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세계 9월호

 

 

 

 

 

 

 


 

 

목판화가 정비파선생의 ‘국토’전이 끝나는 지난 20일, ‘아라아트’전시장을 다시 찾았다.

작품들에 대한 여운이 남아 철수하기 전에 다시 한 번 감회를 맛보기 위해서다.

전시장 한 가운데 놓인 탁자에 앉아 한 시간 넘게 사방에 걸린 작품들을 바라보았다.

우리나라 국토의 혈맥들을 섬뜩하게 드러낸 작품들은 장엄함에 앞서 슬픈 비애감에 빠져들게 했다.

6미터나 되는 ‘백두대간’ 작품의 주름 잡힌 산 줄기 줄기에서 우리민족의 통한을 읽었기 때문이다.

한 쪽 벽면에는 외세나 다름없는 독수리 떼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부리를 들이대고 있었고,

또 한 쪽에는 피 냄새 맡은 까마귀 떼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바로 우리 국토가 겪은 피의 근대사였다.

그 산골짜기 골골을 칼창으로 파내며 분노했던 작가의 투혼이 느껴졌다.

나는 미술평론가도 아니고, 작가와의 친분도 그리 깊지 않다.
잘은 모르지만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은 한다.

들은 바로는 정비파선생이 이 작품들을 제작하기 위해 수도승처럼 10년 동안 외부와 연을 끊은 채,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을 했다고 한다.  때로는 일이 풀리지 않아 목 놓아 운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란다.

도대체 그런 작가가 우리나라에 몇 명이나 되겠는가?

나는 많은 예술가들을 만나며 작품보다 그들의 인간성을 더 유심히 지켜보았다.

아무리 재주 좋아 유명세를 타는 작가라도 인간성이 돼먹지 않으면 그만이다.

선배들 말씀처럼 “작품 이전에 올바른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좋은 작가들은 참 많다. 그러나 잔머리 쓰는 작가들은 오래지 않아 들통 난다.
온 몸을 바치는 작가들도 많다. 그도 정신적 바탕이 깔리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정비파씨를 처음 만난 것은 올 6월 ‘아라아트’광복70주년 특별전을 기획하며

‘아라아트’ 대표 김명성씨와 ‘제주4,3연구소’ 김상철이사장이 함께 한 자리였다.

오래 전 전시장에서 한 두 차례 지나친 적은 있으나, 같이한 자리는 없었다.

그가 스마트폰으로 보여주는 작품 이미지들에 일단 놀랐고,

대부분이 가로 6미터나 되는 대작이라기에 믿어지지 않았다.

 

기다리던 7월15일, 그의 ‘국토’전 개막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심지어 사람이 무섭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떻게 그렇게 해 낼 수 있단 말인가? 대단한 감동이었다.

내가 만약 재벌이라면 그 작품들이 걸린 전시장까지 통째로 사 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전시 끝나는 37일 동안 가까이서 멀리서 그를 지켜본 것이다.

시쳇말로 뒷조사를 한 것이다. 그의 인간성에 대해...

정비파선생의 군 복무시절, 공윤희씨가 해당 부대 직속장교로 재직하였기에 그를 잘 알았다.

그래서 그의 사람 됨됨을 듣게 된 것이다.

 

나는 평소 전시기간동안 작가가 얼마만큼 전시장을 지키는지를 보며 그 작업에 쏟아 부은 열정의 부피를 가늠한다.

이 일 저 일 하는 일이 많은 사람은 한 곳에 쏟아 넣을 열정이 상대적으로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도 아니고 경주에 사는 그를 인사동 나올 때마다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신의도 있었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전시 끝나기가 무섭게 짐 싸들고 가기 바쁘지만,

전시가 끝나는 마지막 날, 신세진 분과 가까운 지인들을 불러 뒤풀이를 한 번 더했다.

마지막 날의 뒤풀이도 전례가 없는 일이지만, 작품은 물론 크기도 한국판화사의 새로운 기록이었다.

그 날 전시장에서 작가 내외와 함께 공윤희, 이종률, 장경호, 최혁배 변호사를 만났다.
인사동 ‘유목민’에서 열린 뒤풀이에는 전시장에서 만난 분들을 물론 조해인, 박찬함, 김상현, 조준영, 정영신씨 등

20여명이 모여 성공적인 전시를 축하하며 여흥을 즐겼다.

작가 정비파선생을 알게 된 것은 올해 최고의 인연이었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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