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팔이, 희망고문

[신동아 스크랩]

정윤수:문화평론가

미래를 계획할 수 없는, 삶의 서사가 붕괴한 시대를 사는 우리는 추억과 낭만을 되새김질한다.
조로한 1990년대 세대마저 “응답하라”고 외치면서 애틋한 옛 기억만 뒤적거린다.
아무래도 ‘힐링’은 이런 차가운 계절과는 무관한 일인 듯싶다.

 

 

 

 

바쁘게 돌아가는 도심의 일상이지만, 어쩌다가 갑자기 시간이 텅 비어버리는, 그런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잠시 당황하지만, 곧 수습하면서 아, 이건 시간의 신이 특별히 내려주신 선물이다, 그렇게 마음을 먹는다.

11월의 마지막 주 어느 날이 그랬다. 작업실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의 약속을 위해 나갔으나 그만 어떤 이의 사정으로 한 주 미뤄지게 됐다. 조금만 일찍 연락이 닿았더라면 굳이 작업실을 벗어날 까닭은 없었는데, 이미 나는 인사동에 나와버렸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저녁 약속은 8시 시청 앞. 그 사이의 7시간이 갑자기 주어졌다.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나야만 하는 약속이 아닌 바에야 그저 혼자 배회하는 습관을 유지할 뿐 한 줌의 시간이 생겼다 해서 누군가를 불러 허튼 소리나 주고받는 일을 극도로 경계해왔으므로 나는 곧 휴대전화를 진동 모드로 바꿔놓고는 광화문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는 식민지였던가. 우선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인사동 사거리에서 광화문 쪽으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언덕길, 오른편으로 높고 길고 둔중한 담장이 꽤 지속되었다.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 부지였는데, 어느 기업이 우여곡절 끝에 매입했고 바로 이 자리에 호텔을 짓는다는 보도가 있었다.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전통의 명문 학교들이 터를 잡고 있어서 관광객 유치가 목적인 호텔이 이 자리에 들어설 수 있겠는가 하는 비판 여론 또한 들어서 알고 있다.

길고 높고 둔중한 담장이 가리고 있던 터를 상상하니, 외국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제3세계 어딘가에서 긴급 사태가 발생하는데, 그래도 그곳의 현지 미국대사관이나 관련 시설은 안전지대가 되는, 그런 영화를 생각하니, 이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 부지야말로 꼭 그런 지점에 꼭 그런 형상의 담장으로 둘러쳐진 외지의 영토 같았다. 실제로는 얼마 되지 않는 거리지만 길고 높고 아득한 담장 때문에 한참이나 걷는 느낌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시대정신이 사라진 시대

 

이윽고 광화문이 보이고, 동십자각 근처에 다다랐는데, 내 발걸음은 갑자기 우회전해 한참을 더 올라갔다. 수십 년 동안 한국 미술계와 문화계의 숙원이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개관했으니, 갑자기 텅 빈 이 시간이야말로 그곳을 둘러보기에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쌀쌀하고 흐린 평일 오후임에도 꽤 많은 관람객이 모여들어 있었다. 주말이면 더 많은 인파가 몰릴 것이다. 도심에 새로 뭔가가 생기면 사람들이 몰려온다. 누군가는 그런 풍경을 못마땅해하는데, 무엇인가가 새로 생겨서 사람들이 아이들 손잡고 몰려가는 일이야말로 간절하고 애틋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랴. 야박하게 살아오는 동안 무엇인가를 구경하고 아이들에게 설명하고 귀갓길에 밥이라도 함께 먹는, 그런 풍경에조차 우리는 너무 소홀했던 것은 아닐까.

전시회는, 일단 ‘서울관’이 아니라 ‘서울대관’ 같았다. 개관 기념 전시인 ‘자이트가이스트-시대정신’전의 참여 작가 38명 중 27명이 서울대 미대 출신이었다. 하아, 역시 이 나라는 예술에서도 얼어 죽을 서울대의 나라구나, 이런 푸념이 절로 드는 구성이었다. 그런데 더 문제는 ‘서울대 동문전’ 같은 인적 구성이 아니라 ‘시대정신’이라는 주제 아래 전시된 작품들로부터 팽팽한 ‘시대정신’을 느끼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까짓 서울대면 어떠랴, 기획 의도에 맞게 작품이라도 시대의 정신을 제대로 반영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듣자 하니 조금 세게 ‘시대정신’을 추구한 몇몇 작품은 제외됐다는 얘기도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서 설치미술작가 장영혜의 작품을 한참 본 후 미술관 바깥으로 나와서 배회했다. 승용차 없이는 엄두도 못 낼, 평일에는 도저히 갈 수가 없는 저 청계산 깊은 곳의 미술관에 비한다면, 어찌 됐든 한국의 미술계와 시민들은 큰 선물을 받은 셈이기는 하다. 큼직하게 구획 정리를 하고 동선을 안쪽 깊이 자연스럽게 유도하기도 해서, 보행로가 서너 배 넓어진 효과까지 있다. 나는 드넓은 창가에 앉아 쌀쌀한 바람이 스쳐지나가는 중정을 보면서 앉아 있었다.

 

마담 보바리의 ‘자기愛’

 

갑자기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가 생각났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시골 오지에서 벗어나려는 소녀 엠마, 읍내 최고 신랑감인 의사 샤를 보바리와 혼인하지만, 기존의 관습과 도덕의 억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몸부림친다. 몸부림 끝에 결국 비소를 먹고 자살한다. 마음의 통증이 심했다.

1856년 4월 탈고된 이 소설은 1815년 빈 체제가 성립된 이후의 유럽 시민의 일상 문화를 잘 묘사하고 있다. 엠마 보바리는 여성지를 탐독한다. ‘라 코르베유’와 ‘살롱의 요정’. 각종 공연물의 개봉일자와 경마, 야회, 여가수의 데뷔, 매장 오픈 등을 샅샅이 읽는다. 으젠 쉬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 안에 묘사된 실내 가구를 메모했고, 오노레 드 발자크나 조르주 상드의 소설을 읽으면서 작품 속 여주인공과 자신의 일상을 겹쳐 상상한다. 그런 ‘잡다한 독서’를 통해 영혼의 깊은 곳에서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기를 기다린다. 이윽고 법학도 레옹이 나타난다. ‘통증’이 심한 엠마는 말한다.

“바닷가에 지는 저녁놀처럼 멋진 것은 없어요.”

그러자 레옹이 작업을 건다.

“호수의 시적인 아름다움과 폭포의 매력과 거대한 빙하의 맛은 이루 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랍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소나무들이 급류를 가로질러 무성하고, 천애절벽에 걸려 있는 듯한 오두막집들에다, 구름이 반쯤 열려지기라도 하면 발아래 천 길 밑으로 골짜기가 완전히 보이기도 한답니다. 이러한 풍경은 틀림없이 우리를 열광시킬 것이고, 기도의 세계나 법열의 세계로 들어가게 해줄 겁니다. 그러니 나는 유명한 음악가가 상상력을 더 잘 북돋우기 위해서 늘 장엄한 경치를 앞에 하고, 피아노를 치러 그런 곳에 가는 것을 조금도 놀랍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나는, 주변의 사람들이 다들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평일의 카페에서 잡지를 읽으며 대화를 나누는 시민들, 최신 유행을 서둘러 받아들이는 시민들, 정치적 억압을 피해 내면의 자유를 찾으려는 시민들, ‘영혼의 사건’을 위해 방황하는 시민들. 2013년 한국의 도시 일상에서 흔히 보게 되는, 칙릿 소설에서, 혹은 홍대 앞 힙스터 문화에서, 혹은 민음사 창고 세일이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매표소 앞에 길게 줄지어 서는 마음의 풍경들 말이다.

 

‘아늑한 평화’를 소망하다

 

미술관을 나와서 시내로 걸어 나가는데, 자연스레 광화문 앞으로 걷게 됐다. 원래는 광화문 앞을 스쳐 지나서 세종문화회관 쪽으로 가서 다리 쉼을 할 생각이었다. 광화문을 등지고 볼 때, 비록 정부종합청사와 세종문화회관이 압도적인 스케일을 갖고는 있지만, 그래도 반대편의 둔중한 건물들에 비해서는 마음이 놓인다. 그 뒤편의 골목들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광화문 앞에서 진행되는 수문장 이벤트 때문에 걸음이 멈췄고 어느새 나는 경복궁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정확한 역사적 고증에 따른 재현이라기보다는 서유럽의 근대 국가주의적 근위 열병식을 옮겨놓은 듯한 이벤트였지만, 많은 사람이 둘러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구경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이 열기는 무엇일까. 왜 역사적 고증이 아니라 문화적 이벤트에 이토록 집중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경복궁으로 들어섰는데, 아! 자연스레 마음속에서 탄성이 나왔다. 근정문을 지나 근정전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야말로 시간이 멈춰버린 느낌이었다. 꽤 많은 사람이, 게다가 중국이며 베트남이며 일본에서 온 관광객들이 깃발을 따라 몰려다니는 상황이었음에도, 흡사 왕자웨이 감독의 영화 한 장면처럼 몰려다니는 관광객들은 그저 바람처럼 스칠 뿐이고 내 앞에는 장엄한 근정전이 갑자기 쑥 솟아오른 듯 서 있었다.

 

경북궁 근정정

 

경복궁에서 바라본 광화문 빌딩 숲.

 

이미 시간은 네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꽤 넓은 경복궁이기에 남은 시간 동안 뭐라도 본다고 하면 빠른 걸음으로 돌아다녀야 할 형편이었다. 나는 경복궁 전체는 포기했다. 서울 한복판이니 언제든 다시 오기 쉬운 곳이다. 대신 근정전 하나만 목표로 했다. 멀리서, 가까이에서, 오른쪽에서, 왼쪽에서, 오른편에서, 다시 앞에서 그렇게 각도를 달리해 근정전만 한 시간이 넘도록 보고 또 보았다.

초겨울이지만 다행히 따스한 기운을 담은 햇살이 전의 내부로 스며들어 있었다. 노르스름한 겨울 햇살이 견고하게 시간을 머금고 있는 전의 내부를 쓰다듬으면서 조금씩 사위어갔다. 꽤 많은 사람이 저물어가는 시간을 아쉬워하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나는, 다시, 근정전을 구경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1815년 수립된 빈 체제는 프랑스혁명 이전의 왕정을 복위시키고 프랑스의 정복지들을 강대국들이 분할해 차지함으로써 유럽 사회의 모든 질서를 혁명 이전으로 돌려놓았다. 메테르니히가 주도한 1815년 이후의 이 경찰국가 시기를 문화사에서는 ‘비더마이어’라고 한다.

혁명의 시대 이후, 나폴레옹 시대 이후, 왕정복고 이후, 유럽 시민들은 거리의 소문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거실과 카페의 교양 있는 중산층이 되려고 했다. 가정 음악회, 편지 쓰기, 취미용품 수집, 시낭송 등이 유행했다. 카를 슈피츠베크, 에드윈 랜드시어 등은 그 시대의 ‘아늑한 평화’를 보여준다. 화면 속의 인물들은 정원을 가꾸고 거실 인테리어를 바꾸고, 강아지를 기른다. 세상은 바꾸지 못했지만 거실은 바꾼다? 세상은 내 맘대로 되지 않지만 강아지는 내 마음을 알아준다?

 

혁명은 간 데 없고…

 

김수영은 혁명은 되지 않고 방만 바꿔버렸다고 썼다. 그는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 옹졸하게 욕을 하고” 그렇게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 자신을 질책했다.

사실 너무 오랫동안 피의 시대를 살았다. 왕의 목을 자르며 시작한 시민혁명, 기요틴의 칼날 밑에서 벌어지는 공포정치의 음모와 배신, ‘칼을 든 프랑스 혁명아’ 나폴레옹의 등장과 기나긴 전쟁, 그리고 1815년 왕정복고. 이 30년 가까운 세월은, 그 첫 문턱에 성장해 청년기를 보낸 40대 이후의 시민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게다가 경찰국가라니? 혹은 왕의 귀환? 그래서 그들은 음악, 연극, 가정음악회 등 조촐한 가족 중심 생활에 만족하기 시작했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아담한 거실이나 카페에 모여 술 한잔과 음악을 즐기는 일상에 몰입했다.

권선형의 ‘우수에 근거한 명랑성’에 따르면, 비더마이어는, 진부한 시민문화를 비판하기 위해 부정적 의미에서 착안됐으나 곧 “가정적인 작은 영역을 중시하면서 자기만족에 조용히 살아가는 인간 유형”으로 이해됐다. 19세기 중엽, 특히 독일의 ‘청년독일파’가 현실에 대한 강렬한 응전을 도모한 것과 달리 비더마이어 작가들은 “개인적인 작은 공간”에 머물고자 했다. “내면적인 힘, 소박함, 운명에 대한 말없는 순종, 작은 행복” 등이 주제가 됐고 ‘작고 귀여운’‘상냥한’‘부드러운’‘온화한’ 같은 단어들이 유행했다.

그들은 위로받고 싶었다. 이 강렬한 ‘자기에 대한 배려’! 낭만주의의 수세적 에토스가 내장된 감성이다. 고독 속에서 자신의 정신적 자율성과 예술적 자율성을 동시에 확보하고자 했던 정념들! 이를테면 결벽에 가까운 슈베르트와 그 친구들의 내면 집착과 유미주의는 외부로부터 차단된 하나의 영역, 즉 그 어떤 강제나 억압도 없이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영역을 지키고자 했다.

여기 또 하나의 유류품이 있다. 제인 오스틴의 ‘센스 앤 센서빌리티’. 언니 엘리너가 동생 매리앤에게 말한다. “그이가 그림을 직접 그리지 않는 건 사실이야. 그렇지만 다른 이들이 그리는 걸 보길 아주 좋아해. 그리고 키울 기회가 없었다 뿐이지 소질은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고.” 그래도 매리앤이 걱정하자 덧붙인다. “그이와 나는 긴 시간을 보내게 된 적이 가끔 있었어. 그이를 볼 만큼 봤고, 감정을 면밀히 살폈지.”

 

 

“실은 네 잘못이야”

 

감정을 살핀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기의 솔직한 ‘감정’을 말한다. “말로 표현하기보다는 내 감정이 더 강하다고 믿으렴. 요컨대, 내 감정이란, 그이의 장점이라든지 그이도 나를 사랑할 것이라는 짐작, 아니 희망에 비추어보아서 내가 그렇게 느껴도 괜찮겠다, 주제넘지도 어리석지도 않겠다 할 그런 감정이야.” 그리고 어떤 일로 인해 서식스의 노어랜드 파크를 떠나게 된다.

서구의 근대가 막스 베버가 말한 ‘청교도 윤리’뿐만 아니라 ‘자기 환상적 쾌락주의’에 의해 견인됐다고 주장하는, 이를 ‘낭만주의 윤리와 근대 소비주의 정신’을 통해 증명하는 콜린 캠벨은 노어랜드 파크를 떠나며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표현하는 아래 대목을 특정해 “감상주의의 현저한 특징인 자의식적 반응 및 과도한 감정주의의 특성이 명백하게 드러난다”고 말한다. 자, 매리앤이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토로한다.

“정든 나무들아! 너희들은 늘 그대로일 거야. 우리가 가버린다고 잎이 시들지도 않을 거고, 우리가 너희들을 더 이상 안 본다고 해서 가지가 살랑대지 않을 리도 없겠지! 그래, 너희들은 꼭 같을 거야, 너희들로 인해 생긴 기쁨도 슬픔도 모른 채, 너희들의 그늘 아래 걷는 사람들에게 생긴 변화도 모른 채! 그러나 누가 남아 너희들을 즐길까?”(제인 오스틴, ‘이성과 감성’, 윤지관 역, 민음사, 41쪽)

경복궁을 나와 세종로를 따라 걸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지금 우리는 열정이 노동이 되어버린 참담한 전황 보고서를 자주 접하고 있다. 세계적 차원의 모순, 그것의 한국적 치명상, 그에 따른 청년 실업과 각종 사회문제의 폭발은 우리 모두가 들어서 알고 겪어서 알고 있다. 노정태, 박권일, 한윤형, 최태섭 등의 전황 분석 보고서와 최규석, 김수박, 이말년, 마영신 등의 그림 작업과 김홍중, 서동진, 심보선, 김수환 등의 심미적 성찰과 박민규, 김애란, 편혜영 등의 작품들은 오늘의 삶이 ‘쉼없는 수색 정찰’(지그문트 바우만)의 상황이며 “날개를 활짝 펴고 세상을 자유롭게”(윤도현, ‘나비’) 날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런 조건에서도 자기계발서들은 또 얼마나 많이 팔렸단 말인가. 지난 1980년대의 비릿한 약속어음들, 김형석, 안병욱, 유안진, 신달자, 황필호 같은 저자들의 무책임한 말들의 뒤집힌 거울상이 홍정욱, 김난도, 김미경이다. 부분적으로 안철수와 박경철도 있다. “네 잘못이 아니란다”는 달콤하지만 부질없는 말들. 그러나 읽고 나면 “실은 네 잘못이야. 넌 열정이 부족했어, 미안하지만, 넌 살 수가 없구나. 나가는 문은 저쪽이란다.” 이런 식이다.

불안이 쉼 없이 유동하는 세계를 뛰어넘기 위해 바우만은 시시포스의 삶이 아닌 프로메테우스의 삶을 살자고 주장한다. 자기 자신의 그 비참한 고통에 압도당해 날마다 바위를 굴리는 시시포스가 아니라 “타인들을 위한 삶을, 곧 그 타인들의 비참한 고통에 맞서 반항하는 삶을 선택”하는 프로메테우스가 되자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속물과 잉여

 

김수환과 서명선에 따르면 프로메테우스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아니, 쉽지 않은 게 아니라 또 하나의 ‘계몽’이다. ‘계몽’은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에게 지루한 설교일 뿐이다. 게다가 타깃을 특정하지 않고 구조만 언급하는 비판은, 가장 쉬운 비판일 뿐이다.

김수환은 ‘웹툰에 나타난 감성구조’(백욱인 편, ‘속물과 잉여’ 재수록, 154~155쪽)에서 “현대의 삶이란 한마디로 서사적 삶(narrative life) 자체가 파괴되어버린 시대다. 미래를 계획하고 삶을 준비할 수 없는 시대, 그것은 삶의 서사가 붕괴돼버린 시대”라고 말한다. 이는 ‘단지 서사의 불가능성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서사에 대한 관심 자체를 상실해버린 새로운 세대’의 징후다.

같은 맥락에서 서명선은 ”노예 사이클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20대는 지금의 사이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사이클에서 벗어날 방법은 일단 자신이 노예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지겨운 곳에서 탈출하는 것인데, 20대가 살아온 맥락상 그건 거의 ‘미션 임파서블’”이라고 말한다(서명선, ‘그들은 관찰한 것인가. 관찰된 것일까’, 레디앙, 2009년, 234쪽). 일단, 이런 인식은 출발점이 된다.

2009년 ‘마음의 사회학’(김홍중, 문학동네)과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서동진, 돌베개)를 시작으로 2010년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엄기호, 푸른숲), ‘잉여의 시선으로 본 공공성의 인문학’(구미정 외, 이파르), 2013년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한윤형 외 지음, 어크로스), ‘잉여사회’(최태섭,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속물과 잉여’(백욱인 편, 지식공작소) 등이 출간됐다.

 

추억, 낭만을 간질이는 덕수궁길의 현수막.


 

이들은 각기 다르지만 ‘속물과 잉여’가 대표적으로 그러하듯이, ‘진정성의 시대가 가고 속물의 시대가 왔다’‘속물의 시대가 가고 잉여의 시대가 왔다’‘애비는 속물이 되었고 그 자식은 잉여가 되었다’는 식의 세대론적 비판을 경계한다.

심보선과 김홍중의 ‘87년 이후 스노비즘의 계보학’(문학동네, 2008년 봄)에 따르면 “자기애적으로 확장되고 부유해진 자아의 존재론적 빈곤을 채울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 바로 문화적 스노비즘과 이를 물질적으로 지원했던 소비문화사업”이었다. 이 문화적 스놉은 이를테면 “인문학적 교양과 속류지식, 예술과 대중문화를 넘나들며 ‘자기다운’ 라이프스타일의 자양분을 흡수”하는 세련된 키치 양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추억과 낭만을 되새김질한다. 아, 벨 에포크! 진짜 좋았던 옛 시절이 과연 있었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1980년대의 집합적 열정이나 그 시절의 언더그라운드 음악 문화에 대한 수사적 기록이 쏟아진다. 그리고 이제는 ‘회고’의 세대로 조로해버린 1990년대 세대마저 ‘응답하라’고 외치면서 추억이 방울방울 맺힌 옛 책갈피를 뒤적거린다. 과거의 기억을 말갛게 정제해 그중 애틋하고 깔끔한 기억만을 더듬어 추억상자 속에 넣어뒀다가 예민해지고 쓸쓸할 때면 꺼내서 살펴보는, 수많은 엠마 보바리의 ‘자기애’가 지금 재현되고 있다.

걷다보니, 대한문 앞이다. 2013년 현재, 대한문 앞은 한국 사회의 모든 긴장과 욕망이 충돌하는 장소가 됐다. 쌍용차 사태의 해결을 바라는 집회, 그것에 반대하는 집회, 충돌을 막으려는 경찰, 기이하게 조성된 화단, 사람 대신 화단을 지키는 경찰, 바쁘게 오가는 직장인들, 고궁을 구경하러 온 관광객들, 그리고 갑자기 북소리가 울리며 수문장 교대식까지 펼쳐지면 대한문 앞은 가히 근현대사가 평면으로 압축된 ‘포스트모던’의 공간처럼 바뀐다.

 

“모두 다 속물을 만들어라”

 

나는 정동길로 접어든다. 김수영이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고 토로한, 그래서 결국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난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고 자책한 곳이 어쩌면 이 길 어디쯤일지도 모른다. 겨울이라서 그런가, 아무래도 ‘힐링’은 이런 차가운 계절과는 무관한 일인 듯싶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말하고도 싶다. 가령 말이다. 그래 좋다, 속물성의 극한을 보여주마. 만랩의 잉여력을 보여주마. 오프사이드를 두려워하지 않는 골게터의 숙명을 보여주마. 어쩌면 우리는 지나치게 계몽적이라서 제대로 ‘속물’이 되어보지도 못하는 것은 아닐까. ‘자기계발’이라는 집단 사기극과 낭만이나 추억을 소비하는 감성팔이와 가당치도 않은 희망고문이야말로 진정한 속물성의 적들이 아니고 무엇이랴.

다시 김수영을 빌리건대, 그는 1967년에 “자폭을 할 줄 아는 속물”의 기미마저 없다고 질책했다. 그는 자책하는 마음으로 썼다. “모두 다 속물을 만들어라. 모두 다 유명하게 만들어라. 간판이 너무 많은 종로나 충무로 거리에서 간판이 하나도 보이지 않게 되기까지 더 간판을 늘려라.” 지금 우리는 오히려 “새로운 예술은, 삶은, 거칠고 조야한 곳에서 시작된다”(발터 벤야민)는 그런 극한까지 치달려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저물어가는 정동길에서 문득 해보았다.

   (끝)


 

[정윤수의 힐링 healing 필링feeling]

 

길 위의 음악, 국도변의 서정

 

나의 가을은 ECM의 기억과 이소라의 노래로 시작됐다.
가을이 오고 또 곧 눈 내리는 겨울이 될 것이다.
국도변으로 가서 잠시라도 자동차를 세우고 들판을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시화방조제 밤 풍경

 

만프레드 아이허가 왔다. 누구? 만…프레드 아이허? 할리우드 유명 배우도 아니다. 독일을 대표하는 축구선수도 아니다. 국제적인 거물 정치인도 아니다. 혹시 재즈를 좋아하시는지? 그리고 가을을, 여행을, 커피를, 키스 자렛을, 텅 빈 거리를, 침묵을, 팻 메스니를? 침묵 다음에 흐르는 맑고 투명한 소리를? 그러한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만프레드 아이허가 누군지 잘 알 것이다.

독일 뮌헨에 거점을 둔 세계적인 재즈 음악 레이블 ECM의 설립자이자 프로듀서인 만프레드 아이허. 그가 왔다는 소식에 가만있을 수 없었다. 그를 만나러 인사동에 갔다. 그가 준비한 전시회를 보러 무작정 간 것이다. 11월 3일까지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열리는 ‘ECM 전시회,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 그것을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개막 첫날, 9월이 오기 바로 전날에 나는 인사동으로 휘적휘적 걸어가서 내 젊은 날의 감각과 취향에 강렬한 화인(火印)을 남긴 ECM의 레코드와 사진과 기록을 보러 갔다. 오직 그걸 보러 간 것인데, 그곳에 개막에 맞춰 내한한 만프레드 아이허가 있었다. 그를 한참이나 보았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저 친구는 누군데, 나를 응시하는 걸까?” 그러나 나는 다가가지 않았다.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투명하고 섬세한 ECM 음악

 

ECM 전시회 포스터

다른 사람들이 질문을 했고 그는 대답을 했다. 묻고 싶은 바가 없지 않았지만(예를 들어 ‘세상은 점점 혼탁하고 불안해지는데 ECM의 영롱한 소리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가 다른 이들의 질문에 대해 답하는 것으로부터 내가 궁금해하는 것들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아이허는 “ECM의 아티스트들이 표현하는 클래식 음악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시적인 요소’다. 그러한 시적인 요소가 있다면 클래식, 재즈, 민속음악이라는 구분 없이 다 훌륭한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 어떤 장르의 음악이든지 그 음악을 만든 작곡가나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가 모두 자신만의 독창성을 가지고 있다. ECM의 역할은 바로 그러한 독창성을 잘 발현해내는 것이며, ECM의 아티스트들은 그러한 독창성을 표현하는 것에 탁월하다.”

그가 만든 마스터피스에 비하면 지나치게 정답에 가까운 대답이지만 그런대로 받아들일 만했다. 사실 그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음반에 다 들어 있다. 키스 자렛, 팻 메스니, 랠프 타우너, 얀 가바렉 같은 섬세한 재즈 음반이나 기야 칸첼리, 아르보 패르트, 지외르지 쿠르탁 같은 현대의 비극을 담은 클래식 음반에 그의 대답은 이미 다 들어 있다. 나는 그것을 30년 가까이 들어왔기 때문에 말로 질문하고 말로 대답하는 것은 어쩌면 번거로운 부산물이었다.

그러나 다음의 대답은 잊기 어려웠다. 누군가가 “급변하는 음악시장 환경에서 음반이 가지는 의미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했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아날로그 시대 때부터 음악을 접했다. LP판의 비닐, 재킷, 잡음, 그리고 판을 꺼낼 때의 느낌까지 내게 그 모든 것은 하나의 음악적인 경험이었다. 나는 아날로그 시대의 경험을 했고, 따라서 그러한 경험이 지닌 가치를 안다. 책을 읽었을 때 물론 책 안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책을 처음 쥐었을 때의 느낌, 책장을 넘기는 소리, 이 모든 것이 독서의 경험에 포함되지 않는가. 음반에 실린 곡과 곡 사이에 쉬는 타이밍에도 내가 전하고 싶은 것이 담겨 있다.”

 

어디론가 떠나게 만드는 소리

 

바로 그점일 것이다. 중3 때였던가, 아니면 고1 때? 그 무렵 키스 자렛의 걸작 앨범 ‘My Song’을 접한 이후 불멸의 ECM을 여태 들어온 것은, 단 한 곡의 완성도뿐만 아니라 앨범 전체에 흐르는 어떤 이야기와 질감 때문이었다. 그가 만든 거의 모든 앨범에는 지독한 고독과 외로움이 묻어 있었고, 그것을 견디거나 벗어나기 위해 어디론가 훌쩍 떠나는 자의 상실감이 배어 있었다. 그가 만든 앨범의 표지 디자인은 그 자체로 탁월한 감각이 작동한 섬세함의 극치라서 그 안에 담긴 음반의 곡들을 듣지 않고서도 당장 그 앨범의 냄새며 색깔이며 온도까지 느낄 수 있었다.

그가 관여한 음악을 들으면 그 순간 아무 미련 없이 떠나고 싶어진다. ‘힐링 이전의 힐링’이다. 여행을 통해 뭔가 재충전한다든지 하는 일말의 계몽도 없다. 그냥 떠나버리게 만든다. 실제로 나는 그가 만든 음반들을 듣다가 목적지도 없이 떠난 적도 있고, 무슨 일로 어디론가 가게 되면 마치 음악을 듣다가 그냥 뛰쳐나온 것처럼 억지로 그렇게 마음을 먹기도 했다.

 

그렇게 하여 어디론가 차를 몰고 달리다가 국도의 변에 문득 멈춰 선다. 꽤 오랫동안 경향 각지를 돌아다녔고 그런 일들을 바탕으로 이렇게 ‘힐링 필링’을 연재하고 있지만, 잠시 틈을 내 조금은 억지스럽게라도 우기고 싶은 일이 있는데, 그것은 내 마음 속의 진짜 힐링 장소가 ‘국도변’이라는 점이다.

 

이 점, 분명한 사실이지만, 황량하고 쓸쓸한 국도변을 힐링 장소라고 하면 너무 주관적이다. 경향 각지의 산 좋고 물 좋은 곳, 그윽하고 아늑한 곳, 쉬기 편하고 책 읽기 편하고 걷기 좋은 곳을 다 제쳐두고 국도변만 이야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허름한 주유소 하나쯤 있고 언제 재료를 채워놓았는지 모를 낡은 자판기에서 멀건 인스턴트 커피를 한잔 뽑아서 저물어가는 들판을 바라보는 것만큼, 적어도 내게는 마음이 편안한 장소가 실은 달리 없다.

 

만프레드 아이허가 아니었다면, 11월 초까지 인사동에서 그가 만든 앨범을 주제로 한 ECM 전시회가 열리지 않는다면, 나는 국도변의 서정을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혼자서 떠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고, 그 버릇 지금까지 못 고쳐 매달 이렇게 돌아다니지만, 그런 경험의 배경에 ECM의 앨범 표지들에 담긴 황량하고 쓸쓸한 풍경 이미지가 있었음을 또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개심사 소나무

 

국도변을 한참이나 달리다가 문득 멈춰 서면, 흡사 오래전부터 소장해온 음반의 표지를 닮은 어떤 풍경이 내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런 풍경들 앞에 서면 나는 틀림없이 과거로 여행을 온 듯한 환영에 빠진다. 시간도 멈췄고 공기의 흐름도 멈췄고 차도 멈췄고 나도 국도변에 그냥 멈춰버렸다. 이 아득한 순간들이 나를 어루만진다. 국도변의 황량한 풍경이 나를 감싼다. 나는 시공간의 진공 상태에 빨려들어가 한참이나 그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를테면 시화방조제가 그렇다. 시흥시 정왕동 오이도와 안산시 대부동 방아머리를 잇는 길이 11.2㎞의 방조제다. 6년 반 만에 준공을 본 방조제다. 1987년 6월부터 1994년 2월까지 벌인 시화지구 간척사업으로 준공됐다. 간척사상 최대로 알려져 있는 10.3m의 조차(조석 현상에 의한 만조 시와 간조 시의 해수면 높이의 차)를 극복한 난공사를 겪었다.

 

공사 계획 때나 공사 중일 때, 공사 완료 이후에도 이러한 간척 개발에 따른 엄청난 생태계 교란과 환경오염이 문제였다. 실제로 방조제 완공 직후에는 악취와 오염과 환경 재난을 다룰 때 어김없이 시화호 일대가 언급됐다. 그런데 인간의 온갖 노력에 감응한 자연의 위대한 배려로 인해 지금 시화호는 ‘생명의 호수’로 불리고 있다. 천연기념물 201호 큰고니, 천연기념물 205호 노랑부리저어새, 천연기념물 361호이면서 멸종위기야생동물 1급 노랑부리백로 등이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는 호수다.

 

초가을 이맘때면 저녁 7시 전후의 시화방조제가 거룩하다. 누구는 서해 쪽으로 가서 전어를 먹네, 꽃게를 먹네 하고 소동을 피우지만 설령 그런 여정이었다 하더라도 시화방조제의 안전한 곳에 차를 세운 후 저물어가는 서해를 보라. 전어니 꽃게가 문제가 아니다. 압도적인 하늘에 드리워진 광활한 공기마저 누구도 보지 못한 곳으로 서둘러 휩쓸려간다.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이다.

시화호에서 1시간 남짓 달려가면 서산의 개심사다. 개심사는 가야산의 한 줄기가 북쪽으로 내려오면서 산뜻하게 떠오른 상왕산의 남쪽 기슭에 있다. 백제 의자왕 14년에 창건된 역사를 갖고 있으니 기록상으로는 고찰이다. 그러나 화재가 났었고 이를 조선 성종 6년(1475)에 중창했다고 한다.

서산 개심사의 소나무는 청도 운문사, 합천 해인사와 함께 산중 사람들이 으뜸으로 꼽는다. 그래서 가급적 개심사를 갈 때는, 주차장에서 곧바로 개심사에 이르는 골짜기 길보다는 소나무들이 터널을 이룬 능선 길을 따라 걷는 게 낫다. 능선이라고 해도 20분 정도면 충분히 걸을 수 있다.

근대의 명필 해강 김규진의 예서체 ‘상왕산 개심사’라는 현판이 늠름하고 그 아래로 사시사철 어느 때나 운치 있는 연못이 장려하다. 심검당(尋劍堂)이라는 요사채는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덕분에 ‘나무의 자연스러운 결을 그대로 살린 최고의 건물’로 꼽히는데, 어떤 건축학자들은 그게 일부러 그것을 추구해 그리 된 것이 아니라 산에서 얻을 수 있는 소재가 그런 형태였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찌 됐든, 슬기롭고 아름다워 보인다.

 

대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

 

 
담양 메타세쿼이아 길

그런데 내 마음속 개심사는 산속 깊은 곳의 대웅전이 아니라 그곳에 이르는 과정의 국도변이다. 서해안고속도로를 벗어나 개심사 방향으로 달리다보면 봄에는 황홀한 벚꽃 때문에, 가을에는 화려한 단풍 때문에 자꾸 브레이크를 밟게 된다. 역시 그 시간은 늦은 오후가 좋다. 대지를 적시던 태양은 9월이면 황급하게 물러선다. 역시 서해 쪽이라서 금세 그 기운이 사라지지는 않고 들판 곳곳을 어루만진다. 그 광경 앞에서, 주유소의 낡은 자판기에서 뽑아온 인스턴트 커피 한잔을 들고 가만히 서 있다보면, 어느새 밤이 된다.

다시 그곳에서 한 시간 정도 내려가면 내소사가 있는 변산반도 일대가 된다. 서해를 따라 펼쳐진 지역이 외변산이고 내륙을 내변산이라고 한다. 중앙 내륙 일대는 1999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만약 의견이 다른 가족이나 취향이 다른 회사원들끼리 어딘가를 가야 한다면 그 1번지로 꼽을 만한 곳이 변산 일대다. 바다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격포리 일대의 해안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며,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깊고깊은 변산에 아예 사무치고 싶을 것이다. 실제로 조선 후기나 근세기에 전란을 피하려는 정감록 일파나 가족사의 악연으로 정든 마을을 벗어나야만 했던 사람들이 이곳에 몸을 숨기곤 했다. 그만큼 산이 깊고, 산이 깊어서 뭐라도 캐서 먹으며 구명하기에 좋았다는 곳이다.

 

외변산이든 내변산이든, 어느 곳이나 차를 세우고 한참이나 머물기 좋다. 특히 9월의 가을, 해가 지는 오후가 되면 반드시 곰소만 일대의 국도변에 머물러보기를 권한다. 해는 아주 느릿느릿 저문다. 내륙 깊숙이 들어온 물 위로 놀이 물든다. 산이 어두워지고 물은 한순간이나마 붉은 기운으로 번진다.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그렇게 산은 깊어지고 물은 장려해진다. 국도변에서 도저히 벗어나기 어려울 정도인데, 이러한 풍경이란 서해 전체에서도 매우 드물다. 참고로, 나는 결혼하기 전 아리따운 아가씨 한 사람을 그곳까지 데리고 가서 그 광경을 보여주면서 말하자면 청혼이랄까, 그런 쑥스러운 일을 했음을 밝히고자 한다. 그곳은 그럴 만한 곳이고 성혼율은, 적어도 내 경우로 보면 100%다.

 

다시 그곳에서 한 시간 못 미쳐 가면, 담양이다. 아무래도 가족과 함께 가을 나들이를 하려면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장소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방조제나 국도변에서는 혼자서 오랫동안 머물 수 있지만 아무래도 그런 악취미를 온 가족이 함께 할 수는 없다. 담양의 죽녹원과 그 일대라면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 있다. ‘한국대나무박물관’에서 대나무의 생태와 재배, 죽세공예품 등을 볼 수도 있다. 담양 향교 인근 언덕에 조성된 ‘죽녹원’에서 대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오랫동안 느낄 수도 있다.

 

조선 시대 선비들의 문향이 배어 있는 소쇄원, 식영정, 명옥헌 같은 곳은 도무지 그곳을 벗어날 여지가 없게 만드는 그윽한 장소이며 그곳들에 이르는 국도변은 지극히 아름답다. 특히 메타세쿼이아 길이 그렇다. 요즘은 너무 많은 사람이 찾는 바람에, 특히 5월에 열리는 대나무축제 같은 때에 찾다보면 성가신 일도 벌어지지만, 그래도 가족과 함께 삶의 어떤 순간을 소중한 추억으로 봉인하기에 아름다운 국도다.

 

가을밤의 서정

 

인사동의 ECM 전시회를 보고 난 후, 한두 가지 약속을 더 마친 후, 늦은 밤에야 귀가하게 됐다. 토요일이면 인사동 일대에 차량이 들어갈 수 없고, 게다가 약속들도 모두 인사동과 광화문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라서 모처럼 차를 두고 시내에 나간 길이었다.

그리하여 깊은 밤, 초가을의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는 밤에 심야 좌석버스를 탔다. 사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버스를 기피하는 편인데, 대중교통을 생활화하자는 전 국민적 운동에 동참하지 못하는 까닭은, 버스 안의 소음을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 소음에 민감한 편이라서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에도 한사코 가지 않는다. 상대방이 그런 곳을 약속 장소로 잡아놓으면 어쩔 수 없이 들르지만, 곧 그를 데리고 조금이라도 조용한 곳으로 도피한다.

내가 듣고 싶지 않은 음악, 내가 듣고 싶지 않은 대화, 내가 듣고 싶지 않은 전자음을 가급적 피하면서 살아간다. 버스는 어떤가. 듣기 싫은 음악이 쉬지 않고 흘러넘치기 일쑤고, 엿듣고 싶지 않은 밀어를 억지로 들어야 하며 운 나쁘면 횡설수설하는 취객 옆에 앉아서 고약한 술 냄새까지 맡아야 하는 고행이 따른다.

그래서 웬만하면 버스를 타지 않는데, 그날, 초가을의 깊은 밤은 달랐다. 오히려 기사 아저씨에게 라디오 볼륨 좀 높여달라고 목청껏 소리치고 싶었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심야 좌석버스를 탔는데, 희미하게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가 몸에 다가와서 스며들곤 했다. 이제 가을이 시작된다는 이유로 라디오의 어느 음악 프로그램에서는 ‘가을’ ‘낙엽’ ‘사랑’ ‘그리움’ 같은 낱말이 들어간 노래를 연속해서 틀었다.

 

기억 속 서울

 

피곤한 몸에 스며들었던 노래의 가사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그대사랑 가을사랑 단풍일면 그대오고 그대사랑 가을사랑 낙엽지면 그대가고”(신계행, 가을 사랑), “그대와 나 둘이서 사랑을 할 때 제가 먼저 사랑할래요 사랑을 받을 땐 행복하지만 주는 마음도 햇살이에요”(강인원, 내가 먼저 사랑할래요), “끝, 끝없는 바람 저 험한 산 위로 나뭇잎 사이로 불어가는 아, 자유의 바람”(한대수, 바람과 나), “이제는 모두 잊을래 잊자 그래도 추억은 그대로인걸 잊어버리려 애를 써도 눈물이 고여있는 건 아직도 끝나지 않은 내 마음의 깊은 사랑인가”(오성과 한음, 빛바랜 사랑)….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한창이던 1987년 6월 성공회 서울대성당.

 

 

이런 노래들이 집으로 가는 심야의 좌석버스 안을 은은하게 채웠다. 이런 노랫말만 보고도 금세 선율을 떠올리는 독자도 있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위의 노랫말로 잠깐 검색이라도 해보면, 비록 한 세대 전의 노래지만, 이 가을을 더없이 그윽하고 애틋하게 만드는 노래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그리고 그 프로그램은 마지막 곡으로 이소라의 ‘바람의 분다’를 선곡했으니, 요즘 말로 해서,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바람이 분다 서러운 마음에 텅 빈 풍경이 불어온다 머리를 자르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벌떡 일어나서 “아저씨, 볼륨 좀 높여주세요!”라고 외칠 뻔했다. 가을! 가을 아닌가!

 

만약 내가 그날의 선곡을 담당했더라면 꼭 하나 추가하고 싶은 노래가 있다. 노랫말에 ‘눈 덮인 교회당’이라는 표현이 있어서 가을보다는 겨울에 합당한 노래지만, 그래도 폭서와 폭습과 폭우를 다 견디고 나서 조금씩 쌀쌀해지는 이 9월이라면 너무나 어울리는 곡이다. 이영훈이 작사·작곡하고 이문세가 부른 노래, ‘광화문 연가’다.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 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내가 이 노래를 각별히 생각하는 까닭은, 가을이 오고 또 곧 눈이 내리는 겨울이 될 것이라는 계절의 감상 때문만은 아니다. 노랫말처럼, 정말 익숙하고 오래되고 정겨웠던 것들이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마는 이 시대의 가혹한 개발 신드롬 때문이다.

 

인문주의 지리학자 이 푸 투안에 따르면 인간은 장소에 둘러싸여 살고 그 안에서 빚어내는 기억 속에서 살아간다. 그에 따르면 “장소는 정감 어린 기록의 저장고이며 현재에 영감을 주는 찬란한 업적이며 영속적인 곳”이다. 그러나 메트로폴리스라고 불리는 대도시는 전통사회로부터 이어져온 누적된 감각과 정서, 그 장소의 기억을 분해하고 마모시킨다. 현대에 이르러 의미 있는 장소에서 풍부한 경험과 관계를 맺는 삶은 점점 축소되고, 획일적 표준에 따라 집합적으로 활동하는 무(無)장소성이 압도한다.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정서적 풍경을 작품화해온 이영훈 음악의 중요성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영훈의 작품에는 ‘구체적인 스토리’가 존재한다. 대도시 서울의 쓸쓸한 풍경이 보인다. 이영훈의 작품에는 열렬한 사랑과 실연의 아픔이 배어 있다. 노래 속의 주인공은 노을 지는 하늘을 보며 담배를 피우거나 옛 기억을 찾아 도심 공간을 배회한다.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가슴 깊이 그리워지면

눈 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곳에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공간에 대한 기억

 

이영훈은 덕수궁 돌담길이나 광화문 광장이나 혜화동 골목의 기억을 바탕으로 작품을 만든다. 실제로 그는 스물네 살 때 혜화동 로터리에 작업실을 두고 곡을 썼으며, 아침이면 혜화동 길을 거슬러 아무도 없는 대학로길을 산책하곤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데이트할 때도 인사동이나 광화문 일대를 산책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대학로에서 광화문 사이에, 고궁들과 오래된 길과 정독도서관이 있는데, 이영훈의 사랑은 그 도심의 길 위에서 이뤄졌다.

 

표면적으로 보면 그의 노래는 실연의 아픔을 자주 다룬 듯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대도시 서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간에 대한 기억이나 애착을 깔고 있다. 이영훈은 대도시 서울의 삶을 애틋한 서정 발라드에 기품 있게 담아냈으며 그것을 이문세가 특유의 목소리로 들려줬다. 단지 사랑에 대한 낭만적인 감상 때문이 아니라 이 거대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에 대한 추억을 위해서라도, 이 가을에 빠짐없이 들어볼 만한 노래, 그 노래가 바로 ‘광화문 연가’다.

 

이렇게 나의 가을은 ECM의 기억과 이소라의 노래로 시작됐다. 그 음악들은 서울의 거리를 산책하라고 권한다. 국도변으로 가서 잠시라도 자동차를 세우고 들판을 바라보라고 권한다. 당신에게는? 당신에게는 어떻게 가을이 다가왔는가. 기상이변이라고들 하지 않던가, 이번 가을은, 아 가~을 이라고 말하는 사이에, 금세 스쳐지나갈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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