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국서 연출의 관객모독8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랐다.

지난 71일부터 오는 1010일까지 대학로 아티스탄홀에서 100일 동안의 장기 공연에 들어간 것이다.

 

그것도 정부 지원금이나 자체 예산으로 마련한 무대가 아니라 기국서 연출의 팬이 기부한 후원금으로 올리는 작품이라 그 의미가 더 크다. 관객을 모독하는 연극이 관객의 후원으로 살아나 새로운 동력을 얻게 된 셈이다. 새로운 후원 문화를 기대할 수 있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관객모독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오스트리아 출생 페트 한트케가 1966년에 발표한 희곡이다. 1978년 기국서 연출의 극단76’에 의해 무대에 오른 후 꾸준히 재 공연되어 관객을 모아 온 대표적 레퍼토리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으며, 기국서를 일약 천재 연출가로 불리게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연출가 기국서

기국서 연출의 천재성은 주벽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기국서 연출만 생각하면 머리에 떠오르는 생생한 장면이 있다.  201010월 완주 종남산 자락에 있는 도예가 한봉림씨 작업실에서 열린 창예헌 예술기행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인사동 예술가들이 완주의 늦가을 정취에 취해 치룬 예술행사인데, 밤늦도록 이어진 뒤풀이에서 벌어진 갑작스러운 해프닝으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결정적인 것은 날이 밝은 새벽녘에 우연히 마주친 모습이다. 신발은 어디 갔는지 맨발로 터벅터벅 시골길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마치 연극의 마지막 장면 같았다. 어디론가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은 애잔한 여운을 남겨주었다. 이 밖에도 전설이 된 기국서씨의 수많은 이야기가 연극계 주변을 심심찮게 떠돈다.

 

연극 '관객모독’ 또한 관객에게 욕설과 물세례를 퍼붓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파격적인 연극으로, 공연 때마다 화제가 되어왔다. 띄어쓰기를 무시한 중복된 의미의 단어를 사용하거나 목사님 설교 같은 어조나 약장수 같은 상황을 설정하는 등 언어만을 매개로 한 독특한 연극이다. 공연을 처음 접하는 관객은 불편하고 당혹스럽지만, 사람들은 이 작품을 반극이라 불렀고 작가는 언어연극이라 한다.

 

 

이 작품은 관객이 연극에 대해 갖고 있는 기존의 연극적 형식이나 선입견을 완전히 무시하고 파괴한다. 플롯이나 서사는 물론,  무대 막이나 장을 구분하는 자체가 없다. 빈 의자 네개만 놓인 텅 빈 무대 위로 막이 올라가면  네 명의 배우가 걸어 나온다. 무대와 객석의 조명이 동시에 밝아지면서 배우와 관객은 동등한 관계에서 서로 바라보게 된다. 이어서 네 배우가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대사들, 특별한 순서도 연관성도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대사는 무대 위에 어떤 '이야기'나 '환상'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이를 통해 배우들은 관객이 연극에 대해 갖고 있는 환상이나 관례적으로 반복해온 습관, 공연을 본다는 것의 의미 자체를 전복시켜버린다.

 

이 연극에서 무언가를 얻을 것이라는 기대는 마십시오. 다른 연극에서 볼 수 있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이고,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도 없을 것입니다.”라는 대사처럼 관객모독은 관객이 기대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연극을 전개한다. 배우들이 쏟아내는 셀 수 없는 욕설말의 유회, 이런 일련의 행위가 관객들을 자극하며 그들이 자연스럽게 입을 열고 반응하도록 하는 것이다. 폭넓은 감정의 진폭으로 해방감을 맛보게 하는 것이 바로 관객모독이 선사하는 카타르시스다. 그 본심은 메너리즘에 빠진 연극들을 조롱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한 관객들을 각성시키는 데 있다.

 

1978년의 초연에는 기주봉, 정재진, 주진모, 고수민을 내세웠으나, 젊은 배우들로 꾸린 2005년판 관객모독은 래퍼 양동근의 매력이 두드러진 무대였다. 대사의 진폭은 높아지고, 배우가 관객을 모독하는 방법도 더 잔인해진 자극적인 버전이었다.

 

공연장을 바꾸고 배우를 바꾸고 대본을 바꿔 새롭게 내놓은 이번 버전은 관객을 무대 위로 끌어올려 연기하게 하거나, 배우가 객석 통로에 들어가 관객과 호흡을 같이 하는 등 또 다른 시도를 보여준다. 극적인 사건은 없지만, 말을 맛 갈 나게 구사하는 캐릭터들이 인상적이다.

 

 / 조문호

 

장소 : 아티스탄홀 / 기간 : 20227 1일부터 1010일까지

공연시간 : 평일 730/ 토요일 3, 6/

           일요일, 공휴일 2, 5(화요일은 공연 없음)

           티켓 전석 5만 원

공연문의 : 팀플레이예술기획(주) 1661-6981

 

출연 : 리얼 김성태, 김주희, 임주영 

       현도 이주훈, 심성필, 민들샘 

       극만 강현택, 박세욱 

       현실 홍리나, 최유리, 기은수 

       무대감독 : 서민균

 

 

지난 30일은 예술인 '스마트협동조합' 정기총회 날이었다.

대의원은 아니지만, 술 냄새를 맡아 달라 붙은 것이다.

 

그날이 바로 코로나 감옥에서 해방된 날이 아니던가?

총회 끝날 시간에 맞추어 뒤풀이 집에 갔더니, 반가운 분들이 많았다.

 

서인형 이사장, 황경하 사무국장, 박권주, 김성은, 송수아씨 등

상근하는 분 외에도 최석태, 장경호, 김이하, 정영신, 민정기,

박태종, 이미경, 김은엽, 이영경, 이명신씨 등 많은 분 들이

총회를 끝내고 여기저기 모여 있었다.

 

다들 몸 사리는 코로나 시국임에도 40명이나 참석했다고 한다.

전체 조합원 십 분의 일이 참석했다면 많이 나온 편이다.

 

스마트협동조합은 창립 삼 년 만에 괄목할만한 성장을 했다.

음악연습실 운영 등 사업도 확대되었지만, 조합원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나 역시 가난한 예술인들이 받을 수 있는 여러 지원을 받았는데,

코로나로 힘 들어 하는 가난한 예술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여태 예총이나 민예총’같은 예술단체 어디에서도 회원들 생계를 위해

도움 준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도움은커녕 회원들 갉아먹는 구조가 아니던가?

 

빈손으로 시작한 '스마트협동조합'이 불과 삼 년 만에 자리 잡은 것은

조합원들의 협력도 따랐지만, 서인형 이사장의 기획력과

황경하 국장의 추진력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찰떡궁합이었다.

 

올해는 음반 사업에 이어 출판 사업도 시작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스마트협동조합' 인터넷신문도 창간 준비 중이란다.

 성장하는 '스마트협동조합'을 보니 마음이 든든했다.

 

아직 가입하지 못한 예술가들도 참여하여 함께 만들어 가자.

예술인들의 권익을 지키려면 힘을 모아야 한다.

 

이제 가난한 예술가들이 의지할 곳이 생겼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오늘 쪽방 격리에서 해방된 날인데, 이게 얼마 만이던가?

 

귀는 어두운데다 목소리까지 막혀 통하지도 않지만,

못난 사람은 보기만 해도 기분 좋더라.

 

그런데 소주가 달달한 게 술술 넘어갔다.

술잔 주고받을 것도 없이 혼자 홀짝홀짝 마시며

사진 찍고 놀다 결국 맛이 가고 말았다.

 

성악하는 민정기, 박태종씨는 쩌렁쩌렁 좌중을 압도했고,

김이하 시인은 구수하게 축가를 불러 박수갈채를 받는 판에

감히 어찌 끼어들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서너 개 남은 이빨 사이로 튜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목구멍은 막혀 파리 방귀 소리보다 작은 주제에 말이다.

술이 취하면 간이 커진다는 말이 딱 맞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이란 구겨진 첫 구절부터 슬프게 만들었다.

아마 그건 노래가 아니라 벙어리 몸부림에 가깝다.

조지 피면 가치 웃고 조지 지면 가치 울던, 알뜰한 그 맹서에 봄날은 간다

마지막 대목에서 결국 눈물을 짤아내고 말았다.

 

그 이쁜 처자들 많은 자리에서, 팔릴것도 없는 쪽을 다 판 것이다.

그렇게, 그렇게 오바 하지 않으려고 다짐에 다짐을 해도 술만 취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지 버릇 개 못 준다. 아마 죽어야 철들 것 같다.

 

사진, / 조문호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출간한 황정수

 

미술평론가 황정수가 지난 11일 서울 인사동 황정수미술연구소 사무실에서 사진 촬영에 응하고 있다.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는 현장 취재와 발굴의 결과물이다. 돈이 생길 때마다 그림을 샀다는 그의 작업실엔 그림과 문헌 자료가 가득하다. 실물을 확인하지 않으면 작품 평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도 갖고 있다. 김종목 기자

“작품을 소유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소문난 수집·애호가
조선 말부터 한국전쟁 전후까지의 화가와 작품 찾아 ‘있는 그대로’ 기록
“서구 인상파 영향 받은 이인성, 정확히 말하자면 구로다 세이키 영향”

 

“탑골공원에 가면 심전 안중식(1861~1919)의 ‘탑원도소회지도(塔園屠蘇會之圖)’가 떠오르고, 정관 이건중(1916~1979)의 사진 ‘탑골공원’도 생각나죠.” 미술평론가 황정수는 옛 서울의 흔적이 남은 곳에 갈 때면 관련 작품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고 했다. 탑골공원에서는 “그림 네댓 개가, 사람 네댓 명이 머릿속으로 싹 스쳐 지나간다”고 한다.

 

서예가 오세창(1864~1953)이 살던 집은 탑골공원 근처라 ‘탑원’이라 불렸다. ‘탑원도소회지도’는 안중식·오세창 등 여덟 친구가 달빛 아래, 원각사지십층석탑을 뒤로 두고 시·서·화를 즐기던 모습을 담았다.

황정수가 최근 출간한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푸른역사) 북촌·서촌 편 2권(사진)에는 조선시대 말기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 전후까지 격변기를 살아낸 화가와 작품 이야기가 가득하다. 책은 ‘황정수, 근대 그림들의 장소를 거닐다’로 여겨도 된다.

 

지난 11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한 주상복합건물에 있는 황정수미술연구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황정수는 경성 화가들의 자취를 빠뜨리지 않으려고 기록을 하나하나씩 뒤져 다 찾아다녔다고 한다. “뜻밖에 화가가 많았어요. 대부분 서울 중심부, 그중에서도 북촌과 서촌에서 활동했더라고요.”

 

인물과 인맥, 지리, 미술사에 관한 육하원칙이 줄줄 이어진다. “오원 장승업(1843~1897)은 광통교 쪽에서 활동했다.” “인사동은 일제강점기 서화골동(書畵骨董) 유통의 본거지다.” “일본인 화가들은 주로 남산 아래 남촌으로 들어갔다.” 황정수는 “인사동을 중심으로 북촌과 서촌, 남촌이 하나의 미술 벨트를 형성했다”고 말했다.

 

왜 ‘경성 화가들’이었을까. “이중섭이나 김환기는 1950년 이전에 그린 작품으로 남은 게 다섯 점 될까 말까합니다.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라 불리는 춘곡 고희동(1886~1965)의 작품은 서양화 석 점만 남았어요. 근대기 작품을 여럿 남긴 다른 작가는 왜 연구하지 않는지가 불만이었죠.”

 

근대기는 ‘일본 미술’ ‘일본인 화가’와 떼어놓고 볼 수 없다. 그는 “여러 연구자가 자랑스럽지 못한 일제강점기 역사 때문에 미술 분야에서 발전한 일본이 발전되지 못한 한국에 영향을 줬다는 식의 서술을 하는 걸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인상파를 배운 일본인이 도쿄에 온 한국인에게 그림을 가르쳤는데, 이 한국인 제자가 나중에 한국에서 유명 화가가 되었어요. ‘서구 인상파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1886년 프랑스에서 화가 라파엘 콜랭에게 배운 구로다 세이키의 영향을 받아 그런 그림을 그렸다고 얘기하지 않는다는 거죠.” 이 유명 화가는 고희동 등이다. 황정수는 “일본의 누구한테 무엇을 배웠는지, 왜 그런 작품을 그렸는지 하는 연구가 없다”고 말했다.

 

황정수는 2018년 <일본 화가들 조선을 그리다>(이숲)를 출간했다. “일종의 한·일 문화교류사의 사초”로 책을 정의했다. 1908년 한국에 들어와 미술을 가르친 일본인 화가 시미즈 도운의 ‘최제우 참형도’와 ‘최시형 참형도’ 등 여러 작품을 발굴해 책에 실어 알리기도 했다. 그는 “(한국인 화가든, 일본인 화가든) 내가 제일 중요하게 여긴 건 미술사에 이름은 남았지만, 작품이 남지 않은 작가들의 작품을 발굴하는 것”이라고 했다.

 

책을 낼 때 ‘친일·반일’ 프레임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황정수는 “일본인 화가들은 빼고 근대기 한국 미술과 경성 화가들의 면모를 볼 수가 없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자는 신념으로 출간했다”고 말했다. 그 신념은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에도 적용됐다. 작업실은 온갖 작품으로 가득했다. 황정수는 소문난 수집가이자 애호가다. “작품을 소유하지 않으면 작품을 알 수 없다”는 신념으로 여유가 생기는 대로 작품을 사들였다. 부모님 드릴 용돈을 빼곤 다 그림을 샀다고 했다. 통틀어 1만점가량을 가졌다. 그는 “너무 그림이 좋으니까 안 사면 못 배기는 그런 병이 생긴 것”이라며 웃었다.

 

30여년간 작품을 수집하면서, 주식이나 부동산에 욕심을 낸 적이 없다고 했다. “경제적 이유 때문이나 다른 그림을 구입하기 위해 갖고 있던 그림을 팔고서는 한 번도 즐거웠던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림을 팔아야 한다면, (화랑이나 개인이 아니라) ‘반값’에라도 미술관에 팔려고 한다”고 했다. “미술관에 가면 언제든지 볼 수 있으니까요.”

 

황정수는 한밤에 깨면 불현듯 보고 싶은 작품이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둘이 마주 앉으면 그림과 어떤 대화가 이루어져요. 미술품은 살아 있는 생물이에요. 무속인들의 접신 비슷한 걸 느낄 때도 있죠. 작가의 마음이 된 듯도 하고요. 그 희열이 매력적이죠.”

 

그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도 미술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는 “내 눈으로 보고, 내 발로 가본 곳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것”이라고 했다. “미술이 인간 마음을 풍요롭게 해준다는 걸 조금이나마 대중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연구소를 찾았을 때 황정수는 출판사 요청으로 신간에 사인을 하고 있었다. 이름 곁에 “畵中有詩 詩中有畵(화중유시 시중유화: 그림을 보면 시가 떠오르고 시를 읽으면 그림이 떠오른다)”를 적었다.

 

경향신문 / 김종목기자

 

격리되어 숙제처럼 머리에서 떠나지 않은 것이 안창홍의 ‘유령패션’전이었다.

인터넷에서 대략의 작품이미지는 보았지만,

하나하나의 작품이 어울려 안겨주는 감흥이 기대되어서다.

더구나 전시장 가려다 코로나에 발목 잡힌 전시가 아니던가?

 

지난 16일 정동지와 은평구 진관동의 ‘사비나미술관‘을 찾아갔다.

때 마침 안창홍 작가와 이명옥 사비나관장 등 여러 명이

전시 보러 온 에콰도르 대사 일행에게 작품을 설명하고 있었다.

 

지난해 ‘한국과 에콰도르 수교 60주년을 기념해 안창홍의 ‘유령패션’이 초대되었는데,

에콰도르 최고의 미술관인 '과야사민미술관'과

'인류의 예배당'에서 성황리에 전시를 마친 귀국 보고 전이었다.

에콰도르와 교류의 물꼬를 턴 문화외교의 좋은 선례였다.

 

안창홍의 '유령패션'은 옷만 있고 사람은 없는 그야말로 유령 같은 작품이다.

삼개 층에 나누어 전시된 작품들은 물질문명에 병든 현대인의 자화상 같았다.

쇼윈도나 걸려있을 원색의 옷들이 난무하지만, 얼굴도 팔도 다리도 없다.

허공을 부유하듯 옷만 떠도는데, 더러는 옷깃에선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진다.

 

자신을 드러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자 부와 계급을 상징하는 패션을 통해

인간 존재 자체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유령패션’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욕망과 인간 허상의 단면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사람 사는 것이 아니라 허깨비의 삶이라는 것이다.

 

'유령패션' 작업은 먼저 인터넷에서 그림의 바탕이 될 패션 이미지를 수집한다.

디지털 펜으로 사람의 형상은 지우고 옷만 남긴 위에 그림을 그려 넣는다.

이를 캔버스에 전신 크기의 유화로 옮기고, 입체 작업으로도 확장한다.

 

그리고 폭력적 억압에 의해 잃어버린 개인의 정체성과

현대 사회의 집단 최면 현상을 담은 ‘마스크’ 연작인상적이다.

눈을 가린 붕대와 이마에 뚫린 열쇠구멍은 상실된 자아와 무의식을 상징한다.

마스크는 최면에 걸린 듯 집단적 무의식에 빠져들게 한다.

 

안창홍 작업의 밑바탕에는 부패한 자본주의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역사 속에 희생된 이들에 대한 울분의 시선이 깔려 있다.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을 통찰력 있게 꿰뚫어보며 까발린다.

 

이번 귀국전을 위해 평면에서 입체로 확장한 새로운 시도의 작품 3점도 선보였다.

스마트폰으로 '유령 패션'을 그린 디지털 펜화 약 150점은 OLED 디스플레이로 설치됐고,

디지털 펜화를 유화와 입체 작업으로 옮긴 작품 32점이 전시되었다.

그리고 4층 전시실에는 자화상을 비롯한 드로잉 85점을 내 걸었다.

 

자화상

안창홍은 1953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제도적인 미술 교육을 거부하고 화가로서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현대 한국 사회를 비판하며 권력에 저항해온 작가다.

1970년대 중반 '위험한 놀이'연작을 시작으로 80년대 민중미술 운동을 주도한 ‘현실과 발언’도 참여했다.

가족 해체를 다룬 ‘가족사진’ 연작을 비롯하여 '봄날은 간다', '사이보그' 연작 등을 발표하며

50여 년간 ‘권력’이란 괴물의 속성을 꿰뚫어보며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전달해왔다.

 

거침없고 저돌적인 작업 방식에서 야성의 끼를 느낄 수 있듯이,

원초적 본능이 꿈틀거리는 강열함이 작품의 주조를 이룬다.

첨예한 비판 의식을 지니면서도 항상 새로운 시도로 돌파한다.

 

그는 1989년 카뉴 국제회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2009년 이인성 미술상에 이어

2013년 이중섭미술상과 부일미술대상을 수상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기획한 '2019 원로작가 디지털 아카이빙 자료수집·연구지원' 작가로 선정되는 등

국내 대표 작가로서 작품성을 인정받은 잘 나가는 작가다.

 

이 전시는 5월 29일까지 이어진다.

 

사진, 글 / 조문호

 

 

성완경 선생(79)께서 지난 3월 18일 새벽 5시17분 코로나 합병증으로 운명하셨습니다.

 

삼가 고인의 극락왕생을 빕니다.

 

장례식장 : 화순 전남대학교병원 장례식장 제1분향실

 

발인 : 3월21일(월) 정오

 

전염병으로 방문하는 문상은 가급적 피해 주시길 원합니다.

배우자 공선옥 연락처 : 010-3389-7563

[국민은행 535501-04-079978 공선옥]

 

성완경선생은 민중미술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우리시대의 대표적 평론가다.

서울대학교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수료하고,

파리국립고등장식미술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파리제8대학 조형예술학부를 수학했다.

 

1979년 최민, 윤범모, 오윤 등과 함께 미술그룹 '현실과 발언'을 창립해 민중미술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1982년부터 인하대학교 미술교육과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광주비엔날레국제전 커미셔너(1995년),

부천만화정보센터 이사장(1999~2001년).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2001년)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레제와 기계시대의 미학' '민중미술을 향하여-현실과 발언 10년사'

'민중미술 모더니즘 시각문화-새로운 현대를 위한 성찰' '성완경의 세계만화탐험' 등을 남겼다.

 

미술과 관련있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사진가들도 대부분 기억할 것이다.

1989년 지젤 프로인트의 ‘사진과 사회’라는 책을 번역하여 일찍부터 사진가들에게도 친숙한 분이다.

 

모든 직책에서 물러 나 담양에 정착한 후에도 지인들의 전람회나 모임만 있으면 빠짐 없이 나타났다.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만 같은 선생의 느닷없는 비보에 몸 둘바를 모르겠다,

 

사진으로나마 지난날을 추억하며 선생의 명복을 빌어주시기 바랍니다.

 

 

 

건축가 임태종씨가 '인사동 이야기' 사진과 ‘어머니의 땅’ 사진을 여러 점 사 주었다.

이 어려운 시기에 한 점도 아니고 네 점이나 사겠다기에, 고마움에 앞서 마음의 짐이 되었다.

정해준 사진을 프린트하여 액자까지 만들어두었으나 전할 방법이 마땅찮아,

구정연휴가 시작되는 1월30일 강남 사무실에 갖다 주기로 한 것이다.

그 날이 노는 날이지만 사무실 나갈 일이 있어 같이 차 한잔 하자고 했다.

 

그동안 임태종씨 사무실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는데,

선릉 옆의 그 길은 오래전 삼성카메라에서 일할 때 자주 들렸던 눈 익은 곳이었다.

마중 나온 임태종씨 따라 간 사무실은 쾌적하고 아늑했다.

흡연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사무실엔 넓직한 테라스가 있었다.

 

그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선능이 한 눈에 쏙 들어왔다.

누구의 작품인지 모르지만 책장 위에 돈통을 들고있는 목각인형도 눈길을 끌었다.

한때는 이곳에 친구들 불러 모아 바베큐 파티도 종종 열었으나, 일이 지긋지긋해 그만두었단다.

파티를 준비하는 과정도 만만찮지만 이튿날 청소하는 직원들 눈치가 보였다고 한다.

 

사실, 초대받는 입장에서야 좋을지 모르지만, 준비하는 사람은 예삿일이 아닐 것이다.

오래 전 정선 만지산에서 서낭당 축제를 열어보아 그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안다.

돌이켜 생각하니, 없는 주머니 털어가며 누굴 위해 그토록 정성을 쏟아부었는지 모르겠다.

국 쏟고 뭐 데인다는 말처럼, 돈잃고 고생만 한 것이 아니라, 돌아서서 욕하는 사람도 있었다.

 

축제의 의도와 상관없이, 왜 돈들여가며 쓸데없는 짓을 벌이냐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긍정적으로 보지 못하고, 사사건건 부정적으로 생각할까?

 

그리고 정선 집을 흔적도 없이 태워 버린 옆집에서는 땅을 다시 측량했다며

남의 집터에 걸쳐 자기네 집만 지어 올렸다.

보상에 대해서는 일체의 언급이 없는 것을 보니 어무래도 사람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것 같다.

이젠 이웃에 대한 정이 완전히 사라져, 법적 소송을 해서라도 기어히 손해배상을 받아 낼 것이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으나, 임태종씨 덕에 선능 사무실 구경한 번 잘 했다.

전해 준 사진이 어떤 용도로 어디에 걸릴지는 모르지만,

영감을 일깨우는 작품적 기능에 앞서 복 짓는 부적으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할 것으로 믿는다.

부디 새해에는 복 많이 받으시길...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을 유달리 좋아했던 사업가 강선화씨가

지난 28일 돌아가셨다는 안타까운 부고를 접했습니다.

고인의 극락왕생을 기원합니다.

 

상주 : 김진규(아들)

빈소 : 서울성모장례식장23호실

발인 : 2021년 12월30일

 

지난 날을 추억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세요.

아래는 인사동에서 찍은 생전의 모습과

‘인사동이야기’ 사진집에 게재한 강선화씨 글입니다.

 

 

"인사동에서 만난 두 사람"

 

인사동은 친정집 같은 포근함이 있다. 숱한 세월 드나들며 많은 예술가들을 만났지만,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사람은 화가 박광호씨와 사진작가 조문호씨를 꼽을 수 있다. 애잔하고 즐거운 두 사람의 상반된 기억이 너무나 뚜렷하기 때문이다.

 

박광호씨의 그림과 그의 삶은 너무 애잔하다. 전람회장에서 만난 그의 삶도 기구하지만 벽에 걸린 그림들이 마음을 적셨다. 생선뼈만 그려진 그의 그림을 구입했는데, 볼 때마다 애잔한 감상에 빠져 내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조문호씨는 인사동 ‘풍류사랑’에서 소설가 배평모씨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 몸 바쳐 최선을 다하겠다는 충성서약 같은 첫 인사로 어리둥절하게 하더니, 갑자기 술상 밑을 기어 내 앞으로 나와 놀라게 하기도 했다. 시종일관 개구쟁이처럼 좌중을 웃기는 그의 모습이 너무 신비스러웠다. 그의 절창 ‘봄날은 간다’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사람의 감정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한번은 ‘천포문학회’ 모임을 영월에서 가진 적이 있다. 시 낭송회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결정판은 아침에 찍은 기념촬영이었다. 참석한 삼십 여명이 사진을 찍기 위해 뜰 앞으로 모였는데, 대뜸 조문호씨가 “무슨 졸업사진 찍냐?”며 바지 지프를 내려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눈 깜짝할 순간에 모든 상황은 끝났다. 그 많은 사람의 표정이 천태만상인데, 내 생애 찍은 기념사진으로는 최고의 걸작이었다.

 

글 / 강선화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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