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생(生)과 사(死)를 접하는 일이 늘었다. 삶이란 무엇일까? 인간의 삶만큼 복잡한 것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질문은 보편적인 고민과 생각이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철학적이고 초월적이며,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의미를 찾게 한다. 유한하고 불완전한 존재인 우리의 삶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담겨 그 자체로 빛나고 아름다우며 찬란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전시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라는 주제에서 시작되었다.
노재석_뿌리 깊은 나무_대리석_66×50×18cm_2013
노재석의 조각은 자연의 형상을 닮아있다. 자연에서 채취한 돌을 깎고 다듬으며 제작한 작품은 생명의 유기적 형태와 기하학적인 요소를 담아 자연 그 자체로부터 체득된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펼친다.그의 작품에서 생명의 근원에 대한 새로운 조형언어를 탐구할 수 있다.
이태근 _ 바람 한 점 생각 한 조각 _ 그리스 백석 _50×27×14cm_2021
이태근의 조각은 작가 자신의 누이를 소재로 한다.누이는 우리 모두의 누이이기도 하다.그 누이는 실체가 있는 하나의 인격체이기도 하며,그 실체가 흐릿하거나 아예 없는 한 관념의 대상이기도 하다.이렇듯 실재하거나 때로는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누이를 통해 그리움과 향수의 원형을 표상한다.작가는 누이로 표상되는 친근하면서도 소박한 한국 여인의 초상의 한 전형을 제시하고 있다.
김도영_건너 바라보다 Ⅱ_한지에 분채_65×65cm×2_2023
김도영은 한옥과 한글을 기본요소로 한다. 이번 전시에 출품한 그의 작품은 한옥 공간에 추억의 정취를 감성적으로 표출해 내고 있다. 겹겹이 쌓아올린 채색과 차분한 발색으로 한국적인 감성을 더하고, 세세한 한옥 내부의 묘사와 옛 정취로 가족의 온기와 추억을 세밀하게 전달한다. 한옥이 지닌 미(美)와 어린시절의 따뜻한 추억의 감성은 우리네 보편적 삶의 자취를 만날 수 있다.
김준기의 '타자의 풍경'은 타자의 존재와 삶에 대한 이야기다. 재현이라는 끊임없는 그리기(긁어내기)의 행위와 그리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시간적 사고의 결합에 의해 만들어진 스펙트럼은 찰나적이고 지속적인 동시대를 살아가는 타자들의 삶에 대한 욕망의 이기를 반추하고, 자연스러운 삶이란 어떻게 사는 것인지에 대한 사유의 과정을 풍경의 한 장면을 통해서 은유적으로 성찰한다.
권하얀_The Original City Heart_영상설치_00:10:00, 가변설치_2022
권하얀은 오래된 공간에서 오랜 시간의 기억을 담은 작품은 공간 속 기억의 파편을 조각조각 연결하여 개개인의 기억을 담아낸다. 기억은 각기 다른 형태로 왜곡되거나 변형되어 덧씌워지고 현재를 상징하는 미디어아트와 겹쳐 다층적 구조의 상상을 이룬다. 허구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고향을 기억하는 조각들로 남아 우리의 과거를 채우고 기억의 레이어가 공간을 재구성하여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낸다.
정은진 _Cold Forest_ 피그먼트 프린트 _120×120cm_2016
정은진의 작품은 가장 어둡고 신비한, 불분명한 삶의 시간인 새벽 4시를 담았다. 캄캄하고 뭉근한 밤 공기는 사람의 마음을 비추어 시시각각 변화하며 마음을 흔든다. 타자의 겹겹의 삶을 세밀하게 포착하여 위로한다. 다중노출 촬영 기법으로 만들어진 풍경은 회화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공간을 만들어 입체적이고 다양한 시선을 내포하고 있다.
이후민_춤-no.9 a clown and balloons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0.3×60.6cm_2022
이후민은 어렸을 적, TV속 만화 주인공들을 보며 자란 일상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자신의 삶을 투영하여 기록한다. 캐릭터가 변조되어 낯설게 보이는 모습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시간의 흐름과 내면세계를 보여주고 캐릭터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동시대를 풍자적이고 해학적으로 꼬집어 본다. 그리고 시간의 기록을 캐릭터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고 달라지는 우리의 모습에 '존재'의 의미를 탐구한다.
최혜원_꿈이 자라는 집 1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97cm_2023
최혜원은 집을 기록한다. 집에 놓여진 물건들을 통해 나의 시간을 기록하고 흔적을 남긴다. 물리적 공간이자 정서적 공간인 집은 각자의 유토피아가 담겨있는 상징적 존재이다. 각박하고 비인간적인 삶과 삭막한 오늘의 현실에 꿈처럼 환상적이고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집에 개개인의 삶이 담겨있는 내밀하고 경험적인 측면을 담아 재정의해 본다. ● 『상이:삶의 예찬』은 '삶'을 자신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자신의 주체성을 타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구성한 작가 8명의 작품을 선보인다. 보이지 않는 요소들을 담은 이들의 이야기는 각기 다른 매체와 기법으로 시각화시켜 우리에게 메시지를 던진다.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전시는 우리가 세상을 더욱 넓게 이해할 수 있게 가능성을 제공한다. 전시를 다양한 각도에서 서로(相) 다르게(異) 바라보며 당신의 마음에 담아가길 바란다. ■ 정다예
조각가 김은현이 갤러리 담에서 『조각가의 드로잉』이라는 제목으로 아홉 번째 개인전을 갖는다. 작가는 그 사이 파리의 그랑 쇼미에르 아카데미의 크로키 반에서 드로잉 작업을 해왔으며, 이번 전시는 그 결과물들을 선보이는 자리이다. 작가가 드로잉과 조각 작품을 동시에 선보이는 것은 이번 전시가 처음이다. ● 인체 드로잉, 크로키는 조각 작업에 바탕이 되는 과정이다. 입체적 대상물이 뿜어내는 양감, 생명력, 동작을 통해 드러나는 형태감과 리듬을 포착하여 평면의 화폭에 담는다. 조각가의 손에 의해 표현된 굵직하면서도 날렵한 선들, 묵직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터치들은 지금은 잠시 평면의 화폭에 갇혀있지만 언젠가는 평면 밖으로 튀어나와 다시 입체의 형태로 되살아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김은현의 드로잉 작품들이 생명력과 강한 역동성을 보여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드로잉으로 표현되었던 작품과 그것을 입체적인 조형물로 되살린 작품을 동시에 감상하면 그것을 더 잘 느낄 수 있다. 이번 김은현 조각가의 드로잉전이 매우 풍성하면서도 다채로운 느낌을 주는 것은 여러 인종의 다양한 모델, 역동적으로 표현된 다채로운 동작들, 그것을 생동적으로 포착한 작가의 손맛이 어우러졌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번에 드로잉과 같이 전시되는 조각품들은 기존의 작품들과는 조금 다르다. 기존의 전시에서는 단아하면서도 고아한 명상의 세계를 표현한 작품들을 많이 선보인 데 비해 이번 전시에서는 인간 내면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는 집착이나 두려움을 표현한 작품들이 많다. 기법 면에서 새로운 변화를 보여주는 작품들도 있다. 입체적인 점토 덩어리 위에 평면적인 드로잉 기법을 활용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작가는 늘 그래왔듯이 흙이라는 재료의 물성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무심으로 꼬막밀기를 하다 어느 순간에 정제된 형태를 뽑아낸다. 이전의 작품들은 주로 그 형태에서 얼굴을 뽑아내는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그 위에 자연스러운 드로잉을 통해 손과 손톱을 표현한 작품들도 선보이고 있다. 입체적인 흙덩이와 평면의 드로잉 기법의 만남은 「집착」 시리즈 작품들에서 감상할 수 있다. 작가의 인체 표현 영역이 훨씬 확장되고 자유로워졌음을 느낄 수 있다. ■ 갤러리 담
사물의 입체 형태를 구현하는 나에게 있어서 드로잉은 가장 밑 작업이다. ● 리듬, 흐름, 양감, 생명력... 인체의 선이 점토 위에서 녹아진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과 생명의 자유로움에 다가서고자 오늘도 점토를 치대고, 형태는 오롯이 드러난다. 내가 나에게 다가서는 여행이다. ■ 김은현
예술과 물질 모두 집단 안에서 가치를 갖는다. 돈이란 스스로 가치를 갖는 것도 아니고 유용성을 지니는 것도 아니지만, 시장 참여자들이 믿으면 심지어 바다에 빠져 눈에 보이지 않는 돌도, 그 누구도 만져본 적 없는 비트(bit)도 화폐로 인정받는다. 잘 만들어진 환상은 사람들이 믿게되고, 믿음이 모이는 순간 엄청난 힘을 가진 현실로 변한다. SeMA 창고에서 개최하는 전시『현실은 메타포』는 개인과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인 동시에 집단 안에서 본분을 넘어 절대적인 권력을 갖게된 가치들의 양면을 재고한다.
손수민_In God We Trust_HD 영상, 사운드_00:12:09_2023손수민_In God We Trust_HD 영상, 사운드_00:12:09_2023
『현실은 메타포』는 크게 두 가지 파트로 나뉜다. 영상 「In God We Trust」 (2023)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인해 내일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 시기에 사회에 첫걸음을 내딛던 작가의 기억을 바탕으로 사회적 사건들을 몽타주 형식으로 엮어낸 무빙이미지다. 영상의 제목인 "In God We Trust(우리의 신을 믿는다)"는 기축통화로 막강한 지위를 누리는 미국 달러에 쓰여진 문구이다. 출퇴근길과 일터에서 목격한 장면들을 수집한 이미지와 사운드로 재구성하며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를 향한 환각에 가까운 우리의 집단적 믿음에 그 만의 방식으로 질문한다.
손수민_뮤직박스_퍼포먼스_2023/2018 (촬영_정순영)
손수민_뮤직박스_퍼포먼스_2023/2018 (촬영_정순영)
「뮤직박스」 (2023/2018)는 모더니즘의 유산으로 여겨지는 미국 동부에 위치한 예일대학교 루돌프 홀에서 선보였던 퍼포먼스를 세마창고의 공간적 특징을 고려하여 재구성한 관객참여형 설치다. 규격에 맞춰 대량생산된 뮤직박스를 공간과 시간, 인력과 자원을 작가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비효율적인 방법으로 연주함으로서 합리주의 성장사회를 상징하는 공간을 점거하고자 했다. 표준화된 세계의 기준에서 벗어나 다양한 관객들의 창의적인 가능성을 환영한다.
작가는 현실의 무게를 감히 예술이 잊게할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다만 예술이라는 렌즈를 통해 현실을 바라보다 보면 그 안에서 희망도 발견하기를 늘 기대한다. ● 손수민은 기술기반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을 조명하는 작업을 만들어왔다. 누군가 직접 겪은 일이나 한 말에서부터 사회의 경계와 균열을 탐색한다. 환경에 반응하며 생산된 정형화되지 않은 언어는 작가에게 관심의 대상이다. 타인을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만, 미세한 접촉면은 생겨날 수 있다고 믿는다. 일상에서는 그런 작은 교차점의 가능성을 지나치기 마련인데 작가가 관찰자로, 참여자로, 때로는 시나리오를 만드는 선동자가 되어 그 순간을 좀 더 확대해본다. ■ 손수민
『문득, 하얀 달』은 분리된 경계를 잇는 주제의 중간 결산이다. 일상과 비일상,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이질적인 세계를 연결하는 작업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왔는데 이 기획은 그 진화의 결과이자 또 다른 도약을 위한 준비이다. ● 현실과 비현실의 모호한 경계를 상징하는 하얀 달과 그 아래 펼쳐지는 자연친화적, 자기 성찰적 상상을 나뭇결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살려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하얀 달' 이 지니는 명확하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특징은, 그 자체로 하나의 경계를 의미하고 서로 다른 시공의 공존을 이끌어 내는 시각적 상징으로서 좋은 설정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화면 속 아이(혹은 신체 일부)는 성별과 나이를 무시한 그저 '인간'으로서의 자아이다. 특정 성격이나 매력, 개성 등이 배제된 대명사와 같은 존재를 표현하기 위해 내용을 가질 수 있는 요소들(머리카락, 특정 의상 등)을 제거하였다. ● 아이는 '현실의 자아'이고 화면에 펼쳐지는 경계의 상상을 만들어내는 창조자이며 다른 차원의 존재를 인식하는 주체인 동시에 감상자를 화면 속 세계로 이끄는 감정이입의 매개자이기도 하다. ● 아이와 함께 존재하는, 목탄으로 그려진 다양한 종의 동물들은 '대자연'을 통칭하는 존재로서 상황에 따라 토템으로서의 수호신, 아이와 함께 공존하는 친구, 깨달음을 주는 현자 등의 역할을 한다. 아이와 동물은 화면에서 각각의 실재감을 드러내고 있으며 이 실재감은 현실과 상상이 만나는 경계의 모호함 속에서 상호 공존을 표현하는 요소로 사용하였다.
또한 전 작업에서 비현실 세계의 표현 요소로 전통화의 이미지를 차용했다면 「하얀 달」 작업은 초기 목탄 작업의 요소를 다시 접목하여 더욱 확장시킨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존재감' 표현의 다각화, 존재 간의 교감에 더 집중하며 주변 이미지를 조형적으로 보다 면밀히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진화하게 되었고 '인식과 조우'에서 시작된 일상에서의 비일상적 이미지는 '교감과 소통'을 거쳐 '성찰과 공존'에 이르는 사고의 과정을 낳게 되었다. ● ...........우리가 이제와서 맹수의 송곳니를 목에 걸고 다닐 일은 없겠지만, 그들과의 지나치게 멀어진 거리감이 서서히 우리를 피폐하게 한 것처럼 그것을 기억하고 존중하는 마음의 에너지가 잃어버린 어떤 부분을 조금은 채워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강승혜
당신이 서 있는 그곳은 아마도 예전에 숲이었을 것이다. 그 숲이 도로가 되고 아파트가 되고 호텔이 되고 카페가 되고 도시가 됐다. 그러는 사이 인간이 숲의 일부로 존재하던 시절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고 숲과 계곡이, 산과 강이, 자연이 부동산에 부속된 프리미엄급 풍경이라는 잉여 가치가 되어 더 비싸게 사적으로 소유되고, 소비되는 것으로 자연이 축소됐다. 그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뿌리와도 같은 근원으로서의 자연을 잃어버렸는데, 사람들은 그걸 잃어버렸다는 것조차 모른 채 여름 휴가철이 되면 어떻게 해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결핍감을 채우고자 거의 강박적으로 산으로 강으로 몰려 간다. 그것이 짧고 덧없는 디지털 접속의 연속과도 같은, 뿌리 뽑힌 현재에 대한 보상이라도 되는 양 말이다. ● 오별 아트가 처음으로 기획한 『메아리치는 녹색』전에 참여하는 세 작가는 공통적으로 어린 시절을 시골이나 산, 숲에 있던 원형적 자연 한 복판에서 보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훗날 도시의 대학에 가서 회화를 전공한 이들에게 그것은 엄청난 축복이고 행운이었을 것이다. 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를 보고, 들꽃에서 천국을 보려면, 손 안에 무한을 쥐고, 찰나 속에서 영원을 보라 - 월리엄 블레이크, 「순수의 전조」 중●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크고 작은 동식물들이 제 각각 제 방식대로 살아 숨쉬며 하나의 숲을 이루는 자연은 그만큼 원대하고 또 순환적이다. 그 안에는 정말 없는 게 없고 그 모든 게 다 연결된 채 살아 움직이고 있다. '손 안에 무한을 쥐고 찰나에서 영원'을 볼 수도 있을 만큼 말이다. 그렇다면 혹시 그런 곳에서 자연의 일부로서 살았던 화가들의 그림은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라 그 결핍감으로 자연을 그리게 된 화가의 그림과 다를까? ● 다르다. 확실히 다르다. 도시인이 가장 사랑하는 컬러인 녹색 자연을 그리는 화가는 세상에 많고 많다. 하지만 어린 시절 자연의 일부로 살았던 이들 세 작가의 그림 같지는 않다.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해도 좋을 만한 것이 있다. ● 무엇보다 다른 점은 자연과의 일체감이다. 19세기 증기기관차가 생겨 난 이후 풍경은 도시 방문자가 눈으로 즐기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풍경화가 되었고 그것들은 기필코 도시인 눈에 장엄하거나 아름다운 것이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팔렸다. 그 때문에 존 버거는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서 미술관 그림들이 진부한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기도 했다. "화가가 서툴러서가 아니다. 화가에겐 팔리는 그림을 그리는 일이 중요했고, 그런 그림 위주로 그리니 진부해진 것이다. 시장의 요구가 예술 자체의 요구보다 더 강해서 생긴 결과였다." - 존 버거● 김성남, 지용현, 파랑의 녹색 그림은 일반적인 기준에서 아름답지 않다. 어떤 그림은 무섭다. 하지만 결코 진부하지 않고 식상하지 않다. 자연 속에 깃든 만물의 신성을 드러내는 그림으로서 가치가 있다. 눈으로 즐기는 자연이 아니라, 온 몸으로 체험하는 자연으로 우리의 감각을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과거로 돌려 놓는가 하면 미래나 시점을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도 데려간다. 예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것, 겉으로 보기엔 없지만 더 오래 보면 있을 수 있는 것, 누군가는 볼 수 있지만 결코 말해질 수 없는 것. 그러니까 한 마디로 "보이지 않는 것들의 복원" 으로서의 녹색 그림, 그게 바로 김성남의, 지용현의, 파랑의 그림이다.
1.파주 시골에서 태어나 자라며 혼자 숲에 가는 일이 많았다는김성남의 그림은 "자연 현상을 포함한 이 세상 모든 것이 이음새 없이 전체, 하나의 전체이기 때문에 부분들간의 경계는 중요하지 않다" 했던 괴테의 자연관과 정확히 일치한다. 숲 속으로, 숲의 웅덩이로, 빠져 드는 게 아니라 녹아든다. 깊이 용해되어 사라질 수도 있을 것 같다. 특히 숲의 물 웅덩이에 사람이 누워 있는 듯한 불분명한 형태의 그림은 왠지 으스스한 분위기마저 드는데 그건 일종의 물을 통한 '치유와 정화의 시간'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아무래도 작가는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유년의 숲, 태고의 자연을 되살리는 '불가능한 임무'를 수행하며 그 안에 생존과 귀환을 위한 자기 삶의 험란한 경험들을 투영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2.서울 출생이지만 어린 시절 관악산 산 속에서 살았고 더 깊은 산골이 좋아 경기도 안성에서 강원도 평창으로 이주한지용현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속한 거대한 세계를 보여주려는 것이 예술이고, 그림은 이 수수께끼 같은 세계를 전해 주는 전령들"이라고 했던 존 버거의 말을 다시 한 번 소환하게 된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그의 녹색 자연 속에는 눈으로 잘 보이지 않거나 보여도 보잘 것 없거나, 원자 단위의 존재감밖에 없어서 실은 아무도 기록하지 않았을 것 같은, 빛의 파동 같기도 하고 외계 생명체의 불꽃 모양 에너지 같기도 한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우주의 먼지처럼 신비롭게 하찮은 무엇인가가 있는데 그게 뭔지 작가는 아마도 함구할 것이기에 묻지 않는다. 제법 오랜 기간의 재탐색 끝에 모래 한 알 같은 티클에서 무한에 이르는 '우주적 춤'을 추고자 했던 지용현만의 독자적 상상력이 강원도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다시금 실험되고 교신되고 파동하고 있다는 소식은 우리 모두에게 좋은 뉴스다.
파랑_5월의 어느날(뉴질랜드)_캔버스에 유채_91×117cm_2017파랑_Wolf boy and black wolf(꽃밭에서)_캔버스에 유채_91×73cm_2022
3. "사람의 유년시절의 추억은 그 사람의 근원이자 뿌리이다. 인간의 삶이란 자신에게 부여된 공간에 시간과 이야기를 채우는 과정이다." - parang 문경 세제에서 6살까지 살다가 강원도 태백으로 이주하여 10살까지 살았다는파랑은 주로 늑대를 그린다. 늑대를 그리지 않을 때조차 늑대가 느껴질 정도로 늑대에게 동화된 삶을 제법 오래 살았다. 무언가를 그린다는 것은 형상과 이미지의 힘으로 시공을 넘어 그 대상과 소통하는 신성하고 초월적인 경험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인간에 대한 증오심이 커질 때는 인간이 사라지고 오직 동식물들만 평화롭게 공존하는 종말 이후 미래의 낙원을 그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딱 자연과의 교감 속에서 낙천적으로 순수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월리엄 블레이크의 시집 「순수의 노래」에 수록된 '메아리치는 녹색(The Echoing Green)' 이라는 시가 떠오르는 그런 그림들이다. "저렇게들, 저렇게들 즐거웠지. 우리 모두, 소녀와 소년이었던 어린 시절에는 우리도 메아리치는 녹색 풀밭에서 놀았지." - 윌리엄 블레이크, 「순수의 노래」 중에서
파랑_가을 속의 날개_종이에 오일 파스텔_60×89cm_2022파랑_늑대개_캔버스에 유채_73×61cm_2023
보통은 어른이 되면 녹색 풀밭에서 놀던 어린 날의 순수를 잃게 된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어로 쓰면, '이윽고 어린 아이들은 지쳐, 더 이상 즐겁게 놀 수 없고, 해는 저물어, 우리는 놀이는 끝났다'로 귀결되고 만다. 그런데 이 세 작가에게 '녹색 순수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은 메아리 같다. 해는 저물어 이미 어두워졌는데, 그들은 집에 돌아가지 않고 어둠 속에서 계속 혼자 놀고 있는 아이 같다. 여전히 그런 마음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 생계를 위한 그림이 아니라, '인생을 건 놀이'로 계속 그림을 그린다는 것! 해는 저물어 어두워지는데… "인간은 충분히 어두워져야 별을 볼 수 있다." 고 했던 괴테의 말로 응원한다! ■김경
김여운의 회화-이름 모를 들풀의, 혹은, 이름도 없는 것들의 윤리학 ● 전시장에 들어서면 크고 작은 텅 빈 캔버스가 걸려있다. 하얀 캔버스에 하얀 사각형을 그린 절대주의 회화인가(말레비치). 아니면 회화가 가능한 필요충분조건을 평면이라는 최소한의 조건으로 환원한 미니멀리즘인가(클레멘테 그린버그). 그도 저도 아니면 텅 빈 캔버스를 보고 당혹해할 사람들이라는 상황 논리를 겨냥한 개념미술인가. 미술사에서 보고 들은 적은 있지만, 실제 전시를 통해 확인해본 적은 없는 만큼 텅 빈 캔버스가 꽤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김여운 _Angelina_ 리넨에 유채 , 나무액자 _135×166×4cm_2023_ 부분
환원주의 혹은 금욕주의와 결합한 후기 미니멀리즘이라고 불러도 좋겠군, 하고 돌아서려는데 얼핏 화면 속에 알 수 없는 얼룩이 보인다. 사실은 캔버스 천을 찢고 그 틈새로 고개를 내민 싹이 그려져 있었다. 실제로 전시장에 돋보기를 비치해놓기도 했지만,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사실적이고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떡잎에 난 보송보송한 털이며, 캔버스가 찢어진 가장자리의 올 하나하나가 오롯한 것이, 그리고 여기에 그림자마저 생생한 것이 영락없는 실물 같았다. 작가가 오며 가며 본 이름 모를 들풀이라고 했고, 실물 크기 그대로라고 했다.
김여운_Anna_리넨에 유채, 나무액자_56×83×3cm_2023
그러나, 저 큰 캔버스에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작은 들풀 하나를 그렸다니. 정말 비효율적이군, 이라고 했지만 정작 작가는 그 말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작가는 회화적 관습을 문제시하고 있었다. 이미지 과잉의 시대에, 의미 포화 상태의 현대미술에 대해 꼭 필요한 말과 이미지로 한정하고 싶었다고 했다. 스펙터클 한 시대에 던지는 검소한(혹은 같은 의미지만 검약한) 말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한정에는 윤리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김여운 _Anna_ 리넨에 유채 , 나무액자 _56×83×3cm_2023_ 부분
여기에 작가는 적정 거리 혹은 심적 거리를 문제시한다. 그림을 더 잘 보기 위해서 요구되는 거리를 의미하며, 그림을 넘어서 삶의 태도와 같은 상황 논리에 확대 적용되는 개념이다. 작가는 그 거리, 그 개념을 수정하는데, 작가의 그림에 무엇이 있는지 보기 위해선 그림에 바짝 다가가야 한다. 주의 깊게 보아야 하고, 세심하게 보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못 본 채, 아니면, 아예 아무것도 못 본 채 지나치기 쉽다.
김여운 _Sophie_ 리넨에 유채 , 나무액자 _31×38×3cm_2023
무슨 말인가. 앞서, 이름 모를 들풀이라고 했다. 이름도 없는 것들이라고 해도 좋을, 사실은 지천이지만 없는 거나 매한가지인 존재들이다. 이 미물들이 봄이면 언 땅을 깨고 고개를 내민다. 보도블록 사이로 뿌리를 내리고, 시멘트 바닥을 뚫는다. 창틀에 쌓인 먼지에서도 자라고, 마침내 캔버스 천을 찢고 나온다. 혹자는 이처럼 새싹이 언 땅을 깨고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고도 했지만, 실제로 소리가 들린다기보다는 심적으로 공감하는 소리를 듣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김여운 _Sophie_ 리넨에 유채 , 나무액자 _31×38×3cm_2023_ 부분
문제는 존재에 대한 공감이다. 존재의 살림살이를 보기 위해선, 존재가 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선 존재에 대한 공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정작 현실에서 그 존재는 이름도 모르고, 이름도 없다. 조르조 아감벤은 법으로부터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인간을 호모 사케르, 그러므로 발가벗은 생명이라고 했다.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이름 모를 들풀들, 그러므로 이름도 없는 존재들에 대한 유비적 표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어쩌면 우리 미물들 그러므로 타자들이 사는 치열한 삶의 소리를 보고 듣기 위해선 주의 깊고 세심해야 한다. 겨우 보이고, 바짝 다가가서야 비로소 보이는 작가의 그림의 숨은 뜻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는 다시, 타자의 삶에 대해 깊고 세심한 주의를 요청해오고 있다는 점에서, 윤리적인 측면이 있다.
김여운_Antony and Cleopatra_리넨에 유채, 나무액자_76×64×3cm_2023
그런데 정작, 이처럼 이름 모를 들풀들, 그러므로 어쩌면 이름도 없는 존재들 하나하나에 작가는 이름을 불러주고 있었다. 안젤리나, 하나, 소피, 안나, 에바, 루이스, 미아, 버지니아, 리사와 같은. 그리고 관객들도 작가처럼 저마다 풀들에게 이름을 불러주라고 요청한다. 연대를 요청해오는 관객참여형 프로젝트다. 내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는 김춘수의 시를 떠올리게 된다. 처음부터 이름도 없는 것들은 없다. 처음부터 무의미한 것들은 없다. 처음부터 미물(타자)들은 없다. 다만 이름을 불러주는, 의미를 발견하는, 타자를 인정하는 누군가가(혹은 행위가) 없었을 뿐. 그러므로 이름 모를 풀들에게 이름을 불러주는 이 프로젝트에는 타자(성)의 초대가 있고, 자기_타자의 맞아들임이 있다(에마뉘엘 레비나스).
김여운 _Virginia_ 리넨에 유채 , 나무액자 _31×38×3cm_2023
그리고 여기에 집주인이 있고, 세 들어 사는 사람이 있었다. 집주인은 여하한 경우에도 집에 못을 박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세 사는 사람이 이사 가고 난 뒤에 벽에 박힌 못을 발견했다. 아마도 집주인마저 눈치채지 못할, 쉽게 찾기는 힘든, 후미진 곳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서도 삶의 방법은 찾아지고 있었고, 치열한 삶은 계속되고 있었다. 내가 미처 모르는 사이에, 어쩌면 나의 인식(보다는 관심)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도 치열한 삶을 살고 있었던 이름 모를 들풀처럼.
김여운 _Virginia_ 리넨에 유채 , 나무액자 _31×38×3cm_2023_ 부분
그러므로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못 그림(정확하게는 벽에 못을 박은 그림)은 제도가 그어놓은 금을 넘어서 삶의 방책을 찾아내고야 마는, 여하한 경우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당위처럼 읽히고, 금기와 위반의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그렇게 작가는 이름 모를(그러므로 어쩌면 이름도 없는) 들풀 같은 존재들의 치열한 삶의 순간에 주목하게 만들고, 후미진 구석에서도 계속되는 삶의 현실에 눈뜨게 만든다.
그리고 여기에 세 개의 기둥이 서로 기대어 서 있는 입체 설치작업이 있다. 세 개의 기둥이 마치 한 몸인 양 하나로 묶여 있는데, 하얗게 도색 된 표면에는 Life와 Variable(변수)과 같은 영문자가 기록돼 있다. 아마도 삶의 지침을 적어놓은 것일 터이다. 삶의 표상 혹은 푯대라고 해야 할까. 혼자서는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 서로 기대어야 하고, 협동해야 하고, 연대해야 한다. 그 과정에 예기치 못한 변수가 매개될 수 있다. 삶이 꼭 그럴 것이다. 김지하는 삶을 기우뚱한 균형, 그러므로 유격에 비유했는데, 아마도 변수의 또 다른 표현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작가는 인간다움이 본인의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라고 했다. 여기서 작가가 추구하는 인간다움이란 인간중심주의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제도에 반하는 인간, 제도의 잣대가 아닌 자기의 잣대로 서는 인간, 그러므로 자율적인 인간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업은 자율적인 인간 간 연대와 협동을 의미할 것이다. 형태는 다르지만, 두벌의 옷이 마치 한 몸인 양 하나로 들러 붙어있는 작업을 매개로 협동을 주제화한 요셉 보이스의 작업을 떠올리게 된다. 계몽(교육)을 매개로 사람들의 의식에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요셉 보이스의 사회조각에 대한 공감과 유대를 떠올리게 만든다.
발터 벤야민은 예술가를 망가진 세계를 수선하는 사람에 비유했다. 안젤름 키퍼는 세계를 불태워 내년 농사를 기약하는 화전민에 비유했다. 작가 역시 어쩌면 이런 수선공과 화전민에서 예술의 당위를 얻고, 예술을 위한 실천 논리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이름 모를, 그러므로 어쩌면 이름도 없는 들풀 같은 존재들에, 후미진 구석에서 계속되는 치열한 삶의 순간들에, 그리고 자율적인 인간 간 연대에 주목한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것들, 나의 인식(보다는 관심)이 미치지 못하는 것들, 그러므로 진즉에 거기에 있었던 존재들에 눈뜨게 만든다. 작가는 근작의 주제를 거기 있다, 라고 명명한다. 아마도 진즉에 거기에 있었던 존재를, 거기에서의 치열한 삶의 현실을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 고충환
넓은 백사장과 그곳을 둘러싼 매끈한 고층 건물들이 자아내는 기하학적이고 미래적인 도시 풍경, 그리고 그 이면에 드리워진 난개발과 환경오염의 그림자. 이 이야기는 작가의 고향인 부산 해운대로부터 시작된다. 황민규는 어머니가 정월대보름마다 참여하시는 달집태우기 행사를 영상에 담기 위해 부산에 들렀다가 '코로나19 바이러스'라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의해 그곳에 고립되고 만다. 전염병 확산 방지를 위한 엄격한 통제 속에 생활하던 작가는, 해운대 일대에 들어선 고층 아파트들의 이름이 대부분 '~시티'로 마무리되는 것을 보고 자치도시를 떠올린다. 엉뚱한 상상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작가가 제시하는 레퍼런스들을 거쳐 후쿠시마 오염수 방출, 지구온난화 등 환경오염 문제와 같은 현실의 문제에 맞닿게 된다. 다수의 개인이 뭉쳐져 이루어지는 것이 사회라면, 시대정신 또한 여러 삶의 집약을 통해 발생하는 것이다. 황민규는 삶에서 가장 가까운 곳부터 담아내는 것을 시대 기록의 시작점이라 여기고, 일상의 풍경을 통해 체감할 수 있는 거리에서 시대 담론을 펼쳐나간다.
황민규_Floyd's Message_단채널 영상_00:05:52_2023황민규 _Out of the Blue 展 _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_2023황민규 _The Wall_ 디지털 프린트 _53×80cm_2023황민규 _Out of the Blue 展 _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_2023
황민규는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형식을 빌려 일상을 통해 자연스럽게 수집된 장면들을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모호한 모큐멘터리로 제작해왔다. 영상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작가의 가족이거나 가까운 지인들로, 작업에 사용된 영상 역시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상황들을 즉흥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녹화 버튼을 누르는 것 외에는 의도 없이 포착된 일상의 장면들은, 작가가 유년기에 보았던 만화나 영화 속 대사 그리고 현시점에 대두되는 사회 문제들과 유연하게 얽혀나가며 하나의 서사로서 다시 쓰이게 된다. 작가는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가진 작품들로부터 차용하여 각색한 대사들을 통해 존재론적인 불안에 대해 사유하고, 그것에 내재된 암울한 시대정신을 일상의 장면에 스며들게 함으로써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트려 프레임 속에 안락과 위기가 공존하게 한다. 그리고 절묘하게 들어맞는 실제 사건 보도자료들이 서사에 살을 붙이고, 과거 시점의 레퍼런스들이 예언하던 어두운 미래가 도래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전개 방식은 오늘날 분별력 없이 이루어지는 정보 수용을 꼬집기도 한다. 가상과 현실을 혼재하게 하는 황민규의 작업 방식은 재난을 가까운 위치에서 읽히도록 하지만, 다가오는 위기의 실체는 노출하지 않아 관객으로 하여금 작품 속 사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되묻게 한다. 이미지, 소식, 그리고 감각조차도 인스턴트식품처럼 제공되는 이 사회에서 정보는 결국 지표로서만 존재할 뿐이고, 진리를 걸러내는 것은 정보를 수용하는 우리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황민규의 작업은 얕은 논리로 위장한 정보를 경계하되 적극 활용하고, 수많은 지표를 거쳐 다가서게 될 '신세계'란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한다.
황민규_To Kris_다채널 영상_가변설치_2023
《Out Of The Blue》에서, 황민규는 기존 작업에서 부각되던 90년대 서브컬처의 색을 덜어내고 SF 문학과 인문학 등으로 레퍼런스의 영역을 확장한다. 차용하는 장르를 전환하는 듯 보이지만, 삶 속에 드리우는 재난을 통해 사회와 인간의 한계를 들여다보는 방식은 유지된다. 작업 전반에 깔려있는 90년대 서브컬처적인 색채는 작가가 유년기를 보낸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기의 시대 감성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다양한 문화가 절제 없이 수용되던 90년대 중반에 작가가 수많은 장르 중에서도 SF와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에 몰입하게 된 것은 (8-90년대 작품 특유의 세련된 구성과 작화 때문도 있겠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분위기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90년대는 냉전의 끝에서 시작되었다. 자본주의가 권력을 얻으며 경제적 호황과 파산이 연달아 일어났고, 교체되는 세기를 향한 호기심과 막연함에서 비롯된 비관론이 공존하는 시대였다. 세기말의 무기력한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애니메이션 속 디스토피아 세계관은 현실과 중첩돼 보였을 것이고, 초인적인 힘으로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히어로들은 꽤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노스탤지어가 부각하는 것은 판타지에 의존할수록 더 버겁게 다가오는 현실이다.
황민규 _ 정월 - 스틸이미지 _ 단채널 영상 _00:42:00_2023
앞서 말했듯, 황민규의 영상 작업의 서사는 미리 쓰인 것이 아니라 수집된 장면과 레퍼런스가 얽히고 편집되는 과정을 통해 유기적으로 발생한다. 작가는 서사가 어디까지 뻗어 나갈 수 있는지 충분한 시간을 갖고 바라본다. 숙성된 이야기는 단편으로 정리되거나 일련의 에피소드로서 그 내용이 순환하기도 한다. 기존 작업과의 흐름을 연달아 살펴보자면, 〈나를 지켜줘〉(2017)에서는 신혼여행의 기록에 애니메이션적 상상을 더해 '영웅'이라는 키워드를 적극적으로 펼치지만, 사건의 얽힘과 흐름에 따라 영웅은 부재한다는 허무주의적인 결론으로 치닫는다. 이후 〈야생 속으로〉(2020)에서 영웅의 부재를 선언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개척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보이지만, 코로나바이러스가 야기한 격리된 환경과 고독으로 인해 그 다짐이 무너지고 만다. 사루비아에서 선보이는 신작 〈정월〉(2023)에서는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는 아내와 안도감을 주는 어머니의 서사를 교차시키며, 자립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회의와 함께 의지의 대상을 찾는 여정을 보여준다.
황민규 _Out of the Blue 展 _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_2023황민규 _Out of the Blue 展 _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_2023황민규 _Red Moon_2023
삶은 미지로부터 온다. 축적된 과거를 통해 미래를 예견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조우한 현재가 어느 방향으로 뻗어 나갈지는 정확히 예상할 수 없다. 우리는 안정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미지의 불안으로부터 지키려고 한다. 모든 조우는 희망이자 불안이다. 황민규는 작업을 통해 끊임없이 다가오는 위기 앞에서 나약해지는 인간의 모습을 탐구한다. 하지만 이 탐구를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은 공교롭게도 우리가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들이다. 불안은 맞닥뜨리는 것이 아니라 발 밑에 침잠해 있는 것이다. 모든 삶에는 끝이 있지만 그 길이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다. 우리는 삶이라는 엉성하고 불확실한 선 위에 함께 놓인 것들을 사고, 재난, 전쟁, 상실과 같은 균열로부터 지키고 싶어 한다. 과학, 종교, 미신, 혹은 영웅을 통해서, 내가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을 초월하여서라도 말이다. 《Out of the Blue》는 초월적인 존재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포착하고, 질문한다. 우리는 어떤 신세계를 그리는가? 노력조차 모래성처럼 무너져 버리는 이 세상 속에서 서로를 지킬 수 있을까? ■ 문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