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의 원로 시인 황명걸(87세)선생께서 지난 9월 13일 새벽무렵 지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한 달 전에위독하다는 소식을 받았으나, 병 병문도 못한 채 운명하시어 더 가슴 아픕니다.
황명걸선생을 인사동 대표 시인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창예헌)’의 고문이기에 앞서,
인사동에 대한 사랑이 남 달랐기 때문입니다. 인사동에 일만 있으면 노구를 이끌고 먼 길을
달려오시던 선생의 따뜻한 마음도 이제 그리움으로 묻을 수밖에 없습니다.
황명걸시인의 강력한 현실비판시는 60~70년대한국시단을풍미한바 있습니다.
서울대불문과를 중퇴한 후 ‘여상’, ‘주부생활’, 여성동아‘ 기자로 일했으며,
1962년 ’자유문학‘에 ’봄의 미아‘가 당선되며 등단하셨지요.
그동안 ‘한국의아이’(1976)를 비롯하여‘내마음의솔밭’(1996),‘흰저고리검정치마’(2004),
‘저희를 사랑하기에 내가’(2017)등의 시집을 펴낸바 있습니다.
1975년 자유언론 운동으로 '동아일보'에서 해직되어 펴낸 첫 시집 `한국의 아이'가 나오며 세상의 주목을 받았지요.
생계를 위해 일했던 LG에서 퇴직한 뒤는 북한강변에서 갤러리 카페 `무너미'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은백양 또는 자작나무처럼 가을 들판에서 허연 흉터를 스스로 드러내며
저녁노을을 향해 서 있는 그의 시들은 서러울 만큼 아름답다.
칠순이 되어서야 시의 참맛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은 아닐까!”
신경림 시인이 황명걸시인의 네 번째 시집을 읽고 상찬한 말입니다.
아래는 판금 조치라는 수난을 겪기도 한, 선생의 대표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한국의 아이’'
배가 고파 우는 아이야 울다 지쳐 잠든 아이야 장난감이 없어 보채는 아이야 네 어미는 젖이 모자랐단다 네 아비는 벌이가 시원치 않았단다 네가 철나기 전 두 분은 가시면서 어미는 눈물과 한숨을 아비는 매질과 술주정을 벼 몇 섬의 빛과 함께 남겼단다. 뼈골이 부서지게 일은 했으나 워낙 못 사는 나라 백성이라서 허지만 그럴수록 아이야 사채기만 가리지 않으면 성별을 알 수 없는 아이야 누더기 옷의 아이야 계집아이는 어미를 닮지 말고 사내 아이는 아비를 닮지 말고 못 사는 나라에 태어난 죄만으로 보다 더 뼈골이 부숴지게 일을 해서 멀지 않아 네가 어른이 될 때는 잘 사는 나라를 이룩하도록 하여라 멀지 않아 네가 어른이 될 때는 잘 사는 나라를 이룩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명심할 것은 아이야 너무 외롭다고 해서 숙부라는 사람 믿지 말고 외숙이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가지고 노는 돌멩이로 미운 놈의 이마빡을 깔 줄 알고 정교한 조각을 쪼을 줄 알고 하나의 성을 쌓아 올리도록 하여라 맑은 눈빛의 아이야 빛나는 눈빛의 아이야 불타는 눈빛의 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