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 되면 빌린 돈도 갚아야 하지만, 차례상 차림에서 선물에 이르기까지

돈 들어 갈 곳이 너무 많아 명절 다가오는 것이 무서운 때도 있었다.

지금은 모든 경제활동에서 벗어나 무소유의 삶을 살아 그렇게 마음 편할 수가 없다.

더러 불편한 점도 있으나 돈으로 생기는 폐악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다행스럽게 기초생활수급자라 최소한의 수입이 보장되어 사는데 불편함은 없다.

 

돈은 가지면 가질수록 욕심이 생기 듯,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모든 사건이 돈에서 비롯된다.

정치인들이나 재벌이나 가질 만큼 가진 자들의 돈에 대한 집착은 무섭다.

공직에서 옷을 벗거나 감옥에 가는 것까지 감수하며 돈에 혈안이 되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돈은 ‘돈다’는 말에서 유래되었다는데, “돈 놓고 돈 먹는다”’는 말이 있듯이, 돈은 밑천이 있어야 벌 수 있다.

그 돈을 굴려 버는 과정에서 온갖 몰염치와 비리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돈이 많으면 장사를 잘하고, 소매가 길면 춤을 잘 춘다.’는 말은 사람의 능력보다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이다.

‘돈만 있으면 처녀 불알도 산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 ‘돈만 있으면 개도 멍첨지라.’는 말에서는

돈의 위력을 강조하느라 불가능한 일 까지 끌어들여, 돈 때문에 세상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우려다.

 

돈이 없을 때도 돈에 대한 말을 많이 한다. ‘돈 없으면 적막강산이요, 돈 있으면 금수강산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돈 벌기가 힘들어 ‘돈 한 푼 쥐면 손에서 땀난다.’고도 한다.

 

그래서 ‘돈에 침 뱉을 놈 없다’지만, 돈 많은 사람을 존경하지는 않는다.

특히, 돈을 벌어 모으기만 하고 쓰지 않는 구두쇠는 비난과 풍자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돈은 벌기보다 쓰기가 더 어렵다고 해서,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써라'고도 한다.

 

그처럼 돈은 버는 것 보다 쓰길 잘 쓰야 한다.

돈 때문에 친구는 물론, 등 붙이고 사는 가족까지 헤어지는 것을 많이 보았다.

때로는 사람을 죽이는 흉기가 되기도 하고...

 

 돈이란 똥과 같아서 돈이 모이면 구린내가 진동을 하나 골고루 나누면 좋은 거름이 된다.

나 역시 돈이 있을 때는 걱정을 달고 살았으나, 돈이 없으니 아무런 걱정이 없다.

 종종 인용하는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나.’는 속담도 돈보다 사람이 더 소중하다는 경구다.

돈에 대한 속담까지 이렇게 많은 걸 보니, 돈이 요물은 요물인 모양이다.  

 

정초부터 재수 없는 돈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는 것은,

돈이 없어 빌려가며 가난한 예술가를 돕는 사람이 있어서다,

 

주말에 녹번동 가면 찾아오는 지인이 더러 있다.

지난 토요일에는 정동지 동생 정주영씨가 다녀갔고, 일요일엔 '유목민'의 전활철씨가 왔다.

활철씨는 용돈 하라며 돈 봉투를 내놓아 정동지 팁이라며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지난 20일은 김명성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해 바뀌기 전에 술이나 한잔 하자며 불광동 '대조시장'에서 만나자는데, 그날따라 날씨가 너무 추웠다.

동자동에서 시간 맞춰 갔으나, 조해인씨와 먼저 도착해 길에서 떨고 있었다.

 

'대조시장'에 온 것은 며칠 전 홍어무침을 샀는데, 맛이 있어 다시 사러 왔다는 것이다.

홍어무침을 배낭에 집어넣고 추위를 피해 인근 ‘남도술상’이란 주막에 들어갔다.

맛있는 집만 찾아다니는 그였지만, 추위에는 도리가 없었다.

 

연포탕을 안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김명성씨가 두 사람에게 용돈을 내놓았다.

병석에 누워있는 이청운화백을 비롯한 몇 몇 분에게도 보냈다는 것이다.

 

인사동에서 ‘아라아트’를 운영할 때는 종종 가난한 예술가들을 도왔으나,

지금은 건물이 경매에 넘어가 빚더미에 앉은 처지가 아니던가?

가져 온 돈도 외국기업에서 지사장으로 근무하는 딸에게 빌린 돈이라고 한다.

제 코가 석자인데, 남 생각할 여지가 어디 있겠나?

그의 성격을 아는지라 받으면서도 "씰데없는 짓 그만하라"는 염장 지르는 소리를 했다.

 

다들 갈 길이 바빠 소주 두병만 까고 일어섰는데, 마침 돈 쓸 곳이 생겼다.

밥만 올리려던 차례상을 차리려고 '대조시장'에서 장을 본 것이다.

술김에 이것저것 안 살 것까지 사며 돈을 다 써 버렸다.

돈이 생기면 그냥 두지 못하는 버릇을 탓하지만,

차례음식도 귀신이 먹을 것이 아니라 사람이 먹을 것 아닌가?

 

아무튼, 김명성씨 덕분에 푸짐한 명절상을 차렸지만, 마음은 개운치 않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 아무리 없어도 밥 굶는 사람은 없는데,

그득한 제사상 또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의 부스러기 일 뿐이다.

 

새해에는 더 이상 민폐 끼치지 않기로 다짐했다.

돈이 인간성을 갉아 먹는다.

 

사진, 글 / 조문호

 

 

울음이 타는 가을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을 보겠네.

 

저것 봐, 저것 봐,

너보다도 니보다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가는

소리죽은 가을을 처음 보겠네.

 

 

오늘따라 왜 이리 박재삼시인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이 생각날까?

새삼 시집을 들춰 보고 오래된 사진첩에서 박재삼시인의 사진을 찾아보았다.

며칠 전 친구가 떠난 뒤로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친구를 잃은 슬픔보다 안면몰수하는 세상인심이 더 슬퍼서다.

 

박재삼시인의 울음이 타는 가을 에는 삶의 통과의례가 담겨 있다.

죽음과 제사 그리고 가을강은 삶의 허무가 깃든 한편의 아름다운 서정시다.

그러나 가을 강이 상징하는 것은 죽음과 소멸만이 아니다.

다시금 재생하는, 그 너머의 삶을 희구한다.

 

박재삼 시인은 스무 살까지 삼천포에서 살았으나,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신문을 배달하거나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했다.

이런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삼천포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한다.

그의 주경야독 생활은 1953현대문학에 취직하여 서울 생활을 할 때까지 계속되었다는데,

초기 시에 자주 등장하는 가난은 이런 개인적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박재삼 시인은 정적인데다 외로운 기질을 타고난 분이다.

생전에 인사동에서 만나면 별말씀은 없지만, 항상 미소가 따뜻했다.

30여년 전, 양평 가는 길에 우연히 따라가 찍은 사진이 선생의 마지막 사진이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오래된 사진을 찾아 추억이나 들추는 걸 보니, 나도 갈 때가 되었나보다.

너무너무 그립고 만나고 싶은 분들이 많다.

 

사진,/ 조문호

 

지난 15일 정영신씨와 함께 세상을 떠난 창원 김의권씨의 장례식장에서 황성건, 변형주씨를 만나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눈 후 인근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튿날 발인을 지켜본 후 양산장에 가기 위해서다.

 

울산에서 온 황성건씨와 동행했는데, 양산장에는 공윤희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정동지는 장터 촬영을 왔는지, 장보러 왔는지 모를 정도로 농산물을 바리바리 사들고 왔다. 온 김에 오세필씨도 만나보기 위해 남창에 있는 동광기와를 찾아간 것이다.

 

남창에 있는 기와 골 사무실은 열려 있으나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사무실에는 나무로 만든 다양한 모골(기와모형 틀)이 진열되어 있었다. 작업장에는 귀면기와와 용두 같은 미완의 기와들이 어지럽게 놓여있었는데, 마치 귀신 나올 듯 으스스 했다.

 

문 닫힌 기와공장에는 반구대 암각화를 형상화한 전돌이 전면을 장식하고 있었는데, 두꺼비굴이라 불리는 재래식 기왓굴과 달랐다. 노장들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 전래의 기왓 가마는 쌍굴이었고 원주에서 발견된 경우는 산언덕을 깎고 굴을 뚫었다. 부여근교에서 발굴된 백제 와요는 강둑에 굴을 파고 바닥에 구들장까지 놓았다고 한다.

 

담장처럼 쌓아 둔 기와더미를 보니, 사양길에 접어든 기와의 암울한 현실을 읽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각 지방마다 특색 있는 기와를 만들어 왔으나 콘크리트로 지은 슬라브집이 대세를 이루는데다 양기와와 슬레이트 등 새로운 지붕재료의 보급으로, 명맥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가상한 일이다. 지금은 전통기와의 수요가 점차 줄어 둘어 이곳 울산 남창과 전라도 장흥군 안양면에서만 만들어진다고 한다.

 

오세필씨가 운영하는 동광기와는 선조인 오호영옹이 1900년대부터 시작하여 4대째 이어지는 긴 역사를 가졌다. 3대째인 부친 오성환씨가 동광기와라는 이름으로 확장시켰고, 4대째인 오세필씨가 이어받으며 문화재관리국 등록1호가 되었다고 한다.

 

오세필씨는 황금기와를 개발하여 구인사 '대조사전'에 올리기도 했다. 구인사가 돈도 많으면서 콘크리트 절만 만든다는 비판을 받자 제대로 된 대조사전을 건립한 것이다. 신흥수대목장이 도편수가 되고 오세필 제와장이 기와를 맡는 등 전통건축의 장인들을 불러 모아 지어졌는데, 안쪽은 한 층이지만 겉으로는 3층이라 법주사 팔상전의 구조와 비슷하다. 그 '대조사전'은 1992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2000년에 완공되었는데, 오세필씨의 금빛 기와는 도금이나 단청이 아니라 유약을 발라 구운 기와라 시간이 지나도 빛이 바래지 않는다고 한다.

 


기와는 암기와와 숫기와로 구분되는데, 아래에서 받쳐주는 넓적한 기와가 암기와고, 위에서 덮어 지붕의 골을 만드는 둥근 기와가 숫기와다. 또한 암막새와 수막새, 귀면기와(도깨비 얼굴을 새긴 기와), 치미(전통 건물의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는 기와), 용두(용머리를 표현한 기와), 망와(지붕의 마루 끝에 세우는 기와) 등 부속장식 기와도 다채롭게 만들어져 사용되었다.

 


전통 기와는 흙과 물로 만들기 때문에 습기가 많은 우기와 한랭한 계절을 피해 봄과 가을에 제작된다. 첫 작업은 질 좋은 원토를 채취하는 것이다. 검은 흙, 누런 흙, 붉은 흙 등 세 종류의 흙이 고루 배합돼야 좋은 기와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기와를 만드는 공정은 찰진 진흙으로 된 점토를 물과 반죽하여 흙 사이에 기포가 생기지 않도록 밟고 짓이기는 작업을 반복하며 나무로 만든 모골(模骨)이란 틀에 넣는다. 모골의 외부에 마포나 무명천을 깔고 반죽한 진흙을 다져 점토판 위에다 씌워 방망이 같은 판으로 두들긴다.

 

그런 다음 와도(瓦刀)2등분하거나 또는 3, 4등분하여 자른 다음 장방형으로 재단한 진흙을 한 조각씩 떼어 와통 둘레에 붙인다. 와통은 진흙을 성형하는 데 쓰이는 원통형의 나무통이다. 성형 작업 중에도 진흙 판을 계속 두드리는데, 이는 흙 사이에 기공이 생기면 나중에 굽는 과정에서 기와가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양이 잡힌 뒤에는 대나무칼 등으로 선을 긋고 건조 과정을 거친 뒤 각각의 낱 기와로 분리해 다시 말린다.

 


최종 단계는 가마 작업이다. 말린 기와를 화기가 고루 통하도록 가마에 차곡차곡 쌓은 뒤 사흘간 불길을 조절하며 섭씨 1000도가 넘는 고온에서 구워낸다. 은은한 검은색이나 은회색이 되면 제대로 구워진 것이다. 이렇게 한 장의 기와가 탄생하기까지 40일 가까이 흙과 물, 그리고 불 속에서 서른 가지가 넘는 까다로운 공정을 거쳐야 한다.

 

전통 기와는 기계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자연스러운 곡선미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수분 흡수율과 통기성도 이른바 공장 기와가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옛 기와를 두고 흔히 살아 숨쉰다고 표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전에는 시골 여행하다 보면 곧잘 눈에 띄던 것이 흙으로 두둑하게 쌓은 두꺼비굴이 있었는데, 요즘에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워낙 영세한 시골의 기와공장 인데다 인력 의존도가 높은데 비해 값이 싼 제품이라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곳저곳 살펴보며 전통기와의 우월성과 창의성에 감복하고 있으니, 제와장 오세필씨가 나타났다. 손님 접대를 위해 횟집에 회 사러 간 것 같았다. 오세필, 정영신, 황성건, 공윤희씨 등 다섯 명이 회를 싸들고 오세필씨 형님이 운영하는 고깃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식당은 여러 차례 가보았지만, 소고기 육질이 좋아 입에 찰싹 달라붙었다. 소고기에다 생선회가 어울리지 않는 궁합이지만, 회를 좋아하는 정동지를 위한 특별한 배려였다.

 

그리고 식당 벽에도 오세필씨의 기와 골에서 구워낸 전돌이 장식하고 있었다. 장식적 효용성만 아니라 전돌이 고기냄새를 흡수하는 이점도 있다고 한다. 아무튼, 오세필씨 덕에 맛있게 잘 먹었다.

 

식당에서 나와 보지 못했던 와당 전시장을 둘러보았는데, 마치 기와 박물관에 온 것 같았다. 백제기와에서부터 신라기와에 이르기까지 연대별로 전시되어 있었는데, 입이 쩍 벌어졌다. 심지어는 오래된 기왓장 조각까지 바리바리 모아 두었다. 나라마다 기와의 특징이 뚜렷했다. 고구려의 기와는 힘차고 날카로운 모습을 보였고, 백제의 기와는 간소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다. 백제기와의 보드라운 촉감에서 특유의 조형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또 통일신라 때의 섬세한 문양은 무르익은 미의식의 화음이 느껴졌다. 신라의 기와는 처음에는 소박했으나 차츰 화려해지고 무늬가 다양하게 나타났다.

 

제와장 오세필씨의 설명으로는 우리 기와가 삼국시대에 꽃을 피웠다고 한다. 고구려와 백제가 각기 수준 높은 조와 기술을 가지고 있었는데, 통일신라에는 독자적인 기와를 구워내어 완성의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심지어 녹유 기와와 전돌이 그러하려니와 무늬에 있어서도 다양하고 정교하다. 그런데 고려이후의 무늬와 종류는 한계점에 달했음을 보게 된다. 청자로 구운 기와까지 나왔음에도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12세기로 한 고비를 그었다. 얼굴 무늬 수막새는 자연스러운 미소를 간직한, 신라의 대표적 기와 유물로 꼽힌다. 그리고 강진에서 구워진 모란당초 무늬의 청자기와는 얼마나 기발한 착상인가.

 

옛 유물에 나타난 기와의 종류는 무려 20여종에 달했다. 평와로서 암기와와 숫기와는 물론, 숫기와로서 미구기와와 토수기와가 더 있었다. 막새는 평기와에 낙수의 드림새를 붙인 것이고 망새 (망와)는 용마루나 내림마루 끝에 다는 바래기를 말한다. 옛것에는 귓기와, 곱새기와, 기왓골수새 등 갖가지 기와가 있었다고 한다. 치미, 용두, 잡상, 토수 같은 것은 궁궐이나 큰 사찰용이라 흔치 않았다.

 

정영신씨는 이곳에서 구웠다는 달항아리 한 점과 오래된 숫기와 한 점을 선물 받았다. 숫기와에 핀 세월의 꽃은 어느 조각품도 따를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나저나, 문화재청에서 전통기와를 전승하고 보존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 같다.

전통기와를 배우려는 사람도 없거니와 타산이 맞지 않아 더 이상 만들 수가 없다는 말에 귀가 막혔다

역사를 중시 않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

 

사진, / 조문호

 

선물받은 달항아리와 숫기와를 집이 좁아 어디 둘까 걱정했는데, 다 제자리가 있네.

 

며칠 전 창원의 김의권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친한 친구이기에 앞서, 그의 죽음은 무심했던 내 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떠난 사람이야 세상 시름 모두 내려놓고, 행복과 사랑이 넘치는 곳으로 가는 축복받을 일이지만,

단지 살아남은 자들의 아쉬움이고 슬픔일 뿐이다.

 

운명을 달리한 김의권은 불의에 분노할 줄 알고, 남의 슬픔에 가슴 아파하는 그런 평범한 예술가였다.

음악과 그림, 그라픽디자인, 실내장식 등 다양한 재능을 가졌으나

특정 예술을 간판으로 내세워 포장하는 짓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을 내세우는 일에는 더더욱 질색이다.

그냥 예술과 사람이 좋아 인사동을 고향처럼 드나들던, 우리 시대의 한 저항아였고 풍류객이었다.

 

그를 처음 만난 지도 어언 반세기가 흘렀다.

고향 친구는 아니지만, 긴 청춘을 함께 누렸기에 고향 친구보다 정분은 더 깊다.

 

그를 알게 된 것은 1970, 부산 에덴공원의 난향 음악실에서 처음 만났다.

리퀘스트 용지에 빵모자를 쓴 자화상의 케리커쳐를 그려놓았는데,

제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퀸시 존스'의 음악이었다.

누가 신청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말없이 음악에 빠져있다 눈길이라도 마주치면 배시시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는 히피라는 듯...

음악과 이념이 같다는 이유로 정남규, 황성건, 신윤택 등과 어울려 어지간히 놀았다.

미망인이 된 최갑순여사도 그가 경영한 마산 수림음악실에서 만나게 되었다니,

어쩌면 음악이 맺어 준 것은 공통의 인연이 아닌가? 생각된다.

 

미망인의 회고에 의하면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생 때 였다고 한다.

방송실에서 신문 사설을 읽어가며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용기에, 마음을 빼앗긴 것 같더라.

대중이 모인 장소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망인 역시 부마민주항쟁에 앞장섰던 학생이라 어쩌면 동지애 같은 것도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좋은 사람에 대한 이상은 현실과 너무 멀었다.

고인 역시, 돈이 판치는 세상에 히피의 삶을 산다는 것이 간단치 않았을 것이다.

낙천적으로 사는 대개의 예술가들이 겪는 운명의 장난인지 모른다.

예술로 밥 먹고 산다는 것이 힘든 것은 어제 오늘만의 일도 아니다.

 

거기다 심성까지 모질지 못해, 일 해주고도 실내장식비도 못 받는 일이 비일비재한데다

그것도 모자라 툭하면 남의 빚보증까지 서, 집을 날릴 뻔 한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사람이 어질어 밖에서 좋은 말 듣게 되면, 죽어나는 건 가족뿐이다.

 

그런데도 남에게 싫은 소리는 죽어도 못한다.

부탁은 물론 아들딸 결혼식이나 몸 아프다는 연락까지 안 하는 고집불통이었다.

천성이 그러니 어찌하겠냐마는, 아내 최여사가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다행히 아내가 팔 걷고 나서서 자식들을 잘 키웠으나,

경상도 사내의 고약한 성질머리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 했을 것이다.

 

아내 최갑순씨는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이사장으로 있고,

변호사로 일하는 아들 형일은 일남일녀를 두어 화목하게 살고,

교사로 일하는 딸 엄지까지 결혼하여 만삭이라니, 무슨 부족함이 있으랴!

말년에 손자 재롱이나 즐길 형편에 그리도 갈 길이 바쁘던가?

 

지난 15일 정동지와 창원 파티마병원 장례식장을 찾아갔더니,

공윤희씨는 기다리다 지쳐 가버렸고, 이종호씨만 장례식장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빈소에는 스스로를 그린 자화상이 영정사진을 대신했는데,

거리를 방황하는 풍류객의 삶을 대변하듯 쓸쓸했다.

 

고인의 영전에 향을 사르며 영원한 안식을 빌었다.

죽는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나는 죽지 않고 친구가 가는 걸 보니,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사더라.

인사동 친구들이 그리워 일만 있으면 지팡이 짚고 인사동을 들락거렸으나, 세상인심은 그와 달랐다.

병석에 있는 김상현씨만 조의금을 대신 전달해 달라는 연락을 해왔을 뿐이다.

 

하기야! 먼 길까지 문상가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그렇지만, 가깝게 지내던 마산의 후배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 보기 어렵다는 말은 오래된 말이지만,

요즘은 가족을 모르면 친구도 문상가지 않는다는 말로 바꾸어야 할 판이다.

 

그러나 돗대기 시장 장삿꾼도 아니고 예술가들이 아니던가? 

평소에 가족을 동반하지 못한 원죄는 있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

어느 풍류객이 마누라 끌고 다니며 풍류를 즐긴 자가 몇이나 되던가?

 

오래전 찍어 둔 알몸 영정사진은 정선 화재 때 불타 미처 프린트할 여유도 없었지만,

대개 너무 늦게 알거나 상주의 이해를 구하지 못해 번번이 불발되었다.

사람 크기로 프린트한 알몸사진을 내세워 초상집을 잔칫집으로 만들 생각이었으나

가족들의 오래된 고정관념을 바꿀 수도 없지만, 인터넷에 올리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미투란 요상한 바람이 불어 이성을 사랑으로 보지 않고 적으로 여기는 삭막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

 

얼마 전, 알몸 영정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삭제해 버리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을 알리는 영정사진은 아랫도리를 잘라 상체만 올린 것이다.

내가 죽는 날은 먼저 간 친구들의 초상까지 함께 내거는 축제를 열기로 했다.

 

오랜만에 이종호씨를 만나 술 한잔 나누고 있으니, 친구 황성근이도 찾아왔고,

40여 년 동안 의권이 따까리 노릇만 했다는 변형주씨도 나타났다.

어제는 신윤택, 최정순, 신병섭씨도 다녀갔다고 한다.

눈물을 글썽이던 미망인은 미운 정만 꽤 씹으며 고인을 원망했으나,

긴 세월의 고운 정 미운 정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고인이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했다는 미안하다! 너한테 미안하고, 나 자신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가정보다 밖으로 떠도는 풍류객들이 되새겨야 할 대목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요즘은 상갓집 풍경도 많이 변했더라.

밤새도록 빈소를 지키며 술 마시는 풍습은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손님이 뜸하니 도우미까지 퇴근하고, 젊은 상주만 빈소를 지켰다.

황성건과 변형주씨만 상가에서 마련해 준 가까운 여관에서 자고,

나와 정동지는 이종호씨가 마련해 준 '엠배스더호텔'에 자는 호강도 했다.

 

호텔 인근 찻집에서 사진하는 조성제씨를 만나기도 했는데,

오랜만에 사진판 돌아가는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 이튿날 발인시간에 맞추어 서둘러 장례식장에 갔더니,

그때까지 황성건과 변형주씨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상가에서 챙겨 간 술로 밤새도록 퍼마신 것 같았다.

 

추모 미사에서 편히 승천하라는 축원도 올렸다.

할아버지 영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손녀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다.

 

세단에 실려 하늘나라로 떠나는 친구의 뒷모습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조문객이야 많았지만, 정작 마음 주었던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다.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다.

욕심부리지 않고 초연하게 살다 간 그 그림자가...

 

의권아~ 잘 가거라! 그곳에는 먼저 간 홍수진과 정남규를 비롯하여 적음도 있고,

삐뚤 웃음으로 반기는 창동허새비 이선관 시인이나 현재호 화백도 계신다.

그리고 만나기만 하면 노잣돈 달라던 천상병시인도 반길거다.

부디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린다

 

자유인을 꿈꾸어 온 김의권은 이 시대 마지막 희피였다.

돈이 지배하는 야멸찬 세상에,  그 자리를 지켜 온 것만도 용타!

머지않아 전설이 된 빨치산처럼, 모두 사라질 것이다.

 

 

선관 형의 ! 함성을 조시로 올린다.

 

당신들은 아는가

십년이 지나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이십구년이 된 지금까지도

점점점 더 진하게 들려오는

저 함성 함성

구암동 애기봉 중턱에

눈감지 못하고 누워 있는

죽어도 살아 있는 열사들이여

살아 있음이 죽어 있는

우리들은 오늘

들려오는 함성 소리에

부끄럽게

묵념을 올립니다

 

사진, / 조문호

 

 황명걸 시인의 추모제가 49제를 이틀 앞둔

지난 29일 오후 4시 무렵, 양평 물안개공원에서 열렸다.

 

추모제에는 미망인 서상실여사를 비롯한 가족들과,

평소 선생을 존경해 온 인사동 사람들이 모여 고인의 넋을 기린 것이다.

 

황명걸시인 추모제는 한 때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던

'창예헌' 이사장 김명성씨가 발 벗고 나서서 추진한 행사다.

장례식 때 추모제를 지내지 못한 아쉬움에 자리를 만들었지만, 49제는 아니었다.

날자도 맞지 않은데다, 유족들이 착실한 기독교 신자기 때문이다.

 

사람 모으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 농심마니가을 산행과 함께 추모제를 지낸 것이다.

인사동 사람들과 농심마니’ 회원,  양평문인, 가족 등 60여명이 참여했다.

 

추모제에 참석한 분으로는 최유진 농심마니 회장을 비롯하여 김명성, 송상욱, 

김상현, 조준영, 수견 김정남, 이명희, 전활철, 조해인, 기국서, 김수길, 정복수, 

정영신, 이 성, 최진환, 노광래, 이강용, 송일봉, 박상희, 황예숙, 서길헌, 최정인,

오만철,나자명, 오치우, 박흥식,  권경업, 신영수, 윤성은, 조명환, 김각환, 

문창길, 이동국. 김성철, 강미숙,  이철순, 황요한씨가 함께했다.

 

모처럼 반가운 분들 만나 가을 정취에 흠뻑 빠질 수 있었는데,

황명걸선생 시비 앞에 놓인 영정사진을 바라보니, 가슴 아린 회한이 밀려왔다.

오래전 선생께서 시화전을 하고 싶어 하셨으나, 그 걸 말렸기 때문이다.

시화전이라면 오붓한 장소가 어울리지, 백 평이 넘는 '아라아트'는 무리라는 생각에서다.

그 이후로 전시 이야기를 듣지 못했으나, 서운해 하실 것 같아 늘 마음에 걸렸다.

추모제를 맞아 그때의 배은망덕을 사죄한 것이다.

 

추모제에 앞서 행사를 주선한 김명성 시인의 간단한 인사에 이어

수견 선생의 구슬픈 피리 소리가 영령을 위안했다.

 

시인은 시를 낭송했고젊은 춤꾼은 위령무로 넋을 기렸다.

 

 '뮤아트' 김상현씨까지 나와 아코디언을 연주했다.

김상현씨는 병원에서 위중한 수술을 받아 입원한 환자가 아니던가?

병든 자신의 몸보다 떠난 분의 그리움이 절절했던 모양이다.

 

김상현씨가 연주하는 애잔한 ‘부베의 연인음율에 맞춰

선생께서 너울너울 춤이라도 추는 것 같은 환영이 떠올랐다.

 

돌이킬 수 없는 그리움이었다.

 

시비 세운 장소가 중앙에서 옆자리로 옮겼을 뿐, 꽁지머리상은 여전했다.

시비에는 황명걸선생의 지조가 새겨져 있다.

 

한 포기 작은 풀일지라도

그것이 살아 있으면

비에 젖지 않나니

더구나 잎이 넓은

군자풍의 파초임에랴

빗방울을 데리고 논다

 

한 마리 집오리일지라도

그것이 살아 있으면

물에 젖지 않나니

더구나 몸가짐이 우아한

왕비 같은 백조임에랴

물살을 가르며 노닌다

 

배준석시인은 선생의 지조에 대해 이렇게 말했더라.

지조를 풀과 집오리로 비유하며 파초와 백조로 연결시킨다.

그중 두 번이나 반복되는 중요한 구절이 그것이 살아 있으면이다.

이를 목숨을 걸 수 있으면으로 바꿔 읽어본다.

멀리 있던 지조가 꿋꿋하게 곁으로 다가옴을 느낀다.

빗방울도, 물살도 데리고 놀 수 있는 경지까지 이를 수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선생의 시는 저항의 격문 같은 한국의 아이가 먼저다.

황명걸선생은 70년대 대표적 리얼리즘 시인으로,

'한국의 아이'에서 민족분단의 현실과 부조리한 사회를 향한

비판적인 시선을 결기 어린 시어로 토해낸 분이다.

 

"계집아이는 어미를 닮지 말고 / 사내아이는 아비를 닮지 말고 / 못사는 나라에 태어난 죄만으로 /

보다 더 뼛골이 부서지게 일을 해서/머지않아 네가 어른이 될 때에는/잘사는 나라를 이룩하도록 하여라/()

너무 외롭다고 해서/숙부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외숙이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그 누구도 믿지 마라/

가지고 노는 돌멩이로/미운 놈의 이마빡을 깔 줄 알고/정교한 조각을 쫄 줄 알고/

하나의 성을 쌓아올리도록 하여라/ 맑은 눈빛의 아이야/빛나는 눈빛의 아이야/불타는 눈빛의 아이야"

('한국의 아이' 부분)

 

'한국의 아이' 시집은 판금 되었고, 선생께서는 자유언론 운동으로 신문사에서 해직되었다.

다시 한번 선생님의 뜨거운 저항 의식에 고개 숙입니다.

 

추모제가 끝난 후, 35년 동안 심어 온 농심마니가을산행으로 이어졌다.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열리는 산삼심기는 양평 '천주교 양근성지'라고 한.

 

양평군 강하면 이미란 발효학교에서 하루 묵으며 야외 술판과 굿판을 벌이고,

다음날 아침 산신제를 지내고 산삼을 심지만,

난, 오후 여섯 시까지 동자동에 갈 일이 있어 함께 할 수 없었다.

모처럼 음유시인 송상욱선생께서 무거운 앰프까지 짊어지고 오셨는데 말이다.

그 푸짐한 술상의 놀이판을 마다한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운다는데...‘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최근 들어 아름다운 삶을 살던 분들이 여럿 세상을 떠나셨다.

연세가 많은 황명걸 시인이나 박기정 화백은 병으로 돌아가셨지만,

안애경 감독은 마음 정리할 틈도 없이 갑작스럽게 떠나 더 안타깝다.

 

떠난 분은 말이 없으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일 뿐이다.

, 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더 빨리 데려간다고 믿으니,

고난의 삶을 끝내고 새로운 길을 떠나는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있겠는가?

사는 동안 나쁜 일만 아니라면 꼴리는 대로 즐겁게 사는 것을 최고로 친다.

 

가끔 정동지가 언제 무슨 일이 있다고 약속을 해오면 하는 답은 똑 같다.

그 때가지 내가 살지 모르겠다.”

.오늘 죽을 것처럼 사니, 두려울 것도 꿀릴 것도 없는 것이다.

 

지난 19일 박기정화백의 부음을 받았다.

정영신, 김명성, 조해인씨를 녹번역에서 만나 서울아산병원장례식장을 찾아갔다.

장레식장 입구에는 조화가 줄을 이었고, 많은 조문객이 모여 들었다.

좀 있으니 박인식 시인에 이어 박재동 화백도 나타났다.

 

그리고 '삼총사’, ‘가정교사등을 펴낸 박기정화백의 친동생 박기준화백도 만났다.

박기준화백은 평소 형님께서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셨는데,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며 지난 일을 회고했다.

 

박기정화백은 최근 폐암진단을 받아 투병하시다 고통스럽게 돌아가셔서 더 안 서럽다.

평생 소신이 '백절불굴(百折不屈, 백 번 꺾이더라도 휘어지지 않는다)'이던

선생께서는 시대를 보는 눈도 매섭지만, 재치 있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가 남달랐다.

 

1956별의 노래로 데뷔하여 은하수’ ‘들장미’ ‘도전자’ ‘황금의 팔

레슬러’ ‘폭탄아’ ‘치마부대등 다양한 극화 만화를 남겼다.

특히 도전자훈이폭탄아탄이는 선생의 대표적 캐릭터였다.

 

내가 고인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60년대 발표한 가고파

주인공 훈이가 엄마를 찾아 헤매는 순정만화였다.

탄탄한 스토리와 사실적인 캐릭터가 돋보였는데, 지금도 보고 싶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흰 구름 검은 구름’에서는 오동추의 캐릭터가 인상적이었다.

친구들 보는데, 교실창문으로 도시락을 넣어주는 할머니에게 난색을 표하는 장면은

어린 시절 내가 겪은 일이라 더욱 잊혀 지지 않았다.

 

박기정화백을 실제 뵙게 된 것은 창예헌고문으로 모신 10여 년 전이었다.

가끔 박인식씨가 운영하는 로마네꽁티에서 뵙기도 했는데,

가수 최백호와 박인식, 김명성씨 등 몇몇이 

오동추란 박기정 펜클럽을 만들 정도로 박기정화백을 좋아했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지난 18일 운명하시어, 20일 남양주 영락동산에 안치됐다.

많은 분들의 추모 속에 분주히 길을 떠났지만, 쪽방 사람들은 죽어서도 마음대로 떠나지 못한다.

없는 연고자를 기다리며 한 달 동안 갇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약자는 죽어서도 차별받는 세상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상주-

배우자 : 정기창

 : 박영훈, 박영술,  : 박영지

사위 : 이동엽, 자부 : 정재연, 정진희

 

사진 / 조문호

 

 

 

 

 

 

 

만화 '도전자', '폭탄아'를 그린 우리나라 1세대 대표 만화가 박기정 화백(88세)께서

지난 18일 오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박기정화백은 1934년 만주 용정에서 태어나 해방 후 서울에서 자랐습니다.

경복고 미술반 상급생이던 ‘고바우’ 김성환 화백의 연재에 자극받아

1956년 스물두 살 나이에 만화계에 데뷔했습니다.

 

1956년 중앙일보에 4컷짜리 만화 '공수재'로 출발하여 1963년에 '흰 구름 검은 구름'을 발표하며

주인공 ‘훈이와 미미’의 캐릭터를 창출해냈고, 1964년에 발표한 '도전자'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동안 '별의 노래', '허허박사', '뚱딴지', '개구쟁이 형제', '사회만보', '오중어부부',

'황금의 팔', '폭탄아', '레슬러' 등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보관문화훈장, 문화관광부장관 만화공로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제3대 한국만화가협회 회장도 역임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사동사람들' 모임이었던 '창예헌'고문일 뿐 아니라,

같은 회원인 가수 최백호는 박기정  팬클럽 ‘오동추’ 회원이기도 합니다,

 

박기정선생님의 극락왕생을 빕니다.

 

빈소 :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호실 (02)3010-2000,

발인 : 20일 오전 9시40분

장지 : 경기 남양주 영락동산

 

-상주-

배우자 : 정기창

자 : 박영훈, 박영술, 녀 : 박영지

사위 : 이동엽, 자부 : 정재연, 정진희

 

 

장애학생을 돕는 전시 ’함께 맞는 비‘가 지난 27일 막을 내렸다.

자선전을 주관했던 주홍수감독을 비롯한 운영위원들의 적극적인 섭외로 소기의 성과는 거두었다.

전시가 끝나는 날 작품을 실어왔는데, 뒤늦게 주감독 전화를 받았다.

가져 간 작품을 다시 작업실로 보내달라는 것이다. 그것도 정영신씨 작품까지...

 

장애학생을 돕는데 기여한 것만도 고마운데, 나까지 도움 받게 된 것이다.

장애학생을 돕고 가난한 작가에게도 도움 주는 것이 전시 취지지만, 주홍수 감독의 세심한 배려 덕분이었다.

주홍수씨는 만화가이자 에니메이션 감독으로 KBS와 MBC, 중국 등에서 자신의 작품이 방영되기도 한 인기작가다.

지금은 ‘한국경제신문 게임톡’에 ‘주홍수의 삼라만상’ 칼럼을 연재 중이다.

작가적 역량보다, 항상 사회적 약자에게 보내는 따뜻한 마음이 더 아름답다.

 

지난 30일 주감독이 찍어 보낸 영등포 도림로 139길에 있는 작업실을 찾아갔다.

2년 전 주감독 후암동 작업실에 초대받아 술 마신 적이 있어,

후암동 이웃으로서의 친밀감이 항상 앞섰는데, 도림동으로 옮겨간 줄은 전혀 몰랐다.

네비 따라 갔더니, 2대철빌딩 4층에 ‘마나가네’란 카페를 겸한 작업실이 있었다.

입구에는 소녀상이 지키고 있었고, 그 위에 자리잡은 주감독 캐리커처가 ‘마나가네’ 로고였다.

그런데, 주감독이 그림 에세이집 ‘토닥토닥 쓰담쓰담’ 한 권을 선물로 주었다.

 

얼마 전 인사동 ‘유목민’에서 본 적이 있는 책인데,

비정의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안타까운 모습이 익살스럽거나 재치있게 묘사되어 있었다.

 

고달픈 삶을 다독여주는 정겨운 그림들과 수필이 어우러져, 그만의 아름다운 시어를 토해냈다.

가진 자보다 버림받거나 소외된 자들에게 초점을 맞춘 애정 어린 시선이 아름답다.

 

책을 펼쳐 보고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 대가리 털 나고 이런 작가 서명은 처음 받아 본다.

징그러운 내 꼬라지까지 그려놓았더라.

 

 

‘아마존의나비’에서 출판된 ‘토닥토닥 쓰담쓰담’(240페이지) 책값은 16,020원이다.

                          세종도서에 선정된 인기 서적으로, 바쁜 일상에서 스스로를 위안하는 좋은 책이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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