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터줏대감인 민속학자 심우성선생께서 요즘 몸이 불편해 요양원에 계신다.

인사동 시궁창(신궁장)여관에 투숙하시며, 투덜투덜 인사동을 떠도시던 모습을 이제 볼 수 없게 되었다.

절규하는 선생님의 넋 굿도 더 이상 볼 수 없다.

선생님 팔순 잔치 때 찍은 사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4년이나 흘러 버렸다.

세월이 너무 빠르다.





“무심한 세월아 너만 가거라. 정든 사람, 귀한 사람 다 데려가고 남은 사람은 어찌 살란 말인가?”

세월보다 더 무정한 것은 사람이다.

잘 나갈 때는 파리무리처럼 들끓던 사람들이 기력 이 다하면 금세 사라진다는 것이다.

심지어 가족들 까지도...

엊그제 선생님의 넋 춤 제자였던 양혜경씨가 올린 글을 보고, 요양원에서 외롭게 지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주에 있는 아내와 서울에 있는 가족들은 다 무엇하고, 왜 공주까지 홀로 떠나셨는지 모르겠다.

이게 사람 사는 도리인가?




선생께서 외로워하신다는 양혜경씨의 문자메시지에 당장 달려가고 싶지만,

마음처럼 싶지 않은 것이 사람 사는 현실이다.

통화는 가능하다기에 전화로나마 문안인사 드렸더니, 엄청 반가워 하셨다.

언제 한 번 만나자는 말씀에 외로움이 뚝뚝 묻어났다.

평소 가까이 지낸 지인들은 전화로 문안인사라도 드렸으면 고맙겠다.

행여 공주방향으로 가는 걸음이 있다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인생 길,

따뜻한 선생님의 손 한번 잡아드리자.

전화 010-9940-1299 / 공주 에덴요양병원 201호


사진,글 / 조문호









지난 3일 정오 무렵, 강민 선생의 생신을 축하하는 오찬회가 인사동 ‘가회’에서 열렸다.
‘도서출판 답게’ 장소임씨가 매년 이맘때면 오찬자리를 만들어 강민선생을 비롯하여 친구 분들을 모셔왔는데,

그 날은 강 민선생과 장소임씨를 비롯하여 신경림, 박정희, 추은희시인, 소설가 김승환선생, 아동문학가 정두리씨,

민속학자 심우성선생, 문학평론가 구중서선생, 시대의 협객 방동규선생 등 모두 열 분이 모이셨다.

난, 그 자리에 끼일 군번은 아니지만, 모처럼의 인사동 터줏대감 회동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덕분에 제대로 차린 밥상을 대할 수 있는 호사도 누렸지만...

마침, 강민선생 옆자리에 앉게 되어, 선생의 핸드폰을 엿볼 기회가 있었다.

핸드폰 창에 소설가 이국자선생의 생전 모습이 떠 있었다. 사모님께서 세상을 떠난 지가 8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그리워하고 계시는 것 같았다. 그토록 못 잊어 그리워하는 님을 둔 사모님이 더 부러웠다.

10여 년 전 양평에 사셨던 선생의 자택을 방문하여, 점심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처음 뵈었는데, 인자했던 모습은 어렴풋이 떠오르지만,

손수 끊여주신 된장국 맛과 방문 앞에 흐드러지게 핀 목련 꽃의 기억은 아직까지 생생하다.

그래서인지 목련의 우아한 아름다움과 구수한 된장국 맛이 잘 어우러진 그런 분으로 기억되고 있다.

준비한 생일 케익을 자르며, 강민 선생의 생신을 축하드리며 축배를 들었다.

그러나 나누는 대화라고는 대개 그렇고 그런 말씀이셨다.

이제 말년에 접어들어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처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복되는 삶을 되 뇌일 필요도 없었을 게다.

그런데, 그 날은 조선의 주먹으로 통했던 방배추선생의 재미있는 이야기로 화기애애했다.

선생의 자선전을 읽어 대개 아는 사실이지만, 들어도 들어도 재미있는 이야기들이다.

와전된 이야기라지만, 깡패 열 일곱 명을 한 판에 때려 눞혔다는 이야기와,

친구이신 백기완선생과의 첫 만남에 빰을 얻어맞았다는 이야기 등 흥미진진했다.

백기완, 황석영선생과 함께 조선의 삼대구라라 불리지만, 그런 호칭을 들을 만 했다.

주먹이 먼저라는 말이 있듯이, 다른 이야기보다 주먹이야기가 훨씬 재미있었다.

찻집인 ‘인사동 사람들’로 옮기다 연출가 기국서씨를 만나 함께 기념사진도 찍었지만,

다들 반갑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강 민선생님의 생신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늘 건강하시어 오래 오래 인사동을 지켜주시길...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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