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은 경북 성주장을 찾아 나섰다.

성주하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게 사진계 전설로 통하는 이명동선생이시다.
삼 년만 있으면 백순을 맞는 이명동선생 고향이 바로 성주가 아니던가.
소 판돈 몰래 들고 나와 카메라 구입했던 그 현장이다.






선생께서는 고향 조카들에게 부탁하여, 성주 참외까지 보내주는 자상하신 분이다.
그 짱짱하시던 선생님께서 사모님이 돌아가신 후로 외출도 않으시고,
이젠 몸도 많이 수척해 지셨다.
한 번 찾아뵙는다는 것이 차일피일 미루어 왔는데, 성주에 당도하니 갑자기 죄책감으로 밀려드네.






그런데, 3년 만에 들린 성주장은 엄청난 변화를 맞고 있었다.
그 고색창연한 장옥의 정겨움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구조물로 바뀌어 버렸다.
그동안 가볼만한 장터로 성주장을 빼 놓지 않고 소개해 왔는데,
이젠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추억이 되고 말았다.






오래된 문화를 깡그리 말살하는 사람의 머리구조는
도대체 어떻게 되어 있는지 한 번 파헤쳐보고 싶어진다.
문제는 돈 들여 장옥을 바꾸었지만, 장사가 잘되기는커녕 장사꾼들의 불만만 더 높았다.
손님은 날로 줄어드는데다, 도저히 정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터를 한 바퀴 돌아본 후,
행여 추억의 자락이라도 만날까 장터 주변을 맴돌았다.


골목 한 모퉁이에서 노부부가 열심히 텃밭을 파내고 있었다.
손바닥만 한 텃밭을 왜 파내냐고 물었더니.
“자식들이 찾아와도 차댈 곳이 마땅찮아 주차 공간 만든다”고 하셨다.
골목이 좁아 텃밭이라도 깎아내어, 자식들 편하게 주차하라는 배려였다.






차 댈 곳이 없어 자식들이 자주 오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만,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의 애틋한 마음을 자식이 알기나 할까?






도식화되어가는 농촌의 모습을 성주장에서 다시 확인할 뿐이지만,
마냥 자식만 기다리며 사는 시골 노인들의 외로움이 더 가슴에 묻힌다.
이젠 주변 환경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정마저 메말라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 부모 없는 자식이 어디 있겠는가?
시골에 부모님이 계시다면 전화라도 자주 드리자.
이러다, 죽기 전에 가족 해체되는 세상 올까 두렵다.

사진, 글 / 조문호
























[사진마을] 한국 사진계 대원로 이명동 작가

 

이명동(94)씨

 

한국 사진계의 대원로인 이명동(94·작은 사진)씨의 생애 첫 개인전 <이명동 사진전>이 7월5일부터 31일까지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열린다.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 있는 월간 <사진예술>사에서 이명동 선생과 인터뷰를 했다. 사진가이자 사진예술 발행인인 김녕만(65)씨가 자리를 같이했다.

 

이명동 선생은 살아있는 한국 사진의 역사다.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그는 성주공립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14살 때 아버지가 황소를 사려고 마련해놓은 돈 12원을 훔쳐 사고를 친다. 등·하굣길에 홀리듯 보던 학교 근처의 일본인 가게에서 “절대 물러주지 않는” 조건으로 카메라를 구입했던 것이다. 발각이 되자 이틀 동안 산에 숨어 지낸 끝에 “손자 죽이겠다”는 할머니의 도움으로 간신히 용서를 받아서 사진 인생을 시작했다.

 

일본에서 나오는 사진잡지 <아사히카메라> 독자사진 응모란에 사진이 실리기도 했다. 1942년에 일본 법정대학교 부속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본격 사진가의 길을 걷는다. 한국전이 나자 군무원의 신분으로 종군해 육군 보병 제7사단에서 종군사진을 담당했고 이 공로로 세 개의 무공훈장을 받았으며 1953년 종전 직후 군생활을 마무리했다. 1953년 <중앙일보>(현재의 중앙일보와는 다른 신문)에서 사진부장을 맡았다가 1955년에 <동아일보> 사진부로 옮겼다.

 

이때의 사연도 재미있다. 이해 2월18일 동아일보를 설립한 인촌 김성수가 세상을 떴는데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정권에 늘 비판적인 야당지 동아의 사주 빈소에 문상을 온 사진을 기관지 격인 중앙일보의 이명동만 찍고 막상 동아일보 기자는 물을 먹었다. 크게 화가 난 김상만이 단독보도를 한 이명동을 불러 간단하게 면접을 보고 스카우트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1979년까지 동아일보에 근무하면서 이명동은 4·19혁명 당시 경무대 앞에서 학생 시민들이 경찰의 총탄에 쓰러지는 모습 등 역사적 장면을 특종취재했다.

 

 경교장에서 촬영한 백범 최후의 사진(1949년 6월23일)

 

4·19 혁명 당시 경무대 앞에서
총탄에 쓰러지는 학생 모습 등
역사적 장면 숱한 특종 취재
한국 사진계 토대 구축 힘쓰고
일흔 나이에는 사진잡지 창간
생애 첫 개인전 다음달 열어

 

 

이미 그 전인 1949년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하기 3일 전에 김구의 최후 모습을 찍었던 이명동은 1956년 5월5일엔 호남선 열차에서 사망한 신익희 선생의 마지막 모습을 3시간 전에 찍기도 했고 1959년에는 조병옥 박사의 최후 사진도 기록했다. 이는 마치 마하트마 간디를 인터뷰하고 돌아서 나온 바로 몇 시간 뒤에 간디가 암살당하는 바람에 간디의 최후 사진을 찍게 된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 자신의 입으로 “나는 운이 좋았는지 세계 곳곳을 방문할 때마다 세계적인 사건의 현장과 마주칠 수 있었다”고 말한 대목이 연상되는 장면이다.

 

사진기자로서 역사의 현장을 기록한 것뿐만 아니라 한국 사진계의 토대 구축에도 공을 들였다. 1963년에 동아사진콘테스트를 만들고 1964년에는 대한민국 국전에 사진 분야를 포함시키는 데도 앞장섰다. 1968년에는 한국 최초의 개인사진집에 해당하는 최민식의 <인간>이 동아일보사에서 나오는 과정도 주선했다. 이명동은 동아일보와 다른 매체의 지면을 통해 한국 사진계의 발전, 각성을 촉구하는 기사를 수차례 썼고 사진전시와 사진작가 소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임석제 제5회 사진전을 보고>는 1955년 중앙일보에 썼고 <제6회 사협전평>을 통해선 “내용 없는 작품을 형태만 크게 한다고 효과적이 될 수 없다”고 일갈했고 1957년엔 당시 경기고 2년생이던 김희중(에드워드 김)의 개인전을 소개하며 “사진계의 비상한 관심”을 전했다. 1969년 <신동아> 지면을 통해 “젊은 사진작가 주명덕”의 사진집을 소개했다.

 

그는 동아일보를 떠난 뒤 여러 대학에 보도사진 강사로 활약하며 후학들을 길러냈다. 70살의 나이에 사진잡지 창간에 도전했다. 이 선생은 “설날에 세배 온 후배 사진가들이 230만원을 모아서 주더라. 거기에 할머니(이 선생의 부인을 가리키는 표현)가 마련한 곗돈 500만원을 보태서 사무실을 얻고 창간호를 만들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는 2001년에 <사진예술>을 아끼는 제자이자 후배인 김녕만에게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고” 물려주었고 잡지는 올해로 창간 25년이 되었다. 김녕만은 “이 선생이 어렵게 창간한 잡지라서 물려받은 것에 대한 책임이 막중하다”고 말했다. 이명동 선생에게 창간 때와 25년 된 지금의 사진예술을 비교하면 어떤지 물었다. 이 선생은 “하늘과 땅 차이다. 좋아졌지”라고 했다.

연평도(1956년).

 

 보병 제7사단의 중동부전선(1952년).

 

2대 발행인 김녕만과 이명동의 인연은 그야말로 각별하다.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김녕만씨는 스물두살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고 대학 사진과에 입학하기 전에 이미 고창군청 공보실에서 사진담당으로 일했다. 1974년 동아사진콘테스트에서 <강제등교>로 입상하였고 대학생 시절에는 각종 공모전에서 받은 상금으로 등록금을 조달했다. 김녕만씨는 사진학과 2학년이었던 1974년에 당시 동아일보 부국장인 이명동 선생의 보도사진강의를 듣게 되면서 인연이 시작되었다. 결국 1978년 “꿈속에서도 그리던” 동아일보에 입사해 사진기자 선후배의 관계가 되었다.

 

<80년 광주>를 기록했던 김녕만씨는 이명동과 달리 기자 시절부터 수많은 사진전에 참가했고 개인전도 열었으며 사진집 등 저서도 여럿 펴냈다. 가장 최근의 사진집은 지난해 나온 <시대의 기억>이며 가장 최근의 개인전은 6월13일에 끝난 <김녕만, 해학을 공유하다>였다. <사진예술> 윤세영 편집장이 곁에서 인터뷰를 듣다가 “김녕만 현 발행인은 사진 인생 내내 이명동 선생님의 발자취를 따라왔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이 선생님이 김 발행인의 뒤를 따른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이명동은 평생 사진을 하면서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보도사진을 찍었고 사진계를 위해 일했지만 자신의 것을 돌보지 않았으나 이번에 한미사진미술관의 호의로 첫 전시를 열게 되었다. 그런 만큼 개막일에는 많은 사진가 등이 참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한겨레신문 /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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