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경북 고령장


“햇볕에 말린 고추 때깔 좀 보소 , 톡 쏘는 매븐 맛이 쥑인다카이”

조선시대 장기리에 형성됐다가
구한말 대홍수 인해 지산리로 옮겨와
인근 큰 장 없어 성주·합천서도 찾아
건고추 등 농산물 흥정 ‘시끌벅적’
쫄깃한 식감 ‘수구레국밥’ 별미




 손수레에 토란대를 가득 실은 이씨 할머니(73)가 희미한 장터 불빛 속으로 들어온다. 새벽 3시 무렵 전등이 일제히 켜지자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한다. 경운기 가득 실려 있던 고추 포대를 내려놓자 도매상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포대를 열어젖히고 맛을 본다. 5시가 지나자 고추를 비롯해 고구마·호박·땅콩 등으로 장터는 붉고 푸른 밭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모습이 된다. 농민들의 땀으로 만들어진 풍족한 농산물들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며 새벽을 깨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햇볕에 말린 내 고추 때깔 좀 보소. 하루에도 열일곱번이나 변하는 기 고추 아인기요. 혀에 닿으면 달달하고 톡 쏘는 매븐(매운) 맛이 쥑인다카이.”

 경운기 가득 고추를 싣고 나온 심씨 할아버지(82)의 자랑이다. 저울 눈금이 집에서 단 것과 다르다며 흥정하는 할아버지 목소리가 장바닥을 흥건히 적신다.

 대가야의 숨결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경북 고령은 곳곳에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다. 또 질 좋은 고령토가 많아 우리나라 최초로 가야토기를 재현해낸 곳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에 고령읍 장기리에 형성된 고령장은 구한말 대홍수로 인해 지금의 자리인 고령읍 지산리로 옮겨왔다. 4일과 9일이 들어 있는 날이면 장이 열리는데 인근에 큰 장이 없어 장날이면 인접한 경북 성주, 대구 달성, 경남 합천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온다. 우곡수박·쌍림딸기·개진감자·성산참외·덕곡토마토 같은 고령 지방 특산품이 장터 가득 펼쳐지기 때문이다. 향부자와 천궁 등의 약용작물, 은은하고 순한 민속주인 ‘국청’, 고령읍 본관리의 향토주인 ‘본관동스무주(本館洞二十日酒)’도 유명하다.

 운수면에서 토란대와 호박을 갖고 나온 김씨(65)와 부인은 달려드는 중간상들을 물리치고 “비료값이라도 건지려면 직접 팔 수밖에 없다”며 자리를 잡고는 한마디 건넨다. “운수벼루 압니꺼? 대평리에서 캔 원석으로 만드는데, 먹도 잘 갈리고 마르지도 않고 글 쓰마(쓰면) 붓도 잘 나가는…. 내가 거기 산다 아입니꺼.” 토란대 팔 생각보다는 마을 자랑에 열을 올리는 김씨의 웃음소리에 논에서 벼 익어가는 냄새가 물씬 풍긴다.

 장터에서 3대에 걸쳐 55년 동안 고령대장간을 이어오는 이씨 부자도 만나볼 수 있었다. “여가 어릴 때부터 울 아부지 따라 일한 데 아이가.” 반세기 동안 일해온 대장간을 집안의 성전으로 생각하는 이상철씨(70)는 지금도 새벽 3시30분이면 어김없이 불을 지펴 하루를 시작한다. 이씨는 “쇠를 다루는 데는 담금질이 제일 중요해. 쪼매마 한눈 팔면 고마 못 쓴다카이” 하며 아들 이준희씨(40)가 구슬땀을 흘리며 낫 두드리는 모습을 찬찬히 내려다본다.

 고령장에서 맛볼 수 있는 별미 중 하나가 수구레(소의 가죽 안쪽의 쫄깃한 아교질 부위)를 넣고 끓인 수구레국밥. 이 고장의 옛 정취를 느낄 수 있어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가을 수확철이 되면 장바닥은 한해 동안 몸과 마음을 바쳐 가꾸고 거둔 농산물 흥정하는 소리로 시끌벅적하다. 지천으로 널린 고추 사이로 만원짜리 지폐가 흔한 종이처럼 오간다. “고추 시세가 좋지 않지만 빌린 농자금 때문에 조금이라도 건지려고 나왔는데 전국에서 고령 고추값이 제일 싸서 걱정”이라는 게 장씨 할아버지(78)의 하소연이다.

 주전자에 미꾸라지를 넣어온 김씨 할머니(87)는 가지와 오이·논우렁·토란으로 좌판을 꾸몄다. 40년째 고령장에 나온다는 할머니가 마수걸이로 미꾸라지 만원어치를 팔았다. 하얀 이가 귀에 걸릴 듯 좋아하던 할머니는 고쟁이 속에서 복주머니를 꺼내 돈을 넣더니 다시 고무줄로 묶는다. 호박 한덩이와 콩 두어되 가지고 사람 만나는 재미로 장에 마실 나오던 옛날 할머니들의 모습을 점점 보기 어렵게 된 게 요즘 시골 장터란 생각에 마음이 조금 쓸쓸해진다.

 



 

 

 

A. 아이구! 이기 누고? 얼마만이고, 어데 아푼데는 없나?
B. 와 아푼데가 없건노. 인자 허리가 아파서 마이 댕기지도 몬한다.
A. 여 좀 안자봐라.
B. 조카넘이 차에 기다려 호메이 사가지고 퍼뜩 가야된다.
A. 쯔쯔.. 인자 언제 보것노이?
B. 그래, 사는기 뭐라고...

8월29일 경북 고령장에서 만난 두 어머니의 짧은 대화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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