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 샘터 2019년 7월호]


이 달에 만난 사람 : 조문호


                 가장 낮은 곳을 올려다보는 빈자(貧者)의 카메라




서울역 건너편 동자동 언덕배기엔 낮게 엎드린 빈자(貧者)들의 쉼터가 있다. 서울 도심에 몇 남지 않은 쪽방촌 골목. 오랜만에 다시 만난 다큐멘터리 사진가 조문호(73) 작가는 그 사이 쪽방촌 생활에 순조롭게 적응한 듯 전보다 더 밝고 편안해 보였다. “보기는 이래도 생활하는 덴 불편하지 않아요. 매달 70여만 원 씩 나오는 기초수급비에서 방값 23만 원을 내고도 돈이 남으니 걱정할 게 없지요. 월세 걱정하는 이웃들한테 어쩌다 만 원씩, 이만 원씩 집어줘도 나 혼자 사니까 충분히 지낼만합니다.”


동자동 일대엔 이처럼 보증금 없이 20만원 남짓한 월세만 내고 사는 쪽방이 천여 개나 밀집돼 있다. 작가가 세 들어 있는 다세대주택 또한 50여 개의 쪽방 이 벌집처럼 들어차 있는 4층짜리 건물이다. 층마다 복도 양편으로 나란히 도열해 있는 방들, 바가지로 물을 퍼 뒤처리를 해야 하는 공동 화장실, 한겨울에 도 온수가 나오지 않는 열악한 환경에 아랑곳 없이 작가는 만 3년째 쪽방촌 이웃들과 어울렁 더울렁 살 부비며 즐겁게 사는 중이다. 가진 건 비록 1인용 침대 와 컴퓨터 책상만으로 꽉 차는 1.25평짜리 작은 방 하나뿐이지만 작가에게선 여전히, 가진 게 없어 행복한 삶의 역설을 수긍하게 하는 진심이 느껴진다.

 

밖에서 볼 땐 초라하고 거칠어 보일지 몰라도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이 정이 더 많습니다. 먹을 게 생기면 자기보다 없이 사는 사람부터 챙겨주려는 인정이 살아 있는 곳이지요.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정겹게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 좋아 가끔씩 나도 모르게 동네 풍경, 동네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는 욕심이 들곤 합니다.”

 

작가의 동자동 생활은 서른 해 넘게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을 찾아다니며 진실의 순간을 탐닉해온 이력과 자연스레 겹쳐진다. 그는 오래 전 서울의 대표적인 윤락가인 전농동 588번지를 특유의 정감 어린 시선으로 담은 사진연작 홍등가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장본인이다. 청량리 홍등가의 일상을 기록한 작품들로 1985년 동아미술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이력 때문에 어떤 이들은 그가 애초에 쪽방촌 사진 작업을 위해 이곳에 들어왔을 거라고 넘겨짚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형편에 맞춰 살 집을 구해온 것뿐이라는 말로 세간의 얄팍한 호기심을 일축해버린다. “이왕 여기 온 김에 쪽방촌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은 생각도 없진 않았지만 같이 생활하다보니 그것조차 다 내 욕심일 뿐이란 생각이 들어 계획을 접었습니다. 사진이 아무리 좋아도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상대가 꺼려하는 사진은 안 찍는 것만 못합니다.”

 

작가라면 구미가 당길 법한 소재 앞에서도 담담히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결의는 선험(先驗)에서 나온다. 윤락가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작품으로 상을 받았다는 후회가 밀려와 뒤늦게 그곳에 6개월간 머물며 다시 작업한 청량리588의 뒷얘기가 그리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월간 사진편집장을 거쳐 동아미술제, 86아시안게임 기록사진전 수상으로 사진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할 때도 그의 관심은 오직 사람뿐이었다. 하지만 현장 속으 로 뛰어들어 일체의 연출 없이 대상과의 유대감을 직관으로 포착하는 작업방식을 이해 못하는 동료들도 적진 않았다. 누군가는 소재주의라는 비난을 쏟아 냈고, 그에 편승한 언론에서는 매춘(賣春)이라는 자극적인 이야기만 부각시켜 애써 기록한 사진의 가치를 깎아내렸다. 그 소란통에서 급격한 산업화 시대의 민낯을 예리하게 포착한 작가의 노력도 얼마쯤 빛이 바랬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사람들의 역사도 기록해야 하지 않느냐, 그 작업을 누가 할 거냐고 물으면 모두들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시대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럴수록 지금껏 눈여겨보지 않는 대상을 찾아내 연출하지 않고 대상의 마음이 전해지도록 찍어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좋은 그림을 만들기 위해 장면을 연출하거나 화려한 촬영기법과 렌즈를 이용해 현실을 포장하려 한다면 다큐멘터리와는 안 맞습니다.”


 

한때 그에게도 농협 직원, 부산 광복동 학사주점 사장으로 세속의 화려함을 좇던 시절이 있었다. 30대 후반, 주점 단골손님이던 다큐멘터리 1세대 사진가 최민식 선생에게 선물 받은 사진집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그도 가진 게 많아 불행한 삶에 허덕이고 있을지 모른다. ‘생활주의 리얼리즘을 주창하며 부산 자갈 치시장의 인간 군상을 포착한 선생의 흑백사진들은 평범했던 삶을 뒤흔든 태풍이었다. “휴먼이란 제목의 사진집인데 머리가 멍해집디다.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주는 힘이 강하다는 걸 알게 된 거지요. 그길로 나도 사진 한번 해볼 거라고 결심하고 부산을 떠나 서울 생활을 시작했어요. 뒤늦게 사진 공부 를 하게 됐지만 월간 사진에서 일하며 배운 게 도움이 많이 됐어요. 대상에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스스로 답을 찾아가던 시기였지요.”

 

삶의 방향을 완전히 돌려놓은 선생의 영향은 그의 사진에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선생은 내 특징은 스냅숏 기법이다. 상대가 의식하기 전에 찍을 수 있는 그 기법이 있어야 연출을 안 하고 찍을 수 있다. 사진을 찍는다면서 요란한 기법만 늘고 머리와 가슴은 텅 비어가는 게 끔찍이 싫다. 혼이 쑥 빠져 버린 사진은 의미도,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가르쳤다. 선생을 통해 연출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진실에 눈뜨기 시작한 작가 또한 그 뒤론 발을 동동거리며 부지런히 삶의 현장을 쫓아다녔다. 사진작가로서의 명성을 높여준 <87민주화항쟁> <동강 백성들> <태풍 루사가 남긴 상처> <두메산골 사람들> <인사동 그 기억 풍경전> 등이 누구보다 뜨겁고 치열하게 살았던 그 시절의 산물이다.

 

작가의 사진은 사진은 무조건 아름다워야 한다는 기존의 사진관을 간단히 묵살할 만큼 반골기질이 넘친다.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이면에 눈길을 주고 누구라도 관심 둘만한 소재, 화려한 촬영기술이 필요한 주제엔 눈도 돌리지 않는 다큐멘터리 작가로서의 고집도 여전하다. “옳지 않은 일엔 쓴소리를 참지 못하니 인간관계가 좁아지는 게 걱정이지요. 얼마 전에도 친하게 지내던 후배가 제가 찍은 천상병 시인의 사진을 허락도 없이 남에게 인화해준 게 화가 나 일 년간 안 만나겠다고 선언해 버렸어요. 사과 한마디 했으면 풀어졌을 텐데 사진 한 장 가지고 뭐 그렇게까지하는 태도에 속이 상합디다. 사진도 엄연히 주인이 있는 물건인데 허락 없이 써도 된다고 생각하는 게 서글펐어요.”

 

그도 이젠 서서히 체력을 안배해가며 작업할 나이가 되었다. 그런데도 작가는 동자동에 들어온 뒤에도 언제 마주칠지 모르는 찰나의 감동을 놓치지 않기 위해 손바닥만 한 콤팩트카메라를 종일 손에서 놓지 못한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찰칵 찰칵, 셔터부터 누르던 직업병 덕분에 작가의 카메라엔 오래 전 세상을 떠난 시인 천상병,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 극작가 겸 문필가 박이엽 선생처럼 한 시대를 풍미하고 간 숱한 문화예술인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 또한 수십 년 간 있는 그대로의 삶을 성실하게 수행해온 기록의 힘이다.

 

젊은 시절부터 지금껏 무시로 드나드는 인사동과의 행복한 추억은 인사동 사람들이란 개인 블로그에 담겨 있다. “30여 년 넘게 쌓인 사진 자료들이 조금 더 의미 있게 쓰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이왕이면 동료 다큐멘터리 작가들과 함께할 수 있는 협동조합 같은 걸 만들어볼까 고민 중에요. 다큐멘터리 사진은 돈이 안 된다는 인식 때문에 작가가 죽고 나면 유족들이 그동안 모인 자료를 그냥 불태워 버리는 경우도 흔한데 이제라도 귀한 기록들을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지요.”

 

비좁은 쪽방촌 골목을 빠져나오며 가난한 다큐멘터리 작가로 살아온 게 후회되지 않느냐고 객쩍은 소리를 건네자 작가는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으니 후회는 없다며 웃는다. 해야 할 일들이 아직 많은 그에게 괜한 걸 물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글 이종원 편집장 / 사진 최순호





겨울에 필요한 옷가지나 살림 챙기러 정선 갈 일이 생겼다.

동자동 쪽방이나 녹번동 방이나 짐둘 곳이 마땅찮아

정선 집을 피난처나 창고처럼 사용하는데, 겨울은 사람 살 곳이 못된다.


오래된 윗만지산 집은 본래 고추 말리기 위해 지은 집이라 방은 넓지만 외풍이 거세다.

처마 밑을 막지 않아 겨울엔 맞바람이 몰아쳐 천장인지 천막인지 구분이 안 된다.
군불 지피면 바닥은 쩔쩔 끓지만, 얼굴은 시베리아 벌판에 선 기분이다.

그래서 겨울에 갈 일이 생기면 되도록 당일치기로 나서는 것이다.


20여 년 전 ‘생활성서’란 잡지의 편집장으로 계시던 김용기씨와
수녀 기자 두 분이 동강에 취재 와 하루 밤을 같이 묵은 적이 있는데,
얼마나 추웠던지, 그 수녀 기자는 만날 때마다 그 이야기를 했다.





녹번동에 자동차 빌리러 간김에 정영신씨와 가볍게 한 잔 빤 것이 하루 일기의 시작이다.

하루치기로 돌아오려면 새벽에 출발하는 게 편하기도 하지만,
정영신씨와 씨잘 때 없는 이바구 지껄이며 마시는 술맛도 꽤 괜찮다.


다른 사람과의 술자리에서는 할 말이 별 없으나,
십 삼년이나 같이 산 그 와는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내가 웃기고 내가 웃으며 키득거리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기도 하고...






그 날은 아쉽게도 자정에 술자리를 끝냈으나,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이 생각 저 생각, 잡념이 끊이지 않으니 잠이 올 수 없었던 거다.

죽고 나면 아무 것도 필요 없는데, 무슨 생각이 그리 많은지...
몇 시간을 뒤척이다 일어 나 보니, 그때까지 네 시밖에 되지 않았다.
잠을 포기하고 정선으로 곧 바로 출발해야 했다.

매번 양평으로 가는 국도를 타는데, 시간은 더 걸리지만,
통행료도 필요 없는데다, 연료비까지 절약된다.
더러 새벽에 출발하다보면 양평에서 만나는 물안개도 장관이다.


정선 귤암리에 도착하니, 오전 여덟시 정도 되었더라.

조양강은 꾀죄죄한 내 몰골을 비웃 듯,

'여기 물 끊여 놓았으니 목욕하라'며, 김을 모락모락 피우고 있었다.





어머니 계신 무덤부터 찾아가 이런 저런 넋두리를 해댔다.
다 잘 사는 세상이 되려면 부탁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닐 진데,

꼭 빠지지 않는 것이 자식타령으로, 원죄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집에 가니 찢어 진 현수막 차양이 팔랑거리며 인사하고,
급히 가느라 내버려 둔 옥수수대가 원망스러운 듯 나를 지켜 보았다.
다 거두어주고, 메모쪽지 봐가며 짐 챙기다 보니, 세 시간이 후딱 지나버렸다.

끼니는 동자동에서 받은 빵으로 운전 중에 해결했다.






평창 쯤에 이르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천국 가는 길 인양 평화로웠으나, 양평에 도착하니 비로 바뀌어 버렸다.
그런데, 그 때부터 갑자기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깜빡깜빡 곡예운전 몇 번에 두 손들고, 갓길에 차 세워놓고 잤다.
천지개벽 할 듯한 트럭 크락숀 소리에 놀라 눈을 떠보니, 오후2시가 넘었다.






내부순환도로에 접어 들 무렵, 정영신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 날 인사동에서 ‘샘터’기자와의 인터뷰가 있는데, 인사동으로 와 줄 수 없냐는 것이다.

기자가 사진 한 장 같이 찍었으면 한다는 데, 싫지만 어쩌겠나?

동자동에 간 후로 나를 드러내는 인터뷰는 대부분 사양해 왔으나, 정영신씨 일은 도와주어야 했다.

한 잡지사는 인터뷰를 계속 거절했더니, 원고료 줄 테니 사진만 좀 사용하자는 곳도 있었다.
시간 뺏는 인터뷰는 사진을 사용해도 원고료도 안 주는데, 모순투성이가 하나 둘이 아니다.





약속장소인 카페 ‘수요일’에는 '샘터' 편집장인 이종원씨와 최순호씨가 정영신씨를 취조하고 있었다.

두 분 다 면식이 있었는데, 사진가 최순호씨는 조선일보 기자로 일해 그런지, 더 낯 익어보였다.

비슷한 질문과 대답을 하도 들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는데,

마지막에 나더러 정영신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물었다.

대뜸 튀어 나온 말이 ‘장에서 죽어라’고 했더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인터뷰가 끝나고 거리에서 이야기 좀 나누라는 포즈를 주문받았는데,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빠진 이를 드러내 놓고 찢어지게 한 번 웃었더니, 그대로 통과되었다.

일이 잘 마무리되었는지, 최순호씨가 아는 국밥집에 가자고 했다.

하루 종일 빵 한 개로 허기를 메운 터라 '얼시구나' 따라갔다.






식당으로 가다 윤병갑씨를 만났고, 주차장 앞에서는 한정식선생을 만나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만남에 얼마나 놀랐는지, 카메라 초점마저 흔들려 있었다.

아마, 한정식선생께 잘 못한게 있는지? 도둑이 제 발 저린 모양이다.

대뜸 하시는 말씀이 “이명동 선생님 뵈러 갈 작정인데, 같이 갈 수 없냐?‘고 해 흔쾌히 가겠다고 했다.

그렇찮아도 이명동 선생님께서 사모님이 돌아가신 후로 바깥출입을 않으신다는 이야기를 들어

한 번 찾아뵈려 마음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찾아 간 ‘남원집’은 헌법제판소 앞에 있었는데, 최순호씨 친구가 운영한다고 했다.

인사동에서 옮겼다는 말을 듣고 보니, 어렴풋이 예전의 ‘남원집‘이 떠 올랐다.

어머님 가업을 이어 받은 이 가게는 진한 사골국물에 우거지를 넣어 끊인 국밥 맛이 일품이다.


밥 먹으며, 사진가 최순호씨의 사는 이야기도 들었다.

남원으로 귀농해, 깨 농사로 깨 쏟아지게 산다는데, 수요일은 프리랜서 사진가로 활동한단다.

재미있게 사는 모습이 남 달라 보였다.






눈오다 비오다 맑아지는 날씨처럼, 변덕스러운 기분의 기나 긴 하루였다.

바쁜 하루였지만, 즐겁게 잘 마무리했다.  차 때문에 한 잔 밖에 못 마신 술 빼고는...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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