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가객 최백호의 산문집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마음의 숲에서 출간되어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다.

출판된지 한 달도 되지않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최백호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마음의 숲/ 240면 / 가격17,000원

지난 달 초에 발간된 산문집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는 그가 써온 노래가사처럼 깊은 우수와 사유,

삶에 대한 통찰이 오롯이 담겨있다.

 

산문집에는 최백호가 가수가 된 우여곡절과 가수로서 진정성을 잃지 않고 살아 온 진득한 이야기,

노래에 얽힌 사연, 그리고 깊은 울림을 주는 삶의 잠언들이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60세가 넘어 그리기 시작하여 여러 차례 개인전을 가졌던 그림 30점도 수록되어

산문집의 볼거리를 더해주는데, 그림에 이어 글 솜씨도 보통은 아니었다.

하기야! 그가 쓴 시 같은 노래가사들을 보면 일찍부터 노래하는 시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수이며 시인이고, 시인이며 화가인 최백호는 이 시대의 진정한 풍류객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난 4일 오후 4시에는 광화문 교보빌딩 대산홀에서 최백호의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북 콘서트가 열렸다.

 

교보빌딩 23층 대산홀은 350석 규모지만 코로나 방역으로175명만 입장할 수 있는데다,

책은 이미 구해 읽은 터라 북 콘서트는 가지 않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뜻밖의 이변이 생겨버렸다.

 

필자가 포스팅한 북 리뷰를 본 울산의 오세필씨가 사발통문을 돌려버렸다.

그 덕에 김명성씨가 좌석을 확보하여 인사동 지인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이십여 명이나 추가로 참석할 수 있었던 것도 객석의 반만 예약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그 날 오후 3시 무렵, 정영신씨와 인사동부터 들려 갤러리인덱스에서 열리는

) 김기찬선생의 어게인 골목안 풍경 속으로사진전을 관람했는데,

사진전 역시 모처럼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좋은 사진이었다.

 

전시를 보고 나오는 길에 역술인 신단수씨를 만나 그날 일진이 어떨지 궁금했는데,

북콘서트가 열리는 대산홀 입구에는 신단수씨의 친형인 김명성씨가 구입한 책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객석에는 오세필, 임태종, 정기범, 이정숙씨등 반가운 분도 여럿 보였다.

 

오후4시부터 시작된 북 콘서트는 최백호의 주옥같은 노래와 함께

가을 낙엽처럼 구수한 이야기들이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국회의원이었던 아버지께서 태어난 지 몇 개월 밖에 되지 않은 자신을 보러오다 교통사고를 당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에서부터, 누님으로부터 너 때문에 아버지를 잃었다는 원망과 더불어

공부가 하기싫어 방황했다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가슴에 맺힌 상처까지 다 털어놓아

그의 진정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별도의 사회 없이 혼자서 1시간 30분 동안 끌어가는 북 콘서트 진행 솜씨도 보통은 아니었다.

 SBS 라디오에서 '최백호의 낭만시대'14년 동안 끌어 온 경험이 뒷받침 되지 않았나 싶다.

 

그 날 부른 노래는 부산에 가면을 비롯한 애창곡을 일곱 곡이나 불렀는데,

우수에 젖은 그의 노래는 흩어지는 낙엽처럼 아련한 향수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특히 지금은 별이 되어버린 친구 홍수진 시인을 생각하며 가사를 쓴

영일만 친구에서는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 왈칵 밀려왔다.

마지막 구절인 친구를 부르는 대목은 절규처럼 가슴에 내려 꽂혔다.

 

3월 말에는 부산에서 최백호의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북 콘서트가 열린다니,

부산에 계신 분들은 잊지 말고 좋은 시간 만들길 바란다.

 

'인사동 사람들'은 북 콘서트가 끝난 후 미리 예약해 둔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겨 유쾌한 만찬의 시간도 가졌다.

그러나 김명성씨가 마지막 기념사진 찍으며 뱉은 농담 한마디는 영원히 잊지 못할 마음의 상처가 되고 말았다.

 

사진, / 조문호

 

정영신 사진
정영신사진
정영신사진

  

삼천포의 박구경시인(67세)이 지난 3월2일 오후10시, 서울성모병원에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조정애시인의 페이스북에 올라 온 박구경시인 부고를 보고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저승 가는 길에 순서야 없지만, 왜 착한 사람만 데려가는지 모르겠다.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면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오래전 ‘진료소가 있는 풍경’시집 낼 때는 프로필 사진 찍으러 그녀가 근무한 ‘사천 북사동 보건소’까지 찾아간 적도 있었다.

그리고 인사동 사람들 모임이라도 있으면 먼 길을 마다 않고 올라와 모두의 안부를 확인한 인정 많은 시인이었다.

 

너무 늦게 알아 문상도 가지 못했지만, 부디 극락왕생을 빕니다.

 

빈소 : 삼천포서울장례식장

발인 : 3월 4일 오전9시

장지 : 선산수목장

 

박구경시인은 경상대간호학과를 졸업하고, 한때 경남일보 기자와 사천북사동보건진료소장을 지내며, 96년 ‘문예사조’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 ‘진료소가 있는 풍경’, ‘기차가 들어왔으면 좋겠다’, ‘국수를 닮은 이야기’, ‘외딴 저 집은 둥글다’, ‘형평사를 그리다’ 등이 있다. 98년 제1회 공무원문예대전에서 장관상을 수상하는 것을 시작으로 고산 윤선도 문학대상, 경남작가상, 하동문학상을 수상했고, 경남작가회의 회장을 지낸바 있다.

 

"기차가 들어왔으면 좋겠다/ 자가용은 너무나 미끈하고/ 핸드폰은 점점 작아지고/ 디지털의 표정,/ 그 생각은 너무나도 엉뚱해지고/ 그 꿈들은 세련되고 약아빠졌으니/ 육중한 열 량 스무 량의 기차가/ 거친 쇳내를 풍기며 들어서는 바닷가 역사驛舍/ 사람들이 사철나무 울타리에 깃들어/ 아침 햇살과 바다 물결을 길게 이고 지고/ 사람들이 왔다야! 하며/ 흥청흥청 장터처럼 모여들었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다"(2007년 작 '기차가 들어왔으면 좋겠다' 중에서)

 

최백호 /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 마음의 숲 / 240면 / 17,000원

낭만가객 최백호의 산문집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마음의 숲에서 출간되었다.

가수에서 화가로, 화가에서 문필가로, 끊임없이 도전하는 전방위 예술가로 거듭나고 있다.

 

인사동 공화랑/ 쵀백호개인전에서 2008.5

 다들 바쁘게 살다보니 그의 소식은 인터넷에서나 볼 수 있었는데, 최근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산문집이 나왔다는 기사를 보고 서둘러 구해 보았다. 노래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에 이어 맛깔 나는 글 솜씨 또한 일품이었다. 그의 노래 가사처럼 깊은 사유와 삶에 대한 통찰이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가수로서 진정성을 잃지 않고 살아 온 이야기와 노래에 얽힌 사연, 그리고 속 깊은 울림을 주는 인생의 잠언들은 최백호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환갑이 되어 그리기 시작해 여러 차례 전시 해 온 그림 삼십여 점도 볼거리를 더해준다.

 

인사동 '경복궁'에서 '인사동사람들'모임에서 / 2018.8

, 최백호를 추남(秋男)으로 부른다.

며칠 전에는 우연히 유튜브에서 그의 노래 부산에 가면을 들었는데, 쪽팔리게 왜 그리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마치 낙엽이 흩어질 듯한 우수에 젖은 목소리가 아련한 향수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만난 지가 몇 년은 족히 된 것 같아 모처럼 그에게 문자메시지로 편지를  보냈다. 평소 어눌한 말버릇으로 소통이 잘 안되는데다, 이젠 귀도 어둡고 발음까지 분명치 않아, 전화는 잘 걸지도 받지도 않는다. 마침 '스마트협동조합' 일로 상의할 것도 있어 장문의 편지를 쓴 것이다.

 

정동 이화아트갤러리 / 장사익글씨전에서 2019.5

그를 알게 된지도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10여년 전 정영신씨와 내가 인사동에서 '아트온'이란 사진출력소를 차린 적이 있었다. 그 때 김명성시인과 뜻을 모아 '앱숀' 출력기를 사라며, 천 만원이나 되는 큰 돈을 준적이 있었다. 돈이 있어도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지난 세월은 아름다운 시간도 있었지만, 지워버리고 싶은 부끄러운 시간도 많았다. 그는 부끄러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부끄러움도 배워야 한다. 배우지 않으면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모른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얼마나 용감한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그것을 가르쳐야 한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볼이 빨개진 모습. 그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알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어른인 우리도 배워야 한다. 그래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 한다.“

 

인사동 '툇마루'에서 김명성, 오세필씨와 함께 / 2018. 7

산문집에 실린 글들은 떠나보낸 세월 속의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소환되고 있었다. “노래 속에 나오는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은 부산 동래시장 근처 수안파출소 부근의 어느 허름한 다방이었다. 힘들었던 시절 길을 걷다가 갑자기 비가 쏟아져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에이스 캐논의 색소폰 연주곡인 로우라가 흘러나와 그 자리에서 스무 번을 넘게 들었던 것 같다. 그런 기억을 더듬어 만든 노래다

 

마포 '뮤지스땅스' 개막식에서 / 2014.12

노래에 대한 투지에 대해서도 말했다. “여든이 되어도 나는 입영전야를 부를 수 있다. 젊은 시절에 한 호흡으로 부르던 대목을 두세 호흡으로 나눠 부르면 된다고 생각한다. 여든에는 여든의 호흡으로 아흔에는 숨이 좀 가파르겠지만 충분히 노래할 수 있다.”  그렇다. 그는 부지런하고 최선을 다하는 친구다. 책 속에 이런 대목도 나온다. “나보다 음악을 잘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나처럼 열심히 하는 사람은 드물 거라고 생각한다. 매일 새벽 6시 반쯤 일어나 두세 시간씩 노래 부르고 그림을 그린다. SBS 라디오'최백호의 낭만시대'14년째 하고 있다. 열심히 하는 일에 타협은 필요 없다.”

 

인사동 덕원갤러리의 정영신 '장날' 전에서 / 2016.8

그리고 사회를 향한 질책도 빠지지 않았다.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르고도 카메라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 어른에게 심한 욕설을 해대는 젊은이, 더욱 거칠어진 폭력범, 갑 질하는 부자들의 뻔뻔스러움 등은 씁쓸하면서도 오늘의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

이외에도 스스로 간이 작았다며 무대에서 손을 올리기까지 한없이 힘들었다는 이야기, 할 말은 하는 그의 성격 덕에(?) 일어났던 방송국 에피소드, 70년대 해외 공연에서 일어났던 에피소드, 박자가 틀리고 부를 때마다 노래가 다르다고 후배들에게 핀잔 듣는 솔직한 이야기들은 공감과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표절에 대해 남긴 글에서는 정의로운 의지를, 교편 잡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압구정 '장천아트홀'에서,, 옆은 오세필씨와 필자 / 2014,8, 정영신사진

이 책의 매력은 결코 최백호의 진정성 있는 고백이었다.

어떤 일을 하던 그가 주목하는 지점은 진정성이다. 고독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서지 않고 돋보이려 하지 않는 것. 그 고독을 견디는 힘이 최백호의 음악과 그림 그리고 지금의 글을 만들지 않았나 생각한다.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자신에 대한 진정성이라는 중력이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겨 독자들로 부터 사랑받게 된 좋은 책이다. 나 온지 며칠 되지않았으나 벌써 베스트셀러다.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효교' 교주로 등극 / 2014.8

 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고독이다. 그것은 내가 노래와 그림을 시작할 수 있게 해준 언제나 가장 소중한 친구다. 고독에서 사유의 힘이 오고 혼자 견뎌낼 수 있는 강인함이 온다. 진정한 고독은 따뜻한 위로를 준다.”

 

나는 일출보다 일몰을 더 사랑한다. 세상을 삼 킬 듯이 힘차게 솟아오르는 피둥피둥한 아침 햇살 의 욕망스런 모습보다, 온몸을 불태워 최선을 다한 장엄한 황혼의 그 처절한 모습에 감동 받는다.”

사진, 글 / 조문호

 

오는 3월4일 교보문고(23층대산)에서 최백호 북콘서트가 열린다.

 

자유로운 삶을 사신 철학자 신성준 선생께서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을 받았다.

뇌출혈을 일으켜 갑자기 돌아가셨다며, 인사동 유목민에 빈소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며칠 전 윤명철씨가 발견하여 급히 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미 늦었다고 한다.

독일 사는 조카에게 연락이 닿아 그나마 혈연이 빈소를 지킬 수 있었다.

 

지난 5일 오후6시 무렵, 빈소를 차린 유목민에 갔더니,

독일에서 온 외조카 유수선씨와 조카 신대식씨를 비롯하여

윤명철, 노광래, 전활철, 최유진, 강찬모, 김명성, 조해인, 이명희씨가 있었다.

 

일찍은 박상희씨가 다녀갔고, 늦게는 방기식씨와 김상현씨도 조문을 왔는데,

김상현씨는 암과 투병중인 환자가 아니던가?

 

빈소에 걸린 영정사진이 젊은 모습이라 낯설기도 하지만,

고인의 영전에 술 한 잔 올려 편안한 안식을 기원했다.

 

먼길 떠나는 노잣돈이라며 돈봉투를 내놓았더니, 노광래씨가 필요없다며 돌려 주었다.

술 값은 독일에서 온 외조카 유수선씨가 부담한다며...

 

고인은 독신으로 사셨으니, 걸릴 것 없이 편하게 떠나신 것이다.

장례식장보다 유목민에 빈소를 마련한 것도 잘 한 것 같았다.

 

5일은 인사동 유목민에서 조문객을 맞고,

6일은 노광래씨가 운영하는 시네갤러리에서 맞을 것이라 한다.

 

생전에 두 곳을 가끔 들리기도 했지만, 유목민처럼 사시며 술을 즐겼으니

고인의 뜻도 같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인의 삶처럼 자유롭게 이승을 떠돌며  삶을 하직한 것이다.

최유진씨는 장례문화도 이처럼 다양하게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유해는 화장하여 조카가 사는 독일로 옮겨 갈 것이라는데,

절차가 까다로워 보름정도의 시일이 걸린다고 한다.

 

삼가 고인의 극락왕생을 빕니다.

 

사진, / 조문호

 

 

 

 

철학자 신성준 선생께서 지난 4일, 뇌출혈로 돌아가셨습니다.

빈소를 지킬 가족이 없어 인사동 ‘유목민’에 임시 분향소를 마련하였습니다.

2월 5일은 '유목민'에서 조문이 가능하고, 2월6일은 노광래씨의 '시네갤러리'로 옮깁니다.

생전에 좋아하신 약주 한 잔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고인의 극락왕생을 빕니다.

 

아래는 고인의 생전 모습입니다.

 

명절이 되면 빌린 돈도 갚아야 하지만, 차례상 차림에서 선물에 이르기까지

돈 들어 갈 곳이 너무 많아 명절 다가오는 것이 무서운 때도 있었다.

지금은 모든 경제활동에서 벗어나 무소유의 삶을 살아 그렇게 마음 편할 수가 없다.

더러 불편한 점도 있으나 돈으로 생기는 폐악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다행스럽게 기초생활수급자라 최소한의 수입이 보장되어 사는데 불편함은 없다.

 

돈은 가지면 가질수록 욕심이 생기 듯,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모든 사건이 돈에서 비롯된다.

정치인들이나 재벌이나 가질 만큼 가진 자들의 돈에 대한 집착은 무섭다.

공직에서 옷을 벗거나 감옥에 가는 것까지 감수하며 돈에 혈안이 되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돈은 ‘돈다’는 말에서 유래되었다는데, “돈 놓고 돈 먹는다”’는 말이 있듯이, 돈은 밑천이 있어야 벌 수 있다.

그 돈을 굴려 버는 과정에서 온갖 몰염치와 비리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돈이 많으면 장사를 잘하고, 소매가 길면 춤을 잘 춘다.’는 말은 사람의 능력보다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이다.

‘돈만 있으면 처녀 불알도 산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 ‘돈만 있으면 개도 멍첨지라.’는 말에서는

돈의 위력을 강조하느라 불가능한 일 까지 끌어들여, 돈 때문에 세상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우려다.

 

돈이 없을 때도 돈에 대한 말을 많이 한다. ‘돈 없으면 적막강산이요, 돈 있으면 금수강산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돈 벌기가 힘들어 ‘돈 한 푼 쥐면 손에서 땀난다.’고도 한다.

 

그래서 ‘돈에 침 뱉을 놈 없다’지만, 돈 많은 사람을 존경하지는 않는다.

특히, 돈을 벌어 모으기만 하고 쓰지 않는 구두쇠는 비난과 풍자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돈은 벌기보다 쓰기가 더 어렵다고 해서,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써라'고도 한다.

 

그처럼 돈은 버는 것 보다 쓰길 잘 쓰야 한다.

돈 때문에 친구는 물론, 등 붙이고 사는 가족까지 헤어지는 것을 많이 보았다.

때로는 사람을 죽이는 흉기가 되기도 하고...

 

 돈이란 똥과 같아서 돈이 모이면 구린내가 진동을 하나 골고루 나누면 좋은 거름이 된다.

나 역시 돈이 있을 때는 걱정을 달고 살았으나, 돈이 없으니 아무런 걱정이 없다.

 종종 인용하는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나.’는 속담도 돈보다 사람이 더 소중하다는 경구다.

돈에 대한 속담까지 이렇게 많은 걸 보니, 돈이 요물은 요물인 모양이다.  

 

정초부터 재수 없는 돈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는 것은,

돈이 없어 빌려가며 가난한 예술가를 돕는 사람이 있어서다,

 

주말에 녹번동 가면 찾아오는 지인이 더러 있다.

지난 토요일에는 정동지 동생 정주영씨가 다녀갔고, 일요일엔 '유목민'의 전활철씨가 왔다.

활철씨는 용돈 하라며 돈 봉투를 내놓아 정동지 팁이라며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지난 20일은 김명성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해 바뀌기 전에 술이나 한잔 하자며 불광동 '대조시장'에서 만나자는데, 그날따라 날씨가 너무 추웠다.

동자동에서 시간 맞춰 갔으나, 조해인씨와 먼저 도착해 길에서 떨고 있었다.

 

'대조시장'에 온 것은 며칠 전 홍어무침을 샀는데, 맛이 있어 다시 사러 왔다는 것이다.

홍어무침을 배낭에 집어넣고 추위를 피해 인근 ‘남도술상’이란 주막에 들어갔다.

맛있는 집만 찾아다니는 그였지만, 추위에는 도리가 없었다.

 

연포탕을 안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김명성씨가 두 사람에게 용돈을 내놓았다.

병석에 누워있는 이청운화백을 비롯한 몇 몇 분에게도 보냈다는 것이다.

 

인사동에서 ‘아라아트’를 운영할 때는 종종 가난한 예술가들을 도왔으나,

지금은 건물이 경매에 넘어가 빚더미에 앉은 처지가 아니던가?

가져 온 돈도 외국기업에서 지사장으로 근무하는 딸에게 빌린 돈이라고 한다.

제 코가 석자인데, 남 생각할 여지가 어디 있겠나?

그의 성격을 아는지라 받으면서도 "씰데없는 짓 그만하라"는 염장 지르는 소리를 했다.

 

다들 갈 길이 바빠 소주 두병만 까고 일어섰는데, 마침 돈 쓸 곳이 생겼다.

밥만 올리려던 차례상을 차리려고 '대조시장'에서 장을 본 것이다.

술김에 이것저것 안 살 것까지 사며 돈을 다 써 버렸다.

돈이 생기면 그냥 두지 못하는 버릇을 탓하지만,

차례음식도 귀신이 먹을 것이 아니라 사람이 먹을 것 아닌가?

 

아무튼, 김명성씨 덕분에 푸짐한 명절상을 차렸지만, 마음은 개운치 않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 아무리 없어도 밥 굶는 사람은 없는데,

그득한 제사상 또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의 부스러기 일 뿐이다.

 

새해에는 더 이상 민폐 끼치지 않기로 다짐했다.

돈이 인간성을 갉아 먹는다.

 

사진, 글 / 조문호

 

 

울음이 타는 가을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을 보겠네.

 

저것 봐, 저것 봐,

너보다도 니보다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가는

소리죽은 가을을 처음 보겠네.

 

 

오늘따라 왜 이리 박재삼시인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이 생각날까?

새삼 시집을 들춰 보고 오래된 사진첩에서 박재삼시인의 사진을 찾아보았다.

며칠 전 친구가 떠난 뒤로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친구를 잃은 슬픔보다 안면몰수하는 세상인심이 더 슬퍼서다.

 

박재삼시인의 울음이 타는 가을 에는 삶의 통과의례가 담겨 있다.

죽음과 제사 그리고 가을강은 삶의 허무가 깃든 한편의 아름다운 서정시다.

그러나 가을 강이 상징하는 것은 죽음과 소멸만이 아니다.

다시금 재생하는, 그 너머의 삶을 희구한다.

 

박재삼 시인은 스무 살까지 삼천포에서 살았으나,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신문을 배달하거나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했다.

이런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삼천포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한다.

그의 주경야독 생활은 1953현대문학에 취직하여 서울 생활을 할 때까지 계속되었다는데,

초기 시에 자주 등장하는 가난은 이런 개인적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박재삼 시인은 정적인데다 외로운 기질을 타고난 분이다.

생전에 인사동에서 만나면 별말씀은 없지만, 항상 미소가 따뜻했다.

30여년 전, 양평 가는 길에 우연히 따라가 찍은 사진이 선생의 마지막 사진이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오래된 사진을 찾아 추억이나 들추는 걸 보니, 나도 갈 때가 되었나보다.

너무너무 그립고 만나고 싶은 분들이 많다.

 

사진,/ 조문호

 

지난 15일 정영신씨와 함께 세상을 떠난 창원 김의권씨의 장례식장에서 황성건, 변형주씨를 만나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눈 후 인근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튿날 발인을 지켜본 후 양산장에 가기 위해서다.

 

울산에서 온 황성건씨와 동행했는데, 양산장에는 공윤희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정동지는 장터 촬영을 왔는지, 장보러 왔는지 모를 정도로 농산물을 바리바리 사들고 왔다. 온 김에 오세필씨도 만나보기 위해 남창에 있는 동광기와를 찾아간 것이다.

 

남창에 있는 기와 골 사무실은 열려 있으나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사무실에는 나무로 만든 다양한 모골(기와모형 틀)이 진열되어 있었다. 작업장에는 귀면기와와 용두 같은 미완의 기와들이 어지럽게 놓여있었는데, 마치 귀신 나올 듯 으스스 했다.

 

문 닫힌 기와공장에는 반구대 암각화를 형상화한 전돌이 전면을 장식하고 있었는데, 두꺼비굴이라 불리는 재래식 기왓굴과 달랐다. 노장들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 전래의 기왓 가마는 쌍굴이었고 원주에서 발견된 경우는 산언덕을 깎고 굴을 뚫었다. 부여근교에서 발굴된 백제 와요는 강둑에 굴을 파고 바닥에 구들장까지 놓았다고 한다.

 

담장처럼 쌓아 둔 기와더미를 보니, 사양길에 접어든 기와의 암울한 현실을 읽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각 지방마다 특색 있는 기와를 만들어 왔으나 콘크리트로 지은 슬라브집이 대세를 이루는데다 양기와와 슬레이트 등 새로운 지붕재료의 보급으로, 명맥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가상한 일이다. 지금은 전통기와의 수요가 점차 줄어 둘어 이곳 울산 남창과 전라도 장흥군 안양면에서만 만들어진다고 한다.

 

오세필씨가 운영하는 동광기와는 선조인 오호영옹이 1900년대부터 시작하여 4대째 이어지는 긴 역사를 가졌다. 3대째인 부친 오성환씨가 동광기와라는 이름으로 확장시켰고, 4대째인 오세필씨가 이어받으며 문화재관리국 등록1호가 되었다고 한다.

 

오세필씨는 황금기와를 개발하여 구인사 '대조사전'에 올리기도 했다. 구인사가 돈도 많으면서 콘크리트 절만 만든다는 비판을 받자 제대로 된 대조사전을 건립한 것이다. 신흥수대목장이 도편수가 되고 오세필 제와장이 기와를 맡는 등 전통건축의 장인들을 불러 모아 지어졌는데, 안쪽은 한 층이지만 겉으로는 3층이라 법주사 팔상전의 구조와 비슷하다. 그 '대조사전'은 1992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2000년에 완공되었는데, 오세필씨의 금빛 기와는 도금이나 단청이 아니라 유약을 발라 구운 기와라 시간이 지나도 빛이 바래지 않는다고 한다.

 


기와는 암기와와 숫기와로 구분되는데, 아래에서 받쳐주는 넓적한 기와가 암기와고, 위에서 덮어 지붕의 골을 만드는 둥근 기와가 숫기와다. 또한 암막새와 수막새, 귀면기와(도깨비 얼굴을 새긴 기와), 치미(전통 건물의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는 기와), 용두(용머리를 표현한 기와), 망와(지붕의 마루 끝에 세우는 기와) 등 부속장식 기와도 다채롭게 만들어져 사용되었다.

 


전통 기와는 흙과 물로 만들기 때문에 습기가 많은 우기와 한랭한 계절을 피해 봄과 가을에 제작된다. 첫 작업은 질 좋은 원토를 채취하는 것이다. 검은 흙, 누런 흙, 붉은 흙 등 세 종류의 흙이 고루 배합돼야 좋은 기와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기와를 만드는 공정은 찰진 진흙으로 된 점토를 물과 반죽하여 흙 사이에 기포가 생기지 않도록 밟고 짓이기는 작업을 반복하며 나무로 만든 모골(模骨)이란 틀에 넣는다. 모골의 외부에 마포나 무명천을 깔고 반죽한 진흙을 다져 점토판 위에다 씌워 방망이 같은 판으로 두들긴다.

 

그런 다음 와도(瓦刀)2등분하거나 또는 3, 4등분하여 자른 다음 장방형으로 재단한 진흙을 한 조각씩 떼어 와통 둘레에 붙인다. 와통은 진흙을 성형하는 데 쓰이는 원통형의 나무통이다. 성형 작업 중에도 진흙 판을 계속 두드리는데, 이는 흙 사이에 기공이 생기면 나중에 굽는 과정에서 기와가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양이 잡힌 뒤에는 대나무칼 등으로 선을 긋고 건조 과정을 거친 뒤 각각의 낱 기와로 분리해 다시 말린다.

 


최종 단계는 가마 작업이다. 말린 기와를 화기가 고루 통하도록 가마에 차곡차곡 쌓은 뒤 사흘간 불길을 조절하며 섭씨 1000도가 넘는 고온에서 구워낸다. 은은한 검은색이나 은회색이 되면 제대로 구워진 것이다. 이렇게 한 장의 기와가 탄생하기까지 40일 가까이 흙과 물, 그리고 불 속에서 서른 가지가 넘는 까다로운 공정을 거쳐야 한다.

 

전통 기와는 기계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자연스러운 곡선미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수분 흡수율과 통기성도 이른바 공장 기와가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옛 기와를 두고 흔히 살아 숨쉰다고 표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전에는 시골 여행하다 보면 곧잘 눈에 띄던 것이 흙으로 두둑하게 쌓은 두꺼비굴이 있었는데, 요즘에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워낙 영세한 시골의 기와공장 인데다 인력 의존도가 높은데 비해 값이 싼 제품이라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곳저곳 살펴보며 전통기와의 우월성과 창의성에 감복하고 있으니, 제와장 오세필씨가 나타났다. 손님 접대를 위해 횟집에 회 사러 간 것 같았다. 오세필, 정영신, 황성건, 공윤희씨 등 다섯 명이 회를 싸들고 오세필씨 형님이 운영하는 고깃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식당은 여러 차례 가보았지만, 소고기 육질이 좋아 입에 찰싹 달라붙었다. 소고기에다 생선회가 어울리지 않는 궁합이지만, 회를 좋아하는 정동지를 위한 특별한 배려였다.

 

그리고 식당 벽에도 오세필씨의 기와 골에서 구워낸 전돌이 장식하고 있었다. 장식적 효용성만 아니라 전돌이 고기냄새를 흡수하는 이점도 있다고 한다. 아무튼, 오세필씨 덕에 맛있게 잘 먹었다.

 

식당에서 나와 보지 못했던 와당 전시장을 둘러보았는데, 마치 기와 박물관에 온 것 같았다. 백제기와에서부터 신라기와에 이르기까지 연대별로 전시되어 있었는데, 입이 쩍 벌어졌다. 심지어는 오래된 기왓장 조각까지 바리바리 모아 두었다. 나라마다 기와의 특징이 뚜렷했다. 고구려의 기와는 힘차고 날카로운 모습을 보였고, 백제의 기와는 간소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다. 백제기와의 보드라운 촉감에서 특유의 조형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또 통일신라 때의 섬세한 문양은 무르익은 미의식의 화음이 느껴졌다. 신라의 기와는 처음에는 소박했으나 차츰 화려해지고 무늬가 다양하게 나타났다.

 

제와장 오세필씨의 설명으로는 우리 기와가 삼국시대에 꽃을 피웠다고 한다. 고구려와 백제가 각기 수준 높은 조와 기술을 가지고 있었는데, 통일신라에는 독자적인 기와를 구워내어 완성의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심지어 녹유 기와와 전돌이 그러하려니와 무늬에 있어서도 다양하고 정교하다. 그런데 고려이후의 무늬와 종류는 한계점에 달했음을 보게 된다. 청자로 구운 기와까지 나왔음에도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12세기로 한 고비를 그었다. 얼굴 무늬 수막새는 자연스러운 미소를 간직한, 신라의 대표적 기와 유물로 꼽힌다. 그리고 강진에서 구워진 모란당초 무늬의 청자기와는 얼마나 기발한 착상인가.

 

옛 유물에 나타난 기와의 종류는 무려 20여종에 달했다. 평와로서 암기와와 숫기와는 물론, 숫기와로서 미구기와와 토수기와가 더 있었다. 막새는 평기와에 낙수의 드림새를 붙인 것이고 망새 (망와)는 용마루나 내림마루 끝에 다는 바래기를 말한다. 옛것에는 귓기와, 곱새기와, 기왓골수새 등 갖가지 기와가 있었다고 한다. 치미, 용두, 잡상, 토수 같은 것은 궁궐이나 큰 사찰용이라 흔치 않았다.

 

정영신씨는 이곳에서 구웠다는 달항아리 한 점과 오래된 숫기와 한 점을 선물 받았다. 숫기와에 핀 세월의 꽃은 어느 조각품도 따를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나저나, 문화재청에서 전통기와를 전승하고 보존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 같다.

전통기와를 배우려는 사람도 없거니와 타산이 맞지 않아 더 이상 만들 수가 없다는 말에 귀가 막혔다

역사를 중시 않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

 

사진, / 조문호

 

선물받은 달항아리와 숫기와를 집이 좁아 어디 둘까 걱정했는데, 다 제자리가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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