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오면 쪽방촌은 추위보다 화재가 무섭다.

추위를 막는 대부분 물품이 불이 붙으면 쉽게 꺼지지 않는 소재인데다,

주방이 없어 방 안에서 부탄가스로 밥을 한다.

전선도 대부분 노후화되어 아슬아슬한데다, 끼고 사는 전기장판도 너무 오래되어 위험하다.

 

방과 방 사이 사람 한 명이 들어가기 어려울 만큼 다닥다닥 붙은

쪽방 구조 자체가 불에 취약한데다 불이 나도 소방차가 진입하기도 어렵다.

동자동 쪽방촌은 해마다 화재로 골머리를 앓는데, 사흘 전에도 불이나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으나, 재발을 막을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동자동 재개발을 계속 미루는 것도, 화재로 모두 사라지기만 기다리는 건가?

 

나 역시 정선 살 때 옆집에서 옮겨 붙은 불로 모든 걸 태웠지만, 아산으로 옮기고 나서도 불을 끼고 산다.

장작 타 들어 가는 불길이 좋아 하염없이 지켜보는 것이 낙이라면 낙인데,

활활 타오르다 한 줌의 재로 사는지는 것을 보면 마치 인생을 보는 듯 하다,

집에 손님만 오면 불을 피워 고기나 고구마를 구워 먹는데, 문제는 태울 나무가 넉넉지 않다는 데 있다.

 

지난 목요일도 서둘러 아산으로 내려가 필요한 생필품을 사려고 '하나로마트'부터 들렸는데,

완주의 김종신씨가 백암길 전시장에 와 있다는 연락을 했다.

부리나케 달려갔더니 부안의 김영숙씨와 같이 와 있었다.

 

땔감이 부족해 걱정했는데, 캠핑 카에 있던 참나무부터 꺼내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다행히 나무가 적게 들어가는 화덕을 사용해 한숨 돌렸다.

아담한 불길에 삼겹살과 고구마를 구워 술판을 벌였으나, 나는 안주만 축낼 팔자가 되고 말았다.

20여일 전부터 금주를 시작했으나 전시 중 딱 한 차례 유혹에 못 이겨 술을 마셨는데,

술이 들어가니 아니나 다를까 음담패설을 즐기던 예전 버릇이 도졌다.

그 이후로 술을 마시면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다짐했으니, 그들의 건배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술 고문이나 다름 없으나, 기어이 떨쳐 낼것을 다짐하며 죄 없는 담배만 피워댔다.

유일하게 낄낄거리며 웃을 수 있던 술을 떠나보내는 마음이 애인을 잃은 듯 허전한데,

블루투스에서는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 악장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반가운 벗들과 옛 이야기 나누는 정겨움에 위안받고,

타오르는 불길에 음악 날리는 행복감에 젖었다.

하늘에 걸린 초승달 또한 얼마나 매혹적인지, 예쁜 여인네 눈웃음을 닮았다.

김영숙씨는 김종신씨 술 덜 먹이기 위해 마시다 보니 주량이 늘었다며, 연이어 술 잔을 부딪혔다.

홀 애비와 과부가 서로 사랑하며 의지하지만, 자식들 눈치 보여 결혼 못한다니, 답답한 분들이다.

자식들이 평생 같이 살아줄 것 같은가?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는데, 집으로 돌아가던 마을버스가 멈추며 운전기사 김재돌씨가 내렸다.

유달리 사진을 좋아하는 분이라 반겼는데, 운전하는 애주가에게 술을 권할 수 없어 난감했다.

꼬불쳐 둔 대마불사주를 한 잔만 따라 주었는데, 단숨에 들이킨 후,

고기 던져 주기를 기다리며 바라보는 들고양이처럼 애절한 눈길을 보냈다.

건달로 살아오다 우연히 마을버스 기사 자리를 얻어 살아가는,

지난 이야기를 하염없이 풀어 대는 바람에 분위기를 깨버렸다.

 

술자리가 파한 후 김종신씨 내외는 캠핑 카에 자러 갔으나,

잠이 오지 않아 첫닭이 울 때까지 뒤척이다 늦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떠 보니 해가 중천에 걸렸고, 김종신씨도 그때 사 일어나 떠날 준비를 했다.

선우가 끓여 놓은 시락국으로 속 달래며 아쉬운 작별을 했다.

 

요즘은 텃밭의 채소가 다 자라 나무하는 것이 일이다.

주변에서 주워 사용하던 나무가 바닥나, 당장 급한 일은 땔감을 구해야 했다.

 

현충사 둘레길로 이어진 산길로 차를 끌고 가 넘어진 소나무 가지를

조그만 톱으로 잘라 오기란 만만찮았다.

 

그렇지만, 모닥불에 둘러앉아 보내는 행복한 시간은,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두 차례나 오르내리며 정신 없이 실어 나른 후, 일을 끝 내려는데 톱이 보이지 않았다,

다닌 곳을 삼십 분 가량 찾아 헤매다, 포기하고 차로 돌아와 보니 짐칸 나무에 걸려 있지 않겠는가?

어이 없지만, 이런 치매 현상이 어제오늘 만의 일도 아니다.

 

실어 온 나무도 제법 많은 것 같았으나,

잘라 정리해보니 두세 차례 땔거리밖에 되지 않지만, 보리 슝년에 이기 어디고?

 

마당을 청소하며 돌아보니 오래전 김창복씨가 옮겨 심은 국화가 이제 사 봉우리를 맺기 시작했다.

 

서리 올 때 핀다는 말은 들었으나, 너무 반갑고 고마웠다.

모든 꽃이 시드는 늦가을의 아쉬움을 이 국화가 달래 주었다.

마치, 너도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는 듯...

 

사진, 글 / 조문호

고영준씨 자당 임화녀씨(83세)가 지난 10월31일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평소에 지병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저녁 식사를 한 후, 속이 매스꺼워 체한 줄 알았다고 한다.

날이 밝으면 병원 갈 작정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병원 가려다 심경경색으로 운명하셨단다.

 

처음 119를 불렀더라면 회생하실 수 있었을텐데, 얼마나 애석하겠는가?

멀리 떨어져 사는 자식의 입장으로서는 통탄 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비보를 받은 상주 고영준씨가 태국에서 돌아오는 일도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하루에 한 번밖에 없는 비행기를 어렵사리 탔으나, 검역으로 공항에 묶일 수밖에 없었다.

복잡한 절차를 마치고 장례식장을 찾아오니, 발인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사람 모이는 곳은 잘 가지 않지만, 고영준씨 상가에는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고영준씨는 오래 전부터 동생처럼 지낸 가까운 지기인데다, 자상한 모친을 두 차례나 뵌 적이 있었다.

 

부음을 받은 지난 1일 오후 일곱시 무렵에서야 장례식장이 있는 상계백병원으로 달려갔는데,

상주 역시 늦게 장례식장에 도착해 염하러 갔다며 자리를 비웠다.

 

그런데, 고영준씨 부친이 살아계신다는 것도 그 날 처음 알았다.

평소 가족이야기를 잘 하지 않아 홀어머니 슬하에 자란 줄만 알았다.

장례장식장에서 아버님 고동석씨를 처음 뵙게 되었는데,

갑자기 당한 사연에 기가 막히는 지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즉각 병원에 못 데려간 것이 얼마나 한이 되며,

혼자 여생을 보낼 일은 또 얼마나 막막하겠는가?

 

더구나 아버님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국가유공자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어야 하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 유골이 다른 묘역에서 기다려야 된단다.

돌아가신 어머님보다 살아계신 아버님의 여생이 더 가슴 아팠다.

 

부디 어머님의 극락왕생과 함께 아버님의 편안한 여생을 빕니다.

 

발인 ; 2020년 11월 2일 오전8시

장소 : 수원연화장

 

배우자 : 고동석,

아들 : 고영준, 고영재, 고영기

며느리 : 한선혜, 이유영

손 : 고병수, 고병욱, 고수연

 

장례식장에는 오래전에 함께 했던 사우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인사동에 있던 ‘꽃나라’라는 흑백현상소를 매개로 어지간히 어울려 다닌 벗들이다.

정영신씨를 비롯하여 하상일, 정용선, 이혜순, 김종신, 목길순씨가 차례대로 나타났는데,

옛날에는 ‘진우회’가 아니라 ‘진로회’라 부를 만큼 애주가들이 많은 사진모임이기도 했다.

 

그런데 독신녀로 살아 온 이혜순씨가 몇 년 전부터 사진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얼마나 사진에 대한 한이 많았으면, 남아 있는 사진은 물론 필름까지 모두 불태웠겟는가?

그 긴 세월 동안 기록해 온 숱한 자료들이 전문가의 검증 한번 없이 사라진 것이다.

 

어디, 이혜순씨만의 일이겠는가?

천덕꾸러기로 처 박혀 있던 필름들이 당사자가 죽으면 대개 버려진다는 사실이다.

소중한 사료들이 안타깝게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정부와 민간기구가 협력하는 사진아카이빙기구 설립이 절실하다.

 

김종신씨는 캠핑카를 마련하여 전국 유랑에 나섰다고 했다.

숙식을 해결해 주는 캠핑카는 대개의 사진가들이 꿈꾸던 선망의 차가 아니던가?

장례식장 밖에 세워두었다기에, 문상이 끝 난 후 차 구경하러 갔다.

 

6천만원이라는 차 값에 비해 편의성이 좀 떨어지는데, 

침대를 줄여서라도 일할 수 있는 집무공간을 늘렸으면 좋겠다.

전국을 돌아다니는 사진가들에게 꼭 필요한 차였다.

 

80년대 초반 ‘진우회’에서 활동하던 맴버들이 이제 세상을 떠난 분도 더러 있고,

소식 끊긴 사우가 많았다. 연락되는 사우들도 이제 퇴역이 되어 뒷전으로 밀려났다.

다들 건강을 잘 지켜 최후의 일각까지 세상을 기록했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신랑 고병수가 엄청 잘 생겼더라.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노래도 가수 빰 치데.
예쁜 소라 양을 만나 입이 찢어지는데, 솔직히 사랑 좀 받겠더라.
‘병수야! 부디 행복하게 잘 살아라.’





그런데, 병수보다 아버지 고영준 이야기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겠다.
병수야 어린 시절 한두 번 본 게 전부지만, 고영준은 40년 지기다.
79년 쯤 만났는데, 그는 사진가이기 전에 ‘사협’의 반세기를 지켜 본 증인이다.






‘사협’의 총무라면 하나의 권력라인이다.
총무에서 사무국장으로 바꾸어가며 이사장을 좌지우지했던
웃기는 사협의 세월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감방까지 오가며..






세상에! 이사장 바뀌었다고, 먹고 사는 총무 목을 자르는 놈이 어디 있노?

이명복과 이명박이 비슷한 과다.
오죽하면, 옆 사무실에 있던 ‘예총’소속 ‘연예인협회’ 사무국에서 일했겠는가?






고영준은 천성이 못된 짓을 못한다. 그러니 못된 패거리들과 조가 맞을 수 없다.
대신 너무 착해 빠져, 아내 한선혜씨 고생깨나 시켰다.
서울예전 사진과를 나온 아내 한선혜씨는 사랑 때문에 하던 일을 포기한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상이다.
초창기에 본 한선혜씨의 사진은, 솔직히 고영준 사진보다 한 수 위였는데 말이다.






고영준씨는 일찍부터 ‘사협’에서 총무 일을 오래 한 덕에,
‘환경사진가회’나 ‘현대사진가회’의 총무 일도 도맡아 했다.
사람 좋은 덕에 그의 주변에는 항상 사람이 몰린다.





당시에는 ‘예총’에 소속된 ‘사협’ 사무실도,
신희순씨가 운영한 ‘꽃나라’라는 흑백현상소도 모두 인사동에 있었다.
자주 만나다 보니, 사진동아리도 만들었는데,
이름 하여 ‘眞友會’라고 했으나 대개 ‘진로회’라 불렀다. 




 


돌아가신 양은환, 신회순씨를 비롯하여 유성준, 정용선, 하상일, 고영준, 정영신씨
등 10여명 남짓 되었으나, 뒤늦게 들어 온 분들은 헷갈려 정리가 잘 안 된다.
그 중 사진으로 돈 번 친구는 강남에서 폐션 사진 한 정용선씨가 유일하다.






어떤 특정한 색깔 없는 친목단체였기에, 사진 기억보다 술 마신 기억이 더 많다.
그 모임의 중심에도 언제든 고영준씨가 있었지만, 어느 날 홀연히 털고 일어난 것이다.
갑자기 찾아온 빨간 불에, 그 좋아하던 술과 담배 헌신짝처럼 버려 버렸다.
고생만 죽도록 한 사진판을 뒤로하고, 태국에서 사업가로 변신한 것이다.






82년 서울 올라 왔을 때, 잊을 수 없는 추억 하나 있다.
취직하기 위해 면접 보러 간다니까, 면접 볼 사람이 그 꼴로 어떻게 가냐며
카드를 빌려 준, 그런 위인이다. 






본래부터 정장하고는 거리가 멀지만,
그 따뜻한 마음에 촌놈처럼 빼입고, 면접 보러 간일도 있다.
그러나 매사가 쉽지 않았다. 사진 때문에 잘 나가던 장사도 날린 놈인데,
차라리 거지로 살며 마음대로 사진 찍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가족에게는 미안하지만, 꼴리는 대로 살았으니, 아무 여한은 없다.






고병수 장가가는 날에 갑자기 삼천포로 빠진 것은 고영준과의 만남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다.
그날 결혼식장에 모인 분들이 대개 ‘진우회’와 관련 된 오래된 사우였다.
하상일 선생의 오붓한 가족을 비롯하여 유성준, 정용선, 이혜순, 김종신, 목길순,
정철균, 배창완, 우숙자, 최성규, 정영신, 김흥묵씨 등 많은 분들이 어울렸다.
옛날 ‘한국일보’자리의 ‘무드블랑’ 예식장에서 한 잔 했으나, 이차는 인사동이었다.






옛날 ‘꽃나라’ 자리에 가본 후, ‘유목민’에서 한 잔 더 하려 했으나, 생각을 잘 못했다.
주말의 인사동은 관광객에게 뺏긴지 오래라, 단골집 모두가 문을 닫아 버렸다.
골목은 텅텅 비어 허허로웠고, 큰 거리만 관광객들로 왁자지껄했다.
그들은 밥도 술도 먹지 않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먹을 것을 싸들고 다닐까?






사람이 많으니 한 사람 찾고 나면, 한 사람 잃어버리는 돼지 가족처럼 돌아다니다
간신히 자리 잡은 곳이 인사동 ‘마중’이었다.





정용선씨가 ‘화요’를 비롯한 기똥 찬 술로 한 턱 쏜다지만, 더 이상 마실 수가 없었다.
사실은 축의금을 부탁하고, 전 날 강진 가기로 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될 것 같았다.
날이면 날마다 만나는 것도 아니고, 이번엔 결혼식이라 한선혜씨 까지 오지 않았는가?
그래서 결혼식만 끝나면, 출발할 작정으로 차를 끌고 나온 것이다.






‘진로회’답게 삼차를 간다기에 도망쳤지만, 주차비 문제로 또 씨름했다.
요즘은 카드가 없으면, 주차도 못하는 지랄 같은 세상이다.

하기야! 카드 내지 않고 현금 내니, 탈세 조장한다는 양반도 있더라.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중국을 더나드는 멋쟁이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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