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가 개막된지 45일만에서야 차기율씨의 '순환의 여행/ 방주와 강목사이 2013'을 관람할 수 있었다.
두 달 간이나 이어지는 장기 전시는 틈이 날 때 가볼 수 있는 이점이 있는 대신 미루다 보면 자칫 놓치기 싶다.
미루고 미루다 지난 주말에야 시간을 내어 조계사 옆에 자리잡은 'OCI미술관'을 찾았다.

전시장 문을 열자 마치 박물관에 들어 선 것 같은 태고의 장엄과 침묵이 느껴졌다.
1,2,3층을 가득메운 웅장한 작품들에 일단은 머리가 숙여졌고, 벽에 걸린 그림들도 너무 좋았다.
부유하는 영혼을 향한다는 작가 의식은 그 다음 문제이고, 방대한 분량의 작업량과 치밀하고 섬세한 손길에 주눅이 들었다.
그리고 선시시대 유적같은 돌 조각이나 나무넝쿨같은 덩어리의 엉킴에도 혼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에 공감이 되고,
작가의 작업 밑바닥에는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미술평론가 고충환씨의 말에 수긍이 됐다.

이 전시는 오는 1월15일까지 전시되니 꼭 한 번 관람하시기 바랍니다.



"서양으로 상징되는 문명과 동양으로 상징되는 자연을 화해시키고 종합(요새 말로 치자면 융합)을 실천한다는 의미이며 의지의 표명이 아닌가.
서양과 동양을 화해시키고 문명과 자연을 융합시킨다? 이렇게 주제를 풀어놓고 보니 불현듯 작가의 작업의 스케일이 보인다.
신이 죽고 형이상학이 죽은, 진리가 죽고 진실이 죽은, 선이 죽고 악이 죽은, 주술이 죽고 신비가 죽은 미시담론의 시대며 표면의 시대
그리고 무미건조한 논리의 형해들이 실재를 대신(대체?)하는 시대에 들려주는 거대담론의 메시지라고나 할까.
그 의미며 울림은 그래서 오히려 더 크게 와 닿는다" -고충환-

 

 

 

 

 

 

 

 

 

 

 

 

 

 

 

 

 

 

 

 

 

 

 

 

 

 

 

 

 


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사이 2013

차기율展 / CHAKIYOUL / 車基律 / mixed media

2013_1120 ▶ 2014_0115

 

월요일 휴관

 

 

 


차기율_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사이_자연목, 음향스피커, 모니터, 스테인리스 스틸_225×52cm×2_2013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0122g | 차기율展으로 갑니다.

차기율 블로그_blog.daum.net/chakiyoul

초대일시 / 2013_1120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수송동 46-15번지Tel. +82.2.734.0440

www.ocimuseum.org


차기율의 작업-방주를 짓고 강목을 짓고 우주를 짓고 존재를 짓다 ● 예외가 없지 않지만 대개 형식논리가 강한 작업에서 주제는 형식적이거나 무의미한 것이어서 작업과 주제와의 연관성이 별로 없는 편이다. 이에 반해 서사가 강한 작업에서 주제는 작업의 의미내용을 압축하거나 상징하는 것이어서 주제가 작업을 확장하고 심화하고 변주한다. 마치 그 자체가 작업의 일부인 양 작업의 능동적인 또 다른 한 축으로서의 의미기능을 도맡고 있는 것이다. 차기율의 경우가 그렇다. ● 부유하는 영혼, 땅의 기억, 사유의 방, 그리고 순환의 여행 - 방주와 강목 사이. 세세한 차이가 없지 않지만, 작가가 그동안 자신의 작업에 붙인 주제들이다. 이 주제들 자체는 각각이지만 사실상 그 이면에서 서로 통한다고 보아야 하고, 상호 유기적인 관계로 보아야 한다. 이 주제들에는 그동안 작가의 의식을 지배했고 그 의식을 작업으로 풀어냈던 계기들이며 단서들이 고스란히 탑재돼 있다. 그렇게 작가의 의식은 부유하는 영혼들을 향한다. 영혼은 산 자들의 몫이 아니고 유기체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영혼은 산 자를 넘어 죽은 자를 향하고, 유기체를 넘어 무기질로 확장되고, 유형의 형태를 넘어 무형의 존재를 아우른다. 부유하는 영혼이란 도처에 편재하는 영혼이며 심지어 무의식마저 파고든 영혼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영혼이다. 이런 연유로 작가는 한갓 돌 속에 혼이 깃들어있다고 생각하고 식물의 혼을 믿는다. 그렇게 작가는 콜로세움의 대리석 조각을 취하고 고비 사막의 사암에 취한다. 심지어 백령도 해변에서 조약돌들이 서로 부닥치면서 내는 가각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면 태초의 아련한 기억이 떠올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식물처럼 뿌리를 내리고, 그렇게 내린 뿌리털을 매개로 존재와 존재가 연결되고 세계와 세계가 연속된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 밑바닥에는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이, 범신론과 물활론이 깊게 뿌리 내리고 있었다. 풍문으로나 떠돌던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숭고의 감정이 고스란히 복원되고 있었다.

 

 


차기율_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사이_포도나무, 자연석, 스테인리스 스틸_가변설치_2011


그렇다면 이처럼 존재와 존재가 연결되고 세계와 세계가 연속되고 주체와 타자가 연장돼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는가. 바로 기억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그 기억은 예사롭지가 않은 기억이다. 아련한 기억이며, 기억할 수 없는 기억이며, 기억의 수면 아래 잠재된 기억이며, 무의식적인 기억이며, 원초적이고 원형적인 기억이며, 땅의 기억이다. 융이라면 집단무의식 내지 원형이라고 했을 것이다. 논리로는 해명되지 않는 끌림이며 이유가 없는 끌림으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그렇다면 땅은 무엇을 기억하는가. 시간을 기억하고, 공간을 기억하고, 역사를 기억한다. 피를 기억하고, 죽음(아님 주검?)을 기억하고, 삶을 기억하고, 존재를 기억하고, 시원을 기억한다. 그 기억용량은 당연히 인간과 인류의 그것을 넘어선다. 작가는 그 기억이 궁금하다. 그래서 땅을 파헤치는데, 선사시대 유적을 발굴하고, 통의동 한옥을 발굴하고, 인천 배다리를 발굴하고, 화성 시 집터를 발굴한다. 그렇게 한국근현대사의 생활사의 한 자락이 복원되고, 작가의 유년시절의 한 모퉁이가 현재 위로 호출된다. 모든 발굴은 흔적을 향한다. 발굴이란 곧 삶과 죽음의 흔적을 발굴한다는 것이며, 존재와 시원의 흔적을 발굴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땅을 발굴하는 작가의 행위는 땅이 기억하고 있을 존재의 흔적을, 자기가 존재하는 근거를, 존재의 원형을 발굴한다는 것이다. ● 그렇게 발굴되고 복원된 존재의 흔적이며 아득한 시원으로부터 작가에게까지 이식되어졌을 존재의 원형과 대면한 자기가 이전의 자기와 같을 수는 없는 일이다. 무슨 말인가. 작가는 작업을 사유의 방이며 장으로 본다. 존재가 거듭나고 재설정되고 재부팅되는 계기로 본다. 작가에게 작업이란 곧 사유를 의미하며, 그 사유에 의해서 존재가 거듭나지는 계기이며 실천의 장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실천의 계기가 존재의 시원이며 원형을 향하는 것에, 그 원형이 현재 위로 호출돼 존재를 송두리째 바꿔놓는 것에 작가의 작업의 특이성이 있다. 그렇게 존재가 바뀌지 않으면 작업도 작업이 아니다. ● 그리고 그렇게 이른 주제가 순환의 여행 - 방주와 강목 사이이다. 그동안 경유했던 주제들, 이를테면 부유하는 영혼, 땅의 기억, 그리고 사유의 방에 연이어 최종적으로 정박된 의미론적 지점이다. 최종적으로 정박된 지점이라고는 했지만 작업에 최종이 따로 있을 수가 없듯 일정하게는 임의적일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동안 작가의 작업을 아우르는 종합의 계기 내지 분기점으로 볼 수는 있겠다.

 

 


차기율_고고학적 풍경-불의 만다라_소성된 갯벌, 철_1000×300×30cm_2013


주제도 그렇지만 작가는 작업을 여행으로 본다. 그리고 알다시피 여행은 길이며 연극과 함께 가장 널리 알려진 삶의 메타포이다. 삶은 말하자면 자기를 찾아나서는 길 위에서의 여정이며, 그 길이라는 무대 위에서 상연되는 한 편의 연극과도 같다. 여기서 자기를 찾아나서는 여로에 의미론적인 방점이 찍힌다. 자기를 찾아나서는? 자기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찾아지는 것이다. 진정한 자기며 자아, 주체며 에고는 그 실체가 있는 것인가 아님 그저 허무맹랑한 의식의 착시현상에 지나지 않은 것인가. 불교에서의 진아는 무엇이며, 의식을 제로지점에다 설정하는 현상학적 에포케는 또한 무슨 의미인가(현상학에서 나의 실체는 추상된 의식이며 관념화된 의식이 아닌 지각된 의식의 소산으로 본다). 여하튼 그렇게 작가는 작업을 매개로 자기를 찾아 나선다. 그 여정에서 작가는 돌을 만나고, 식물을 대면하고, 선사와 시원과 존재의 흔적과 조우한다. 시공간적으로 작가를 초월해 있으면서 작가의 일부로서 이식된 것들이며, 작가가 분유된 성분들이다. 작가를 초월해 있으면서 작가가 분유된? 그래서 원형이다. 그 원형은 아득한 그리움으로 작가를 기다렸었고, 알 수 없는 끌림으로 작가를 유인했었고, 그리고 그렇게 작가 이전에 이미 작가를 예정했었다. ● 이처럼 작가는 여행을 하는데, 그 여행은 매번 자기에게로 되돌려지는 여행이고, 자기반성적인 여정이며, 자기라는 폐곡선 위를 따라 걷는 순환하는 과정이었다. 이처럼 순환하는 여행에는 범위며 스펙트럼이 있는데, 방주와 강목 사이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그 범위며 스펙트럼은 동시에 자기의 범위이며 스펙트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차기율이란 오디세이의 스펙트럼 상의 양 극에 해당하는 방주와 강목은 무슨 의미인가. 방주는 대홍수 이후 살아남은 노아의 방주를 의미하고 서양문명을 상징한다. 그리고 강목은 나무와 풀과 같은 한방에서 약초나 약재로 쓰이는 각종 식물의 대강(大綱)과 세목(細目)을 밝힌 서책인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따온 것으로서 동양사상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이처럼 서양의 문명과 동양의 사상을 오디세이의 양 극으로 세팅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 각각 서양으로 상징되는 문명과 동양으로 상징되는 자연을 화해시키고 종합(요새 말로 치자면 융합)을 실천한다는 의미이며 의지의 표명이 아닌가. 서양과 동양을 화해시키고 문명과 자연을 융합시킨다? 이렇게 주제를 풀어놓고 보니 불현듯 작가의 작업의 스케일이 보인다. 신이 죽고 형이상학이 죽은, 진리가 죽고 진실이 죽은, 선이 죽고 악이 죽은, 주술이 죽고 신비가 죽은 미시담론의 시대며 표면의 시대 그리고 무미건조한 논리의 형해들이 실재를 대신(대체?)하는 시대에 들려주는 거대담론의 메시지라고나 할까. 그 의미며 울림은 그래서 오히려 더 크게 와 닿는다.

 

 


차기율_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사이_드랄루민, 책, 자연석_25×210.5×12cm_2013


그렇게 작가는 방주를 짓는다. 방주와 강목으로 설정된 주제로 볼 때 일정하게는 작가의 모든 작업이 방주를 짓고 강목을 짓는(실천하는?) 행위일 수 있다. 실재하는 방주며 강목이라기보다는 작가의 신화적 주체며 인문학적 주체를 지지하는 관념적 실체일 수 있다. 그런 만큼 그 꼴이 감각적 실재를 닮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서도 얼추 비정형의 유선형으로 나타난 조형물의 구조가, 그리고 바다에 떠 있었을 노아의 방주처럼 허공에 매달린 조형물의 전시 행태가 방주의 감각적 실재를 닮았다. ● 작가는 주로 포도나무 줄기를 소재로서 취하는데, 다른 나무들에 비해 뒤틀림이 강해 마치 근육과도 같은 유기체의 본성을 떠올려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포도나무 줄기를 취해와 끓는 물에 삶아 그 껍질을 일일이 벗겨낸 연후에, 그 토막들을 연이어 조립하는 방법으로써 거대한 구조물을 만든다. 전체적으로 유선형을 그리면서 세로나 가로로 길게 설치된 그 구조물은 마구 얽히고설킨 덩굴나무를 연상시키고, 비정형의 유기체적 다발이나 덩어리를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렇게 구조물이 만들어지고 나면, 그 줄기의 표면에 주로 본초강목에서 인용한 자연과 관련한 한문자들이 붓글씨로 기입된다. 여기서 한문자들은 나무줄기로 표상된 유기체적 신체에 직접 작용하는 치유력과 주술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때로 구조물의 표면을 마치 불에 탄 숯처럼 검게 칠하기도 하는데, 마찬가지로 숯의 치유력과 재생능력을 의미할 것이다. 이처럼 검게 칠해진 구조물에서도 여전히 그 밑에 한문자가 잠재적인 형태로 기입된 것으로 보아야 하고, 따라서 자연으로부터 유래한 능력들, 이를테면 자연치유력이며 주술작용 그리고 재생능력이 함축된 경우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구조물은 방주와 강목을 한 몸에 아우르고 있었다.

 

 


차기율_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사이_자연목, 스테인리스 스틸_28×230×53cm_2013


흥미로운 것은 이 거대한 구조물이 마구 얽혀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의 고리로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마치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합체된 것 같은 이 구조물에서 역동성과 정치함이, 우연한 계획으로 나타난 이율배반적인 역학이 작동되고 있음을 알겠다. 뫼비우스의 띠란 알다시피 하나의 거대한 순환하는 고리이다. 뒤틀리고 비틀린 고리의 몸체를 따라 생과 사가 흐르고 삶과 죽음이 만나지기를 무한 반복하는, 그리고 그렇게 무한 순환하는 존재의 표상이다. 그렇게 무한 순환하는 뫼비우스의 띠 중간 중간에 작가는 납작한 조약돌을 장착해놓고 있다. 조약돌의 가운데를 뚫어 그 구멍 사이로 나무줄기가 관통하게 한 것인데, 반복의 마디 같고, 순환의 마디 같고, 윤회의 마디 같다. 무한 반복 속에 마디가 있고, 무한 순환 속에 경계가 있고, 무한 윤회 속에 분기점의 계기가 있다. 그렇게 억겁의 시간동안 축적된 존재가 호출되고, 억겁의 시간을 넘어 존재가 복원된다. 존재가 아닌 존재들이라고 해야 할까. 하나(一)이면서 다(多)인. 그렇게 마디가 있으면서 무한 순환하는 고리로부터 불현듯 질 들뢰즈의 주름이며 고원이며 뿌리(리좀)가 오롯이 복원되고 있었다. 특히 뿌리와 관련해선 서두에서도 말한 것이지만, 작가의 모든 작업엔 뿌리가 있다. 뿌리가 없는 경우에도 사실상 뿌리가 암시되고 있다. 이처럼 직접적이고 암시적인 뿌리를 매개로 생과 사가 연장될 수 있었고, 아(我)로부터 타(他)에로의 탈주를 감행할 수 있었고, 결정태로부터 가능태로의 이행이 가능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무한순환고리는 생과 사를, 아와 타를, 결정과 비결정의 계기를 한 아름에 싸안고 있었다. ●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를 형상화해놓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작가에게 방주란 말하자면 우주였고 만다라(우주를 도해한)였다. 그리고 그 우주가 세상을 바라본다. 무슨 말인가. 작가는 매달린 구조물 밑에 이런저런 장치들을 보조하는데, 바닥에다 파문을 그린다. 여기서 파문은 기며 에너지를 표상한다. 그렇게 각각 나와 너로부터 발원한 에너지는 파문을 그리며 퍼져나가 너에게 가닿고 나에게 미친다. 뿌리도 그렇지만, 불교의 연기설을 표상한 경우로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작가는 이와는 또 다른 버전에서 전시장 바닥에다 검은 물이 가득 담긴 바트(수조)를 설치한다. 그리고 바트 속에다 돌들(존재의 섬들)을 설치하고, 종교적인 도상이며 이데올로기의 표상들(이념과 역사 아님 이념의 역사)을 설치하고, 생활 오브제들(생활사)을 설치한다. 그대로 삶이며 세상사를 재현해놓은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이렇게 재현된 세상을 허공에 매달린 우주가 바라본다. 흑경처럼 반영하는 성질로 인해 세상은 세상대로 우주(바트에 담긴 우주의 반영상이며 이미지)를 바라본다. 그렇게 우주는 세상을 그리고 세상은 우주를 반영한다. 특히 바트에 담긴 돌들은 존재를 표상하고 존재의 섬들을 표상한다. 존재의 섬들 각각은 고립돼 있지만, 보이지 않는 파문으로 서로 연결된다. 가시적인 파문이 비가시적인 파문의 형태로 재차 변주되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나는 너에게 가닿고 너는 나에게 미친다. 가닿는다는 것 그리고 미친다는 것은 서로 반영하고 반영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무한 반복되고 무한 순환된다. 재차, 불교의 인드라망(서로 반영하고 반영되는 밑도 끝도 없이 연이어진 구슬그물)이 실현되고 있는 경우로 봐도 되겠다.

 

 


차기율_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사이_종이에 콘테, 오일컬러_100×70cm_2011


이처럼 작가가 방주를 짓고 우주를 짓고 작업을 짓는 동안 자연은 자연대로 집을 짓는다. 무슨 말이냐면, 작가가 인천 강화 작업실로 옮긴 이후 제작된 신작 이야기다. 알다시피 강화도는 서해에 위치해있고, 서해는 조수간만의 차이가 큰 편이라 광활한 갯벌이 조성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렇게 물이 빠지면 게들이 갯벌에 집을 짓는데, 갯벌 위로 흙을 퍼내 생긴 구멍 주변으로 일종의 방벽을 쌓는다. 이때 큰 집게손으로 흙을 돌돌 말아 밀어 올리는데, 그 흙 알갱이가 무슨 벽돌 같다. 해서, 게들이 집을 지을 때면 갯벌은 온통 게들이 만든 구멍과 방벽들로 장관을 이루는데 그 자체가 흡사 갯벌에 난 숨구멍 같다. 흔히 숨 쉬는 갯벌이니 정화하는 갯벌이라는 말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님을 알겠다. 그러나 이렇듯 어렵사리 지은 집들은 잠시잠간 동안만 집 구실을 하는데, 다시 물이 들어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기 전까지만 유효하다. 이처럼 매번 일시적인 집을 위해 노고를 마다하지 않는 게의 본성(?)이 놀랍고 경이롭다. 사람으로 치자면 애써 그린 그림을 어떠한 미련도 없이 지워 없애는, 그리고 그렇게 허상과 이미지의 무상함을 실천해 보이는 티베트 승들의 모래 만다라에나 견줄 수가 있을까. 사람은 불심(?)을 깨쳐서 얻지만, 자연은 미처 깨칠 일도 없이 저절로 획득하고 있었다고나 할까. ● 작가는 그 게가 예쁘고 그 집이 경이롭다. 그래서 그 집 그대로를 떠내기로 했다. 하지만 이 일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테면 모종삽 같은 도구를 이용해 게집 주변으로 사각을 찔러 넣어 집 그대로를 떠내야 하는데, 이때 집의 원형 그대로를 보존할 수 있을 만큼 흙이 적절하게 굳어 있어야 한다. 평소 때는 그렇게 굳지도 않을뿐더러, 적당하게 굳었을 때에도 여차하면 타임을 놓치기가 쉽다. 조수간만의 차이에 대한, 물이 가장 많이 그리고 멀리 빠질 때(간조와 사리)에 대한, 물이 들고나는 때에 대한 평소 세심한 관찰과 이해가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작가는 이렇듯 오랜 기다림과 지난한 과정을 거쳐 떠낸 게집들을 자연 상태 그대로 소성하는데, 대개는 락꾸소성이나 노천소성의 과정을 거친다. 이렇게 작가는 게가 만든 집을 모나드 삼아 또 다른 집(작업)을 짓는다. 이를 통해 작가는 아마도 숨 쉬는 자연이며 자연의 숨구멍을 조형하고 싶었을 것이다.

 

 


차기율_돌의 혼_자연석, 철, 드로잉과 나무_30cm, 30×21cm(액자)_2013


아트의 어원을 보면, 원래 아르스(ars)보다는 테크네(techne)라는 말이 먼저 있었다. 그리고 테크네는 이런저런 일을 해내는 능력을 의미했고, 원래 거미나 개미 그리고 벌이 집 짓는 것에서 착상되었다고 한다. 그 의미가 독일어 빌덴(bilden)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처럼 조형은 무엇보다도 집을 짓는 행위와 관련이 깊다. 그러므로 방주를 짓고 강목을 짓고 우주를 짓고 작업을 짓는, 그리고 종래에는 자연이 지은 집을 원형 그대로 가져다가 자신만의 또 다른 집을 짓는 작가의 작업은 어쩌면 작업의 수위를 조형의 원천으로 소급시키는 행위일 수 있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조형의 근본에 대해서, 조형의 이유에 대해서, 조형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서, 자연에 조형이 개입해 들어가 원형 그대로를 보존하면서 자연을 변형시키는 과정과 방법과 태도와 입장에 대해서 심각하게 재고하게끔 유도한다. 그렇게 반쯤은 자연이 조형하고 생성시킨 유기체를 떠올리게 하고, 자연의 본성에 존재의 본성을 합치시키는 미덕이 있고 겸허함이 있다. ■ 고충환

Vol.20131120i | 차기율展 / CHAKIYOUL / 車基律 / mixed media


인천대학교 조형예술학부 서양화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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