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거리는 항상 사람들이 붐비지만 전시장은 대부분 비어 있다.

 

어제오늘만의 일은 아니겠으나 사람들을 전시장으로 끌어들일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오래전부터 인사동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소식을 인사동관광안내소에 비치하라는 등

여러 가지 대안을 제시했으나, 담당 공무원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였다.

 

종로구청문화관광과 담당 공무원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인사동 상인들 모임인 인사전통보존연구회만 믿는지 모르지만,

서로의 돈벌이를 먼저 생각하는 상인들 모임에서 무슨 전통문화를 보존한단 말인가?

 

인사동 큰 길가의 매장들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사거리에 있던 전통 한지 가게가 ‘BLING BOX’로 변신해 있었고,

곳곳에 대규모 모자가게가 들어서 있었다.

 

인사동에서 기존 전통 가게가 살아남기는 힘들어졌다.

거리는 대부분 관광객인데, 그날따라 잼버리에 참가한 스카우트 대원들 모습도 많이 눈에 띄었다.

인사동이 한국의 대표적 관광코스는 되었으나, 인사동 고유의 특색은 보기 힘들어졌다.

 

그나마 버스킹 나선 연주자들이 삭막한 분위기에 윤활유 역할을 해주는데,

젊은 퍼포머들을 끌어들여 다양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것은 어떨까?

 

복잡한 거리에서 탈 사람도 없는 관광용 아띠인력거를 운영하는 것보다는

옛날 약장수나 극장 포스터를 붙여 등짐 북을 치고 다니던 것처럼, 등짐 북을 재연하면 어떨까?

 

오랜 향수를 끌어들이는 재미도 있지만,

그날 열리는 인사동의 중요한 전시 포스터를 붙여 거리에서 등짐 북을 치고 다닌다면,

유독 전시장이 많이 몰린 인사동 홍보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뿐 아니라 거리에 전시 현수막이나 다양한 홍보물을 설치할 수 있도록 협조해야 한다

 

문제는 그 많은 전시 중에 볼만한 전시 한두 개를 선택하는 방법에 있다.

그 전시 광고를 신뢰할 수 있게 만들려면, 전문가가 나서야 한다.

절대 특정 개인이 개입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미술평론가 몇 분으로 구성된 선정위원회를 만들면 될 것이다.

홍보하는 전시를 신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사동 고유의 전통문화나 전시문화를 소개하는데, 전문가 개입 없이는 빛 좋은 개살구다.

 

작품성도 작품성이지만, 그때그때 사회적 이슈가 될만한 좋은 전시를 알려준다면,

이보다 더 유익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사실, 인사동에서 전시를 보려고 해도 어디에서 좋은 전시가 열리는지 몰라 방황할 때가 많다.

 

인사동에서 열리는 좋은 전시를 알릴 수 있는 선정위원회를 잘만 운영한다면,

인사동 전시문화도 살릴 수 있고관광객에게 좋은 정보까지 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 복잡한 거리에 트럭이 들어와 수박을 팔고 있었다.

차량 출입을 통제하는 인사동 거리에 몰래 비집고 들어왔으나, 큰 착각이었다.

 

사람이 많아 잘 팔릴 것으로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인사동 관광 나와 누가 그 큰 수박을 들고 가겠는가?

차라리 변두리 주택가를 도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머리가 안 돌아가면 돈도 못 벌고 몸만 고생시킨다.

그 수박 장사꾼만이 아니라 종로구청 담당자도 마찬가지다.

 

/ 조문호

 

 

 

  사람도 풍정도 다 바뀐 삭막한 인사동을 아직도 미련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실 날 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인사동을 기록해 왔지만,

마지막 끈이었던 아지트마저 막혀, 더 이상 인사동에 대한 기록을 접기로 했다.

 

  간혹 봐야 할 전시가 있거나 볼 일이 있으면 들리기는 하지만,

이전처럼 인사동 거리를 스냅하여 포스팅 하는 일을 그만 둔지는 제법 되었다.

 

  그렇다고 인사동을 좋아했던 오랜 정마저 어찌 끊을 수가 있겠는가?

마치 마음 변한 연인을 못 잊듯, 습관적으로 카메라를 꺼내든다.

 

  며칠 전에는 갈 곳도 만날 이도 없는 인사동을 무작정 찾아 나섰다.

인사동 정취가 사라져 낯설기 그지없는 인사동 거리를 하릴없이 거닐었다.

 

  외국 관광객만 보일 뿐 반가운 사람은커녕 아는 사람조차 없었다.

궁녀가 꽃이 되었다는 쌈지 담벼락의 능소화가 그나마 눈 익은 풍경이었다.

 

  강민 시인을 비롯한 많은 풍류객들이 변해가는 인사동을 한탄했으나,

세월 따라가는 것을 누가 붙잡을 수 있겠나?

 

  또 다른 젊은이들이 새로운 인사동 문화를 만들어 갈 테지만,

인사동이 미술의 중심지인 이상 발길을 끊을 수는 없었다.

 

  전시개막식에서 반가운 인사동 풍류객을 만날 수도 있고,

다양한 전시를 볼 수 있는 것만도 인사동의 매력이 아니겠는가?

 

  그 날도 차마 그냥 갈 수 없어, 볼만한 전시를 찾아나섰다.

마침 갤러리밈에서 정정엽의 모욕을 당한 자이며 위대한이 열리고 있었다.

 

텅빈 전시장에 들어서니 천장에서 바닥으로 늘어뜨린 긴 설치작이 눈길을 끌었다.

광목천을 캔버스 삼은 그림에는 크기도 생김새도 제각각인 수많은 벌레가 그려져 있었다.

 

  여성·생태주의 대표작가인 정정엽의 모욕을 당한 자이며 위대한전에는

벌레외에도 그녀의 대표작인 팥과 콩 시리즈 등 23점이 전시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구상이자 추상이었다. 콩과 팥을 한 알 한 알 구상화처럼 그렸지만,

캔버스 전체를 바라보면 추상 또는 반추상이었다.

 

  콩과 팥은 때론 거대한 파도가 되기도 하고, 때론 빤짝이는 별이 되었다.

사소한 것에 담긴 생명력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었다.

 

  특별할 것 없는 콩이지만, 작은 한 알의 콩이 삶과 우주를 지탱하는 소중한 생명의 씨앗임을 말했다.

 

  그 한 알 한 알에 녹아든 농부의 땀은 노동의 가치를 말했고,

주변에 널린 평범한 것과 약한 존재의 의미를 일깨워 주었다.

 

  특히 새로 선보인 벌레에 대한 재발견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편견의 껍질을 벗은 벌레의 모습은 흉한 미물이 아니라 신비롭고 품위 있는 모습으로 승화되었다.

 

  미술평론가 심은록은 정정엽의 작품은 생명의 고귀함과 숭고함을 드러내며

우리의 편견을 한 꺼풀 벗겨낸다고 말했다.

 

전시는 오는 818일까지 열린다.

 

사진, / 조문호

 

 

지난 17일 오후5시 무렵, 인사동 사람들의 정기모임이 인사동 유목민에서 열렸다.

 

두 달 만에 열린 이번 모임에는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이명희, 정복수, 조해인, 유근오, 장경호, 정영신,

임태종, 공윤희, 안원규, 임헌갑, 최유진, 임경일, 김발렌티노 등 15명이 참석했다.

 

모처럼 만난 반가운 자리였으나 좌석이 여러 곳으로 나뉘어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분도 있었는데, 마침 최유진씨로 부터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년을 맞아 위령 종루를 보수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는 27일 오후4시부터 인사동 서원빌딩 14‘615남측위원회회의실에서 종루 보수 모금 확산을 위한 이규수교수의 '관동대진재와 조선인 학살, 그 망각과 기억의 소환'이란 특강이 열리니 많은 참석을 바랍니.

 

이 일은 오래 전, 김의경, 심우성선생께서 성금을 모아 일본 관음사 경내에 종과 종루를 세웠으나, 지금은 훼손이 심해 보수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돌아가신 심우성선생을 대신하여 연극연출가 최유진씨가 모금위원장을 맡아 발 벗고 나섰다고 한다.

 

2023년은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년이지만, 그 참혹한 역사를 기억하고 원혼들을 진혼하기 위한 시설이 아직 우리나라에는 없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59년 양심적인 일본 시민들이 그 학살 현장에서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는 위령제를 올리기 시작한 것이 발단이었단다.

 

1985년 그곳의 위령 팻말을 본 한국 문화예술인들이 나서서 대한민국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희생자 기림 시설인 보화종루를 일본 관음사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1999년에는 일본 시민들이 조선인 희생자들의 위령비를 종루 옆에 세우고, 한일 양국 시민들의 추모문화제도 계속 열었다고 한다. 이렇게 역사적 의미가 깊은 사적 가치를 지닌 보화종루가 오랜 세월과 잦은 지진으로 훼손과 파손이 심해져 붕괴 위험에 처한 것이다.

 

이에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년을 맞아 과거 이 종루를 건립하고 보수해왔던 원로 문화예술인들의 후배와 자녀 세대 문화예술인이 중심이 되어 다시 한 번 양국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개보수하여 시설을 보존하려 한다.

 

학살피해 100주년이 되는 오는 9 10일은 추도문화제도 함께 개최하여 상생의 뜻깊은 전통을 이어가고자 하오니, 뜻있는 분들의 많은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사진, / 조문호

 

 

  

 

인사동 밤길을 걸었다.

술 생각에 나선 것도 아니고 약속은 더 더욱 아니다.

텅 빈 마음을 인사동은 매워 줄 것 같았다.

인사동 밤거리는 이국처럼 낯설었다.

정든 가게는 사라지고 옷가게만 즐비했다.

진열대 상품마저 이질적이다.

어떤 집은 벽보판이 되었고 어떤 집은 안녕이란다.

사람도 하나같이 낯설다.

시끌벅적 개똥철학 풀던 사람은 다 어디 갔는가?

아련한 그리움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지향당' 배첩장만 풀칠을 한다.

아직 인사동에 붙어 있다고...

사진, / 조문호

 

 

26일은 서울 전역에 눈이 내린다는 일기예보에 밤잠을 설쳤다.

 

눈이 오면 지저분한 것들을 모두 덮어버리는 순백의 세계도 장관이지만,

뽀드득 뽀드득 소리를 내는 눈 밟는 소리가 정겨워서다.

 

눈 치울 일이나 길이 미끄러운 불편함이야 따르지만,

 눈이 오면 어린애처럼 마음 들 떠는 것은 늙어도 어쩔 수 없다.

 

어제 밤엔 늦잠이 들어 오전 열시 무렵에야 일어났다.

 

쪽방에 창문은 있지만 옆 건물과 붙어있어 햇볕은커녕 바깥 날씨조차 알 수 없다.

 오로지 담배연기 빠져 나가는 배출구 역할만 톡톡히 해 준다.

 

마음이 바빠 서둘러 나가보니, 솜털 같은 눈발이 휘날렸다.

 

골목엔 간간히 눈 치우는 주민이 보였으나, 공원은 텅 비어 있었다.

 

눈이 내려 나처럼 신이 난 사람도 있었다,

 정재은씨를 골목에서 만났는데, 기념사진 한 장 찍어 달라며 포즈를 취했다.

 

다들 추운 날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티브이 삼매경에 빠진다.

 

그러나 티브이는커녕, 길거리에서 떨고 있는 노숙인이 걱정이다.

 

서울역으로 가기 위해 지하도를 내려가니, 계단 구석에 웅크려 울고있는 여인이 있었다.

옆에 파지가 깔린 걸 보니 그 곳에서 밤을 지샌 것 같았다.

 

무슨 사연으로 가출했는지 모르지만, 추위보다 자신의 처지가 더 슬펐던 것 같다.

 

서울역광장에 머무는 노숙인들은 찬바람 피할 곳을 찾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선교단체에서 여러 동의 천막을 세워, 오가는 행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예배를 시작할 때는 몇 명 안 되던 인원이 40여명으로 불어났다.

 

한 아낙은 흡연구역에서 담배 피우는 젊은이들을 향해 목이 터져라 구원을 외쳐댔다.

 

예배를 마친 이들은 추위를 피해 '서울역희망지원센터'로 가거나, 지하 통로로 뿔뿔이 흩어졌다.

 

서울역 지하도에 앉은 노숙인은 “평소에는 저녁 6시가 지나야 내려오는데,

오늘은 너무 추워 어쩔 수 없이 일찍 내려왔다”고 한다.

 

일부는 광장에 설치된 텐트 안에서 추위를 버티기도 했다.

따뜻한 커피와 떡을 나누어 준다니까, 어디서 나왔는지 금방 긴 줄이 형성되었다.

 

잠잠하던 텐트 안에서도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텐트 지프를 열려고 손이 슬그머니 나왔는데,

반지를 낀 고운 손을 보니 여성 노숙인 같았다.

 

요즘 들어 여성 노숙인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모든 생활이 남성에 비해 어려울 수밖에 없는 여성 노숙인에 대한 특단의 대책이 요구된다.

 

노숙인의 삶을 개선할 수는 없을까?

별도의 보호시설은 있지만, 그 곳에 가지 않는 이유는 술과 담배를 피울 수 없기 때문이다.

 

추운 고통을 감수해 가며 자유를 원하는 노숙인의 삶은 살얼음판처럼 위태롭다.

 

서울역에서 인사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먼 거리가 아닌데다, 인사동의 눈 내린 풍경을 기록하고 싶어서다.

 

인사동 거리는 눈 치우는 상인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골목에 자리 잡은 술집들은 대부분 문이 잠겼고, 내린 눈은 그대로 쌓여 있었다.

 

더러 한복을 입은 중국관광객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지만, 다들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남인사마당 입구에는 눈을 뒤집어 쓴 노점상 리어카가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연출했다.

 

눈 덮인 설경을 찾아 가까운 탑골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곳 또한 서울역광장의 살풍경과 다를 바 없었다.

 

빵과 두유를 얻기 위해 선 줄이 탑골공원에서부터 담장을 끼고 길게 이어졌다.

 

그 곳은 노숙인보다 집에서 눈칫밥 먹는 노인들이 더 많다.

춥고 미끄러운 눈길을 헤쳐 나와 빵조각 하나 얻기 위해

긴 줄을 서야하는 노인들의 속울음이 귓전에 들리는 것 같았다.

 

곳곳에 오갈 곳 없는 가난한 자들의 서러움이 넘쳐 나는데,

아름다운 설경이나 찾아 나선 스스로의 작태가 부끄러웠다.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인가?

가난한 자의 눈물을 팔아먹는 장사꾼이 아니라면,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문제였다.

 

가난의 서러움을 껴안아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만, 방법이 없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권력자들은 자신의 이권에 눈이 어두워 아무런 관심도 없다.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들을 위한 투사라기보다, 싸우다 죽겠다.

 

새해는 가난한 이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눈이 아니라

내일을 꿈 꿀 수 있는 흰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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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인사동이 인사동 같지가 않다.

인사동이 삭막하게 변한 것이 어제 오늘만의 일도 아니지만,

정든 사람마저 볼 수 없으니,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인사동 풍류객들은 세상을 등졌거나 대부분 떠나버렸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거리도, 여느 거리와 다를 바 없다.

서울역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지만, 특별한 일이 없으면 가기도 싫어졌다.

 

지난17일 오후무렵,  유목민전활철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홍천 사는 양서욱씨가 인사동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를 본지도 오래되었지만, 술 생각이 간절한 터라 하던 일을 덮어버렸다.

 

유목민에 갔더니, 전활철, 양서욱, 고은우씨가 있었다.

가게 안쪽 전등이 꺼진데다 주변이 어수선해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그 날이 정기휴일이란다.

 

홍천에서 집 짓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는 서욱씨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뒤늦게 도언탁, 장은하씨가 등장하며 술자리도 무르익어 갔다.

 

그러나 날씨가 추워 그런지, 벽치기길 입구의 담배포가 문을 닫아버렸다.

술 마시며 담배를 참아야 하는 인내에 한계를 느꼈다.

또 한 곳인 '예당은 술집이라 사러가기가 민망하지만. 어쩌겠는가?

 

하는 수 없이 예당에 담배 사러 갔더니, 도처에 아는 사람들이 콩알처럼 박혀 있었다.

 

최유진, 이만주, 이두엽, 김태서씨 등 반가운 분들이 많았으나, 사진만 찍고 나와 버렸다.

 

돌아오다 새로 생긴 술집에도 잠시 들려 보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장경호, 박원규, 노현덕씨가 앉아 있었다.

느닷없이 등장한 쌍다구에 그들이 더 놀란 것 같았다.

 

반가운 인사동 사람들이 여기 저기 앉아 있으니, 모처럼 인사동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예전 인사동이 정겹듯이, 사람도 오래된 사이가 정겹다. 농익은 술이나 곰삭은 된장처럼...

 

새로 개업한 집에서부터 예당유목민을 오가며 첨벙거리던 중에

흐린 세상으로 건너오라는 이두엽씨의 전화를 받았다.

 

이미 술에 절었지만, 그 쪽 사정이 궁금해 안 갈수가 없었다.

골목을 돌고 돌아 흐린 세상 건너기로 갔더니,

이두엽, 최유진, 이만주씨와 잘 모르는 여시인도 한 분 계셨다.

 

한 때 방송피디로 일하다 신문사사장까지 두루 거친 이두엽씨는

세상을 떠난 여운화백과 더불어 인사동 밤안개로 불렸다.

밤안개처럼, 밤 새도록 인사동을 휩쓸며 새긴 사연이 얼마나 많겠나?

 

그런데, ‘뿌리 깊은 미래라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추진한다는 따끈한 소식을 주었다.

그 첫 번째 대상이 인사동이라며, 인사동의 뿌리를 찾아 나서겠다는 말에 가슴이 부풀었다.

 

인사동의 매력은 정이라는 말에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정하면 인사동의 인정이니, 결국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아닌가?

 

"사람아 사람아~ 인사동 사람아~"

 

사진, / 조문호

 

 

인사동의 멋은 구불구불 미로처럼 이어진 골목에 있다.

주막에서 흘러나오는 취객들의 웃음소리로 항상 왁자지껄하고,

천장 낮은 한옥의 거친 흙벽과 문살 사이로 번지는 불빛조차 포근하다.

 

다들 인사동이 변했다고 탄식하지만, 아직은 골목문화가 살아있어 그리 비관적이지는 않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오래된 술집이나 찻집에 인사동의 풍류와 낭만이 꿈틀댄다.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정적 이미지가 아니라,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동적 이미지를 연출한다.

 

북인사마당에서 남인사마당을 잇는 큰길 사이로 20여개의 골목과 샛길이 이어졌다.

 

도로명이 생겨나며 인사동 골목은 1길에서 30길까지 나름의 길 번지가 생겼는데,

인사동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골목은 아무래도 인사동16길이다.

 

그 골목은 안국역 6번 출구에서 관훈주차장 사이길인 벽치기길과 연결되었는데,

‘유목민’, ‘푸른별이야기’, 누룩나무, 사랑채 등의 많은 술집이 모여 있다.

한식집도 여럿 있고, 옛날의 사랑방모텔도 이 골목에 있다.

 

'이즈갤러리' 옆 골목인 인사동14길은 ‘선천집’, ‘사천집’, ‘이모집’, 등의 한식집과 ‘여자만’도 있다.

‘귀천’, ‘소담’, ‘흐린 세상 건너기’등 찻집도 즐비해 식사와 차 마시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길이기도 하다.

 

쌈지 옆길인 인사동12길로 들어가면 ‘보릿고개추억’, ‘달새는 달만 생각한다’가 있고,

서인사주차장으로 가는 인사동11길에는 생태탕으로 유명한 ‘부산식당’과 오래된 전통찻집 ‘초당’도 있다.

 

그리고 수도약국 옆에 있는 인사동10길로 가면 ‘경인미술관’ 입구에 ‘개성만두 궁’이 있다.

반대편의 인사동9길에는 ‘안동국시 소담’이 있다.

 

 옛날부터 인사동을 출입한 분이라면, 실비대학으로 불린 ‘실비집' 자리 인사동8길을 잊을 수 없다.

지금은 실비집 대신 만두전골로 유명한 ‘사동집’과 ‘인사동수제비’가 있고,

‘대감집’을 돌아 막다른 곳에 자리 잡은 ‘낭만(풍류사랑)’도 인사동사람들이 자주 애용하는 주막이다.

 

 

큰길인 인사동 사거리에는 낙원동 가는 인사동4길이 있고,

반대편의 낙원떡집 방향으로 가는 인사동5길에는 음식점 '경복궁'이 있다.

가는 도중에 베트남요리인 ‘하노이의 아침’과 ‘무교삼계탕’도 있다.

 

인사동 사거리에 있는 4길과 5길, 그리고 인사동10길 만이 차량통행이 가능한 넓은 길이다.

 

인사동4길 옆의 인사동6길로 들어서면 된장비빔밥으로 유명한 ‘툇마루’, 그리고 ‘나주곰탕’도 진국이다. 

 

맛있고 분위기 좋은 집이 어디 그뿐이겠는가?

맛과  흥과 예술이 어우러진 인사동 골목문화는 인사동만의 자랑이다.

 

골목마다 지난 시절의 낭만과 향수를 한 자락씩 깔고 앉은 예술가들이 인생과 예술을 노래한다.

 

인사동 골목 골목 자리잡은 풍류객들이 그리워 오늘도 인사동 간다.

 

'신촌부루스' 엄인호의  '골목길' 노래가 생각난다.

“골목길 접어들 때면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은 뭐니 뭐니 해도 골목문화가 성행한 동네다.

큰 길을 가운데 두고 틈틈이 생겨 난 골목이 스무여 개나 되는데,

그 골목 축에도 못 끼어 문패도 없는 개구멍 같은 길이 벽치기 길이다.

 

안국역 6번 출구 전방의 담배 가게 맡은 편에 있는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는 샛길인데, 옛날 늦은 밤에는 취객들의 화장실이었다.

지린내를 맡으며 개구멍 같은 통로를 오갔는데,

때로는 소변 보던 취객이 길을 막기도 하지만, 얼마나 급했으면 길에 싸겠는가?

 

통행이 잦은 요즘은 그리 간 큰 사람이 없지만.

그 골목에 ‘유목민’ 같은 업소가 생겨나며 샛길로 자리 잡은 것이다.

휠체어를 탄 최혁배씨를 비롯한 많은 인사동사람들이 불편을 겪어 와,

오가는 사람마다 벽을 한 번씩 쳐 허물자는 뜻에서

‘벽치기’로 불렀는데, 그게 골목이름이 되어버렸다.

 

그 문제는 주차장에서 조금만 양보하면 될 일이지만,

종로구청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해, 그 자체를 살리며 통행에 불편이 없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물론 둘러 가는 ‘인사동16길’이 있으나, 지름길을 아는 이상 누가 둘러 가겠는가?

 

그 안에는 ‘유목민’ 외에도 ‘푸른별 이야기’, ‘누룩나무 등의 술집과

'유담'찻집이 있고, 마지막 코너에 있는 ‘보고사’를 돌면,

'사랑채'를 비롯한 많은 술집들과 호텔도 있다.

 

그리고 춥지만 않으면 담배 피울 곳 찾는 손님들로

골목자체가 술집이 되어버릴 정도로 통행이 많은 곳이다.

건너편에 사람이 들어오면 기다렸다 갈 수는 있으나

최소한 장애인이 탄 휠체어는 통과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은 비좁은 골목 자체가 유명세를 타고 있다니, 할 말이 없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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