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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은 정영신 동지의 생일이었다.

인사동 전시를 마무리한터라 어디든 여행이나 가자고 했더니, 작심한 듯 포항 장기장에 가잔다.

 

포항 장기장은 전국장터 목록에 빠져있어 유일하게 가보지 않은 오일장이란다.

문화유적이 많은 장기면의 장터가 빠졌다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 곳에는 장기읍성과 뇌성산성을 비롯하여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서원이 많은 곳이다. 

죽림서원, 삼명서원, 덕림서원, 서산서원이 있고, 

향교와 척화비, 석남사지, 고석사 석불좌상 등 문화재가 많다.

 

모처럼의 장거리 여행이기도 하지만, 일에서 해방되어 날아갈 것 같았다.

새벽 일찍 출발해 정오 무렵에서야 현장에 도착했는데, 텅 빈 장터가 반겼다.

마치 피난 간 마을처럼 사람이라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장터였다.

 

어렵사리 만난 노인에게 “장이 왜 안서냐?”고 물었더니, 

아침에 몇 사람 나왔으나 이내 끝났다는 것이다. 

노인들만 남은 면소재지 장이라 장터의 기능을 잃은 지 오래된 것 같았다.

 

새로 지은 장터 앞에는 장의사가 버티고 있어 을씨년스러웠다. 

한 세기나 지난 것 같은 오래된 고물차가 장터 곳곳에 있었고, 

점포들도 외부는 깔끔하게 정리되었으나,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유령의 마을 같았다. 

아마 문화유적을 찾는 관광객들을 위해 외관정비와 시설 보수는 했으나 

늙은이만 남아 장터 기능은 물론 살기조차 힘들 것 같았다.

 

옛날에는 유배지이기도 했으니, 외딴 곳에 젊은이들이 살고 싶겠는가?

장기장은 찍을 것이 없었으나, 지척에 있는 유적이라도 돌아보기로 했다.

 

장기면 읍내리에 있는 장기읍성은 둘레가 1,440미터고, 

옹성과 치성을 비롯하여 네 개의 우물과 두 개의 연못인 음마지가 있고, 

성 안쪽에는 향교와 동헌터가 남아 있었다.

 

여진족의 해안 침입에 대비하여 쌓은 토성으로 현종 2년에 축성되었는데, 

세종 21년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돌 성으로 개축된 후 군사기지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교의 대가인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이 귀양살이 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송시열을 기리는 죽림서원이 세워져 글 읽는 마을이 되었으나 

오로지 군사기지로서의 역할을 다한 고장이라 할 수 있다.

 

장기향교도 가까이 있었으나 문이 굳게 잠겨있었다. 

담장을 돌며 내부를 살펴볼 수밖에 없었는데,

맞배지붕 겹처마 5칸으로 된 대성전에는 18현의 위패를 봉안해 두었다고 한다.

당우로는 팔작지붕 홑처마에 7칸으로 된 명륜당, 내삼문, 외삼문, 주사 등이 있었다.

 

모두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었다고 한다.

뇌성산성이나 고석사 석불좌상도 찾아 보고 싶었으나,

울산의 기와장인 오세필씨를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이 다가와 갈 시간이 없었다.

 

지방 촬영 때는 일체 지인을 만나지 않지만, 오래 전부터 한 번 오라는 연락에 정동지가 약속해 두었단다.

그래서 일박이일의 촬영일정을 잡은 것이다.

 

약속 장소인 울산 남창까지는 2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였다.

남창마을 입구에 도착하니 오세필씨를 비롯하여 한양현씨와 양산에 있는 공윤희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세필씨 따라 그가 운영하는 기와공장을 거쳐 ‘송화정’으로 갔는데, 그날따라 정기휴일이라고 했다.

형님이 운영하는 곳이라 일할 분을 불러낸 모양인데,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더욱 송구스러운 것은 정동지가 좋아하는 감성돔까지 횟집에서 장만해 왔는데,

너무 과분한 대접이라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 날이 정영신씨의 생일이란 말은 하지 않았으나, 최고의 생일만찬이 아닐 수 없었다.

 

바닷가에서 커피를 마신 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L모텔에 여장을 풀었다.

공윤희씨가 숙소에 공수해 온 술과 안주로 밤늦도록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들 반가웠고 고마웠어요.

 

사진, 글 / 조문호

 

 




울산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기와장 오세필씨다.
만난 지가 수십 년이 된 후배지만, 인사동에서 더 자주 만나는 오래된 벗이다.
그는 밀밭에만 가도 취하는 사람이지만, 남을 위한 술자리는 자주 만든다.
워낙 미식가라 울산만 가면 뭘 먹일까로 고민하여, 늘 내 입이 호강 해왔다.
기장 칼치집에다 고깃집, 회집 등 맛 집을 훤히 잡고 있어 갈 때마다 설렌다.

부산 국제시장에서 울산으로 출발하였는데, 또 똥차가 말썽을 부리기 시작한다.
크라치에 이상이 생겨 도통 변속이 되지 않았다.
뒤에서 빨리 가라며 빵빵거리지만, 차가 꼼짝 않는데 난들 어쩌란 말인가?
급히 견인차를 불러 끌려갔지만, 걱정이 태산 같다.
분명 미션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견적이 만만찮을 것이고, 폐차시켜도 서울까지 끌고 가야했다.

응급조치만 하고 다시 운행했으나, 틈틈이 말썽을 부리며 애간장을 태웠다.






울산에서의 점심약속은 저녁 약속으로 미루어졌는데, 간절 곶 남평 회집까지 가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어디까지 왔냐며 수시로 전화가 울렸는데, 전화만 오면 눈치 챈 듯 시동이 꺼지며 말썽을 부렸다.

아마 복에 없는 회 맛을 보려니, 차가 심통을 부리는 것 같았다.
도착하니 오세필씨와 ‘울산신용보증재단’ 이사장으로 일하는 한양현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만나자마자 내뱉은 소리가 나 신용불량자에서 해방될 수 없냐고 물어보았다.

신용카드 하나 만들어 짝짝 긋고 싶어 어깃장을 부렸다.

오랜만에 만나 나눈 대화래야 고작 인사동이야기였다.

나도 요즘 인사동 출입이 뜸하니, 그가 더 많이 알고 있었다. 주로 김명성씨에 대한 근황이었다.

서울까지 운전하고 가야 할 놈이 소주를 쪽쪽 들이키니 정영신씨가 불안한 눈빛이다.

‘먹다 죽은 놈은 화색도 좋다’며 염장을 질러댔다.






술자리가 끝난 후, 정초에 해가 제일 먼저 뜬다는 0732라는 커피 집에 갔는데, 그 시설이 보통이 아니었다.

엄청난 투자로 고작 손님이 몇 명 뿐이니, 주인도 답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별장처럼 자기가 즐긴다면야 무슨 대수겠는가? 없는 놈은 항상 자기 기준에서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커피로 술기운을 다독인 후, 서울로 출발했다.
고속도로에선 변속할 일이 없으니 별탈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휴게소에 들릴 때 마다 말썽을 부렸다.

간이 배 밖에 나와 죽는 것도 두렵지 않으나 정영신씨는 약간 쫀 것 같았다.


“어차피 인간이 태어나 한 번은 죽는 거야!

충무공 말처럼 "살고 싶어 발버둥 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음도 불사하는 자는 살 것이니라”

나무관세음보살~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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