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독립은 통일이다

 

2020, 새로운 독립운동의 원년展

2020_1118 ▶ 2020_1124

 

두시영_안중근 아리랑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7×91cm_2020

 

 

초대일시 / 2020_1118_수요일_05:00pm

 

참여작가

강기욱_강충모_고재춘_김선동_김수영_김영중

김윤기_김은숙_나선우_두시영_류충렬_박건재

박신영_박은태_박장근_박재동_박흥순_전진현

정세학-주재환_최병수_최연택_탁영호_황의선

 

주최  (사_(사)민족미술인협회 서울지회후원 / 경기문화재단_경기도기획 / 이종희

 

 

관람시간 / 10:00am~06:30pm

 

갤러리 아리수

GALLERY ARISOO

서울 종로구 인사동11길 13 2층 2전시장

Tel. +82.(0)2.2212.5653 / 070.8848.5653

galleryarisoo.com

 

 

평화와 비폭력의 3·1운동 정신을 통해 통일 조국으로 ● (사)공공예술 들로화 집단과 (사)민족미술인협회 서울지회는 2019년 5월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천로에 위치한 '갤러리 와부'에서 『남양주 독립운동 100주년 기념전』을 개최하였다. 2019년은 3·1운동이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로서 대한민국 전국에서 관련된 문화 예술 행사가 다양하게 진행되었었다. (사)공공예술 들로화 집단과 (사)민족미술인협회 서울지회는 3·1운동 당시 독립 만세 시위의 불을 당겼던 미금면 평내리(현 남양주)의 독립 운동을 재조명하고, 독립운동에 대한 예술가들의 다양한 연구와 참여를 독려하여 남양주 독립운동의 100년 역사를 되돌아보는 전시를 진행하였다. 물론 지역적 문화 인프라의 부족으로 협소한 갤러리와 관람객 확보 및 시민들과의 소통, 문화 행정의 부재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악조건 속에서 진행된 프로젝트로 많은 숙제를 남긴 것은 사실로 보인다. 다만 현재를 살고 있는 예술인 집단이 역사의 범주안에서 공통된 고민을 하였고 계속하여 담론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은 큰 소득이라 할 수 있겠다. ● 2019년『남양주 독립운동 100주년 기념전』이 남양주 지역이라는 국한된 장소성에 머물렀다면 이번에 기획되어진 전시는 지역적 한계를 넘어 준비되었다. 일제에 항거하던 독립 운동의 시작부터 현재와 미래에 대한 거시적 통일 담론을 내포하는 이번 전시에서 기획자는 '지난 100년의 기간 동안 우리는 진정한 독립을 하였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김은숙_하늘이 바다이고 바다가 땅이듯_천에 아크릴채색_162.2×112.1cm_2020

 

 

1부; 1919, 대한민국 원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3·1운동(1919-1945) / 2부; 2019, 독립운동 100주년(1946-2019) / 3부; 2020 새로운 독립운동 (2020-미래) 총 3부로 기획된 이번 전시에는 40명의 다양한 작가들이 참여하여 3·1운동 100년을 넘어가고 있는 이 시기의 진정한 독립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작품으로 보여 줄 것이다. 또한 2020년을 대한민국의 완벽한 독립이 시작되는 원년으로 선포함으로서 과거의 부끄러움을 씻고 나아가서는 분단의 벽을 허물어 자주통일의 원대한 꿈을 실현시키는 것에 전시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40여점의 그림과 조각, 설치, 만화, 글씨 등이 '갤러리 와부(남양주시)'와 '갤러리 아리수(서울시)'에서 연속하여 전시가 열린다. ● 주지하다시피 역사라는 테마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조명하는 기획 전시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작가의 주제의식 등 많은 어려움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역사적 문맥 속에 작품을 놓고 본다는 것이 설사 가능하다고 쳐도, 결국 그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시대의 물질 내지는 정신적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기획자의 역할은 얼마나 작가들로 하여금 주제의 틀로 접근시킬 수 있느냐가 전시의 성패를 가름할 것이다.

 

박장근_영원한 약속_합성수지, 화강석_87×45×23cm_2019

 

 

1. 1919, 대한민국 원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3·1운동(1919-1945) ● 1919년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한 해이다. 3·1운동을 시작으로 1919년 한해에만 1500회가 넘는 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이 정신으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후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암흑과의 사투와도 같은 기나긴 시간이었다. 우리는 때로 역사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행복의 정원에서 소일하는 나태한 자가 필요로 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필요로 한다. 역사적 인식의 주체는 억압받는 계급 자신이기 때문이다. ● 1부의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강충모, 고재춘, 김선동, 김영중, 김윤기, 두시영, 박은태, 박재동, 이석숙, 이영학, 탁영호, 황의선)의 역사 인식은 몇 가지로 분류되어 지는데, 절망적인 시대에 직면하여 아직도 책임질 수 있는 예술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역사를 구원의 관점에서 관찰하려는 태도가 그 중 하나다. 또 다른 유형은 직접적이며 분노하는 형태와 희망의 빛을 찾아나서는 표현방법을 구현해내는 작가들이다. 김선동 작가는 「나는 독립운동가다」라는 테라코타 작업에서 비현실적인 거대한 꽃나무 아래 외로이 서 있는 여성을 통하여 독립에 대한 희망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였다. 작가 박재동은 「어머니.... 분이야...대한독립만...」, 「들어 가세요 어머니」, 「귀향」의 연작에서 외롭게 지켜내야만 하는 조국의 현실을 어머니라는 모티브를 등장시켜 구원자 내지는 피안의 안식처로서 묘사해 내고 있다. 다소 정돈되지 않은 붓질의 질감은 비현실적이며 꿈꾸는 듯한 상황을 재현해 내고 있다. 두시영의 「안중근 아리랑」은 대동여지도 위에 안중근의 초상화를 그려 넣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아픈 안중근의 형상은 그가 죽기 전에 남긴 글들로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즉 텍스트로 구성된 텍스트화인데 한반도의 지형과 안중근의 강인한 이미지가 오버랩 되며 역설적이게도 한반도의 불안한 미래를 암시하는 듯 보인다. 이영학과 박은태는 「칼의 나라」, 「우남의 초상」에서 각각 날카로운 분노와 역사의 죄인을 희화하여 단죄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박재동_1.어머니..... 분이야......대한독립만.._유채_72.7×91cm_2019

 

 

2. 2019, 독립운동 100주년(1946-2019) ● 광복 후 73년은 포스트 일제의 시기였다. 기득권으로 세습된 친일잔재가 권력과 언론, 관료, 기업, 교육, 문화, 군, 경찰 등 곳곳에 흘러 국민들에게도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이시기는 외세가 아닌 동족에 의해서 수난을 당하고 육체와 정신을 혹사당한 시기이다. 성장제일주의라는 미명하에 철저하게 숨겨진 일제의 잔당들이 국토를 유린하며 득세하여 온 아픈 역사의 기록이다. 과거를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이 원래 어떠했는가를 인식하는 과정일 것이다.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역사의 순간을 기억으로서 붙잡는다는 것을 뜻한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현대 예술론의 중요한 과제는 기억과 경험으로서 역사적 사실들에게 예기치 않게 나타나는 과거의 이미지를 붙드는 일이다.

 

박흥순_남북동색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1×117cm_2019

 

 

광복 후 분단의 아픔을 표현해 낸 작품들(박신영, 박흥순, 류충열, 손장섭, 이동주, 이승곤, 정세학)과 평범한 현대 회화의 재현방법으로 7.80년대의 고속성장 시대를 살아온 모습들을 표현한 (변대섭, 서수경, 손금식, 양형규, 최연택)작품들은 대부분 아픈 과거와 현실이 교차되어 묘사되어 있다. 다음 유형은 시대를 향한 분노와 저항, 슬픔 (나선우, 박건재, 변사무엘, 송효섭, 엄순미, 주재환)등을 표현한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박신영의「선과 선을 넘어서」는 분단의 3·8선을 넘나드는 잠자리가 연상되는 서정적 슬픔이 느껴진다. 박흥순은 「남북 동색」에서 철조망에서 피어난 엉겅퀴를 통하여 분단국가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는듯하여 다소 아프면서도 화면 뒤쪽 섬 주변에 배치 되어 있는 군함 같은 형상들은 전면의 꽃과 예리한 각을 이루어 긴장을 극대화 시키고 있다. 손장섭의 「DMZ」 연필 드로잉은 비무장지대의 풍경을 한 폭의 풍경화처럼 재구성함으로서 전혀 새로운 이미지의 전환을 유도하고 있다. 작가의 전혀 진지하지 않은 작업 태도는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강대국들의 태도와 어느 정도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여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붉은색으로 강하게 써놓은 글자 위로 잘 자란 소나무를 그려놓은 송효섭의「문자도-혈-민주주의 나무」는 "The tree of liberty must be refreshed from time to time with the blood of patriots and tyrants"-Thomas Jefferson의 무서운 말이 생각나는 그림이다. 전체적인 구조는 분재의 분위에 놓인 잘생긴 분재처럼 보이나 그 보색의 대비에서 전달되는 힘은 그림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역할을 넘어 일견 사회주의식 포스터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이승곤의 「어머니」는 한 화면에 여러 가지 상황을 배치하여 다큐멘터리 효과를 준 그림이다. 어머니의 사실적 묘사를 화면의 중심에 배치한 후 전쟁의 참혹한 상황들을 흑백으로 배열함으로서 과거와 현재를 구분 짓고 있다. 역사는 야누스와 비슷하여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과거를 바라보건 현재를 바라보건 우리는 늘 하나의 역사를 선택하여 바라보는 습관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것이 진실이건 거짓이건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 다만 자기가 정한 것만 보려고 한다는 것에서부터 늘 비극은 시작되어 진다. 「비무장새」를 그린 정세학은 다소 아름다운 그림으로 분단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블루와 그린으로 병치된 화면의 구성과 만리장성이 연상되는 철책의 구조는 너무나 장대함으로 다가와 도저히 파괴할 수 없는 물질로 느껴져 좌절감을 안기는 듯하다. 주재환의 「어머니 영웅」은 베트남전에서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베트남 금성홍기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줄거리와 함께 배치한 작품이다. 한 어머니의 슬픔은 그 시대의 아픔을 대변한다. 텍스트 말미에 쓰여진 '역사는 윤리와 만나야 한다'라는 진실에 가까운 글이 뼈를 때린다. 우린 너무 안 좋은 시절을 지나온 것 같다.

 

정세학_비무장새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1×75cm_2019

 

 

3. 2020 새로운 독립운동 (2020-미래) ● 잃어버린 100년의 시간을 되찾는 방법은 그 시대를 지켜온 역사를 올바르게 기억하는 일일 것이다. 2020년 대한민국은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고 적폐를 청산하는 원년으로 삼았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민족의 대 부흥기를 맞이할 준비를 하여야 한다. 대한민국의 진정한 독립은 분단으로부터의 독립, 즉 통일이다. 외세의 도움 없이 스스로 만드는 완벽한 통일만이 이 암울한 시절을 끝장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백두산 호랑이의 기백을 전통적 민화의 기법으로 형상화하여 독립적인 통일의 염원을 묘사한 강기욱의 「독립! 통일」, 화면을 흑과 백으로 분할하여 전쟁의 흔적을 희망의 언어로 승화시킨 김수영의 「안식의 언덕」, 인상주의풍의 서정적인 풍경에 한반도 지형의 여백을 만들어 새로운 역사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김은숙의 「하늘이 바다이고 바다가 땅이듯」, 신현경은 흙으로 만든 종이 위에 찢긴 풍선을 매단「우리의 통일」을 통하여 불안하고 힘겨운 미래, 통일 등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이동주는 「종전고지」라고 명명된 작품에서 만개한 꽃들을 전장에서 피어나게 하는 긍정적 화법을 선보인다. 이종희와 박장근은 각각 「휘영청 뜬 보름달처럼 통일이여 아침 빛으로 찬란히 오라」, 「영원한 약속」에서 통일에 대한 염원을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종희의 8광 화투에 보름달처럼 환하게 뜬 달빛은 희망의 횃불처럼 찬란하다. 이영선의 「통일의 실을 잣다」는 한올 한올 실을 자아 통일을 기원하는 진정이 묻어난다. 임진택의 「아리랑애국가」는 새롭게 제작되어야 할 애국가를 제시하고 있다. 전진현의 「하나되어」, 「숨쉬다」는 옻칠재료기법이라는 독특한 제작방식으로 영토와 국가라는 인식에 한발 다가서고 있는 듯 보인다. 최병수의 금속작업인 「평화통일」은 완전한 형태의 완성체로서의 한반도를 표현해 내었다고 본다.

 

최병수_평화통일_철_35×20×0.5cm_2014

 

 

새로운 독립운동의 원년인 2020년 가을, 그 어느 때보다도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한반도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것도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청산해야 할 적폐는 산적해 있고 예술가로서 이 시대를 양심적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숙명도 함께 안고 가야 한다. 또한 통일을 이루기 위한 예술인으로서의 지분을 감내해야 하며, 희망의 메시지도 제시할 의무가 있다. 어려운 문화 인프라 여건에서도 지속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사)공공예술 들로화 집단과 (사)민족미술인협회 서울지회의 이번 전시가 의미 있는 영감의 원천으로 작동되기를 기대해 본다. ■ 이종호

 

 

Vol.20201111h | 진정한 독립은 통일이다-2020, 새로운 독립운동의 원년展

천근의 삶

 

박은태展 / PARKEUNTAE / 朴銀泰 / painting 

2020_1104 ▶ 2020_1125

 

박은태_철골-H빔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50×162cm(125×162cm×2)_202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80411j | 박은태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30am~06:30pm

 

인디프레스_서울

INDIPRESS서울 종로구 효자로 31(통의동 7-25번지)

Tel. 070.7686.1125

www.facebook.com/INDIPRESS

 

 

회화적-노동 속 숨은 그림 찾기: 추상노동과 구체노동의 변증법적 반전을 위하여1.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로 사람들 사이의 교류는 물론 세계경제 전반이 급격히 위축되고 있지만, 오히려 이를 계기로 그동안 기존의 관습과 저항에 부딪쳐 완만하게 진행되던 비대면-경제, 비대면-교육, 비대면-의료, 비대면-문화활동 등이 급부상하고 있다. 바야흐로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기술이 산업과 생활 전반에 전면적으로 결합되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코로나19 팬데믹의 파도를 타고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셈이다. 이럴 경우 이미 3차 산업혁명(정보혁명)에 의해 난도질 당해온 '노동의 사회적 위상'도 함께 약화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자동화 기술이 제조업(스마트팩토리)과 서비스업(스마트서비스)은 물론 농업(스마트팜)과 일상생활(스마트홈)로 확산될 경우 '인간 노동'의 비중이 급격히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당장 자영업과 관광/여행 등 서비스업에 큰 타격을 가했다면, 인공지능/4차 산업혁명은 20여 년 전 제레미 리프킨이 예상했던 '노동의 종말'을 현실화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2010년대부터 가시화되기 시작한 이런 추세에 따라 '노동' 관련 담론은 물론 이를 주제로 한 연구도 급격히 줄어온 게 현실이다. ●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사실은 「자동기술화의 증가=노동시간 감소」라는 등식이 공장 내에 적용된다고 해서 사회의 전 분야에도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미 초국적으로 연결된 불균등 발전의 가치 사슬로 얽혀 있는 첨단기술과 낙후된 기술의 병존을 통해 독점이윤을 수취해온 자본주의적인 생산관계가 기술발전을 사회 전체의 노동일 감소로 이어지게 할 통로를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공장 내에서도 이 등식은 개별 노동자의 노동력 지출을 오히려 증대시키는 방식으로 악용될 수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노동생산성의 발전에 의한 노동의 절약은 결코 노동일의 단축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1개의 상품에 이전의 10분의 1의 노동시간을 지출하게 된다는 사실은, 결코 그로 하여금 종전과 같이 하루에 12 시간 노동하고 또 그 12 시간 동안 120개가 아니라, 1200개를 생산하도록 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사실 그의 노동일은 단축되기는커녕 연장되기조차 하여 14시간 동안 1400개를 만들도록 강요되는 수도 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의 테두리 내에서는 노동생산성의 상승은 노동일 중 노동자가 자기 자신을 위해 노동해야 할 부분[필자: 필요노동]을 단축하며,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일 중 노동자가 자본가를 위해 무상으로 노동할 수 있는 나머지 부분[필자: 잉여노동]을 연장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마르크스: 409~410쪽). 맑스가 150년 전에 분석했던 자본주의적 생산의 이런 역설적인 특징은 오늘날 스마트 배달경제의 현장에서 과로로 사망하는 배달노동자의 참혹한 현실에서 반복되고 있다. 따라서 진정한 문제는 기술 발전과 노동시간의 관계(및 그에 따른 노동의 종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술 발전과 생산관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박은태_철골-비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50×176cm(125×176cm×2)_2020

 

코로나19 펜데믹/비대면 경제/인공지능 시대의 도래와 같은 오늘의 거시적이고 현기증 나는 시대 변화와 비교하자면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노동'이라는 오래된 주제에 함축된 이런 역설적인 의미를 먼저 거론하는 것은 화가 박은태의 이번 개인전의 주제가 바로 '건설현장의 노동'이기도 하지만, 이 문제가 인수공통감염병의 펜데믹 시대이자 본격적인 인공지능자본주의로의 전환이 가속화되는 2020년대에 대다수 노동자/민중의 삶 전체를 압박하는 공통의 화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인공지능/4차 산업혁명에 의한 단위 시간당 노동생산성 증가의 성과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하에서는 오직 소수 자본가에게만 귀속될 뿐만 아니라 노동과정에 대한 기술적 지배력의 증대로 인해 노동자/민중 전체는 노동일의 조정은 물론, 노동의 양과 강도, 노동의 질 등 다양한 측면에서 통제력을 상실하고 더욱 불안정하고 예속적이고 취약한 상태로 전락할 위험이 커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는 「노동의 종말」이라기보다는 「노동의 만성적 위험의 심화」라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구조가 변하지 않는 상태에서 인공지능/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이런 위험의 증대는 지난 40여 년 동안 전개된 3차 산업혁명/신자유주의 시대가 초래했던 노동의 수직적 분할/위계화, 자산/소득의 양극화가 가져왔던 참혹했던 결과에 비추어 보면 쉽게 가늠할 수 있다. 실제로 2010년대에 들어와 이전과는 달리 묵시록적인 재난영화/좀비영화의 생산과 소비가 지속적으로 증가해온 것이나 각종의 힐링 담론이 만연했던 것도 이런 현실적 추세가 촉발하는 소외감/불안감/공포심 대한 일종의 집단신경증적 반응(을 통한 카타르시스 효과)이라고 볼 수 있겠다. ● 그러나 현실 문제에 대한 신경증적인 증상을 통한 심리적 반응/위로와 현실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처방을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전자에 머물 경우 현실이 악화되면 신경증적 반응 역시 강화되고 자아는 더 무력해지는(정말 좀비처럼 되어 생산관계 변화의 행위자-주체가 될 가능성 자체가 사라지는) 악순환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 악순환 고리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기술과 노동을 대체 관계로 보는 기술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 노동의 위기를 강제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내적 모순과 생산관계 내에서 노동자/민중의 위치를 직시하면서, 그와 동시에 대안적 생산관계를 구성할 수 있는 노동자/민중 자신의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잠재력을 회복할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건설현장의 노동과정을 촬영하고 몇 개의 장면들을 선택하고 변형하면서 다양한 기계 장치들과 노동력의 결합 과정을 대형 화면으로 구성하고 있는 박은태 화가의 이번 전시가 노동자의 소외나 분노/투쟁을 주제로 삼았던 1980~1990년대 노동미술의 부정적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른 종류의 의미(와 긴장감 있는 재미)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맥락 속에서다.

 

박은태_철골-상념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51×158cm_2020

 

2. 박은태 화가의 이번 작품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 기울인 세밀한 수작업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얼핏 보면 극사실주의 회화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사진과 같은 정확하고 세련된 기술적 재현이 아니라 시간을 요하는 건설 현장의 복잡한 공정을 최대한 상세히 따라가면서 철골을 구부리고 용접해서 철골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과정, 여러 층의 비계를 설치하는 과정, 전선을 연결하는 과정, 목재와 시설들을 쌓아두고 여기저기 옮기는 과정, 레미콘에서 시멘트를 붓는 과정 등을 일일이 붓으로 수를 놓듯 화폭에 옮겼음을 알 수 있다. 또 도구와 설비를 연결하는 건설 노동자들의 다양한 작업 동작과 안전모와 햇볕 가리개 수건과 땀에 절은 작업복의 주름 등도 특정한 단면의 사진적 재현이 아니라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직접 대면해서 꼼꼼히 실사하듯이 공들여 그려내고 있다. ● 이는 멀리서 풍경을 조감하는 원근법적인 관찰보다는 현장에서 작업자들과 함께 움직이면서 노동과정의 호흡을 생생하게 담아내려는 인류학자의 참여관찰 기록과도 같아 보인다. 사진으로만 보면 삭막해 보이는 현장에서의 지루하고 기계적인 작업을 긴 호흡으로 생생하게 따라갈 수 있는 이런 참여관찰의 자세는 아마도 젊은 시절 7년 동안 공장 노동자로 살았던 화가 자신의 직접 경험에서 나왔을 거라고 추론해 볼 수 있다. 다양한 상황에서 손과 도구가 유기적으로 결합해서 대상을 변형시키는 노동과정의 복잡한 메커니즘은 매우 복잡한 인지생태학적 경험, 즉 사진으로 찍거나 말로 전달하는 형식적 지식과는 다른 특수한 감각과 근육과 주의가 결합된 복합적인 암묵적 지식과 기술적 경험을 함축하고 있다. ● 만일 이 과정에서 생성되는 특정한 형태의 기술적 활동에 내재한 힘든 노고와 맞물린 암묵적인 즐거움이 없다면 땡볕을 반사하는 뜨거운 시멘트 바닥에서, 또는 바람 부는 허공에서 비계를 딛고 서서 장시간 주의를 집중하는 작업이 지속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토목 공사를 통해 텅 빈 땅에 기초 골조를 세우고 한층 한층 쌓아 올려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어 나가는 긴 건설 공사의 과정을 자본의 관점에서 보자면 투자한 자본을 회수하기 위해 생산수단과 노동력 상품을 구매해서 결합하는 회계적 과정에 대한 산술적인 계산이나 재산 증식의 수단에 불과하겠지만, 노동의 관점에서 보면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유사한 보람찬 과정일 수 있는 것이다(비록 그 시작과 끝이 제한된 기간에 한정된 것이고, 그 생산물이 자신의 소유나 점유와는 무관한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박은태_철골-여보세요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50×205cm_2019

 

이런 맥락에서 보면 박은태의 이번 그림은 그 자체가 건설 현장의 노동과정을 '대상화'해서 '재현(representation)'하기보다는 복잡한 노동과정 자체를 '재상연(re-presentation)'하는 일종의 '유사-기술적 활동'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실물 크기에 근접하는 규모로 캔버스를 제작해서 붓으로 전선을 연결하고, 철골을 나르고, 목재를 재단하는 일종의 「회화적-노동」이 그것이다. 이 과정에서 흰 바탕의 캔버스에서 일련의 질서(색조와 형상의 배치가 만드는 일련의 리듬)를 조성해 나가면서 화가가 암묵적으로 느끼게 되는 수작업의 즐거움이 보는 이에게는 대형화면에 배치된 추상적인 패턴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형상이 만드는 '정중동'의 리드미컬한 '제스처'를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전달된다. 이런 느낌은 정확히 현장을 재현하는 작은 크기의 흑백 사진에서는 포착되기 어려운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작업들은 현장 사진을 일종의 '트리트먼트'로 삼아 무대를 만들어 직접 공연을 올리는 연출 행위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이 '회화적-공연'에서 중요한 것은 연극에서처럼 이야기의 줄거리가 아니라 각각의 현장 상황 속에서 각각의 노동자들이 취하고 있는 다양한 동작의 전과 후를 응축해낸 특별한 운동 중의 포즈들이다. 작품 「철골-3」에서 시멘트 벽에 드릴로 구멍을 뚫고 있는 노동자의 왼쪽 몸과 다리는 다소 앞으로 기울어 드릴에 힘을 가하고 있고 등과 오른 다리가 기울기를 조절해 주고 있어 작업자의 숙련된 운동감을 그려내고 있다. 「몬드리안 비계」에서는 머리 위의 비계에 합판을 올리는 노동자의 자세에서 무거운 물건을 가벼운 손짓을 지렛대로 삼아 들어 올리는 힘의 효과적인 조절 동작을 읽어낼 수 있다. 「철골-4」에서는 목재를 재단하는 노동자의 앉은 자세들에서, 「철골-5」에서는 여러 갈래의 전선을 연결하는 자세들에서 재료와 도구와 노동력을 효과적으로 결합하는 숙련된 장인의 포즈가 느껴진다. 이런 자세들이 바로 건설 현장 노동자들이 대상과 도구를 결합하기 위해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를 쏟아 부으면서 체득했던 일련의 기술적 활동 속에서 시작과 끝이 분명하게 연결되는 일련의 '제스처'들이다. 벤야민이 브레히트의 서사극에서 제스처가 갖는 의미에 대해 기술했듯이 제스처들은 여러 요소들이 연결되어 만들어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에피소드, 그로부터 행위의 사회적 함의를 읽어낼 수 있는 일련의 내용을 갖고 있다. ● "제스처는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나 벌이는 일들과 달리 확고한 시작과 확고한 끝이 있다. 하나의 태도는 전체적으로 볼 때 생동적인 흐름 속에 있는데, 이 태도의 각 요소가 이처럼 엄격하게 틀을 갖고 완결되어 있다는 점은 제스처의 변증법적인 기본 현상들 가운데 하나이다...중단하면서 [줄거리를] 지체하는 성격과 틀로 감싸 일화를 만들어내는 성격이 바로 제스처적인 연극을 서사극으로 만든다." (벤야민: 119쪽)

 

박은태_철골5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50×388cm(120×194cm×4)_2019

 

만일 이런 제스처들이 온전히 그려지지 않았다면 이 그림들은 건설 현장의 철골 구조나 비계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일련의 추상적 패턴을 몬드리안의 추상화처럼 그려낸 장식적인 그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몬드리안 비계」는 바로 이런 추상적 패턴들 「속」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노동자들의 다양한 제스처들을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그려냄으로써 자본주의적으로 구조화된 사회적인 추상노동과 개별적인 구체노동 간의 변증법적 긴장을 '상연'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20세기 모더니즘을 상징하는 몬드리안의 추상화는 현장의 구체노동을 생략하고 추상노동(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으로 개별적인 구체노동을 기계화하는 강제력)의 결과인 멋진 구조물만을 그려냄으로써 자본주의적인 추상노동의 획일적 지배를 시각적으로 일반화하고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20세기에 시작된 추상화의 패턴과 추상노동의 이런 짝패구조는 오늘날 화려한 초고층 건물들과 신도시의 외관을 누구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든 인지생태학적 변화의 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별적인 구체노동이 생산하는 「사용가치」는 단지 자본주의적으로 편성된 사회적인 추상노동의 양, 즉 사회적으로 지출되는 평균 노동시간의 양인 「가치」로 환원되고, 가치는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임금) 혹은 이를 제외한 잉여가치의 크기에 의해서만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에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노동의 의미는 노동자들 자신에 의해서도 거의 망각되기에(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기에) 이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생산의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주목하면 사용가치를 창조하는 개별적인 구체노동의 의미는 자본가의 입장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는 창조성의 원천이다(이것 없이는 새로운 상품을 판매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연과 비인간의 자연의 풍부한 잠재력을 결합해서 합목적적으로 변형시키는 노동과정 속에서 발휘되는 이 창조성의 원천은 「생산수단과 생산물로부터의 소외」라는 일반적인 개념으로 모두 규명하고 비판할 수 없는 특별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맑스가 노동의 이중적 성격을 지적한 것도 이 점을 강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 "모든 노동은 한편으로 생리학적 의미에서의 인간노동력의 지출이며, 이 동등한 인간노동[또는 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속성에서 상품의 가치를 형성한다. 모든 노동은 다른 한편으로 특수한 합목적적 형태에서의 인간노동력의 지출이며, 이러한 구체적 유용노동이라는 속성에서 사용가치를 생산한다." (마르크스: 58쪽) ● 문제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에서는 잉여노동의 비율을 증대시키기 위한 압력이 추상노동의 형태로 강화되면서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구체노동의 합목적적인 성격이 지속적으로 희석화되는 방향으로 흘러왔다는 데 있다. 점증하는 자동기술화는 구체노동의 의미를 더욱 폄하하게 만들고 일부 노동자들에게서는 노동의 의미는 사용가치의 생산보다는 단지 임금의 크기에 달려 있는 것으로 일면화되기에 이르고 있다. 이런 현상은 원자력 발전소의 노동자들이 일자리 상실을 우려해 기후위기 시대가 요구하는 탈원전 정책을 반대하는 데 앞장서는 아이러니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인간의 구체노동이 이제 그 의미를 상실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맑스가 강조했듯이, ● "노동과정은 사용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합목적적 활동이며,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자연물의 취득이며,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의 일반적 조건이며, 인간생활의 영원한 자연적 조건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생활의 어떠한 형태로부터도 독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간생활의 모든 사회적 형태에 공통된 것이다." (마르크스: 233쪽) ● 문제는 그 사용가치의 특성이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의 촉진에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균열을 내는가에 있는 것이지 사용가치 생산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구체노동 자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맑스가 정확히 규명했듯이, 노동 자체가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필자: 에너지와 물질의 동화작용과 이화작용)를 합목적적으로 매개하는 존재론적인 조건이며, 이 조건 속에서 인간은 자연과 분리될 수 없게 얽혀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신체 자체도 자연력에 속한다. ● "노동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과 자연과의 신진대사를 자기 자신의 행위에 의해 매개하고 규제하고 통제한다. 인간은 하나의 자연력으로서 자연의 소재를 상대한다. 인간은 자연적 소재를 자기 자신의 생활에 적합한 형태로 획득하기 위해 자기의 신체에 속하는 자연력인 팔과 다리, 머리와 손을 운동시킨다. 그는 이 운동을 통해 외부의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화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자기 자신의 자연(천성)을 변화시킨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하며 이 힘의 작용을 자기 자신의 통제 밑에 둔다." (마르크스: 225~226쪽)

 

박은태_철골4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260cm(194×130cm×2)_2019

 

인간이 자신의 자연에 내재한 잠재력(육체적〮정신적 역량)을 개발해 외부의 자연을 변형함으로써 자신의 자연도 함께 변화시키는 활동적 과정, 즉 「인간의 자연」과 「비인간의 자연」이라는 자연의 두 부분들 간의 결합에 의한 「자연의 자기-생산(오토포이에시스) 과정」이 곧 구체적인 노동과정이며 이것이 바로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이라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노동이란 불완전하지만 「능산적 자연」의 속성을 지닌 「인간의 자연」과 나머지 「비인간의 자연」이 함께 결합해 각자의 「소산적 자연」을 변화시키는, 자연 자신의 자기 조직화(자기 생산) 과정의 일부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구체적인 노동은 인간 자신의 잠재력의 발현이자 인간과 자연의 공진화의 존재론적 조건이기에 제아무리 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해도 표기할 수 없는 것이다(퇴직을 하게 되면 사람들이 무력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의 자연의 자기 생산을 통한 다중지능 네트워크의 발전이 중단되기 때문이다). ● 문제는 이와 같은 노동의 능동적이고 자기-조직적인 의미가 자본주의적인 생산관계 하에서는 자동기술화의 추세에 떠밀려 지속적으로 폄하되고 사회적 인식의 무대 뒤편으로 떠밀려 왔다는 데 있다. 그와 더불어 인간노동력과 함께 부의 생산의 원천인 자연력의 의미 역시 언제든 파괴하고 탕진해 버려도 되는 무상의 원료로 폄하되어 왔다. 그 결과 이제 인류는 과학자들이 「인류세/자본세의 위기」라고 부르는 전지구적인 지질학적 균열의 시대에 이르게 되었다. 노동을 매개로 한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의 과정이 오직 자본축적만을 목적으로 삼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의해 심각하게 일그러지면서 비인간의 자연과 인간의 자연의 풍부한 자기 조직화의 역량이 훼손되어 지구온난화와 환경오염은 물론 코로나19팬데믹과 같은 인수공통감염병의 확산, 신경증적 불안과 우울증, 혐오 감정과 공포감의 확산 같은 인지생태학적 위기가 대규모로 증폭되고 있는 것이다. ● 이런 문제들이 심각하게 전면화되자 일각에서는 트랜스휴먼/포스트휴먼 담론들이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문제를 야기한 원인이 인간/자연의 불완전성과 인간중심주의에 있으므로 GNR 기술과 탈인간중심주의에 의해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보는 이런 담론들은 불완전한 인간노동을 인공지능으로 대체해 생산성을 높이자는 4차 산업혁명의 정책/담론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담론/정책들은 정작 문제의 근본 원인이 인간노동력과 자연력을 무차별적으로 착취하고 수탈해온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있음을, 오직 잉여가치 증식을 목적으로 삼는 추상노동의 메커니즘을 통해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구체노동을 지배해온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애써 회피하고 있다. 그러나 발병의 근본 원인을 방치한 채 다양한 마취제나 환각제를 사용할 경우 통증을 일시적으로 완화할 뿐 병은 더욱 깊어질 뿐이다. 따라서 정말 인류와 지구생태계가 종말에 이르기 전에 발병의 근본원인인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해체하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공진화를 가능하게 할 대안적인 생산관계를 구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인간노동력이 만들어낸 노동도구와 자연력을 결합하는 노동과정과 생산과정 전체를, 추상노동과 구체노동의 관계 자체를 새로운 시각에서 파악해야만 한다.

 

박은태_철골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18×142cm_2018

 

추상노동과 구체노동의 관계는 대안적인 생산관계 속에는 추상노동의 일방적인 지배가 아니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양자 간의 선순환 관계로 전환될 수 있다. ● "공동소유의 생산수단으로써 일하며 또 자기들의 각종의 개인적 노동력을 하나의 사회적 노동력으로서 의식적으로 지출하는 자유인들의 결합체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로빈슨 크루소의 모든 생산물은 다만 그의 개인적 생산물이었고 그 자신을 위한 사용대상이었다. 자유인들의 결합체의 총생산물은 사회적 생산물이다. 이 생산물의 일부는 다시 생산수단으로 역할하며 사회에 남는다. 그러나 다른 일부분은 결합체 구성원에 의해 생활수단으로 소비되며, 따라서 그들 사이에 분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분배 방식은 사회적 생산조직 자체의 성격 여하에 따라, 또 생산자들의 역사적 발전 수준에 따라 변화할 것이다. 다만 상품생산과 대비하기 위해 각 생산자들에게 돌아가는 생활수단의 분배몫은 각자의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고 가정한다. 그렇게 된다면 노동시간은 이중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노동시간의 사회적 계획적 배분은 결합체의 다양한 욕망과 각종의 노동기능 사이의 적절한 비율을 설정하고 유지한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시간은 또한 각 개인이 공동노동에 참가한 정도를 재는 척도로서 기능하며, 따라서 공동생산물 중에서 개인적으로 소비되는 부분에 대한 그의 분배몫의 척도로 된다....사회적 생활과정 즉 물질적 생산과정은, 그것이 자유롭게 결합된 인간들에 의한 생산으로 되고 그들의 의식적 계획적 통제 밑에 놓여지게 될 때 비로소 그 신비의 베일을 벗어버린다." (마르크스: 99~100쪽). ●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서 사회적인 공동소유로 생산관계를 전환시키는 일은 신비로운 기적이나 위대한 지도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합목적적인 노동에 참여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결합체의 형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럴 경우 개별적인 구체노동들의 결합물인 사회적 추상노동 역시 그 신비의 베일(M-C-M'라는 자본의 자기 증식적 과정의 추상적인 베일)을 벗어버리고 노동자들의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통제 아래에 놓임으로써 구체노동과 추상노동의 선순환의 새로운 길이 열릴 수 있다. 비록 현재는 자본가의 지휘 아래에 결합된 추상노동이 '천근'의 무게로 짓눌러 폄하되고 저평가되고 소외되어 악순환의 고리에 갇혀 있다고 해도, 결국 이 악순환의 고리를 깨고 추상노동과 구체노동의 선순환의 길을 여는 관건, 또는 지렛대는 사용가치를 생산해온 개별 노동자들의 구체노동의 역량과 경험의 네트워크의 형성에 달려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적인 추상노동의 거대한 구조적 압력과 개별 노동자들의 구체노동에 응축되어 있는 다양한 제스처들 사이에서 변증법적 긴장관계(와 역전의 가능성)을 읽어내는 일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박은태_철골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29×152cm_2018

 

3. 박은태의 이번 작품들 중에서 이런 변증법적 긴장관계를 함축하고 있는 하나의 예시를 '하이 앵글'로 그린 「철골-5」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건축물의 평면은 거시적으로는 도시 전체의 풍경을, 미시적으로는 컴퓨터의 배전판, 반도체의 회로를 연상시킨다. 실제로 오늘의 대도시는 거시적-중간적-미시적 수준 모두에서 유비쿼터스 컴퓨팅의 복잡한 회로에 의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철골-5」의 이미지는 오늘의 초연결 사회의 도시적 삶의 풍경화로서 제격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 그런데 이 그림에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지점은 노란색/붉은색/파란색/흰색의 화려한 색조의 전선들과 사각형의 시멘트 블록과 크고 작은 배관들이 연결된 네트워크의 추상적인 패턴이 만들어내는 현대적인 미감만이 아니라, 전선들을 연결하고 있는 개별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동작이다. 현재 '스마트팩토리', '스마트팜', '스마트시티', '초연결사회'에 관한 모든 담론과 정책들은 마치 센서와 인공지능과 빅데이터와 크고 작은 로봇 등의 기술적 수단들에 의해 자동으로 복잡한 네트워크 형성이 가능하다는 식으로 기술적 네트워크의 발전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철골-5」가 잘 환기시키고 있듯이 이 복잡한 회로들의 링크가 실제로 연결되어 작동하게 되려면 반드시 개별 노동자의 구체노동이라는 결절점(노드)을 거쳐야 한다. 이렇게 노드의 관점에서 보자면 따라서 전체 링크들의 숫자와 복잡함보다는 각 노드의 성격과 방향, 노드와 노드가 결합하는 방식이 더 중요해진다. ● 노드를 이루는 개별 노동자들이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자신의 구체노동의 실존적이고 생태학적인 의미를 깨닫고 그것들이 비자본주의적인 사회적 노동력으로 새롭게 연결되도록 노동자들의 자유로운 결합체를 구성하게 된다면, 컴퓨터 배전판의 작동 방식은 물론, 건축물 내부에서 사물들의 연결 회로와 사람들의 동선, 건물과 도로와 사람들의 움직임을 연결하는 방식을 의식적/계획적으로 바꿀 수 있다. 모든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증식을 위해 노동력 착취와 온난화와 환경오염과 자연파괴를 서슴지 않는 「자본의 수직적 네트워크」가 아니라 공동소유에 기반해 개인적 소유를 재건하면서 「인간의 자연과 비인간의 자연의 공진화」를 촉진할 「노동의 수평적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방향이 그것이다. ● 이런 각도에서 보자면 「철골-5」는 일종의 숨은 그림 찾기 또는 비트겐슈타인이 예시했던 「오리-토끼 그림」을 볼 때와 비슷한 재미를 주기도 한다. 멀리서 얼핏 보면 이 그림 역시 추상적인 격자를 촘촘하게 중첩시킨 모더니즘적인 추상화와도 같아 보인다. 그러나 거대한 추상적 패턴 속에서 미미하게 움직이는 노동자들의 동작에 초점을 맞추면, 추상적인 사회적 노동의 향방을 바꿀 수 있는 노드들의 새로운 연결망이 마치 캄캄한 밤하늘에 고립된 것으로 보이던 별들이 각도를 달리해서 보면 여러 가지 성좌를 이루게 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기계들과 사물들만의 연결망이 아닌 노동하는 사람들의 연결망, 인간과 자연을 연결하는 새로운 사회 구성체의 성좌가 그것이다.

 

박은태_철골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51×216cm_2018

 

물론 직선의 격자들과 곡선의 추상적 패턴(오리 그림) 속에서 새로운 사회의 전망(토끼 그림)을 끌어내는 이런 시각을 지속적으로 견지하기는 쉽지 않다. 노드들이 고립되면 「철골-6」에서처럼 미로와 같은 격자 속에서 표류하기 쉽고, 때로는 「철골-구덩이」에서처럼 블랙홀 같은 거대한 구멍 앞에서 망연자실해질 수도 있다. 때로는 「하늘-배선」에서처럼 몸과 머리가 분리되는 것과 같은 상황에 일시적으로 갇힐 수도 있다(자본주의적인 추상노동의 '천근의 무게'에 짓눌려 소외된 노동자들 모습). 하지만 사람은 사물이 아니기 때문에 고립되거나 분리된 상태로 정지해 있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 자체가 실은 가장 복잡하고 역동적인 다중지능 네트워크적인 존재라는 오늘의 뇌신경과학과 복잡계 생물학의 발견은 이런 고립감이 일반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는 점을 쉽게 확인해준다. ● 뇌신경과학에 의하면 인간 뇌의 신체지도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손과 입술을 관장하는 영역이다. 이는 직립에 따라 손과 입술 사용의 자유도가 크게 증가한 데서 기인한다. 따라서 「손-도구의 결합」에 의한 생산 역량의 발전과 「입술-언어의 결합」에 의한 커뮤니케이션 역량의 발전은 지구상에서 인간만이 이룩한 문명 발전의 두 바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전개되고 있는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이라는 것도 실은 손-도구의 결합과 입술-언어의 결합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 개별적인 구체노동과 사회적인 추상노동의 역동적 결합의 누적적 산물이며, 인공지능과 네트워크의 기술의 발전 역시 그러하다. 만일 발생과 과정을 도외시하고 그 최종 결과물에만 주목해서 인간노동과 인간들 간의 의사소통의 역량을 인공지능과 유비쿼터스 네트워킹 기술로 대체하는 방향으로 생산관계를 몰고 나아가는 것은 결국 인간 뇌에 장착된 진화적 역량인 손-도구 사용과 입술-언어 사용의 역량을 폐절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인류세/자본세의 위기를 초래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이제는 인간에게 고유한 실존적 역량 자체의 존폐를 좌우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셈이다. ● 그러나 절망할 필요는 없다. 각자의 몸과 뇌에 잠재된 「다중지능 네트워크」의 풍부하고도 강력한 힘을 깨닫고 활성화하여 자유로운 개인들의 수평적 네트워크를 구성해나간다면 이제 한계에 도달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역전의 가능성은 다양한 분야에서 "천근의 무게"로 짓눌리면서도 유용한 사용가치를 생산하고 있는 모든 노동하는 개인들이 '자기 자신의 실존적 역량의 의미와 사회적 가치를 새롭게 깨닫는 데에서부터 열릴 수 있다. 이번 박은태의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들이 주목하고 있는 건설현장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작업 동작과 제스처는 바로 오랫동안 폄하되고 망각되어온 이 잠재된 역량을 새롭게 일깨우며, '정중동'의 흐름 속에서 「자본주의적 추상노동→소외된 구체노동」으로의 일방향의 흐름이 중단되면서 「능동적 구체노동→대안적인 추상노동」으로 나아가는 역전의 계기를 함축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정중동의 제스처」에 함축된 이러한 두 갈래의 상이한 회로에 대한 인식 가능성은 숨은 그림 찾기가 주는 즐거움보다 더 놀랍고도 유쾌한 즐거움을 준다.

 

박은태_철골-구덩이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52×218cm_2018

 

(A) "인간을 특정한 방식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점이 벌써 승리의 감정을 만들어냅니다. 또 인간은 온전히 인식되지도, 최종적으로도 인식되지도 않는 존재이며. 쉽게 고갈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많은 가능성을 자체 내에 품고 그것을 숨기고 있는 존재(이로부터 인간의 발전능력이 유래한다)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도 유쾌한 일입니다. 인간이 자신이 환경에 의해 변화되고 또 스스로 환경을 변화시킨다는 것, 즉 환경을 다뤄서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유쾌함의 감정을 자아냅니다." (벤야민: 135쪽) ● 물론 "천근의 무게"에 짓눌려 소외감에 시달리고 있는 개별 노동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링크의 연결 방향을 바꾸어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수평적 네트워크를 구성해갈 수 있다는 얘기는 오늘의 상황에서는 일종의 '그림의 떡'을 제시하는 얘기로 들릴 수도 있다. ● (B) "하지만 오늘날 특정한 상황 때문에 일어나고 있듯이 인간을 어딘지 기계적인 존재, 남김없이 투입되는 존재,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존재로 간주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벤야민: 135쪽) ●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안정적으로 재생산되었던 지난 시기에는 구체노동에 대한 추상노동의 지배가 안정적으로 관철되었기에 (B)의 관점이 지배적일 수밖에 없었다면, 미국 헤게모니의 해체 과정에서 세계체계 전체가 요동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추상노동의 체계 전체가 흔들리기 때문에 (A)의 관점에서 구체노동의 능동성이 새롭게 발휘될 수 있다. 카오스 이론이 설명하듯이 체계의 요동이 급격해지면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 태풍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 "「조성의 시간」이 모순의 과잉결정 속에서 미끄러지는 「재생산의 시간」(지배계급이 주도하는 계급투쟁의 시간)이라면, 「사건의 시간」은 과잉결정과 과소결정의 이중운동 속에서 나타나는 「변동의 시간」(전자에 맞서 피지배계급이 능동적으로 전개하는 계급투쟁의 시간)이다. 세계체계의 상대적 안정기에는 전자가 지배적이지만 세계체계의 내적 모순이 응축되어 폭발하는 이행기에는 후자가 활성화된다. 이런 구분은 뇌의 인지생태학적 리듬의 두 가지 유형, 즉 상대적으로 낮은 진폭과 긴 파장을 가진 안정적 리듬(감각적 즐거움과 미적인 만족)과 높은 진폭과 짧은 파장을 지닌 레비비행 같은 폭발성 리듬(고통을 경유한 숭고의 기쁨)의 구분과도 상응한다." (심광현: 85쪽) ● 코로나19 팬데믹의 파도를 타고 인공지능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는 현재 순간에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재생산의 시간과 대안적 생산관계를 향한 변동의 시간이 어지럽게 중첩되어 있다. 이것이 문명사적 이행기의 소용돌이에 내재한 분기의 시간이다. 놀랍게도 「철골-7」에는 이 시간적인 분기가 공간적인 분기로 표현되고 있다. 비계를 타고 오르내리며 공사를 하는 작업자들의 배경은 시멘트 벽과 파란 하늘로 정확히 양분되어 있다. 개별 노동자들의 구체노동의 연결망이 시멘트 건축물을 짓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치 파란 하늘을 동시에 '짓고' 있는 듯이 보이는 이 그림에서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을 읽어내기는 어렵지 않다. 천근의 무게로 짓눌리는 건설현장의 고된 노동과정 속에서, 개별 노동자들의 구체노동의 제스처 속에서 이런 희망의 단서를 찾아 그려내는 것이 바로 박은태의 이번 회화적-노동이 이루어낸 참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젊은 시절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늦은 나이에 미술대학에 들어가 화가로 살아온 그가 나름의 방법으로 오랫동안 암중모색해온 「노동과 예술의 수평적 협력의 네트워크」가 이로써 어두운 소외의 그림자들 사이에서 밝은 빛을 발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A로 나아갈지 B에 머물 것인지는 여전히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여기가 바로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보자! (2020.10.13) ■ 심광현

 

* 참고문헌1. K. 마르크스, 『자본론 1권-상』,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1999 개역 11쇄2. 발터 벤야민, 『브레히트와 유물론』, 윤미애/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20203. 심광현, 「문명의 전환과 인간의 미래: 인간학과 정치학의 역사지리-인지생태학적 연결을 위한 밑그림」, 『문화과학 100호 특집: 인간의 미래』, 문화과학사, 2019

 

 

Vol.20201104d | 박은태展 / PARKEUNTAE / 朴銀泰 / painting

오는 17일까지 '광화랑'에서 열려 
2018년 04월 15일 (일) 20:09:04 조문호 기자/사진가 sctoday@hanmail.net

세상에서 밀려 난 초라한 사람들만 그려 온 화가 박은태의 ‘늙은 기계 두 개의 시선’전이 지하철 광화문역의 ‘광화랑’에서 오는 17일까지 열린다



▲박은태, 김포에서 2016 잉크젯 출력 , 아빠의 그림자 2018 장지에 아크릴 117x91cm.


작품에 등장하는 노숙자는 작가 박은태가 세상을 바라보는 출발점이기도 하지만,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 지난 번 전시한 새마을운동을 소재로 한 ‘가라뫼 사람들’도 인상 깊었다. 새마을 운동의 깃발에 가려진 어두운 면을 읽어낸 작품으로, 농촌근대화란 이름아래 진행된 농촌의 파괴와 농어민의 도시유출로 인한 도시빈민화를 꼬집는 작가의 비판적 시선이 날카로웠다. 특히 수몰민의 기념사진을 그린 ‘수물-깃발’에 등장하는 농민들의 표정은 압권이었다. 하나같이 입은 웃고 있었으나 눈은 우는 것 같은 이질적 표정 묘사가 긴 여운을 남긴다.



▲박은태, 대곡들에서 2016 잉크젯 출력 102x154cm/ 시민청에서 2016 장지에 아크릴 138,5x102cm.


작가는 고향인 강진군 성전면에서 중학교까지 다녔다.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성남 어느 공장의 프레스 판금 노동자로 일하며 7년의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하고 싶었던 그림에 대한 관심으로 틈틈이 그림공부에 매달리다 결국은 홍익대학교 미대에 입학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미대를 들어 간 시기도 민주화의 열기가 뜨거웠던 87년도였다고 한다.



▲박은태, 원흥리에서, 2016, 잉크젯출력/과천 대공원에서, 2015, 장지에 아크릴 91x 117cm.


우리 근현대사의 주역이면서도 소외되어 온 인간상에 초점을 맞추어 온 그의 작업은 어쩌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일 것이다. 노동자적 의식이 깔린 무게로 도시 변두리 빈민들의 삶을 바라 본 그의 작업은 사회적 변혁을 위한 운동으로서의 의미도 컸다. 고향을 떠나 집안의 생계를 잇기 위한 노동자로 생활하며 체득한 사회의 문제의식이 비판과 저항으로 발전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박은태, 홍성시장에서, 2017, 장지에 아크릴, 138,5x 102cm.


전시된 작품들은 근대화로 치닫는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어두운 회억의 표정과 모든 걸 체념한 듯 웅크린 노숙자의 모습이 주를 이루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밀려난 초라한 사람들의 삶의 흔적에서 애잔한 비애가 느껴졌다. 다소 생뚱맞은 전개이기는 하지만, 쇠잔해진 노인이나 노숙자 옆에 고물이 되어버린 기계 사진이 버티고 있었다.


▲박은태, 아빠 2016 장지에 아크릴, 사진.


그러나 늙은 기계와 대비된 소외된 사람들은 더욱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기계처럼 살아 온 인간의 퇴화된 모습과 동격으로 본다는 것만은 결코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사람과 사물 사이의 의미나 시간의 유대를 찾아 연결하는 은유가 깔린 것으로, 그만의 또 한 가지 표현 방법이다.


▲박은태, 상사천 다리 위에서 2016, 장지에 아크릴 138


그리고 그림 배경이 사라지거나 억제된 채, 주인공인 사람만 떠 있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삶의 터전이나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은, 즉 배경을 빼앗긴 사람이란 말이다.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는 사진과 회화가 한 화면에서 어우러지는 ‘아빠’라는 작품도 있었고, 노인의 모습과 함께 도형화된 그림자를 그려 넣은 ‘아빠의 그림자’도 눈길을 끌었다. 그 그림자가 기계와 사람, 사진과 회화의 벽을 허무는 단초가 되고 있었다.


▲박은태, 광화문에서 2017 장지에 아크릴 138.5x102cm

.

고물기계처럼 방치된 노인을 그린 그림과 기계를 찍은 사진은 상호 충돌하면서도 결합하였다. 그는 화가이지만 늘 카메라를 작업도구로 활용한다. 암담한 현실을 리얼하게 드러내야 하는 작가의 입장에서는 회화가 사진의 리얼리티를 따를 수 없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순간적인 출현이나 우연한 배치를 결코 놓치지 않는 사진가로서의 안목도 만만치 않다.


▲박은태, 홍성시장에서 2017 장지에 아크릴 138.


사람의 모습도 유추하여 그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난 대상을 찍어 그림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늙은 기계 두 개의 시선”전은 회화와 사진을 대비시킨 다소 낯선 접근이기는 하지만, 헐벗은 존재와 방치된 사물을 만나게 함으로서 생겨나는 또 다른 울림도 있다.


작품집 서문에 쓴 미술평론가 성완경씨의 글이 작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박은태가 오늘의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는 이 시대를 위기와 불안의 시대로 파악하는 시각이 일관되게 관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부조리한 풍경, 불안한 풍경, 재앙과 위기, 희망 없음의 풍경이다. 생각하기 나름으로는 지옥도가 따로 없을 그런 풍경이다.


▲'미적분' 작품 앞에 앉은 작가 박은태씨 ⓒ조문호 사진가


박은태의 작업은, 단지 설자리를 잃은 사람들, 용도 폐기된 사람들, 초라한 사람들을 그렸다는 소재적 차원보다도 훨씬 더 깊은 의미에서 한국사회의 먼지가루 같은 불안과 위기의 징후들을 겉보기보다 훨씬 더 깊이 드러내는 작업일지도 모른다“






 

지난 11, 지방에 촬영간 정영신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여기 장흥인데, 촬영에 문제가 생겼어!

짐이 많아 움직일 수도 없으니 좀 와 줄 수 없냐?”는 것이었다.

일주일 정도 체류할 것이라며 짐을 잔뜩 싸가지고 갔는데, 뭔 일인지 모르겠다.

하던 일이 있었지만, 감히 지존이신 동지의 말을 어찌 거역할 수 있으리오.


 

대충 마무리하고 나서니, 오후5시가 되어버렸다.

내일 전시장 들릴 곳이 있어 밤늦게라도 돌아 올 작정으로 출발했는데,

서울을 빠져나가려니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해야 하는 변속으로 다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는데,

마동욱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어디쯤 오셨냐?“기에 도착하면 한 밤중일 것 같다니까,

우리 집 옆 대나무 숲 민박집을 잡아놓을 테니, 천천히 오라는 것이다.

힘들어도 숙박비 줄이려 당일치기를 생각했으나,

난데없는 지원군 덕에 하루 밤을 장흥에서 묵게 된 것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 밥도 먹지 않고 밟았는데, 도착하니 밤11시가 가까웠다.

네비게이션이 없어 전화로 물어물어 찾아갔는데, 민박집이 아니라 마동욱씨 집이었다.

정영신, 마동욱씨와 함께 그의 아내 김영숙씨도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늦은 시간까지 자지 못하게 해 송구스럽기 그지없으나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겠느냐?


 

김영숙씨는 저녁 못 먹은 걸 눈치 채고 저녁상을 차려 주었는데,

얼굴에 철판 깔아 눈 지긋이 감고 허급지급 먹어 치웠다.

바지락 국에다 갑오징어, 열무김치 등 반찬 수는 적으나, 그 맛이 예사롭지 않았다.

시장기도 한 몫 했겠지만, 여지 것 그토록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영숙씨는 제 작년 쯤 인사동의 마동욱씨 전시 오프닝에서 한 번 뵌 적이 있지만,

음식 솜씨가 이렇게 좋은 줄은 미처 몰랐다.

음식 솜씨도 보통이 아니지만, 두 내외가 찰떡궁합이었다.

여지 것 아침상 한 번 거른 적 없이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챙긴다는데,

마동욱씨는 마누라 복을 타고 난 사람이었다.


 

난 지방촬영가면 아는 분들에게 좀처럼 연락하지 않는다.

빠듯한 촬영 스케줄에 장애가 되기도 하지만, 상대에게 민폐 끼치기 싫어서다.

지난 번 강진촬영 때도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더니,

페북을 본 마동욱씨가 어떻게 지척까지 와서, 그냥 갈 수 있냐며 나무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영신씨가 연락한 것 같았다.


 

마음 마씨라 본래 마음이 좋은지 모르지만, 마동욱씨는 사람 좋기로 유명하다.

그에게 신세지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주변을 잘 챙긴다.

벌어 놓은 돈도 없으면서, 욕심 없이 사는 그의 모습에 존경감이 일었다.

덕분에 그가 얻어놓은 대나무 숲 속의 민박집에서 편안한 하루를 보냈다.



아침 일찍 가야 한다며, 내일 못 본다고 헤어졌으나, 그만 늦잠이 들어 버렸다.

오전 아홉시 무렵, 민박집을 지나치던 마동욱씨가 차를 보고 다시 연락해 온 것이다.

본인은 이미 식사를 했었고, 우리는 평소에 아침을 먹지 않는다고 했으나,

기어이 밥 먹으러 가자는 성화에 따라나서야 했다.


 

친구가 운영하는 듯한 우리식당이란 밥집으로 데려갔는데

이곳 역시 진수성찬으로 차린 반찬이 모두 맛있었다.

전라도에서도 음식 잘하는 장흥 여인네들 음식솜씨를 제대로 맛 본 것이다.


 

마동욱씨와 헤어져 서울로 차를 몰았는데,

정영신씨는 이왕 온 김에 하루 더 지체하여 시골장터 좀 돌아보자고 했으나,

박은태씨 전시 보려면, 오후 다섯 시까지 도착해야 한다며 우겼다.

시간이 좀 남을 것 같아, 가는 길에 장흥 용산장과 강진 성전장만 들리기로 했다.


 

먼저 장흥에서 지척에 있는 용산장 부터 들렸다.

용산장 역시 사라져 가는 장터의 한숨이나 파는

장꾼 몇 사람이 나와 장을 지키고 있었다.

먼저 용산장 입구에 있는 장터식당부터 들렸다.


 

이 식당 주인 백외자씨는 정영신씨와 동갑내기인데,

작년에 정영신씨와 친구하기로 약속하고 전화번호까지 주고받은 사이다.

음식 맛있다는 칭찬에 갓김치를 바리바리 싸주는 고마움에 감읍해 친해졌는데,

마치, 친정 엄마처럼 뭘 먹이지 못해 안달 하더니, 또 몇 가지의 김치를 싸 주었다.

다양한 김치를 이렇게 맛깔나게 담는 사람도 보지 못했지만,

작년에는 장터 사진집으로 답했으나, 이번엔 뭣으로 답해야할지 고민되었다.


 

이어 강진 성전장으로 옮겼는데, 공교롭게도 찾아 간 곳이

오늘 서울 가서 봐야 할 전시의 주인공인 화가 박은태씨의 고향이었다.

그 전에는 비스듬히 버틴 장옥 한 채가 장터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 때의 장옥은 사라져버리고, 어울리지 않는 천막 식 장옥에

동네 사람 몇몇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나 주변의 헐벗은 옛집들이 아련한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오래된 장옥이라도 보존하고 있었다면, 향수나 추억이라도 팔 텐데,

이젠 살 사람도 팔 물건도 아무 것도 없었다.

어디, 여기만의 아쉬움이겠는가? 면소재지에 위치한 대개 오일장의 현실이다.


 

이제 서울로 올라가는 일만 남았다.

지루한 운전이라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사실상, 얼마 전 강진 갈 때도 정영신씨가 목적을 말하지 않았지만,

일주일의 여정으로 혼자 떠난 이번 촬영 역시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다.



더구나 촬영에 차질이 생겨 사흘 만에 돌아와야 했으니,

이젠 보따리를 풀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일이 진척되면 말하려 했다며, 말문을 열었다.


 

평생을 장돌뱅이로 살아 온 현역 장꾼 몇 명을 밀착 취재하여

그 사람의 생활 전모를 기록하겠다는 것이다.

지난 번 영랑시인 기념관에 도슨트로 일하는 이재광씨를 만난 것도

취재 대상에 걸 맞는 장꾼을 추천 받기 위해서란다.


 

그런데, 추천한 여인이 흔쾌히 허락하여 촬영에 들어갔는데,

하루 찍고, 이틀 날 새벽에 못하겠다는 전화가 왔다고 한다.

깊이 파헤치면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지만,

동네 이장이 큰일 난다며 못하게 말렸다는 것이다.


 

닷 세 동안 그 여인이 사는 콘테이너 박스에서 기거 할 약속에,

그 여인도 좋아했다는데, 갑자기 이변이 생겨버린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바꿀 때까지 일단 철수해야 할 것 같았다고 했다.

다른 사람도 있으나, 그 장꾼에게 이야기 거리가 너무 많아

꼭 취재하고 말 것이라는 각오도 덧 붙였다.


    

나 몰래 추진하니 이런 일이 생긴다며 어깃장을 놓았지만,

마음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첫날엔 이재광씨도 만났다고 한다.

그 분의 차로 장흥 펜션으로 안내하여 숲 해설가 김동호씨도 소개해 주었고,

해남의 설화다원까지 찾아가 마승미씨를 비롯한 소리꾼들과 어울려

판소리까지 들으며 찡하게 놀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재광씨는 지난번에도 이곳 저 곳 안내해 주며 사람도 소개해 주었는데,

이번에도 신세를 많이 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장흥은 음식도 맛있지만, 인심까지 좋으니,

사돈 볼 사람은 기어이 장흥사람 찾으라고, 동네방네 소문내야겠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 조문호


















 



[김포에서 2016]                                                                   [대곡들에서 2016]


세상에서 밀려 난 초라한 사람들만 그려 온 화가 박은태의 ‘늙은 기계 두 개의 시선’전이 지하철 광화문역의 ‘광화랑’에서 오는 17일까지 열린다.




'[미적분' 작품 앞에 앉은 작가 박은태씨]


소외된 자를 조명한 박은태의 작품세계 전모를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한 달 전 작가로부터 사람들이란 제목의 화집을 한 권 선물 받았는데, 그 작품집에는 대학시절 습작에서부터 어머니의 발자취를 그린 작품과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에 이르기 까지 전 작품이 실려 있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구체적인 이력도 알게 되었는데, 그가 작업해 온 '사람'이란 바로 필자가 40여년 메 달려 온 대상이 아니던가. 그리고 이번에 시도한 기계 또한 서로 의도한 바는 달랐지만, 사람을 찍기전인 초창기에 잠간 찍은 적도 있었다. 기계화 되어가는 현대인의 상징으로 시작했으나 결국은 객관적인 사람을 택하여 미완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예사롭지 않은 인연이었다.


[대곡들에서 2016]

[시민청에서 2016]

 

몇 일전 작가 박은태의 늙은 기계 두 개의 시선전시를 알리는 글이 SNS에 올라왔다. 전시 첫날 가려고 메모해 두었으나, 갑자기 장흥에 갈 일이 생겨버렸다, 일을 마무리하려면 하루 정도 더 머물러야 했으나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상경을 서둔 것도 그렇지만, 서울로 오다 마지막 들린 장터도 작가가 태어 난 고향인 강진의 성전장인 것도 결코 우연만은 아닌 것 같았다.


[원흥리에서 2016]

[과천 대공원에서 2015]

 

작가는 고향인 성전에서 중학교까지 다녔다.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성남 어느 공장의 프레스 판금 노동자로 일하며 7년의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하고 싶었던 그림에 대한 관심으로 틈틈이 그림공부에 매달리다 결국은 홍익대학교 미대에 입학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미대를 들어 간 시기도 민주화의 열기가 뜨거웠던 87년도였다고 한다.


[홍성시장에서 2017]

   

작품에 등장하는 노숙자는 작가 박은태가 세상을 바라보는 출발점이기도 하지만,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 새마을운동을 소재로 한 가라뫼 사람들도 인상 깊었다. 새마을 운동의 깃발에 가려진 어두운 면을 읽어낸 작품으로, 농촌근대화란 이름아래 진행된 농촌의 파괴와 농어민의 도시유출로 인한 도시빈민화를 꼬집는 작가의 비판적 시선이 날카로웠다. 특히 수몰민의 기념사진을 그린 수물-깃발에 등장하는 농민들의 표정은 압권이었다. 하나같이 입은 웃고 있었으나 눈은 우는 것 같은 이질적 표정 묘사가 긴 여운을 남긴다.


   [아빠 2016] 

 


우리 근현대사의 주역이면서도 소외되어 온 인간상에 초점을 맞추어 온 그의 작업은 어쩌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일 것이다. 노동자적 의식이 깔린 무게로 도시 변두리 빈민들의 삶을 바라 본 그의 작업은 사회적 변혁을 위한 운동으로서의 의미도 컸다. 고향을 떠나 집안의 생계를 잇기 위한 노동자로 생활하며 체득한 사회의 문제의식이 비판과 저항으로 발전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상사천 다리 위에서 2016]


전시된 작품들은 근대화로 치닫는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어두운 회억의 표정과 모든 걸 체념한 듯 웅크린 노숙자의 모습이 주를 이루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밀려난 초라한 사람들의 삶의 흔적에서 애잔한 비애가 느껴졌다. 다소 생뚱맞은 전개이기는 하지만, 쇠잔해진 노인이나 노숙자 옆에 고물이 되어버린 기계 사진이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늙은 기계와 대비된 소외된 사람들은 더욱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기계처럼 살아 온 인간의 퇴화된 모습과 동격으로 본다는 것만은 결코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사람과 사물 사이의 의미나 시간의 유대를 찾아 연결하는 은유가 깔린 것으로, 그만의 또 한 가지 표현 방법이다.


 

[광화문에서 2017]

 

그리고 그림 배경이 사라지거나 억제된 채, 주인공인 사람만 떠 있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삶의 터전이나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은, 즉 배경을 빼앗긴 사람이란 말이다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사진과 회화가 한 화면에서 어우러지는 아빠라는 작품도 있었고노인의 모습과 함께 도형화된 그림자를 그려넣은  아빠의 그림자’도 눈길을 끌었다. 그 그림자가 기계와 사람, 사진과 회화의 벽을 허무는 단초가 되고 있었다.


  [홍성시장에서 2017]

   


고물기계처럼 방치된 노인을 그린 그림과 기계를 찍은 사진은 상호 충돌하면서도 결합하였다. 그는 화가이지만 늘 카메라를 작업도구로 활용한다. 암담한 현실을 리얼하게 드러내야 하는 작가의 입장에서는 회화가 사진의 리얼리티를 따를 수 없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순간적인 출현이나 우연한 배치를 결코 놓치지 않는 사진가로서의 안목도 만만치않다. 사람의 모습도 유추하여 그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난 대상을 찍어 그림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늙은 기계 두 개의 시선전은 회화와 사진을 대비시킨 다소 낯선 접근이기는 하지만, 헐벗은 존재와 방치된 사물을 만나게 함으로서 생겨나는 또 다른 울림도 있다.



 

작품집 서문에 쓴 미술평론가 성완경씨의 아래 글이 작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박은태가 오늘의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는 이 시대를 위기와 불안의 시대로 파악하는 시각이 일관되게 관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부조리한 풍경, 불안한 풍경, 재앙과 위기, 희망 없음의 풍경이다. 생각하기 나름으로는 지옥도가 따로 없을 그런 풍경이다.

박은태의 작업은, 단지 설자리를 잃은 사람들, 용도 폐기된 사람들, 초라한 사람들을 그렸다는 소재적 차원보다도 훨씬 더 깊은 의미에서 한국사회의 먼지가루 같은 불안과 위기의 징후들을 겉보기보다 훨씬 더 깊이 드러내는 작업일지도 모른다


사진, / 조문호













 

 


기다리는 사람들

박은태展 / PARKEUNTAE / 朴銀泰 / painting
2015_0415 ▶ 2015_0421

 

박은태_팽목항의 대한민국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05×143cm_2014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21107d | 박은태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5_0416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8:30pm

 

 

광화랑GWANG GALLERY_sejong center

서울 종로구 세종로 81-3번지5호선 광화문역 지하도 안

Tel. +82.2.399.1111

www.sejongpac.or.kr

 

팽목항의 대한민국 ● 구르마(차)을 가져 본적이 없는 우리가족은 매주 주말에 북한산에 가는 즐거움을 누린다. 작년 4월초 목련이 아직 피어나기전 여느 주말처럼 우리는 지축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재개발로 몇 년 째 폐허로 방치된 지축동 옛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나무위에 큰 검은 비닐이 걸쳐 있는 모습이 마을 버스를 타고 가는 중에 가슴에 쿵 다가왔다. 십여 일이 지나 세월호 참사,, 누구나 겪은 그 시간을 통과하며 나는 팽목항에 팽나무가 있을거란 생각과 그 참사의 순간. 대한민국의 민낯을 보았다. 그래 나무위에 검은 비닐 대신 찍긴 태극기를 그리자...

 

박은태_한강의 기적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08×155cm_2014
 

한강의 기적 ● "팽목항의 대한민국"그림을 그리면서, 세월호참사의 총체적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하자, 그것을 그려보고 싶어졌다. 조국의 근대화/ 한강의 기적/70년대 말에 형성된 안산공단이라는 장소성/30대말에 웅크리고 머물렀던 안산 고잔동의 쪽방과 공장 근처에서 대면했던 눈망울들 / 무얼까? 그들. 아니 우리에게 "한강 기적"은 무얼 가져 왔고 누구를 위한 기적이었던가?

 

박은태_기다림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87×454cm_2015
 

기다림 ● 다시 시월이 되어 찬바람이 불자 나는 다시 세월호 작업을 하고 있었다. 매체를 통해 매일 접했던 세월호 유족들의 모습을 모아서, 오롯이 기다리는 유족들의 모습만 집중해 그리자며... 그리고, 나는 한해의 끝에선 하얀 민복을 입고 아스팔트 바닥을 기어 다니다 광화문 광장에서 누워 검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내 그림 속의 복장도 갯벌 속에서 나온 민복 차림의 유족이었다. 그 몸들을 어디서 볼 수 없는 간절한 기다림의 모습으로 그려 보고 싶었다 .

 

 

박은태_강_장지에 아크릴채색_151×213cm_2014
 

● 한 여름 남대문 근처에서 우연히 카메라에 잡힌 모습에서 우리시대의 청년의 모습과 대기업 사옥을 배경으로 무언의 질문을 던지고 싶어졌다.

 

박은태_하늘 배선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00×140cm_2014
 

하늘 배선 ● 수원 호매실 근처에서 겨울의 끝에 벽화작업을 했다. 그는 '전기' 또 다른 그는 '배관' 우리는 '뺑끼'로 불린다. '전기'의 모습이 내 핸드폰 카메라에 잡혔다. 그날은 진눈깨비가 내렸다. 나는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박은태_횡단보도_장지에 아크릴채색_151×213cm_2013
 

횡단보도 ● 일 년 남짓 날마다 작업실을 오가다 마주친 한 노인의 모습이다. 편의점 비닐봉투에 막걸리 한 병과 담배 한 갑을 들고서, 늘 같은 시간에 불안한 걸음의 뒷모습 속에 조국 근대화의 주역의 쓸쓸한 풍경을 담고 싶었다. 언제가 부터 그 노인은 보이지 않는다...

 

 

박은태_4월에 눈. 지축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13×150cm_2014
 

4월에 눈 ● 이 작업 두 점으로 포스터를 만들어 광화문 세월호 천막주변에서 배포하며 두어 달을 광화문 근처에서 주말을 보내면서, 예전에 지축에서 보았던 목련 나무를 그렸다. 포크레인 삽날에 상처투성이인 몸을 가진 나무가 봄을 맞아 싹을 띄우고 꽃망울을 준비 중인 나무에 이미 떠난 집주인이 사다리를 놓고 갔다. 그리고 봄 눈 치고는 많은 눈이 내렸다.

 

박은태_노란버스_장지에 아크릴채색_151×213cm_2013
 

               노란버스 ● 집 근처에서 늘 본 풍경에 우리 아들을 등장시켜 그렸다. 마을버스 보다 많은 노란버스가 우리 아이들의 미래인가?

 

박은태_불꽃_장지에 아크릴채색_151×213cm_2013
 

불꽃 ● 화정역에서 환영을 본 것 같이 지나간 모습이다. 자전거로 뒤쫓아 갔지만 볼 수 없었고, 두어달 후 우연히 근처 아파트입구에서 우연히 만났지만, 그 사이에 내가 품고 있던 강렬한 "칼 갈아요 가위도 갈아요"의 비수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는 살아가기 위해 날마다 모퉁이에 앉아 칼을 간다 .

 

박은태_증언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70cm×2_2011
 

여섯 번의 개인전을 하며 내안의 몇 가지 부채감은 덜어 내었다. 어머니, 그리고 늘 품고 보았던 새마을운동 화보집속에 고향 부모 세대의 모습들, 그리고 내 성장과정의 내면들,... 그래도 여전히 도시 변두리를 배회하는 또 다른 그들이 내 화폭에 포장을 다르게 해서 드러나기는 한다. 그렇지만, 아직도 여전히 그들은 내 작업 안에서 대상화 되어 나타난다. 내 작업의 한계이다. 그건, 내 성장과정에서 도망가고픈 대상을 내 작업의 소재로 삼았고, 나는 관찰자로 그들을 타자화 시켰다. 삶의 처지는 같았지만, 내안에 막을 만들어 그들에게서 분리되고 싶었던 것이다. 이젠 내가 조금 더 그들 안으로 다가 설수 있는 나이가 들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문제가 내 작업과 삶의 과제이다. 전시를 준비하며... ■ 박은태

 

 

 

Vol.20150414b | 박은태展 / PARKEUNTAE / 朴銀泰 / painting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