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의 기본에서 눈으로 만져지는 그림까지

From the basics of molding to a painting touched with one's eyes

권성원/ KWONSUNGWON / 權聖元 / painting

2023_0916 2023_1012 / ,월요일,추석연휴 휴관

권성원_An icon of Flatland 23-1_모두의 환타지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3×91cm_2023

권성원 블로그_blog.naver.com/forflame

 

초대일시 / 2023_0916_토요일_05:00pm

작가와의 대화 / 2023_1007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추석연휴 휴관

 

아팅

arting gallery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4013 2

@arting.gallery.seoul

 

조형의 기본에서 눈으로 만져지는 그림까지 채색 효과를 배제하고 단색으로 대상의 형태와 명암을 잡는 그리기 기법을 드로잉 혹은 드로우라 표기한다. 그걸 제목으로 딴 2022년 작 Draw는 이번 개인전에 세 점 나왔다. 종래 작업 연보와 달라진 이번 개인전의 변화를 읽는 출발점으로 이 연작을 꼽기로 했다. 원통 원뿔 육면체 원형 사면체 같은 기본 도형은 권성원의 작업 연보에서 개인 도상에 가까운 브랜드로 굳었다. Draw는 공중에 부양한 갖가지 기본 도형들 사이로 붓질의 시원한 질감이 뱀처럼 휘감고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붓질의 움직임이 만든 유기성과 수직선과 수평선으로 구성된 기본 도형의 각진 질감은 하나의 결합체가 되어 역동감과 안정감이 혼재된 미묘한 인상을 준다. 붓질과 기본도형의 상반된 질감의 결합은, 노을 진 하늘을 붓으로 그린 바탕에 각진 도형들의 뭉치를 중심에 올린 신작 An Icon of Flatland이나, 표현주의적 붓질 위에 도형과 붓질을 뒤섞은 D-Formation으로도 연장되어 나타난다.

 

권성원_An icon of Flatland 23-1_모두의 환타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3×91cm_2023_부분
권성원_An icon of Flatland 23-2_모두의 환타지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3×91cm_2023
권성원_Draw-1_종이에 아크릴채색_46×34cm_2022

권성원은 2017년 이래 줄곧 시각예술의 다양한 원형에서 화면에 쓰일 기본 요소와 구성을 참조해왔다. 조형의 기본은 권성원의 초지일관한 미적 태도다. 세모 네모 원처럼 기본 도형들의 입체 버전으로 화면을 채워왔으니 말이다. 채색도 혼색을 하지 않고 3원색이라는 기본색을 병치 혼합시켜 밝고 맑은 색상을 구사했는데, 이번 신작에선 색상의 화려함이 이전보다 더하다. 작년 그의 개인전 서문에서, 나는 스토리가 사라지고 기본 도형과 3원색으로 구성된 작업 계보를 두고 '이미지 뭉치'라고 표현한 바 있다.

 

권성원_D-formation 22-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5.5×60.5cm_2022
권성원_D-formation 22-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38×53cm_2022

채색과 구성처럼 미술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 외에도, 출품작 Draw처럼 시각예술의 기본 기법을 제목으로 작명하는 것도 권성원에겐 흔하다. 연작 형성 Formation이나 '변형' 쯤으로 번역될 D-Formation연작이 그렇다. 형성이건 변형이건 이처럼 명시된 제목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권성원 그림은 튜브로 짜낸 수직선과 수평선 물감의 줄로 화면이 구성되며 완성작에 이르기에, 직물 짤 때 씨줄과 날줄의 엮임을 연상할 만큼 체계적으로 화면이 축조된다.

 

권성원_Flatland 23-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5×70cm_2023
권성원_Flatland 23-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5×70cm_2023_부분
권성원_Flatland 23-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5×70cm_2023

그림의 안에 담긴 의미보다 작품 표면이 주는 첫 인상에서 작품의 우열을 가를 때가 많은 게 미술 현장인데, 이 점에 착안해서 기획한 그룹전 미술의 피부(2022년 아팅)에 그가 초대된 것도 권성원 그림의 촉각성 때문이었다. 이번 개인전 눈으로 만져지는 그림(2023.0916~1012 아팅)에 나타난 변화로는 Draw처럼 도형의 기하학적 경직성과 붓질의 표현주의적 기법을 결합시킨 화면을 시작으로, 표면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튜브를 짜 올리는 물감의 층을 기존보다 더 두툼하게 올린 점을 들 수 있다. 하얀색 바탕 화면에 수직 수평선으로 채워진 두툼한 물감의 색줄 사이에 틈새가 있다. 그 틈새 때문에 그림을 정면으로 볼 때와 측면으로 볼 때 색의 질감이 다르게 지각되는 렌티큘러 효과를 경험하게 된다.

 

권성원_전환의 징후_붉은 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0×240cm_2023
권성원_입면화된 풍경 1-우크라이나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7×80.5cm_2022
권성원_입면화된 풍경 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0×100cm_2022
권성원_2D roller coaster_종이에 아크릴채색_51×37cm_2022

기존 작업보다 두툼한 물감의 층위가 돋보이는 신작은 두꺼운 물감 덧칠로 화면의 입체감을 극대화했던 반 고흐를 차용한 전환의 징후_붉은 밤이다. 임파스토 기법으로 소용돌이치는 푸르른 밤하늘을 배경으로 왼편에 불타오르는 검푸른 삼나무를 배치한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권성원의 튜브를 통과하면서 전환의 징후_붉은 밤이란 제목을 달았다. 권성원의 도상인 기본 도형들로 화면의 밑면을 깔고 그 위로 튜브로 짜낸 붉은 물감의 소용돌이 밤하늘을 3면화로 길게 올렸다. 그리고 원작에선 한 그루인 삼나무를 양편에 각각 배치해 좌우대칭이라는 권성원의 또 다른 프레임에 끼웠다. 반이정

Deep End, natural rhythm-Time of rhythmical flow

심연, 자연율-결이 흐르는 시간

김정남/ KIMJEONGNAM / 金政南 / painting

2023_0920 2023_0925

김정남_natural rhythm 027032_알루미늄에 스크래치_73×117cm_2023

 

김정남 인스타그램_@rhythm_tan_Jeongnam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주말,공휴일_11:00am~06:00pm

 

후원 / 강원특별자치도_강원문화재단

 

아트가가 갤러리

ART GAGA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41

(인사동 183-4번지) 1

Tel. 070.7758.3025

www.gagagallery.com

@artgaga_gallery

 

김정남의 작업-하얀 산맥과 풍경이 된 파토스 심연, 자연율, 결이 흐르는 시간(Deep End, natural rhythm, Time of rhythmical flow). 작가 김정남이 근작에 붙인 주제다. 아니면 그저, 결이 흐르는 시간이라고도 했다. 자연율에서 시작해 여기까지 왔다. 자연율의 개념을 해석하고 재해석하는, 심화하고 확장하는, 그렇게 자연율의 개념을 변주하는 과정에서 덧붙여진 주제일 것이다. 처음엔 모호했던 개념이 점차 확신을 얻으면서 뚜렷한 실체를 얻게 된 주제일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지금까지 작업을 지지해왔던 주제들을 아우르고 종합하는 주제라고 해도 좋다. 다시,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을 견인하는 인문학적 배경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김정남_natural rhythm 508032_알루미늄에 스크래치_81×131cm_2023
김정남_natural rhythm 614032_알루미늄에 스크래치_61×91cm_2023
김정남_natural rhythm 204022_알루미늄에 스크래치_60.5×91cm_2022

존재에는 결이 있다. 자연에도 결이 있다. 나무에도 결이 있고(나이테) 바람에도 결이 있다(바람결). 물에도 결이 있고(물결) 빛에도 결이 있다(빛살). 호흡에도 결이 있고(숨결) 몸에도 결이 있다(지문). 소리에도 결이 있고 피부에도 결이 있다. 소리나 피부가 거칠다거나 부드럽다고 할 때가 그렇다. 그러므로 결은 존재의 질감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결이 있는가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결도 있다. 이를테면 마음결 같은. 그렇다면, 결은 무엇인가. 몸에 아로새겨진 존재의 증명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존재가 겪었을 삶의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시간의 흔적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은 에너지의 물적 형상일지도 모른다. 존재는 움직인다. 존재와 존재가 움직이면 충돌이 일어난다. 그렇게 충돌이 일어나는 곳에 에너지가 발생한다. 그렇게 바람과 바람이, 공기와 공기가, 존재와 존재가 움직이면서 부닥칠 때 에너지가 발생하고, 그 에너지가 결을 만든다. 거시적(혹은 미시적)으로 말하자면, 음의 기운과 양의 기운이 움직이면서 부닥칠 때 에너지가 발생하고, 그 에너지가 존재를 생성시킨다. 그러므로 결은 어쩌면 존재에 아로새겨진 지문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풍경에도 지문이 있고, 상처에도 지문이 있다.

 

김정남_natural rhythm 524032_알루미늄에 스크래치_50×73cm_2022
김정남_natural rhythm 617022_알루미늄에 스크래치_50×73cm_2022

결은 흐른다. 존재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존재가 이행 중이기 때문이다. 결이 흐를 때 마구 흐르지는 않는다. 흐르다가 맺히고 맺히는 듯 흐르는 강약이 있고, 주기가 있고, 패턴이 있다. 그게 뭔가. 율이다. 리듬이다. 리듬이 자연에 탑재되면 자연율이 된다. 자연이 숨겨놓고 있는 리듬 그러므로 음률이라고 해야 할까. 자연이 품고 있는 소리 그러므로 음악이라고 해야 할까. 자연이 은연중 실현(그러므로 암시)하고 있는 공감각이라고 해야 할까. 자연의 호흡, 자연의 숨결, 자연의 기운, 자연의 섭리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풍경에는 결이 있고, 율이 있다. 주름이 있고, 리듬이 있다. 산을 쳐다보면(시선), 산도 쳐다본다(응시). 그렇게 내가 산을 쳐다볼 때, 나에게서 산 쪽으로 산에서 내 쪽으로 건너가고 건너오는 것이 있다. 교감이고 공감이다. 감정이입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는 산과의 교감이 있고, 자연과의 공감이 있다. 그 교감이, 그 공감이 산맥을 따라 흐르는 결로, 율로, 주름으로, 리듬으로 정착되었다. 어쩌면 작가가 산맥에서 캐낸, 그러므로 산맥을 자기식으로 단순화한, 산맥의, 자연의, 풍경의 골격이라고 해도 좋다(그리고 알다시피 그 골격을 도상으로 옮겨놓은 것에서 등고선이 유래했다). 자연도 존재도 결을, 율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산맥을 유비적으로 해석한, 그러므로 존재의 본질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산맥의 골격을 캐내면서 존재의 본질을 같이 발굴했다고 해야 할까.

 

김정남_natural rhythm 417032_포맥스에 아크릴채색_41×61.5cm_2022
김정남_natural rhythm_부분

그렇게 작가는 산을 그린다. 그러므로 풍경을 그리고 자연을 그린다. 엄밀하게는 산을 새긴다. 새긴다? 알루미늄 판각이다. 알루미늄판에 끝이 뾰족한 도구를 이용해 이미지 그러므로 산맥을 새김질한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알루미늄판을 대개는 남색에서 검은색에 이르는 짙은 색으로 칠한다. 이처럼 배경 화면을 어둡게 칠하는 것은 그 위에 새김질할, 새김질을 통해 드러나게 될 하얀 산맥과의 대비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외에 또 다른, 의미심장한 의미를 어둡고 짙은 배경 화면은 내포하고 있는데, 바로 심연을 상징한다. 작가가 심연이란 말을 옮겨놓은 영문의 의미가 흥미롭다. Deep End. 깊이의 끝이란 말이다. 그 끝을 미처 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이란 의미일까. 그 끝에 미처 가 닿을 수 없는 깊이란 의미일까. 아마도 심연은 미처 헤아릴 수도, 미처 가 닿을 수도 없는 깊이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밑도 끝도 없는 심연으로부터 작가는 산맥을 건져 올리고, 산맥의 골격을 건져 올리고, 존재의 본질을 건져 올린다. 어쩌면 의식보다 깊은, 무의식보다 아득한 존재의 원형을 발굴한다. 존재에 아로새겨진 원형적 기억을 캐낸다.

 

김정남_natural rhythm 32803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5×91cm_2023
김정남_natural rhythm 628032_포맥스에 아크릴채색_53×53cm_2023
김정남_natural rhythm 91803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5×91cm_2023

그러면 작가는 그 원형을, 그 원형적 기억을 어떻게 캐내고 발굴하는가. 니들을 장착한 소형 드릴을 도구로 발굴하는데, 온 신경이 곧추선 초긴장 상태에서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과정이다. 실제로 산맥이 발굴되는 과정인 만큼 작가의 작업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해도 좋다. 한 땀 한 땀 수놓듯 이미지를 새김질하는데, 여차하면 곁길로 빠질 수도, 산맥이 흐트러질 수도 있는 일이어서 드릴에 가해지는 힘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하고 호흡을 가다듬어야 한다. 그래서 실제 작업을 보면 선 위로 니들이 지나간 자리가 여실한데, 호흡이 머물다간 자리 아니면 호흡이 순간적으로 멈춘 자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흐르면서 맺히는, 맺힌 듯 흐르는 촘촘한 주름이 자리를 잡고, 그 주름들이 모여 산세를 일구고, 마침내 산맥이 그 실체를 얻는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하얀 산맥 앞에, 산맥의 골격 앞에 서게 만든다. 때로 작은 심연 같은 옹달샘을, 그리고 더러 개인사에서 유래한, 때로 역사적인 서사를 자기 속에 숨겨놓고 있는 풍경 앞에 서게 만든다. 심연에서 건져 올린 존재의 원형, 그러므로 원형적인 기억 앞에 서게 만든다. 풍경의 지문 앞에 서게 만들고, 존재의 지문 앞에 서게 만든다.

 

김정남_natural rhythm 138032_포맥스에 아크릴채색_53×53cm_2023
김정남_natural rhythm_부분

그리고 작가는 근작에서 종전 작업과는 사뭇 다른 작업을 예시해주고 있다. 기왕의 판각 작업과는 별도로 꽤 오랫동안 형식실험 해왔던 페인팅 작업을 근작에서 본격적으로 시도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림을 보면 어둑한 화면 위로 무분별한 붓질이 가로지르는 것이 한눈에도 추상표현주의 회화를 떠올리게 한다. 몸이 부르는 대로 감각이 이끄는 대로 그린 그림이란 점에서 몸 그림으로 정의해도 좋을 것이다. 배경 화면과 붓질이 유기적인 전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 마치 배경 화면이 밀어 올린 붓질들의 춤을 보는 것 같고, 그 깊이의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심연에서 건져 올린 파토스가 자기실현을 얻은 것도 같다. 자기에 오롯이 집중해야 하는 판각 작업이 에토스가 그린 그림이라면, 자기를 방기한 채 직관에 내 맞긴 그림이 파토스가 그린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 그처럼 무분별한 붓질이 어둑한 배경 화면과 대비되면서 얼핏 산세가 보이고 풍경이 보인다. 심연으로부터 건져 올린 풍경이라고 해야 할까. 풍경이 된 파토스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는 하얀 산맥과 풍경이 된 파토스를 그리고 있었다. ■ 고충환

 
 

 

할 수 없는 것을 뺀 나머지

After the Unsustainable

2023_0817 2023_0923 / ,,공휴일 휴관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김태연_윤주희_조재영

믹스앤픽스(권동현_구재회_신익균_염철호_최주원)

 

후원 / 재단법인 일심_씨알콜렉티브

한국문화예술위원회_시각예술창작산실

,협력기획 / 현민혜(큐레이터)

관람시간 / 12:00pm~06:00pm / ,,공휴일 휴관

 

씨알콜렉티브

CR Collective

서울 마포구 성미산로 120 일심빌딩 2

Tel. +82.(0)2.333.0022

cr-collective.co.kr

 

'이제 지구 온난화의 시대는 가고 열대화의 시대 global boiling이 시작되었다.' ('23.7.28, UN발표) 우리는 유례없는 이상 기후와 환경 문제를 마주하고 있다. 그 변화의 속도와 위기감은 생태, 환경, 지속가능성을 오늘날 인류의 가장 긴박한 주제로 만들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실천하도록 강제한다. 맹목적인 당위에 의해 개인에게 부과된 실천 과제들은 인류가 직면한 이 거대한 위기를 해결할 효과적, 필수적인 대안인지 검증되지 않은 채 '할 수 없는 것'만 아니면 하도록 행동을 요구 받는다. 반드시 해야 하는 우선 과제와 나머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실용과도 관계없고 잉여의 산물인 창작 작업과 전시는 효율과 발전이라는 사회적 요구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할까. 새로운 미감을 위해 본 적도 없는 재료를 수집하고 실험하여 형태를 만드는 창작 과정은 수많은 부산물과 쓰레기를 수반한다. 작품에 맞는 전시 구성, 작품 제작, 가벽 설치, 운송, 디자인 등, 무수한 자원의 소모를 거쳐 전시가 만들어지고, 끝난 뒤 다음 전시를 위해 폐기라는 효율적인 절차를 밟는다. 창작자는 지속해서 새롭고 발전된 작품 제작을 요구받지만, 대부분 작품은 판매 전까지 작업실 구석에 보관되고, 결국 구작(舊作)을 더 이상 보관할 여력이 되지 않는다면 작품 폐기까지 진행되기 십상이다. 이런 과정을 보고 있자면, 예술이 '환경'을 언급한다는 건 상당히 역설적이다. 그러나 현시대의 문제에서 창작자도 예외는 아니기에 창작자는 환경 파괴에 가담할지 모른다는 정체 모를 죄책감과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분열적인 감각을 느낀다. 창작자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 이번 전시는 거대한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우리의 행동은 얼마나 유의미할 수 있으며, 창작행위와 작품, 전시라는 과정을 통해 어떻게 전달될 수 있을까 고민한다.

 

할 수 없는 것을 뺀 나머지展_씨알콜렉티브_2023

김태연은 창작물이 시공간을 초월해 지속가능성으로서 '구작의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중성적 구조물은 개인전 이후 컨테이너에 보관해두었던 설치 작품 중에서 지지대나 받침대와 같은 부수적 구조물들이 작품의 보조를 넘어서 상호보완하며 기능을 상쇄해 대상 그 자체가 주연으로 새롭게 등장할 수 있음을 드러낸다. Foams는 큰 부피와 내구성이 약한 재료 등으로 인해 보관상 한계가 있었던 구작에 특별한 향방을 마련함으로써 유보적 지속가능성의 면모를 찾아본다.

 

할 수 없는 것을 뺀 나머지展_씨알콜렉티브_2023

윤주희는 삶의 의지를 상징하는 구조물로 제작되었던 긴 하루를 사는 이들을 위한 기념비를 변형해 뭘 굳이를 만들었다. 작가는 단단하게 서 있던 작품을 분절하고 위태로운 형상으로 흩뜨려 또 다른 자리를 점유하게 한다. 이는 기존의 작품을 다시 존재하게 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되뇌었던 "뭘 굳이"로 시작된 질문에 대한 자문자답의 또 다른 모습일 터이다. 작가는 관람객들이 분절된 구조 위에 앉아 스스로 삶의 지속 가능한 방식에 대해 공명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한다.

 

할 수 없는 것을 뺀 나머지展_씨알콜렉티브_2023

조재영은 증식과 변용의 가능성을 담은 조각의 본질에서 환경 문제와의 유사성을 탐색한다. 부동의 상태로 멈춰진 조각이 아니라 유닛(unit)으로 해체되고 재구성되며 노마드의 상태를 구현한 앨리스의 방은 고정된 불변의 명제란 무엇인가를 재사유하게 한다. 존재의 물리적 조건에 따라 유동적인 변화를 거쳐 완성되는 조각 작품처럼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한정된 활동과 규격화된 정답 찾기가 아니라 핵심의 중심을 찾아 끊임없는 비워내기임과 동시에 한없이 증식 가능한 변용/변형의 순간에 집중한다.

 

할 수 없는 것을 뺀 나머지展_씨알콜렉티브_2023

믹스앤픽스는 작품화가 되지 않았지만 버릴 수 없는 사물들을 수집하고 재조합하여 벼룩시장 좌판의 미감을 재현한다. 작가로서 혼자 할 수 없거나 혼자서 버거운 부분을 5명 작가들의 협업으로 보완하고 채우기 위해 결성된 믹스앤픽스는 유의미한 나눔을 위해 공유된 비효율적 다양체를 작업실 한편에 자리했던 터널 모양의 진열대 위에 채워나간다. 잡동사니처럼 보이는 사물들은 무질서 속에서 발견된 새로운 조형성을 통해 사물이 지닌 쓰임과 버림, 소유와 나눔 등의 가치를 환기한다. 이번 전시 할 수 없는 것을 뺀 나머지4명의 작가/팀이 조각 작업을 진행하면서 생태, 환경, 지속가능성이라는 주제를 실천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다. 작가들은 작품을 재사유하고 최소단위의 유닛으로 분해하며 존재의 물리적 조건 안에서 나눔의 의미를 재조명한다. 이는 자본주의의 효율성과 효용가치라는 미명 아래 숨겨진 끊임없는 무한 욕망의 증식이 가져온 비극의 본질에 대한 비판적 해석이다. 예술은 인류 미완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또 다른 진지한 모색을 살펴야 한다는 신념의 방편이기도 하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빼고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 그 나머지- 젠가(Zenga)의 무수한 조각들을 빼어내도 서 있을 수 있는 날카로운 긴장의 균형감을 찾아보려는 시도와 같을 것이다. 씨알콜렉티브

 

할 수 없는 것을 뺀 나머지展_씨알콜렉티브_2023

"The era of global warming has ended; the era of global boiling has arrived." (UN announcement, July 28, 2023). Nowadays, we are facing unprecedented abnormal climate and environmental problems. The pace of change and a sense of crisis have made ecology, environment, and sustainability the most urgent subjects of mankind and force us to find and do whatever we can. Individuals are imposed to perform tasks for action by unsupported justification and required to do something unless they are "not able to" without verifying if it is an effective and essential alternative to solve the huge crisis of humanity. We do not even properly discuss high priorities and non-urgent issues. If so, how should creative works and exhibitions, which are products of impractical surplus, stand in this social demand of sustainable development? The creative process of collecting and experimenting with unique and rare materials for a new sense of beauty involves numerous byproducts and waste. An exhibition is created through the consumption of countless resources such as materials and energies for the exhibition composition, production of works, installation of walls and facilities, shipping, and design. After the exhibition is over, efficient disposal is also executed for the next exhibition. Creators continue to be required to produce new and better works, but most of the works are kept in the corner of a studio until they are sold. If an artist can no longer afford to store old works, they are likely to be discarded. Considering this, it is quite ironic that art mentions the environment. Because creators are no exception to current problems, they also feel ambiguous between the unknown guilt of participating in environmental destruction and the desire to create new works. What can or cannot a creator do? In this context, this exhibition explores how meaningful our actions can be from a huge ecological perspective and how they can be delivered through the process of creative activities, works, and exhibitions. Taeyeon Kim attempts a "new interpretation of old work" as sustainability of a creation transcending time and space. Neutral Structure reveals how supplemental objects, such as supports and holders, which were used to support the installation works and stored in containers after exhibitions, can complement each other beyond their assistive roles and re-emerge as the main subjects. Foams looks for reserved sustainability by providing a special revision of an old work that had difficulties in storage due to its large size and frail materials. Juhee Youn transformed her previous work Monument for Those Living a Long Day, a sculpture that symbolizes the will to live, into a new work Why Bother. The artist splits the sturdy work into a fragmented, unstable, and precarious shape, allowing it to occupy another position. This may be another answer of her own to the question "why bother [to rework a previous work]?" that was constantly repeated in the process of reworking the existing work. Youn expects spactators to have an opportunity to be resonated with sustainable way of life sitting on a segmented structure. Jaiyoung Cho explores the similarity between environmental problems and the essence of sculpture containing the possibility of proliferation and transformation. Alice's Room makes us rethink the definition of a fixed, immutable proposition by being dismantled and reconstructed as a unit rather than a piece in an immovable state. For Cho, sustainable development, like sculpture completed through fluid changes according to the physical conditions of existence, focuses on the moment of transformation/modification that is infinitely multiplying and emptying out to find the core rather than limited activities and standardized answers. MIX n FIX reproduces the beauty of a flea or garage market by collecting and recombining objects that have not been made into artworks yet cannot be thrown away. The group was formed to supplement and share the works that are burdensome to individual artists or exceeds one's capacity through the collaboration of five artists. They fill a tunnel-shaped display in a corner of their studio with inefficient objects for meaningful sharing. Objects that look like odds and ends evoke the values of using, abandoning, possessing, and sharing through new formality in disorder. The exhibition After the Unsustainable demonstrates the process of artistic praxis for ecology, environment, and sustainability through sculptures created by four artists and team. The artists rethink their works, dismantle them into the smallest units, and reexamine the meaning of sharing within the physical conditions of existence. This exhibition, in this context, is a critical interpretation of the tragedy generated by the constant proliferation and infinite desires of capitalism in the name of efficiency and utility value. It is also a way of believing that we should seriously look for an alternative to current environmental issues without turning our eyes from unsolved problems of humankind. Ultimately, it is an attempt to find the best possible alternative after acknowledging what we cannot do and find the balance within sharp tension like a firmly standing Jenga puzzle even after losing many pieces. CR Collective

 

눈을 감아도 보이는 툭 툭 Detached

최성임/ CHOISUNGIM / 崔成任 / installation

2023_0827 2023_1001 / 추석 당일 휴관

최성임_아주 오래된 나무_철제 프레임, 스테인리스 스틸, 플라스틱 공, pe망, 실_가변크기_2023

 

최성임 홈페이지_www.sungimchoi.com

인스타그램_@sungimchoi_works

초대일시 / 2023_0901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2:00pm~07:00pm / 추석 당일(929) 휴관

 

아티스트 토크 / 2023_0916_토요일_04:00pm

움직임 워크숍 / 2023_0930_토요일_03:00pm

 

기획 / 강은미_박현

디자인 / 김아해

사진 / 전병철

설치 도움 / 스톤김_최혜진_최성문

후원 / 서울문화재단

 

 

온수공간

ONSU GONG-GAN

서울 마포구 월드컵북로174 2,3

Tel. 070.7543.3767

www.onsu-gonggan.com

 

이곳 아닌 저곳 ● … 그것의 역사가 존재하게 되는 것은 작업자가 그것을 자료로 수집한 순간부터가 아니라 그것을 향해서 질문을 던지는 순간부터다. 그래도 그 흔적을 잊을 수는 없다. 어느 날 그렇게 눈앞에 나타난 씨앗의 색깔, 헝겊의 글자(아를레트 파르주, 아카이브 취향(파주: 문학과지성사), 김정아 옮김, 2020, p.21.) * 최성임에게 작가로서의 10년이 찾아왔다. 반복되는 돌봄 노동을 자기 재현으로서 풀어내어 일관된 작업을 펼쳐 온 작가는 이번 전시 눈을 감아도 보이는 툭 툭에서 '떨어짐'에 주목한다. 익어서 툭 떨어져 일그러진 감. 아무렇게나 벗어 놓아 몸의 일부만 알아볼 수 있는 허물과 같은 옷가지. 노안이 찾아와 뿌옇게 보이는 시야. 자신의 주양육자와도 다름없었던 할머니의 죽음. 그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또 다른 시간의 배열로 줄 세워 전시장에 가져온다. 여전히 삐그덕대는 계단, 다세대 주택을 개조한 전시장이기에 끊임없이 채울 수 있는 방 안들, 못 하나 제대로 박을 수 없는 유약한 천장, 합판으로 된 벽체, 증축하여 쌓아 올린 3층의 다락방까지. 이 모든 것이 제약이자 도전적으로 작용한 이 요소들은 작가와 밀접하게 연동되어 이번 전시를 구축하는 데 있어 주춧돌이 됐다.

 

최성임_물러난 얼굴_아크릴, 실, 비즈_Ø 150cm×5, Ø 130cm×2_2023
최성임_살갗_플라스틱판, 연필 드로잉_가변크기_2023

최성임 개인전은 온수공간을 하나의 유기체적 몸체로 바라본 작가의 그 시선에서 출발한다. 뼈와 살이 있는 공간, 기관과 기관이 만나는 그 통로, 피가 흐르는 혈관이 지나는 길목. 몸으로 상정된 전시 공간은 얽히고설켜 자란 덩굴과 같이 안팎으로 넘나들며 생동한다. 그 모든 몸이 끝나는 공간인 3층에 최성임은 책의 집(2023)을 배치했다. 이는 단단한 물성인 책과 그 책을 읽는 몸이 가장 가까이에 만날 수 있도록 고려된 평상으로, 지난 10년의 기억이 퍼즐처럼 담긴 8권의 책들을 읽을 수 있는 아카이브 공간이다. 이곳은 앉을 수 있도록 하여, 몸으로 상정한 온수공간을 '안에서 밖으로' 볼 수 있도록 시점의 전환을 유도한다. 이제 관람객은 3층에서 2, 1층 그리고 바깥으로 나가는 길목에 몸 안쪽에서 생성되는 뒤엉킨 (그래서 피같이 진한) 서사와 겹쳐볼 수 있게 된다. 이번 전시에서 주안점이 되는 키워드는 작가가 지속해서 천착했던 긴장과는 반대인 '허물(어짊)'이다. 아카이브 공간 너머 창밖에는 아주 오래된 나무(2023)가 쏟아진다. 끝없는 나무(2015~) 시리즈의 신작으로 최대 28미터가 넘는 PE 망 안에 수만 개의 플라스틱 붉은 공이 매달려 있는 대형 설치다. 이 광경은 마치 온수공간에서 피를 쏟아내는 듯, 공간 안쪽까지 붉은색이 스미며 공간을 물들인다. 붉은색은 뼈의 일부인 누워 있는 몸(2023)에 관통하며 또 다른 몸으로 변모한다. 계단을 통해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며 맨드라미가 있는 풍경(2023)을 스친다. 전통 민간요법으로 지혈제의 역할을 했다고 알려진 맨드라미는 쏟아지는 피를 응고하여 하나의 지층을 쌓아준다. 사운드 작업_살갗에 닿기(2023)는 다시금 작업자와 작업자가 초대한 사물들과 맞부딪히는 사운드로, 우리에게 지혈된 몸을 피부 그 가까이에서 접하게 한다. 공간 1층 전면에 빼곡히 붙어있는 살갗(2023)은 미색의 반투명 색지에 드로잉 작업으로, 이는 아주 오래된 나무의 붉은빛을 투과한다. 이렇듯, '허물(어짊)'은 과거의 작업이 단단한 물성으로 쓰인 책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시작되어 다시금 뼈, 늘어진 살점, 지혈된 피, 살갗이라는 부산물이 파편화된 장면으로 펼쳐진다.

 

최성임_살갗에 닿기_사운드 작업_00:07:00_2023
최성임_황금 이불 + 빛나는 벽_와이어 타이, 합판, led_240×310×245cm_2023
최성임_맨드라미가 있는 풍경_led, pe망, 실_가변크기_2023

수수께끼 같은 인생에서 죽음을 앞둔다는 것은 생의 진리다. 최성임은 그래도 살아있는 한, 이곳과 분리된 저곳의 생과 연결될 수 있는 그 흔적들을 찾고자 한다. 그는 '눈을 감아도 보이는' 것을 감각하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아리아드네의 실이 묶인 그 미로에 몸을 던진다. 생의 끝에 서게 된 몸이 피부에 닿았던 그 감각을 기억하기 위하여.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자전적 세계가 당신 몸 어느 한구석에 새겨질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박현

 

최성임_두 개의 귀_철제 앵글, 플라스틱, 솜_215×240×120cm_2023
최성임_누워 있는 몸_패브릭, led, 콜라겐 케이싱, 철제 스프링, 스테인리스 스틸, 아크릴, 가죽_가변크기_2023
최성임_가족을 위한 식탁_와이어 타이, 비즈, 스테인리스 스틸, 합판_990×940×70cm_2023

나의 몸, 나의 집, 눈을 감으면 찾아오는. 몸은 참으로 특이한 '존재'. 몸은 세상을 마주하는 창이면서 또 자아를 현시하는 무대이자 또 그 자체로 주인공이며 수많은 불화가 찾아들며 화해가 일어나는 장소다. 나의 의식이 거처하는 곳은 나의 몸이며, 삶이란 나의 몸이 집에서 나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일련의 반복이다. 인간이 존재 자체로 목적을 달성하고, 주어진 시간을 살아내는 과정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이 기억으로 새겨지는 곳 또한 몸이다. 그렇게 나의 몸은 이 세상에서 주고 받았던 모든 관계의 보관함이다. 최성임 작가는 집에서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거리에 놓인 사물들과 친교를 맺으며 작업을 시작한다. 시선이 박혔던 사물을 움켜쥐고 자신의 사유를 통과시킨 형상을 집약적인 노동으로 잉태해 세상에 내어놓았다. 그의 지난 작업이 집의 안과 밖, 그 사이의 몸의 위상학에 대해 언급해왔다면, 이 전시를 통해 제시되는 신작은 실체적인 대상인 몸, '자기자신'을 물화시키고 있다. 그의 작업들이 전시공간으로 건너와 거주를 시작하면, 누군가의 집이었던 공간은 거대한 육체로 변모한다. 작가는 지금까지 사용한 설치의 전형, 천장에서 수직으로 내려오며 팽팽하게 당겨지고 매끈하게 정리되는 일련의 방식을 뒤집는다. 신체의 변화를 통해 삶의 곡절들을 온전히 목도한'오늘의 몸'3개 층으로 이루어진 공간에 배치시키며 늘어뜨리고, 내려 놓고, 펼쳐놓는다. 대문을 들어서면 붉은 색의 가지가 정원과 집의 깊은 곳으로 안내한다. 3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공간의 외벽을 덮은 거대한 다발, 선홍색 망에 알알이 들어찬 거대한 덩어리는 태초의 인간도 지켜보았을 법한 형태가 뒤틀린 아주 오래된 나무의 몸통을 닮았다. 모든 생명활동이 일어나는 몸의 경계를 구성하는 피막은 불투명하다. 건물의 유리창을 뒤덮은 피부색을 띤 정사각형의 트레이싱지에 새겨진 반원형의 반복된 드로잉은, 그 자체로 생명의 리듬이자 손끝에 각인된 지문, 혹은 신체를 따라 흐르는 완만한 곡선을 상기시킨다. 몸이라는 유기체에는 생명의 리듬이 있고 모든 접촉에는 울림이 있다.

 

최성임_안기, 2023_가죽, 실, 솜_100×220cm×5_2023
최성임_책의 집_합판, 가죽, 실, 8권의 책_130×240×45cm_2023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시도하는 사운드 설치는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 작가의 작업실에서 채집 된 백색소음이다. 황금 이불을 위한 와이어 끈을 엮거나, 구슬을 꿰거나, 실을 자르는 등의 반복 된 행위가 신체에 부딪히며 만들어낸 일련의 소리는 고요한 전시장에 작은 균열을 낸다. 전시장 1층에는 노안으로 흐려진 시야에 대한 감각을 제시하는데 가려진 작업들 사이로 사운드와 빛이 여리게 새어나오며 작품이 제시된 무대의 뒤편을 상상하게 한다. 계단을 따라 2층으로 들어서면 다양하게 변주 된 몸이 드러난다. 태어난 몸이 아닌, 살아낸 몸이자 죽음을 향해가는 몸이 1인 다역의 배우처럼 곳곳에 등장한다.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패널은 두 개의 귀라는 작업으로 외부의 진동을 흡수하는 고막을 닮아 세상을 감지하는 피막으로서의 신체를 더욱 극대화한다. 누워 있는 몸은 우리가 매일의 시작과 끝에 마주하는 그 자체의 덩어리이며, 생명의 시작과 끝이었던 수평으로 뉘어진 몸이다. 기관인지 하나의 장치인지 세계를 향해 열린 표면인지 알 수 없는 몸의 부분들이 공간을 점유한다. 3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들어선 곳에는 예성-예술가로 살아낸 몸, (flesh), 그 자체를 닮은 듯한 두 개의 작업, 가족을 위한 식탁, 안기가 제시 된다. 커튼처럼 늘어진 살덩어리의 다발을 걷어내고 3층으로 올라가면, 이 전시공간의 가장 높은 장소, 신체의 가장 높이 있는 머리에 해당하는 곳에서 책의 집을 만날 수 있다. 전시가 끝나고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작업들이 정박된 기억의 장소로서의 아티스트북 8권이 제시되며, 책은 몸의 피부와 같은 표면 위에서 자신의 거처를 마련하고 관객을 맞이한다. 자기를 경험하는 방법에는 수많은 길이 있고, 타자와 만난 수많은 경험에 대한 지각은 나의 신체에 새겨진 흔적에 흐르는 감각을 바라보는 일이다. 세월이 흐르며 희미해지는 기억의 장소도 몸이고, 팽팽했던 근육과 힘으로 버티게 한 것도 내 몸이다. 나의 몸이라는 무대를 바라보며 모든 곳에 내적 의식을 위치시키며 의미를 오랜동안 지켜보는 행위는 삶을 기꺼이 살아낸, 그리고 살아나갈 시간에 대한 깊은 유대이며 우정의 형식을 띤 사랑의 제스처가 될 것이다. 강은미

 

최성임은 집과 몸, 몸의 장소, 집의 자리라는 인간이라는 장소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자신이 머무를 자리를 탐사해왔다. 일상공간에서 만난 사소한 물질에서 촉발된 사유의 운동은 사적 기억과 연합하며 수행적인 노동을 통해 작품이 되고, 전시장이라는 영토에 그의 집을 지으며 연대의 지점을 찾아왔다. 온수공간에서 열리는 개인전 눈을 감아도 보이는 툭 툭(Detached)은 작가의 작업에 새겨져있던 육체에 대한 모티브를 발전시켜 무대의 중심에 올린다. 눈을 감아도 보이는 기억 혹은 잔상, 청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인상을 구체적인 형태로 제시한다. 세대를 연결하는 몸이라는 장소에 새겨지는 공동의 기억과 존재적 한계, 생애주기에 따른 신체적 변화와 시간의 불가역성에 대한 무력함을 인정하고 모든 현재적 사태를 넘어서는 태도를 보인다. 이번 전시에서는 과거의 생활 공간인 집을 신체의 연장으로 삼고, 집이 그 자체로 거대한 몸으로 육화하는 전환을 시도한다. 또한 사운드 작업을 통해 몸의 표면과 물질세계의 마주침에 대한 고민도 내어놓는다. 예술가로서의 삶이 흐르며 찾아오는 나이듦이 주는 의미, 생활 장소로서의 집, 세계 내에 존재하는 몸은 어떤 의미가 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사유의 테이블에 초대하며, 시간이 몸을 통과하고 다시 또 다른 집을 지어나가며 생성의 공간을 창조해나가는 여정을 함께 하기를 바란다. 강은미_박현

 

 

Believing is Seeing

최윤정/ CHOIYUNJNG / 崔允禎 / painting

2023_0901 2023_0919 / ,월요일 휴관

최윤정_believing is seeing_캔바스에 유채_30×30cm_2023

최윤정 홈페이지_www.choiyunjung.kr

 

초대일시 / 2023_0919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0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관람시간 외 전화예약

 

아터테인_아터테인 S

ARTERTAIN_ARTERTAIN S

서울 서대문구 홍연길 65

(연희동 717-15번지) 1,2

Tel. +82.(0)2.6160.8445

www.artertain.com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들 우리는 살고자 하는 의지와 상관없이 사회가 던지는 수 없이 많은 시각적 정보에 노출된다. 이를 통해 지금을 살고 있는 자신의 의지와 별도로 이유를 찾게 되고 합리화시키게 된다. 하지만, 그 정보 속엔 우리의 소비적인 삶이 지치지 말기를, 그 끝없는 소비를 통해 시스템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로 가득하다. 결국, 우리를 둘러싼 정보라는 것은 스스로 찾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라면 누군가의 이익, 혹은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메시지일 뿐이다.

 

최윤정_pop kids #44_캔바스에 유채_65.2×100cm_2013

최윤정 작가는, 자신만의 캐릭터를 통해 이러한 메시지를 분석한다. 또한, 그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캐릭터들의 감각적인 장면들을 클로즈업해 작가가 전달하고 있는 메시지 뒤에 있는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을 시각화한다. 인간의 욕망은 그 어떤 것 보다 솔직하고 직접적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누군가의 이익을 취하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인간적이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세상을 가장 편안한 상태로 관망할 수 있는 지점까지 선택할 수 있는 순간을 만든다.

 

최윤정_pop kids #122_캔바스에 유채_30×30cm_2023

그의 pop-kids시리즈 주인공들의 머리카락처럼 보이는 본 전시의 작품들은 머리카락이라고 인지하기 전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무수한 경험의 중첩처럼 보인다. 어찌 되었든, 우리의 삶은 어제의 경험과 오늘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일로 이어지게 된다. 따라서 삶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중첩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이어질 수 없으니까. 이것은 시간이 이어주는 것이 아니라 경험, 즉 기억이 이어주고 있다. 그렇게 한 가닥, 한 가닥 서로 얽히고설키고 있는 최윤정의 머리카락은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우리의 삶을 내일로 연결하고 있는 상징이기도 하다.

 

최윤정_hero#03_종이에 실크스크린판화_37×47cm(image), 55×75cm(frame)_2021

지금, 우리 앞에 보이는 모든 사물과 혹은 사건들이 과연 사실일까, 혹은 사실이었을까. 눈을 감으면 이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는 것을 감안해 보면 세상은 보이는 것들이 우리의 사고를, 믿음을 결정하고 있다는 생각을 뿌리칠 수가 없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가장 보편적이고 이성적인 사고가 형성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또한, 이성적인 사고가 폭력적으로 변질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최윤정_folds #07_캔바스에 유채_80×80cm_2013
최윤정_folds #12_캔바스에 유채_30×30cm_2023
최윤정_folds #10_캔바스에 유채_40.9×24.3cm_2023

최윤정의 머리카락은 바라보고 얻는 사고와 사건에 대한 믿음 이전에 먼저 믿고 바라봤을 때, 얻을 수 있는 정보와 메시지들을 찾기를 제안하고 있다. 정보 이면에 있을 수많은 이익과 권력을 너머, 메시지와 정보 자체를 우리가 얼마나 잘 활용하고 서로 소통할 수 있을지, 그리고 그 정보를 토대로 우리의 사고가 얼마만큼 확장될 수 있는지, 해서, 그의 작업은 그런 사고의 확장을 바탕으로 하는 오늘과 내일의 중첩이다.  임대식

 

최윤정_folds #13_캔바스에 유채_24×19cm_2023
최윤정_folds #06_캔바스에 유채_33×24cm_2013

최윤정은 이번 전시를 통해 욕망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을 보여줍니다. pop kids 시리즈는 미디어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의 단면에 대한 메시지 중심의 시리즈입니다. 주름의 형태를 양식화한 다소 추상적인 folds 시리즈는 존재를 향하는 의지 그 자체를 욕망으로 해석한 나름대로의 생각을 시각화 한 시리즈입니다. 최윤정

 

This is Why I Always Whisper

전현선/ JEONHYUNSUN / 全炫宣 / painting.installation

2023_0825 2023_0922

전현선_연못, 거울, 메아리 Pond, Mirror, Echo (2)_캔버스에 수채_150×180cm_2023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전시기간 중 상시개방(주차 불가)

 

IBK & GMoMA YOUNG ARTISTS 2023 VOL. 2

주최 / IBK기업은행_IBK행복나눔재단

 

IBK기업은행 본점

Industrial Bank of Korea

서울 중구 을지로 79(을지로250번지)

 

기업은행은 IBK&GMoMA YOUNG ARTISTS 2023두 번째 전시로 회화작가 전현선의 개인전을 개최한다. 전현선은 기하학적인 형상들과 인터넷에서 차용한 이미지를 수채로 캔버스 위에 얇게 쌓아올리며, 구상과 추상, 회화와 설치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을 해왔다. 원래의 맥락에서 벗어난 형상들은 회화 평면 안에서 동일한 위계를 가지며, 개별적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들 간의 관계를 통해 이야기하는 작가 고유의 스타일을 보여준다. 전현선 작업에서 뿔 형태는 그의 작업세계를 관통하는 중심축이다. , 텐트, 무화과 등의 뿔 형태는 작가의 초기작부터 등장하며, 명확하게 판단할 수 없는 풍경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서 전현선의 작품은 위에서 내려다보아야 볼 수 있도록 바닥에 뉘여 설치되거나, 병풍처럼 연결되어 세워진다. 관람자들은 마치 세상이 반영되어 비추는 연못과 다른 세계로 연결된 창문을 들여다보듯, 화면 속 이미지들을 재조합해보기도 하고 이미지들의 다양한 이야기들에 귀기울이기도 하면서 작품을 통해 자신과 세상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전현선(b.1989)은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와 동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개인전 Meet Me in the Middle(갤러리2, 2022), 열매와 모서리(갤러리2, 2020), 붉은 모서리, 녹색 숲(P21, 2019), 나란히 걷는 낮과 밤(대안공간 루프, 2018), 모든 것과 아무것도(Weekend, 2017) 등이 있으며, 참여한 주요 그룹전으로는 뒤집기(에스더 쉬퍼 갤러리, 2023), 아트 스펙트럼2022(리움, 2022), 20회 송은미술대상전(송은아트스페이스, 2020), 6회 종근당 예술지상(세종문화회관 미술관, 2019), 뿔의 자리(인사미술공간, 2016) 등이 있다.

 

전현선_연못, 거울, 메아리 Pond, Mirror, Echo (3)_캔버스에 수채_150×180cm_2023
전현선_그림과 창문 Painting and Window (9)_캔버스에 수채_200×100cm_2023

IBK & GMoMA YOUNG ARTISTS 2023 IBK&GMoMA YOUNG ARTISTSESG경영을 실천해 온 IBK기업은행이 경기도미술관(GMoMA)과 협력하여 유망한 신진작가를 발굴하여 신작제작비 지원을 포함한 실질적 지원을 통해 문화 예술 육성 토대를 마련하고 소외분야를 지원하는 전시 프로그램입니다. 기업은행 본점 로비에서 신진작가 4인의 커미션 작품을 포함한 개인전을 순차적으로 개최하고, 최우수 작가 1인을 선정하여 2024년 경기도미술관에서 수상작가 전시를 개최합니다. IBK기업은행

 

방화광 Pyromaniac

윤미류/ YOONMIRYU / 尹美柳 / painting

2023_0831 2023_0924 / 월요일 휴관

윤미류_Hunter-Walker 1_캔버스에 유채_227.3×181.8cm_2023

윤미류 인스타그램_@miryuyoon

 

초대일시 / 2023_0831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본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하는

2023 신진미술인 전시지원 프로그램

선정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주최,후원/ 서울시립미술관

 

서울혁신파크 SeMA 창고

SEOUL INNOVATION PARK_SeMA Storage

서울 은평구 통일로 684 4~5 전시실

Tel. +82.(0)2.2124.8800

sema.seoul.go.kr

 

윤미류의 회화(繪畫)와 방화(放火) 윤미류 회화의 구조는 일정하다. 한 인물이 화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인물화라는 첫인상과는 달리 통상적인 인물화 장르와는 거리가 있다. 인물이 가진 고유한 분위기를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되, 이를 바탕으로 작가가 향하는 종착지는 본래의 인물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회화적인 장면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인물이 환기하는 추상적인 감각을 뾰족하게 드러내기 위해 장면을 직접 연출하고, 연출된 세팅에서 모델이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만드는 내러티브로 허구의 이미지를 구축한다. 이번 개인전 파이로매니악에서는 그가 쌓아온 균일한 흐름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을 보다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윤미류_Hunter-Walker 2_캔버스에 유채_259.1×193.9cm_2023

* '파이로매니악''방화광'을 뜻한다. 의미만으로 무척 강렬하고, 압도적이다. 많이 들어보았을 방화범과는 다르다. 방화범의 방화가 금전적이든 개인적이든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다면, 방화광에게는 뚜렷한 동기가 없다. 불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충동 억제 장애 때문에 방화를 감행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불타는 광경을 보며 긴장이 완화되고 강한 황홀함을 느끼기도 한다. 윤미류의 기존 작업들은 방화광이 연상케 하는 충동, 긴장, 공격성과는 멀어 보이는데, 그래서 이번에 새롭게 등장한 '파이로매니악'이라는 키워드는 작가의 행보를 읽어낼 중요한 단서가 된다.

 
윤미류_Brushing Off 1_캔버스에 유채_227.3×162.1cm_2023

** 페인터로서 윤미류가 감각을 다루는 방식을 살펴보자. '낯익은 대상이 환기하는 사적이고 추상적인 감각'을 시각화하기 위해 작가는 일련의 시스템을 구축했다. 2021Dripping Wet을 작업하는 과정에서는 어렴풋한 감각을 먼저 키워드로 표현했다. '채비, 다짐, 서늘한, 선명한, 태연한, 굳은, 더듬다, 버티다'와 같은 키워드는 인물을 섭외하고 장소, 의상, 소품, 제스처 따위를 연출하는 실마리가 된다. 연출한 현장에서 인물이 즉흥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을 아이폰 카메라로 촬영하고, 이를 캔버스 위에 물감으로 옮긴다. 이번 신작을 준비하면서는 낱개의 모호한 단어들을 늘어놓는 데서 나아가 이들을 조합해 서사를 상상했고, 그런 과정에서 '주술사, 사냥꾼, 산책자'라는 캐릭터가 등장했다. 주술사, 사냥꾼, 산책자라는 캐릭터로 연상한 장면들, 이를테면 '이유 모를 행동을 하는 주술사의 몸짓과 무언가를 쫓는 사냥꾼의 얼굴, 어느 순간 길을 잃은 산책자의 눈,' '다른 사람은 짐작도 못 할 주문, 목표물을 급습하려는 작전, 하늘을 헤아려 길을 찾는 꾀를 가진 사람' 등의 상상은 한 야산의 현장에서 현실화된다. 두 젊은 여성이 모델로 분해, , 햇빛, 눈발, 나뭇가지 등 자연 환경에 반응해 여러 행동을 취한다. 이들이 디렉션을이 표현하는 시간에서, '이미 예정된 자신의 연출 보다는 연출된 행위를 뚫고 나오는 우연한 형태들' 이 모여 작가가 느끼는 감각은 점차 예리하게 세공된다. 작가가 포착하고자 하는 '인물-환경이 만드는 다양한 조형성, 내러티브' 는 언어로 완벽히 표현할 수 없는 순간에 존재한다. 그 내러티브는 감상자의 해석에 열려 있고, 새로운 자극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이를테면 전시 준비가 한창이던 여름, 한 동료의 피드백은 작가에게 적절한 환기점을 제공했다. 눈밭을 배경으로 한 그림을 보고 '눈덩이/눈송이/눈가루들은 불타버린 하얀 재, 혹은 폭죽이나 불꽃의 불티처럼' 보이고, 그 이유는 인물의 눈빛이 '뜨거운 느낌'을 뿜어내기 때문인 것 같다는 감상이었다. 한창 무더운 7월에 겨울의 눈을 그리고, 눈의 차가움이 아주 뜨거운 무언가로 교차되는 순간, 차가움과 뜨거움이 서로 전이되고 뒤섞이는 찰나. 이렇게 감각이 새롭게 확장되는 순간에 작가는 매료되었던 것 같고, 그래서 '파이로매니악'은 단숨에 전시의 제목으로 등극하게 된다. '야트막한 산에 출몰하고, 혼자 무언가를 꾸미고 실행하고, 아닌 척 살고, 붙잡기 위해 쫓고, 붙잡히지 않기 위해 도망 다니는,' '주저하고 망설이는 순간, 입가의 물기를 닦으며 이제 막 중요한 무언가를 끝내고 숨을 고르는' 누군가처럼 주술사, 사냥꾼, 산책자를 통해 떠올린 이미지들은 외부 감상자의 해석이 더해져 방화광으로 확장된다.

 

윤미류_Brushing Off 2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23

이쯤에서 작업의 핵심 질문을 되짚어본다. 윤미류는 '회화로 표현하는 여러 형태 중에서도 특히 인물에 관심'이 있고, 그의 고민은 '인물을 그린다는 것에 요구되는 조건'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물은 '그와 환경이 만들어내는 조형성, 내러티브, 그것이 '환기하는 추상적 감각'이다. 윤미류가 추구하는 감각은 어디쯤 위치해 있을까? 작가는 그 감각에 도달하기 위해 키워드, 캐릭터, 모델, 사진 등을 동원하지만, 그가 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실제 인물도, 사냥꾼도, 방화광도 아니다. 작가는 캔버스에 최종적으로 안착한 회화적 이미지와 본래의 대상이 다르다고 선을 긋지만, 여러 단계들을 차곡차곡 밟고 감각을 다듬으며 도달한 결과물에는 그가 경유해 온 흔적들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 특히 모델이 가진 고유한 분위기는 작업의 밑바탕 역할을 한다. 작가는 주변 인물을 모델로 섭외하는데, 가까운 이들 중에서도 작가에게 어떤 종류의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에게 집중하고, 그 얼굴에서만 볼 수 있고, 끌어낼 수 있는 형태를 보여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영화 감독이 상상한 미장센을 연출하기 위해 배우를 섭외하면, 그 배우의 해석이 캐릭터에 반영되는 식일 것이다. 또한 그림 속 인물이 주술사다, 혹은 방화광이다, 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환원할 수는 없지만, 캐릭터는 작품을 읽어내는 길잡이가 된다.

 

윤미류_Fists in the Pocket_캔버스에 유채_33.4×45.5cm_2023

*** 윤미류가 천착하는 감각은 종국에 회화의 물성과 결합하며 완성된다. 작가는 회화의 장면을 조직하는 데 있어 빛, , 질감, 양감, 등의 물성을 무척 예민하게 살핀다. 화면을 넓게 차지하는 어두운 푸른색을 상상하며 모델에게 후디를 입히고, 동물적으로 무언가를 부욱- 찢어 가르는 것 같은 느낌, 반짝이는 텍스처를 떠올리며 가죽 부츠를 고른다거나, 사방으로 산란되는 모습을 상상하며 모델이 머리를 풀어헤치게 한다는 식이다. 전시에서 선보이는 신작은 두 그룹으로 나뉜다. 야산이라는 장소만 같을 뿐, 모델, 날씨, 시간대, 의상, 그에 따른 상황은 모두 다르게 설정했다. 그 덕에 두 그룹이 이루는 감각의 대조가 뚜렷하다. 한 사람은 눈이 내린 다음 날, 한낮에, 캐주얼한 오버 사이즈 후디와 청바지를 입고 포니테일을 한 채 카메라 앞에 섰다. 머리카락과 옷에 전부 눈이 잔뜩 묻었다. 머리를 거칠게 흔들자 머리카락에 들러붙은 눈발이 후두두 떨어진다. 맨손으로 한 움큼 눈을 쥔 손, 코끝에 맺힌 물방울의 온도가 시리다. 반면 다른 한 사람의 화면은 좀 더 미스테리하다. 어둠이 깔리는 시간대에 한 여성은 나뭇가지를 쥔 채 이런저런 자세를 취한다. 가죽 블루종과 부츠의 회색빛에는 따뜻함보다는 냉한 푸른기가 감돈다. 저녁 빛이 얼굴에 강한 명암을 드리우며 얼굴을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으로 드라마틱하게 나눈다. 모델의 눈빛은 스스로의 역할에 충분히 심취한 몰입을 보인다.

 

방화광은 그림 속 인물이기도 하고, 작가 자신을 가리키기도 한다. 작가는 '사건의 타임라인 속 하이라이트 장면을 그리기보다는, 마치 방화광이 일을 내기 직전 또는 직후의 상태에 가까운 시간' 을 포착하고자 한다. 어떤 일의 직전과 직후라면 긴장감이 고조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 최고조의 순간을 찾아 헤매는 페인터의 모습에 방화의 아이디어를 고르는 방화광을 겹쳐본다. 성기게 존재했던 감각이 현실에서 연출되는 광경을 바라보는 작가의 '경이로운 눈'이 활활 타오르는 불에 환희하는 방화광의 눈과 같다면, 작가가 회화에 대해 느끼는 매혹의 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유한나

 

, Wind, inner landscape

김지현/ KIMJIHYUN / 金芝賢 / painting

2023_0908 2023_0920 / 월요일 휴관

김지현_삶2_종이에 채색_91×116.8cm_2023

김지현 인스타그램_@iamjihyun.art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그리다

GALLERY GRIDA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1221

(창성동 108-12번지) B1

Tel. +82.(0)2.720.6167

www.gallerygrida.com

 

우연은 필연을 향한 여정이다 "안다는 것은 본 것을 기억하는 것이며, 본다는 것은 기억하지도 않고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둠을 기억하는 것이다" (오르한 파묵 내 이름은 빨강, 김상욱 울림과 떨림에서 재인용) 모든 흔적은 의미를 남긴다. 의미는 존재에 대한 기억이다. 흔적에서 감지된 의미, 즉 존재의 기억은 물리적 시공간을 초월한다. 기억은 지나간 시간을 반추하지만, 존재는 지금 여기 우리 눈앞에 현존하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를 횡단하는 '흔적'처럼 '그림'이라는 사물의 본질도 이와 유사하다. 작가의 철학적 사유를 몸짓으로 풀어내 형상화한 것, 이것이 의미다. 그리고 인식과 물질의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낸 유의미한 결과물, 이것이 존재다. 그림이란 결국, 이미 사라진 시간의 체취를 시각적으로 부활시켜 현존하는 물질 형상으로 드러낸 사물을 말한다. 김지현 그림을 보고 흔적을 떠올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지현_삶1,2,3_종이에 채색_91×116.8cm_2023

실제로 2020년 이후 제작된 드로잉 연작 제목이 흔적이다. 경험에서 비롯된 내면의 기억을 몸 밖으로 끄집어낸 결과물이 그의 작품이다. 이미지는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비구상-추상회화 형식으로 표출된다. 따라서 보는 사람의 해석은 열려있다.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인데, 그 속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보기는 쉽지 않다. 사실적으로 재현된 구체적 이미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철저히 주관적인 심상의 표현, 비가시적인 내면 풍경이 김지현 작품의 알맹이다. 사변적이지도 않고, 친절하게 내러티브를 전달해 보여주지도 않는 미지의 세계다. 직접화법이 아닌 은유법이 동원됐다. 절제된 함축미도 감지된다. 비정형 도상과 화려하지 않은 색채, 생동하는 몸짓으로만 구성된 화면은 시적(詩的) 감흥을 물씬 풍긴다.

 

김지현_몇 마음_종이에 채색_56×60cm_2023
김지현_산 사이로_종이에 채색_45.5×53cm_2023

그림의 모티프는 어떤 사건에서 출발한다. 키우던 대형 반려견과 함께한 산책 에피소드다. 늘 같은 시간 같은 코스를 지났던 공원 숲길과 주변 풍경들, 그리고 예기치 못한 반려견의 갑작스러운 죽음...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었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이미 겪었을 법한 소소한 일상의 단편일지도 모른다. 동서고금 막론하고 모든 예술작품엔 작가의 삶이 반영된다. 평범을 특별함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예술가다. 아니나 다를까, 김지현이 체감한 감정의 파동은 각별했다. 여느 일반인과 달리 그 기억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우연처럼 맞닥트린 작은 사건이 인생-삶의 가치관마저 바꿔버리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자신의 선택과 판단을 무한 긍정하고, 조형적으로 열린 가능성을 화면 위에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런 마음가짐은 의도된 창작행위로 승화되었고, 결과는 그림 속에 선명히 각인되었다.

 

김지현_침전된 찰나_종이에 채색_45.5×53cm_2023
김지현_바람 부는 날_종이에 채색_45.5×53cm_2023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김지현 그림은 과거지향적이라 할 수 있다. 기억 속에 저장된 특정 사건을 집요하게 되뇌어 표현하기 때문이다. 망각의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았던 섬세한 감정은 재현을 뛰어넘는 추상 이미지로 환생시켰다. 이성과 의식 이면에 잠재됐던 감성과 본능을 스스로 흔들어 깨웠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듯 내면의 파동이 부지불식 분출되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 흘러가는 구름, 일렁이는 물결... 이 모든 현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 가시적으로 만들어낸 자연의 조화다. 선과 획, 면과 색의 겹침, 질감과 여백의 어울림, 붓놀림의 방향과 속도... 차별화되고 독창적인 스타일을 만들어낸 김지현의 조형 능력의 원천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다. 화가의 내면에 잠재된 에너지 역시 바람 같기 때문이다. 김지현이 창조한 작은 우주, 그의 그림은 바람이 만들어낸 풍경처럼 경이롭다.

 

김지현_있었던, 잊었던_종이에 채색_39.6×54.8cm_2023

과거를 회상하며 즉흥적으로 풀어내는 제작과정엔 우연이라는 요소가 강하게 개입된다. 우연은 언젠가 필연과 맞닥뜨린다. 이 둘은 동전 양면처럼 한 몸으로 이뤄진 운명이다. 곰곰이 생각하면, 우연과 필연이 낳은 결과는 서로 얽혀있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현대물리학, 특히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도 비슷한 고민을 한다. 예컨대 그들은 빛이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이기도 하다는 난해한 난제를 관측만 했을뿐, 그 원인을 명쾌히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재밌는 건, 김지현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내 작업 방식은 필연적이기도 우연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거의 우연에 가깝다. 사건들이 내 마음에 고정된 것은 필연이지만, 작업에 쓰일 재료들을 선택하는 것은 우연이다. 무의식 속 선택의 순간을 재조합하는 작업은 불확실한 자연과 사물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 짧은 글이지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김지현_기억의 재조합1_종이에 채색_26.4×19.3cm_2023

문장을 부분으로 쪼개고, 단어의 뜻을 곱씹어 본다.(굵은 글씨에 주목!) "작업에 쓰일 재료를 선택하는 것은 우연"이고, "무의식 속 선택의 순간을 재조합"한다며, "작업은 불확실한 사물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이를 한 번 더 축약하면 "작업-재료-선택-우연, 무의식-재조합, 불확실-기억"으로 정리된다. 그렇다. "우연히 선택된 재료가 무의식으로 재조합된 불확실한 사물로 기억될 것", 이것이 바로 김지현 그림의 정체다.

 

김지현_기억의 재조합2_종이에 채색_19.3×26.4cm_2023
김지현_내, 풍경_종이에 채색_15.8×22.7_2023

한편, 작가는 동양화를 전공했다. 그렇지만 동양화니 서양화니 하는 구분은 무의미하다. 졸업장에 찍힌 학과 이름으로 장르를 재단하는 건 형편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김지현 그림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는 '그냥 그림'이다. 뜬금없이 서양 철학사와 잘 알지도 못하는 첨단 현대물리학 분야인 양자역학, 심지어 신유물론 같은 새로운 과학이론과 혁신적인 사상을 들먹여본다. 데카르트가 설파한 명제 '코기토 cogito ergo sum' 이후, 인간은 신-종교로부터 벋어났다. 이성을 지닌 주체적 자아를 자각하게 된 것. 비로소 근대(화)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이때부터 인간은 이원론적 시각으로 세상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인식하는 주체(나)와 대상으로서 객체(너) 뿐만 아니라 선-악, 신체-정신, 물질-영혼, 자연-문화, 생물-무생물, 남성-여성, 정상-비정상, 서양-동양, 전통-현대, 미시-거시... 미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모든 것을 능동과 수동으로 나누는 이항 대립적 세계관을 지니게 됐다. 하지만 영원불변, 절대 진리는 없는 법. 패러다임은 변하고, 절대적인 것처럼 여겨지던 과학적 원리는 전복되기 마련이다.

 

김지현_바람과 경치1_캔버스천에 채색_140×270cm_2022
김지현_바람과 경치2_종이에 채색_51×64.7cm_2022

예컨대 현대물리학, 특히 미시세계를 연구하는 양자역학에서 제기된 '불확정성의 원리'는 서양철학과 과학의 뿌리를 근본적으로 뒤집으며 새로운 과학혁명을 예고하고 있다.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물질'에 대한 새로운 사유와 인식을 주장하는 '신유물론'의 등장도 눈여겨 주시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제기된 '인류세 Anthropocene' 개념도 무시하고 외면할 수 없는 화두임에 틀림없다. 근대 이후 폭주해 온 인류에 대해 지구가 반응하며 내놓은 위험경고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덩달아 예술-미술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반성도 필요하다. 여하튼, 개인적으로 최근 흥미롭게 살펴 보는 사상이 바로 신유물론이다. '행위자-연결망 이론(Actor Network Theory, ANT)'을 주장한 과학기술학자 브뤼노 라투로(Bruno Latour, 1947~2022) 견해에 많은 부분 공감한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자꾸 그런 입장으로 그림을 해석하려는 경향을 감추지 못하겠다.

 

김지현_바람과 경치3_종이에 채색_45.3×41cm_2022

이런 배경을 전제로 김지현 작품에 대한 의견을 정리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김지현 그림은 단순히 추상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동양회화로 규정 지울 수 없다. 예술이라는 불확정한 가치판단 개념을 내포한 유의미한 사물이기 때문이다. 기억과 존재의 의미는 작품의 핵심요소다. 그림은 인간과 비인간-물질 상태에서 얽혀서 횡단하며 관계 맺는다. 어떤 사건의 결과가 흔적이라면, 그림 역시 흔적을 간직한 사물이다. 인간과 물질의 행위가 결합 되어 보여주는 우연의 결과, 유의미한 이미지를 발산하는 필연의 사물이다. 어둠을 기억하는 밝은 표면. 이것이 김지현 그림이다. 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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