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승덕 / 김윤수,35x61cm,브론즈



일시 : 2019년 11월 29일- 12월 5일
장소 : 가나아트 옥션하우스
서울, 종로구 평창동 97 (전화) 02-720-1920


주최 : (사) 민족미술인협회, (사) 한국민족예술인단체총연합
주관 : 김윤수선생 1주기 추모특별전 추진위원회
후원 : 가나아트, 네오록, 창비


참여작가
강관욱, 강남미, 강명희, 강요배, 구본주, 권기윤, 권순철,
김경인, 김성호, 김정헌, 김준권, 김천일, 김환기, 노원희,
노태웅, 류  인, 민정기, 박불똥, 박수근, 박영균, 박장근,
박재동, 박한진, 손상기, 손장섭, 송  창, 신학철, 심정수,
안경진, 양순열, 오  윤, 오치호, 원승덕, 이만익, 이봉기,
이상국, 이석금, 이영륭, 이원석, 이종구, 임세택, 임옥상,
정연희, 정은기, 정종해, 주재환, 최민화, 최의순, 최종태,
홍선웅, 홍순모, 황재형


강관옥 / 구원, 40x25x46cm테라코타


강남미 / 제목미상,134x66cm,화선지에 수묵


강명희 / 흰색 무궁화꽃,130x160cm,캔버스에 유채


강요배 / 산방산,91x116,5cm,캔버스에 아크릴, 2014


구본주 / 눈칫밥 삼십년,70x70x18cm,브론즈,1999


권기윤 / 조탑리-권정생 마을,44.5x89cm,한지에 수묵담채,2018


권순철 / 아낙네,90x90cm,캔버스에 유채,2008


김경인 / 문맹자38-3(닫힌 공간) 110x110cm,캔버스에 아크릴,1978


김성호 / 새벽-항구,91x50cm,캔버스에 유채,2017


김정헌 / 느릅나무,60x60cm,캔버스에 아크릴


김준권 / 가파도 보리밭,95x180cm,유성목판,2018


김천일 / 대흥사북미륵암 비천상,47x72cm, 한지채색,2019


김천일 / 일강정 구럼비,99.7x21.2cm 종이에 먹


김환기 / 무제,121x85cm,캔버스에 유채,1968


노원희 / 게임의 재미,83x100cm,캔버스에 유채,2010


노태웅 / Station,91x60,6cm,캔버스에 유채,2019


류인 / 파란(Broken Egg),25(d)x32(w)x64(h)cm, Ed,of8 브론즈 1984


민정기 / 향교가는 길,97.5x115cm,캔버스에 유채,2019


박불똥 / 토리노의 말,63x108cm,피그먼트프린트,2018,


박수근 / 기름장수,31x19cm판화


박영균 / 기레기들,90x60cm,디지털프린팅,2019


박장근 / intro 1,64x30x100(h)cm, 브론즈 화강석, 2005


박재동 / 민중미술의 밭을 일구고,26x26cm,화선지에 수채


박한진 / 부적연구, 80x57cm, 여러가지 물감 1987


손상기 / 절박,65x53cm,천 위에 유채,1984


손장섭 / 서편제 길,72,7x60,6cm,캔버스에 아크릴


송 창 / 초평도에서,72,7x116,8cm,캔버스에 유채,2015


신학철 / 풍경A-2,75x51cm,종이 꼴라쥬


심정수 / 굴비,80x40x25cm,동판 단조 용접


안경진 / 두려움,100x50x120cm,합성수지에 채색,2018


양순열 / ANIMA,ANIMUS OTTOGI, 98x56(d)x45(h)cm, 혼합재료,2019


오 윤 / 대지,35,5x41cm 종이 위에 잉크


오지호 / 해경,31,8x41cm,캔버스에 유채,1974


이만익 / 기러기가 있는 그림,72x61cm,캔버스에 유채


이봉기,하얀 밤,90x45cm,캔버스에 아크릴


이상국 / 제목미상,60x37,5cm,닥지에 수묵


이석금 / 암행, 27.5x14,5x45cm 종이, 나무 위에 채색


이영륭 / 무위자연, 90.9x72,7cm 캔버스에 아크릴


이원석 / 우리도 그들처럼,65x35x60cm,화이버글래스,우레탄,2010


이종구 / 광장-봄을 위하여,130x65cm,캔버스에 아크릴,2018


임세택 / 임세택,53x45cm,캔버스에 유채,2015


임옥상 / 시인 백석,150x130cm,캔버스에 흙, 먹, 2019


정연희 / 나뭇잎배,53x33xx21cm, 스테인레스 스틸, 2013


정은기 / 하늘놀이, 80x80x60cm, 나뭇가지 위에 옻칠,피아노선,2017


정종해 / 표정,121x88cm,한지 목면에 수묵


주재환 / 작가회의 회보 제22호, 44.5x32cm, 종이에 인쇄


최민화 / 회화의 추억,16,5x14cm(10점)종이에 유채


최의순 / BOX017,30x30x30cm,석고, 기타


최종태 / 기도하는 사람,64x20x20cm,브론즈,2018


홍선웅 / 정방폭포,109x75cm,수성+유성,2018


홍순모 /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내목이 마르며,30x25x38cm,수성암,2012


황재형,사탄의 맷돌, 매암쇠,72,7x90,9cm,캔버스에 유채,1992-2013



지난 29일, 김윤수(1936~2018)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1주기를 맞아  묘비 제막행사에 이어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추모제와 추모전도 열렸다.

 

이어 김윤수 저작집 간행위원회장을 맡은 유홍준씨가 나와 그동안의 편집 과정을 설명했다.

엄청난 분량의 원고를 어렵사리 분류했는데, 책을 펴낸 출판사 직원들의 노고를 격려하기도 했다.

 

그리고 ‘창비’ 직원들이 나와 미망인 김정업씨에게 책을 전해주는 전달식도 가졌다.

 

백낙청씨는 추모사를 통해 30년 이상 계간지 ‘창작과 비평’ 발행인으로 일하신 선생이 계셨기에 오늘의 ‘창비’가 가능했다며 김윤수 선생을 그리워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윤범모관장은 추모사에서 선생께서 남긴 방대한 원고와 자료들을 정리하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아카이빙하겠다는데, 사회자인 임옥상씨는 "전관예우가 아니냐?'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임진택씨의 창작판소리 ‘소리내력’ 추모공연으로 추모제는 마무리되었다.

 

또한 ‘서울옥션하우스’에서는 신학철씨를 비롯한 50여명이 출품한 1주기 추모특별전이 개막되어 5일까지 열린다

 

김윤수 선생은 민족예술과 민중미술운동의 정신적 지주이자 리얼리즘 미학의 대부로서

‘한국민족예술인총연맹 이사장, 국립현대미술관장, 계간 '창작과비평' 발행인을 역임하셨다.

 

이번 1주기를 맞아 김윤수 선생의 저작집(전3권 / 가격100,000원)도 ‘창비’에서 출간되었다.

이 저작집은 김윤수 선생이 별세한 후 김윤수 저작집 간행위원회(위원장 유홍준)가 구성되어

지난 1년 동안 김윤수 선생의 저술과 자료를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이다.

 

미술비평과 명작해설, 전시회 소개문 등 예술현장에 몸 담은 고인의 흔적을 주제별로 묶었고,

후학들의 회고담과 인터뷰를 부록에 담기도 했다.

 

'리얼리즘 미학과 예술론'에는 미학자로서의 기조를 담은 글을 모았고,

'한국 근현대미술사와 작가론'에는 우리 미술사와 근현대 작가에 관한 작가론 등 미술사가로서의 글이 담겼다.

'현대미술의 현장에서'는 미술평론가로서 현장비평에 몰두하며 쓴 글이 실렸다.

 

유홍준씨는 간행사에서 "펴내고 보니 마치 살아생전 선생의 모습뿐 아니라 좀처럼 뵐 수 없었던 모습까지 다시 만나는 것 같고,

선생의 예술적, 학문적, 사상적 깊이에 더욱 깊은 존경심이 일어 난다"고 적었다.

 

출판사측은 "선생은 일생 동안 누구보다도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며 예술가와 독자를 설득해왔고,

예술의 창조성이 가장 빛날 때야 비로소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역설했다"며

김윤수 선생이 남긴 인간과 예술에 대한 성찰은 또 다른 변화를 준비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지침이 될 것"이라 했다.

 

추모제가 끝나고, 두 곳에 나누어 마련된 만찬장에는 많은 분들이 함께하여 선생을 기리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 자리에 함께한 분은 다음과 같다.
김정업, 백낙청, 유홍준, 임옥상, 김정헌, 윤범모, 임진택, 채희완, 두시영, 김영종, 이태호,

최종태, 주재환, 심정수, 신학철, 박종관, 이애주, 박재동, 김정환, 민정기, 성완경, 공선옥,

김건희, 노원희, 임정희, 박홍순, 이종구, 박은태, 장경호, 김영동, 최석태, 김천일, 홍선웅,

이광군, 곽대원, 김종근, 김준권, 박불똥, 조경연, 박세라, 정재안, 김천일, 정영신, 손병주,

서인형, 노형석, 손기환, 김이하, 정영철, 조명환, 노광래 씨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양평군 강상면 자택에서 만난 황명걸 시인. 숨이 차 소리가 잘 나지 않았다. 걸음도 불편했다. 그래도 시와 그림에 대한 열정은 여전했다. 그의 시엔 유난히 세상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많이 담겨있다. “4·19때 철학과 후배 어머니가 하는 중학동 다방에 있었어요. 2층에서 내려다보니 의대생이 피묻은 흰 가운을 입고 쓰러진 학생들을 들것으로 나르고 있더군요. 그게 눈에 선합니다. 옆에서 주먹만 쥐고 끼어들지는 않았어요.” 시선집이 나온 데는 절친 신경림 시인의 도움이 있었다. “신경림 시인이 ‘죽을 때도 됐는데, 시선집 하나 없으면 되겠느냐’고 하더군요.”


평양 출신 부친 해방뒤 치안대장
‘완장’ 싫어 미대 원했지만 ‘반대’
시쓰고 그림 그리다 서울대 ‘중퇴’

1962년 시로 등단…첫시집 ‘판금’
‘동아투위’ 거리시위 격문시 맡아
90년대 양평서 카페 운영하기도



시선집 낸 해직언론인 출신 황명걸 시인(82·사진)은 자신의 인생을 ‘자유혼’ 한 글자로 요약했다. 대학 졸업장에 얽매이지 않았고, 시를 썼고 그림을 그렸다. 언론자유를 외치다 직장을 잃었고, 남한강과 북한강변에서 갤러리 카페를 운영하기도 했다. 최근 시선집 <저희를 사랑하기에 내가>(창비, 구중서 신경림 엮음)를 펴낸 시인을 10일 경기 양평군 강상면 자택에서 만났다.


“아버지에 대한 역심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요. 언젠가 아버지와 나에 대한 소설을 쓰고 싶어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자유혼과 불가분의 관계처럼 엮이는 듯했다. “아버진 쁘띠(소) 브루주아 근성이 농후하셨죠.” 의대나 법대를 고집하며 아들의 미대 진학을 끝내 반대했다. 시인은 타협책으로 서울대 불문학과에 들어갔다. “미술사학을 하겠다는 생각이었죠. 하지만 대학에서 공부도 제대로 안하고 유학도 좌절되면서 결국 졸업을 못했죠.”


시인의 고향은 평양 대동강변이다. “아버지가 완장을 좋아하셨어요. 일제 때 사업을 하셨어요. 자동차도 있었죠. 당시 집엔 일본도가 몇개 걸려 있었어요. (해방 때) 아버지 무릎에서 일왕의 항복 방송을 들었는데, 아버지는 유카타(일본식 가벼운 겉옷) 차림에 일장기가 그려진 머리띠를 이마에 두르고 계셨어요. 해방 뒤에는 권총을 차고 치안대장을 하셨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과 겹쳤다. “외삼촌은 소련군 장교였고, (한국전쟁 때 납북당한) 친삼촌 둘은 서북청년단 간부였어요.”

아버지의 ‘쁘띠 브루주아 근성’이 너무 싫었던 아들은 화가를 꿈꿨다. 한국전쟁 때 부모는 제주로 피난을 가 냉면집을 했다. 고교생이었던 시인은 제주의 유일한 화방을 드나들며 그림을 그렸다. 물방울 화가인 김창렬도 같이 배웠다. 

 

전쟁이 끝난 뒤 부모는 서울 중구 초동에 냉면집을 냈다. 군 복무를 마친 시인은 대학에 복학하지 않았다. “대학을 하찮게 생각했어요. 시를 썼어요. 소설도 쓰려고 했죠.” 대학 다닐 때 이화여고 다니던 동갑내기 아내 서상실씨를 만나 동거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강하게 반대했다. “이대 작곡과나 피아노과를 나온 며느리를 원했어요. (아내가) 고교생이었으니 반대가 심했죠. 집에서 쫓겨났어요.”


‘고졸 가장’은 잡지 편집자 생활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1962년 <자유문학> 편집자로 일하던 시절 ‘이 봄의 미아’란 시로 등단했다. 여성지 <주부생활> 등에서 편집기자로 인정받은 그는 67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했다. 8년 뒤 자유언론운동으로 해직당할 때까지 <신동아> 등 잡지 쪽에서 일했다. 해직 기자들의 거리 투쟁 때 ‘격문시’는 등단 13년차인 그가 도맡았다. 해직 뒤 <미술과 생활> 편집장을 거쳐 엘지의 전신인 럭키금성사의 사보 편집자로 취직했다. “격문시를 써서 그런지 형사들이 럭키금성사 시절에도 한동안 따라다녔어요.” 88년 <한겨레> 창간 때 주주로도 참여했지만, 동아일보에서 해직 당한 뒤엔 돈 주고 신문을 사서 보지는 않는다고 했다. 강제로 쫓겨난 상처가 그만큼 컸다.


시인은 등단 이래 50여년동안 시집 3권을 냈다. 유신 때 펴낸 첫 시집 <한국의 아이>(76)는 판매금지 처분을 당했다. 20년 뒤 <내 마음의 솔밭>(96)을, 2004년엔 <흰 저고리 검정 치마>를 펴냈다. 이번 선집에는 세 시집에서 각 25편을 골랐고, 신작시 25편도 보탰다.


구중서 평론가는 발문에서 “시 ‘한국의 아이’ 한편만으로 황명걸은 불멸의 시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썼다. 이 시엔 “숙부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 외숙이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가지고 노는 돌멩이로/ 미운 놈의 이마빡을 깔 줄 알고/ 정교한 조각을 쫄 줄 알고/ 하나의 성을 쌓아올리도록 하여라”란 표현이 있다. 기성 체제와 권위에 대한 강렬한 저항 의식을 담았다. “65년에 통혁당 사람들이 만든 <청맥>이란 잡지에 이 시를 발표했어요. 내가 객원필자였죠.” 3년 뒤 통혁당 사건이 터졌다. ‘통혁당 핵심’ 김질락은 사형을 당했다. “나도 잡혀갈까 봐 조금 떨었어요.”


시인은 정년 퇴임 뒤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북한강변에 터를 잡았다. 91년이었다. “퇴임 뒤 노름에 빠져 퇴직금과 모아놓은 그림도 팔아먹었죠. 아내의 마음 고생이 심했어요.” 건축가인 아들이 지은 예쁜 집도 화재로 불탔다. 화마를 당한 집을 손봐서 갤러리 카페(무너미)를 냈는데, 대박이 났다고 했다. 예술인의 사랑방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이번엔 ‘무허가 영업’으로 고발돼 경찰서 유치장에 한달간 구금되기도 했다. 그뒤 남한강가인 옥천면 아신리로 옮겨 카페 ‘어린왕자’를 열었다. 역시 아들 작품이었다. 3년 전 사진작가에게 카페를 남겼다. 요즘은 동네 노인정에서 서예 공부를 하는 일 외엔 집 밖 출입을 하지 않는다. 서재 밖으로 남한강 물결이 넘실거리지만 장애가 있어 운동이나 산책은 못한다.

지금도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쓴다. 최근 <양평문학>에 ‘노 시인의 아내’란 시를 발표했다. “집사람에 대한 속죄를 담은 헌시죠.” 서재엔 그의 그림 200여점이 보관돼있다. “2008년에 시화집을 내고 전람회도 한번 했죠. 그뒤에 그린 그림도 전시하고 싶지만 쉽지 않아요. 전시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어요.”


[스크랩 / 한겨레] 글·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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