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천사여” 편지 사방팔방엔 ‘뽀뽀’…어느 무연고자의 죽음

이중섭, 황소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통과. 가도 좋소."

1953년. 이중섭은 침을 꼴깍 삼켰다. 입국심사 직원에게 가짜 선원증을 돌려받았다. "고맙습니다." 다행이다…. 중섭은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짐가방을 꾸역꾸역 들었다. "아, 그런데 잠깐." 직원이 중섭을 다시 불렀다. 위조가 걸린 건가? 이대로 도망쳐야 할까? 중섭은 오만가지 생각을 했다. "선원 양반, 혹시 괴혈병 아니야? 안색이 안 좋으니 병원부터 가보쇼. 아무리 일주일짜리 체류라고 해도…." 중섭은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섭은 땀에 푹 젖은 채 바깥 공기를 맞았다. 짭조름한 소금 냄새가 코를 시큰하게 했다. 일본이었다. 사랑하는 아내, 목숨보다 귀한 두 아들이 있는 히로시마였다.

"아고(あご)리!" "아빠!"

중섭이 여관방 문을 두드렸다. 아내 마사코와 아들 태현, 태성이 달려왔다. 중섭의 세상에 이제야 색채가 깃들었다. 꿈에서나 보던 이들 앞에서 눈물, 콧물을 다 쏟았다. "그래, 건강은 어떻소? 밥은 잘 챙겨 먹고 있소?" 중섭은 훌쩍대며 마사코의 두 볼을 감쌌다. "아고리, 당신은요. 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어요." 마사코도 울먹였다. "어쩌다 살이 이렇게 빠졌어요. 나보다 더 아파 보여요." 마사코는 중섭의 얇은 뱃가죽을 안았다. "나는 괜찮소. 나는 지금 최고로 행복하오." 중섭은 눈물을 쓱 닦고 활짝 웃었다. "너희들, 엄마 말은 잘 듣고 있었어?" 중섭이 묻자 아이들은 질세라 네, 라고 대답했다. "아빠, 내가 그린 그림 보여줄게요!" "저랑 자전거 구경하러 가요!" 중섭은 그런 아이들을 힘껏 껴안았다. 사랑한다, 정말 너무너무 사랑한다…. 중섭은 이 말만 계속했다.

 

이중섭, 시인 구상의 가족

꿈 같은 일주일이었다.

중섭은 마사코와 종종 걸었다. 손을 잡고 강줄기를 산책했다. 함께 해와 달을 바라봤다. 꽃과 나무를 구경하고, 강과 바다를 감상했다. 두 아들과도 실컷 놀았다.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술래잡기를 했다. 군것질거리도 잔뜩 먹었다. 중섭은 습관처럼 시계를 봤다. 이대로 초침이 고장 나길 바랐다. 온 세상이 멈췄으면 했다. 시간은 야속했다. 벌써 마지막 날 밤이었다. 중섭과 마사코, 마사코의 어머니(장모)가 함께 늦은 저녁을 먹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곤히 잠들었다. "그냥…. 그냥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 있을까 보오." 중섭은 고민을 털어놨다. "다시 갈 자신이 없소." 마사코도 중섭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젖은 두 눈만 깜빡였다.

"자네, 그건 안 될 일일세."

중섭의 무모한 결정을 막은 건 장모였다. "자네는 훗날 훌륭한 화가가 될 거야. 여기에 남으면 불법체류자가 되는 거야." 중섭은 얼굴을 푹 숙였다. "…그러니까 위대한 화가가 되고 나면, 그때 내 딸과 손자를 호강시켜주게. 모두 내가 잘 보살피고 있을 테니. 지금은 견딜 때야. 조금만 더 버텨주게." 불법체류자의 삶은 곧 도망자의 삶이었다. 중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박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중섭 가족은 눈물의 생이별을 했다. "아빠가 곧 돌아올게. 그때는 꼭 자전거를 사줄게." 중섭은 너무 울어 얼굴이 새빨개진 아이들과 약속했다. 배에 탄 중섭은 점점 멀어지는 가족을 봤다. 이들이 점보다 작아져 사라질 때까지 봤다. 마사코와 아이들은 끝없이 팔을 흔들었다. 중섭은 이후 죽을 때까지 가족을 만나지 못한다.

아고리·아스파라거스의 첫 만남

 

이중섭이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화

"오늘은 뭘 그려요?"

"네?" 1939년, 일본 문화학원(文化學院).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중섭의 등을 콕 누르며 물었다. 중섭이 수돗가에서 붓을 씻고 있을 때였다. "저는 야마모토 마사코예요.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미안해요." "괜찮아요." 중섭은 붓을 탈탈 털며 말했다. "제 이름은 이중섭입니다." "그런데요. 별명이 진짜 아고리에요?" 중섭은 눈을 동그랗게 뜬 마사코를 쳐다봤다.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보다시피 제 턱(あご·아고)이 길어서요." 중섭은 자기 턱을 문지르며 씩 웃었다. 마사코도 따라서 웃었다. 중섭은 마사코의 깔끔한 앞머리를 봤다. 곧게 뻗은 등, 장난스러운 미소에서 보이는 흰 앞니도 봤다. "같은 미술부라고요? 정말 몰랐네요." "아고리 상은 늘 친구 무리에 둘러싸여 있으니까. 사실은요. 전 지금 굉장히 용기 내고 있는 거에요." 중섭은 마사코의 손이 떨리고 있는 걸 알았다. 그녀의 두 귀가 차츰 빨개지고 있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혹시 시간 되면…." 이번에는 중섭이 용기를 냈다. 중섭은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게 될 것을 확신했다.

그 시절 중섭은 문화학원 내 인기 스타였다.

중섭은 훤칠했다. 이목구비도 뚜렷했다. 그림도 잘 그렸고, 운동도 잘했다. 중섭은 귀공자 분위기를 풍겼다. 실제로도 중섭은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1916년, 중섭은 평안남도 평원에서 부농(富農)의 아들로 태어났다. 외가 또한 100칸 넘는 집이 있는 재력가였다. 1930년, 열네 살의 중섭은 명문 오산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때마침 미국 시카고 미술대학과 예일대학을 수석 졸업한 임용련이 부임했는데, 중섭은 그의 스케치 수업에 빠져 미술에 진지하게 입문했다. 중섭은 여러 공모전에서 상을 휩쓸며 재능을 보였다. 임용련은 중섭을 놓고 "미래에 거장이 될 것"이라고 했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중섭 집안은 이 반짝이는 막내아들에게 더 큰 세상을 안기기로 한다. 1936년, 중섭은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중섭은 자유로운 학풍의 문화학원에 자리 잡았다. 부족함 없이 입고, 아쉬움 없이 먹고 배워왔던 덕에 금세 눈에 띄었다. 그 결과, 어느 햇살 좋은 날에 마사코와 만나 인연을 맺은 것이다. 조심스러운 중섭이 끝내 고백을 못하자 그의 친구가 두 사람만 초대한 뒤 "빨리 할 말 해!"라며 휙 떠났다는 말도 있다.

 

이중섭이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화. 이중섭이 상처난 마사코의 발가락을 치료하고 있는 모습을 담았다.

"아고리는 오늘도 를 그려요?"

"나는 우직한 소가 우리 민족과 닮았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쭉 그릴 거예요." 중섭과 마사코는 나란히 누워 작업실 천장을 바라봤다. 중섭은 마사코의 앞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마사코는 그런 중섭 쪽으로 몸을 돌려 더 바짝 붙었다. 중섭과 마사코는 결혼을 말할 사이까지 발전했다. 중섭은 마사코의 단정함을 좋아했다. 마사코는 중섭의 진중함을 귀여워했다. 마사코 또한 아버지가 대기업 고위임원진에 속하는 등 집안이 좋았다. 이런 점도 서로에게 묘한 공감대를 줬을지도 모른다. 중섭은 마사코를 '아스파라거스'라고 불렀다. 둘은 바쁜 일정 탓에 아스파라거스 통조림으로 종종 끼니를 해결했다. 중섭은 마사코의 발가락이 하얗고 긴 아스파라거스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중섭을 늘 아고리라고 부른 마사코도 자신만의 애칭이 생긴 게 싫지 않았다

 

이중섭, 망월

2년 선배였던 중섭이 먼저 졸업했다.

중섭은 자주 볼 수 없게 된 마사코에게 1년에도 80통 넘게 엽서를 썼다. 사랑 편지이자 청혼 편지였다. 중섭은 그사이 화가 입지도 더 굳혔다. 중섭은 일본자유미술가협회 주최의 태양상을 받았다. 일본인도 타기 힘들다는 상이었다. 그가 낸 작품은 '망월'이다. 그림은 슬프다. 처절하다. 일제강점기에 있는 조국의 슬픔, 그런데도 희망을 기원하는 초월적 의지가 느껴진다.

세기의 결혼…‘꽃길’ 펼쳐지길 바랐지만

 

이중섭, 말과 소를 부리는 사람들

1943년 8월, 중섭은 다시 고향으로 왔다.

잠깐 전시 준비를 위해 들렀다가 일본으로 출국길이 막혔다는 말이 있다. 당시 미국과 일본 사이 태평양 전쟁이 절정이었는데, 징용을 피해 귀국했다는 말도 있다. 중섭은 어쩔 수 없이 고향에서 그림을 그렸다. 소, 물고기, 달과 새, 연꽃 등 향토적 소재를 화폭에 담았다. 워낙 뚫어지게 관찰한 탓에 소도둑으로 몰린 적도 부지기수였다. 중섭은 저 멀리 있는 마사코에게 계속 사랑의 편지를 썼다. 마사코도 변함없이 애정을 표현했다. 중섭과 마사코는 세상이 더 어지러워지기 전에 결혼해버리기로 했다. 외려 떨어져 있었기에, 둘은 서로가 없으면 제대로 살 수 없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1945년, 오직 중섭을 보기 위해 마사코는 목숨을 걸었다.

광복 직전 시기에 겨우 배를 얻어타고 대한해협을 건넜다. 그해 5월, 둘은 원산에서 혼례식을 올렸다. 전쟁이 한창일 때 본토의 일본 여성이 사랑을 찾아 식민지 조선에 온 일, 그 땅에서 식민지의 전통 의상인 한복 차림으로 백년가약을 맺은 일 모두 이례적이었다. 중섭과 마사코의 결혼식은 둘과 안면 없는 사람까지 모여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중섭은 마사코에게 '이남덕'(李南德)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줬다. '남쪽에서 온 덕 있는 여인'이란 뜻이었다. 마사코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억지 결혼에 나섰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훗날 마사코는 "부모님은 '화가로 먹고살 수 있을까'란 걱정만 했을 뿐, 중섭을 조선인이라고 차별한 적이 없다. 아버지는 '딸 바보'였다. 나를 믿어줬다. 먹고살기 힘들면 다시 돌아오라는 말만 했다"라는 말로 사실관계를 바로잡았다.

 

이중섭, 부부 [국립현대미술관]

중섭과 마사코는 앞으로 꽃길이 펼쳐지길 바랐다.

부유한 두 집안의 결합이었으니 무리한 생각이 아니었다. 하지만 먼 훗날 둘의 삶 끝 지점에서 돌아보면, 이들 앞에는 긁히고 찢기는 가시밭길뿐이었다. 중섭이 가족과 함께 보낸 시간은 앞으로 약 7년에 불과하다. 중섭과 마사코가 결혼하고 3개월 뒤인 8월15일, 한반도는 광복했다. 기쁨도 잠시, 국토 한가운데 삼팔선이 그어졌다. 중섭이 있던 원산은 북한의 공산 정권에 속했다. 자본가였던 중섭 집안은 곧장 반동으로 내몰렸다. 사업가 기질을 가진 형 중석은 오랜 기간 고초를 겪었다. 중섭은 강제로 공산당 동맹에 가입했다. 감성적 표현을 중시한 중섭에게 공산당 특유의 직선적 화풍은 물과 기름이었다. "정말 맥없다…." 중섭은 공산당 회의를 다녀오면 마사코에게 늘 이렇게 호소했다.

 

이중섭, 가족과 비둘기

이런 불행마저 모두 집어삼킬 만한 더 큰 불행도 찾아왔다.

중섭과 마사코는 결혼 1년 뒤 낳은 첫아들을 거의 바로 잃었다. 디프테리아였다. 중섭은 낙담했다. 이쯤부터 중섭은 소와 함께 '아이들'을 정성껏 그렸다. 예술 활동이자, 먼저 떠난 아들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의식이었다. 중섭과 마사코는 이듬해, 그리고 2년 뒤 각각 태현, 태성을 낳아 두 형제를 품는다. 하지만 이들은 너무 빨리 간 첫 아기를 평생 가슴에 묻고 살게 된다. "혼자서는 외로울 거다. 아빠, 엄마가 가기 전에는 '이 친구들'과 맛있는 것 먹으며 놀거라…." 중섭은 관속에 누운 첫째 아들 위에 그림 몇 장을 올려뒀다. 그가 아이들을 그린 초기작 중 제일 잘 그린 그림들이었다. 배를 깐 채 장난을 치고 있는 아이들, 천도복숭아를 양껏 따먹는 아이들 등이 담긴 작품들이었다고 한다.

6·25 발발에…가난에 허덕이다

 

이중섭, 길 떠나는 가족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부잣집 출신이라 요주의 인물로 취급받던 중섭은 중공군(中共軍)이 온다는 소식에 짐을 쌌다. 피란이 시급했다. 가만히 있으면 정말 총살형을 당할 수도 있었다. "어머니, 빨리 가야 해요! 여길 안 떠나면 정말 죽어요!" 중섭은 어머니를 설득했다. "네 형, 중석이가 아직 안 왔다." 어머니는 슬픈 눈으로 중섭을 쳐다봤다. "네 형이 돌아왔는데 다 없으면 얼마나 놀라겠어. 내가 여길 지키마…." 중석은 이미 완장꾼들에게 부르주아로 몰려 비참한 최후를 맞은 후였다. 이 사실을 아는 중섭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어머니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했다. 중섭은 자기 그림 대부분을 어머니에게 안겼다. 그렇게 막내아들이 곧 돌아올 테니 그림을 잘 부탁한다며 안심시켰다. 행여나 못 돌아오더라도, 나라가 잠잠해진 뒤 팔면 종잣돈은 될 것이었다. 희망은 희망일 뿐이었다. 중섭은 앞으로 죽을 때까지 어머니를 보지 못한다. 그는 마사코와 두 아들을 데리고 떠났다. UN군 수송선을 탔다. 도착한 곳은 부산이었다.

 
이중섭, 밤과 까마귀

중섭은 막막했다.

이곳은 낯선 땅이었다. 늘 차고 넘친 돈이 없다. 몸을 기댈 친척도, 지인도 없다. 일단 밥벌이를 해야 했다. 생이 그림보다 먼저였다. 그날 밤 가족이 모여 먹을 수 있는 밥과 반찬이 시급했다. 도련님이 막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중섭은 종종 부둣가에 나갔으나 돈벌이는 시원치 않았다. 가끔은 푼돈을 받고도 "얼마 전 폐를 끼친 아무개에게 고마움을 표한다고…"라며 텅 빈 주머니로 돌아왔다. 마사코는 속이 터졌다. 하지만 이 가엽고도 순진한 남편을 무턱대고 탓할 수 없었다.

마사코가 직접 팔을 걷었다.

광장에서 재봉질을 했다. 받은 푼돈으로 아이들 밥을 해 먹였다. 훗날, 중섭과 가까웠던 화가 황염수의 아내 남경숙은 당시 마사코를 회상하며 "(그 시절)중섭은 정말 무능하고 나쁜 남편이었다"고 분노노하기도 했다. 그만큼 마사코는 처절하게 바느질을 했다. 중섭의 가족이 몸을 둔 집은 비좁았다. 공기는 탁했고, 바닥은 차가웠다. 이들은 온갖 옷과 천을 다 껴입고 잤다. 그런데도 추워 신음했다. 중섭은 고향의 더운 방에서 온 가족이 홀딱 벗고 자던 그때를 떠올렸다. 어쩌면 마사코도, 어쩌면 두 아들도 그 시절을 추억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배고프고 비루했지만…행복했던 1년

 

이중섭, 서귀포의 환상

"서귀포로 가보셔. 서귀포 칠십 리에 물새가 운다는 노래도 있지 않소."

온 세상 피란민이 다 몰려드는 부산을 뒤로하고 제주도로 온 중섭 가족은 한 노인의 권유를 듣고 서귀포로 갔다. 그냥 몇 날 며칠을 걸었다. 도착했을 때는 거의 거지꼴이었다. 서귀포의 알자리 동산마을 반장인 송태주·김순복 부부가 이들을 딱하게 여겨 본인들의 집 곁방을 내어줬다. 1.4평짜리 방이었다. 중섭은 이들이 고마웠다. 중섭 가족은 1951년 봄부터 겨울까지 근 1년간 이 방에서 옹기종기 지낸다. 배고프고, 비루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훗날 중섭은 이 시기가 가족과 함께 보낸 가장 행복하고 풍요로운 때였다고 추억한다.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허나 아름답도다"라는 시를 쓸 정도였다.

 

이중섭, 그리운 제주도 풍경

서귀포에 새롭게 둥지를 튼 중섭 가족은 한라산에서 뜯어온 부추를 씹어먹었다.

그것마저 떨어질 때는 바다로 갔다. 게를 잡았다. 아장대는 녀석들을 굽거나 찌면 한 끼 식사였다. 아이들은 놀이하듯 게를 잡고, 건지고, 쫓아갔다. 자빠지면 그대로 까르르 웃었다. 중섭과 마사코는 이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이 순간만큼은 눈물겹게 행복했다. 중섭은 가족과 떨어지게 되는 가까운 미래에 '그리운 제주도 풍경'을 그리게 된다. 삶이 휘청일 때마다 꺼내먹고, 또 꺼내먹은 추억을 화폭에 담았다. 벌거벗은 아이들이 게와 씨름하듯 놀고 있다. 이를 보는 중섭과 마사코는 아무 걱정이 없는 듯하다. 중섭은 아이만큼 게도 정성껏 그렸다. 중섭은 종종 게를 너무 많이 잡아먹는다며 이들에게 미안함을 말하곤 했다. 서귀포 생활이 익숙해질 때쯤 중섭은 가끔 마을 언덕에 올라 섶섬을 봤다. 섶섬은 포화에서 벗어나 거짓말처럼 평화롭게 두둥실 떠 있었다. 초연함을 되새길 수 있었다.

 

이중섭, 섶섬이 보이는 풍경 [이중섭미술관]

중섭은 밝은 미래를 꿈꿨다.

소일거리도 하나둘 들어왔다. 이제 전쟁만 사라지면 바랄 게 없었다. 이쯤 뭍에서 반가운 소식이 닿았다. 전쟁이 곧 끝날지도 모른다고 했다. 중섭은 부푼 꿈을 안았다. 마사코, 아들들과 함께 다시 부산으로 갔다. 중섭은 땅을 밟자마자 절망했다. 소문은 가짜였다. 전쟁은 끝나기는커녕 교착 상태였다. 나라는 여전히 불안했다. 도시는 아직도 혼란스러웠다. 중섭 가족을 맞이한 건 한파와 빈곤뿐이었다. "여보, 괜찮소?" 중섭은 그쯤부터 마사코에게 이상함을 느꼈다. 마사코는 자꾸 기침을 했다. 입에 댄 손수건에 피가 묻어나오기도 했다. "아고리. 여긴 너무 추워요." 마사코는 폐결핵에 걸렸다. 요 며칠 풀죽만 먹인 아이들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눈에 띄게 야위었다. 계속되는 피란, 끈질기게 따라붙는 가난이 모두에게 죽음의 그림자를 씌우는 중이었다. 1952년, 마사코와 아이들은 일본으로 갔다. 요양을 위해서였다. 그쯤 장인도 사망했기에, 더더욱 가야했다. 그래도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린 마사코에게 대고 중섭이 설득했다는 말이 있다.

세상은 끝내, 만만치 않았다

 

이중섭, 마사코에게 보낸 편지 일부 [국립현대미술관]

단잠 같은 일주일을 보낸 뒤 돌아가는 중섭은 가족이 점이 돼 사라진 후에야 꺽꺽 울었다.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억지를 쓰더라도 남아있을 것을 수백번 후회했다. 친구들도 "왜 바보같이 돌아왔느냐"며 안타까워했다. 이제 중섭의 희망은 하나였다. 빨리 그림을 그려 전시회를 열고, 돈을 잔뜩 벌어 가족과 다시 같이 사는 것이었다. 한국 땅을 밟은 중섭은 떠돌이 생활을 했다. 하루를 벌어 하루를 살았다. 막일을 하면서도 잡지에 실을 삽화 등 그림은 꼭 그렸다. 중섭은 소와 게, 가족 등을 소재로 삼았다. "끝없이 훌륭하고, 끝없이 다정하고, 나만의 아름답고 상냥한 천사여. (…) 더욱 힘을 내 더욱 건강하게 지내주오. (…) 내 사랑하는 아내 남덕 천사 만세, 만세." "아빠는 온종일 태현이와 태성이, 엄마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어요. 곧 만날 생각을 하니, 아빠는 너무 즐거워요." 그쯤 가족이 너무 보고 싶어 편지도 많이 썼다. 내용은 희망으로 가득했다. 중섭은 글과 함께 그림도 곁들였다. 두 아들이 그림을 놓고 싸울까 봐 같은 그림을 두 장씩 그려줬다. 편지지 가장자리 사방팔방에 '뽀뽀'라는 말을 써놓기도 했다.

 

이중섭, 흰소
이중섭, 흰소

슬픔은 아름다움을 낳는다.

지인 도움으로 1954년까지 통영에 머문 중섭은 필생의 걸작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중섭은 '소' 연작과 '부부' 연작, '길 떠나는 가족' 등 그림을 내놓았다. 모두 한국 미술사의 대표작이 될 작품들이었다. 화구를 살 돈도 없던 중섭은 양담배 은박지를 모았다. 길거리를 나뒹구는 이 은박지를 모아 못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른바 은지화(銀紙畵)다. 중섭은 은빛으로 반짝이는 마사코와 아이들을 보며 그리움을 삼켰다. 하지만 중섭에게 세상은 끝까지 가혹했다. 중섭은 1955년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개인전을 치렀다. 마지막 혼을 갈아 넣은 행사였다. 미술계의 평은 좋았다. 작품성이 넘실거린다고 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많은 이가 그의 그림을 외상으로 가져가곤 값을 보내지 않았다. 난리를 틈타 그림을 훔쳐가는 이도 있었다. 전시는 상처뿐인 영광만을 안겨줬다. 뒤이어 대구에서 연 전시는 반응마저 싸늘했다. 그의 은지화에는 싸구려 춘화(春)라는 딱지도 붙었다.

 

이중섭, 싸우는 소, 1954
이중섭, 싸우는 소, 1955

그 사이 마사코도 중섭을 위해 노력했다.

마사코는 중섭 모르게 사업을 벌였다. 중섭의 오산학교 후배에게 일본 서적을 외상으로 사주고, 이를 팔아 이윤이 나면 일부를 받는 일이었다. 너무 쉬운 일이었다. 너무 단순한 일이었다. 그래서 사기였다. 그 후배는 돈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횡령한 뒤 꿀꺽 삼켰다. 마사코는 거액의 빚을 졌다. 앞으로 20년 이상 삯바느질을 해야 할 만큼 타격을 입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중섭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중섭도, 마사코도 빈털터리였다. 희망은 모래알처럼 빠져나갔다. 중섭의 1954년 작품 '싸우는 소'를 보면 어떻게든 온 힘을 다해 맞서려는 투지의 소가 보인다. 1년 뒤 중섭이 다시 그린 '싸우는 소'는 힘없이 고꾸라지고 있는 소 뿐이다.

 

이중섭, 돌아오지 않는 강

끝이었다. 모든 게 끝이었다.

중섭은 무너졌다. "작업에 몰두하며 어떻게 하면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지 온통 그 생각뿐이라오"라던 편지를 쓰던 중섭은 모든 것을 내려놨다. 이젠 아내가 보낸 봉투를 뜯지도 않았다. 중섭은 생애 마지막 그림을 그렸다. 한 남성이 남루한 집 창틀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저 멀리에 광주리를 진 한 여성이 있다. 서 있는지, 다가오고 있는지, 멀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종이에 찍힌 얼룩은 눈물 자국 같다. 중섭이 그 시절 상영하던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 포스터를 보고 제목에 영감을 받아 그린 절필 작이다. 제목은 똑같이 '돌아오지 않는 강'으로 지었다.

 

이중섭, 부부(은지화)

중섭은 조금씩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그의 꿈에선 북한에 두고 온 어머니와 일본에 가 있는 마사코가 번갈아 나타났다. 중섭은 자신에 대해 실패한 가장이라고 했다. 자기가 대단한 예술가가 될 것처럼 세상을 속였다며 가슴을 퍽퍽 쳤다. 중섭은 밥을 아예 끊었다. 거식증에 걸린 그는 물만 마셔도 토할 만큼 몸이 상했다. 중섭은 청량리정신병원 무료 입원실에 입원했다. 그곳에서 간염 진단을 받은 그는 곧 서울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다. 중섭은 1956년 9월6일 무연고자로 생을 마쳤다. 중섭의 시신 곁에는 병원비 독촉장이 다였다고 한다. "사랑하는 마사코, 정말 외롭구려. 소처럼 무거운 걸음을 옮기며 안간힘을 다해 그림을 그리고 있소." 죽기 얼마 전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 한 장이 유언이 됐다. 마사코는 중섭이 죽은 후 평생 수절(守節)하다 지난해 8월13일에 노환으로 별세했다.

 

이중섭
2012년 11월 제주 서귀포시 이중섭미술관에서 야마모토 마사코 여사 [연합]

 

최석태의 WHY YOU

꼬리가 묶인 채 서로 죽이려는 야수는 왜 그렸나?

앞에서 알미늄박지에 긁어 그린 그림 가운데, 전쟁 중 저질러진 양민 학살을 고통스럽게 보여주는 그림을 이미 살펴본 바 있다. 그 그림의 화면 오른쪽에 어머니인지 아내인지 모르겠으나 큰 비중으로 그려진 여자의 얼굴이 있고, 짧고 굵은 선으로 흐르는 눈물을 표현한 것에서 나는 눈을 떼기 어려웠다. (관련기사 이중섭 <눈물>, 원통한 떼죽음을 은박지에)

 

▲ 눈물, 담배를 싸는 알루미늄 박지에 긁어서 새기고 색칠, 10x15센티미터,&nbsp; 대구 인당박물관 소장. 이중섭, 백년의 신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2016. 6. 3-10. 3, 도판 125
이렇게 처참한 동족상잔, 골육상쟁을 그린 그림이 또 있다. 

아래 그림을 보면, 두 마리의 네발 짐승이 아래위로 그려져 있다. 이들의 꼬리는 묶여 있고 짐승의 머리 부분은 사람의 상체로 설정되어 있다. 이들 사람인지 짐승인지 모를 괴물은 손에 망치와 칼을 쥐고 서로 해치려는 것으로 보여 우리를 놀라게 한다. 섬찟한 느낌이다.

 

▲ 이중섭, 꼬리가 묶인 채 서로 해치려는 괴물들, 종이에 잉크와 수채, 그림만 26x26센티미터, 소장자 모름
이중섭은 서로 해치려는 두 마리의 짐승을 그리면서 그 꼬리가 서로 묶인 것으로 연출함으로써 이들이 처한 상황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서로를 스스로 묶었는가? 누군가가 강제로 묶었는가? 이들은 왜 한 손에 서로를 해치는 흉기를 들고 휘두르고 있는가?

그런데 이렇게 서로 다른 짐승의 꼬리를 연결하는 발상을 한 그림이 또 있다. 그 그림은 이중섭이 1941년 6월 2일자 엽서에 그려 보낸 그림이다. 특이하게도 이 그림에 등장하는 세 마리 짐승들의 꼬리는 서로 연결되어 그려져 있고 여인이 그것을 손잡이처럼 들어올리고 있다.

 

한 방향으로 달리는 세 마리 짐승 그림이 1941년에 그려진 반면, 이번에 소개하는 서로 해치려는 두 짐승의 그림은 1950년 이후 휴전으로 전쟁이 멈춘 시기를 전후하여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들의 꼬리는 확연하게 묶여 있다. 조금만 더 잡아당기면 풀기 어려운 옭매듭이 되어버릴 것만 같다.

 

▲ 꼬리 부분이 옭매듭 직전으로 엉켜있다.
시간 차를 두고 그려진 그림들에서, 이중섭은 짐승의 꼬리를 통해 무슨 말을 하고싶었던 것일까? 해방 이전에는 평화로운 통일 조국에 대하여 희망을 가졌었는데, 해방 이후 엉켜버린 정국 속에서 걱정스럽고 실망한 마음을 표현한 것일까?

원래 그림을 다시 보자. 일견 잔인해보이는 설정 이면에 중섭은 좀 더 생각하게 하는 장치를 마련했다. 칼과 망치를 들고 서로 해하려 하는 장면이지만 둘의 얼굴 표정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민하게 한다. 그들의 얼굴 표정이 잔인한 짓을 할 때의 표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손에 망치를 든 괴물의 다른 손은 칼 든 상대편 팔을 잡으려는 듯 뻗어있으나 표정은 마뜩찮은 듯 찌푸려져 있다. 칼을 든 괴물은 상대방의 손을 피하려는 듯하다. 쌍방이 다 곤혹스러운 표정이다.

 

이 그림은 소재 말고 또 다른 점도 특이하다. 한글가로풀어쓰기로 이름을 그림의 맨 위, 그것도 가운데에 적었다. 그리고는 이름의 좌우로 네모난 종이 형태에 맞추어 테를 둘렀다.

그림에 곁들인 색칠도, 위아래 짐승들의 몸통 색은 상대방이 걸쳐입은 저고리 색과 같게 칠했다. 그런데 색칠한 방법은 다르다. 저고리는 세로로 몸통은 가로로 그려진 느낌이라서, 같은 색이지만 칠이 다르도록 구성했다. 배경은 차가운 색으로 선택해 그림 전체의 어두운 분위기를 강화하고 있다.

 

이 그림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한 내용이 있다.

나라의 절반을 꺾어 한배새끼가 서로 목을 자르고 머리를 까고 세계의 모든 나라가 어울림을 해 피와 불의 회오리바람을 쳐 하늘에 댔던 그 무서운 난리

- 함석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사상계, 1958. 8 (임헌영,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문학가 임헌영과의 대화, 한길사, 2021, 98쪽에서 재인용)

 

6. 25 전쟁이 이런 전쟁이었다고 절규하는 듯한 말이다. 함석헌의 이 말이 나오기 수년 전 어느 때에 화가인 이중섭은 이 처참한 상태를 그린 것이다.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당하는 이 처참함을 세계에 내놓아 증거하고 싶다는 마음을 적어보내기도 한 이중섭이었다. 

 

크지 않은 종이에 그려진 이 그림은, 분명 전시나 책자로 발표하기 위해 그린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기만 하고싶지는 않았던 이중섭이 주위 사람에게 그려준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런 그림이 좋은 바탕재료 위에 비싼 물감으로 그려진 그림보다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림의 제목은 필자가 붙인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분이 더 좋은 이름을 궁리해 내기를...

 

최석태 미술평론가 

[출처] 뉴스아트 (https://www.news-art.co.kr)

뉴스아트 / 최석태의 WHY YOU

 

몇 번이나 지우고 정성 들여 고친 연필화
해방 직후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던 분위기를 반영한 듯

 

이 그림에 대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번 언급한 고 이구열 선생님은 이중섭이 연필을 남다르게 구사한 점에 주목했다. 표현이 육중하고 사색적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기법이 놀랍고 예술적 깊이가 완벽하여 감탄을 자아낸다고 하였다.

 

▲ 이중섭, 세 사람, 종이에 연필, 18.3x26.2 센티미터,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세 사람이 그림을 꽉 채우고 있다. 그다지 크지 않은 화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맨 앞 사람이다. 그 뒤에 세운 무릎에 두 팔을 얹고 머리를 웅크리고 앉은 인물을 배치했다. 그 뒤로는 두 팔을 깔고 엎어져 누운 인물이 보인다. 배경은 땅바닥인 듯 가로줄이 그어졌다.

 

뒤에 있는 두 사람이 다소 무기력해 보이는 것과 달리, 앞의 사람은 보는 사람에게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자세를 하고 있다. 무언가를 모르는 척하는 것 같다. 왼팔을 얼굴 위에 놓고, 잔뜩 긴장한 상태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건드리기만 해도 바로 반격할 태세다. 무릎을 세워 접은 왼쪽 다리와 바닥에 기대어 접은 오른발은, 왼손과 마찬가지로 잔뜩 긴장한 상태다. 앞 사람의 왼쪽 팔과 오른쪽 발은 연필을 거듭 그어대서 매우 진한 상태다.

 

나는 맨 앞에 있는 사람을 이중섭이 얼마나 정성 들여 고쳐 그렸는가 하는 점에 주목한다.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오른쪽 종아리나 머리 위로 올린 두 팔이 이룬 각도를 다소 느슨하게 그렸다가 더 가파르게 보이도록 바짝 당겨붙여 그리고 펜선을 지운 흔적이 뚜력하다. 그는 왜 이렇게 고심한 것일까?

 


이 그림이 언제 그려졌느냐 하는 것은 그림의 내용을 파악하는데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중섭의 조카이자 지금은 돌아가신 이영진 선생님의 주장에 따라 나도 이 그림은 1942년부터 여러 해에 걸쳐 그려진 것으로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그림의 내용을 면밀히 살펴본 결과, 이제 그 견해를 취소한다. 그림이 그려진 것은 1945년 8월 이후, 9월 정도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림의 앞 쪽에 있는, 모르는 척하며 팔로 눈을 가리고는 있지만 굳게 다문 입술로 “우리를 모욕하면 가만 있지 않아!”라고 말하는 듯한 인물이 1942년에 착안되어 그려지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1945년 가을은 해방됐다는 벅찬 기분이 유지되던 때였으나 불안감이 컸다. 북에는 소련군이, 남에는 미국군이 군정을 선포한데 이어 38선 이남의 유일한 정부가 미군정이라고 선언한 때가 10월 초였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가 힘을 모으면 독립된 나라를 세울 수 있다는 희망이 꺼지지 않은 때였다.

 

맨 앞의 인물은 그렇게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던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당시 대중들의 문맹률은 매우 높아서 이중섭은 나라의 미래에 대하여 무기력함을 느꼈을 수 있다. 그는 뒤의 두 인물을 통해 이러한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면서도 앞의 인물을 통해 복잡하지만 단호한 심경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 아닐까.

 

 

이 그림은 1945년 10월에 처음 선보였다.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새로운 국면이 열린 지 불과 몇 달 뒤 10월에 서울에서 열린 해방기념 미술전에 내보이기 위해 원산에서 가져 온 것이다.

 

하지만 이중섭은 이 그림을 해방기념 미술전에 걸지는 못했다. 그림을 가져왔을 때는 전시회가 이미 끝났기 때문이다. 그 때 중섭의 친구인 시인 오장환과 관련된 인천의 시인, 조각가 등이 광복의 기쁨을 표현하는 인천의 문화행사에 그림을 출품하라고 요청했다. 이중섭은 이 그림과, 함께 가져왔던 <소년>이라는 연필화를 출품하였다.

 

 

<세 사람>과 함께 그려진 <소년>. 징용을 당했거나 돈 벌러 일본이나 만주로 갔던 아버지를 기다리는 것일까? 아니면 정신대 불려간 누나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일까? 베어진 나무 그루터기, 바람부는 듯한 언덕 사이로 난 길 가운데 비오는 듯한 그림 전체의 분위기에 왼쪽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불안감을 더한다.

 

전시를 마친 두 점의 연필화는 이중섭이 일본에서 공부할 때 알게 된 같은 유학생이자 인천에 온 이중섭을 재워주는 등 호의를 베풀었던 노상덕에게 주었다. 이 연필화는 그 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지금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이 되었다.



[출처] 뉴스아트 (https://www.news-art.co.kr)

개인사가 아니라 휴전협정 뒤 희망을 담은 그림
세련되고 비범한 조형감각을 드러낸 명작

 

최석태 / 미술평론가

 

▲ 달과 까마귀. 종이에 유채. 29*41. 5cm, 개인 소장
 

둥근 보름달이 떠 있는 푸르른 하늘. 무리를 향하여 내려오는 까마귀 한 마리, 맨 오른쪽 까마귀가 날아오며 무리를 향해 입을 벌려 무언가를 말하는 듯하다. 화면 중앙에 앉아 있는 녀석은, 몸은 무리 쪽으로 향하면서 고개는 날아오는 녀석 쪽으로 돌려 뭐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맨 왼쪽 녀석도 아래쪽을 보면서 마치 오라고 부르듯 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까마귀들은 실제로 이런 상태를 연출했을까? 마침 이런 광경을 본 이중섭이 이를 그린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이런 장면을 연출한 것은 화가 본인이다. 이런 장면은 많은 궁리를 거치지 않고는 만들 수 없다.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런 연출을 했을까?

 

이 그림은 1954년 6월 대한미술협회 연례전에 출품되었고 이를 본 미국인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호평을 받았다. 함께 출품한 소를 그린 그림은 이승만 대통령이 구입해 미국을 방문하면서 들고 가 선물했다고 할 정도이다.

 

유치환은 이중섭 사후 11년 만에 이 그림을 소재로 마지막 발표작이 된 시 ‘괴변-이중섭 화(畵) 달과 까마귀’를 썼다. 우리나라 최초 미술평론가 이구열은, “세련되고 비범한 조형감각을 드러낸다”고 극찬하였다.

 

▲ 자화상. 종이에 연필, 48.5*31cm, 1955년
 

이중섭의 불행한 개인사 때문인지, 소유권 이동도 많았던 이 그림에 대하여 ‘절망과 희망이 엇갈리는(이구열)’ ‘불길한 내용의 그림이지만 매우 아름다운’(이경성) ‘우울하고 무겁과 음산한 분위기’(임영방)라면서 가족과의 이별로 인한 외로움과 불행, 불안한 심정을 드러낸다는 담론이 많다. 과연 그런가? 

 

1953년 7월 27일에 남한 정부는 불참한 상태로 휴전협정이 조인된다. 다음 달인 8월 15일에 정부는 서울로 돌아간다. 그 무렵 때마침 부산에 머물 까닭이 없어진 이중섭은, 통영의 나전칠기강습소 책임자로 부임한 유강열로부터 강사로 오시라는 제안을 받는다. 이북 사람이라 고향이 없던 이중섭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거기서 만난 사람이 이성운이다. 이중섭은 강습소 2층 방에서 이성운과 함께 머물렀다.

 

이성운의 증언에 의하면, 이중섭은 이성운의 고향인 욕지도에도 동행하여 풍경을 그렸고, 통영에서 평화로운 소를 보았다면서 소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여 여러 점의 소그림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중섭은 통영에 내려온 직후 어느 기분 좋은 초저녁에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여태까지 이 그림은 대한미술협회 연례전이 열린 1954년에 그렸다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이성운의 증언을 토대로 보면, 이 그림은 휴정협정 직후인 1953년 늦여름에 그려진 것이 분명하다. 지루하던 휴전회담이 마감되고 평화로운 시기를 맞이할 희망에 부푼 이중섭의 마음을 반영한 그림이다. 그래서 선선해지기 시작한 늦여름이라는 알맞은 계절과 보름달이 뜬 좋은 시간에 까마귀들이 모여드는 모습을 절묘하게 그려낸 것이다. 그림의 여름 하늘빛, 까마귀 한 마리, 한 마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중섭은 많은 궁리를 했을 것이다.

 

지난 7월 27일은 휴전회담을 조인한 지 69년이 되는 날이었다. 내년에는 70주년이 된다. 지난 8월 13일에 이중섭의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 여사가 100세를 갓 넘겨 돌아가셨다. 이중섭의 그림을 읽을 때 이런 사항을 겹쳐 읽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요즘이다.

 

▲ 까마귀떼의 싸움 30.2*25.7
 

덧붙이는 그림은 1952년 부산에서 그려졌다고 추정되는 것으로, 휴전을 앞둔 시기 한 뼘 땅을 두고 처절하게 싸웠던 북과 남의 동족 상잔을 그린 것이라고 보인다. 까마귀는 살기 힘든 환경이 되면 서로 물어 죽인다고 한다. 한국 전쟁을 겪은 어르신 여러분들로부터 들은 것을 여기 옮긴다.

 

[출처] 뉴스아트 (https://www.news-art.co.kr)

미술가 복고바람

연초 미술가에 박수근, 이중섭 등 ‘국민화가’ 중심의 복고바람이 거세다.그동안 연말연시 기획으로 해외 유명미술관의 소장품전이 큰 흐름을 이뤘으나 올해엔 우리나라 근현대명화전이 강세다. 겨울방학용 해외명화전 위주에서 벗어나 ‘국민화가 작품전’이 새롭게 호응을 얻고 있다. 친근한 국내 작가의 대표작을 중심으로 우리 미술이 재조명되면서 학생, 가족 단위의 미술애호가뿐만 아니라 중·장년층으로 관람객층이 확산되는 추세다.


▲  가나인사아트센터의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서 관람객들이 대표작 ‘빨래터’를 감상하고 있다. 김동훈 기자

 

 

 미술가 복고 열기를 이끄는 대표적인 기획전은 가나인사아트센터의 박수근 회고전(3월 16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의 ‘명화를 만나다-한국근현대회화 100선’(3월 30일까지) 및 갤러리현대의 ‘종이에 실린 현대작가의 예술혼’전(3월 9일까지) 등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을 비롯해 대형 화랑들이 진행하는 이들 전시장으로 주말이면 하루 2000∼3000명의 관람객이 몰리는 등 국내 미술거장과 대표작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이들 전시를 중심으로 기발한 실험과 도전의 난해한 현대미술과는 또 다르게, 전통 장르의 회화, 드로잉 중심의 근현대미술전이 미술가에 새로운 흐름을 이끌고 있다.

◆중·장년층 문화마인드가 반영된 친근한 우리미술 =‘근현대작가전 열기’와 관련해 미술평론가 정준모 씨는 “해외 유명미술관 소장품전이 경비 부담 등을 이유로 주춤한 반면, 국민화가 기획전이 새로운 문화소비층으로 부상한 중·장년층의 회귀적 감성과 맞물려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고 분석했다.

 


▲  이중섭의 ‘세사람’


 

자본 부담이 덜한 국내기획으로 연초 세시풍속형 고미술전과 더불어 우리 미술을 돌아보는 기획전이 정례화하고 있는 것. 전시기획자들은 은퇴 전후 경제적·시간적으로 여유 있는 중·장년세대들이 추구하는 문화마인드가, 대중음악의 ‘세시봉 열풍’의 연장선에서 우리 근현대미술로 연결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젊은 층에서도 해외여행 중 유명미술관 나들이를 통해 접한 미술 경험이 자연스럽게 우리 미술과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1일 오후 2시 박수근 회고전이 열리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에는 서너 명씩 무리지어 다니는 관람객들이 많았다. 등산복 차림의 주부 이경인(50·서울 서초구 효령로 68길) 씨는 “박수근 화백의 다양한 작품을 한꺼번에 살펴볼 수 있어 반갑다”며 “지난 1월 17일 개막 직후 혼자 둘러봤고 오늘 북한산 등산길에 친구들과 또 찾았다”고 말했다.

관람객들은 3층 전시작 중 2007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국내 미술품경매 최고가인 45억2000만 원에 낙찰됐던 가로 72㎝의 ‘빨래터’와 이보다 크고 가라앉은 색채의 1.1m 크기의 제2 ‘빨래터’를 꼼꼼히 대조해보며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40대 후반의 한 남성은 박 화백이 자신의 장남을 그린 1952년작 유화를 한동안 지켜보더니 자신의 유년기를 회상하듯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최윤이 가나인사아트센터 팀장은 “전시가 입소문을 타면서 일부 소장자가 미공개 소장품을 전시에 제공하고 있다”며 “22일 박 화백의 탄생 100주년 기념일에 앞서 전시작이 보강됐다”고 밝혔다. 전시도록 표지화 ‘노상의 사람들’을 닮은 드로잉, 1950년대 유화 ‘절구질하는 사람들’이 설 직전 전시작으로 추가됐다.

◆이중섭 소그림 3점 동시 전시 등 전시작 업그레이드= 지난해 10월 29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막 올린 ‘명화를 만나다-근현대회화 100선’은 90일 만인 지난 토요일 유료관람객 25만 명을 넘어섰다. 무료관람을 포함해 일평균 관람객이 2900여 명에 이른다. 1920∼1970년대 한국미술사에 큰 업적을 남긴 근현대화가 57명의 대표작 100점을 한데 모은 기획이다.

전시기획자 임병준 씨는 “40∼60대를 중심으로 관람 열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전시작의 업그레이드가 이뤄지고 있다”고 밝혔다.

 


▲  천경자의 ‘길례언니


현재 이중섭의 소그림 중 서울미술관과 개인의 소장품 2점이 걸려 있는 전시장에는 오는 18일부터 홍익대 박물관의 소장품이 더해져 이중섭의 소그림 걸작 3점이 한자리에 모인다. 서울미술관과 개인의 소그림은 제목이 ‘황소’이고, 홍익대 소장품은 ‘흰소’다. 서울미술관 ‘황소’와 홍익대 ‘흰소’는 이미지가 비슷해도 자세히 보면 고개를 숙인 서울미술관 ‘황소’가 보다 동적이며, 머리가 수평인 홍익대 ‘흰소’는 움직임이 덜하다. 반면 전시 중인 개인 소장의 ‘황소’는 ‘머리’만의 소그림이다.

관람객 대상의 설문조사 등을 토대로 근현대 대표작 100점 중 특히 관람객의 관심을 모으는 작품으로 이중섭의 소그림 외에 천경자의 ‘길례언니’,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 등이 지목됐다.

서울전 폐막 후 부산시립미술관에서 4월 8일부터 시작하는 ‘명화를 만나다’ 부산전에는 서울전에 나오지 못했던 김인승의 ‘봄의 가락’이 소장처인 한국은행 2월 자체 기획전 후 추가될 예정이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현대 신관에서 열리는 ‘종이에 실린 현대작가의 예술혼’전도 1층에 전시 중인 이중섭의 종이드로잉 ‘세사람’과 은박지 그림 등에 관람객이 몰리고 있다.

문화일보 / 신세미 기자 ssemi@munhwa.com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