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최민식선생께서 돌아가신 지가 벌써 10년이 되었다.

최민식 선생 서거10주기를 맞은 심포지움이 지금 다시, 최민식을 바라보다는 제목으로

지난 20일 오후4시부터 부산 F1963도서관 세미나실에서 열렸다.

 

  부산광역시부산문화재단이 주최하고 SOOYOIL이 주관한 이날 심포지움에는 이광수교수의

최민식 사진의 작품성: 평론가와 대중의 평가 차이를 중심으로란 발제로 열렸다.

사진가 이동근씨의 사회로 진행된 심포지엄 패널로는 사진가 김문호, 문진우, 강제욱씨가 나섰고,

20여명의 사진인들이 참석했다. 참가한 사진가 중에는 박태진, 배정선씨 등 아는 분도 여럿 눈에 띄었다.

 

  고 최민식선생은 50여년에 걸쳐 민중의 삶을 기록해 온 우리나라의 대표적 다큐멘터리 사진가다.

전통적 스트레이트 사진으로 15만점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다.

한 평생 작업해 온 휴머니즘이 대중에게 큰 감동을 일으키며,

한 시대를 증언한 훌륭한 사진가로 자리매김했으나, 최민식선생의 사진세계를 제대로 조명한 자리가 없었다.

 

  서거 10주기를 맞아 최민식 선생의 작품세계와

이를 둘러싼 다양한 관점을 나누며 토론하는 자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열쇠구멍으로 본 도둑사진이라거나 소재주의라는 몇몇 사진가들의 잘못된

비판에 따른 해명은 물론 평소 선생의 삶에 따른 여러 가지 이야기도 나왔다,

루카치가 말한 전형을 통한 예술의 가치를 이룩하며 카타르시스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루카치가 말한 예술은 인간의 삶을 명료하게 볼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사회적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부분에서도 정확하게 일치했다.

선생의 사진만큼 노동운동이나 여러 가지 사회적 쟁점에 사용된 분도 없었다.

박정희정권 초기에는 빈민사진으로 외국원조를 얻는데도 일조하는 사회적 기여도 했다.  

대신 북한으로 흘러들어가 악용되기도 했지만...

한참 후에는 선생을 주축으로 김문호씨가 리얼포토’(사진집단 사실)를 창립하여

사회적 참여에 적극 나설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평론가말로는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대중적이고 통속적으로 수준이 낮다지만,

페널로 나선 강제욱씨는 예술이 인문학 위에 있지 않다며,

한 평생 인간애를 다룬 최민식선생의 사진 자체가 사회사적 의미고 작품성이라고 말했다.

나 역시 공감하는 말로, 객관성을 요하는 사진의 재현보다 작가의 주관이 우선되는 표현이라면

사진보다 미술에 해당된다는 생각이다. 카메라나 붓은 대상을 표현하는 도구에 불과하니까...

 

  그리고 찍히는 사람에게 허락 받지 않고 찍은 열쇠구멍으로 본 사진이라 비하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배경도 생각해야 한다. 유학에서 돌아 온 이들에 의한

새로운 사진조류가 형성되기 이전의 사진가들은 거리의 스냅 촬영이 일상적이었다.

순간 포착으로 자연스러운 표정이나 동작을 잡아야하는데,

본인에게 물어 본다는 자체가 셔터찬스를 놓치는 것이다.

오죽하면 원로사진가인 고 임응식선생은 초대전 작가와의 만남에서

대표작 구직을 연출이라고 말씀하셨을까? 작가의 주관을 높게 평가하는 시류가 빚은 촌극이었다.

 

  요즘이야 초상권문제가 크게 작용하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초상권 운운하는 사람이 없었다.

시골 노인들마저 초상권을 말하는 오늘의 현실도 문제다.

사진이 악용되어질 때 초상권을 거론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심도가 얕은 준망원 렌즈를 표준렌즈보다 더 많이 사용하는 것도 탓할 문제는 아니다.

사람을 찍어 부각시키는데 가장 적합한 렌즈가 105미리에서 130미리 정도인 것은 다 아는 사실이 아니던가?

오히려 유행처럼 광각렌즈로 대상을 왜곡하는 게 더 문제다.

어떤 렌즈에 의해 어떤 방법으로 찍던 그것은 작가가 추구하는 접근방법일 뿐이지,

정해진 원칙이 어디 있는가? 작가마다 접근방법이 다르듯이,

작가의 개성에 따른 개성적인 사진이 많이 나오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닌가?

 

  사람을 찍는 사람에게 소재주의라는 말도 터무니없는 비방이다.

나 역시 소재주의라는 말을 많이 듣는데, 그러면 그런 사진은 누가 기록할 것인가?

 

최민식 사진상 부정심사 의혹을 밝히는 자리에 불려 나온 당시 운영위원장과 심사위원

문제는 열쇠 구멍 사진이라며 최민식선생을 비방한 자들이 최민식 사진상을 운영하는 자리를 차고앉아,

선생이 주창했던 휴머니즘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터리 사진에다 상을 주며 끼리끼리 단물을 빨아 먹었다는

사실이다. 사태가 확대되어 최민식 사진상 자체가 없어지게 상황까지 갔는데, 최민식 사진상

부정 심사 의혹을 밝히는 자리에 나와 상의 권위를 위해 가난한 친구에게 주었다는 개소리를 지껄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몰상식하고 염치없는 인간들이 대학 사진 교수나 힘 있는 자리에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최민식선생은 열 네 권의 개인사진집을 낼 정도로 열심히 기록한 사진가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로 개인사진집을 낸 분이다.

사진평론가 였던 고 이명동 선생께서도 최민식선생 사진을 극찬했다.

뛰어난 직감력으로 대상과 거리의 개념을 없애는 독자적 시각이라며,

인간의 내면적 리얼리티 핵심에 접근한다고 말했다.

 

  1967년도 영국사진연감에서 스타작가로 지명하며, 선생의 사진으로 특집을 만들 정도였다.

국내외로 유명도가 높아, 그때부터 동료나 선배 사진가들의 시기와 질투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그러한 훌륭한 성과를 무시하는 후배들의 비방에 기가 막힐 뿐이다.

 

  발제자와 패널의 많은 의견과 해명도 있었으나, 귀가 어두워 자세히 알아 듯 지 못해 죄송스럽다.

나 역시 발언할 시간을 주었으나 관중공포증으로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해 이 면을 빌어 말한다.

 

  나는 최민식선생 때문에 사진을 시작한 사람으로서 선생의 모든 사진관에 동조하지만

선생과 같은 어프로치는 하지 않는다.

때로는 거리 스냅도 하지만, 모르는 분의 사진은 가급적 사용하지 않고,

반드시 찍힌 사람의 이름을 밝힌다. 이름 없는 사진은 유령사진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대상 속으로 들어가 작업한다.

 

  최민식 선생을 알게 된 것은 70년대 중반인데, 평소 음악을 좋아 하셔서 선생은 우리 집 단골손님이셨다.

어느 날 휴먼사진집 한 권을 선물로 주셨는데, 받아보니 너무 감동적이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주는 힘이 더 강하다는 생각에 사진을 시작했는데, 때로는 후회스러웠다.

한곳에 빠지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 때문이다.

사진을 하며 장사는 항상 뒷전으로 밀려났는데, 매일같이 가게를 종업원에게 맡기고 다녔으니,

잘 되던 가게지만 손님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선생께서 별일 없는 날엔 주 촬영 무대인 자갈치시장에 나오셨다.

한 번은 촬영하는 중에 선생과도 가까운 분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은 것이다.

같이 장례식장 부터 가자는 말에 한마디로 거절했다.

죽고 나서 가는 것은 아무 소용없다며, 그 시간에 사진이나 열심히 찍으라고 말했다.

내가 죽어도 문상오지 말라며, 죽고 나면 말짱 도루묵이라 했다.

선생은 카톨릭 신자였으나,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 현실적인 분이셨다.

 

  촬영이 끝날 무렵에는 남포동의 음악다방을 거쳐 우리 집에 들리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술을 많이 드시진 않았지만, 젊은 손님들과 어울리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사진 하는 분보다 화가나 음악인들과 자주 어울렸다.

 

  어느 날 최민식선생께서 부산에 사진학원을 차리면 어떻겠냐는 질문에 귀가 번쩍 띄었다.

사진학원을 차리기 위해 급매물로 나온 확대기 세대와 기자재부터 구입해 놓고 서울로 시장조사를 간 것이다.

서울 낙원동에서 민태영씨가 운영하던 한국사진학원3개월 수강 신청을 하고 세밀하게 알아 본 것이다.

가르치는 커리큘럼도 신통 찮았지만, 사진학원 운영이 어려웠다.

그 사진학원은 그나마 군대 사진병으로 갈 수 있는 특전이라도 있어

현상유지라도 한다는 말에 의욕이 꺾이고 말았다.

 

  결국 사진학원은 포기하고 사진 작업에만 매달렸는데,

월간사진황성옥대표의 요청으로 월간사진클럽 부산지부를 창립하게 된 것이다.

지도교수로 최민식선생과 김복만선생을 번갈아 모셨으나, 작업에는 도움 되지 않았다.

찍어 온 사진들을 살펴보며 트리밍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번은 서울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같은 회원이었던 김석중씨와 야간열차를 타고

상경한 적이 있었는데, 최민식 선생을 나무라며 밟고 넘어서야 한다는 당돌한 이야기를 했다.

그 친구도 초창기에는 정신병동을 찍어 사진집을 만들기도 했는데,

그 이후에는 김아타로 이름까지 바꾸며 표현주의로 돌아섰다.

 

  결국 가게를 청산하고 서울로 올라가 처음으로 나간 곳이 월간사진이었다.

최민식선생은 서울 오실 때마다 만났으나, 수시로 원고청탁을 하는 등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한번은 서울 올라와 인쇄소 맡겨야 한다며 사진 프린트 잘 하는 곳을 물었다.

당시 인사동에 작업실이 두었던 김영수씨를 연결해 주었는데, 비용이 만만찮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사실 선생의 사진 프린트는 콘트라스트가 너무 강했다.

콘트라스트가 강하면 사진이 돋보이기는 하지만, 사진 계조가 고르지 못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오래된 습성이라 잘 고쳐지지 않았는데, 사진집 찍을 때마다 애로가 많았단다.

 

  삼년 후 월간사진을 그만두고, ‘한국사협회지편집장으로 갔을 때는선생의 예술론을 연재하기도 했다.

그 당시 원고지 40매에 가까운 원고를 매달 우편으로 보내왔는데,

선생의 독서량이 상당하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한번은 지방에 촬영하러 갔다가 카메라 가방 채 몽땅 도둑맞은 적도 있었다.

너무 난감하여 카메라바디와 렌즈 번호를 적어 분실공고를 회지에 게재했는데,

최민식 선생께서 며칠 뒤 서울 오실 때, 안 쓰는 카메라가 있었다며

니콘FM 바디와 105미리 랜즈 하나를 갖다 준 것이다.

사진 찍는 사람이 잠시라도 카메라가 없으면 안 된다는 선생의 말씀에 코끝이 찡했다.

선생의 사진에 대한 열정은 진작 알았으나, 인정이 많다는 것은 그 때 처음 알았다.

 

  선생을 만나며 지켜 본 바에 의하면 나와 공통된 점이 몇 가지 있었다.

인간을 향한 주제의식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음악을 좋아하거나 무엇이든 한 번 시작하면 포기하지 하는 것도 똑 같았다.

예술가들의 풍류에서 빠질 수 없는 화류도 마찬가지다.

 

  한 번은 사진클럽 회원 중에 혼자 사는 여성회원 한 분이 있었는데,

식사나 한 번 같이하자는 편지를 보낸 것이 화근이 된 것 같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혼자 사는 처녀가 아니라 같은 회원 분과 동거를 하고 있었는데,

성격 급한 그 친구가 최민식선생께 전화를 걸어 사진판에서 매장 시키겠다고 겁을 준 모양이다.

그래서 나에게 말 좀 해달라며 장문의 편지를 적어 보낸 것이다.

별 문제는 없었지만, 지금으로 치면 미투의 원조가 아닌가 생각된다.

연서를 보낸다는 자체가 얼마나 로맨틱한지,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주절주절 생각나는 대로 적다보니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다시 한 번 선생의 명복을 빈다.

 

사진, / 조문호

 

28일까지 갤러리브레송에서 열려...    




['오마이뉴스'에서 스크랩]

노회찬의원 장례식장에서 침통한 표정의 심상정의원 옆에 유시민씨가 오열하고 있다



이 무슨 날벼락인가?

전시리뷰를 작성하려 컴퓨터를 열어보니, 노회찬의원 자살 소식이 떴다.

눈을 의심했으나,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사실이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우리나라에 그만한 정치인이 과연 있었더냐?

 

지난 일요일엔 여야 원내대표 다섯 명을 싸잡아 욕하기도 했다.

미국을 방문한 원내대표들이 워싱턴DC 의사당 앞에서

연예인들처럼 뜀박질하는 사진을 보았기 때문이다.

연출시킨 사진기자 탓으로 여기며, 잘 다녀오기를 바랬는데,

어찌 이런 일이 생겼더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온 종일 밖에 나가 공원을 싸돌아다녔으나

도저히 슬픔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어찌 좋은 사람은 먼저 데려가고, 나쁜 놈들이 잘 살게 할 수 있는가?

세상을 원망하며 분노했으나, 아무 소용없었다.

 

난 노무현 전대통령이나 노회찬씨를 정치인으로 보지 않고 지도자로 본다.

정치를하는 장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하기에,

인간적으로 가슴이 따뜻한 분들은 그러질 못한다.

 

이제 그 분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 할 때.

이 기회에 정치자금법의 대수술과 함께 정치개혁을 이루어 내야 한.

슬픔은 뒤로하고, 우리모두 냉정을 되찾자.




당신이 추구해온 가치가 꼭 실현되길 바라며,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부산사견록'에 참여한 사진가 / 좌로부터 정남준, 문진우, 김동진씨



부산 사()견록전이 지난 20일 충무로 갤러리브레송에서 개막되었다.

부산의 중견 사진가 김동준, 문진우, 정남준씨 등  세 사람이 각기 다른 생각의 시선으로 바라 본 부산이다.

 



김동진의 '해운대'


 

머지않아 사라지게 될 범5동 매축지의 골목풍경을 찍은 문진우의 매축지

마치 죽음의 그림자처럼 짙은 어둠이 깔려 있다.

정남준의 영도 수리조선소조선소 노동자들의 삶을 통해 노동의 의미을 일깨운다.

삶의 본질을 비틀지 않고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김동진의 해운대는 소외, 외면, 박탈, 욕망, 갈등 등 사회의 비정상적인 모습을 자기만의 목소리로 기록했다.

각기 다른 삼색의 부산사견록갤러리 브레송’ 3-3시리즈 두 번째 기획전이다.



문진우의 매축지



부산사견록이란 제목 차체가 부산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추진한 '부산참견록'을 떠올리게 한다.

'부산참견록'은 매년 중견사진가 한 명을 선정해 부산의 역사성과 지역성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기록하는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개인적 친분에 의한 작가선정으로 결과가 들죽 날 죽 할 수 밖에 없었다.

거기서 태어나고 자란 부산의 사진가가 철저히 배제되어 왔다는 사실은 지역작가들의 소외감을 살 수도 있지만,

자칫 뿌리 없는 사진일 수도 있다.



정남준의 노동자



때로는 외지인의 낯선 시선이 필요할지 모르나, 바닥에 뿌리내린 자의 익숙한 눈빛에 따르지 못한다.

문진우의 매축지의 소시민들과 해변에서 잡아 낸 김동진의 부조리한 장면,

정남준이 찍은 조선소 노동자 정면사진은 또 다른 부산의 모습이다.

각기 사진들이 갖는 의미나 우열은 풀이하는 바에 따라 다를 수 있겠으나

일단은 부산참견록을 의식한 전시라는 느낌도 든다.

전시 기획자는 사견록의 자가 생각 사()자라 했다.

생각하고 보고 기록한다는 의미로 세 사람의 작품 성격을 한 마디로 나타내고 있다.

    


김동진의 '해운대'



문진우의 사진은 부산의 아주 오래된 마을, 아직도 그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매축지라는 장소를 기록한 것이다. 문진우가 기록한 그 장소성은 사람이 이 땅에서 추방되어야 하는 슬픔을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그림자 안에 있거나 온전치 않은 형태로 나타난다. 사진가의 슬픔이 배어 있으니 슬픔으로 읽어내지 않을 도리가 없지만 그 읽기는 과학적 읽기가 아닌 문학적 읽기다.


정남준은 노동자의 삶을 담았다. 인간은 일 하는 기계가 아닌 살아 있는 사람임을 말하는 전형적인 사회 다큐멘터리 작품이다. 노동이 정당하게 인정되지 않은 이 세상에서 사는 노동자의 모습을 어둡게 그리지 않은 것은 역설적이거나 그들이 세계의 주체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 것이다.


김동진의 사진은 역사 인식이 강한 사진이다. 세상은 일반적인 모습으로 보이는 게 아니고 개별적으로 보인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보편이란 과학성을 숭모하다 보니 사람이 소외되고 세계가 비정상이 되어 감을 말하고자 한다. 그래서 다른 이들은 세계를 그렇게 보지만 나는 세계를 이렇게 본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의 사진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진의 문법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은 바로 그런 그의 역사 인식 때문이다.”사진비평가 이광수교수가 서문에 적고 있다.




문진우의 매축지



지난 20일 오후630갤러리브레송에서 열린 개막식에는 김동진, 문진우, 정남준씨 등

부산에서 상경한 사진가들을 비롯하여 많은 서울 사진가들이 함께 어울린 사진축제의 자리였다.

김남진 관장을 비롯하여 사진가 김문호, 안해룡, Area Park, 강제욱, 고정남, 권 홍, 임종선, 노은향, 오현경

이동준, 권병준, 신락선, 이수철, 박춘화, 김 헌, 남 준, 최인기, 곽명우, 곽윤섭, 이규철, 석재현씨 등이

충무로 조방낙지로 알려진 해물탕집에서 마셨고, 이차는 해나루’에서 보냈.




정남준의 영도 수리조선소



이 전시는 28일까지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02-2269-2613)에서 열린다.

 

 

사진, / 조문호

 






















































































오는 30일까지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려...




▲문진우, '비정도시'사진집.(눈빛출판사, 12,000원)

부산의 다큐사진가 문진우가 상경하여, 30여 년 전에 찍은 사진들을 펼쳐놓았다.


지난 22일,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개막된 문진우의 ;비정의 도시‘가 바로 그 것이다.

다소 신파적인 ’비정의 도시‘라는 말을 들으니, 바로 80년대 이전으로 필름이 돌아간다.


그가 찍은 남포동 사진들은 그 당시의 수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게 했다.

내가 운영했던 남포동 '한마당'에서  최민식 선생을 만나 사진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부산매일‘사진부장으로 있던 장정수 소개로 문진우를 몇 차례 만난 적은 있지만,

사진에 미쳐 서울로 도망치며, 이내 그를 잊어버렸다.


작년 무렵, 폐북에서 문진우를 기억하게 되었으나, 그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갤러리 브레송'에서는 35년 만의 만남이었는데, 사진들이 너무 좋았다.

이런 사진이 3-40년 동안 잠자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한정식선생의 말씀처럼 “사진은 된장이나 와인처럼 숙성되어야 제 맛이 난다”는 게 실감났다. 그가 다시 보였다.

 


▲문진우, 1985 부산 남포동


그 당시 사진판의 선배들이란 트리밍자 들고 다니며 후배들 사진을 이리 저리 짜르는 게 일 이었다. 거기에 걸렸다면 문진우의 사진도 이리저리 잘려나가 반병신 되었을 게다. 스승을 두지 않고, 꼴리는 대로 찍었기에 지금의 문진우가 있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기본에서는 벗어났지만, 사진의 전달 메시지는 강하다. 기록성에 자신의 감성을 더한 이미지라 울림이 컬 수밖에 없었다.



▲문진우, 1985 부산 해운대


80년대 초반, 부산에 있었던 문진우씨와 나는 알게 모르게 최민식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접근방법은 서로 달랐지만 휴머니즘을 향한 정신 하나는 확실하게 이어받았다. 난, 그 당시 시 건방이 들어 인간성 상실을 낡거나 날카로운 기계에서 찾았지만, 그는 인간을 등장시켜 다큐멘터리 사진의 수필을 쓴 것이다. 그가 선택한 접근법이 옳았다. 인간 자체가 사진 최고의 가치기준 아니던가?



▲문진우, 1984 부산 충무동


지금도 다를 바 없지만, 사진만 찍어서는 살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사진 찍는 직업들을 선호했는데, 그 당시 신문사 사진기자는 사진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는 사진기자로서 일하며 자신의 작업을 할 수 있었고, 난 여기 저기 사진잡지에 밥 빌어먹으며, 아마추어 사진판의 비리나 지켜보며 눈을 더럽혀 왔다. 그나저나 여태껏 부산의 문진우 사진을 몰랐다는 게, 더 부끄럽다. 한동안 내 사진의 주인이었던 산골사람들과 지내며 사진판을 떠나 있었기 때문이다.



▲문진우, 1985 부산 남포동


그를 생각하니, 또 열 받는다. 어떻게 이런 사진가가 학맥이나 인맥으로 범벅된 속칭 성골 진골에 가려 구석방 신세지고 있었단 말인가? 말 많은 부산의 최민식사진상 후보는 물론 ‘부산참견록’이라는 프로젝트조차 한 번 해보지 못했을까?



▲문진우, 1987 부산 기장


하기야! 끼리끼리 노는 바닥에 그야말로 개밥에 도토리 격이었을 게다. 평생 부산을 향해 카메라를 겨누어 왔지만, 그의 줄은 짧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다. 철저하게 밀려난 변방의 사진가였다. 뒤늦게 들은 이야기지만 문진우 사진을 영혼이 없단다. “영혼 좋아하시네,” 욕 나올라 한다.



▲문진우, 1985 부산 남포동


인간에 대한 애정을 냉소로 토해내는 초창기 ‘불감시대’ 사진들은 서울에서 활동하는 사진가 김문호의 ‘온더 로드’를 많이 닮았다. 두 사진가가 드러내고자 한 도시인의 상실감은 구체적 사실보다 전체적인 해석이었는데, 그 방법의 하나로 이질감을 끌어들이고 있다.


신축빌딩 앞에 가면 쓴 사나이를 등장시켜 건물이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하고, 쭈그려 앉은 노인들 앞에 멈춘 승용차로 인간존재를 위협하는 현대문명을 비판했다.



▲문진우, 1992 부산 범일동


부산에서 활동하는 사진가가 부산을 찍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는 일편단심 부산을 찍어왔다. 소재주의고 뭐고 그런 생각은 할 필요도 없이 바다가 좋으면 바다를 찍었고, 부산의 슬픈 역사와 인간 소외를 담으려 산복도로에 메달리기도 했다. 사진은 자기 마음 가는 대로 당면한 상황에 따라 찍었던 것이다.


바다를 찍기 위해 해운대로 이사하는 열정도 보통은 아니지만, 궂은 날씨 따라 달라지는 바다의 암울한 풍경을 줄곧 나게 찍어왔다. 그 사진으로 1997년 ‘바다, 하늘 그리고 오브제’란 전시를 했다.



▲문진우, 2010 부산 산복도로


산의 배를 갈라 길 내고, 동네 만들었다는 산복도로는 그에게 소외된 도시 사람들의 상징 처로 자리 잡았다. 허리 굽은 노인밖에 없는 볼품없는 동네였지만, 그만의 어법으로 ‘산복도로에서 부산을 보다’(2013)란 전시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돈 받고 찍은 사진이긴 하지만, 1950년 부산에 들어 선 미군부대 ‘하야리야’의 폐쇄된 모습을 찍어 ‘하야리아, 사진 속에 잠들다’(2011)란 사진전도 했다.



▲문진우 2010, 부산 하야리아



지금은 낙동강 철새도래지였던 명지 뉴타운이 들어서는 과정들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모든 기록들도 80년대에 찍은 ‘불감시대’처럼 시간이 흘러 숙성되면 그 가치가 빛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진가 문진우

사진비평가 이광수 교수는 그의 사진을 두고 “사진이 어떤 용도로 쓰일지라도, 그것의 속성이 기록에 가깝든 예술에 가깝든 순수 다큐멘트이든 관계없이 모든 경우에 통용되는 가치 하나만 골라라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오래됨’이라 했다. (중략)


그의 사진은 구도가 정형화되어 있지 않아 죽어있지 않고, 그 안에 세계의 해석까지 들어 있다면, 그 다큐멘터리 사진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 전시는 30일까지 이어지고, 눈빛출판사의 사진가선28호로 문진우‘비정의 도시’(12,000원)사진집도 출간되었다,


(갤러리 브레송 / 02-2269-2613)


[서울문화투데이 / 조문호기자/사진가]










1985 부산 남포동



부산의 다큐사진가 문진우가 상경하여, 30여 년 전에 찍은 사진들을 펼쳐놓았다.
지난 22일,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개막된 문진우의 ;비정도시‘가 바로 그 것이다.
다소 신파적인 ’비정의 도시‘라는 말을 들으니, 바로 80년대 이전으로 필름이 돌아간다.

그가 찍은 남포동 사진들은 그 당시의 수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게 했다.. 

내가 운영했던 남포동의 '한마당'에서  최민식 선생을 만나 사진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부산매일‘사진부장으로 있던 장정수 소개로 문진우를 몇 차례 만난적은 있지만, 

사진에 미쳐 서울로 도망치며, 이내 그를 잊어버렸다.




1991 부산 남포동



작년 무렵, 폐북에서 문진우를 기억하게 되었으나, 그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갤러리 브레송'에서는 35년 만의 만남이었는데, 사진들이 너무 좋았다.

이런 사진이 3-40년 동안 잠자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한정식선생의 말씀처럼 “사진은 된장이나 와인처럼 숙성되어야 제 맛이 난다”는 게 실감났다.

그가 다시 보였다.


1985 부산 해운대


그 당시 사진판의 선배들이란 트리밍자 들고 다니며 후배들 사진을 이리 저리 짜르는 게 일 이었다.

그기에 걸렸다면 문진우의 사진도 이리저리 잘려나가 반병신 되었을 게다.

스승을 두지 않고, 꼴리는 대로 찍었기에 지금의 문진우가 있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기본에서는 벗어났지만, 사진의 전달 메시지는 강하다.

기록성에 자신의 감성을 더한 이미지라 울림이 컬 수밖에 없었다.



1987 부산 기장



80년대 초반, 부산에 있었던 문진우씨와 나는 알게 모르게 최민식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접근방법은 서로 달랐지만 휴머니즘을 향한 정신 하나는 확실하게 이어받았다.

난, 그 당시 시건방이 들어 인간성상실을 낡거나 날카로운 기계에서 찾았지만,

그는 인간을 등장시켜 다큐멘터리 사진의 수필을 쓴 것이다. 그가 선택한 접근법이 옳았다.

인간 자체가 사진 최고의 가치기준 아니던가?



1984 부산 자갈치시장



지금도 다를 바 없지만, 사진만 찍어서는 살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사진 찍는 직업들을 선호했는데, 그 당시 신문사 사진기자는 사진인 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는 사진기자로서 일하며 자신의 작업을 할 수 있었고, 난 여기 저기 사진잡지에 밥 빌어먹으며,

아마추어 사진판의 비리나 지켜보며 눈을 더럽혀 왔다.

그나저나 여지 것 부산의 문진우 사진을 몰랐다는 게, 더 부끄럽다.

한동안 내 사진의 주인이었던 산골사람들과 지내며 사진판을 떠나 있었기 때문이다.



1985 부산 남포동



그를 생각하니, 또 열 받는다. 어떻게 이런 사진가가 학맥이나 인맥으로 범벅된 속칭 성골 진골에 가려

구석방 신세지고 있었단 말인가? 말 많은 부산의 최민식사진상 후보는 물론 ‘부산참견록’이라는 프로젝트조차

한 번 해보지 못했을까? 하기야! 끼리끼리 노는 바닥에 그야말로 개밥에 도토리 격이었을 게다.


평생 부산을 향해 카메라를 겨누어 왔지만, 그의 줄은 짧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다.

철저하게 밀려난 변방의 사진가였다.

뒤늦게 들은 이야기지만 문진우 사진을 영혼이 없단다. “영혼 좋아하시네,” 욕 나올라 한다.



1984 부산 충무동



인간에 대한 애정을 냉소로 토해내는 초창기 ‘불감시대’ 사진들은

서울에서 활동하는 사진가 김문호의 ‘온더 로드’를 많이 닮았다.

두 사진가가 드러내고자 한 도시인의 상실감은 구체적 사실보다 전체적인 해석이었는데,

그 방법의 하나로 이질감을 끌어들이고 있다.


신축빌딩 앞에 가면 쓴 사나이를 등장시켜 건물이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하고,

쭈그려 앉은 노인들 앞에 멈춘 승용차로 인간존재를 위협하는 현대문명을 비판했다.



1992 부산 범일동



부산에서 활동하는 사진가가 부산을 찍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는 일편단심 부산을 찍어왔다.

소재주의고 뭐고 그런 생각은 할 필요도 없이 바다가 좋으면 바다를 찍었고,

부산의 슬픈 역사와 인간 소외를 담으려 산복도로에 메달리기도 했다.

사진은 자기 마음 가는 대로 당면한 상황에 따라 찍었던 것이다.

 


1993 부산 해운대



바다를 찍기 위해 해운대로 이사하는 열정도 보통은 아니지만,

궂은 날씨 따라 달라지는 바다의 암울한 풍경을 줄곧 찍어왔다.

그 사진으로 1997년 ‘바다, 하늘 그리고 오브제’란 전시를 했다.


산의 배를 갈라 길 내고, 동네 만들었다는 산복도로는 그에게 소외된 도시 사람들의 상징처로 자리 잡았다.

허리 굽은 노인밖에 없는 볼품없는 동네였지만,

그만의 어법으로 ‘산복도로에서 부산을 보다’(2013)란 전시를 만들어냈다.



2010 부산 산복도로


2010 부산 하야리아



그리고 돈 받고 찍은 사진이긴 하지만, 1950년 부산에 들어 선 미군부대 ‘하야리야’의 폐쇄된 모습을 찍어

‘하야리아, 사진 속에 잠들다’(2011)란 사진전도 했다.

 

지금은 낙동강 철새도래지였던 명지 뉴타운이 들어서는 과정들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모든 기록들도 80년대에 찍은 ‘불감시대’처럼 시간이 흘러 숙성되면 그 가치가 빛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15 부산 명지 뉴타운



사진비평가 이광수교수는 그의 사진을 두고 “사진이 어떤 용도로 쓰일지라도,

그것의 속성이 기록에 가깝든 예술에 가깝든 순수 다큐멘트이든 관계없이

모든 경우에 통용되는 가치 하나만 골라라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오래됨’이라 했다. (중략)

그의 사진은 구도가 정형화되어 있지 않아 죽어있지 않고, 그 안에 세계의 해석까지 들어 있다면,

그 다큐멘터리 사진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 전시는 30일까지 이어지고, 눈빛출판사의 사진가선28호로 문진우‘비정도시’(12,000원)사진집도 출간되었다, 

(갤러리 브레송 / 02-2269-2613)


사진가 문진우씨



아래사진은 전시 오프닝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가 문진우를 비롯하여 ‘갤러리 브레송’ 김남진관장, ‘눈빛출판사’ 이규상대표, 사진비평가 이광수교수, 사진가 엄상빈, 김문호, 김영호, 김봉규, 고정남, 마동욱, 고 헌, 곽명우, 신인식씨, 그리고 최철민, 박태진, 신은정, 정지윤씨 등 부산에서 온 사진가들도 많았으나, 대부분 성함을 모르는 분이었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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