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김수길씨가 응암동에 “순간포착”이 아닌 “순간포차”를 차렸더라.
지난 3일, 송추 전강호씨 집에 가을소풍 갔다 오며 이차로 들린 술집이었다.
김수길, 공윤희, 민영기씨 등 몇 명이 둘러앉아, 송추에서 모자란 기름을 ‘순간포차’에서 보충하였다.
뒤늦게 조해인, 박진관씨도 나타났는데, 나만 ‘순간포차’를 몰랐던 것 같았다.






술집 분위기가 꽤 괜찮았다.
전형적인 선술집이나 통술집 스타일인데, 가뿐하게 한 잔 하기 딱 좋았다.


그런데, 돌아가신 민병산 선생 조카 민영기씨로 부터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바로 인사동 사람이라면 한두 장 쯤 다 갖고 있는 민병산 선생의 글씨였다.
아들 조햇님 결혼식을 미처 몰랐다며, 전해주라는 결혼선물이었다.






거리의 철학자로 불리는 민병산선생은 세상을 훤히 읽고 있지만, 평소 별 말씀이 없으셨다.
붓 글씨 또한 얼마나 좋은지, 추사선생께서 계셨다면 아마 스승으로 모셨을 것이다.
자유롭고 거침없이 몰아가는 바람 같은 획들이, 쓰 놓고 나면 얼마나 조형적인지,
한 눈에 반할 글씨였다. 항상 괴나리봇짐에 잔뜩 넣고 다니며 나누어 주셨다.


선생께서는 달라고 말만 하면 거침없이 주었지만, 달라고 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 주지 않았다.
싫어서도 아까워서가 아니라 자기 자랑하는 것 같아 차마 주지 못하신 것 같다.
그러나 살아생전 그토록 많은 글을 쓰서 나누어주셨지만, 나는 한 장도 받지 못했다.
달라고 손을 내밀지 않아 못 받았는데, 어떻게 귀한 작품을 그냥 달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민영기씨가 내놓은 민병산 선생의 붓글씨 내용을 보니,
김삿갓처럼 떠돌던 당나라 시인 맹호연의 ‘봄 새벽’이란 시였다.
살아생전 그 글을 인사동 ‘귀천’에서 쓰시는 것을 보고 탐낸 적이 있는데,
하필이면 그 글씨를 삼십년 만에 만났으니, 그 인연도 예사롭지 않다.
마치, 달라지 않은 너는 가질 자격이 없으니, 자식에게나 주겠다는 것 같다.
그 시를 곱씹고 곱씹으며 민병산 선생님을 그린다.

“봄날 혼곤히 잠들어 새벽을 느끼는데
여기저기서 새 울음 들려온다.
지난 밤 비바람 사나웠기에
꽃잎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아누나“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 사람들이 모처럼 서울 도심을 벗어나, 송추에서 뭉쳤다.

무슨 미련에 못 떠나는지, 인사동 주변을 기웃거리는 예술가들이다.
매월 셋째 수요일마다 인사동에서 만나 대포 한잔하기로 한 것도,
위안거리를 만들기 위한 방편이나 몇 나오지도 않는다.






지난 셋째 수요일 만남에서 송추로 소풍 한 번 오라는 화가 전강호씨의 초대가 있었다.
개천절인 3일 정오 무렵, 송추에서 만나자는 조준영시인의 연락으로 찾아 나선 것이다.
송추유원지 부근에 있는 전강호씨 자택에서 모처럼 자연과 벗이 어울린 호젓한 시간을 보냈다.






전강호씨는 산을 눈앞에 두고 있어 천혜의 자연경관을 누리고 산다.
가 본지가 10년도 넘어 좀 헤맸는데, 주변이 많이 바뀌었더라.
처음 보는 건물들이 많아 낮 설었지만, 집에 들어가니 산을 정원처럼 끼고 앉은 옛날 그대로였다.






그 날은 날씨마저 받혀주어. 따스한 햇살에 온몸이 노글노글 했다.
전강호, 이종순 내외는 물론 조준영, 박윤호, 김민경, 유진오씨가 먼저 와 있었고,
민영기씨 승용차에는 김수길, 공윤희씨가 도착해 내리고 있었다.






인삿말에 동네가 많이 달라졌다고 했더니, 땅값도 몇 배나 올랐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사는 집값이 오르면 기분이야 좋겠지만, 그 집에서 살아야 할 사람에게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지천에 늘린 밤도 줍고, 연못에서 노니는 물고기 모이를 주는 등, 술만 마신 게 아니었다.
뒤늦게 화가 정순겸씨 자매와 사진가 하형우씨도 왔고, 한 때 인사동의 ‘풍류사랑’을 운영했던 최동락씨도 오셨다.






이 반가운 술자리에 노래 한 자락 없어서야 되겠는가?
소리꾼 김민경씨 노래야 여러 차례 들어 잘 알지만, 유진오씨 노래는 처음들었다.
마치 “여자의 일생”을 살아 본 것처럼 처절하게 웃겼다.






그러나 안타까운 소식도 전해졌다.
다들 무세중선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넘어져 갈비뼈가 부러졌다는 것이다.
병문안이라도 가야 했지만, 다들 술 마신 상태라 들리기가 좀 그랬다.
요즘은 기초생활수급자 혜택으로 간신히 사신다는 이야기도 전해들었는데,
한 분야 획을 그은 예술가의 여생이 이러하니,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화가 전강호씨는 인사동과 연을 맺은 지가 어언 30여년이 넘었다.
작가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목발로 어지간히도 인사동 주막을 누비고 다녔다.
그동안 강용대, 김종구, 적음스님, 신원섭씨 등 술로 이승을 떠난 친구도 여러 명이다. 



 


유신시절에는 사마귀 작가로 불릴 만큼, 사마귀 그림에 집착하기도 했다.
곤충의 군림자 같은 사마귀 형상에서, 작가의 시대적 저항을 읽을 수 있다.
그 이후에는 버려진 폐자재를 활용하여 다양한 작업들을 했으나, 돈과는 연이 닿지 않았다. 
그렇지만 돈에 연연하지 않고 힘겹게 주워 모은 폐자재들로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여름과 겨울 일 년에 두 번씩 술과 외출을 자제하고 수행하는 모습은 스님을 닮았다.





그는 한쪽 다리가 없지만, 건강한 사람보다 더 부지런하다.
그림은 물론 집 주변의 조경이나 모든 것들이 그의 손길 안 닿은 곳이 없다.
텃밭을 가꾸며 직장에 다니는 아내 뒷바라지까지 다 한다.
부지런한 생활에서 예술을 찾아내는, 삶 자체가 예술이다.






푸짐한 안주 덕인지, 아니면 가을 날씨 때문인지,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차를 가져 온 민영기씨 일행이 일어나, 나도 일어나야 했다.
버스타기 번거로워 끼어 탔으나, 많이 아쉬웠다.

술과 안주도 남았지만, 남아 있는 벗들이 더 눈에 밟혀서다.





아무튼, 전강호씨 내외 덕에 가을 소풍 잘 다녀왔다.
손님 맞느라 애쓴 두 내외분께 거듭 고마움을 전한다.



사진, 글 / 조문호























































대부호 재산 포기하고 무소유 삶 실천한 철학자
양자 민영기씨 "유고집 이제는 세상 빛 봤으면" 

 

 


 ‘거리의 철학자’, ‘한국의 디오게네스’로 불린 청구자(靑丘子) 민병산(1928~1988)의 유고집이 타계 30여년 만에 세월의 더께를 벗고 빛을 본다.

민병산은 드라마틱한 인물이다. 충북 청주 대부호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스스로 재산을 포기했고 결혼도 하지 않았다. 평생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채 무소유의 자유인으로 살았다. 말 그대로 안분지족의 삶을 향유했다. 그리고 회갑 하루 전날 세상을 떴다.

신경림 시인은 ‘세월청송로(歲月靑松老)’란 시에서 ‘민병산 선생은 회갑 바로 전날 세상을 떴으니/ 세상에 만 예순해를 머문 셈이다/ 가족이 없는 그를 위해 친구와 후배들이/ 잔치를 열어준다는 걸 극구 마다했을 때/ 그의 뜻대로 했더라면 그는/ 그렇게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준비했던 잔치 음식은 장례 음식이 되고/ 회갑 옷은 그대로 수의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민병산은 철학 문학 역사 예술 등 다방면에 걸쳐 동서고금의 서적을 독파, 해박한 지식으로 번역서와 수필 등을 남겼고 서예에도 능했다. 1960년 <새벽>지에 ‘사일의 철학적 단편’, ‘사천세의 은자’를 발표해 이름을 알렸다. 이후 <사상계> <세대> <창작과비평> 등에 여러 편의 철학 에세이와 전기를 발표했다. 사후인 1990년 지인들이 유고집 ‘철학의 즐거움’을 펴냈다.

그는 생전에 서울 관철동과 인사동 일대를 사랑방으로 삼았다. 사람을 끄는 힘이 있던 민병산이 가는 곳마다 문인들의 아지트가 됐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인사동 3전설’. ‘귀천’의 시인 천상병, 극작가 겸 문필가 박이엽과 함께 인사동 터줏대감으로 꼽혔다. 매일같이 거리에서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만나며 청빈한 교유를 즐겼다.

“돌아가시고 한 차례 유고집을 냈죠. 그 이후에 책으로 나온 건 없습니다. 큰아버님이 생전에 써둔 원고를 쭉 갖고 있었어요. 수기나 일어로 써놓은 내용들입니다. 시간이 많이 지났고 저도 몸이 아파요. 이대로 묻힐 수도 있겠다 싶었죠. 더 늦기 전에 세상의 빛을 봤으면 좋겠습니다.”

민병산의 조카 민영기씨(58)가 이제야 남은 원고를 묶어 유고집을 내려는 이유다. 일어로 된 원고 번역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해서 타계 30주년에 맞춰 유고집을 출간할 요량이다. 민병산이 남긴 원고와 서예 작품을 보관해 온 민씨 역시 고집스레 살았다. 혹시 무소유의 삶을 산 큰아버지의 뜻을 어기는 일이 될까봐 유고집 출간을 미뤄왔다고 했다.

민씨는 호적을 옮기진 않았으나 민병산의 양자 노릇을 했다. 하던 일이 있었지만 큰아버지 뜻에 따라 인사동으로 거처를 옮겨 그 글씨를 서각(書刻)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선생의 생애 마지막 한 해를 곁에서 지켜본 것도 그다.

지난 22일 명륜동 한 공원에서 한경닷컴과 만난 민씨가 기억하는 생전의 민병산은 스스로의 양심에 예민했던 지식인이었다. 무소유를 지향하되 무책임하지는 않았던 자유인이기도 했다. 재산을 포기하고 독신으로 산 이유도 그가 남긴 원고에서 읽어낼 수 있다고 했다.




- 세월이 많이 흘렀다. 이제야 유고집을 내려는 이유가 궁금하다.

“큰아버지는 생전에 이런저런 글이며 글씨를 주변 분들에게 나눠주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지인 분들이 유고집 ‘철학의 즐거움’을 냈고. 제가 이런저런 큰아버지의 원고며 수기를 넘겨받게 됐다. 큰아버지 후배 분에게 보인 적 있는데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말고 잘 갖고 있으라고 하더라. 옛날에 썼지만 현대인들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면서. 혹시 돈벌이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그렇게 당부한 것 같다. 그래서 그간 쭉 보관해 왔는데, 시간이 많이 지났고 저도 몸이 아파서 자칫 이대로 묻힐 수 있겠다 싶었다. 이젠 세상의 빛을 봤으면 좋겠다.”

- 민병산 선생의 양자라고 들었는데.

“제 큰아버지 된다. 호적을 옮기진 않았지만 양자로 들어온 셈이다. 늘 ‘너는 내 아들’이라고 말씀하곤 했다. 1987년 가을로 기억한다. 큰아버지가 편찮아 병원 응급실까지 가는 일이 있었다. 만나 뵈러 갔더니 ‘너 이쪽으로 와서 내 밑에서 시키는 것 해라’ 그러시더라. 평생 결혼도 안 하고 산 큰아버지인데 나라도 곁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전자전기 계통 일을 했는데 그때부터 인사동으로 옮겨 서각 일을 배웠다. 큰아버지는 1년여 만에 돌아가셨다. 저도 고지식해서 돌아가신 분과의 약속은 지킨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일을 계속하고 있다.”

- 원고를 봤을 텐데 어떤 내용인가.

“일어로 써놓은 게 많다. 수기는 1권부터 4권까지 있는데 1권은 생전에 직접 번역해 놓았다. 남긴 글을 읽어보니 큰아버지의 삶이 이해되는 점들이 있다. 해방 전 큰아버지가 중학생 때였다. 일제가 패망 중이란 소식을 학생그룹에서 삐라로 만들어 뿌렸다가 구속당했다. 집안에 재산이 있는 편이어서 감옥에서 빼내려고 했는데 혼자선 못 나간다고 버텼다. 결국 몇 달 옥중생활을 한 뒤 손을 써 빼냈다. 큰아버지는 일을 벌인 친구들과 다 같이 감옥에서 나오는 줄 알았는데, 막상 나와보니 아니었던 것이다. 혼자만 혜택을 받은 데 대해 양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했다.

원래 활동적이었는데 그 사건 이후 집에 틀어박혀 철학책을 탐독하면서 성격이 변했다고 한다. 해방 후엔 ‘독립운동 하고 나왔네’ 하면서 거들먹거리는 주변 행동에 또 충격 받았다고. 그러니까 큰아버지는 굉장히 양심에 예민한 분이었던 거다. 수기에는 스무살 때 마음에 드는 여학생에 대해 여러 관점에서 쓴 내용도 나온다. 그 여학생 분은 6·25 즈음에 결핵으로 돌아가신 걸로 안다. 큰아버지가 왜 평생 혼인을 안 했는지 글을 읽으면서 수수께끼가 풀렸다. 그만큼 마음을 준 사람이 세상을 떠났으니 딴 사람에게 마음 주기 어려웠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

 

 

 

 

유고집은 언제쯤 나올 수 있을지.

“번역하는 작업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단순히 번역만 하는 게 아니라 큰아버지를 잘 알고 글도 읽어본 분이 맡아야 하지 않겠나. 그런 문제가 걸림돌이다. 사실 이전에도 한 차례 유고집을 내자는 얘기가 오간 적 있다. 큰아버지 글을 많이 읽은 언론사 문화부장 하던 분이 출판사 대표에게 권유해 추진됐었다. 그런데 원고를 번역하려던 분이 돌아가셨고, 그땐 저도 유고집 내는 데에 적극적이지 않아 흐지부지됐다. 이번엔 여유를 갖고 차근차근 추진하려 한다. 3년 후면 큰아버지 돌아가신 지 30주년이니 그때쯤 맞춰 나오면 좋지 않을까 싶다.”

- 선생이 재산을 포기하고 무소유로 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철학적 사색을 하면서 그렇게 마음을 굳힌 것 같다. 선조들이 이만한 부를 축적한 만큼 남들은 누릴 것을 못 누렸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사실 큰아버지는 자유인이긴 했지만 책임감은 있었다. 큰아버지가 종손이라 집안의 기대가 컸다. 일찌감치 무소유로 살겠다는 결심을 하고서도 1950년대 후반에 집을 떠난 것도 그래서다. 그때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였다. 당시 친구들에게 쓴 편지에 ‘이젠 훌훌 털고 벗어나겠다’는 여운의 문장이 보인다.”

- 철학자이자 문필가, 번역가였다. 그중 어디에 가까웠을까.

“모두 맞지만 사실 큰아버지에게는 평생 소원이 있었다. 기존 위인전이 아닌 역사 속에 묻혀있는 위인들의 전기를 새롭게 발굴해 쓰는 것이었다. 그 꿈을 위해 어렵게 살면서도 청계천 고서점을 다니며 옛날 서책을 사들였다. 그렇게 모은 고서적이 족히 1톤 트럭 분량은 됐던 걸로 안다. 가난 때문에 거처를 자주 옮기다 보니 아는 분 댁에 맡겨뒀는데 책들이 사라져버렸다. 필생의 업이 그렇게 됐으니 얼마나 허무했겠나. 그 이후 주로 글씨로 소일했다.”

 


민병산 선생의 서예 소품

 

 

- 생전에 ‘인사동 3전설’로 불렸다고.

“돌아가시기 전 1년 정도는 곁에서 직접 지켜봤다. 큰아버지는 대개 불광동 숙소에서 오후쯤 인사동으로 나와 찻집을 돌았다. 아는 분들과 말씀 나누고 함께 식사하는 자리를 즐겼다. 미리 그분에게 어울리는 내용을 써 와서 주위에 건네기도 했다. 큰아버지 주변엔 항상 사람이 많았다.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유명한 문인들도 큰아버지가 있는 찻집으로 찾아오곤 했다. 사람들이 버글버글 했다. 그래서 큰아버지가 가는 곳은 늘 명소가 됐다.”

- 아지트나 사랑방처럼 만들었구나.

“그렇다. 인사동 자체가 옛날과 많이 달라졌다. 인사동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부분도 예전의 사랑방처럼 모이는 분위기가 사라진 것이다.”

- 기억나는 선생과의 에피소드가 있다면.

“큰아버지는 천식을 심하게 앓았다. 하지만 남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했다. 여러 번 저를 불러서 쉬엄쉬엄 인사동 뒷골목길로 함께 걸어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평생 무소유로 살았지만 저한테는 ‘야, 나이 먹으니 조금은 돈이 있어야 하겠더라’고 말한 적도 있다. 큰아버지가 당시 건강이 안 좋기도 했고, 원래 물건에 집착하지 않는 분인데 전시회에 출품된 토기 주전자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한 기억이 있다. 제게 ‘내가 죽고 나서도 네가 평생 서각할 만큼 글씨를 써놨다’고도 했다. 그런 장면들이 기억난다.”

- 인간적인 면도 있었던 것 같다.


 

“최대한 말을 아끼면서 살아 다른 사람들이 잘 모르는 면도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무책임한 자유인은 아니었다는 거다. 인사동 분들은 놀랄 텐데, 1970년대에 큰아버지가 고향에 작은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해 어머니를 모신 적이 있다. 물론 서울의 전셋집 보증금도 안 되는 값이었고 그나마도 얼마 안 돼 처분했지만. 어머니를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 집안을 떠나온 몸이었으나 수시로 어머니에게 용돈도 드리고 아들의 도리를 다하는 효자였다.”

한국경제 / 김봉구 한경닷컴 기자 kbk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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