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채색화 민화’ 전에 나온 19세기 말~20세기 초 화조영모도의 오리 그림. 물고기를 잡아먹으려고 머리를 물속에 처박거나 물고기를 부리에 잡아넣고 삼키는 모습이 익살맞게 그려졌다.

100여년전 병풍에 그려진 동물들의 짓거리가 개그맨을 뺨친다. 천연덕스런 표정의 오리는 헤엄치다가 물 속에 대가리를 처박거나 부리로 덥석 물고기를 물어 막 삼키려는 참이다. 민물 속에서 험상궂은 척만 하는 쏘가리 몰골도 웃음보를 터뜨린다. 입가에 삐죽 튀어나온 날카로운 잔이빨로 물 속에 가라앉는 꽃잎을 우적우적 씹어먹는 모양새라니.

 

이번 주말, 서울의 문화 거리로 손꼽히는 북촌 인사동에 가면 전통 민화의 숨은 명작들과 20세기초 진귀한 근대 생활용품들을 구경할 수 있다. 전시 무대는 인사동 거리 북쪽 들머리에 있는 문화복합몰 ‘안녕인사동’ 지하 1층 센트럴뮤지엄. 여기에 지난 10일부터 18개 고미술업체들의 장터로 열리고있는 ‘2021 인사동 앤틱&아트페어’의 딸림 특별전 ‘한국의 채색화 민화’가 19세기말~20세기초 기기묘묘한 수작들로 입소문 났다.

 

‘한국의 채색화 민화’ 전에 나온 쏘가리 그림. 날카로운 이빨로 물에 가라앉는 꽃잎을 먹고 있는 모습을 해학적인 선으로 그렸다.
 
현대화랑의 문자도 기획전에 나온 제주 문자도. 화면 중간의 문자도를 중심으로 위쪽에는 화초를, 아래쪽에는 바다 속 해물들을 등장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출품된 민화들에는 ‘대체 무엇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의외성의 매력이 여실하다. 얼빠진 듯 익살맞은 오리, 쏘가리, 토끼 등의 자태와 몽글몽글한 소용돌이 선으로 배경의 바위덩이를 묘사한 화조영모도가 압권이다. 새 발자국처럼 대충 끄적거린 흔적으로 나는 기러기 떼를 간략하게 표현한 ‘소상팔경도’, 구성이 재미있는 강원 지역 문자도, 책 읽는 귀부인이 등장하는 근대 책가도 등도 눈맛을 다시게 한다. 올해 처음 차려진 앤틱 페어에선 전통 민예품 말고도 근대기 가정집과 사무실 등에서 쓰던 근대기 그릇과 각종 생활용품, 경성제국대학 교기 등의 유물들이 시선을 끌고있다. 인사전통문화보존회가 주관하는 이번 장터는 14일까지다. 17~21일 같은 장소에서 현대미술품을 파는 장터인 ‘아시아호텔아트페어(AHAF) 서울 2021’이 이어진다.민화 애호가라면 인근 사간동 현대화랑에서 14일까지 선보이는 기획전 ‘문자도 현대를 만나다’를 함께 감상해도 좋다. 백수백복도, 제주문자도, 화조문자도 등의 명품들이 나왔다.

 

한겨레신문 / 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김규헌 화가  

 

  (디지털조선/최선영 기자 = digitalhe@chosun.com)

 

가장 한국적인 그림 민화. 민화의 가치는 높지만 국내에 존재하는 민화들은 모조품이 많다. 전통을 계승하기만 한다면 모방에서 끝이 나고 만다. 예술은 창작이 앞서야 한다. 누구보다 이러한 창작의 가치 그리고 우리의 것을 강조하는 화가가 있다. 바로 김규헌 화가다. 오는 28일부터 전시회를 앞두고 한창 바쁜 그를 여의도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림에 눈을 뜨다

우연히 선배를 통해 절에 간 적이 있다. 그는 그때 ‘탱화’를 처음 접하게 되면서 불교 미술의 다양한 건축과 색깔 그리고 선에 빠져들게 된다. 현재 김 화가는 오방색을 주로 다룬다. 오방색이라 하면 적색, 흑색, 백색, 황색, 청색을 말한다. “오방색을 촌스럽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오방색은 우리 민족 고유의 색깔이며 정신이다. 특히 적색은 민간에서 액운을 방지하며 행운과 평안을 뜻한다.”

처음 그림과의 인연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고흐의 그림을 접하면서 시작되었다. 단번에 그를 매료시켰고, 이후 ‘까미유 피사로’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그림을 독학으로 배웠다는 그. “친구 따라 화실을 가게 되면서 선생님께 어깨 너머로 그림을 배웠다. 당시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았기에 화실 청소를 하면서 그림을 배웠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열심히 그렸던 것 같다. 화실 안에 있는 연필과 종이냄새, 물감냄새 하나하나가 다 좋았다”. 이렇게 그림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이 있기까지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던 그는 자주 잔병치레를 했다. 더욱이 그림을 그리면서 불규칙한 생활이 반복되고 스트레스를 술로 달래다 보니 건강이 점점 악화되었다. “당뇨가 심해지면서 합병증까지 가세해 그림을 쉴 수 밖에 없었다. 자그마치 십 년이다.” 하지만 그는 끝가지 붓을 놓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의 작품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기운이 전달되길 바랐다.

김 화가는 병마와 싸우면서 민화에서 십장생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십장생의 의미가 무병장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 속 십장생은 기존의 십장생과 차별화된다. “기존의 십장생은 전형적인 틀에 박힌 형태인 데 비해, 내 작품은 현대 회화기법으로 그린다.” 즉, 서양화 재료인 유화 물감으로 토속적이고 해학적인 우리 민족의 정서를 담아내는 독특한 우리식의 서양화인 셈이다.


열한 번째 개인전, 우리 전통의 멋

이번 개인전은 화가 김규헌만의 색깔과 가치관을 내포하고 있다. 주제는 우리 전통의 해학적인 멋을 현대적 감각으로 되살리는 데 있다. 현대사회는 점점 우리의 것은 등한시하고, 서양의 것이 최고인 마냥 무분별하게 서구화되면서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우리 민화에는 해학이 살아있다. 고통이 아닌 즐거움, 분노와 절망보다는 사랑과 희망을 담아 우리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 십장생


평소 그는 영감을 보이지 않는 공기 속, 텅 빈 공간 속에서 얻는다. “물론 형태를 보고도 영감을 얻지만, 정해져 있기보다 순간 순간 얻는다. 이번 전시회도 그러한 과정을 통해 표현되었다.” 아무리 그림을 잘 그려도 철학이 없으면 아마추어다. 자신만의 뚜렷한 가치관을 담아 창작을 해야 ‘프로’인 것이다. 나만의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김 화가. 그러한 면에서 본다면 그는 프로다.

그림 그린 것을 후회한 적이 없다는 그. 하지만 건강이 나빠져 작업을 못할까 내심 걱정한다. 그에게 그림은 전부이고 삶 그 자체다.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그는 그림과 함께 할 것이다.

전시회는 오는 28일부터 6월 10일까지 14일간 열리며, 장소는 서울 인사동 ‘미술세계 갤러리’ 5층이다. 우리 전통의 멋을 소재로 한 김규헌의 독특한 작품세계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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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민화(民畵)

 

김성호(미술평론가)
  

작호도, 까치와 호랑이, 109 × 62㎝, 종이에 채색, 호암미술관

 

I. 거리에서 만나는 민화 아닌 민화
인사동 골목 어귀나 종로 대로변을 걷다 보면 좌판을 마련한 화가 아닌 화가의 바지런한 손놀림을 볼 수 있다.

허연 수염을 휘날리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관광객들에게 슥슥 총천연색의 혁필화(革筆畵)나 고무그림을 그려주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한자의 형태 안에 들어서 있는 학이며 소나무 그림 한 측에 똬리를 튼 용이 승천하기도 하고 노계(老鷄)가 졸고 있기도 한 그림은 한층 멋을 부린 현란한 모양새로 변모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조시대 민화의 문자도(文字圖) 속성을 여지없이

물려받고 있다. 유교의 윤리관을 상징화시키려던 당시 민화의 교화용 그림의 맥을 잇고 있는 이 그림은 요즈음 가까스로 박물취미에 부합하는 장식화 기능을 하거나 신념을 주술하는 부적과도 같은 용도로 변질된 듯싶다. 그래서일까? 근래 들어 활기를 띤

인사동 주변을 서성이는 외국인 관광객들이나 그 주변을 서성일 따름이고, 다른 이들에겐 별다른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

파리도 날리고 호객행위에 지쳐 있는 노화가(?)가 연신 하품을 해대는 인사동 오후의 풍경은 그래서 그리 낯설지 않다.
예전에 이들을 아마도 떠돌이 화가 유랑화가라 불렀을 테다. 보따리 안에 혹은 커다란 가방 안에 참빗이며, 실, 바늘, 화장품,

패물을 가득 담고 걸쭉한 입심으로 물건을 팔아내던 방물장수처럼 유랑화가들도 시골장터와 마을을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려주고 세상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음을 그 시대에 아이로, 청년기로 보냈던 이들은 기억할 것이다. 화조도나 책거리그림, 문자도,

십장생도 몇 장을 신기한 붓놀림으로 그려내고 며칠 푹 눌러 쉬어 가거나 품을 받아 총총히 길을 떠나던 유랑화가들...

이들은 아마도 민화시대를 마감하는 화가들이었을 게다. 아직까지 인사동 주변에 옛것을 시늉하는 나이든

낭만 객이 있다손 치더라도 말이다.그렇다면 민화란 과연 어떤 그림일까? 언제부터의 그림일까? 민화시대란 과연 있었던

것이며 그것이 그 시대에 가졌던 진정한 본질과 복잡다기하게 변모된 오늘날에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II. 서민을 위한 서민의 그림
민화하면 우리는 이런 그림들을 생각해낸다. 소나무 위에 까치를 약이 오른 듯이 잔뜩 올려다보는 호랑이, 서가에 그득한 책들의 무게, 장수한다던 동물들의 왕국처럼 보이는 십장생도, 화려한 꽃들에 둘러싸여 있는 새들의 난무...
조선시대에 정통회화에 비해 천한 그림으로 취급받았던 이러한 그림들은 당시 속화(俗畵), 별화(別畵), 잡화(雜畵) 등으로 불렸다. 중국 화풍에 영향 받은 전통화와는 달리 색이나 화면 구성 등에서 유치하고 치졸한 면모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던 당시의

그림에 민화(民畵)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붙인 이는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였다. 1937년 일본의 월간 『공예』지에 실린 「공예적 회화」라는 글에서 그의 "민중 속에서 태어나고 민중에 의해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 구입되는 그림을 민화라고 하자"라는 주장은 기실 일본의 전통미술을 말한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민화라는 용어는 본래 일본의 大津繪, 泥繪, 繪馬를 민화라고 지칭한데서 연유한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그의 1959년 『공예』지에 실린 「불가사의한 조선민화」라는 논문으로 확장된다. 물론 그는 1929년 일본 동경에서 열린 민예품 전시회에서 한국의 민속적 회화를 민화라고 규정하고 있기도 하지만 그 출발은 다분히 일본학자에 의해서 유래된 말인 것이다.이를 극복하려는 이름들이 해방 후에 부상하는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속속 논의되었다. 겨레그림, 서민회화(庶民繪畵), 서민화(庶民畵), 백성화(百姓畵). 대중화(大衆畵). 민중화(民衆畵)라는 이름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한 시대의 이름 짓기가 불문율처럼 상용되어 좀처럼 바뀌기 어렵듯이 무수한 용어규정도 이제는 ‘민화’로 고착되지 않았나 싶다.앞서의 이름들에서 민화는 우리 전통시대의 미의식과 생활 감정이 솔직하게 반영되어 있는 '서민들에 의한, 서민들을 위한 그림’이라는 의미 규정이 보다 선명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창작 주체와 향수자가 서민층이라는 기본적인 특성을 간과하고서는

민화에 대한 논의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물론 민화는 도화서의 화원뿐 아니라 양반문인, 승려, 무당을 비롯해서 손재주 있는 무명의 일반 백성들이 창작 주체임과 동시에 향수자이지만 대체적으로 ‘민중(서민, 백성)을 위한 민중의 그림’이라는 데에는 특별한 이견이 없어 보인다.

 

 

III. 보기와 쓰임새 사이, 실용화로서의 민화
민화의 시작을 찾아 나설 때 혹자는 민화에서 나타나는 화제(畵題)나 소재와의 유사성을 들어 고구려의 고분벽화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그러나 고구려벽화는 당시의 회화수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지만 민화는 당시 이조시대의 정통 회화의 회화 수준과는 격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향수자와 창작자가 서민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무리한 추적으로 평가된다. 기록으로 추측되는 민화의 시작은 조선후기로 볼 수 있다. 봉건 사회가 해체되는 영조, 정조 시대를 전후하여 사설시조나 판소리, 민요, 민담 등의

놀이문화와 함께 생성되었던 민화는 당시의 현실적 유교정치와 실학적 풍토 속에서 더욱 만개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취미가

강한 소재에다 판에 박힌 화풍을 답습하던 화가가 부유한 신흥 상인이나 중상류 서민층으로부터 부담 없이 의뢰받은

그림들은 호사가들의 감상용 그림이기보다는 실생활에 쓰이는 생활도구와도 같이 기능하는 실용화이었던 것이다.

 

효제문자도,  孝'자의 윗부분 일부를 글씨대신에 이미지로 치환하고 있다.
 
하나의 그림을 보자. '효(孝)'자 위에 죽순과 잉어가 그려져 있다. 일견 단순한 장식화처럼 보이는 이 그림은 기실 그 안에 왕상빙리(王祥氷鯉), 맹종설순(孟宗雪筍)의 뜻을 지니고 있다. 즉, 중국 진 시대의 학자 왕양이 마음씨 비뚤어진 계모가 병상에 누워있을 때 쾌유를 위해 얼음을 깨뜨리고 고생하며 잉어를 잡아 드렸다는 이야기와 중국 오나라의 관리였던 맹종이 연로한 모친의 병을

고치기 위해 눈 쌓인 대나무 숲에 들어가 뜨거운 눈물로 죽순을 소생시켜 그것을 캐어 드렸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러한 효도의 드라마는 다분히 권선징악(勸善懲惡)의 교화용 그림으로 제작된 것인데, 이와 더불어 벽사진경(辟邪進慶)의 재앙을

막고자 하는 주술용, 기념용 그림, 기복축사(祈福逐邪)라는 상징이나 주술의 목적으로 이루어진 그림 등과 함께 실용화의 기능을

담당한다. 실용화로서의 민화의 가치는 한국전통화를 순수회화와 민수회화로 분류한 조자용의 다음의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민수화는 대체로 생활에 쓰이는 실용화, 실화, 활용화, 응용화 등으로 불리는 그림을 말하며 감상미술을 위한 그림이 아니라

삶을 위한 그림이다.”여기서 민화는 조자용이 언급한 ‘민수화’와 부합함은 물론이다. 감상용이 아닌 실용성에 더욱 근접한 민화의 존재를 이우환은 그의 책 『이조의 회화』에서 조선시대의 회화의 구조적인 측면과 대비하여 고찰한 바 있다. 그는 여기서 감상화 측면과 생활화, 실용화의 측면으로 대별되는 조선조 회화가 감상화의 측면만을 강조함으로써 실용화의 측면을 홀대했다고 지적하고 이를 통합하여 조선 회화를 재구성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정통 회화가 일반적으로 한 장 이상은 그리지 않고 어느 정도 창조를 본질로 하는 것에 비해 민화는 대부분 똑같은 것을 반복해서 본에 의한 그림을 그리기에, 오늘날의 상업적 목적과 치장의 기능을 담당하는 여러 복제화와 매우 유사하게 들어앉아 있는 셈이다. 민화에 대한 조선시대 당시의 가치평가는 폄하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를 지니고 있었지만 오늘날에서의 민화에 대한 평가는 한국미술사의 아주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화조도, 비단 대련 각 174×90㎝ 18세기

 

IV. 민화의 종류
우리 일상사만큼이나 다양한 종류를 가지고 있는 민화는 그 내용에 따라 크게 장생도(壽), 복록상징도(福),

벽사용 그림(辟邪), 교화용 그림(敎化) 등의 4가지로 대별해 볼 수 있다.
 
①장생도
옛 시대에 죽음이라는 두려운 존재 앞에 선 사람들의 가장 큰 소망은 아마도 무병장수, 부귀영화, 백년해로를 누릴 수 있는 불로장생일 것이다. 저 불로초를 찾아 나선 진시황제의 헛된 꿈꾸기를 보라. 장생도는 그런 만큼 백수백복도, 백록도, 백학도, 백어도,

백접도, 백란도 등 무수한 그림들에게서 백(百)이란 숫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99는 모자란 숫자이고 100을 완전수로 생각하였기에 기인한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장생도를 통해 하늘의 수 100을 숭상하며 일월도, 송학도를 통해 장수의 꿈꾸기를 하는 것으로 족해야만 될는지도 모른다. 장생도 중에서도 해, 구름, 물, 바위, 소나무, 대나무, 불로초, 사슴, 거북, 학 등을 표현해내는 십장생도(十長生圖)는 오래 살고자 하는 불가능하지만 소박한 꿈꾸기의 대리 충족물로 기능한다. 그런 까닭에 십장생도는 노인들의

축수를 기원하기 위해 회갑잔치 수연병풍으로 많이 쓰이거나 세화로서 정월 때 장식을 위해 사용되기도 하였다.

 

십장생도(十長生圖),112 x318.5cm, 종이에 채색

② 복록상징도
장수의 꿈 안에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은 이미 다 들어 있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오복(五福)은 『상서(尙書)』에서 언급하는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을 지칭한다. 그러나 서민층이 바라는 오복으로는 『통속편(通俗編)』에서 언급하는 수, 부, 귀, 강녕, 자손중다(子孫衆多)가 꼽힌다. 남에게 덕을 베푸는 유호덕 보다는 귀가 낫고 사람의 천수대로

사는 고종명 보다는 슬하에 자손이 많은 것이 외려 서민들에겐 더 행복한 조건이었을 테니 말이다.복의 상징과 관련한 민화들은 다음과 같다. 금술 좋은 부부와 자식복을 비는 원앙도, 쌍치도와 재산과 안녕을 바라는 상징의 모란도, 길상도와 함께, 화려한 꽃에 둘러싸여 있는 새들의 난무가 아스라한 화조도가 그 대표적인 복록상징도이다. 민화 가운데 제일 많은 양을 차지하는

화조도는 자연을 방안에 두고 자연의 질서와 정기를 배우고 닮아 행복을 추구하려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모란도, 174.2 × 48㎝, 종이에 채색 호암미술관

③ 벽사용 그림
수복을 누리는 데는 재앙이 없어야 한다. 인간이 싫어하는 잡귀, 귀신이나 질병을 쫓아낸다는 축사(逐邪)의 기능을 하는 벽사용

그림은 매년 새해가 되면 새로운 세화(歲畵)를 서로 나누어 주고 새 그림으로 바꾸어 붙인다. 처용도, 해태그림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벽사용 그림일 것이다. 호랑이 그림 또한 그러한데 이는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의 사방(四方)

수호신을 그린 사신수도(四神獸圖)에서 보인 용맹의 상징이, 훗날 까치호랑이 그림에서는 변모되어 나타난다.
“차호도의 까치는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주작이 길상조로서 친숙해진 까치로 차츰 변용된 것이다.”
위의 김호연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호랑이를 약 올리는 듯이 커다란 소나무에서 짖어대는 까치는 해학에 가득 찬 친밀의

대상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우리에게 88올림픽의 상징으로 호랑이가 채택되기 전에 대표적인 상징 동물로 까치가 거론된 것도

그런 연유에서이리라.

 

벽사도 -주작도, 대관령박물관

 

④ 교화용 그림
당시 유교라는 종교적인 바탕과 현실성에 기초한 실학의 이념 아래 권선징악의 윤리관과 도덕적인 내용이 표현된다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이것은 대중소설의 인과응보 규범이 소설이 아닌 그림으로 발현되거나, 지묵필연(紙墨筆硯) 등의 문방사우(文房四友)와 서가의 일반 기물을 첨가하여 진열해 놓은 책거리그림(文房圖)으로 발현된다. 교화(敎化)의 대표 격은 아마도

이 책거리그림일 게다. 역원근법, 투영법, 음양법 등의 특수한 화법이 제일 많이 내포된 그림으로 자녀들의 교육이나 장식화로서 기능을 감당하기도 한다. 문자도 또한 교화의 기능을 담당한다. 인사동의 길모퉁이에서 본 문자도는 어떠한가? 효(孝), 제(悌),

충(忠), 신(信), 예(禮), 의(義), 염(廉), 치(恥)의 8문자의 변형인 일명 효제도(孝悌圖)로부터 출발한 문자도는 유교의 윤리관을

전달하려는 교화의 기능을 담당한다. 마치 중세 시대의 성화(聖畵)가 문맹인을 위한 교육적 기능을 감당했던 것처럼 이

캘리그램으로서의 문자도의 역할은 당시 생활을 고스란히 반영해 내고 있는 것이다.

 

 책가도.  서울역사박물관                                                문자도, 74.2 × 422.2㎝, 종이에 채색, 호암미술관

 

V. 민화의 자생적 미래
김원룡은 한국미술사에서 한국미술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것을 ‘자연주의’로 보았다. 기교나 완성도를 개의치 않는 소박, 소탈,

고졸의 특성은 이우환 식으로 말하면 ‘현상학적 환원’에 다름 아닌 것이다. 게다가 민화는 감상화이기 보다는 실용회화, 서민을

위한 서민의 회화라는 특성을 간직한 채 우리의 정통회화와도 그 맥을 달리하여 새로운 관점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민화는 정통화에 비해 확실한 제작자와 연대를 결여하고 있는데다가 변화의 템포가 느리고 분명치 않아서 연대 변화에 따른 화풍이나 양식의 변모를 추적하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조선시대의 우리 전통문화의 한 유산으로서 우리 자신을 단순하고 솔직하게 표현해준 하나의 뚜렷한 장르임에는 분명하다.
앞으로 사실성과 학문적 공정성에 입각한 민화의 연구가 다양하게 지속되어야 할 부분이 여전히 남겨져 있기에 민화의 자생적 미래에 대한 희망이 밝다. 여전히 무명성, 도식화, 평면성, 윤곽 회화, 설채법, 해학이나 익살, 여유의 미학으로 두루 뭉실 알려져 있는 민화의 본질과 의미를 명확히 규명하는 일이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하리라 본다.
  
정통회화를 배화사상(排貨思想)에 근간한 사대주의적 그림이라고 보는 편향적 평가와 맞물려, 민화야말로 한국미술의 진정한

표상이라고 주장하는 목소리 또한 우리가 분명 경계해야할 것이다. 중국의 영향 속에서도 정통화는 나름의 독자성을 추구하여 간

우리의 미술이며 민화 역시 정통회화와 전혀 별개의 것은 아니다. 정통회화의 토속화가 농도 짙게 나타난 것으로 이해해야 되리라 본다. 민화, 그것은 생활미와 민예성, 자연 상태에 가까운 삶을 즐기는 사람들이 구체적인 것에서 소재로 삼은 생활과 미의 상호관계 속에서 비로소 완성되고 성불하는 구조체를 지닌 열려진 조직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민화의 의미생성은 여기서 계속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민화의 자생적 미래는 그것의 학술적 연구의 지속만이 관건이 아니다.
미술과 문화의 실천적 장에서 민화 전통의 현대적 계승과 발전이 도모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현대공예의 현장에서는 민화는 한국의 독자적 공예미술을 모색하는 데 있어 좋은 출발 지점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한편, 현대미술의 장에서도 민화와 같은 한국 전통은 다양한 현대적 시각언어를 위한 주제나 형식 차원에서 좋은 재료이다. 우리 현대미술의 오랜 화두였던 ‘전통의 현대화’,

‘현대 속의 전통’, ‘로컬과 글로벌’을 다시금 되뇌는 잔잔한 이슈거리를 만들어내기에 제격인 탓이다.
 
최근 젊은 작가 군을 중심으로 현대적 미술어법으로 한국 전통의 미학을 되살려낸다던가 한국 전통미술의 형식적 양상을 빌어 현대를 풍자하는 식의 실험적 노력들이 지속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일견 이러한 전통의 현대적 모색을 시도하는 지점에서 '민화적 전통의 현대적 변용'이 지나친 형식적 유사성을 재료적 변모를 통해서만 구현하려 한다든가, 재기발랄한 회화적 장치만을 통해서 전통성의 개념을 무리하게 확장할 수 있는 위험은 도처에 존재한다. 외피에 대한 발언을 넘어서 민화적 전통이 견지하고 있는 의미망을 연구하는 실험들도 병행되어야만 하리라 판단된다. 민화의 자생적 미래를 찾는 오늘날의 노력은 형식 너머의 본질적 의미망으로부터 그것이 모색될 때 비로소 성취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전통공예의 계승과 대중문화, 미술의 실천적 현장에서는 민화의 현대적 계승의 문제는 여러 가지 문제 제기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결코 오늘 이 시대에 고루한 과거의 것으로만 남지 않는다. 문화나 미술의 실천적 장에서 형식 너머의 민화적 정신을 현대적 의미와의 상관성 속에서 새롭게 모색하는 '신(新)민화'로 거듭날 때 민화의 자생적 미래는 끝없이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안휘준, 『韓國民畵散考』, 민화걸작선 전시 카탈로그, 호암미술관,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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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자용, 『세계 속의 韓民畵』, 민화걸작선 전시 카탈로그, 호암미술관,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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