정영신

우리 시대의 다큐멘터리사진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갤러리 브레송’의 기획전,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서준영론이 지난 22일 오후6시 개막되었다.

양승우, 강재구, 김동진, 김은주씨에 이어 다섯 번째로 열리는 서준영 론은 ‘테마파크, ’오타쿠공화국‘,

’중간정산‘, ’캣워크‘, ’너에게 이름을 주고 싶지 않아’ 등 그동안의 작업을 주제별로 보여준다.

 

 '브레송' 송년회를 겸하는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서준영 전시개막식에는

이번 기획전에 글을 쓰는 이광수교수를 비롯한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모였다.

요즘 전시 개막식엔 잘 가지 않지만, 더구나 그 날이 ‘홈리스추모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그러나 멀리서 우리 교주님이 오시는데,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나에 관한 사진논문을 쓰고 있다는데...

 

여태 이광수교수를 교주라 부르는 것은 그로부터 많은 진리를 깨우치기도 하지만,

최민식사진상의 문제점을 제기했을 때 부터다.

썩어 문드러진 사진판에 누가 감히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수 있었겠나?

입바른 소리로 사진판에 외톨이가 된다는 걸 본인인들 어찌 모르겠나.

자기 밖에 모르는 사진판에 이런 분이라도 있어 숨통이라도 트이는 것이다.

 

서울역광장에서 열리는 ‘홈리스추모제’는  홈리스행동, 동자동사랑방, 빈곤사회연대,

37개 단체가 함께한 ‘2022 홈리스추모제 공동기획단’에서 주최하고 있다.

 

올 해 '홈리스 추모제'는 주거제공 우선 홈리스 정책 실행, 홈리스 차별 금지, 권리기반 정책 시행,

홈리스의 평등한 의료접근권 보장, 여성홈리스 존재 인정, 젠더 관점 기반 정책 시행,

무연고 홈리스 사망자의 애도받을 권리, 애도할 권리 보장 등

다섯 가지 요구를 중심으로 각종 토론회와 집회를 개최하며,

지난 12일부터 추모제가 열린 22일까지 11일간의 추모 주간을 보냈다.

 

2022년 한 해 동안 서울의 거리에서 숨진 사람은 442명으로 파악되었으나,

그것도 정부의 공식 통계가 없어 추모제를 진행하는 단체에서 자체 집계한 것이다.

전국 무연고 사망자는 3600여 명으로 3년 전보다 1.4배 증가했고

10년 전인 2012년보다 3.5배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전시 개막식과 홈리스 추모제가 한 시간 사이로 열려 개막식부터 들렸는데,

마침 이광수교수의 강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입구에는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가 지켜 섰고,

안쪽에는 사진가 김문호, 성남훈, 강제욱, 김동진, 김영호씨등 반가운 분이 여럿 보였다.

 

그런데, 이번 기획전을 추진한 김남진관장이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알아보니 코로나에 감염되어, 주인 없는 집에 나그네들만 잔치를 벌이는 격이었다.

 그렇찮아도 건강에 이상이 생겨 병원을 들락거리는데, 빨리 완쾌하길 바란다.

 

귀가 어두워 이광수교수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작가에게 지적한 한마디는 귀에 들어왔다.

‘어깨에 힘을 빼라’고 말했는데, 그 말은 사진의 힘을 빼라는 말이었다. 학자다웠다.

전시 개막식에 대부분 듣기 좋은 공치사나 하는 판에, 누가 이런 이야기를 해주겠나. 

 

개막식이 끝나 이교수와 인사를 나누고 나니, 정영신 동지가 나타났다.

뒷일은 정동지에게 맡겨두고 서울역으로 달려갔는데, 기다렸다는듯이 추모제가 시작되었다.

 

그날따라 날씨가 얼마나 추운지 숨이 턱턱 막혔다.

여태 추모제에 여러번 참여해 보았으나, 이렇게 추운 날은 처음이었다.

고생하는 활동가나 참여한 젊은이들의 모습에 존경심이 일었다.

거리에서 죽은 442명의 영혼을 달래는 무용가 서정숙씨의 위령무에 마음 실어보냈다.

 

빨리 오라는 정동지의 전화를 받고서야 충무로로 갔더니, 이미 뒤풀이는 파장이었다.

모지웅, 이일우, 박찬호, 임성호씨 등 전시장에서 미처 보지 못한 분도 여럿 있었다.

 

그 자리에서 ‘눈빛’ 이규상대표가 인사동 '인덱스'를 인수한다는 반가운 이야기도 들었다,

사진집 한 권 만들면 사백만원씩 손해보는 무지한 출판 현실에서 살아 남으려면,

사진작품 유통업으로 확대시켜서라도 출구를 찾아야 했을 것이다.

 

오후10시로 예약해 두었다는 부산행 열차 시간이 가까웠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광수교수더러 한 잔 더하고 주무시고 가라며,

박찬호씨를 비롯한 후배들이 가로 막았다.

 

차마 거절하지 못해 이광수교수는 다시 자리에 앉아버렸다.

가라할 수도 없고 있으라할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이라, 슬며시 합바지 방귀 새듯 새버렸다.

늙은이는 사라지는 것이 도와주는 일이다.

 

그 순간을 뿌리치지 못해, 낮선 여관에서 자게되었다며 걱정했으나,

다음날 이광수씨 페이스 북을 보니, 늦게라도 간 모양이더라.

아무튼, 좋은 시간 만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전시는 12월 31일까지 열리오니, 많은 관람 바란다.

그리고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여섯 번째 사진가는 강제욱씨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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