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멂, Blinding Scenery

한상진/ HANSANGJIN / 韓相振 / mixed media

2023_1006 2023_1101 / 월요일 휴관

한상진 _ 검은 산 _ 종이에 수묵드로잉 _ 양구에서 _42×29.7cm_2023

 

초대일시 / 2023_1007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7:00pm / 월요일 휴관

 

두나무아트큐브

DOONAMOO ARTCUBE

경기도 안양시 예술공원로 131번길 49

@doonamoo_artcube/

www.youtube.com/@Doonamoo_Artcube

 

두나무아트큐브에서는 한상진 작가의 눈멂, Blinding Scenery을 기획하였다. 그의 작업은 드로잉과 회화(painting) 그리고 버려진 사물을 채집하여 숨결을 불어 넣는 오브제(objet)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작가의 작업은 주로 길 위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낯선 자리에서 만나게 되는 풍경과 사람들, 그 속에 담긴 삶의 모습들, 친근하면서도 낯선 언어들과의 만남, 접촉을 통해 스스로를 성찰하고 되돌아보는 것이다. 그의 되돌아 봄에는 어떤 것들이 담겨 있을까... 그곳에는 이름 없는 풍경과 스쳐 지나가는 사람, 돌아올 수 없는 시간, 보잘것없는 사물들, 변화하며 사라져가는 자연의 풍경들이 자리하고 있다. 서양의 전통적 사유가 자연을 인위적인 환경으로 조성하는 것임을 의미한다면 동양의 사유에 있어서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것'을 말한다. 작가가 그려가고 있는 소박하면서도 현대적인 회화작업 속에는 이러한 전통적 사유와 함께 우리가 성찰해야 할 '오래된 미래'가 스며들어 있다.

 

한상진_적벽_종이에 수묵드로잉_금산에서_42×29.7cm_2023
한상진_바람처럼_종이에 수묵드로잉_정독도서관에서_42×29.7cm_2023
한상진_묵상 Meditation_종이에 수묵드로잉_신도림 마로니에_42×29.7cm_2023
한상진_피어나다_종이에 수묵드로잉_반려식물, 옥상드로잉_42×29.7cm_2023

길 위에서, 멈춰서서, 한없이 바라보게 되는 순간을 작가는 '눈멂'이라고 말한다. 눈멂이란 수동적으로 이끌리는 '중지'의 순간이 아닌가... 중지의 순간-이끌림, 의식과 의미가, 이성의 구조적 판단이 멈추는 응시의 순간, 수행자의 묵상처럼 찰나가 전해주는 울림을 그는 마음의 숨결, 몸의 감각을 통해 화면으로 전이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는 2023년 전후, 풍경과 사물을 응시해온 수묵드로잉을 포함하여 페인팅 작업 그리고 채집된 오브제로 재구성된 가변설치작업을 선보일 예정이다. 한상진 작가는 홍익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하였다. 2005년 전후 문명의 침실연작, 2008년 전후 FLASH GARDEN연작, 2011년 전후 응시와 명상연작, 2014년 전후 소요逍遙-흐르는 풍경, 무경계, NO BOUNDARY, 미명微明연작 등, 실험적인 작업을 진행해 왔으며 20여 회의 개인전과 100여 회의 기획전 및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두나무아트큐브

 

한상진_무경계. No BOUNDARY-20030905_양양-태풍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3×100.3cm_2023
한상진_무경계. No BOUNDARY-20030906_양양-태풍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3×100.3cm_2023
한상진_무경계. No BOUNDARY-20030907_양양-태풍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3×100.3cm_2023
한상진_무경계. No BOUNDARY-20030908_양양-태풍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3×100.3cm_2023
한상진_무경계. No BOUNDARY-20030909_양양-태풍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3×100.3cm_2023

눈멂-Blinding Scenery 나는 이름 없는 풍경들이나 버려지고 오래되어 허름한 사물들에 이끌린다. 의미화되거나, 화석화되거나, 기호화된 것들과는 거리가 먼, 일상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걸음을 멈추게 하는 응시의 순간이 작동하게 되는 계기는 무엇일까. 그것은 보여지는 것 이상의 바라봄이며 시선이 시선 속에 그 이상의 나머지를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알 수 없는 삶의 계기들은 거부할 수도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도 없는 친밀하고도 낯선 모호함을 숨기고 있다. 문화적으로 가공된 이미지들은 공시적 의미(connotation)로 기능하며 독자의 체계와 공명하겠지만, 이미지가 그 너머의 타자성을 품을 때,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밝은 방에서 제기한 개념 푼크툼(punctum, 푼크툼은 라틴어로 '찌름'이라는 의미로, 이미지를 봤을 때 다가오는 충격과 여운의 감정을 말한다)처럼 숨겨진 틈으로 이어지는 강렬한 분열이 발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미지는 때로 폭력적이고 위험한 것일 수도 있다. 분열의 시간은 일상 속에서 접하는 시간의 나눔과 선형적인 구분 사이에 있다. 동일성을 배제한 타자들의 목소리는 어두운 심연에 몸을 움츠리고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침묵이 또 다른 소리의 형상이며 침묵 또한 온전하게 의미로 정립되는 것을 방해한다. 동행하던 내 안의 내가 길 건너 저편에서 손짓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유령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도플갱어(doppelganger), 겹침(overlapping)은 그러한 의미에서 나에게 온전치 못한 불가능한 의미의 세계로 길을 안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풍경 속에서 풍경이 되어가는 순간들은 길 떠남으로부터 시작된다. 흐린 날의 기행, 목적 없이 떠나는 길에 만나는 풍경들은 변증법적으로 충족시켜가는 과정이 아니며, 다시는 고유성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실패하는 여행이다. 죽음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이미 죽은 것들은 내가 어쩔 수 없는 나의 또 다른 모습들이다. 벗어남, 회의, 전락, 공포의 감정, 무의식... 존재는 언어적인 의미로 해석이 안 된다.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는 유한성의 무한한 지속을 존재의 참을성(patience)이라고 한다. 의미는 급하고 참을성이 없다. 어떤 것에 속하려고 하는 강박은 의미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벌거벗은 존재로서의 연기는 나에게 종결되지 않는 물음을 제기한다. 존재는 의미에 편입되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풍경 속에 몸을 담고 있다. 중지의 순간에도 흐르는 풍경은 고유한 자리가 없다. 죽음은 죽임으로 종결되지 않는 욕망이다. 흔적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는 죽음은 시간적인 차연으로 존재함으로 풍경이 풍경으로 다가오는 순간은 벌거벗은 풍경으로서, 재현 불가능한 풍경으로서만 이야기될 수 있다.

 

한상진_무경계. No BOUNDARY-1001_양구에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6×194cm_2023
한상진_무경계. No BOUNDARY-1002_양양-태풍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6×194cm_2023
한상진_무경계. No BOUNDARY-1003_양구에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6×194cm_2023
한상진_산수무진 山水無盡 -20230904_금산, 석천에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72.8cm_2023
한상진_산수무진 山水無盡 -20230905_금산, 석천에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72.8cm_2023
한상진_무경계. No BOUNDARY-사성암四聖庵_구례-지리산 가는길에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30.3cm
한상진_길 위에서, 20221008 경북-문경에서

기억할 수 없는 타자,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살아 숨 쉬는 죽음의 순간들은 말할 수 없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사진가 육명심(陸明心) 선생은 "나는 농경사회의 마지막 세대이다. 지난날 원시인들이 바위에 암각화를 남겼듯이, 그런 심정으로 우리 시대 사람들을 사진으로 담았다."라고 말했다. 그의 사진집 백민(白民)에 수록된 윤세영 선생의 글을 참조하자면 1970년대 말 시작된 백민(白民)연작은 낮은 곳에서 한국인의 정서를 지탱하고 있었던 기층민, 삼베나 모시옷을 입은 옛 삶의 원형을 담백하게 보여준다. 영적이고, 신비로운, 무속적이고, 토템적인 분위기는 사진들에서 보여주는 강렬한 정면성에 나타나 있고 바라봄과 보여짐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현상, 서로를 마주하면서 발생하는 라포(rapport)를 형성하는 것으로 본다. 관계의 형성은 서로의 경계가 무너지는 교감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육명심 선생의 작품집 백민은 시대의 풍경을 호명하는 것이고 오늘날 기층민이란 의미가 무엇인가를 성찰하게 해준다. 나에게 존재란 그리고 그림이란 이름 없는 것들 속에서, 그 관계 속에서 삶-죽음을 호명하는 것이다. 나는 197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의 시대적인 상황을 묵시해 왔다. 정치적인 형세, 흑백에서 컬러로의 전환,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전환,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을 경험하였다. 급속도로 변화하는 시대적 풍경 속에서 자본의 흐름이 존재를 지배하는 방식은 우리의 삶을 서구의 그것보다도 더 비자연적으로 획일화시키고, 물질화된 환경 속으로 소외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생산과 소비 속에서 남겨진 잉여, 의미로부터 버려진 사물과 풍경들은 일렁이는 시선의 동일성 속에서 나를 애착(affection)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땅 위에 떨어진 열매, 투박하게 마모된 조약돌, 빛바랜 플라스틱이나 유리 파편들, 녹슨 쇠붙이, 바닷가에 떠내려온 부유목, 수변 풍경, 적벽... 풍상이 담긴 나무들, 나타나고 사라지는 하늘의 구름, 하늘과 땅의 경계가 그려내는 모호한 풍경들, 그것들은 그 자체로 원초적이고, 거칠고, 아름답고, 숭고하고 강렬히 눈을 멀게 하고, 삶 속에서 헐벗은 파편으로 흐르며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텅 빔을 나로 하여금 반복-공유하게 한다. 위와 같은 여정 속에서 작품으로 등장하는, 오브제(objet), 최소한의 재료나 물질의 옷을 입은 형과 상의 속삭임들, 미완의 흔적들은 손에 잡을 수 없는 형상들이 되고 만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에게 무경계(no boundary)란 완결되지 않은, 종결될 수 없는 이미지를 사로잡으려는 욕망으로부터 나를 내려놓는 것이다. 천천히, 목적 없이 걷는 길 위에서 만나게 되는 풍경과 사물들, 그러나 이러한 재현 불가능한 것을 재현하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온다. 실패의 반복,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길을 나서며 풍경을 소요(逍遙)하는 것은 아무런 구분도 가능하지 않은 어둠, 바깥으로 열리는 텅 빔을 환대하려는 태도를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한상진

 

 

지난 삼일절엔 동자동 사진 찍느라 고향에서 열리는 '영산삼일민속문화제'는 커녕 '탑골공원'도 못갔다.

봄바람에 치마가 날리는 게 아니라 게양대에 걸린 태극기만 휘날렸다.

 

그 이튿날은 만사를 제쳐두고 정동지와 전시 보러 나섰다.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리는 김동진의 ‘나의 살던 고향’ 부터 들렸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전시장은 조용했다.

 

전시작들은 작가의 고향인 만덕동의 오래전 모습을 살벌한 도심풍경에 빗대어 그리워했다.

자연과 주변 환경만 바뀐 게 아니라 인간의 정신까지 바뀌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사라져버린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진가의 고향노래였다.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물질문명 속에 살아가며,

고향이란 말조차 잊어버린 현대인들에게 보내는 추억의 서사다.

 

이 전시는 3월 12일까지 열린다.

 

두 번째는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김인규씨의 ‘산 넘어 남촌'을 찾아 인사동으로 넘어갔다.

이 전시 역시 고향에 대한 향수로, 전시장 입구에는 ‘갤러리의 봄’이란 또 다른 현수막도 걸려 있었다.

 

봄은 실감할 수 없으나, 전시장은 온통 고향을 그리는 봄 노래였다.

 

‘나무화랑’으로 올라가니 전시 작가는 보이지 않고, 김진하관장을 비롯하여 정복수, 김 구, 장경호씨가 있었다.

 

작품들은 고향의 봄을 연상케 하는 소담한 풍경이었다.

화사한 파스텔 톤의 부드러운 색감이나 초가집과 구릉들이 나열된 공간구성.

거기에 평면적인 입체감을 두리 뭉실하게 드러내어 꿈인지 현실인지 아리송한 풍경으로 끌어갔다.

 

단조로운 내용이 오히려 눈길을 끌게 만들었다.

일체의 기교로부터 탈피한 그리기의 원형을 보여 주는듯한 소박함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원초적 미감의 봄바람 같은 분위기였다.

 

포근하고 아늑한 화면은 조선 민화 같은 담백한 맛을 내는데,

마치 동화를 보는듯한 유치찬란함 그 자체였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구름처럼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전시로, 13일까지 열린다.

 

화가 정복수씨의 술 마시러 가자는 꼬임에 끌려 장경호, 김구씨와 ‘사랑채’로 내려왔다.

운전 때문에 막걸리 한 잔만 마시기로 했으나, 한 잔으로 끝내기란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려웠다.

모시고 가야할 차주 눈치 보느라 술인지 맹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개마서원’의 장의균씨 내외와 안원규씨도 합류했다.

 

아직 보아야 할 전시가 남아 있어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갤러리담’에서 열리는 한상진씨의 ‘무경계’를 찾아 가다 거리에서 춤평론가 이만주씨를 만나기도 했다.

 

‘갤러리담’에는 전시작가 한상진씨를 비롯하여 최석태씨, '스마트협동조합' 서인형이사장 등 반가운 분도 여럿 있었다.

 

전시된 주요 작품은 먹 드로잉이었다.

작업실 주변이나 길에서 만난 하잘 것 없는 사물들을 형상화했다.

풀포기에서부터 하늘에 떠있는 구름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경계 없이 먹으로 그렸다.

 

본래의 의미로부터 벗어나 버린, 버려진 사물에 대한 애착의 발로였다.

변해가는 사물이나 풍경처럼 세월을 멈출 수 없는 현대인의 고뇌를 담은 것 같았다.

무미건조하고 불안한 일상의 파편에 다름 아니다.

 

미술평론가 최석태씨 말로는 지난 전시보다 훨씬 단단해진 미감이라며 만족감을 표했다.

이 전시는 3월21일까지 열린다.

 

재미 사진가 김인태선생의 ‘선율’전이 열리는갤러리인사1010’으로 발길을 돌렸다.

 

15년 만에 찾은 김인태씨의 귀국 초대전은 장엄하면서도 아름다운 미국 대자연의 풍광을 보여주었다.

80년대 중반에 발표한 광활한 사구의 기하학적 구성을 드러낸 작품들도 눈길을 끌었다.

 

이번 '선율' 전에 나오는 작품들은 때로 사색에 빠져들게도 만들었다.

특히 시들어가는 꽃송이를 크로즈업 한 사진은 명상적이고 철학적인 사유가 담겨있다.

 

김인태의 ‘선율’전은 14일까지 열린다.

 

마지막으로 박진흥전시를 보러 '갤러리 더원'에 들렸다.

박진흥씨는 박수근화백의 손자이고 박성남화백의 장남이다.

삼대째 그림을 그리지만, 박진흥 작품은 한번도 보지 못해 작정하고 나선 것이다.

 

박진흥의 '흙결의 시간, 그리고 목련'

박진흥씨의 ‘흙결의 시간, 그리고 목련’이 열리는 ‘갤러리 더원’은 문이 잠겨 있었다.

전시도 보지 못한 채 뒤풀이 장소인 ‘마중’으로 가야 했다.

 

'마중'에서 전시 작가인 박진흥씨는 물론, 부친 박성남화백도 만났다.

오랜 만에 만나 반갑기 그지없으나, 박성남씨의 능글능글한 농담은 변함 없었다.

 

작가의 흙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얼마나 진지한지, 다시 인사동에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이 전시는 13일까지 열리니, 인사동 봄바람 맞으며 전시보러 가자.

 

사진, 글 / 조문호

 

 

무경계

한상진展 / HANSANGJIN / 韓相振 / mixed media

2023_0302 ▶ 2023_0321

한상진_몸의 풍경, 풍경의 몸_종이에 수묵드로잉_각 42×29.7cm_2019~20

초대일시 / 2023_0302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3월21일_12:00pm~03: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안국동 7-1번지)

Tel. +82.(0)2.738.2745

www.gallerydam.com@gallerydam_seoul

 

갤러리 담에서는 한상진의 『무경계』 전시를 기획하였다. 작가의 먹 드로잉을 살펴보면, 그는 작업실과 길에서 만난 어떤 사물들을 A3 크기의 드로잉 종이에 시간을 가지고 먹으로 그려내고 있다. 감자, 모과, 그리고 빈 화분 속에 자라는 풀에서부터 하늘에 떠있는 구름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주변의 사물과 풍경들을 경계 없이 먹으로 그려내고 있다. 작가의 작업에서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은 작품이 되어 전시장에 등장한다. 이번 전시에는 종이에 먹 드로잉을 비롯하여 작품 30여점이 출품될 예정이다. 한상진 작가는 홍익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하였고 이번이 스물두 번째 개인전이다.  ■ 갤러리 담

 

한상진_부유목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1

한상진_부유목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1

한상진_부유목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1

 

한상진_불나무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1

한상진_구름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2

한상진_구름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2

한상진_구름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2

 

한상진_Burn Out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1

풍경 속의 풍경 ● 나타나고 사라지는 풍경, 여기에서 풍경이란 세계를 구획하고 질서지우는 방식의 풍경화가 아니라 비전체로서의 풍경 속에서 풍경이 되고 또 다른 가능성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의 작업은 인위적인 형식이나 의식의 바깥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밖이란 내부와 외부가 만나는 장소이며 지시적인 언어의 내부가 열리는 자리이다. ● 나의 그리기는 고요하게 내려놓는 순간에 발생한다. 소요(逍遙)하는 시간 속에서 무심히 하늘을 바라보는 텅 빈 시선, 판단하지 않는 태도, 너와 내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님(不二)을 깨닫는 시간 속에서 경계(境界)는 사라지고 삶의 유한함 속에서 손에 잡을 수 없는 무한한 것과 만나게 하는 과정이다. ● 회화(繪畵)는 드로잉의 확장된 자리이며 심연의 공간이다. 따라서 드로잉은 회화를, 회화는 드로잉을 서로 대리, 보충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드로잉은 공간을 여는 것이다. 그것은 평면의 공간속에서도 일상의 삶 속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며 행위와 과정을 통해 목소리를 발하는 사후적 결과물이다. ● 무미한 침묵 속에 펼쳐지는 물질과 흔적은 존재의 또 다른 얼굴이다. 정신의 영역을 통과하여 만나게 되는 지지체는 접촉의 촉지적 순간 안에서 정적이면서도 동적인 것이 되어가며, 손에 잡을 수 없는 찰나의 순간은 시간의 명료함을 열고 공기 속에 살아 숨 쉬는 호흡과 감정의 진폭이 되어, 풍경의 몸속에서 흔들린다.

 

한상진_소멸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1

한상진_소멸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1

한상진_소멸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1

 

한상진_흙으로부터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1

한상진_흙으로부터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2

한상진_흙으로부터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1

 

한상진_묵상默想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1

'화면에 일획을 긋는다'는 것은 또 다른 세상과 만나는 순간이다. 기록될 수 없는 순간을 기록하는 여정이며 시작과 끝의 시간을 넘어선 일획은 평면과의 접촉 속에서, 풍경과의 만남 속에서, 타자를 향한 노출 속에서, 예측할 수 없는 노정 속에서, 목적 없는 삶 속에서, 풍경 속의 풍경이 되어간다. ● 시선의 불가능성, 그것은 언어가 의미에 닿지 못하고 끊임없이 지연되고 미끄러지는 것처럼 존재의 지평에서 의미로 포획될 수 없는 나머지와 포옹한다. 화면 위에 포치되는 흔적들의 틈, 피어나는 잔여는 지시적인 공간의 억압으로부터 존재의 세계로 확장되는 울림을 이야기한다. ● 개와 늑대의 시간, 낮과 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지는 미명계(微明界), 무경계(無境界) 연작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며 불가능한 말하기를 반복해야하는 존재의 숙명을 드러낸다. 의미로부터 벗어난 버려진 사물, 그늘진 자리, 흐리고 시린 날에 바라본 이름 없는 풍경들에 대한 애착(affection)은 편리함이나 속도, 효율성과는 거리가 멀다. 합리적인 생산성과 경쟁 속에서 천천히 흐르고 변화해가는 풍경 속에 풍경을 말하려는 것은 빠르게 달려가지만 정지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인의 불안한 일상에 무미함과 무위의 글쓰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 한상진

 

한상진_무경계無境界 No Boundary-Dark, Red 연작_2022~3
한상진_무경계無境界 No Boundary-Dark, Re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1×9.7cm_2022
한상진_무경계無境界 No Boundary-Dark, Red 연작_2022~3
한상진_버려진 사물과 함께하기_부유목-고성, 속초, 양양에서_가변설치_2022

A Landscape in the Landscape ● A landscape that appears and disappears. Here, the landscape is not a landscape painting in a way that divides the world and creates order, but the landscape within the landscape becomes a part and meets another possibility. In this sense, my work is done outside of synthetic form or consciousness. Here, the outside is a place where the inside and the outside meet and a space where the inner part of the indicative language opens. ● My drawing happens the moment I calmly put it down. It is an empty gaze and unjudgmental attitude of looking at the sky casually while walking about freely, a boundary that disappears in the time when you and I realize that there is nothing different from each other, and a process of meeting the infinite that cannot be grasped in the finiteness of life. ● Painting is an expanded realm of drawing and a space of abyss. Therefore, drawing and painting substitute and supplement each other. It is realized even in plane spaces and daily life and is an ex-post result of making voices through actions and processes. ● Materials and traces unfolding in meaningless silence are other faces of existence. The support that passes through the realm of the spirit becomes static and dynamic within the tactile moment of contact, and the moment that cannot be held in hand opens the clarity of time. Also, the breathing that lives and breathes in the air becomes an amplitude of emotions and shakes in the body of the landscape. ● 'Drawing a stroke on the canvas' is the moment of encountering another world and the journey of recording moments that cannot be recorded. One stroke transcending the time of the beginning and the end becomes a landscape within the landscape in contact with a plane, in an encounter with the landscape, in exposure to others, in unpredictable journeys, in an aimless life. ● The impossibility of gaze, as if it were a metaphor that cannot be expressed in language, embraces the rest that cannot be captured in meaning in the horizon of existence. The cracks of the traces widely spread on the screen, that is, the afterimages that bloom, refer to the resonance that extends from the oppression of the indicative space to the world of existence. ● The series 「Twilight」 and 「No Boundary」, in which the boundaries between dog and wolf time, day and night, and sky and earth disappear, to say the unspeakable and reveal the fate of a being who has to repeat the impossible. The affection for abandoned objects devoid of meaning, shady seats, and nameless landscapes viewed on a cloudy and cold day is far from convenience, speed, or efficiency. My work is to speak of the landscape in the landscape that flows slowly and changes amid good productivity and competition. Also, my work is to suggest idle and free writing to the anxious daily life of modern people who run fast but cannot get out of a standstill. ■ Sang Jin Han

영문번역_정수은

 

Vol.20230302b | 한상진展 / HANSANGJIN / 韓相振 / mixed media

미명 微明

 

한상진展 / HANSANGJIN / 韓相振 / mixed media 

2021_0227 ▶ 2021_0310

 

한상진_무경계無境界-미명微明_2017-1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45.5cm_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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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안국동 7-1번지)

Tel. +82.(0)2.738.2745

www.gallerydam.comcafe.daum.net/gallerydam

 

 

한상진 작가는 2000년 초반에 「문명의 침실」 연작을 시작으로 2010년 전후 「응시와 명상」 연작을 제작 발표했으며 최근까지 드로잉과 회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사물의 지시성을 해체하는 작업을 진행해오고 있다. ● 2021년 3월, 갤러리 담에서 발표하는 한상진 개인전-미명 微明 은 백두대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여정 속에서 바라본 풍경 속의 풍경이며 낮과 밤의 경계를 그린 것이다. 소멸과 생성의 시간, 가을과 겨울의 경계에서, 겨울과 봄의 경계에서, 새벽놀이 스미는 강원도의 붉은 숲 그리고 해질녘 지리산의 봉우리에 호흡하는 미명의 순간들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풍경의 표정이자 고정된 지시성으로부터 벗어난 사물의 은유이다. 산은 멀어지면서 가까워지고, 침묵을 통해 말하며 자신을 감추는 방식으로 드러낸다. 그의 작업은 바깥에서 이뤄진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밖이란, 보이는것과 보여지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며, 내부와 외부가 만나는 장소이며 지시적인 언어의 내부가 열리는 자리임을 이야기한다. ● 이번 전시에는 전남 순천에서 작업한 painting & drawing으로 된 풍경 신작이 주로 등장할 예정이다. ■ 갤러리 담

 

 

한상진_무경계無境界-소멸消滅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45.5cm_2017

 

 

본인은 자기로부터 달라지는 풍경을 사유하는 작업을 진행해오고 있다. 삶 속에서 예술을 만나고 구체화시키려는 여정은 예술이 규정된 양식이나 형식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흐르고 변화하는 삶과 시간 속에서 발생하며 조우하는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따라서 본인은 풍경을 통해서 내가 나로부터 달라지는 지점을 통해 새로운 예술과 만나려 한다. 백두대간의 원시림과 산경(山經)은 이러한 맥락에서 본인에게 흥미로운 그림의 소재가 되어왔다.

 

 

한상진_무경계無境界-소멸消滅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3×72.7cm_2017

 

 

풍경은 잉여의 공간이다. 의미화 할 수 없는 빈 공간인 풍경(존재)은 부재로도 현전으로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의미를 통해 재현 불가능한 존재는 언어 이전에 있는 것이며 언어를 초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는 의미가 아니며 보편성으로도 특수성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빈 공간을 포함하고 있다. 빈 공간은 의미에 달라붙어 있는 잉여와 같은 것으로서 보이지는 않으나 존재하는 것이다. 잉여 혹은 나머지로서의 빈 공간은 닫혀있는 집합을 완결되지 못하도록 여는 힘이며 보이지 않는 이 힘은 재현이 불가능한 '움직임'이다. 의미로의 재현 혹은 환원 불가능성은 라캉(Jacques Lacan)에게 있어서 귀환하는 실재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친밀하고도 낯선 외상적인 실재와의 만남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상징화, 단순화 혹은 판타지를 통해 불가해한 빈 공간을 길들이며 적응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풍경을 그리는 것은 고전적 의미의 풍경화가 아니며 풍경과 내가 만남으로써 나를 여는 것이다.

 

 

한상진_미명微明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5×194.5cm_2017

 

한상진_무경계無境界-미명微明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5.5×53cm_2018

 

 

불가능한 것과의 만남은 바타이유(Georges Bataille)의 재현 불가능한 순간들처럼 불가해한 삶의 비밀들과 연계된다. 고통과 쾌락이 동시에 작동하는 희열의 공간인 쥬이상스(jouissance)는 파괴적이며 알 수 없는 죽음충동을 동반한다. 일상 속에 사물과 풍경을 뒤틀어 놓는 죽음 충동은 아름다움 이면의 그림자, 잃어버린 조화에 대한 애도를 상기하게 한다. 불가능한 애도의 멜랑콜리(melancholy)한 흔적은 유령과 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출현한다. 혼자 걷는 길 위에서, 텅 빈 풍경에서, 봄날의 재난 속에서, 친근한 것과의 만남 속에서, 불면의 밤 속에서, 다시 보는 책의 한 페이지에서 친밀하면서도 낯선 이와 같은 경험은 경험할 수 없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며 현실의 이중성 속에서만 이야기 될 수 있다. 의미로 종결되지 않는 죽음은 죽음이후에도 살아남아 유령처럼 출몰한다. 롤랑바르트(Roland Barthes)는 현실이 현실 이상이기라도 한 것처럼 사진이 사진을 넘어서는 지점을 이야기 한다. 본인에게 사진은 불가능한 기억과 회화를 이어주는 매개체가 된다. 이미지가 이미지 이상이 될 수 있으며 순간의 재현을 담은 재현적 원본의 지표(Index)를 넘어서는 잉여(punctum)를 몸의 회화를 통해서 만나는 것이다. 파여진 결들이 몸으로 스며들어 몸이 열리는 확장, 본인에게 풍경과 사물은 풍경의 결이 몸 안으로 들어오고 적요한 침묵의 틈으로 몸이 열리는 확장이다.

 

 

한상진_미명微明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45.5cm_2021

 

 

의미화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사물, 의미로부터 벗어난 몸은, 시야를 불가능하게 하는 일상 속의 풍경들에 매료되곤 한다. 흐릿한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서, 어른어른하게 굴곡진 비닐 너머의 자리에서, 눈 내리는 겨울 풍경 속에서, 흐린 날에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미명의 그늘진 풍경 속에서, 목마른 바스락거림 속에서, 눈물 나는 날의 걷기 속에서... 과거의 희미한 기억과 감각을 소환하는 설명할 수 없는 흔적 혹은 얼룩은 풍경 속에 파고 들어와 풍경을 낯설게 한다.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타자(풍경), 타자에게 열리는 나의 몸은 구분이 불가능하다. 안과 밖, 내부와 외부는 안이자 바깥이며 바깥이자 안이 된다. 몸은 여러 개의 구멍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타자를 향해 열릴 때 유한한 몸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삶속에서 안과 밖의 경계는 사라지며 풍경이라는 타자를 환대하는 나는 풍경 속에서 살아있는 나일 수 있다.

 

 

한상진_미명微明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45.5cm_2021

 

 

본인은 무경계(NO-BOUNDARY), 소요(逍遙)-흐르는 풍경이라는 무위(無爲)의 행위(行爲)를 통해 작업을 진행해오고 있다. 소요는 목적 없이 천천히 걷는 시간이며, 흔적이라는 타자를 환대하는 행위이자 주체를 여는 것이다. 그리고 본인은 소요(逍遙)를 무위(無爲)를 향한 열림과 고정된 이념(지시성)으로부터 떠남, 타자를 향한 노출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한다. 소요는 한가로이 노니는 것이기도 하지만 수치나 의미화로 환원 가능한 일과 분리된 또 다른 생산, 도래할 것으로서의 생산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노장의 핵심개념이기도 한 소요와 무위로서의 행위는 자연스러움 안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행위다. 따라서 본인의 작품은 소요를 통한 존재론적인 사유-서양의 사유와 동양의 사유가 만나는 자리에서 발생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소요는 본인의 작품이 생성되는 자리이며 오늘날의 세계가 필요로 하는 빈 공간이자 멈춤, 중지와 같은 개념들과 연관된다고 본다. 자본의 전체성, 즉 수치화를 통해 모든 존재를 의미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보는 자본의 힘은 폭력적이다. 그러나 의미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차이, 자기로부터 달라지는 자기 차이는 오디세우스(Odysseus)의 항해처럼 의미의 집으로 복귀하는 충만함의 원운동이 아니다. 전통적인 서양사유에 있어서 떠남은 경험을 통해 의미를 얻고 자아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확립하는 환원적인 내재성으로의 복귀이다. 그러나 소요는 최종적인 목적을 전제로 향해 나아가는 지양(止揚)이 아니며 무위(無爲)를 향한 길 떠남이다. 본인에게 소요, 응시와 명상은 치유(Healing)나 다듬어짐, 정화됨을 목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핍을 충족으로 보완하려는 의미론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도 종속되지 않는 존재로서의 떠남이며, 의미의 장소로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 즉, 귀향의 불가능성을 포함하는 존재론적인 이끌림이다. ■ 한상진

 

 

Vol.20210227a | 한상진展 / HANSANGJIN / 韓相振 / mixed media




다큐멘터리사진가 남 준씨의 '갤러리 시이'초대전 ‘무경계(無經界)’ 개막식이

지난 16일 오후5시, 신촌 홍대부근에 위치한 ‘갤러리 사이’[02-323-0308]에서 열렸다.

난, 옛날 사진들을 급히 정리해야 할 일이 생겨, 요즘 일에 쫓겨 산다.

가급적 외출을 자제하지만, 작정한 사진전이라 모처럼 나들이를 한 것이다. 

지하철 홍대 역에서 구자호 선생을 만났다. 주말이라 사람들에 끼어 밀려 나와야 했다.

번잡함에 촌놈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내 몸은 기상측후소나 마찬가지다.

비가 오려 그랬는지 아침부터 온 몸이 쑤셨는데, 진짜 비가 내린 것이다.

전시장에는 작가를 비롯하여 최은경관장, 미술평론가 홍경한씨,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

구자호, 엄상빈, 김남진, 성남훈, 강제욱, 김영호, 정영신, 김재훈, 유별남씨 등

많은 사진가들이 함께해 전시를 축하하고 있었다.

전시된 작품들은 작가가 티베트 히말라야 산맥의 오지에 들어가 찍은 사진이었다,

종교적 신앙심 하나로 살아가는 원주민의 전통과 문화적 풍습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범접하기 힘든 오지를 여행 삼아 찍은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하며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에 나오는 장면처럼, 오체투지로 찍은 것이다,


그리고 예술을 모방한 비틀어진 사진이 아니라, 정석의 앵글로 참 잘 찍었더라.

직설적인 그의 사진언어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인간의 존재 의미를 일깨우고 있었다.

생생하게 드러난 어린이 눈동자에서 그들의 현실과 꿈을 함께 엿볼 수 있었다.

뒤풀이 장소로 옮겨서는 사진계 많은 뒷이야기들을 들었다.

유별남씨는 요즘 물의를 일으킨 장국현사진전을 반대하는 일인시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시위 참가자들이 연일 이어지고, 전시 작가는 '예술의 전당'전시장에 뒷구멍으로 들어가

뒷구멍으로 나온다는데, 쥐새끼같은 부끄러운 전시를 왜 하는지 모르겠다.

구자호 선생은 신문의 위기를 말하기도 했다.
10년내에 모든 신문사들이 사라진다지만, 벌써 신문사 교열부는 없어졌다는 것이다.

사진부는 물론 취재 기자들까지 외주업체에 위탁할 처지이고, 심지어 사무실에 컴퓨터가 없는

언론사도 있다는 것이다. 모든 기자가 노트북이나 핸드폰으로 현장에서 직접 일하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숨겨진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조선일보' 사진부장에서 퇴임한 그가 지난 번 '대구사진비엔날레' 조직위원장을 맡을 때 일이란다.

조선일보에 비엔날레 기사가 나지 않아, 4면으로 된 색션지를 만들어 신문에 나오게 하였다고 한다.

담당기자는 물론 문화부장도 모르는 대구사진비엔날레 특집이 나온 것이다.

세상, 참 재미있는 일이 너무 많다.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

사진,글/ 조문호








"내면으로 건져 올린 삶의 숨결, 시선에 덧대다."



미술평론가  홍경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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