彫刻 in Drawing

김은현展 / KIMEUNHYUN / 金恩賢 / sculpture

2023_0717 ▶ 2023_0730

김은현_꽃비1_조합토_26×19×17cm_202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730_12:00pm~05: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안국동 7-1번지)

Tel. +82.(0)2.738.2745

www.gallerydam.com

@gallerydam_seoul

 

조각가 김은현이 갤러리 담에서 조각가의 드로잉이라는 제목으로 아홉 번째 개인전을 갖는다. 작가는 그 사이 파리의 그랑 쇼미에르 아카데미의 크로키 반에서 드로잉 작업을 해왔으며, 이번 전시는 그 결과물들을 선보이는 자리이다. 작가가 드로잉과 조각 작품을 동시에 선보이는 것은 이번 전시가 처음이다. 인체 드로잉, 크로키는 조각 작업에 바탕이 되는 과정이다. 입체적 대상물이 뿜어내는 양감, 생명력, 동작을 통해 드러나는 형태감과 리듬을 포착하여 평면의 화폭에 담는다. 조각가의 손에 의해 표현된 굵직하면서도 날렵한 선들, 묵직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터치들은 지금은 잠시 평면의 화폭에 갇혀있지만 언젠가는 평면 밖으로 튀어나와 다시 입체의 형태로 되살아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김은현의 드로잉 작품들이 생명력과 강한 역동성을 보여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드로잉으로 표현되었던 작품과 그것을 입체적인 조형물로 되살린 작품을 동시에 감상하면 그것을 더 잘 느낄 수 있다. 이번 김은현 조각가의 드로잉전이 매우 풍성하면서도 다채로운 느낌을 주는 것은 여러 인종의 다양한 모델, 역동적으로 표현된 다채로운 동작들, 그것을 생동적으로 포착한 작가의 손맛이 어우러졌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김은현_꽃비2_조합토_29×19×16cm_2022
김은현_봄날_조합토_41×24×23cm_2023
김은현_자기앞의 생_조합토_62×42×35cm_2019

이번에 드로잉과 같이 전시되는 조각품들은 기존의 작품들과는 조금 다르다. 기존의 전시에서는 단아하면서도 고아한 명상의 세계를 표현한 작품들을 많이 선보인 데 비해 이번 전시에서는 인간 내면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는 집착이나 두려움을 표현한 작품들이 많다. 기법 면에서 새로운 변화를 보여주는 작품들도 있다. 입체적인 점토 덩어리 위에 평면적인 드로잉 기법을 활용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작가는 늘 그래왔듯이 흙이라는 재료의 물성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무심으로 꼬막밀기를 하다 어느 순간에 정제된 형태를 뽑아낸다. 이전의 작품들은 주로 그 형태에서 얼굴을 뽑아내는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그 위에 자연스러운 드로잉을 통해 손과 손톱을 표현한 작품들도 선보이고 있다. 입체적인 흙덩이와 평면의 드로잉 기법의 만남은 집착시리즈 작품들에서 감상할 수 있다. 작가의 인체 표현 영역이 훨씬 확장되고 자유로워졌음을 느낄 수 있다. 갤러리 담

 

김은현_집착1_조합토_27×19×15cm_2023
김은현_집착-한줌_조합토_26×21×12cm_2023
김은현_크로키4_종이, 목탄, 콘테_60×42cm_2018

사물의 입체 형태를 구현하는 나에게 있어서 드로잉은 가장 밑 작업이다. 리듬, 흐름, 양감, 생명력... 인체의 선이 점토 위에서 녹아진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과 생명의 자유로움에 다가서고자 오늘도 점토를 치대고, 형태는 오롯이 드러난다. 내가 나에게 다가서는 여행이다. 김은현

 

독백

표영실/ PYOYOUNGSIL / 表榮實 / painting

2023_0629 2023_0715

 

표영실_걷기_캔버스에 유채_33×24cm_2023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715_12:00pm~05: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안국동 7-1번지)

Tel. +82.(0)2.738.2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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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lerydam_seoul

 

갤러리 담에서는 섬세한 필치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표영실 작가의 전시를 기획하였다. 작가의 작업실 책상의 메모를 보면 작가의 현재의 감정과 이로 인한 일련의 연관성이 유추된다. 망각, 구멍, 불연속, 뒷면, 편린(조각 파편), 그림자, 창백, 진공, 파멸, 불구, 유령의 시간, 껍질 / 부재 애도와 멜랑꼬리 / 고통스러운 마음의 대기상태 / 예술은 감각의 구현을 통해 인간의 정서를 표현하는 것. 내재성의 자유 / 경계를 넘는 사람 / 그물/ 전광판/ 깨진 가로등/ 새벽의 하늘색 / 흔들리고 움직이는 / 불면, 자리, 겨울밤, 밤길, 길을 잃다 이처럼 작가는 순간순간 누구나가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하나하나씩 기록하고 그 감정들을 소중하게 이미지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표영실_나의얼굴너의얼굴_종이에 연필, 수채_28×25.5cm_2023

표영실_땅위의 별_캔버스에 유채_38×45.5cm_2023
표영실_먼지와 안개_캔버스에 유채_24×33cm_2023

작가의 글에서도 나타난 바와 같이 뽀족한 노랑은 걱정스런 생각들의 표현으로, 회색은 막막함을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분홍빛이 가는 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덕성여자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졸업한 후 활발한 작업을 해 오고 있는 표영실 작가의 열 일곱 번째 개인전이다. 갤러리 담

 

표영실_뭉게뭉게_종이에 연필, 수채_28×25.5cm_2023
표영실_얼룩_캔버스에 수채_22×27.3cm_2023
표영실_작은방_캔버스에 유채_24×33cm_2023

늦은 밤 새벽녘까지 깨어있는 일상을 반복한다. 유령처럼 희미하게. 어둠을 밝히는 불빛들과 바람의 온도, 작은 소리들과 미세한 떨림. 고요한 시간에만 비로소 존재를 드러내는 모양들. 살갗에 닿은 감각들은 마음 속 깊숙하게 가라앉은 정서들을 들추어내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불안감과 무겁고 어두운 밤의 질감 사이를 오가는 시선은 늘 비슷한 자리에서 위태롭게 서성인다. 그 시선의 끝에서 간신히 만난 뾰족한 노랑. 막막한 회색들. 곧 울것 같은 분홍의 색들은 겹겹의 얼룩이 되어 다시 나에게 말을 건넨다. 표영실

 

무경계

한상진展 / HANSANGJIN / 韓相振 / mixed media

2023_0302 ▶ 2023_0321

한상진_몸의 풍경, 풍경의 몸_종이에 수묵드로잉_각 42×29.7cm_2019~20

초대일시 / 2023_0302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3월21일_12:00pm~03: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안국동 7-1번지)

Tel. +82.(0)2.738.2745

www.gallerydam.com@gallerydam_seoul

 

갤러리 담에서는 한상진의 『무경계』 전시를 기획하였다. 작가의 먹 드로잉을 살펴보면, 그는 작업실과 길에서 만난 어떤 사물들을 A3 크기의 드로잉 종이에 시간을 가지고 먹으로 그려내고 있다. 감자, 모과, 그리고 빈 화분 속에 자라는 풀에서부터 하늘에 떠있는 구름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주변의 사물과 풍경들을 경계 없이 먹으로 그려내고 있다. 작가의 작업에서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은 작품이 되어 전시장에 등장한다. 이번 전시에는 종이에 먹 드로잉을 비롯하여 작품 30여점이 출품될 예정이다. 한상진 작가는 홍익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하였고 이번이 스물두 번째 개인전이다.  ■ 갤러리 담

 

한상진_부유목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1

한상진_부유목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1

한상진_부유목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1

 

한상진_불나무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1

한상진_구름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2

한상진_구름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2

한상진_구름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2

 

한상진_Burn Out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1

풍경 속의 풍경 ● 나타나고 사라지는 풍경, 여기에서 풍경이란 세계를 구획하고 질서지우는 방식의 풍경화가 아니라 비전체로서의 풍경 속에서 풍경이 되고 또 다른 가능성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의 작업은 인위적인 형식이나 의식의 바깥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밖이란 내부와 외부가 만나는 장소이며 지시적인 언어의 내부가 열리는 자리이다. ● 나의 그리기는 고요하게 내려놓는 순간에 발생한다. 소요(逍遙)하는 시간 속에서 무심히 하늘을 바라보는 텅 빈 시선, 판단하지 않는 태도, 너와 내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님(不二)을 깨닫는 시간 속에서 경계(境界)는 사라지고 삶의 유한함 속에서 손에 잡을 수 없는 무한한 것과 만나게 하는 과정이다. ● 회화(繪畵)는 드로잉의 확장된 자리이며 심연의 공간이다. 따라서 드로잉은 회화를, 회화는 드로잉을 서로 대리, 보충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드로잉은 공간을 여는 것이다. 그것은 평면의 공간속에서도 일상의 삶 속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며 행위와 과정을 통해 목소리를 발하는 사후적 결과물이다. ● 무미한 침묵 속에 펼쳐지는 물질과 흔적은 존재의 또 다른 얼굴이다. 정신의 영역을 통과하여 만나게 되는 지지체는 접촉의 촉지적 순간 안에서 정적이면서도 동적인 것이 되어가며, 손에 잡을 수 없는 찰나의 순간은 시간의 명료함을 열고 공기 속에 살아 숨 쉬는 호흡과 감정의 진폭이 되어, 풍경의 몸속에서 흔들린다.

 

한상진_소멸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1

한상진_소멸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1

한상진_소멸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1

 

한상진_흙으로부터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1

한상진_흙으로부터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2

한상진_흙으로부터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1

 

한상진_묵상默想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1

'화면에 일획을 긋는다'는 것은 또 다른 세상과 만나는 순간이다. 기록될 수 없는 순간을 기록하는 여정이며 시작과 끝의 시간을 넘어선 일획은 평면과의 접촉 속에서, 풍경과의 만남 속에서, 타자를 향한 노출 속에서, 예측할 수 없는 노정 속에서, 목적 없는 삶 속에서, 풍경 속의 풍경이 되어간다. ● 시선의 불가능성, 그것은 언어가 의미에 닿지 못하고 끊임없이 지연되고 미끄러지는 것처럼 존재의 지평에서 의미로 포획될 수 없는 나머지와 포옹한다. 화면 위에 포치되는 흔적들의 틈, 피어나는 잔여는 지시적인 공간의 억압으로부터 존재의 세계로 확장되는 울림을 이야기한다. ● 개와 늑대의 시간, 낮과 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지는 미명계(微明界), 무경계(無境界) 연작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며 불가능한 말하기를 반복해야하는 존재의 숙명을 드러낸다. 의미로부터 벗어난 버려진 사물, 그늘진 자리, 흐리고 시린 날에 바라본 이름 없는 풍경들에 대한 애착(affection)은 편리함이나 속도, 효율성과는 거리가 멀다. 합리적인 생산성과 경쟁 속에서 천천히 흐르고 변화해가는 풍경 속에 풍경을 말하려는 것은 빠르게 달려가지만 정지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인의 불안한 일상에 무미함과 무위의 글쓰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 한상진

 

한상진_무경계無境界 No Boundary-Dark, Red 연작_2022~3
한상진_무경계無境界 No Boundary-Dark, Re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1×9.7cm_2022
한상진_무경계無境界 No Boundary-Dark, Red 연작_2022~3
한상진_버려진 사물과 함께하기_부유목-고성, 속초, 양양에서_가변설치_2022

A Landscape in the Landscape ● A landscape that appears and disappears. Here, the landscape is not a landscape painting in a way that divides the world and creates order, but the landscape within the landscape becomes a part and meets another possibility. In this sense, my work is done outside of synthetic form or consciousness. Here, the outside is a place where the inside and the outside meet and a space where the inner part of the indicative language opens. ● My drawing happens the moment I calmly put it down. It is an empty gaze and unjudgmental attitude of looking at the sky casually while walking about freely, a boundary that disappears in the time when you and I realize that there is nothing different from each other, and a process of meeting the infinite that cannot be grasped in the finiteness of life. ● Painting is an expanded realm of drawing and a space of abyss. Therefore, drawing and painting substitute and supplement each other. It is realized even in plane spaces and daily life and is an ex-post result of making voices through actions and processes. ● Materials and traces unfolding in meaningless silence are other faces of existence. The support that passes through the realm of the spirit becomes static and dynamic within the tactile moment of contact, and the moment that cannot be held in hand opens the clarity of time. Also, the breathing that lives and breathes in the air becomes an amplitude of emotions and shakes in the body of the landscape. ● 'Drawing a stroke on the canvas' is the moment of encountering another world and the journey of recording moments that cannot be recorded. One stroke transcending the time of the beginning and the end becomes a landscape within the landscape in contact with a plane, in an encounter with the landscape, in exposure to others, in unpredictable journeys, in an aimless life. ● The impossibility of gaze, as if it were a metaphor that cannot be expressed in language, embraces the rest that cannot be captured in meaning in the horizon of existence. The cracks of the traces widely spread on the screen, that is, the afterimages that bloom, refer to the resonance that extends from the oppression of the indicative space to the world of existence. ● The series 「Twilight」 and 「No Boundary」, in which the boundaries between dog and wolf time, day and night, and sky and earth disappear, to say the unspeakable and reveal the fate of a being who has to repeat the impossible. The affection for abandoned objects devoid of meaning, shady seats, and nameless landscapes viewed on a cloudy and cold day is far from convenience, speed, or efficiency. My work is to speak of the landscape in the landscape that flows slowly and changes amid good productivity and competition. Also, my work is to suggest idle and free writing to the anxious daily life of modern people who run fast but cannot get out of a standstill. ■ Sang Jin Han

영문번역_정수은

 

Vol.20230302b | 한상진展 / HANSANGJIN / 韓相振 / mixed media

 

녹색 불을 다루는 법

최나무展 / CHOINAMU / 崔나무 / painting 

2022_1227 ▶ 2023_0108

최나무_How to Handle with Fire_캔버스에 유채_116.7×91cm_202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1월8일_12:00pm~05: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안국동 7-1번지)

Tel. +82.(0)2.738.2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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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 작업중인 최나무 작가의 국내 전시를 기획하였다. [녹색 불을 다루는 법]이라는 전시제목에서 힌트를 받을 수 있듯이 작가는 심드렁하고 힘들어진 현실에서 식물을 키우면서 새로운 에너지를 받게 되는데 이를 회화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작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때로는 식물의 줄기 속에 작가 자신이 정령이 되어 숨어 있기도 하다. ● 작가의 글을 읽어보면 식물의 형태와 색, 그 안쪽을 파고들어 가다 보면, 직면하는 것은 바로 나의 마음의 모양이다. 식물의 힘, 그것은 식물을 통해 나 자신을 관찰하고 키워내게 하는 힘이다. ● 식물을 키우면서 보는 것이 스스로의 마음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마음을 보면서 식물로부터 새로운 에너지도 얻으면서 새로운 작업에 몰입할 수 있다고 한다. ● 최나무 작가는 서울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였고 동 대학원에서 판화를 전공하였으며 지금은 도쿄에서 거주하면서 작업중이다. 이번이 열 일곱 번째 개인전에서 작가가 말하는 식물의 치유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좋은 위로의 시간이 되리라 본다. ■ 갤러리 담

 

최나무_Milk Bush 03_캔버스에 유채_65.3×80.4cm_2022
최나무_Light a Tree 01_캔버스에 유채_72.9×50.2cm_2022

무기력을 극복하는 법 ● 작업을 이어 나가는 와중에 한 시리즈를 마무리 짓거나 전시를 마치고 나면 으레 찾아오는 슬럼프가 있다. 번아웃이라고 하기엔 그 정도로 활활 불태우진 않았다는 죄책감이 밀려오지만, 쉼없이 나아갈 기력은 쇠한 상태. 선하나 긋기도 어려운 시간들은 무거운 돌덩이가 되어 어깨를 짓누른다. 팬데믹상황이 어느정도 진정되고 난 시점에 무기력증이 강하게 찾아왔다. 모두들 조금씩 활력을 찾고 밖으로 나설 때 난 여전히 안으로 숨어들고 있어서일까. 방치한 정원에서 말라 죽어 있는 화초들이 꼭 나와 같았다. ● 집안에서 키우던 게발선인장이 시들어가는 것을 보고 측은한 마음에 분갈이를 해주고 돌보기 시작했다. 하루가 다르게 생기를 회복하는 것을 보고 웃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식물 키우기에 몰입하게 되었는데 새순이 돋고 뿌리가 자라나고 꽃을 피우는 식물의 에너지가 무기력한 나를 움직이게 해주었다. ● 식물을 관찰하고 마음에 남는 모습을 그림으로 옮겼다. 그렇게 다시 붓을 잡을 수 있었다.

 

최나무_Hide and Seek-Yellow Sky_캔버스에 유채_50.1×72.9cm_2022

식물의 힘 ● 화원에서 "우유 덤불"(Milk Bush)이라는 식물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가늘지만 단단한 줄기는 카오스상태로 사방으로 뻗어 있지만 나름의 질서가 있고 아름다웠다. 줄기 속에 품고 있는 하얀 수액때문에 '우유 덤불'이라는 이름이 생겼다지만 그 액체가 강한 독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독을 품은 엉킨 덤불은 그 자체가 나와 같았고, 혹은 그 안에 숨어 마음껏 소리를 질러도 아늑한 방어막이 되어 줄 것 같았다. ● 식물의 형태와 색, 그 안쪽을 파고들어 가다 보면, 직면하는 것은 바로 나의 마음의 모양이다. 식물의 힘, 그것은 식물을 통해 나 자신을 관찰하고 키워내게 하는 힘이다.

 

최나무_Hide and Seek-Hill with a Red Tree_캔버스에 유채_91×60.7cm_2022

불과 물, 마음의 모양 ● 그림에 등장하는 식물들은 내가 되어 살아있다. 혼란한 감정들을 빠른 붓질로 그어낸다. 그 모양은 숲을 이루기도 하고 때로는 불과 물이 되기도 한다. '불을 지르는' 행위는 현실에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까딱 잘못하면 모든 것을 앗아간다. 하지만 마음을 표현하는 의미의 불은 다양한 모양새를 가질 수 있다. 최근 작업에 등장하는 불은 출렁이는 녹색의 나무와 닮았다. 뜨겁게 타오르되, 모든 것을 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닌, 자라나게 하는 에너지를 의미한다. 일렁이는 태양빛, 쏟아지는 별똥별의 불꽃에서도 생기를 얻는다. ● 흘러내리거나 고인 물 웅덩이도 살아 숨쉰다. 식물의 잎과 뿌리를 키워내고 썩은 부분을 흘려 보내며 다시 새로운 생명을 품는다.

 

최나무_Green Fire 02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45.6×45.6cm_2022

최나무_Leave Your Worries There 02_캔버스에 유채_27.3×27.3cm_2022

당신의 오늘이 생기 있길 바라요 ● 뉴스를 보는 것이 참으로 꺼려지는 날들이다. 좋은 일보다 마음 아프고 화가 나는 일들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방향을 잃은 분노와 슬픔은 어디서 위로를 받아야 할까. 빗소리에 숨거나 양파 썰기를 핑계로 울어도 본다. 그리고 매일매일 조금씩 모양을 달리하는 식물을 바라본다. 식멍이라고 이름 붙인, 별 거 아닌 듯한 행위가 일상 속에 큰 힘을 발휘한다. 식멍을 하듯, 나의 그림을 보시는 분들이 잠시나마 쉬어 가시길 바라는 마음이다. 적어도 그림 속에선 뭐든 할 수 있으니까. ● "붓 털이 다 휘어지도록 물감을 척척 끼얹으며 선도 그어보고, 색의 숲 안으로 들어가 함께 숨바꼭질을 하면 어때요? 마음 안에 녹색의 불을 당겨보아요. 당신의 오늘이 생기 있길 바라요!" ■ 최나무

 

Vol.20221227a | 최나무展 / CHOINAMU / 崔나무 / painting

채우고, 비우고 Filling and Emptying

박예지展 / PARKYEAJI / 朴玴摯 / sculpture 

 

2022_0701 ▶ 2022_0711

 

박예지_채우고, 비우고 Filling and Emptying展_갤러리 담_202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

11일_12:00pm~03: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안국동 7-1번지)

Tel. +82.(0)2.738.2745

www.gallerydam.com@gallerydam_seoul

 

갤러리 담에서는 7월에 박예지의 『채우고, 비우고』라는 전시를 마련하였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작가는 우연히 기회에 철용접을 접한 후에 지금껏 용접으로 기물과 형태를 만들고 있다. ● 이전에는 선의 형태로 동물_특히나 말_의 모습에 천착해왔다면 이번에는 일상에서 쓰이는 그릇의 형태에 작가는 관심을 두고 있다. 사실상 용도로는 무엇을 담기에는 구멍이 있기도하지만 그 공간을 담아서 채워나가고 나중에는 비우고 싶다는 그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 이번 전시는 박예지의 아홉번째 개인전이다. ■ 갤러리 담

 

박예지_Meditation(명상) 1_1_철_10.5×12×12cm

'만남 흔적'으로 모색하는 육화(肉化)의 형상과 키아즘 - I. 프롤로그 ● 누구에게나 '페르소나(persona)'는 있다. 그리스 어원으로 '가면'을 의미하는 이것은 '가면을 쓴 외적 인격'을 가리킨다. 융(C. G. Jung)의 관점에서 페르소나는 존재자의 그림자와 같은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일 따름이지만, 원래 신학에서 페르소나는 이성적인 본성을 지닌 독립적 실체로 간주되었다. 그러한 점에서, 페르소나는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처럼 '존재자의 위격(位格)을 부여받은 또 다른 존재자'로 기능해 왔다. 오늘날에 이것은 천사, 악마, 의인화된 동식물, 무의식 속 자아처럼 한 인간이 관계를 맺은 모든 소통의 대상이자, 투사된 또 다른 자아를 의미하는 것으로 확장되어 사용된다. ● 작가 박예지에게 있어 '말(馬)'은 소통의 대상이자, '자신이 투사된 또 다른 자아'인 페르소나로 간주된다. 무수한 용접봉이나 철선을 이어 붙여 만든 '말 조각'을 통해서 그녀가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글은 그녀의 작업이 지닌 조형 언어와 그것이 함유한 관계의 메시지와 미학이 무엇인지 살펴본다.

 

박예지_Meditation(명상) 1_2_철_8×12.5×12.5cm

II. 관계 맺기 혹은 관계 연습 ● 박예지의 작품 속에서 '말'은 '내가 투사된 또 다른 나', '무의식의 세계로부터 건져 올린 나' 라는 점에서, 일련의 페르소나이자, 자기와 동일화한 '메타포(metaphor)'로 자리한다. 여기서 '은유'로 해석되는 메타포는 "A는 B와 같다"는 '직유'와 달리, "A는 B다"는 식의 어법으로 상이한 차원의 '원개념과 보조 개념'을 서로 연결한다는 점에서 의미의 전이(轉移)와 전화(轉化)를 촉발한다. 즉, 박예지의 작업에서 '말'이라는 원개념은 '나'라는 보조 개념으로 전이된다. 실제로 박예지는 작가 노트에 작업의 주제인 '말'을 "저 자신이면서 또 다른 타인의 모습, 그러니까 뭐든 인간의 마음"이라고 기술한다. 그러니까 박예지에게 있어, 말이라는 원개념은 나, 타자, 인간의 마음이라는 보조 개념으로 전화를 거듭하는 셈이다. ● 유념할 것이 있다. 메타포의 전략은 양자가 별 개연성 없는 상태에서 '이질적인 것의 동일화' 를 느닷없이 실행하는 까닭에 매우 강렬한 비유의 효과를 가진다는 점이다. 그것을 우리는 '창의적 메타포(creative metaphor)' 혹은 '메타포의 창의성(creativity of metaphor)'이라 부르곤 한다. 이러한 창의적 메타포의 속성은 문학이나 미술에서 더욱더 강렬한 비유의 효력을 지닌다. 박예지의 작업에서 '말'은 '외형적 유사함'이 그다지 없는 '박예지'와의 사이에서 '이질적인 동일화라는 느닷없는 사건'을 벌이면서 '창의적 메타포'로서 강렬한 비유의 효과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 물론 이 비유의 강렬한 효과는 '경험의 유사성' 속에 있는 관람자를 초대하면서 가능해진다. 즉, 긴 다리와 목, 날렵한 몸매와 같은 '형식적 유사성'보다, 인간과 가까운 수태 기간을 지닌 온순한 초식성의 동물이자 십이지의 친근한 동물과 같은 '내용적 유사성'으로 메타포를 이끄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박예지에게 있어 '말'은 관람자와의 상호작용을 성취하게 만드는, 블랙(Max Black)이 언급하는, '암시적 복합체(implicative complex)'로서의 메타포가 되기에 족하다. ● 박예지의 작가 노트에서 살펴보았듯이, 말은 그녀이기도 하지만, 관람자이기도 하고, 모든 인간이기도 하는 '암시적 복합체'로서 '의미의 전이'를 거듭하면서 인간과의 사이에서 '관계 맺기'를 지속한다. 페르소나가 '투사된 또 다른 자아'이고 메타포가 '유사성이 없는 두 개의 대상을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비유'라고 할 때 그녀의 작업에서 원개념과 보조 개념 그리고 주체와 타자 사이의 관계 맺기는 지속된다. 가히 그녀의 작업을 이러한 관계 맺기를 모색하는 '관계 기록'이나 '관계 연습' 혹은 '관계 연습에 대한 조형 실험'이라고 부를 만하다.

 

박예지_Meditation(명상) 1_3_철_10.5×12×12cm

III. 우연과 필연 혹은 '만남 흔적' ● 작품을 보자. 얇디얇은 스테인리스 스틸 봉들을 용접으로 이어 붙여가며 다양한 유형의 '말'을 형상화하는 박예지의 작업은 관계 맺기라는 주제 의식을 지속적으로 조형화한다. 여기에는 다양한 관계 맺기의 방식이 실행된다. ● 첫째, 스테인리스 스틸의 용접봉의 가느다란 몸체를 서로 병렬로 이어가면서 용접을 통해서 접합을 시도하는 동종 동형의 사물이 실행하는 '관계 맺기'다. 밋밋하고 가느다란 용접봉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휘거나 잘리기도 하면서 말의 형상을 만들어 나가는데, 주요한 것은 '불을 일으키는 용접'의 방식을 통해 서로의 몸을 녹이면서 하나가 되는 관계 맺기를 지속한다는 것이다. 사물을 불로 녹여 훼손하면서 또 다른 사물과 만나는 용접의 방식은 마치 인간의 관계 맺기를 유추케 한다. 한 주체가 타자와의 만남을 지속하는 인간의 만남을 생각해 보라. 나의 손해와 상처를 보듬어 안고 타자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바탕으로 관계 맺기를 지속하지 않는 한 인간의 만남은 실패를 자초할 뿐이며, 신뢰의 인간관계는 애초부터 무의미해진다. ● 때론 인내하기에 버거울 만큼 상처가 커서 타자와 싸움을 벌이며 서로에게 생채기를 남기기도 하지만, 인간관계 속 이러한 상처의 흔적은 타자를 더욱더 이해하게 만들면서 서로의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만든 '만남 흔적'으로 작동한다. 박예지의 작업 속 용접봉이 불에 녹아 일그러진 채 서로를 보듬어 안고 있는 상흔(傷痕)은 그러한 점에서 인간의 '만남 흔적'으로 은유된다. ● 둘째, 박예지의 조형 언어라는 것이 일정의 형태의 구조적 틀을 미리 만들고 그 뼈대 위에 살을 메우고 피부를 덮는 과정으로 작업하기보다 점과 점을 잇고 선과 선을 잇는 과정으로 점차 볼륨을 키워가는 관계 맺기를 실행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녀의 작업은 거시적 관계 맺기의 틀 안에서 미시적 관계 맺기를 시도하기보다 미시적 관계로부터 거시적 관계로 점차적인 관계 맺기의 과정을 성취해 나간다고 하겠다. ● 이러한 방식은 반(反)건축적 조형 태도와 맞물린다. 건축이 기본적으로 '거주를 목적으로 하는 유용성과 견실한 구조적 공간의 구축'을 지향한다면, 박예지의 작업은 무엇보다 '순수 예술 창작을 목적으로 한 심미적 가치의 조형'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녀의 조형 태도는 일정 부분 '건축학의 구축'과 달리 '고고학의 발굴'과 같은 태도를 견지한다. 즉 눈에 보이는 거시적 틀을 먼저 제시하는 건축학과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적 세계를 추적하기 위해서 유적지에 눈금을 매겨놓고 순차대로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격자식(grid method) 발굴법과 같은 고고학의 태도 말이다. ● 따라서 그녀는, 건축이 지향하는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필연적 구조'에 매달리기보다 고고학이 지향하는 '우연이 낳은 필연의 구조'를 추적해 나가는 방식을 자신의 창작으로 견인한다. 그것은 마치 초현실주의의 '무의식적 자동 작용'으로 풀이되는 '오토마티즘(automatisme)'처럼 우연의 효과를 폐기하지 않고 지속하는 것과 같다. 그녀는 스테인리스 스틸 봉들이 서로를 만나 관계 맺기를 지속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무수한 우연의 형상과 만남의 흔적을 보듬고 그것이 유인하는 다음 단계의 필연적 만남을 상상하면서 오토마티즘에 자기 몸과 마음을 맡긴다. 박예지의 이러한 조형 태도는 자연스럽게 '인간의 삶'으로 은유된다. 그녀의 작가 노트를 보자: "삶의 어설픔으로 하나둘 쌓아 올린 세월이 조금씩 단단하고 깊어진다. 예측할 수 없는 삶의 무게는 우연의 연속처럼 부서지고 다시 만들어진다." 그렇다. 철을 녹여 반복적으로 마음 가는 대로 쌓아 올리는 그녀의 오토마티즘 조형 언어는 마치 인간의 삶처럼 사람과의 우연의 '만남 흔적' 속에서 필연에 이르게 한다.

 

박예지_Meditation(명상) 1_4_철_10.5×12×12cm

IV. 육화(肉化)의 형상과 키아즘 ● 박예지가 '우연한 만남의 무수한 집적'을 통해서 형상을 찾아 나선 까닭일까? 그녀의 작품은, 해부학적 골격과는 상이한 뒤틀린 말의 형상을 만들거나 간신히 자기 몸을 지탱하는 기이한 구조를 선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말의 기이한 형상을 기다란 세 개의 다리로 지탱하게끔 만드는 방식이 그것이다. 머리와 꼬리는 없고 몸통이 덩그러니 그 다리를 연결하고 있는 형상은 매우 초현실적이다. 수북한 목덜미의 갈기가 바람에 흩날리는 듯한 형상, 거미처럼 기괴하게 자라난 다리를 지닌 말의 형상, 달리기나 도약을 시도하고 있는 기묘한 형상, 말의 앞뒤를 구분할 수 없이 몸통이 연결된 형상 등도 그러하다. 가느다란 다리와 그것이 지탱하는 몸통의 관계 맺기는 진즉 미시적 세계의 우연적 만남으로부터 시작해 예측할 수 없는 필연적 만남으로 스멀스멀 자라난다. ● 그래서일까? 박예지의 작품은 기마상에 천착했던 마리노 마리니(M. Marini)의 말 조각처럼 단순, 고졸(古拙)한 가운데 역동적 면모를 선보이거나, 때로는 큐비즘과 초현실주의를 오가는 자코메티(A. Giacometti)의 거친 표면의 기다란 인물 조각처럼 기이하고 우울하다. 그뿐인가? 그녀의 작품은 마티스(H. Matisse)의 인체 조각처럼 간결하며 루이즈 부르주아(L. Bourgeois)의 거대한 거미조각처럼 기괴하지만, 역동적이기도 하다. ● 생채기를 남긴 표면 질감이 전하는 처연함, 해부학을 탈주하는 위태로운 구조가 전하는 아슬아슬함 그리고 그것들이 한데 어울려 전하는 역동성을 한 몸에 지닌 박예지의 작품은 그래서 아름답다. 무엇인가 우울하고 기묘하지만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아름다움이라고 할까? ● 필자는 박예지의 말을 형상화한 작품들을 '육화(incarnation, 肉化)'의 과정이자 결과물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신학에서 '성육신(成肉身)'으로 해석되는 이것은, 그리스도 성육신의 예처럼, "신적인 존재가 인간의 육체 안으로 들어와서 인간 가운데 거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메를로-퐁티(M. Merleau-Ponty) 식의 현상학에서 이 '육화'는 '의미가 그것을 표현하는 물질에 내재해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즉 '의미'는 '물질'의 우연적 배열 속에서만 생겨나는 것으로, 물질이 의미를 실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에게 있어 '육화한 실존'이란 '인간 실존의 의미가 인간의 살(chair)에 내재하는 상태'이자 '인간 살의 우연적 배열 속에서 의미가 발현하는 것'을 가리킨다. ● 이러한 퐁티의 관점으로 보자면, 박예지의 작품 속 스테인리스 스틸 봉은 육화를 위한 기본 물질로서, '사물의 살(chair des choses)'의 우연적 배열을 통해서 의미를 발현하는 물질'이 되는 셈이다. 그녀의 작품 속 육화는 형식상으로는 차가운 금속이 따스한 피가 흐르는 말이라는 동물 형상으로 전화된 것이며, 내용상으로는 '키아즘(chiasma)'을 실행한 사건이자 그 결과물이기도 하다. '교차'로 번역되는 키아즘은 퐁티의 관점에서 주체가 만나는 다양한 객체와의 상호 작용 혹은 수평적 관계 맺기의 미학을 선보인다. 키아즘은 정신/신체, 나/타자, 대자/즉자의 대립을 수평화한다. 키아즘은 보기-보이기, 지각하기-지각되기, 능동-수동이 교차하는 세계이다. 즉 키아즘이란, 작가 박예지가 "말에는 내 자신이며, 타인이며, 세상의 모든 것이 녹아 있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나의 세계와 타인의 세계와의 다양한 공립(共立) 불가능성을 통해 그 통일을 형성하는 세계"인 것이다.

 

박예지_Meditation(명상) 1_5_철_10.5×12×12cm

V. 에필로그 ● 글을 마무리하자. 필자가 메를로 퐁티의 '육화'와 '키아즘'의 개념으로 살펴본 박예지의 관계 연습은 여전히 실험을 거듭하는 중이다. 그녀는 '말'이라는 주제와 소재를 '투사된 또 다른 자아'인 페르소나이자 동시에 '유사성이 없는 두 개의 대상이 만나는 비유'인 메타포로서 대면하면서 만남의 관계학을 실행하는 중이다. 나-작품-관객-타자-사물-세계와의 '관계 맺기'를 말이다. 그녀가 '통하여(à travers)'를 전시 주제로 내세운 적이 있었듯이, 박예지는 그동안 '말을 형상화하는 조각'을 '통해서' 자신과 자기가 몸담은 세계를 오늘도 다각도로 성찰해 왔다. ● 박예지는 그동안 말 머리만을 습작처럼 지속해서 다양한 조형 실험을 거치거나, 철판 위에 용접봉을 올려서 용접을 통한 관계 맺기를 변주하거나, 말의 표면을 회화적 질감으로 만드는 다양한 실험을 시도해 왔다. 또한 말의 몸통을 일부 비워 투과체의 조각으로 만들기도 하고, 조각이 드리우는 그림자와의 관계를 탐구하면서, 작품들을 연극적 무대 위에 올려놓은 듯 설치를 변주하는 조형적 실험을 선보이기도 했다. ● 9회째가 되는 이번 개인전에서 박예지는 더 본질적인 세계에 깊이 천착한다. 이전까지 '말의 형상을 통하여', '나-타자-세계와의 관계 맺기'에 골몰해 왔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24개의 마음을 담은 그릇 형상을 통해서', '나-사물-세계와의 관계 맺기'를 실험한다. '채우고, 비우고' 라는 주제를 내세운 이번 전시에서, 박예지는 용접봉을 용접으로 이어 붙여가며 바닥으로부터 구불구불 몸체를 만들어 나간 작은 그릇 작품들을 선보인다. 작업 과정에서부터 한 땀 한 땀 점 용접을 시작으로 선 용접을 전개하고 이것을 다시 2차원의 면과 3차원의 입체로 확장하는 까닭에 창작에 있어서 지난한 노동력과 인내 그리고 집중력은 필수적이다. ● 그래서일까? 작품명은 '명상(Meditation)'이다. 용접봉이라는 조각의 기초적 질료인 사물로부터 출발해서 그릇이라는 예술적 사물을 만들기까지, 용접봉이 자기 몸을 다른 것들의 몸과 함께 녹여 관계 맺기를 지속하는 지난한 노동의 작업은 차라리 명상에 가깝다. 마치 백팔번뇌를 하며 고통 속에 자신을 던져 명료한 정신의 세계에 이르고자 하는 명상처럼 말이다. ● 이번 개인전에서도 우연으로부터 필연으로 이어지는 '관계 맺기', 미시적 관계로부터 거시적 관계로 이어지는 '관계 맺기'는 지속된다. 특히 반복적인 용접의 방식으로 구체(球體)에 가까운 그릇 만들기에 집중했던 이번 전시의 출품작들은 '무수한 차이의 반복'을 낳으면서 좌우대칭이 완벽한 시메트리(symmetry) 구조가 아닌 달항아리와 같은 애시메트리(asymmetry)의 그릇 형상을 선보인다, 삐뚤삐뚤한 구조와 형상이지만 우리는 거기서 작가의 지난한 노동과명상이 남긴 '육화의 형상'과 '키아즘의 내용'을 읽어낼 수 있다. ● 말의 다양한 형상 탐구라는 이전의 조형 실험으로부터 그릇이라는 단순한 형상에 집중하는 이번 전시는 그녀의 작업이 함유하고 있던 육화와 키아즘의 본질에 더욱더 깊이 잠입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관계 맺기 혹은 관계 연습이라는 주제에 관한 본질적 세계와 심리적 차원에 더욱더 깊이 성찰한 이번 전시는 그녀의 작업이 품은 관계의 메시지와 미학이 무엇인지를 유감없이 선보이는 기회가 될 것이다. ■ 김성호

 

박예지_Meditation(명상) 1_6_철_10×12×12cm

마음을 어디에 두는지에 따라 사물이든 사람이든 관점도 관계도 다르다 예전엔, 글씨 하나 하나로 이해가 되던 것이 요즘은 글씨 뒷면의 마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 '어떻게 그렇게 감정이 고요하세요?' 스무 살 초반에 이런 질문을 한적이 있다. 그리고 머리로만 이해했던 것이 이제는 온 몸으로 느껴지며 알게 되었다. ● 이번 작업에서 점 용접은 선 용접이 되고, 선 용접은 면으로 표현되는 과정에서 한 방울 한 방울 집중력이 인내로 나를 바라보게 한다. 눈은 시리고, 피로감 또한 남 다르다. 힘들고 괴롭다. 자신을 쥐어 짜는 고통이 시작된다. 하지만, 이 또한 마음이 움직여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잡다한 생각들 그 생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집중력을 떨어뜨리고 생각이 더미가 되어 그 안에 갇혀 그것들과 하나가 되더니 순간, 모든 생각이 사라진다. ● 기계처럼 한 점 한 점 이어지는 행위에서 흩어졌던 생각들이 그 점들 안으로 녹아 사라진다. 가끔 그 생각마저 들지 않는다. 그 순간 고요하고 나는 생각에서부터 자유로워진다. ● 이 순간 깊은 물 속의 고요함 갑자기 설레고, 행복해하며, 감사하고, 슬퍼진다. ● 말(馬)로만 표현했던 이전 작업과 달리 이번에는 '마음의 그릇'을 표현해 봤다. ● 마음의 그릇은 무엇인가?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질문했던 것. 이것을 이번에 작업으로 풀어내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 저 넓은 바다도 담을 수 있고, 저 높은 하늘도 담을 수 있는 당신의 마음 그릇이 투영되길 바란다. ■ 박예지

 

Vol.20220702e | 박예지展 / PARKYEAJI / 朴玴摯 / sculpture

8월의 일요일들

 

양화선展 / YANGHWASUN / 梁和善 / sculpture 

2022_0608 ▶ 2022_0620

 

양화선_가보지 않은 풍경-17_도자_25×23×20cm_202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2:00pm~06:00pm

일요일_12:00pm~05:00pm

20일_12:00pm~04: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안국동 7-1번지)

Tel. +82.(0)2.738.2745

www.gallerydam.com@gallerydam_seoul

 

 

갤러리 담에서는 6월에 조각가 양화선의 『8월의 일요일』이란 주제로 전시를 기획하였다. 양화선은 기존의 브론즈라는 빛나고 견고한 재료를 사용해서 작업을 해왔으나 이번에는 작가의 신체 물리적 나이에 맞게 흙으로 부조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흙이 주는 부드러운 물성이 나이든 칠 십대 중반의 작가에게 따스함과 위로를 주고 있음을 작업에서 느낄 수 있다. 도자작업이 주는 가마안에서의 유약의 변화와 터짐등이 작가의 나이에는 자연스레 포용하면서 즐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평상시에 책을 즐겨보는 작가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8월의 일요일』이라는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서 이번 전시제목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번 전시에는 신작 15여점이 선보일 예정이다. ■ 갤러리 담

 

양화선_팔월의 일요일들-1_도자_2×47.5×20cm_2022
양화선_팔월의 일요일들-2_도자_44×31.5×6cm_2022

8월의 일요일-나는 푸른 그늘 아래로 간다 / 세계 위에 / 지붕과 풍경들 위에 / 내 몸을 풀어놓고 싶구나 / 나의 꿈속에서는 쥐를 쫓는 / 불타는 욕망과 함께 - 파블로 네루다, 「고양이의 꿈」 ● 햇살을 가득 머금은 고양이가 지붕 위에서 녹촌리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삼십 여년의 봄과 겨울을 견뎌낸 나무는 작업실 벽과 지붕을 따라 고양이에게로 손을 뻗는다. 술래를 찾다 미로 같은 골목에서 길을 잃은 소녀는 연원을 알 수 없는 푸른 바다를 만나고 태초의 바람을 찾아 이정표 없는 길을 따라 낯선 목적지를 여행한다. 그곳은 피안의 세계. 하얀 햇살로 살을 데우는 둑 위에 지중해처럼 앉아 있는 고양이가 있는 곳. 결코 다다를 수 없는 과거가 고대 도시처럼 펼쳐진 세계. 하지만 결코 오지 않을 미래. ● 작품 속에는 보드라운 햇살, 비밀을 숨긴 친근한 바다, 푸른색을 머금은 잎과 나무, 그리고 머물다 떠나는 모든 것처럼, 꿈과 인간의 관계처럼 이들 사이를 스쳐 지나는 바람이 있다.

 

양화선_팔월의 일요일들-3_도자_19.5×31×18cm_2022

양화선은 1986년 첫 번째 개인전에서 선보인 테라코타 이후 30여 년 동안 브론즈, 건축모형재료, 유리조각, 에폭시 등 현대 문화의 산물로 쓰이는 재료들을 혼합하여 풍경조각(landscape sculpture)이라는 장르를 독보적으로 발전시켜왔다. 그리고 최근 다시 흙으로 돌아왔다. 인생의 비유처럼 흙에서 다시 흙으로 돌아온 셈이다. ● 조각의 많은 형식은 돌, 철, 나무, 스테인레스스틸 등 재료의 속성에서 만들어지고 그것으로 인해 여타 예술 형식과 차이를 갖는다. 그 차별성이 조각을 조각답게 하는 것도 있지만(가령 양감, 질감, 기념비성, 매스 등) 또한 이러한 재료적 특성으로 인해 형식이 제약되기도 한다. 그래서 전통적인 재료를 다루는 조각가들은 대부분 강도 높은 육체노동자가 되어야한다. 작가 역시 첫 개인전 이후 오랜 시간 브론즈로 풍경 조각을 해왔다. 세월이 흐르니 강도 높은 브론즈는 자연스럽게 부드러운 흙의 유연성으로 변하게 되었다. 흙을 빚고, 긴 시간 천천히 건조시키고, 색을 칠하고, 굽고(작품이 가마에서 익어가는 시간은 작가에게 더할 나위 없는 묘한 설렘과 기대감의 시간이다) 열을 식히는 일련의 창작 과정은 기존 조각에서는 가져보지 못한 가슴 뛰는 경험이다. 마치 품 안에 편안히 안기는 아이처럼 작업은 침착하고 조용하게 전개되지만 형태와 색채의 자유로움과 다채로움은 조각과 회화라는 장르를 넘나드는 희열이 있다.

 

양화선_팔월의 일요일들-4_도자_20×37×4cm_2022

최근작들은 자연(풍경)묘사는 어렴풋하고 인물은 어눌하다. 어리눅은 형상, 색상표로 포착되지 않는 색채는 작품이 생명과 흐름, 바람 같은 유동적인 것들에 기대어 있기 때문이다. 무릇 생명의 모습은 포착할 수 없음이다. 너와 나의 경계가 겹쳐 있음이고 대상과 마음이 포개져 있음이다. 풍경조각은 이제 나무와 인물의 형체가 명확한 바깥보다 흐리멍덩한 속살과 맥박으로 표현된 내면의 풍경으로 다가온다. 인간의 마음이 점액질이듯 풍경은 이제 마음이다. 새로운 풍경조각으로 나아가는 셈이다. ● 하늘 바다 햇살 나무 바람으로 우주 공간을 포괄하고 시간을 은유하는 것은 자연 영역만이 아니라 정신의 움직임 즉, 자기 초월의 영역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삶의 덧없음 vanité과 세상이 비어 있음vacuité을 아는 노년의 작가가 건네는 실존과 자유의 풍경은 아닐까. ■ 정형탁

 

양화선_팔월의 일요일들-5_도자_12×63×11cm_2022
양화선_팔월의 일요일들-7_도자_9×44×19cm_2022

2020년에 처음 도자 작업을 시작했다. 1986년에 열린 첫 번째 개인전을 테라코타로 시작했으니, 흙으로 시작하여 30여 년 만에 다시 흙으로 가는 셈이다. 그동안 작업의 내용에 따라서 그 재료를 달리했지만 대부분은 브론즈를 사용했다. 브론즈를 통한 섬세한 표현에 만족하면서도, 점토가 석고 캐스팅과 주물 공장에서의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본연의 형태를 잃어가는 것, 그리고 원하는 대로 색을 만들어낼 수 없는 것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 도자 작업을 하는 동안 나는 오롯이 혼자만의 공간에 머물며 작품을 완성해 나간다. 50×50×70cm는 내가 사용하고 있는 가마의 최대 면적이다. 점토를 준비하고 형상을 빚기 전에, 먼저 가마의 면적과 곧 만들게 될 작품의 크기를 맞추어 본다. 흙을 주무르는 손끝에서 강인함과 섬세함을 동시에 발견한다. 작품의 건조와 소성을 마치고 가마의 문을 열 때마다, 불안과 기대, 실망과 환희가 공존한다. 색채는 변화무쌍하며 자유롭다. 다채로운 형태의 정신적 부침을 겪는 과정은 도자 작업이 안겨주는 커다란 기쁨이며 기대감이다. (2022년 5월) ■ 양화선

 

Vol.20220608f | 양화선展 / YANGHWASUN / 梁和善 / sculpture

얼음 위의 불

김재형展 / KIMJAYHYUNG / 金在亨 / painting

 

2022_0426 ▶ 2022_0509

김재형_고양이 세수_리넨에 유채_99×75cm_202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

5월 9일_12:00pm~02: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안국동 7-1번지)

Tel. +82.(0)2.738.2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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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담에서는 오랫동안 미국과 독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 김재형의 국내 첫 개인전을 기획하였다. 작가는 한국에서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한 후 더 많은 학습을 위해 영국 Chelsea College of Art and Design 에서 석사과정을, 그후 독일 뮌휀미술대학에서 공부를 마친 후 지금은 뮌헨에서 자리를 잡고 활동하고 있다. ● 김재형은 오랜 시간 동안 다닌 여행에서 작업의 영감을 얻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출품하는 대부분의 작품들은 북인도 레에서 티벳탄들이 살고 있는 풍경들이 배경이다. 산소도 희박한 고도에서 풀들이 자라는 시간은 불과 여름 한철 두 서너 달밖에 되지 않는 곳에서 유목민으로 살아가는 모습에서 고국을 떠나 이국에서 삶과 작업을 병행하는 모습에서 어떤 부분에서의 동질성을 느꼈을 것으로 가늠된다.

 

김재형_꽃, 늦은 가을_리넨에 유채_100×130cm_2022

 

김재형_눈 치우기_리넨에 유채_75×110cm_2022

『얼음 위의 불』이라는 전시제목에서 시사하듯이 삶은 얼음판 위에서도 생존을 위한 온기-따스한 물-를 얻기 위해 얼음 위에 불을 지피는 장면에서 극한의 삶 속에서 삶은 지속되고 있음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 Sabrina Kofahl은 작가 김재형의 작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김재형은 여러 해 동안 자연 속에서 삶과 죽음의 순환과 다양성, 그리고 그 두 가지가 시공간적으로 어떻게 변해왔는지에 대해 몰두해 왔다. 그의 작품은 현재의 질문에 대한 답을 과거에서 찾는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 자연과 삶의 순환의 연결 고리에 대해 직감적인 해석과 비전을 제안한다.

 

김재형_얼음 위의 불_리넨에 유채_95×140cm_2021
김재형_불, 얼어 붙은 강_리넨에 유채_90×130cm_2021

"뜨거운 물 한 주전자를 위해 눈을 헤집어 길을 내고 얼음 아래 흐르는 물을 떠낸다. 장작을 쪼개고 말린 소똥을 넣어 불을 피운다. 흙은 기름기가 없고 비는 일 년 내내 내리지 않는다. 하지만 눈 내리는 겨울은 길고 작물이 자라는 여름은 짧다. 말 한 마리 겨우 지나가는 비탈길로 고개를 넘고 넘어 이틀을 걸으면 옆 마을에 닿는다. 제법 자란 10대 소녀는 도시가 궁금하고 창밖을 자주 내다본다. 어린 아이들은 놀 시간이 남아돌아 즐겁다. 어른들은 일 년 내내 바쁘지만 미소와 여유가 있다. 고향을 떠난 젊은이들은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매해 거친 겨울마다 어린양들 중 절반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는다. 겨울에 어른들은 유독 직접 빚은 술을 많이 마시고 아이들도 조금씩 마신다. 눈이 오지 않는 날의 하늘은 아찔하게 파랗고 태양은 머리 위에 가깝다. 잘라 놓은 나무들은 뙤약볕을 이기지 못해 모두 끝이 터져나간다. ● 이 곳에서 생각과 감정으로 짜집기 해놓은 나를 붙잡고 있기에는, 하염없이 내리는 눈이 너무 무겁고 많다. 마음이 만드는 허상을 세워 놓기엔 삶은 소박하고 단순하다. 비가 오지 않는 땅에 봄이 오면 겨울에 쌓인 수 많은 눈이 녹아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다. 꽃은 봄마다 피지만 한해도 같은 꽃이 피지 않기에 매번 새롭고, 어떨 때는 사람의 경험이 부질 없다는 생각도 든다. 난로 위에 물이 끓는다. 마침 북쪽 산으로 소와 양을 몰고 유목을 갔던 친구가 닷새 만에 마을로 돌아왔다." (작가의 작업 노트 중) ● 이번 전시에는 북인도의 레의 풍경과 티벳탄의 삶이 담긴 그림들이 12여점 전시될 예정이다. ■ 갤러리 담

 

김재형_그 산 너머_캔버스에 유채_90×75cm_2021
김재형_사막의 어린시절_리넨에 유채_100×130cm_2021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은 영양분으로부터 몸에서 발열하거나 움직임을 위한 에너지를 얻는다. 그리고 춥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 그 에너지는 더욱더 도드라져 보인다. 마치 하얀 눈밭을 걸어가는 검은 소처럼. 검은 소는 천천히 발자국을 만든다. 나무 없는 산의 새벽에 피어오르는 연기는 지나가는 사람의 눈을 사로잡는다. 의도적이거나 인위적인 행동은 그 흔적이나 결과를 만든다. ● 보리와 쌀이 생존할 수 있는 적당한 온도가 있다. 그것은 야크도 코끼리도 모기도 인간도 그러하다. 그리고 그 해당 온도 지역에서 생명체들 사이에 삶의 순환이 있다. 그중에 뜨거운 지역도 있고 차가운 지역도 있다. 뜨거움과 차가움이 묘하게 공존하는 지역이 있는데 차가운 사막이 그러하다. 그림자 속에 서서 햇빛을 향해 팔을 뻗으면 몸은 동상을, 팔은 화상을 입는다. ● 여러 자연의 순환 속에서 사람들은 생존과 개체 유지 이외의 활동을 한다. 사람들은 마음이 차가웠다 뜨거웠다 한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에는 '죽은 사람은 상처받은 마음보다 무겁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사람의 마음의 온도와 사람의 생존은 서로가 얽혀있다. 살기에 척박한 곳에서는 그 얽힌 부분이 잘 보일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작업은 그 얽히는 부분이 도드라지는 순간이 드러남을 만나고 그 흔적을 남기는 데에 있다. ■ 김재형

Vol.20220426a | 김재형展 / KIMJAYHYUNG / 金在亨 / painting

 

 

달빛에 물들다

 

최인호展 / CHOIINHO / 崔仁浩 / painting 

2022_0315 ▶ 2022_0327

 

최인호_달빛에 물들다_패널에 아크릴채색, 재_71×52cm_2020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27

일_12:00pm~02: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안국동 7-1번지)

Tel. +82.(0)2.738.2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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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의 회화  삶은 혹, 꿈을 꾸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에 골방이 있다. 쪽창으로 흘러드는 빛과 반쯤 지워진 모서리가 이곳이 실내임을 말해주는 방이다. 쪽창이 환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낮일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빈방에 다만 둥근 테로 장식한 거울이 하나 걸려 있다. 방 안은 아마도 창으로 흘러들어왔을 부드러운 빛의 질감으로 은근한 것 같기도 하고, 연문지 해문지 알 수 없는 공기로 희뿌연 것도 같다. 그리고 벽과 바닥이 접한 모서리 부분에 한쪽 팔을 머리에 괴고 한 남자가 모로 누워있다. 뒤척이는 것도 같고 선잠을 설치는 것도 같은 남자는, 잠을 자는가. 꿈을 꾸는가. 잠결에 꿈을 꾸는 것인가. 꿈속에서 잠든 것인가. ● 은근한, 희뿌연 공기가 잠과 꿈의 경계를 지우는 것도 같고, 현실과 비현실의 지경을 넘나드는 것도 같다. 여기에 이곳이 다름 아닌 방임을 말해주는 반쯤 지워진 모서리는 경계를 견고하게 하기보다는 해체를 위해 있는 것도 같다. 그는 무슨 꿈을 꾸는가. 혹 삶이라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거울 속에 얼핏 한 사람이 서 있는 것도 같다. 흐릿한, 애매한, 마치 흔적과도 같고 그림자와도 같은 그는 누구인가. 이방인? 유령? 분신? 보르헤스는 거울 속에 타자들이 산다고 했다. 자기_타자다. 그렇게 거울 속 희뿌연 사람이 방에 모로 누워 잠든, 혹 삶이라는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를, 다른 한 사람을 보지 않으면서 보고 있다. 그렇게 삶은 혹, 꿈을 꾸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억일지도 모르고, 추억일지도 모르고, 존재의 희미한 그림자를 더듬는 것인지도 모른다.

 

최인호_활절 달걀_패널에 아크릴채색, 재_45×53cm_2018
최인호_달빛에 물들다_패널에 아크릴채색, 재_104×85cm_2022

그리고 사람들이 있다. 얼굴 없는 사람들이 있고, 얼굴이 뭉개진 사람들이 있고, 얼굴이 어둠에 파묻힌 사람들이 있고, 무표정한 사람들이 있고, 흙 같고 질감 덩어리 같은 사람들이 있고, 마치 흔적과도 같은 사람들이 있다. 물 속이나 물 위에 부유하는 사람들이 있고, 바람 속에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고, 흙 위에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유령처럼 길 위에 서성이는 사람들이 있다. ● 개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이 있고, 아마도 웃음 속에 울음을 감춘 사람이 있고, 얼굴을 가면처럼 쓰고 있는 사람이 있고, 곰팡이와 함께 해체되는 사람이 있고, 비처럼 흘러내리는 사람이 있고, 벽이나 땅속으로 스며드는 사람이 있고, 종잇장 같은 사람이 있다. 등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고, 긴 그림자를 밟으며 걸어가는 사람이 있고, 뱃전에 선 사람이 있고, 샤워를 하면서 우는지 웃는지 모를 사람이 있다. 목도리를 한 남자가 있고, 꽃을 든 남자가 있고, 멍하게 창밖을 보는 남자가 있고, 머리에 관을 쓰고 있는 남자(어린 왕자)가 있고, 낮술에 취한 남자가 있고, 불안처럼 빨간 기우뚱한 벽에 기대선 남자가 있다. ● 이 사람들은 다 누구인가. 아마도 기억과 회상으로 불러낸, 그렇게 작가의 일부가 되고 자기를 분유하는, 작가의 분신들일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는 심지어 현실을 그릴 때조차 과거처럼 보이고, 흔적처럼 보인다. 상처가 아문 자리처럼 보이고, 정서로 승화된 외상처럼 보인다. 연민의 집인 사진 앨범 속 빛바랜, 색 바랜, 낡은 사진처럼 보인다. 그렇게 작가는 혹 그때의 그리고 지금의 자기를 호출하는 한편, 자기 분신 그러므로 자기를 분유하고 있는 타자들(자기_타자)과 대면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최인호_아침식사_종이에 아크릴채색, 재_60×72cm_2017
최인호_새벽길_종이에 아크릴채색, 재_62×91cm_2020

그림을 보면, 왠지 자기와 닮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림을 그린 사람을 알 것도 같은 그림이 있고, 그렇지 않은 그림이 있다. 그 사람을 보는 것 같은 그림이 있고, 그렇지 않은 그림이 있다. 그림과 사람이 일치하는 그림이 있고, 그림과 사람이 동떨어진 그림이 있다. 회화의 자율성과 예술의 형식논리에 천착한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견인된 추상미술이 아니라면, 대개 어떤 식으로든 약간씩은 그림과 사람이 닮기 마련인데, 그중에서도 유독, 많이 그런 사람이 있다. ● 최인호가 그렇고, 그가 그림 그림이 그렇다. 쓸쓸한 것 같기도 하고, 우울한 것 같기도 하고, 세상에 저 홀로 내던져진 것 같기도 하고, 칠흑 같은 우주를 저 홀로 떠도는 미아 같기도 하고,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하고, 대기 속으로 사라지고 말 희박한 존재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존재의 흔적 그러므로 존재가 잠시 머물다 간 빈자리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눈을 돌려 다시 보면 사라지고 말 신기루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현실에서조차 과거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득하고 아련하고 아린 기억을 더듬는 것 같기도 하고,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어둠 속을 헤집는 것 같기도 하고, 밑도 끝도 없는 심연의 나락으로 추락하는 것 같기도 하고, 도돌이표처럼 매번 자기에게로 되돌아오는 것도 같다. ● 그림 속 자기가 그렇고, 타인이 그렇고, 개가 그렇고, 고양이가 그렇다. 골방이 그렇고, 쪽창이 그렇고, 때 묻은 거울이 그렇고, 아마도 반어적으로 머리에 쓰고 있을 관이 그렇다. 구름이 그렇고, 노을이 그렇고, 총총한 별이 그렇고, 교회 첨탑이 그렇고, 풍경이 그렇다. 세상천지가 자기를 증언하는 무대가 되고, 그렇게 사물마저 자기를 발설하기 위해 소환되고 육화된 풍경(사물 인격체?)이라고 해야 할까. 세상 자체가 자기를 분유 그러므로 나누어 가지는 자신의 분신이고 화신이라고 해야 할까. ● 아마도 그림 밖 작가도 유독, 많이 그럴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해도, 최소한 작가가 자신에 오롯이 집중하는 순간 그러므로 그림을 그릴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친숙한, 낯익은, 낯 설은, 생경한, 이율배반적인, 편안한, 불안한, 마치 유령과도 같은 존재의 방문을 받는, 그러므로 자기_타자를 맞아들이는 치열한 순간이 있을 것이고, 그 치열한 순간을 그림으로 옮겨 그렸을 것이다.

 

최인호_기다리는 사람_패널에 아크릴채색, 재_45×53cm_2015
최인호_달빛에 물들다_패널에 아크릴채색, 재_107×90cm_2022

그렇게 옮겨 그린 작가의 그림이 어눌하고 어설프다. 그래서 오히려 더 정겹고 살갑다. 그림 속 사람들은 묘사가 무색할 만큼 대충 그린 것 같고 그리다 만 것 같다. 되는대로 조물조물 빗어 만든 흙덩어리를 보는 것도 같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정겹고 살갑게 다가온다. 정겹다는 것은 마음으로 와닿는다는 것이고, 살갑다는 것은 몸으로 와닿는다는 말이다. 마음으로 그린 그림이고 몸으로 그린 그림이다. 그래서 작가의 그림은 그림을 읽기 위해 애써 노력할 필요가 없다. 저절로 와 닿아서 불현듯 공감을 일으키고 부지불식간에 정감을 파고들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있을, 혹 그새 전설처럼 아득해졌을지도 모를 저마다의 자기_타자를 추억처럼 되불러오고 있기 때문이다. ● 그렇게 그림으로 불러낸 사람들이 조금은 슬퍼 보이고 외로워 보이고 쓸쓸해 보인다. 저만의 방, 저만의 바다, 저만의 배, 저만의 창, 저만의 거울, 저만의 햇볕, 저만의 풍경 속에서 그가 세상 밖을 조심스레 내다본다. 그가 보는 세상은 예각으로 기우뚱한 벽에 기대고 선 사람처럼 불안정하고, 일엽편주에 몸을 실은 사람처럼 정처 없고, 몸 안쪽을 감싼 채 웅크리고 있는 사람처럼 막막하다. 적어도 외관상 보기에, 그는 표정이 없다. 붓질이 표정이고 색감이 표정이다. 몸짓이 표정이고 질감이 표정이다. 작가는 이처럼 몇 안 되는 색깔과 어눌한 묘사만으로 희한하게 온몸으로 표정을 밀어 올리는 그림을 그려놓고 있었다. ●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가 여럿 있지만, 그중 결정적인 경우가 연민이라고 생각한다. 존재에 대한 공감이다. 이런 공감이며 연민이 없으면 예술도 없다. 작가의 그림이 이런 존재론적 연민으로 물씬하고 뭉클하다. 덜 그린 듯 어눌한 듯 보는 이의 심금을 파고드는 그림이 감정적 유격(작게 흔들리다가 점차 크게 흔들어놓는)으로 인해 오히려 완전하다고 해야 할까.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를 작가적 텍스트와 독자적 텍스트로 구분한다. 그저 수동적 읽기를 수행하는 텍스트가 독자적 텍스트라고 한다면, 읽으면서 동시에 자꾸 쓰게 만드는, 독자이면서 동시에 작가를 요구해오는, 능동적 읽기를 요구해오는 텍스트 그러므로 열린 텍스트를 작가적 텍스트로 규정한다. 작가의 그림이 그렇다. 어눌한 붓질과 몇 안 되는 색감으로 이루어진 작가의 그림은 그러나 오히려 함축적이고 암시적이다.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미 결정된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하이데거의 세계 내 존재)의 자의식으로, 세상이 낯설고 자신마저 낯선 실존적 징후와 증상(자기소외와 부조리의식)으로, 그럼에도 자기를, 자기_타자를, 타자를, 세계를 감싸 안는 존재론적 연민으로 공감을 얻고 보편성을 얻는다. ■ 고충환

 

최인호_해질녘_패널에 아크릴채색, 재_Φ 80cm_2022

어떤 날은 맑았고 어떤 날은 흐렸다. 내 마음대로 예외없이 그랬다. ● 대부분 흐린 날이 좋았다. 그런 날은 내가 살아있는 것 같고 '전기에 감전된 듯' 일상을 뛰어 넘을 수 있었다. ● 이번 전시는 이런 날에 만들어진 작업들이며 제목을 『달빛에 물들다』로 정한다. (2022. 2. 12 가평, 제령리 작업장에서) ■ 최인호

 

 

Vol.20220310d | 최인호展 / CHOIINHO / 崔仁浩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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