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요소요소에 빈 점포들이 늘려있다.

코로나 시국이라 다들 나설 엄두를 못 내지만, 어쩌면 위기가 기회일지도 모른다.

업종만 잘 선택하면 몫 좋은 곳은 물론 좋은 조건으로 임대할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인사동 거리를 메우는 대부분이 젊은이들이다.

인사동을 찾는 것은 문화예술에 대한 막연한 갈증이 아닐까 생각한다.

차 마시고 술 마실 곳이야 많지만, 전시장 외의 문화공간이 별로 없다.

연인과 함께 연극이나 공연을 볼 수 있는 소극장도 절실하다.

 

성업을 이루던 싸구려 잡화상들이 지금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이젠 몇 곳 남지 않았는데, 임대료가 싼 골목 안으로 옮기기도 했다.

그 빈 가게에 젊은이들의 문화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곳으로 살려내면 어떨까?

 

중국산 싸구려 상품이 아니라 연인들 끼리 품격 있는 선물을 나눌 수 있는

다양한 아트상품 매장들이 들어섰으면 좋겠다.

예술적 감성에 목마른 젊은이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업종을 찾아야 한다.

 

지난 2일은 인터뷰에 불려나간 정영신씨 따라 인사동에 나왔다.

끝날 동안 인사동 거리를 돌아 다녔는데, 빈 가게들이 줄어들지 않았다.

유재만씨가 직영하던 대형 음식점 ‘아라랑가든’까지 문 닫았더라.

 

‘보물창고’, ‘달새는 달만 생각한다’,‘나락실’ 등 문 닫은 지 오래된 점포들이 늘렸지만

‘황금연못’, ‘까망글씨’등 새로 개업한 가게도 생겨나고 있었다.

 

한정식 ‘옥정’은 ‘853’이란 고기집으로 간판을 바꾸었고,

호텔 ’쿠레타케소‘도 언제 개업했는지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마스크 때문에 알아보지 못했다.

근성으로 답례를 하고 돌아설 때야 누군지 생각이 났다.

바로 꿈길 속의 춤을 찍는 양재문씨였다.

 

가는 분을 불러 사진을 찍는 헤프닝까지 벌였다.

빨리 복면의 시대가 끝나야 할 텐데,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청각은 물론 인지 능력까지 떨어져 종종 실수를 한다.

 

나도 쪽방에서 예전에 살던 인사동 옥탑 방으로 옮길 생각이다.

다시 한 번 인사동의 봄을 꿈꾼다.

 

사진, 글 / 조문호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 인사동 마당발 노광래씨로 부터 연락이 왔다.
해가기 전에 인사동 ‘아리랑식당’에서 밥 한 끼 먹자는 전화였다.
그 날은 광화문광장에서 벌어지는 ‘미술행동’ 전쟁터에 가야하나,
서둘면 밥 한 끼는 때울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광화문에 있는 장경호씨까지 기별하여 함께 갔다.

까칠한 화가 장경호씨는 그런 자릴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채현국 선생께서 오신다는 말에 들렸는데,
채현국선생이 나타나지 않아 마음이 영 불편한 듯 했다.
밥술도 떠는 둥 마는 둥, 그 좋아하는 막걸리마저 마시지 않았다.
아마, 몸이 아픈 듯 했다. 혼자서 힘들게 사니 끼니를 잘 챙기지 않는 그다.
독거노인이 아프면, 그보다 더 서러운 것은 없다.
어디 가서 편하게 좀 쉬었으면 좋으련만,
투사적인 그의 고집은 아무도 말릴 수가 없다.

인사동 ‘아리랑식당’은 청주출신의 유재만씨가 운영하는 곳인데,
본 이름은 ‘아리랑가든’이지만, 난 그냥 아리랑식당으로 부른다.
그는 인사동에서 ‘아리랑명품관’까지 운영하며, 돈푼께나 만지는 분이다.
돈에 중독된 대개의 사람들에 비해, 돈을 제도로 쓸 줄도 안다.
가끔은 인사동을 떠도는 예술가나 지인들을 불러 잔치를 열기도 하고,
고향 동문들을 해마다 불러 모아 잔치를 벌이는 등
나름으로 재미있게 살려고 애쓰는 분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한 예술가에 바친 존경심이다.

그의 ‘아리랑 명품관’ 이층에는 십 삼년 전에 돌아가신
타악기 연주자 김대환 선생의 작업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듣기로는 월남전에서 맺은 인연인 듯했으나, 꾼을 제대로 알아 본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북을 두들겨대는 김대환선생께 아무도 작업실을 빌려 줄 사람은 없었다.
그걸 알게 된 유재만씨가 돈 한 푼 받지 않고, 그 분을 아리랑 가게에 모신 것이다.
세월이 숱하게 지난 오늘까지,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빈 작업실에,
다른 짐을 방에 들이기는커녕, 물건하나 손대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신앙적 존경심으로 볼 수 있으나, 그럴 만도하다.

김대환선생의 33년생이나,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내가 추측하기는 몸의 기를 너무 많이 빼앗겼지 않았나 생각한다.
무엇에 집중하면 온몸의 기를 쏟아 붙는 그 분을 보면 마치 신들린 것 같다.
모든 예술의 근간은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기에서 비롯된다.
미천한 내가 그 심미적 기의 세계를 제대로 알진 못하지만,
몸을 단련하는 방법으로야 그지 그만이겠으나,
대개의 유명 예술가들이 무작정 쏟아 붓기만 해 단명 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타악의 독보적인 경지에 있는 그 분은 모든 게 일박에서 통섭된다고 말했다.
이박자와 삼박자도 일박에서 비롯되므로 일박은 무박이고, 즉 박자의 전부라고 말한 분이다.
열손가락에 여섯 개의 북채를 끼우고 북을 치는 소리를 들으면,

그의 아호로 불리는 黑雨처럼 어두워 보이지 않는 비처럼 무겁게 내리 친다.

마치 소나기가 땅을 두드리는 자연의 질서처럼 웅장하게 다가온다.

가히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소리의 경지에 달해 있다.


그 뿐 아니다. 한 때는 ‘세서미각’에 빠져들어 쌀 한 톨에 ‘반야바라밀다심경’283자를 새겨,

세계기네스 북에 오르기 까지 했다.

그런 온 몸을 불사르는 도전정신과 집념이 위대한 성과로 연결된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이제 세상을 떠나가고 없다. 몸을 아껴 좀 더 사셨으면 하는 바람은 간절하지만,

누군들 언젠가는 떠나기 마련이니, 그리 애석해 할 일만도 아닌 것 같다.

단지 아무도 이루지 못한 김대환 선생의 위업을, 나라에서 방치해 잊혀지고 있다는 사실이 서글픈 것이다.

그 날, 오찬자리에는 원로시인 강 민선생을 비롯하여 방배추로 통하는 방동규선생,

장경호, 이만주, 노광래, 전강호, 나재문, 신현수씨 등 열 두 명이 함께하며 유재만씨가

살아 온 내력을 들으며,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본 것이다.

좀 서둘러 나와야 했으나 김대환선생이 사용하시던 작업실까지 들리는 통에,

광화문에서 벌어지는 여태명선생의 서예 퍼포먼스를 놓쳐 버렸다.

아차피, 연착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어쩌랴! 단지 연이 닿지 않는다며 자위한다.

사진, 글 / 조문호























 [전강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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