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 미술시평]

좌) 70년대 중반의 필자와 강용대(오른쪽) 우) 강용대, 미완성 우주, 연대미상, 한지, 먹, 단청, 아크릴 73×143cm


‘별이 된 아이’, 화가 강용대(1953-97).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흔히 그렇게 부른다. 작은 키에 가볍고 날렵한 몸매, 검도로 단련된 그는 80년대 초반, 이대 입구로 넘어가는 굴레방다리 대로변에서 6척 장신의 거한을 무너뜨렸다. 이슥한 밤에 근처의 카페 술자리에서 여성을 괴롭히던 불량배를 말리다 시비가 붙자 벌어진 순식간의 일이다. 이때, 그가 원숭이처럼 빠른 동작으로 붕 떠서 거한의 머리를 양팔로 감싸자, 마치 대나무가 휘듯 그 큰 몸이 무너지던 장면을 지금도 나는 선명히 기억한다.

불의를 참지 못하고 세상에 초연하며, 예술 하는 한 줌의 벗들과 사귀다 사십 대 중반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강용대, 나는 그를 가리켜 이 시대의 마지막 ‘아웃사이더’요, ‘로맨티스트’로 기억하고 싶다. 1981년, ‘대성리’전 창립 멤버이기도 한 그는 막걸리에 취해 주흥이 도도해지면 정지용 시인의 시 <향수(鄕愁)>를 카랑카랑한 높은 톤의 목소리로 낭송을 하곤 했다.

가진 거라곤 빈손밖에 없었지만, 도전과 저항 정신에 충일했던 20대 후반의 나이였다. 우리는 북풍이 매섭게 몰아치는 대성리 화랑포 강변의 눈밭에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그렇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웠다.

간경화로 세상을 떠난 강용대는 죽기 전에 은밀히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따라서 1997년 금산갤러리에서 열린 초대전은 졸지에 유작전이 되고 말았다. 당시 조선일보를 비롯한 주요 일간지들이 문화면 톱으로 그의 기구한 삶과 예술을 소개해서 화제가 되었다.

‘별이 된 아이’ 화가 강용대는 그렇게 우리의 곁을 떠나갔지만, 별을 소재로 한 주옥같은 500여 점의 작품들이 남아 우리를 위로해 준다. 한지의 뒷면에 여러 차례에 걸쳐 먹물을 입히는 ‘배압법(背壓法)’을 기본으로 한 그의 그림은 요즈음에 한창 재조명 바람이 불고 있는 수묵화의 입장에서도 다시 생각해 봄 직하다. 그는 검은색의 짙은 먹빛에 화려한 단청의 무수한 점들을 찍었다. 그것들은 한편으로 우주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온갖 꽃들이 화려하게 핀 화단 같기도 했다. 그는 그 그림들에 각각 다른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주로 별자리 이름과 관련된 것이었다. 접시꽃좌, 감자좌, 연꽃좌 등 상상 속의 별자리들을 그렸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서양화 전공)를 졸업한 그가, 전위미술 단체 ‘S,T’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다 훌쩍 유럽으로 떠나간 게 80년대 중반이었다. 그는 유럽, 캐나다, 동남아 등지를 주유천하 한 후에 국내에 정착하려 했으나, 제도권 미술계는 이미 저만치 물러나 있었다. 오랜 화우들은 그를 점차 멀리하기 시작했고, 그는 점차 마음이 통하는 몇몇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기행을 벌이고 예술을 논하는 길거리 예술가가 돼 갔다. 그는 어느 날 철모를 쓰고 인사동 길거리에서 바나나를 팔기도 했다. 신문지에 바나나 몇 송이를 놓고 한 개에 10원씩 받았다. 10원짜리 잔돈이 없어 백 원을 내면 안 된다고 했다. “왜? 그럼 밑지잖아?” 하고 물으면 “세상에 밑지는 놈도 있어야 한다!”고 일갈했다.

세상에 밑지는 놈도 있어야 한다! 그가 죽은 지 이십여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가 남긴 이 말이 귓가에 쟁쟁하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밑지지 않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 밑지지 않기 위해서는 남에게 덤터기를 씌우거나 때로는 야바위꾼이 돼야 한다. 미술계로 말하면 각종 공모에서 당당히 실력을 겨루기보다는 편법과 야합에 편승하며, 아트페어 참가를 둘러싼 일부 화상과 작가 간의 갈등 따위가 이에 해당한다. 벼룩의 간을 내먹는다고 가난한 작가나 기획자의 등을 치는 미술 관계자들은 우리 주변에 또 얼마나 많은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오로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며, 우리는 그렇게 천민 자본주의의 시대를 속절없이 살아야 하는 것이다.

[서울아트가이드 2020년2월호 스크랩]


아래 사진은 조문호 사진첩에서 옮겼다


인사동 거리에서 한 잔하는 모습, 오른쪽부터 이청운, 강용대,

고 민병산선생 49제에서 찍은사진 / 앞줄에 돌아가신 박이엽선생과 강용대의 모습도 보인다.

신동여 결혼식에 참석한 우인들 / 왼쪽에서 두번째가 강용대

김용문씨의 대학로 옹관장전에서 강용대 포퍼먼스: 

옹관장전에서 왜 강용대는 상여에 오르는 퍼포먼스를 했을까요?


화폐질서를 어지럽힌 화가


“별을 그리다 별이 된 화가 강용대가 어느 날 인사동 거리에서 동전 바꾸기 퍼포먼스를 한 적이 있다.

어디서 돈이 좀 생겼는지 모두 십 원짜리 동전으로 바꾸어 길거리에서 좌판을 벌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일원짜리 동전이 나오면 십원짜리 동전과 맞 바꾸어주는 돈 장사를 한 것이다.

행인들이 모두들 의아해하면서도 일원짜리 찾느라 난리를 피웠다.

그는 주머니에 가득한 일원짜리 동전으로 소주 한 병을 샀다.

투덜거리는 구멍가게 주인의 짜증도 마다하고, 큰돈이나 번 것처럼 낄낄거리며 안주도 없이 나팔 불었다.”


-조문호 사진집 ‘인사동이야기’에서-









사람이 태어나, 언젠가는 꽃잎처럼 떨어져 사라진다.

그러나 죽음보다 더 서러운 것은 쉽게 잊혀진다는 것이다.





힘든 세상사, 어쩌면 죽음 자체가 축복일 수도 있겠다.

난, 초상집이 잔치마당이 되어야 한다고 여긴다.

문상객의 슬픈 모습보다 웃는 모습이 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웃을 수 있는 영정사진까지 만들어 두었다.





죽음이란 떠나가는 망자보다,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이다.
슬픔도 잠시 뿐, 쉽게 잊어버리고 좀처럼 기억하지 않는다는 게 더 슬프다.





흐르는 세월에 잊혀지는 것이야 어쩔 수 없겠으나, 너무 빨리 잊어버린다.
아무리 좋아했던 사람도 조금만 지나면 까마득하게 잊혀진다.

요즘 사람들은 모두 건망증 환자다.






얼마 전, 인사동을 사랑한, 한 여인이 꽃잎처럼 떨어졌다.
그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는 모르지만,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었다.
다 가난이 원죄다. 절망의 벽이 너무 높았던 모양이다.






삶을 끝낸 것보다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은, 모두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무관심한 것은 쪽방촌에 사는 빈민들도 마찬가지다. 강아지가 죽어도 그러지는 않는다.

가족들이 방관하는 시신은 냉동실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다, 태워진다.






돈과 명예를 가진 자의 죽음은 온 세상이 떠들썩하도록 시끄럽지만,

그 여인의 자살은 많은 신문의 어느 한 구석에도 실리지 않았다.

인간이 평등하다는 말만 무성하지, 가진 것 없는 낮은 사람은 죽어서도 외면 당한다.


더러운 세상, 저주의 굿판이나 벌일까 보다.






꽃잎처럼 떨어져 세상을 등진 정성애씨는 참 착한 여자였다.
지난 여름, 우연히 인사동 ‘유목민’에서 찍은 사진이 그녀의 마지막 사진이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하필이면, 장선우 감독의 영화 “꽃잎‘을 배경으로 찍었는데,
80년 5월, 광주에서 죽어가는 엄마를 뿌리친 소녀의 한에 버금가는가?
담배 연기속의 애잔한 웃음에 가슴이 아린다.


우연히 그녀 사진을 만나, 그리운 분의 모습을 찾아 보았다.







“문디 자슥아~ 문디 자슥아~”를 연발하던 천상병 선생은 윙크하고 계셨다.

노자돈 받아 막걸리 사 드시며 흐뭇해 하시던 모습이 그립다.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께서 인사동 고서점을 기웃거리는 사진도 있었다.

말씀 없이 웃으시며, 허름한 봇짐에서 붓글씨를 꺼내 나누어 주시던 모습이 아른거린다.

자유분방한 선생만의 필체는 오래된 인사동 가게라면 부적처럼 붙어있다.






선배들은 챙겨주고, 후배들은 다독거리던 ‘민예총’의 거목 김용태씨도 반겼다.

거나하게 술이 취해, 바지춤을 추켜 세우며 부르던 청포도사랑이 듣고 싶어진다.

저승에서라도 재기의 깃발 올리는 '민예총'에 힘을 실어주길 부탁한다. 





민속박물관장을 지낸 김동수선생은 점심 먹자는 전화를 가끔 하셨다.

인사동에 작업실이 있을 때인데, 선생께서도 사무실을 인사동에 두었다.

만나기만 하면 인사처럼 하시는 말씀이 조군 사진 값을 줘야 할텐데...”였다.

인사동 사람들전시 후, 선생사진을 전해 드렸더니 그게 마음에 걸렸나보다.





‘인사동, 봄날은 간다’ 사진전에 오셨던 이계익 장관도 보고 싶어진다. 
노 풍류객의 아코디온 소리가 아직까지 귓전에 생생하다.

그 와중에 민영시인과 연극배우 이명희씨가 나누는 밀담은 무엇이었을까?





혼 술로 속세를 마감한 적음선사도 내 눈에 밟힌다.

땡초처럼 살았지만, 마음은 깊다. 그가 기거한 '일소암'에서만 볼 수 있는 속내다.

정선 '만지산축제'에서 불렀던 '긴머리 소녀'도 잊을 수 없다.

머리카락 한 올 없는 중이 부른 노래라 다들 배꼽 잡았지만, 나는 슬펐다.






별을 그리다, 별 따라 간 강용대 화백,

인사동에서 일원짜리 동전 가진 사람에게 십원짜리로 바꾸어주는 퍼포먼스도 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인사동 거지 까딱이를 반기며, 대작해준 유일한 술 친구였다.

김용문씨의 '옹관장전' 퍼포먼스에서는, 왜 온 몸을 칭칭 감은 시신 역활을 자처했을가?

일찍부터, 더러운 세상 살고 싶지 않았나보다.





인사동 콧수염으로 통하는 김영수는 성질 한번 고약하다.

그는 마음이 상하면 두 번 다시 보지 않는 성격이다.

괴팍한 그의 박치기에 나가떨어진 사람도 여럿 보았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장례식장 가다 차에 치이는 교통사고도 당했다.

장례식장에 구급차 타고 갔던 귀 막힌 사연이다.





 

문영태는 다리가 불편하지만, 지인들 전시에는 빠지지 않는 의리파다.

그가 그린 심상석을 보여 달래도 끝까지 보여주지 않더니,

결국 죽고 나서 모든 작품을 보여주었다.

저승에서 빙그레 웃고 있을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천상병 선생 뒷바라지로 고생하셨던 '귀천'의 목순옥 여사 모습도 안스러웠다.

천상병 선생 기리는 사업을 그렇게 악착스레 밀어 붙이더니, 결국 빚더미에 오르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돈을 못 구해 전전긍긍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자신을 위한 삶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가련한 분인데...





온갖 기행으로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중광스님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났다.

만나뵈러 댁에 갔더니, 조기를 갈비처럼 뜯어 드시며 어린애처럼 식탁을 어지럽혔다.

사진처럼, 허접한 것들을 보여주며 이게 바로 작품이라는 것이다.

작업실에선 들통에 가득 담긴 먹물을 샤워하듯 온 몸에 부어 쑥대밭을 만들기도 했다.

자우지간 괴짜였다. 저승에서는 어떻게 사시는지 궁금하다.





'인사동 밤안개'로 불리는 목탄화가 여운도 그립다.

인사동 카페 '산타페'에다 양주를 맡겨두고, 술 값 없으면 그 술 마시라는 멋쟁이다.

자신을 위해선 남에게 부탁 한 번 않지만, 어려운 친구를 위해선 손발 걷어 부친다. 

자칭 '전푼련"(전국푼수연합회) 회장이시다. 






온 몸을 비틀며 시를 토해낸 이선관시인,

공단 폐수에 썩어가는 바다를 절규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썩어가는 인간들 정신에 통곡했을 것이다.





기타 하나 둘러메고 인사동을 떠돌던 유랑객 이종문씨는

대마초 한 모금에 세상 시름 다 녹이며, 아름답게 살다 떠났다.





정남규와 홍수진은 둘 다 병들어 떠났지만, 죽는 방식은 달랐다.

정남규는 마당에 있는 감나무에 목 매달아 죽었지만, 홍수진은 병원에서 끌려갔다.

다들 정남규를 나무라지만, 누가 더 현명했는지는 생각에 따라 달라진다. 



 


홍수진의 시 처럼, 그들의 노래는 아직도 잠들지 않았다.





마지막 사진은 얼마 전에 돌아가신 심우성 선생이다.
민속극과 인사동을 온 몸으로 껴안고 사셨지만, 허허롭게 떠난 것이다.

넋전춤으로 선생의 넋을 기리는 제자 양혜경씨가 있어 그나마 위안된다.






그러나 죽는 것만 죽은 것이 아니다.

아무 일도 못한 채, 병석에서 시한부 삶을 사는 사람이 더 불쌍하다.
어눌한 말로 낄낄 거리던 이청운화백 모습에,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세월이 원망스럽더라.






우리 모두, 그리운 사람들 추억이나 씹자.
죽는 것 보다 더 서러운 것은 잊혀진다는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완주의 왈패 한봉림이가 화두를 보내왔다.

작은 영웅들의 동네 인사동’, 우리 그들을 만난다.”로 글을 쓰란다.

생각해 보니, 인사동을 풍미한 많은 걸물들이 떠오르더라.

 

더러는 저승사자한테 붙들려가기도 했지만,

대개 변두리에 처박혀 구멍 파느라 두문불출하고 지낸다.

인사동만 바람난 줄 알았더니, 그들도 바람났나보다.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 중광스님은 그래 그래 놀다 가셨고,

별만 줄 창 그리던 강용대, 체류냄새 풀풀 풍기며 낄낄거리던 사진기자 김종구,

어디엔들 이 한 몸 머물 곳 없으랴산문집으로 폼 잡던 땡초 최영해,

민중미술 그림판을 좌지우지한 사단장 김용태, 인사동 밤안개 여 운,

성질 더러운 콧수염 사진쟁이 김영수 등 많이도 잡혀갔다.

 

김명성, 노광래, 전활철, 최일순 등 몇몇은 인사동에 남았지만,

소설이 안 팔려 작가폐업술집 낸 배평모는 풍기 갔고,

인사동만 나오면 인사불성 된다는 사기꾼 한봉림은 완주 있고,

품팔이 노동자 시인 김신용은 골병들어 소래있고,

부산의 파아란 바다를 그리워하던 이청운은 병원에 갇혀 산다.

 

막사발처럼 사는 상투꾼 김용문은 터키에 돈 벌러 갔는데,

대처승인지, 시인인지, 사기꾼인지 헷갈리는 신동여는 영주 살고,

임진각에 바람개비 날린 털보 김언경은 단양 살고,

떠돌이 유목민  최울가는 어디 있는지 정처 없고,

술버릇 지랄 같은 장경호는 남양주서 독수공방 기다린다.

 

날씨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게 인생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나.

노세노세 늙어 노세, 죽고 나면 못 노나니...” 이 말 참 명언이다.

이 봄 가기 전에 인사동서 경노잔치 한 판 벌이자.

함양 호랑이 이목일이가 인사동서 잔치한다니, 떡 본 김에 제사지낼까?

다음달 27, 인사동의 갤러리M’이란다. (회비20,000원)

 

제목은 거창하게 작은 영웅들의 동네로 시작해 놓고,

글이 삼천포로 빠져 경노잔치 사발통문이 돼 버렸네.

지정곡은 싫어하는데다, 본디 글쟁이가 아니고 사진쟁이니,

너그러이 양해 바란다.

 

사진,/ 조문호




아래 사진들은 23일의 인사동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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