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창원의 김의권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친한 친구이기에 앞서, 그의 죽음은 무심했던 내 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떠난 사람이야 세상 시름 모두 내려놓고, 행복과 사랑이 넘치는 곳으로 가는 축복받을 일이지만,

단지 살아남은 자들의 아쉬움이고 슬픔일 뿐이다.

 

운명을 달리한 김의권은 불의에 분노할 줄 알고, 남의 슬픔에 가슴 아파하는 그런 평범한 예술가였다.

음악과 그림, 그라픽디자인, 실내장식 등 다양한 재능을 가졌으나

특정 예술을 간판으로 내세워 포장하는 짓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을 내세우는 일에는 더더욱 질색이다.

그냥 예술과 사람이 좋아 인사동을 고향처럼 드나들던, 우리 시대의 한 저항아였고 풍류객이었다.

 

그를 처음 만난 지도 어언 반세기가 흘렀다.

고향 친구는 아니지만, 긴 청춘을 함께 누렸기에 고향 친구보다 정분은 더 깊다.

 

그를 알게 된 것은 1970, 부산 에덴공원의 난향 음악실에서 처음 만났다.

리퀘스트 용지에 빵모자를 쓴 자화상의 케리커쳐를 그려놓았는데,

제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퀸시 존스'의 음악이었다.

누가 신청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말없이 음악에 빠져있다 눈길이라도 마주치면 배시시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는 히피라는 듯...

음악과 이념이 같다는 이유로 정남규, 황성건, 신윤택 등과 어울려 어지간히 놀았다.

미망인이 된 최갑순여사도 그가 경영한 마산 수림음악실에서 만나게 되었다니,

어쩌면 음악이 맺어 준 것은 공통의 인연이 아닌가? 생각된다.

 

미망인의 회고에 의하면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생 때 였다고 한다.

방송실에서 신문 사설을 읽어가며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용기에, 마음을 빼앗긴 것 같더라.

대중이 모인 장소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망인 역시 부마민주항쟁에 앞장섰던 학생이라 어쩌면 동지애 같은 것도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좋은 사람에 대한 이상은 현실과 너무 멀었다.

고인 역시, 돈이 판치는 세상에 히피의 삶을 산다는 것이 간단치 않았을 것이다.

낙천적으로 사는 대개의 예술가들이 겪는 운명의 장난인지 모른다.

예술로 밥 먹고 산다는 것이 힘든 것은 어제 오늘만의 일도 아니다.

 

거기다 심성까지 모질지 못해, 일 해주고도 실내장식비도 못 받는 일이 비일비재한데다

그것도 모자라 툭하면 남의 빚보증까지 서, 집을 날릴 뻔 한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사람이 어질어 밖에서 좋은 말 듣게 되면, 죽어나는 건 가족뿐이다.

 

그런데도 남에게 싫은 소리는 죽어도 못한다.

부탁은 물론 아들딸 결혼식이나 몸 아프다는 연락까지 안 하는 고집불통이었다.

천성이 그러니 어찌하겠냐마는, 아내 최여사가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다행히 아내가 팔 걷고 나서서 자식들을 잘 키웠으나,

경상도 사내의 고약한 성질머리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 했을 것이다.

 

아내 최갑순씨는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이사장으로 있고,

변호사로 일하는 아들 형일은 일남일녀를 두어 화목하게 살고,

교사로 일하는 딸 엄지까지 결혼하여 만삭이라니, 무슨 부족함이 있으랴!

말년에 손자 재롱이나 즐길 형편에 그리도 갈 길이 바쁘던가?

 

지난 15일 정동지와 창원 파티마병원 장례식장을 찾아갔더니,

공윤희씨는 기다리다 지쳐 가버렸고, 이종호씨만 장례식장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빈소에는 스스로를 그린 자화상이 영정사진을 대신했는데,

거리를 방황하는 풍류객의 삶을 대변하듯 쓸쓸했다.

 

고인의 영전에 향을 사르며 영원한 안식을 빌었다.

죽는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나는 죽지 않고 친구가 가는 걸 보니,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사더라.

인사동 친구들이 그리워 일만 있으면 지팡이 짚고 인사동을 들락거렸으나, 세상인심은 그와 달랐다.

병석에 있는 김상현씨만 조의금을 대신 전달해 달라는 연락을 해왔을 뿐이다.

 

하기야! 먼 길까지 문상가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그렇지만, 가깝게 지내던 마산의 후배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 보기 어렵다는 말은 오래된 말이지만,

요즘은 가족을 모르면 친구도 문상가지 않는다는 말로 바꾸어야 할 판이다.

 

그러나 돗대기 시장 장삿꾼도 아니고 예술가들이 아니던가? 

평소에 가족을 동반하지 못한 원죄는 있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

어느 풍류객이 마누라 끌고 다니며 풍류를 즐긴 자가 몇이나 되던가?

 

오래전 찍어 둔 알몸 영정사진은 정선 화재 때 불타 미처 프린트할 여유도 없었지만,

대개 너무 늦게 알거나 상주의 이해를 구하지 못해 번번이 불발되었다.

사람 크기로 프린트한 알몸사진을 내세워 초상집을 잔칫집으로 만들 생각이었으나

가족들의 오래된 고정관념을 바꿀 수도 없지만, 인터넷에 올리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미투란 요상한 바람이 불어 이성을 사랑으로 보지 않고 적으로 여기는 삭막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

 

얼마 전, 알몸 영정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삭제해 버리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을 알리는 영정사진은 아랫도리를 잘라 상체만 올린 것이다.

내가 죽는 날은 먼저 간 친구들의 초상까지 함께 내거는 축제를 열기로 했다.

 

오랜만에 이종호씨를 만나 술 한잔 나누고 있으니, 친구 황성근이도 찾아왔고,

40여 년 동안 의권이 따까리 노릇만 했다는 변형주씨도 나타났다.

어제는 신윤택, 최정순, 신병섭씨도 다녀갔다고 한다.

눈물을 글썽이던 미망인은 미운 정만 꽤 씹으며 고인을 원망했으나,

긴 세월의 고운 정 미운 정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고인이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했다는 미안하다! 너한테 미안하고, 나 자신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가정보다 밖으로 떠도는 풍류객들이 되새겨야 할 대목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요즘은 상갓집 풍경도 많이 변했더라.

밤새도록 빈소를 지키며 술 마시는 풍습은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손님이 뜸하니 도우미까지 퇴근하고, 젊은 상주만 빈소를 지켰다.

황성건과 변형주씨만 상가에서 마련해 준 가까운 여관에서 자고,

나와 정동지는 이종호씨가 마련해 준 '엠배스더호텔'에 자는 호강도 했다.

 

호텔 인근 찻집에서 사진하는 조성제씨를 만나기도 했는데,

오랜만에 사진판 돌아가는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 이튿날 발인시간에 맞추어 서둘러 장례식장에 갔더니,

그때까지 황성건과 변형주씨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상가에서 챙겨 간 술로 밤새도록 퍼마신 것 같았다.

 

추모 미사에서 편히 승천하라는 축원도 올렸다.

할아버지 영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손녀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다.

 

세단에 실려 하늘나라로 떠나는 친구의 뒷모습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조문객이야 많았지만, 정작 마음 주었던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다.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다.

욕심부리지 않고 초연하게 살다 간 그 그림자가...

 

의권아~ 잘 가거라! 그곳에는 먼저 간 홍수진과 정남규를 비롯하여 적음도 있고,

삐뚤 웃음으로 반기는 창동허새비 이선관 시인이나 현재호 화백도 계신다.

그리고 만나기만 하면 노잣돈 달라던 천상병시인도 반길거다.

부디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린다

 

자유인을 꿈꾸어 온 김의권은 이 시대 마지막 희피였다.

돈이 지배하는 야멸찬 세상에,  그 자리를 지켜 온 것만도 용타!

머지않아 전설이 된 빨치산처럼, 모두 사라질 것이다.

 

 

선관 형의 ! 함성을 조시로 올린다.

 

당신들은 아는가

십년이 지나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이십구년이 된 지금까지도

점점점 더 진하게 들려오는

저 함성 함성

구암동 애기봉 중턱에

눈감지 못하고 누워 있는

죽어도 살아 있는 열사들이여

살아 있음이 죽어 있는

우리들은 오늘

들려오는 함성 소리에

부끄럽게

묵념을 올립니다

 

사진, / 조문호

 

 황명걸 시인의 추모제가 49제를 이틀 앞둔

지난 29일 오후 4시 무렵, 양평 물안개공원에서 열렸다.

 

추모제에는 미망인 서상실여사를 비롯한 가족들과,

평소 선생을 존경해 온 인사동 사람들이 모여 고인의 넋을 기린 것이다.

 

황명걸시인 추모제는 한 때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던

'창예헌' 이사장 김명성씨가 발 벗고 나서서 추진한 행사다.

장례식 때 추모제를 지내지 못한 아쉬움에 자리를 만들었지만, 49제는 아니었다.

날자도 맞지 않은데다, 유족들이 착실한 기독교 신자기 때문이다.

 

사람 모으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 농심마니가을 산행과 함께 추모제를 지낸 것이다.

인사동 사람들과 농심마니’ 회원,  양평문인, 가족 등 60여명이 참여했다.

 

추모제에 참석한 분으로는 최유진 농심마니 회장을 비롯하여 김명성, 송상욱, 

김상현, 조준영, 수견 김정남, 이명희, 전활철, 조해인, 기국서, 김수길, 정복수, 

정영신, 이 성, 최진환, 노광래, 이강용, 송일봉, 박상희, 황예숙, 서길헌, 최정인,

오만철,나자명, 오치우, 박흥식,  권경업, 신영수, 윤성은, 조명환, 김각환, 

문창길, 이동국. 김성철, 강미숙,  이철순, 황요한씨가 함께했다.

 

모처럼 반가운 분들 만나 가을 정취에 흠뻑 빠질 수 있었는데,

황명걸선생 시비 앞에 놓인 영정사진을 바라보니, 가슴 아린 회한이 밀려왔다.

오래전 선생께서 시화전을 하고 싶어 하셨으나, 그 걸 말렸기 때문이다.

시화전이라면 오붓한 장소가 어울리지, 백 평이 넘는 '아라아트'는 무리라는 생각에서다.

그 이후로 전시 이야기를 듣지 못했으나, 서운해 하실 것 같아 늘 마음에 걸렸다.

추모제를 맞아 그때의 배은망덕을 사죄한 것이다.

 

추모제에 앞서 행사를 주선한 김명성 시인의 간단한 인사에 이어

수견 선생의 구슬픈 피리 소리가 영령을 위안했다.

 

시인은 시를 낭송했고젊은 춤꾼은 위령무로 넋을 기렸다.

 

 '뮤아트' 김상현씨까지 나와 아코디언을 연주했다.

김상현씨는 병원에서 위중한 수술을 받아 입원한 환자가 아니던가?

병든 자신의 몸보다 떠난 분의 그리움이 절절했던 모양이다.

 

김상현씨가 연주하는 애잔한 ‘부베의 연인음율에 맞춰

선생께서 너울너울 춤이라도 추는 것 같은 환영이 떠올랐다.

 

돌이킬 수 없는 그리움이었다.

 

시비 세운 장소가 중앙에서 옆자리로 옮겼을 뿐, 꽁지머리상은 여전했다.

시비에는 황명걸선생의 지조가 새겨져 있다.

 

한 포기 작은 풀일지라도

그것이 살아 있으면

비에 젖지 않나니

더구나 잎이 넓은

군자풍의 파초임에랴

빗방울을 데리고 논다

 

한 마리 집오리일지라도

그것이 살아 있으면

물에 젖지 않나니

더구나 몸가짐이 우아한

왕비 같은 백조임에랴

물살을 가르며 노닌다

 

배준석시인은 선생의 지조에 대해 이렇게 말했더라.

지조를 풀과 집오리로 비유하며 파초와 백조로 연결시킨다.

그중 두 번이나 반복되는 중요한 구절이 그것이 살아 있으면이다.

이를 목숨을 걸 수 있으면으로 바꿔 읽어본다.

멀리 있던 지조가 꿋꿋하게 곁으로 다가옴을 느낀다.

빗방울도, 물살도 데리고 놀 수 있는 경지까지 이를 수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선생의 시는 저항의 격문 같은 한국의 아이가 먼저다.

황명걸선생은 70년대 대표적 리얼리즘 시인으로,

'한국의 아이'에서 민족분단의 현실과 부조리한 사회를 향한

비판적인 시선을 결기 어린 시어로 토해낸 분이다.

 

"계집아이는 어미를 닮지 말고 / 사내아이는 아비를 닮지 말고 / 못사는 나라에 태어난 죄만으로 /

보다 더 뼛골이 부서지게 일을 해서/머지않아 네가 어른이 될 때에는/잘사는 나라를 이룩하도록 하여라/()

너무 외롭다고 해서/숙부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외숙이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그 누구도 믿지 마라/

가지고 노는 돌멩이로/미운 놈의 이마빡을 깔 줄 알고/정교한 조각을 쫄 줄 알고/

하나의 성을 쌓아올리도록 하여라/ 맑은 눈빛의 아이야/빛나는 눈빛의 아이야/불타는 눈빛의 아이야"

('한국의 아이' 부분)

 

'한국의 아이' 시집은 판금 되었고, 선생께서는 자유언론 운동으로 신문사에서 해직되었다.

다시 한번 선생님의 뜨거운 저항 의식에 고개 숙입니다.

 

추모제가 끝난 후, 35년 동안 심어 온 농심마니가을산행으로 이어졌다.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열리는 산삼심기는 양평 '천주교 양근성지'라고 한.

 

양평군 강하면 이미란 발효학교에서 하루 묵으며 야외 술판과 굿판을 벌이고,

다음날 아침 산신제를 지내고 산삼을 심지만,

난, 오후 여섯 시까지 동자동에 갈 일이 있어 함께 할 수 없었다.

모처럼 음유시인 송상욱선생께서 무거운 앰프까지 짊어지고 오셨는데 말이다.

그 푸짐한 술상의 놀이판을 마다한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운다는데...‘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최근 들어 아름다운 삶을 살던 분들이 여럿 세상을 떠나셨다.

연세가 많은 황명걸 시인이나 박기정 화백은 병으로 돌아가셨지만,

안애경 감독은 마음 정리할 틈도 없이 갑작스럽게 떠나 더 안타깝다.

 

떠난 분은 말이 없으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일 뿐이다.

, 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더 빨리 데려간다고 믿으니,

고난의 삶을 끝내고 새로운 길을 떠나는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있겠는가?

사는 동안 나쁜 일만 아니라면 꼴리는 대로 즐겁게 사는 것을 최고로 친다.

 

가끔 정동지가 언제 무슨 일이 있다고 약속을 해오면 하는 답은 똑 같다.

그 때가지 내가 살지 모르겠다.”

.오늘 죽을 것처럼 사니, 두려울 것도 꿀릴 것도 없는 것이다.

 

지난 19일 박기정화백의 부음을 받았다.

정영신, 김명성, 조해인씨를 녹번역에서 만나 서울아산병원장례식장을 찾아갔다.

장레식장 입구에는 조화가 줄을 이었고, 많은 조문객이 모여 들었다.

좀 있으니 박인식 시인에 이어 박재동 화백도 나타났다.

 

그리고 '삼총사’, ‘가정교사등을 펴낸 박기정화백의 친동생 박기준화백도 만났다.

박기준화백은 평소 형님께서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셨는데,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며 지난 일을 회고했다.

 

박기정화백은 최근 폐암진단을 받아 투병하시다 고통스럽게 돌아가셔서 더 안 서럽다.

평생 소신이 '백절불굴(百折不屈, 백 번 꺾이더라도 휘어지지 않는다)'이던

선생께서는 시대를 보는 눈도 매섭지만, 재치 있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가 남달랐다.

 

1956별의 노래로 데뷔하여 은하수’ ‘들장미’ ‘도전자’ ‘황금의 팔

레슬러’ ‘폭탄아’ ‘치마부대등 다양한 극화 만화를 남겼다.

특히 도전자훈이폭탄아탄이는 선생의 대표적 캐릭터였다.

 

내가 고인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60년대 발표한 가고파

주인공 훈이가 엄마를 찾아 헤매는 순정만화였다.

탄탄한 스토리와 사실적인 캐릭터가 돋보였는데, 지금도 보고 싶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흰 구름 검은 구름’에서는 오동추의 캐릭터가 인상적이었다.

친구들 보는데, 교실창문으로 도시락을 넣어주는 할머니에게 난색을 표하는 장면은

어린 시절 내가 겪은 일이라 더욱 잊혀 지지 않았다.

 

박기정화백을 실제 뵙게 된 것은 창예헌고문으로 모신 10여 년 전이었다.

가끔 박인식씨가 운영하는 로마네꽁티에서 뵙기도 했는데,

가수 최백호와 박인식, 김명성씨 등 몇몇이 

오동추란 박기정 펜클럽을 만들 정도로 박기정화백을 좋아했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지난 18일 운명하시어, 20일 남양주 영락동산에 안치됐다.

많은 분들의 추모 속에 분주히 길을 떠났지만, 쪽방 사람들은 죽어서도 마음대로 떠나지 못한다.

없는 연고자를 기다리며 한 달 동안 갇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약자는 죽어서도 차별받는 세상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상주-

배우자 : 정기창

 : 박영훈, 박영술,  : 박영지

사위 : 이동엽, 자부 : 정재연, 정진희

 

사진 / 조문호

 

 

 

 

 

 

 

만화 '도전자', '폭탄아'를 그린 우리나라 1세대 대표 만화가 박기정 화백(88세)께서

지난 18일 오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박기정화백은 1934년 만주 용정에서 태어나 해방 후 서울에서 자랐습니다.

경복고 미술반 상급생이던 ‘고바우’ 김성환 화백의 연재에 자극받아

1956년 스물두 살 나이에 만화계에 데뷔했습니다.

 

1956년 중앙일보에 4컷짜리 만화 '공수재'로 출발하여 1963년에 '흰 구름 검은 구름'을 발표하며

주인공 ‘훈이와 미미’의 캐릭터를 창출해냈고, 1964년에 발표한 '도전자'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동안 '별의 노래', '허허박사', '뚱딴지', '개구쟁이 형제', '사회만보', '오중어부부',

'황금의 팔', '폭탄아', '레슬러' 등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보관문화훈장, 문화관광부장관 만화공로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제3대 한국만화가협회 회장도 역임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사동사람들' 모임이었던 '창예헌'고문일 뿐 아니라,

같은 회원인 가수 최백호는 박기정  팬클럽 ‘오동추’ 회원이기도 합니다,

 

박기정선생님의 극락왕생을 빕니다.

 

빈소 :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호실 (02)3010-2000,

발인 : 20일 오전 9시40분

장지 : 경기 남양주 영락동산

 

-상주-

배우자 : 정기창

자 : 박영훈, 박영술, 녀 : 박영지

사위 : 이동엽, 자부 : 정재연, 정진희

 

 

장애학생을 돕는 전시 ’함께 맞는 비‘가 지난 27일 막을 내렸다.

자선전을 주관했던 주홍수감독을 비롯한 운영위원들의 적극적인 섭외로 소기의 성과는 거두었다.

전시가 끝나는 날 작품을 실어왔는데, 뒤늦게 주감독 전화를 받았다.

가져 간 작품을 다시 작업실로 보내달라는 것이다. 그것도 정영신씨 작품까지...

 

장애학생을 돕는데 기여한 것만도 고마운데, 나까지 도움 받게 된 것이다.

장애학생을 돕고 가난한 작가에게도 도움 주는 것이 전시 취지지만, 주홍수 감독의 세심한 배려 덕분이었다.

주홍수씨는 만화가이자 에니메이션 감독으로 KBS와 MBC, 중국 등에서 자신의 작품이 방영되기도 한 인기작가다.

지금은 ‘한국경제신문 게임톡’에 ‘주홍수의 삼라만상’ 칼럼을 연재 중이다.

작가적 역량보다, 항상 사회적 약자에게 보내는 따뜻한 마음이 더 아름답다.

 

지난 30일 주감독이 찍어 보낸 영등포 도림로 139길에 있는 작업실을 찾아갔다.

2년 전 주감독 후암동 작업실에 초대받아 술 마신 적이 있어,

후암동 이웃으로서의 친밀감이 항상 앞섰는데, 도림동으로 옮겨간 줄은 전혀 몰랐다.

네비 따라 갔더니, 2대철빌딩 4층에 ‘마나가네’란 카페를 겸한 작업실이 있었다.

입구에는 소녀상이 지키고 있었고, 그 위에 자리잡은 주감독 캐리커처가 ‘마나가네’ 로고였다.

그런데, 주감독이 그림 에세이집 ‘토닥토닥 쓰담쓰담’ 한 권을 선물로 주었다.

 

얼마 전 인사동 ‘유목민’에서 본 적이 있는 책인데,

비정의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안타까운 모습이 익살스럽거나 재치있게 묘사되어 있었다.

 

고달픈 삶을 다독여주는 정겨운 그림들과 수필이 어우러져, 그만의 아름다운 시어를 토해냈다.

가진 자보다 버림받거나 소외된 자들에게 초점을 맞춘 애정 어린 시선이 아름답다.

 

책을 펼쳐 보고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 대가리 털 나고 이런 작가 서명은 처음 받아 본다.

징그러운 내 꼬라지까지 그려놓았더라.

 

 

‘아마존의나비’에서 출판된 ‘토닥토닥 쓰담쓰담’(240페이지) 책값은 16,020원이다.

                          세종도서에 선정된 인기 서적으로, 바쁜 일상에서 스스로를 위안하는 좋은 책이다.

 

사진, 글 / 조문호

 

 

기국서 연출의 관객모독8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랐다.

지난 71일부터 오는 1010일까지 대학로 아티스탄홀에서 100일 동안의 장기 공연에 들어간 것이다.

 

그것도 정부 지원금이나 자체 예산으로 마련한 무대가 아니라 기국서 연출의 팬이 기부한 후원금으로 올리는 작품이라 그 의미가 더 크다. 관객을 모독하는 연극이 관객의 후원으로 살아나 새로운 동력을 얻게 된 셈이다. 새로운 후원 문화를 기대할 수 있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관객모독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오스트리아 출생 페트 한트케가 1966년에 발표한 희곡이다. 1978년 기국서 연출의 극단76’에 의해 무대에 오른 후 꾸준히 재 공연되어 관객을 모아 온 대표적 레퍼토리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으며, 기국서를 일약 천재 연출가로 불리게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연출가 기국서

기국서 연출의 천재성은 주벽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기국서 연출만 생각하면 머리에 떠오르는 생생한 장면이 있다.  201010월 완주 종남산 자락에 있는 도예가 한봉림씨 작업실에서 열린 창예헌 예술기행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인사동 예술가들이 완주의 늦가을 정취에 취해 치룬 예술행사인데, 밤늦도록 이어진 뒤풀이에서 벌어진 갑작스러운 해프닝으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결정적인 것은 날이 밝은 새벽녘에 우연히 마주친 모습이다. 신발은 어디 갔는지 맨발로 터벅터벅 시골길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마치 연극의 마지막 장면 같았다. 어디론가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은 애잔한 여운을 남겨주었다. 이 밖에도 전설이 된 기국서씨의 수많은 이야기가 연극계 주변을 심심찮게 떠돈다.

 

연극 '관객모독’ 또한 관객에게 욕설과 물세례를 퍼붓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파격적인 연극으로, 공연 때마다 화제가 되어왔다. 띄어쓰기를 무시한 중복된 의미의 단어를 사용하거나 목사님 설교 같은 어조나 약장수 같은 상황을 설정하는 등 언어만을 매개로 한 독특한 연극이다. 공연을 처음 접하는 관객은 불편하고 당혹스럽지만, 사람들은 이 작품을 반극이라 불렀고 작가는 언어연극이라 한다.

 

 

이 작품은 관객이 연극에 대해 갖고 있는 기존의 연극적 형식이나 선입견을 완전히 무시하고 파괴한다. 플롯이나 서사는 물론,  무대 막이나 장을 구분하는 자체가 없다. 빈 의자 네개만 놓인 텅 빈 무대 위로 막이 올라가면  네 명의 배우가 걸어 나온다. 무대와 객석의 조명이 동시에 밝아지면서 배우와 관객은 동등한 관계에서 서로 바라보게 된다. 이어서 네 배우가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대사들, 특별한 순서도 연관성도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대사는 무대 위에 어떤 '이야기'나 '환상'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이를 통해 배우들은 관객이 연극에 대해 갖고 있는 환상이나 관례적으로 반복해온 습관, 공연을 본다는 것의 의미 자체를 전복시켜버린다.

 

이 연극에서 무언가를 얻을 것이라는 기대는 마십시오. 다른 연극에서 볼 수 있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이고,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도 없을 것입니다.”라는 대사처럼 관객모독은 관객이 기대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연극을 전개한다. 배우들이 쏟아내는 셀 수 없는 욕설말의 유회, 이런 일련의 행위가 관객들을 자극하며 그들이 자연스럽게 입을 열고 반응하도록 하는 것이다. 폭넓은 감정의 진폭으로 해방감을 맛보게 하는 것이 바로 관객모독이 선사하는 카타르시스다. 그 본심은 메너리즘에 빠진 연극들을 조롱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한 관객들을 각성시키는 데 있다.

 

1978년의 초연에는 기주봉, 정재진, 주진모, 고수민을 내세웠으나, 젊은 배우들로 꾸린 2005년판 관객모독은 래퍼 양동근의 매력이 두드러진 무대였다. 대사의 진폭은 높아지고, 배우가 관객을 모독하는 방법도 더 잔인해진 자극적인 버전이었다.

 

공연장을 바꾸고 배우를 바꾸고 대본을 바꿔 새롭게 내놓은 이번 버전은 관객을 무대 위로 끌어올려 연기하게 하거나, 배우가 객석 통로에 들어가 관객과 호흡을 같이 하는 등 또 다른 시도를 보여준다. 극적인 사건은 없지만, 말을 맛 갈 나게 구사하는 캐릭터들이 인상적이다.

 

 / 조문호

 

장소 : 아티스탄홀 / 기간 : 20227 1일부터 1010일까지

공연시간 : 평일 730/ 토요일 3, 6/

           일요일, 공휴일 2, 5(화요일은 공연 없음)

           티켓 전석 5만 원

공연문의 : 팀플레이예술기획(주) 1661-6981

 

출연 : 리얼 김성태, 김주희, 임주영 

       현도 이주훈, 심성필, 민들샘 

       극만 강현택, 박세욱 

       현실 홍리나, 최유리, 기은수 

       무대감독 : 서민균

 

 

지난 30일은 예술인 '스마트협동조합' 정기총회 날이었다.

대의원은 아니지만, 술 냄새를 맡아 달라 붙은 것이다.

 

그날이 바로 코로나 감옥에서 해방된 날이 아니던가?

총회 끝날 시간에 맞추어 뒤풀이 집에 갔더니, 반가운 분들이 많았다.

 

서인형 이사장, 황경하 사무국장, 박권주, 김성은, 송수아씨 등

상근하는 분 외에도 최석태, 장경호, 김이하, 정영신, 민정기,

박태종, 이미경, 김은엽, 이영경, 이명신씨 등 많은 분 들이

총회를 끝내고 여기저기 모여 있었다.

 

다들 몸 사리는 코로나 시국임에도 40명이나 참석했다고 한다.

전체 조합원 십 분의 일이 참석했다면 많이 나온 편이다.

 

스마트협동조합은 창립 삼 년 만에 괄목할만한 성장을 했다.

음악연습실 운영 등 사업도 확대되었지만, 조합원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나 역시 가난한 예술인들이 받을 수 있는 여러 지원을 받았는데,

코로나로 힘 들어 하는 가난한 예술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여태 예총이나 민예총’같은 예술단체 어디에서도 회원들 생계를 위해

도움 준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도움은커녕 회원들 갉아먹는 구조가 아니던가?

 

빈손으로 시작한 '스마트협동조합'이 불과 삼 년 만에 자리 잡은 것은

조합원들의 협력도 따랐지만, 서인형 이사장의 기획력과

황경하 국장의 추진력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찰떡궁합이었다.

 

올해는 음반 사업에 이어 출판 사업도 시작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스마트협동조합' 인터넷신문도 창간 준비 중이란다.

 성장하는 '스마트협동조합'을 보니 마음이 든든했다.

 

아직 가입하지 못한 예술가들도 참여하여 함께 만들어 가자.

예술인들의 권익을 지키려면 힘을 모아야 한다.

 

이제 가난한 예술가들이 의지할 곳이 생겼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오늘 쪽방 격리에서 해방된 날인데, 이게 얼마 만이던가?

 

귀는 어두운데다 목소리까지 막혀 통하지도 않지만,

못난 사람은 보기만 해도 기분 좋더라.

 

그런데 소주가 달달한 게 술술 넘어갔다.

술잔 주고받을 것도 없이 혼자 홀짝홀짝 마시며

사진 찍고 놀다 결국 맛이 가고 말았다.

 

성악하는 민정기, 박태종씨는 쩌렁쩌렁 좌중을 압도했고,

김이하 시인은 구수하게 축가를 불러 박수갈채를 받는 판에

감히 어찌 끼어들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서너 개 남은 이빨 사이로 튜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목구멍은 막혀 파리 방귀 소리보다 작은 주제에 말이다.

술이 취하면 간이 커진다는 말이 딱 맞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이란 구겨진 첫 구절부터 슬프게 만들었다.

아마 그건 노래가 아니라 벙어리 몸부림에 가깝다.

조지 피면 가치 웃고 조지 지면 가치 울던, 알뜰한 그 맹서에 봄날은 간다

마지막 대목에서 결국 눈물을 짤아내고 말았다.

 

그 이쁜 처자들 많은 자리에서, 팔릴것도 없는 쪽을 다 판 것이다.

그렇게, 그렇게 오바 하지 않으려고 다짐에 다짐을 해도 술만 취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지 버릇 개 못 준다. 아마 죽어야 철들 것 같다.

 

사진, / 조문호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출간한 황정수

 

미술평론가 황정수가 지난 11일 서울 인사동 황정수미술연구소 사무실에서 사진 촬영에 응하고 있다.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는 현장 취재와 발굴의 결과물이다. 돈이 생길 때마다 그림을 샀다는 그의 작업실엔 그림과 문헌 자료가 가득하다. 실물을 확인하지 않으면 작품 평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도 갖고 있다. 김종목 기자

“작품을 소유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소문난 수집·애호가
조선 말부터 한국전쟁 전후까지의 화가와 작품 찾아 ‘있는 그대로’ 기록
“서구 인상파 영향 받은 이인성, 정확히 말하자면 구로다 세이키 영향”

 

“탑골공원에 가면 심전 안중식(1861~1919)의 ‘탑원도소회지도(塔園屠蘇會之圖)’가 떠오르고, 정관 이건중(1916~1979)의 사진 ‘탑골공원’도 생각나죠.” 미술평론가 황정수는 옛 서울의 흔적이 남은 곳에 갈 때면 관련 작품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고 했다. 탑골공원에서는 “그림 네댓 개가, 사람 네댓 명이 머릿속으로 싹 스쳐 지나간다”고 한다.

 

서예가 오세창(1864~1953)이 살던 집은 탑골공원 근처라 ‘탑원’이라 불렸다. ‘탑원도소회지도’는 안중식·오세창 등 여덟 친구가 달빛 아래, 원각사지십층석탑을 뒤로 두고 시·서·화를 즐기던 모습을 담았다.

황정수가 최근 출간한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푸른역사) 북촌·서촌 편 2권(사진)에는 조선시대 말기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 전후까지 격변기를 살아낸 화가와 작품 이야기가 가득하다. 책은 ‘황정수, 근대 그림들의 장소를 거닐다’로 여겨도 된다.

 

지난 11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한 주상복합건물에 있는 황정수미술연구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황정수는 경성 화가들의 자취를 빠뜨리지 않으려고 기록을 하나하나씩 뒤져 다 찾아다녔다고 한다. “뜻밖에 화가가 많았어요. 대부분 서울 중심부, 그중에서도 북촌과 서촌에서 활동했더라고요.”

 

인물과 인맥, 지리, 미술사에 관한 육하원칙이 줄줄 이어진다. “오원 장승업(1843~1897)은 광통교 쪽에서 활동했다.” “인사동은 일제강점기 서화골동(書畵骨董) 유통의 본거지다.” “일본인 화가들은 주로 남산 아래 남촌으로 들어갔다.” 황정수는 “인사동을 중심으로 북촌과 서촌, 남촌이 하나의 미술 벨트를 형성했다”고 말했다.

 

왜 ‘경성 화가들’이었을까. “이중섭이나 김환기는 1950년 이전에 그린 작품으로 남은 게 다섯 점 될까 말까합니다.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라 불리는 춘곡 고희동(1886~1965)의 작품은 서양화 석 점만 남았어요. 근대기 작품을 여럿 남긴 다른 작가는 왜 연구하지 않는지가 불만이었죠.”

 

근대기는 ‘일본 미술’ ‘일본인 화가’와 떼어놓고 볼 수 없다. 그는 “여러 연구자가 자랑스럽지 못한 일제강점기 역사 때문에 미술 분야에서 발전한 일본이 발전되지 못한 한국에 영향을 줬다는 식의 서술을 하는 걸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인상파를 배운 일본인이 도쿄에 온 한국인에게 그림을 가르쳤는데, 이 한국인 제자가 나중에 한국에서 유명 화가가 되었어요. ‘서구 인상파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1886년 프랑스에서 화가 라파엘 콜랭에게 배운 구로다 세이키의 영향을 받아 그런 그림을 그렸다고 얘기하지 않는다는 거죠.” 이 유명 화가는 고희동 등이다. 황정수는 “일본의 누구한테 무엇을 배웠는지, 왜 그런 작품을 그렸는지 하는 연구가 없다”고 말했다.

 

황정수는 2018년 <일본 화가들 조선을 그리다>(이숲)를 출간했다. “일종의 한·일 문화교류사의 사초”로 책을 정의했다. 1908년 한국에 들어와 미술을 가르친 일본인 화가 시미즈 도운의 ‘최제우 참형도’와 ‘최시형 참형도’ 등 여러 작품을 발굴해 책에 실어 알리기도 했다. 그는 “(한국인 화가든, 일본인 화가든) 내가 제일 중요하게 여긴 건 미술사에 이름은 남았지만, 작품이 남지 않은 작가들의 작품을 발굴하는 것”이라고 했다.

 

책을 낼 때 ‘친일·반일’ 프레임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황정수는 “일본인 화가들은 빼고 근대기 한국 미술과 경성 화가들의 면모를 볼 수가 없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자는 신념으로 출간했다”고 말했다. 그 신념은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에도 적용됐다. 작업실은 온갖 작품으로 가득했다. 황정수는 소문난 수집가이자 애호가다. “작품을 소유하지 않으면 작품을 알 수 없다”는 신념으로 여유가 생기는 대로 작품을 사들였다. 부모님 드릴 용돈을 빼곤 다 그림을 샀다고 했다. 통틀어 1만점가량을 가졌다. 그는 “너무 그림이 좋으니까 안 사면 못 배기는 그런 병이 생긴 것”이라며 웃었다.

 

30여년간 작품을 수집하면서, 주식이나 부동산에 욕심을 낸 적이 없다고 했다. “경제적 이유 때문이나 다른 그림을 구입하기 위해 갖고 있던 그림을 팔고서는 한 번도 즐거웠던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림을 팔아야 한다면, (화랑이나 개인이 아니라) ‘반값’에라도 미술관에 팔려고 한다”고 했다. “미술관에 가면 언제든지 볼 수 있으니까요.”

 

황정수는 한밤에 깨면 불현듯 보고 싶은 작품이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둘이 마주 앉으면 그림과 어떤 대화가 이루어져요. 미술품은 살아 있는 생물이에요. 무속인들의 접신 비슷한 걸 느낄 때도 있죠. 작가의 마음이 된 듯도 하고요. 그 희열이 매력적이죠.”

 

그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도 미술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는 “내 눈으로 보고, 내 발로 가본 곳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것”이라고 했다. “미술이 인간 마음을 풍요롭게 해준다는 걸 조금이나마 대중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연구소를 찾았을 때 황정수는 출판사 요청으로 신간에 사인을 하고 있었다. 이름 곁에 “畵中有詩 詩中有畵(화중유시 시중유화: 그림을 보면 시가 떠오르고 시를 읽으면 그림이 떠오른다)”를 적었다.

 

경향신문 / 김종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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