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은 인사동에서 반가운 사람들 만나 술마실 수 있었던 셋째 수요일이었다.
이른 술시부터 화가 전강호씨로 부터 연락 왔으나, 두 세 시간 지나야 나갈 수 있었는데,
뒤늦게 인사동 ‘사랑방’으로 갔더니, 장경호, 전강호, 두 사람이 나와 있었다. 빈 병으로 보아 장경호씨는 정량을 초과한 듯 싶었다.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더니, 김명성, 이상훈씨가 있었고, 뒤늦게는 공윤희, 신현수, 이인섭, 강찬모, 신성준씨가 차례대로 등장했다.


그러나 술을 마셔도 노는 게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술자리는 조가 잘 맞아야 하니까...
장경호씨는 이미 취해 매사에 시비조였다. 전강호씨가 배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니, 관용을 아느냐는 식이다.





그래서, 다시 자리를 옮겼다.

장경호가 비상금으로 꼬불쳐 둔 신사임당 한 장으로 술값을 내길래, 내가 강찬모한테 탁발한 심사임당 한 장을 주었는데,

'낭만'가는 길에서 최명철씨를 만나 , 그 구리알 같은 돈을 최명철씨 한데 줘버렸다.

이런 싸가지 좀 보게, 그것도 오빠 보는 앞에서...

최명철씨 역시 객지에서 떠 돈지가 오래되어, 주머니가 빈 걸 눈치챈것 같았다.


김용태씨 딸래미 보영이가 장사하는 '낭만'에 가보니, '민미협' 그림쟁이 투성이더라.

이재민, 조신호, 강성봉, 정세학씨 등등, 다 말하다 보면 날 새겠다.






그 날따라 갑자기 열반한 적음(寂音)이 그리웠다.
인사동하면 생각나는 사람으로  민병산, 박이엽, 천상병선생 등 유명세를 떨친 분이 한 둘 아니지만,
선생 분들은 체면 때문에 본색을 들어 낼 수 없었으니, 노는 것하고는 별개 문제다.

단지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적음이만 유일하게 술자리를 유쾌하게 만들었다.


‘월간 뻐꾸기’이야기가 신화로 둔갑한 '월 빠'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대개 알것이다.
자기가 무슨 ‘월간 빠’ 주간이라며 창간과 복간을 거듭하는 ‘월빠’이야기로 좌중을 웃겨댔다.
자기 이야기에 자기가 웃는 것도 그렇지만, 온 몸을 흔들대며 낄낄대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자신은 ‘적음선사’로 불러주길 원했지만, 법명을 뜻하는 “사운드 오브 사이렌스”나 땡초로 통했다.

보면 이 갈리고, 안 보면 보고 싶은 게, 적음이다.



적음선사



술이 취하면 '찔레꽃'을 엄청 청승맞게 불렀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참 좋지!


한 번은 정선 만지산 ‘서낭당 축제’ 뒤풀이에서 “긴 머리 소녀”를 불렀는데,
털도 없는 중놈이 '긴 머리 소녀'를 청승맞게 불렀으니, 동네 사람들이 나 자빠진 것이다.
아직까지 만지산 사는 최종대씨는 그 이야기로 적음을 그리워한다,

탁발로 살아야할 중이 대중에게는 손 내밀지 못하고, 가까운 사람들 주머니만 털지만,
그마져 없으면 인사동 ‘실비집’에 퍼져 날 밤을 까며 퍼 마셔댔다.
아는 사람 나타나기만 기다렸으니, 무전취식으로 경찰서 끌려가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다 싶다.


오죽했으면 장경호는 적음 이야기만 나오면 아직도 이를 간다.
미술선생을 할 때인데, 돈 떨어지면 학교 찾아와 수업중인 자기 기다리느라

교무실에서 회전의자 돌리고 있었다는데. 얼마나 징그러웠겠는가?

그래도 끝 까지 술값 보태 준 사람은 전활철, 김명성, 강찬모 등 몇몇사람 있었지만,

적음의 겉모습이 아니라 속 깊은 정신을 아니까...






그는 열다섯 살에 경북 기림사로 출가하였으나, 그 기행은 서라벌예대 문창과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디엔들 이 한 몸 머물 곳 없으랴’는 산문집이 잘 팔려나가자 허구한 날 술로 살았다. 있는 대로 퍼 마셨다.
주머니에 돈 한 푼 없어도 택시타고 인사동에서 봉화 ‘청량사’까지 간다.
절에 차 대놓고 주지 불러 택시비 주라니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그것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단지 술 마시기 위해 돈이 필요할 뿐이지만, 한 마디로 돈을 좆같이 본다는 거다.






술을 너무 좋아하니, ‘청량사’ 있을 때도 벼랑 깊은 암자에서 혼자 살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암자에서 하루 머문 적이 있는데, 한 밤중에 부엌에서 그릇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반복되었다,
그 암자에 적음과 나, 두 사람 뿐인데, 누가 그릇을 만진단 말인가?
완전 쫄아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다음 날 아침에 물어보니, 가끔 나한상이 장난 질 친다며 별거 아니란다.


그런데 한참 후에 모령의 애인을 데리고 가서 황당한 일을 당하고 말았다.
산 깊은 암자에 오르느라 너무 피곤한데다, 술에 취해 잠이 들어버렸다.

자고 일어나 눈을 떠보니, 적음도 애인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꼭두새벽에 찾아 나섰는데, 옆 골방에서 신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창호지에 침 발라 구멍을 뚫어 들여다보니, 미쳐 팔짝 뛰겠더라.
보이는 것은 달싹거리는 이불 뿐이었지만, 그 아래서 들리는 신음은 분명 그녀의 신음이었다.

산은 하얀 눈으로 뒤덮였는데,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더라.
도저히, 그 자리를 지킬 수 없어 산으로 기어 올라 청량사를 내려보며 울부짖었다.
“적음아! 이 씨발 놈아~ 적음아! 이 씨발 놈아~” 목 놓아 외치니 산울림은 내 귀에 내려 꽂혔다.

내 얼굴에 침 밷는 격이었다.

내려 와보니, 그 여인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머리 감고 있었고, 적음은 자고 있었다.

그냥 “나무관세음보살~”이라고 지껄일 수 밖에..

아마 꿈 속에서 본 장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일소암 '전경




나중엔 거기서도 밀려나 봉화 수식에 있는 헌 집 하나 얻어 ‘一笑庵’이란 문패 달고 혼자 살았다.
보나 마나 가까이 있는 도예가 신동여씨를 비롯하여 이미 고인이 된 영주의 뮤지션 이종문과

많은 글 패들게 민폐께나 끼쳤을 것이다.


나중엔 마을 사람까지 싫어해 외톨이가 되었는데, 어느 날 발가벗은 알몸으로 열반하고 말았다,
그의 법명처럼 조용하게 세상을 떠났지만, 시신이 방바닥에 썩어 안타까웠다.

그게 바로 적음이다.


열반한 적음선사의 시신이 섞은 자욱





지금 되돌아 보니, 내가 인사동에 연연하는 것도 미우나 고우나 사람 때문이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김종구, 강용대, 김영수는  물론이고, 죽지 못해 발버둥 치며 사는 이청운, 배평모, 신동여,

석 파, 김신용, 장경호, 최울가, 김명성, 김용문, 전강호, 박광호, 이수영, 노광래, 공윤희, 이목일, 전활철 등 등..

아마 사람이 그리워서, 아무 것도 아닌 인사동이란 자리에 목메고 살았던 것 같다.


적음이 남긴 '유적'의 시 한자락이  떠 오른다.

"청동의 푸른 뱀이 / 꿈틀거리고 있는 / 숲길을 지난다 / 무섭지도 않은 등 뒤에 / 스멀스멀 / 실안개 / 따라 붙는다."


사진,글/ 조문호



적음의 열반 소식을 듣고 몰려든 지인들


빈소를 여관방에 차려놓고, 신동여, 석파, 이수영씨가 영정사진을 쳐다보며 안타까워 하고있다.


적음 일주기를 맞아 가까운 이들이 모여 적음을 추모하며 한 잔 마셨다.


아래 사진은 지난 수요일 인사동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요즘 몇 일간 먹는 게 싫다.
먹는 게 싫으면 죽는 것인데, 할 일이 남아 죽을 수도 없다.
지난 주말을 보낸 후, 몇 날을 방에서 낑낑거리고 있다.
몸살 증세 같지만, 푹 쉬면 괜찮을 것으로 여겨 누워 지낸다.
고작 정신 차려 하는 일이라고는, 컴퓨터 열어 노닥거리는 게 전부다.
그러나 하루에 한 끼는 먹어야해, 한 번씩은 밥집을 찾는다.
일찍 서둘면 지척에 있는 ‘식도락’에서 먹을 수 있지만, 매번 밥 때를 놓친다.
그 곳은 사랑방 조합에서 봉사하는 밥집인데, 한 끼에 천원 밖에 받지 않는다.
지난 토요일 후로 여태 못 갔으니, 어지간히 게으름을 피운 게다. 




 

지난 토요일에는 허미라씨가 혈당 검사까지 해 주며,
돈 넣으려고 저금통을 찾으니, 토요일은 무료라며 돈도 받지 않았다.
그런데, 그 날은 돼지 수육과 쌈이 준비된 특식이 나왔다.
수육이래야 한 접시가 전부였지만, 아무도 욕심 부리지 않는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서너 점씩만 담아 갔다.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얼굴에 묻어났다.
‘식도락’은 밥값 부담도 없고, 음식도 깔끔하지만,
이곳의 별미는 여러 이웃과 나누는 따뜻한 인정이다.
따뜻한 눈길 섞인 말 한 마디에 절로 배가 부른 것이다.







요즘 따라 부쩍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힘들어진다.
몸이 신통찮은 탓이겠으나, 애써 추운 날씨 탓으로 돌린다.
4층 계단만 내려오면, 단골 밥집이 바로 입구에 붙어 있다.
이름 적힌 간판도 없이 그냥 닭곰탕이란 글만 보인다.
그러나 아직 이 집에서 한 번도 닭곰탕을 먹어 본 적은 없다.
매번 주문하는 것이 사천 원짜리 백반인데, 먹을 만하다.
코 구멍한 밥집이라 서너 사람만 들어오면, 꽉 차보이고,
주변이 너저분해 손님 모시기는 좀 그렇지만,
주인 아줌마도 좋고, 음식이 집에서 먹듯 맛깔스럽다.







매일 세시 쯤 들리다, 오늘은 다섯 시에 내려갔더니,
주모가 더 신경 써 주는 것 같았다.
날씨가 춥다며, 된장국을 맛있게 끓여 주었다.
살아남기 위해 내려 왔지만, 짭짤한 된장국이 댕겨 허겁지겁 먹었다.
그러다 벽에 붙은 구닥다리 티비 뉴스 소리에 울컥 토할 뻔했다.
반기문씨의 귀국 기자회견에서 한 말에 비위가 상했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해 이 한 몸 바치겠습니다”

말 한마디에 배가 부르기도 하지만, 말 한마디에 밥맛을 잃는다는 것도 알았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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