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만지산 집이 불난 이후로 쉴 곳이 없어 막막했으나,

공유공간 ‘마인’을 운영하는 김선우 소유의 아산시 인주면에 둥지 틀기로 했다.

 

그 땅은 20여 년 전 김선우를 비롯한 몇몇 활동가들이

대안학교를 만들기 위해 구입한 4천평 규모의 땅이란다.

그러나 건축규제에 묶여 지연되다 한 참후에야 규제가 풀렸으나,

열기가 식어 대안학교 설립 자체가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고 한다.

 

사진작업실을 만들기 위한 집터로 개간해 두었다

그중 김선우 소유의 땅 2천여 평에 한옥 한 채를 지어 텃밭을 일구며 살았다고 한다.

오래 전 현장을 둘러본 후, 그 곳에서 마지막 여생을 보낼 작정을 한 것이다.

 

지금은 교통이 불편하지만, 서울 연신내에서 출발하는 GTX가

아산 인주면까지 30분밖에 걸리지 않아 수도권이나 다름없다는데,

열차뿐 아니라 고속도로까지 그 곳을 경유해 아산 인주면이 교통요충지가 된 것이다.

아산역이 생기게 될 인주면 인근에 부동산 업소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선 것이 잘 말해준다.

그러나 김선우 땅은 한 평도 매각하지 않고, 환경 친화적인공간으로 가꾸어 나갈 생각이란다.

세월이 한참 지나면 이 곳만이 자연경관을 헤치지 않은 유일한 공간이 될 것으로 여겨졌다.

 

김창복씨 집터로 기초공사를 해두었다.

마침, 지난 15일부터 예산장터에서 삼국축제가 열린다는 정동지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나섰다.

예산 가는 길에 집터 현장을 둘러보러 아산 인주면부터 들린 것이다.

한 달 전에도 들린 적이 있으나, 그때보다 공사가  많은 진척을 보였다.

내가 머물 집터는 물론 김창복씨 집터까지 평지로 개간해 놓았고, 한 쪽에는 연못까지 파 놓았다.

주변 조경을 위해 여러 가지 과일나무를 옮겨 심는 등 일을 많이 했더라.

 

연못을 만들기 위한 공사현장

김선우의 복안은 기존의 한옥은 전시장으로 개조하고,

나를 비롯한 김창복씨가 머물 주택 두 동과 손님 받을 카페 등

대략의 공사를 올 겨울까지 마무리 할 계획이란다.

내년 봄에 입주가 가능할 것 같은데, 가을쯤에는 신세진 분을 초대할 예정이다.

 

예산장터와 추사고택을 돌아본 후, 저녁 무렵 다시 김선우를 만나기로 했다.

 

국화를 감상하며 국밥과 국수를 즐기는 '예산삼국축제'는

예산장터 일원에서 10월 14일부터 20일까지 열렸다.

 

예산 장마당에는 국화로 장식한 다양한 조형물이 만들어졌고,

그 옆 공연장에는 미스터트롯 가수 정동원이 출연한다는 광고에 많은 관광객이 모여들고 있었다.

역시 지역축제는 유명가수 출연이 관객동원의 성패를 좌우했다.

 

국화 향기 그윽한 가을 정취 속에 흥겨움과 정겨움이 넘치는

‘예산장터 삼국축제'는 코로나로 몸과 마음이 지친 군민들에게 큰 위안을 줄것 같았다.

그러나 장터축제가 열리는 장소성의 의미 외는 장터 축제다운 특성이 드러나지 않았다.

 

10년 전에 촬영한 예산장터의 국수공장들

예산장터의 특징 중에 하나였던 옛날 국수공장들은 모두 철거되고 없었다.

‘예산장터 삼국축제’라는 명칭에 국수까지 집어넣었지만,

정작 예산 장터 문화의 원형은 지켜내지 못한 것이다.

 

관광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룬 공연장이나,

긴 줄을 선 국밥집과는 대조적으로 국수가게는 한산했다.

 

큰 공장에서 만들어 오는 국수야 어디엔들 없겠는가?

 

예산장에서 3대째 국수를 만든 김성근 씨는 어디 갔을까? / 2011년 1월 촬영

옛날식으로 대꼬챙이에 국수를 받아 주렁주렁 말리는 장면은

관광객들의 관심을 불러 모을 수 있는 좋은 볼거리가 아니겠는가?

 

그 흔한 엿장수 한 사람 보이지 않고, 장터마다 늘린 뻥튀기조차 없었다.

볼거리로 관광객을 즐겁게 하려면 전국 장돌뱅이들을 불러 모아 흥겨운 장마당을 연출하거나,

옛날의 보부상 등 잊혀져 가는 소재들을 발굴해 내는 것이 거금 들여 유명가수 불러 오는 것보다

훨씬 의미 있는 장터축제가 아닐 까 생각된다.

 

장옥 위에 올라가서 행사장과 장터 구석 구석을 지켜보았는데,

장날이었으나 장 보러 온 손님이 없어 난장은 파리만 날렸다.

이름만 장터축제지 음악과 춤이 난무하는 공연 축제나 다름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는 추사 고택에 들려

진한 묵향이 베인 고건축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보기도 했다.

 

추사고택은 조선후기 학자며 서화가인 김정희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추사의 증조부 월성위 김한신이 영조의 따님 화순옹주와 혼인하며 지어졌다고 한다.

건축 당시는 53칸 규모의 대저택이었지만,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사당만 남아있다.

 

손님을 접대하며 문학적 유회를 즐기던 사랑채를 지나면

6칸 대청에 안방, 건넌방, 부엌, 광, 등을 갖춘 안채가 나온다.

 

대청 대들보에는 김정희가 쓴 것으로 보이는 글씨가 붙어있고,

여성들의 생활공간이라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는 구조였다.

 

특이한 것은 안채 부엌은 난방전용이고 요리용 부엌은 따로 두었는데,

이는 화순옹주가 살던 왕실 주택 구조여서 그렇다고 한다.

 

한옥 특유의 따뜻하고 정갈함을 느낄 수 있었는데,

기둥 곳곳에 걸린 주련이 추사 정신을 일깨우며 그 의미를 더했다.

 

높은 가을 하늘과 붉게 물든 단풍도 아름답지만,

주렁주렁 달린 감이나 모과는 고택의 여유로움을 더했다.

 

윗쪽에는 김정희가 세상을 떠난 뒤 아들 김상무가 세운 ‘영당’이 있다.

김정희의 벗인 권돈인은 ‘추사영실’이라는 현판을 썼고,

김정희의 제자였던 이한철이 추사 초상화를 그렸단다.

 

고택 후문으로 나오니, 가문 대대로 이용해 온 우물이 있었다.

추사 고댁 인근에 있다는 '용궁리 백송'도 찾아보았다.

이 백송은 올해로 2백 살을 갓 넘긴 소나무로

추사 고택에서 북서쪽으로 난 도로 따라 약 6백 미터 지점에 있었다.

 

한눈에도 예사롭지 않은 나무임을 알 수 있는 백송은 생각보다 가냘팠다.

원래 땅에서 50센티미터 위로 줄기가 셋으로 갈라져 자랐으나

그 중 큰 줄기와 서쪽으로 뻗은 줄기가 오래 전에 부러졌다고 한다.

 

지금은 세 줄기 가운데 하나만 남아 빈약하게 보이는 것이다.

추사가 중국에서 가져 와 애지중지 키운 것은 한 선비가 살아온 내력이나 다름없다.

백송 나무에서 오랜 역사를 돌아보는 것이다.

 

오는 길에 김선우에게 전화했더니, 삽교천 회센터에서 만나잖다.

선우에 이어 김창복씨도 삽교천에 도착했는데, 선우가 단골집에서 해산물을 너무 많이 샀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회로 배를 채우기는 난 생 처음이었다.

 

술 한 잔하고 내일 가라지만, 여관보다 집이 편할 것 같아 술은 사양했다.

그런데, 저녁식사를 하고나니 노래방에 가잖다.

갑작스런 불운으로 어머니 장례를 치룬 선우씨가 

그 슬픈 마음을 풀고 싶은 심정은 이해하고도 남았다.

 

얼마 전, 술 취한 트럭기사가 슈퍼마켓에 난입하여, 밤늦게 물건 사러 간 선우씨 어머니를 들이받은 것이다.

사고를 내고 도주한 운전자는 인근 도로에서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아무것도 없는 빈털털이라 아무런 보상도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어찌 이런 날벼락이 하필이면 착한 선우한데 떨어졌는지 모르겠다.

 장례를 치루고 난 뒤 알아 문상도 못 갔지만,

하늘이 무너진 슬픔을 어찌 쉽게 잊을 수 있겠는가?

 

늦었지만, 선우씨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빈다.

 

몇 년 만에 노래방이란 곳도 들렸는데, 술 한 잔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간 적은 처음이었다.

대개 술김에 고래고래 소리 질렀으나, 술도 없이 못하는 노래가 어찌 나오겠는가?

기관지가 나빠 숨쉬기조차 힘든 상황이라 노래하기가 힘들었다.

대개 술이 취해 불러 잘 몰랐으나, 이제 노래는 끝났다는 비참한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김창복씨는 ‘휘나리’, 김선우씨는 ‘킬리만자로의 표범’ 등,

다들 애창곡으로 100점을 줄줄이 받아가며 가수의 면모를 과시했으나,

없는 놈 제삿날 돌아오듯 순서는 빨리도 닥쳐왔다.

 

김상국의 ‘불나비’등 케케묵은 노래만 골라 부르기는 했으나,

노래를 부른 건지 가사를 읽은 건지, 기억 하기도 싫다.

아무튼, 선우씨 덕분에 잘 먹고 잘 놀았다.

뻥 뚫린 고속도로를 질주해 한 시간 반 만에 도착했다.

 

선우씨! 고마워요. 언젠가는 신세 갚을게...

 

사진, 글 / 조문호

 

골목 둘러보기, 국밥 먹어보기 등 30년간 시골장터를 기록한 정영신씨가 말하는 장터에서 할 일

“이 물건 안 사가면 후회해유. 많이 줄게 들어가유.”(충남 예산장)
“맵고 달삭한 맛이 없고 너무 싱겁데이. 고치를 덜 말린나. 좀 꼬꼬부리하네.”(경남 합천장)

“아따 성님, 내가 언제 속입디여. 조까 믿으씨요.”(전남 함평장)

“물이 좋쑤과. 1킬로에 얼마우꽈.”(제주 모슬포장)

정영신(58·사진 오른쪽)씨는 30년간 시골장터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사진가이자 소설가다. 전국 522개 장터를 빠짐없이 훑고 다녔던 그는 지난 1월 포토에세이집 <전국 5일장 순례기>를 펴냈다. 사진집 <한국의 장터>(2012)의 후속편인 이 책에서 장씨는 장터를 중계하듯 생생하게 그려냈다. 책 출판에 맞춰 남편 조문호(69·사진 왼쪽)씨와 함께 사진전 ‘장에 가자’를 연 정씨를 2월9일 서울 중구 인사동 아리아트센터에서 만났다. 두메산골 주민을 찍던 남편은 9년 전부터 ‘운전기사’를 자처하며 정씨와 함께 장터를 돌아다니고 있다.

장보따리는 가방으로, 유모차로 바뀌고

장터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1987년. 1년간 장터에서 “할매들과 놀다”가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어릴 때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함평장이 열렸다. 엄마 따라 오일장에 가곤 했는데 그 추억이 아련했다. 신춘문예에 자꾸 떨어져서 사람을 더 알아야겠다, 깊이 소통해야겠다 싶어 장터로 향했다.” 그렇게 1년간 장터를 훑다보니 ‘변화상’이 눈에 들어왔다. 컬러텔레비전이 시골에까지 보급되면서 장꾼의 옷차림, 머리 모양이 바뀐 것이다. 그 모습을 정씨는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졌다. 인사동 암실(지금의 스튜디오) ‘꽃나라’와 동아리 ‘진우회’를 오가며 사진을 배운 터였다.


변화상은 30년간 이어지고 있다. 할머니들이 장보따리를 이고 다니다 점차 가방으로 바뀌더니 이제는 유모차에 싣고 다닌다. 장옥도 달라졌다. 난장이 줄어들고 번듯한 건물이 들어섰다. 그러나 장꾼은 반기질 않는다. “공무원들이 새 장옥으로 몰아넣어도 할머니들이 (시멘트가) 썰렁해 들어가질 않는다. 겨울에는 양지바른 곳에서 몸을 녹여야 하는데…. 오히려 역효과다.” 조씨가 말했다. 정씨는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장에 나오는 물건이 이 장이나 저 장이나 비슷해진 것을 아쉬워했다. 또 힘의 논리를 절감할 때는 엉엉 울기도 했단다. “20년간 장터의 명당 자리를 지키던 할아버지가 있었다. 바구니와 빗자루 등을 만들었는데 햇볕 잘 드는 곳이라 이웃 장꾼들이 어우러져 이야기꽃을 피웠다. 어느 날 가보니 낯선 트럭이 그 자리를 차지했더라. 힘있는 자들이 할아버지를 내쫓아버린 거였다.”

안 돼요, 툭툭 건드리며 ‘이거 중국산이죠?’

그래도 전통과 인정을 맛볼 수 있는 장터가 아직은 남아 있다. 충남 예산장, 경남 합천장, 경북 경주 건천장, 전남 함평장, 전남 구례 산동장, 제주 모슬포장 등이 그렇다(상자 기사 참조). 장씨는 몇 곳은 10번도 더 가봤다고 했다. “석류를 맛있게 먹던 모습을 기억하고 할머니가 석류를 챙겨놓고 기다린다. 그 따뜻한 정이 그리워 발길이 자꾸 간다.”


가볼 만한 시골장터
주변 모든 좋은 것이 모여드는 곳

926년 개설된 충남 예산장 쌍송백이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곳에 펼쳐진다. 평소엔 주차장으로 쓰다가 장날이면 할머니들이 보따리를 풀어 난장을 꾸민다. 보따리에선 가을에 수확한 콩과 말린 나물이 쏟아진다. 파라솔도 계절마다 설치가 달라진다. 겨울에는 파라솔이 누워 바람막이로 쓰였다가 여름에는 일어나 햇살을 가린다.

 

경남 합천장에는 없는 것이 없다. 보리, 콩, 참깨, 들깨 등의 곡식을 비롯해 무, 배추, 고추, 양파, 마늘, 수박, 우엉, 토란, 감자에서 백작약, 구기자, 질경이, 당귀 같은 약재까지. 이 모든 것이 인근 마을에서 재배돼 장터로 흘러 들어온다. 예전엔 인근 늪지대에 사는 여인네들이 모두 가물치, 메기, 뱀장어 등 민물고기를 이고 와 팔았다고 한다. 지금은 그 수가 줄어들어 몇몇 할머니들만 눈에 띈다.

경북 경주 건천장 전통의 멋과 맛이 그대로 묻어난다. 장옥을 덮고 있는 슬레이트 지붕과 함석 미닫이문은 시간을 거슬러가는, 일부러 만들어놓은 풍경처럼 느껴진다. 장꾼들이 빙 둘러앉아 점심을 먹으며 고단한 사람살이를 부려놓는, 끈끈한 정도 변함없다.

 

전남 함평장은 100년이 넘었다. ‘두루 평평한 땅’이라는 이름 그대로 산지보다 평야가 많아 지역 특산물과 농산물이 넘쳐난다. 함평만에서 잡아온 수산물과 축산물도 거래된다. 함평장 뒤에는 육회비빔밥집이 즐비하다. 그날그날 들어오는 신선한 재료만을 이용한단다.


1956년 7월에 개설된 전남 구례 산동장 2일과 7일에 열린다. 구례장의 한 귀퉁이밖에 안 되는 조그만 장이지만 산수유를 수매하는 12월 초부터 1월까지는 성시를 이룬다. 산동면 58개 마을이 새벽부터 갖고 나온 산수유 때문이다. 산동은 전국 최대의 산수유 군락지로, 1천 년 된 산수유 나무도 있고 생산량도 전국의 74%를 차지한다. 장에 나온 사람들은 “어째, 산수유 많이 땄는가?”로 시작해 “많이 따이소”로 인사를 끝낸다. 산동장은 오전 10시가 넘으면 서서히 파하기에 ‘파싹장’이라고도 불린다.

 

제주 모슬포장 공식 이름은 대정오일장이지만 모슬포장으로 더 유명하다. 제주답게 귤이 종류별로 나와 있고 자두며 복숭아, 참외, 수박 등 색색의 과일들이 화려하다. 어물전에선 갈치가 은빛을 뽐낸다. 장터 머리에선 바다가 보인다. “어디 감수꽈?”(어디 가십니까?)로 표현되는 구수한 제주도 사투리에서 토속적 문화를 느낄 수 있다.

장터에서 꼭 해야 할 것을 물었다. 장씨는 첫째, 할머니들과 눈을 맞추며 얘기하라고 권했다. “봄 장터에 가면 할머니가 캔 봄나물이 나와 있다. 3천원어치 쑥을 사면서 ‘참 예쁘게 다듬었어요’라고 칭찬해보라. 덤은 물론이고 첫사랑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다.” 둘째, 골목을 둘러보라. 장터에 가면 흔히 큰길만 훑어보는데 고유한 특색은 뒷골목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를 여행할 때 골목을 둘러보며 그들만의 일상을 엿보는 것과 비슷하다. 셋째, 국밥 먹기. 그 지역에서 많이 나는 식재료로 장터에서는 국밥과 밑반찬을 만들어 값싸게 내놓는다. 국밥집은 보통 장날과 장이 열리기 전날만 연다. 약속을 하지 않아도 그날이 되면 장꾼들은 하나둘 모여들어 막걸리 잔을 부딪친다. 놓칠 수 없는 장터 현장이다.

장씨는 장터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도 설명했다. “툭툭 건드리면서 ‘이거 중국산이죠?’라고 묻지 마라. 그렇게 무례하게 굴면 자긍심이 강한 장꾼들이 크게 화낸다. 그들은 갖고 나온 물건이 얼굴이고, 장터가 살아온 역사라고 생각한다.” 그것에 이끌려 장씨는 30년간 장터를 들락거렸다. “장터는 사람과 물건이 만나는 곳이면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다. 세월과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며 느끼는 끈끈한 감정은 그대로다.”

글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전국 5일장 순례기/정영신 지음/256쪽·1만5000원·눈빛

 

 

충남 예산장에서 3대째 국수를 만들고 있다는 김성근 씨. 2011년 1월 촬영. 눈빛 제공

 

 

 

대여섯 살 때 입력돼 용케 세월에 쓸리지 않고 잔존한 대여섯 가지 기억 중 하나가 시장 구경이다. 머리 위로 번쩍 들린 손을 어머니께 꼭 붙잡힌 채 줄줄이 이어진 대야와 광주리 만물단지 숲을 휘둥그레 두리번거리며 이리저리 끌려 다녔다. ‘삑’ 소리 바코드와 쇼핑백이 아니라 됫박과 신문지 포장으로 마무리하던 주고받음의 공간이 서울 복판에도 존재했다.

“장에 오는 사람들은 됫박에 담아 받는 걸 좋아하는데 장 관리주체는 저울을 사용하라네요. 15년 넘게 몸뚱이처럼 지니고 다닌 됫박인데 장에서 못 쓰게 한다고 버리면 벌 받을 거예요. 이것 덕에 먹고살았는데.”

경기 성남시 모란장에서 약재를 파는 60대 상인 노 씨의 이야기. 저자는 30여 년 동안 전국 5일장 552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사람들에게 말을 붙였다. 두서없는 시장바닥 대화가 잡다한 서론 없이 단도직입 빼곡하다. 됫박이 좋을지, 저울이 좋을지 가치판단을 밀어 넣은 문장은 없다. 그저 책장을 넘기다 보면 수십 년 전 시장바닥의 울퉁불퉁 축축한 시멘트길이 또렷하게 다시 밟힐 따름이다.

덤 더 주겠다고 손님 낚아챘다며 시비가 붙은 두 할머니의 다툼 소리. “머시여? 자네가 제대로 팔고 있는 것이 맞는가?” 태극기를 내걸고 앉아 “유관순 누나가 이것 먹고 대한민국 만세 외쳤다”고 외치는 충남 천안시 아우내장 된장 상인의 외침.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살겠다’는 얄팍한 결심의 무모함, 살아가는 모양새의 옳고 그름을 언어로 논하는 어리석음의 뒤통수를 때린다. 카메라 하나 챙겨 들고 가까운 장에 나가고픈 욕망이 읽는 내내 들썩들썩한다. 책장 다 넘겨 덮기 전에 어떤 시장에든 당도해 있기를, 저자도 원할 거다.

동아일보 /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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