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 특종* 역사를 말하는 사진

저자 : 전민조

발행 : 2013년2월19일

규격 : 285cm x 238cm 양장본

면수 : 136면

가격 : 25,000원

출판 : 눈빛출판사

 

 

 

 

 

 

 

앞만 보고 달리는 바쁜 세상일수록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는 시간들이 더욱 소중해 진다.

오랫동안 잊었던 아련한 추억들을 되살려 각박한 현실 속의 원기소가 되어주기도 하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일지라도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반면교사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지 서재에 꽂힌 많은 사진집 중 유독 손길이 자주 가는 사진집이 사진가 전민조

씨가 엮은 “특종* 역사를 말하는 사진”이다.

 

한국현대사의 숨 막히는 순간들이 사진기자들의 카메라에 포착된 특종 사진들로,

그 책에는 여수, 순천 반란사건, 3.15부정선거의 현장, 최류탄이 박힌 채 바다에 떠 오른

김주열군의 시신, 1.21사태의 김신조, 쿠테타의 주역들, 육영수여사 피격사건, 피로 물들인

광주항쟁 등 정치적으로 감추려 한 사건이나 갑자기 벌어진 정치적 사건들이 사진기자들의

끈질긴 집념에 덜미 잡힌 장면들이다. 신민당 전당대회 후 김대중후보 지지 당원들에게 쫓겨

도망치는 김영삼의원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머금게 하고, 추정만 할 뿐 아직까지

구체적인 배후가 밝혀지지 않은 정인숙 피살사건 등 현대사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중요한 사건

현장들이 망라되어 있다.

사진 기록성의 가치를 말없이 보여 준 이 책은 만드는 사진이 판치는 현실에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오래전 어느 매체의 광고 카피로 등장한 문구가 갑자기 생각난다.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고...

 

이 책을 엮은 전민조씨는 서라벌예대 사진과를 졸업한 후 평생을 기록사진에 종사한 사진기자

출신이다. 중학생 시절 본 ‘민주혁명의 기록’이란 화보집에 감명 받아 사진기자가 될 작정을 한

타고 난 사진기자다. ‘여원’과 ‘한국일보’를 거쳐 ‘동아일보’에서 정년퇴임한 후 ‘사진이 모든 것

을 말해 주었다“라는 개인 블로그에 많은 글과 사진들로 말하고 있다.

그를 생각하면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사진들이 여럿 있다.

만원 버스에 매달려 가는 차장(안내양), 보행 질서 위반한 사람들을 모은 사진 등, 한 시대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진들이 ”그때 그 사진 한 장“(눈빛) 사진집에 대부분 실려있다.

특종 사진들이 중요 사건 위주의 기록이었음에 비해, 전민조의 '그때 그 사진 한 장"은 평범한

우리들의 오래된 이야기라 그 울림이 더 친근하다.

 

2013.5

조문호


 

 

백남이 (시인)

 

 

신동여 (도예가)

 

고) 이선관 (시인)

 

 

김언경 (설치미술가)

 

 

이청운 (서양화가)

 

 

 

고) 김영수 (사진가)

 

 

고) 천상병 (시인)

 

박신정 (조각가)

 

 

김신용 (시인)

 

고) 홍수진 (시인)

 

윤희성 (카페주인)

 

장 춘 (불화가)

 

 

윤소정 (영화배우)

 

김상덕 (무직)

 

고) 박재삼 (시인)

 

최울가 (서양화가)

 

배평모 (소설가)

 

고) 이종문 (음악인)


 

사진가 정영신의 장터순례⑽ 인천 강화장

 

화문석·꽃방석·꽃삼합…왕골공예품 즐비

 

 

고려땐 천도한 이후 생겨
일찍이 외국과 직물·도자기 등 무역
상거래 활발해지자 보부상들 몰려

전등사 전설 등 숱한 이야깃거리

인삼막걸리·밴댕이회 ‘일품’
고소한 순무김치도 입맛 자극



 장터 맛은 사람 맛이다. 사람들이 어울려 형성되는 것이 장인데, 그중에서도 사람 중심의 장이란 느낌이 강하게 와 닿는 곳이 바로 강화장(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이다.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만들어 왔고, 볼거리와 먹거리 또한 넘치는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다섯번째로 큰 섬인 강화도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할 정도로 문화 유적지가 많아 역사가 숨 쉬는 곳이기도 하다.

 옛날에는 강화읍내 동락천을 중심으로 웃거리장과 아랫거리장이 있었고, 새벽녘이면 아랫거리장 옆에 화문석장이 열렸다. 강화장은 고려 때 강화로 천도한 이후 생겼다고 한다. 외국 무역이 일찍 이루어졌기에 직물이나 화문석·도자기가 거래되기도 했다. 상거래가 활발해지자 보부상들이 하나둘 강화도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오일장이 서게 되었고, 1960년대에 상설시장과 함께 장터가 생겼다. 1993년에 강화장의 중심인 동락천이 복개되면서 이곳으로 100여명의 지역 주민들이 농산물과 특산품을 싸 들고나와 난장을 펼쳐 장을 만들어 갔다. 지금은 2일과 7일이 드는 날마다 오일장이 열린다.

 김포에서 강화대교를 건너면 강화장의 파라솔이 사람들을 반긴다. 봄날 장터를 둘러보면 할머니들 보자기 위에 들판이 통째로 마실 나온 것 같다. 사람들 발자국 소리에 놀란 듯 나물들이 고개를 바짝 곧추세우더니 할머니 손길이 닿자 어느새 제 모양을 갖춘다. 시집가는 색시처럼 들떠 있는 색색의 나물에서 고향을 만난다.

 “화문석 하나 만드는 데 60만번의 손길이 닿아야 한다”는 유의순 할머니(80)를 화문석 파는 가게에서 만났다. 송해면에서 온 유씨 할머니는 30년 동안 화문석을 짜 왔기에 요즘도 장에 나오면 화문석부터 구경한다면서 “그 시절 장날은 사람들 솜씨 구경하는 재미도 있지만 매겨지는 값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날이기도 했다”고 회고한다. 토산품매장에는 화문석과 꽃방석·꽃삼합 등 손으로 만든 완초(왕골) 공예품들이 즐비하다. 화문석 매장을 운영하는 김영숙씨(73)는 지금도 인근 마을에서 화문석 만드는 사람들로부터 물건을 받아 ‘강화 화문석’만 판다고 한다.

 “내가 장아찌 만드는 일에만 매달렸으면 대한민국 돈은 전부 내 주머니에 들어왔을 것”이라며 큰소리치는 김화자씨(74)가 쑥으로 만든 송편과 장아찌를 펼쳐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어 맛을 보인다. 맛보기로 건네준 송편을 받아먹던 어느 할머니가 대뜸 “전등사에서 벌거벗은 여인이 추녀를 떠받들고 있는 것을 보았느냐”고 묻는다. 전등사 전설의 한토막으로,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을 버리고 도망치자 절을 짓던 목수가 그 배신에 대한 노여움으로 벌거벗은 여인상을 조각해 평생 추녀를 이게 했다는 이야기다. “여편네들이 모이는 장터는 그런저런 이야기들을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해. 그러니 이거 말고도 숱한 이야깃거리가 떠돌고 있지.” 전등사 나부상 이야기를 꺼낸 박씨 할머니의 귀띔이다.

 강화는 북한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한국전쟁 이전에는 이곳 사람과 북한 사람이 결혼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곳곳에서 북한 사투리가 묻어나는 말씨가 들리기도 한다. “빨리 오시겨” 하는 지인의 소리에 놀란 박씨 할머니가 총총걸음으로 사라지는 장터 안 풍경이 살아 꿈틀대듯 정겹다.

 지푸라기에 엮여 온 달걀에서는 병아리가 뛰쳐나올 것 같고, 갓 쓴 엿장수의 가위 소리에 놀란 사물들은 춤을 추듯 출렁거린다.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산성 밑에서 자란 쑥은 역사를 이야기해 주고, 보자기에 펼쳐진 돌미나리는 새초롬하게 초록을 내뿜고 있다. 물동이 일 때 쓰는 똬리와 물 푸는 데 쓰는 표주박, 수수 줄기로 맨 빗자루까지 옛날 시골에서 사용했던 물건들이 모두 나와 있어 마치 장터가 이동 박물관 같다.

 장옥 2층에는 먹거리도 풍성하다. 인삼막걸리와 밴댕이회도 일품이지만, 강화 특산품인 자줏빛 동그란 순무를 듬성듬성 썰어 밴댕이젓갈로 양념한 순무김치의 고소함 또한 입맛을 자극한다. 음식 장사를 한 지 40년이 넘었다는 방씨 할머니(78)가 “이 짓이라도 하고 있어 내가 살지, 언제까지 할지는 나도 모르갓시다” 하며 또 음식을 만든다. 방씨 할머니도 다른 장꾼들도 모두 살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 쉬지 않고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사진들은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중위였던 조지 플러가 기록한 사진들입니다.

당시의 생활상을 흑백사진으로만 보아왔던 우리들에게 또 다른 감흥을 일깨워 주었는데,

연한 분홍빛과 초록저고리를 입은 소녀들의 옷차림에서, 그 시절의 의복들을 제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미군장교가 취미로 찍은 사진이지만, 기록에 대한 소중함을 다시 일깨워 주는 소중한 사료였지요.

 

본인 사후에 일본에서 동거했던 여인을 통해서 들어오게 된 필름들은

슬라이드 필름의 변색을 막기위해 오동나무상자에 잘 보관되어 있었답니다.

1996년 6월, 통신사 기자를 통해 들여 온 필름들을 인화해 삼성포토갤러리에서 전시회도 가졌고,

눈빛출판사에서 '끝나지 않은 전쟁'이란 제목의 사진집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신수진의 사진 읽기] [2]

 

대공황 온몸으로 버텨낸 '어머니'의 얼굴

 

1929년 뉴욕 증시가 붕괴되면서 찾아온 미국 경제 대공황의 폭풍은 거셌다. 도로테아 랭(Dorothea Lange·1895~1965)의 사진 속 여인처럼 대도시는 물론이고 농촌 지역에 이르기까지 집을 잃고 먹을거리를 찾아 떠도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들이 짊어져야 했던 삶의 무게를 상징적으로 기록한 이 작품은 사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사진 중 하나가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어머니이다.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나온 그녀에게 세 아이는 운명처럼 주어진 벅찬 고단함이자 살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쭈그려 앉은 양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매달리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그녀는 살아야 한다. 혼자가 아니기에 그녀의 하루하루는 더 가혹했겠지만, 혼자가 아니기에 그녀는 반드시 살아남았을 것이다. 홀로 어딘가를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에는 운명에 순응하는 자의 허망함과 결연함이 함께 깃들어 있다.

당시 미국의 행정부는 경제 위기로 양산된 이주민 노동자들을 재정착시키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경제학자 로이 스트라이커의 지휘로 경제 침체를 겪고 있는 지역을 순회하며 현장을 기록하는 일을 사진가들에게 의뢰했다. 도로테아 랭은 1935년부터 이 프로젝트에 참여해 14개 주를 돌며 1700마일에 달하는 여정을 소화해 냈다. 본래 꽤 인기 있는 인물사진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던 그녀는 이 일을 계기로 안락한 일터를 등지고 거리로 나아가 사회적 다큐멘터리에 집중하게 된다.

열정적인 그녀의 카메라에 포착된 수많은 장면 중에서도 이 사진이 유독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이유는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도로테아 랭은 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촬영하면서 스스로 세운 원칙을 고수했다고 한다. 억지로 꾸며대지 않고 자신이 마치 그들의 일부인 것처럼 현장에 남은 과거의 흔적과 현재를 고스란히 담고자 했던 것이다. 덕분에 이 사진에는 영원히 살아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남게 되었다. 오래전 낯선 아이들에 둘러싸인 여인의 모습에서, 우리의 어머니를 본다. 비록 남루하고 초라할지라도, 가족을 위해 기꺼이 젊음을 헌신한 모든 어머니에게 이 사진의 감동을 바치고 싶다.

신수진(사진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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