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가장자리
The Edge of Night展


2016_0901 ▶ 2016_1023 / 일,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6_0908_목요일_05:00pm


참여작가

구현모_김기철_김미경_김윤수도윤희_박진아_서동욱_이해민선


작가와의 대화(진행_이우성 시인)

2016_0928_수요일_07:00pm

2016_1015_토요일_04: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수요일_10:00am~09:00pm / 일,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수송동 46-15번지)

Tel. +82.2.734.0440

www.ocimuseum.org



프랑스의 예술철학자 발딘 생 지롱(Baldine St. Girons)은 저서『밤의 가장자리(Les Marges de la nuit)』에서 밤으로부터 출발하는 '또 다른 회화사(繪畫史)'를 쓴다. 밤이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한다거나, 낮의 부재 라거라, 그림 속의 일화(逸話)에나 잠깐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시선을 열어주지 않느냐는 것이 내용이었다. 밤의 여백은 무척이나 넓고 깊어서, 조형성과 원근법이 달라지는 것은 물론, 거기에는 무한한 사상(思想)을 담을 수 있고, 실제와 가상을 아우르는 형이상학이 가능하며, 개별적이면서 공통적인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 속에서 우리는 길을 잃고 또 우연히 조우할 것이라는 논지가 책 속에서 펼쳐졌다.


구현모_달_골드폼, 각재_240×240×130cm_2016


실제로 시각적인 수용은 빛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에, 밤은 여러 미술가에게 영향을 주어왔다. 중국 『산해경(山海經)』에서는 촉음(燭陰)이라는 산신이 눈을 뜨면 낮이 되고 눈을 감으면 깜깜한 밤이 된다고 하였다. 밤을 맞이하는 일은 무엇보다 눈앞에 내리는 어둠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밤이 무섭다고 보채는 어린아이의 머리맡에 작은 램프를 놓아주며 이제는 괜찮다고, 더 이상 무섭지 않다고 도닥여주는 것은, 아직은 이 어둠이 익숙치 않을 것이라고, 그러나 곧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는, 그런 위로일 것이다. 하지만 밤이면 어두운 것이 다 같은 검은색이 아니라는 것을, 밤이 깊을수록 또렷해지는 형상이 있다는 것을, 심지어 '근거-없는-이미지들이-출현하는-순간' 이 온다는 것을, 예민한 작가들이 가만히 지나치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다. 밤에는 실제와 환영을 마주하는 시선이 뒤틀리고 날카로워지고는 하는데, 작가들을 창작욕으로 꿈틀거리게 하는 이 시선은 저마다 벼려온 감각의 날인 동시에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밤이기에 분명해지고 단단해지는, 밤이라는 시점이 그려내는 윤곽선이기도 하다.


김미경_Polaris_리넨에 혼합재료_60.3×73cm_2013


그리하여 이 전시에서는 우리 미술 속에서 만나는 밤을 이야기해보자 하였다. 대단한 담론도, 보도기사 같은 시사성도 말고, 그저 흔한 밤. 오늘 밤이 지나면 내일 밤이 오겠지, 어떤 사람은 마실을 나갈 것이고, 어느 이는 또 홀로 고독하겠지, 나의 밤이 당신의 밤과 같을 리 없지만 그래도 밤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내릴 테지, 이런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 그래도 각자 다 다른 사연들. 남들 다 똑같은 상황인데 꼭 다르게 받아들이는 누군가가 작가들 아니던가. 평범한 소재인 밤을 말하며, 결국은 작가마다 섬세하게 포착해내는 시선의 끝을 따라가보고자 하였다.


박진아_문탠 01_캔버스에 유채_112×162cm_2007_Artist Pension Trust 소장


서동욱_밤-한강유원지-양화지구_캔버스에 유채_97×145.5cm_2011


전시의 첫 장은 '범속한 밤의 풍경'으로 시작한다. 해가 저문 시각, 도시의 밤, 거리로 나선 발걸음. 어디서 본 듯한 풍경, 나도 한 번쯤 해봤던 것 같은 밤 산책의 장면을 마치 영화의 스틸컷처럼 담았다. 서동욱의 그림은 한강 유원지나 집 앞 골목을 배회하며 마주칠 법한 인물과 거리의 모습이다. 밤이면 촉촉이 살아나는, 그리고 해가 뜨면 피로한 모습으로 주저앉아 바스락거릴 것 같은 사람들이 꼼꼼한 붓터치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에 비하여 박진아의 「Moontan」 연작은 속필로 애써 비워내려고 한 듯한 그림이다. 분명 색이 다 칠해져 있는데도 도통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밤이다. 공원을 배경으로 그려진 네 점의 작품에는 서로 겹쳐지고 또 슬쩍 비껴가는 장면이 있는데, 이 퍼즐 조각을 찾다 보면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그때의 순간성이 강하게 스쳐지나간다.


도윤희_Untitled(Night Blossom)_캔버스에 유채_250×195cm_2016


김기철_Antipode_만화경, 빔프로젝터, 커스텀 소프트웨어_가변크기_2016 (프로그래밍_변지훈)


두 번째 장에서는 밤을 물리적인 시간에서 나아가 '인식이 열리는 문'으로서 고찰한다. 명상적이며 시(詩)적인 작품으로 구성하였는데, 그 중 도윤희의 세 작품은 밤이 슬며시 찾아들어와(「밤은 낮을 지운다」, 2004), 환하게 피어나고(「Night Blossom」, 2016), 다시금 새벽을 맞이하는(「허공을 향하여 문이 열리는 시간」, 2007-08) 시간을 담아낸다. 분명 밤에 대한 작업이지만, 이 '밤'은 공간과 시간, 빛 등 현상 이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을 묻는 철학적 질문이기도 하다. 한편, 소리조각가 김기철의 「Antipode」은 밤과 낮을 잇는 커다란 만화경이다. 우리나라와 지리상 대척점에 있는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의 라디오 소리를 시각적으로 전환하여, 밤이라는 모호한 개념에 구체적인 형상을 입혔다. 밤은 곧 낮을 떠올리게 」하고, 밤과 낮이 모여 하루를 이룬다. 김미경의 작업은 매일매일의 사색을 담고 있다. 자신의 경험과 수많은 생각을 차분하고 꾸준히 쌓아 올린 미니멀한 그림으로, 속에서부터 은근히 색이 배어 나온다. 「Polaris」나 「Yoon Dongju's Sky」 등의 작품명을 보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찾게 되지만, 이 관념 속 하늘이 실제로 보일 리 없으며, 밤 역시 그러할 것이다. 김윤수의 「그 밤들」은 '잊혀지지 않는 마음'이 모여 별자리를 이룬 것이다. 다른 이의 마음을 받아, 울트라 마린 색상으로 그리거나 자수를 놓으며 저마다의 별을 새긴 후, 이 밤들을 모아 전시장에 띄웠다. 2011년부터 시작한 이 작업은 전시 기간 중 미술관을 찾아온 관람객의 마음을 모아 훗날 또 다른 별자리로 나타날 것이다.


김윤수_그 밤_캔버스에 울트라마린 색상 파스텔_27.5×22cm_2015


세 번째 장은 현실을 '낮'이라고 보고, 실제 이면의 것을 '밤'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하여 '꿈, 부유의 흔적'을 모았다. 현실의 파편들로 구축되는, 그러나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끄집어낸 듯한 이미지들이다. 구현모의 작업은 예측할 수 없는 사물의 조합이 빚어내는 공간이다. "불가능한 것은 사물들의 근접이 아니라, 사물들이 인접할 수 있을 장소이다." 던 푸코의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처럼 조형물들이 뒤얽히고, 엉뚱하고, 이상하게 관계를 맺으며, 뜻밖의 의미구조를 만들어낸다. 이해민선은 '드로잉-설치'를 통하여 무생물의 생태계를 만든다. 그 속에서는 버려진 스티로품 한 조각, 철근 몇 토막 등 결코 주인공이 될 리 없는 변방의 것들이, 마치 늘 이렇게 존재하고 있었다는 듯, 하잘것없으나 온전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이해민선_무생물 주어_혼합재료_가변크기_2016


밤은 지구의 자전으로 생겨난 물리적 운동이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더없이 사랑하는 연인일지라도 밤잠을 들 때에는 "내 꿈꿔."라고 속삭이며 돌아누울 수밖에 없으며, 누구도 그 시간의 '홀로 됨'을 대신해 줄 수 없다. 하나의 밤이지만, 모두 다른 밤이다. 이태백과 두보, 노발리스와 보들레르 등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이토록 오래되고, 특수와 보편을 아우를 수 있는 메타포가 달리 있을까. 어쩌면 밤은 태고 적부터 그저 텅 비어있을 뿐, 우리의 경험과 감정, 의식의 이미지로 그 어둠을 오롯이 채워나가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이에 밤을 바라보는 시선은 독창성이 아니라 개성이다. 유일할 수가 없는, 열이면 열마다 다 다를 밤이다. 그 밤이 무엇일지, 어디까지일지 참여작가 여덟 명의 손끝에서 저마다의 가장자리를 그려나간다. ■ 김소라



Vol.20160904c | 밤의 가장자리 The Edge of Night展


2016 OCI YOUNG CREATIVES
임현정_오세경展
2016_0728 ▶ 2016_0821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6_0728_목요일_05:00pm


작가와의 대화 / 2016_0820_토요일_02:00pm

작가 공모 탐구 시간-OCI YOUNG CREATIVES 설명회

2016_0728_목요일_04:00pm


임현정 『마음의 섬들』展

오세경『Achromatic Centricity: Grey Temperature』展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수송동 46-15번지)

Tel. +82.2.734.0440

www.ocimuseum.org



오세경-Achromatic Centricity: Grey Temperature - 128,128,128의 멜랑콜리 ● '한강 르네상스'를 꿈꿨던 전임 시장이 취임했을 무렵, 종로대로가 시작되는 초입엔 도무지 그 뜻을 짐작할 수 없는 프랑스식 이름을 붙인 건물이 한 채 지어졌다. 어떻게 봐도 그냥 시멘트 덩어리인 건물은 인근 지역이 개발되며 밀려난 음식점들을 수용하기로 합의돼 있었는데, 누군가의 작은 죄책감 때문인지 고장난 유머감각 때문인지, 나무에 한땀 한땀 아로새긴 오래된 피맛골 현판이 입구에 함께 걸리며 제법 이상한 외관을 연출해냈다. 결재권자에게 이것은 꽤 멋진 (부)조화의 풍경으로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비아냥거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 순간 서울의 나이테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처럼 멋대로 구부러져 숭고에 가까운 판단유예의 감정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으니까. 한동안 모더니스트를 흉내내는데 열중했던 나는 종로를 걸을 때마다 자꾸 재채기가 나올 것 같은 강박에 시달렸지만, 오래지 않아 직선의 관찰이 불가능한 형태로 접붙여진 서울의 인공 좌표들 위에서 그것이 이 도시와 나를 유일하게 하나로 묶는 동시성임을 깨달았다.


오세경_짝꿍_한지에 아크릴채색_130×97cm_2015


오세경이 "기꺼이 속는 삶"(이것은 2014년 첫 번째 개인전의 타이틀이었다)을 결심했을 때 어쩌면 그도 직감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필연적으로 실패를 향해 미끄러지는 산보자임을. 오늘날 도심의 누군가를 '걷는 이'로 만들어주는 것은 포털의 로드뷰 어플리케이션이나 「마인크래프트」가 가진 마법의 권능이다. 적어도 나의 내적갈등은 우아한 근대인의 자기비판적 규범과는 거리가 있었고, 이를 자각한 페인터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다른 이외의 것들을 어떤 악의 없는 속임수라 믿어버릴 지언정. ● 나는 이런 조건에서 말미암은 오세경의 태도를 우선 '가짜 수집가적인 것'이라 부르고자 한다. 작가의 말을 성실하게 따라 그의 회화가 전통적 의미의 재현을 향해 있다고 가정하면, (2015년 그가 참여한 2인전 「성인병」의 서문이 밝히는 바처럼) "내적인 상흔이 남은 소녀의 상실감과 현재의 우리를 잇는"다거나 "불화하는 사회를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것으로 이 작업들을 읽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몇 가지 정황을 고려할 때 나는 그가 정말 화면 속에 놓인 도상들을 "구상"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이 그림들은 정교한 맥락 안에서 특수한 의미를 엮어내는가? 무언가에 대한 지배적 표상으로서 의미를 획득하고 있는가? ● 가짜 수집가는 대상을 재현하기보다는 이미 재현되어 나타난 증상들을 채집한다. 즉, 그는 동일성의 시선을 내재한 채 거리를 걷는 대신 모처의 시공에 기존재하는 시선들로부터 관음성을 탈취하는 연금술사가 되기를 택한다. 가짜 프로토콜을 구현하는 미디MIDI 화면처럼 이 가짜 수집가의 평면에는 방향감각을 상실한 상사similitude적인 투사체들이 쌓이고 (상사와 유사의 엄정한 구분에는 약간의 수고로움이 필요할테지만) 시선은 최초의 욕망을 탈색한 채 훨씬 매스한 이물질로 접합된다. 가령 「성인병」에서 선보인 「숨바꼭질」과 「하얀 나비」의 연장에서 「짝꿍」은 세월호 참사라는 정황에 맞물려 대단히 강렬한 정치적 메시지로 독해될 수 있다. 그러나 「짝꿍」이 재현해 보여주는 것들—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인 여학생, 불타는 우산, 떠내려가는 쪽배 같은 도상들은 사실 벨기에의 시각예술가 얀 드 매샬크Jan De Maesschalck가 그의 작업 「무제 Untitled」에서 사용했던 모티브에 다른 소재들을 이어붙인 결과값이다. 마찬가지로 「8학년 여학생」(이 제목은 작업 도중 자주 틀어두었던 동명의 노래로부터 붙어졌다고 한다)은 존 브로시오John Brosio의 「CEO를 포식하는 공룡 Dinosaurs Eating CEO」을 불러온다. 한적한 도로에서 두 마리의 벨로시랩터에게 뜯어 먹히는 기업 임원의 모습은 브로시오에게 가장 미국적인 불길함을 암시하는 표상이었지만, 「8학년 여학생」에서 여고생의 시선은 포식(혹은 섭식)의 인과 바깥에서 하이에나의 시선과 뒤섞여 산만하게 병치되고 있다. (「토네이도 Tornado」 연작을 그린 브로시오는 초현실적인 회화를 통해 주로 일상의 풍경에 개입한 극적인 재난의 순간을 표현해 온 미국 작가다).


오세경_접속_한지에 아크릴채색_194×391cm_2016_부분


오세경_동병상련 同病相憐_한지에 아크릴채색_150×150cm_2016

개념어 만들기를 좋아하는 프랑스인들의 표현을 몇 개 빌려보자. 인간은 어쨌거나 진리—정체성에 대한 지침을 필요로 하고 그것은 상징이 비스듬히 기울어진("완만"해진) 공란에 주어의 의지를 도달시킴으로써 성취된다. 적어도 현대인에게 실재와의 조우란 그런 식으로 성립한다. (이 문장은 역순으로 읽혀야 한다, ~식으로 성립하는 것을 우리는 현대인이라 부른다). 소멸의 의식이 거행된 회화/평면은 현실원칙이 특정할 수 없는 회색의 영점이다. 이곳에선 비로소 하나의 사건이 출현하고, 아마 그저, 다시 그 다음의 사건이 예비될 것이다. 나는 오세경의 작업이 드러내는 특징을 임의의 범주 속에서 패스티시라는 편리한 진술로 뭉뚱그리고 싶지는 않다. 패스티시가 동일성의 끝자락에서 발생한 조증이라면 오히려 그의 가짜 수집 행위는 (무)의식적인 페티시를 일종의 잠재성으로 발현시키는 멜랑콜리에 가깝기 때문이다. 건축적으로 불투명하게 쌓여 올려지는 캔버스와 오일 페인트의 조합 대신 아크릴과 에어브러시로 장지를 서서히 '먹이'는 독특한 채색은 이런 정서를 반영하는 듯 하다. 역시 브로시오의 잔상이 남겨진 지난 작업 「지배자」나 회화작가 문경의를 빌려온 「아나키스트」, 맥 OS 배경화면을 연상시키는 듯한 텍사스 우주망원경의 구글 이미지를 차용한 「접속」 등에서 비슷한 공통점이 찾아질 것이다. ● 개인전 「기꺼이 속는 삶」과 「성인병」 이후 오세경의 작업에서는 몇 가지 눈에 띄는 변화가 감지된다. 먼저 야생 하이에나, 부서진 탱크, 거대한 공룡 화석처럼 제한적인 상상으로 체험되던 이미지가 길고양이나 병아리(「동병상련」), 디즈니 캐릭터(「환상」) 같은 친숙한 재료로 대치되는 현상이다. 극단적인 폭력의 묘사(「번식」)는 아주 흐릿한 성적 암시(「무정란」)로 전환되었다. 인물의 측면에서는 여전히 여고생이 주요한 소재로 사용되는데, 다만 이제 그는 사건이라 부를 만한 개연성이 모호해진 장면 내부에서 의도적인 양면성을 만들어내는데 더욱 주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8학년 여학생」으로 출발해 「접속」과 「환상」, 「기러기」를 거쳐 설치를 겸하는 한 쌍의 작업 「이별」/「이별 상자」로 이어지는 전시의 동선을 꼼꼼히 살필 때 변화의 낙차는 더욱 크게 체감될 것이다.


오세경_이별_한지에 아크릴채색_93×93cm_2016


오세경_이별 상자_나무, 철, 한지에 아크릴채색_114×76×76cm, 65×65×65cm_2016


종로를 조금 더 걸어 광화문에 진입하면 서울을 응시하는 인상은 윤리적인 차원에서 보다 근본적인 고립감을 환기한다. 이제는 마치 투명한 벽지가 된 것처럼 느껴지는 5호선 역사 안의 장애등급제 폐지 투쟁을 지나, 세련된 포스터가 걸린 재벌 언론사의 사립미술관 앞에서 힙스터들의 긴 줄과 가라앉은 아이들에 대한 각기 다른 서명운동을 한 번의 시야에 뒤섞고, 확성기를 든 노인과 형광색 해조류처럼 부유하는 대사관 앞의 경찰들을 돌파하며, 누구라도 이상한 부채감에 빠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폐허는 에폭시가 듬뿍 발린 노출 콘크리트 위에서가 아니라 증상이 임계를 초과하는 순간 보풀처럼 번지는 우울증과 함께 비로소 자각된다. 한때 지배적이라 믿었던 것들이 더 이상 세계를 설명하지 못하고 무너져내릴 때, 내가 무엇일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것은 결국 열병처럼 남겨진 무채색의 멜랑콜리다. 그곳에서 이미지는 회색의 온도로 무언가의 부재를 증명하려 한다. ■ 윤율리


임현정_Islands of the Mind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97×776cm_2016_부분


임현정_Rocky Landscape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116×91cm_2016


임현정-마음의 섬들 - 임현정의 회화-지금보다 더 비전형적인, 비선형적인 ●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원형 이미지로 이루어진 동화적이고 원초적인 무의식의 세계를 표현하고 싶다. 자신의 그림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함축한 작가 임현정의 말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 주제의식을 뒷받침하기 위해 칼 융의 집단무의식 개념과 원형 개념을 가져온다. 융에 의하면 자아는 원형의 바다 위에 섬처럼 떠있다. 그리고 근작의 주제가 Islands of the Mind이다. 융식으로 옮기자면 마음의 바다 위에 섬처럼 떠있는 자아(들)를 그린 것이다. 여기서 자아는 원형에 연동되고 마음에 연장된다. 그 자체가 메를로 퐁티의 의식의 지향호 개념과 통한다. 의식이 길어 올려지는, 의식이 무분별하게 쌓이는, 의식의 원료인 선의식들이 침묵에 잠겨 있거나 들끓고 있는 의식의 자궁으로 보면 되겠다. 그렇게 의식은 선의식의 영향을 받고, 의식의 자궁의 생태학(아님 생리학?)에 지배된다. ● 여기서 원형은 전형과 다르다. 사회화될 때, 제도화될 때, 문법으로 환원될 때 원형은 전형이 된다. 관념과 관습, 통념과 풍습, 이성과 합리, 상식과 논리가 전형이 고착되는 지점들이며, 그 끝에 물신사회의 가장 강력한 준칙인 클리세(고도로 제도화된 의미, 공인된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어쩜 원형이란 의식화되지 않는 것,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것, 자기를 의미화하고 의식화하려는 모든 기획에 저항하는 것, 전형화의 기획에 저항하는 것, 의식과 의미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 행간에 등록되고 기술되는 것, 자크 라캉의 오브제 아(모든 사물에는 결코 오브제 곧 대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무엇이 있고,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사물의 전모를 알 수는 없다)에 해당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 그렇게 우리는 얼핏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으로 구조화된 작가의 그림 앞에 서 있다.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이라고는 했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어쩜 알만한 이미지들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정작 작가의 그림을 낯설게 하는 것은 이런 이미지 자체라기보다는 이미지를 배열하고 배치하는 것에서 오는 생경함에 연유하는 것 같다. 예술은 배열과 배치의 기술이다. 의미는 사물에 내포된 성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사물이 놓이는 관계로부터 온다. 화용론이다. 사물의 의미란 그것이 놓이는 상황, 전제, 문맥, 맥락 여하에 따라서 달라진다. 맥락이 달라지면 사물의 의미 또한 달라진다. 작가의 그림을 낯설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예사롭지 않은 관계에 의한 것이며, 상식을 벗어난 맥락에 연유한 것이다.


임현정_River Landscape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130×164cm_2016


다시, 사물의 전치다. 초현실주의다. 그 선배에 해당하는 일군의 화가들이 알브레히드 뒤러, 피터 브뤼겔, 히에로니무스 보쉬로 대변되는 북유럽르네상스의 환상파 작가들이다(아마도 프랑수아 라블레 읽기에 바탕을 둔 미하일 바흐친의 그로테스크리얼리즘 역시 이 계보에 속할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이 작가들에게 자연스럽게 친근함을 느끼고 유대감을 느낀다. 환상파 작가들은 초현실주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현대미술에도 여전히 유효한, 어쩜 다 길을 수는 없는 고갈되지 않는 항아리를 열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환상파 작가들의 그림은 얼핏 작가의 그림에서처럼 우연하고 무분별해 보인다. 마치 처음부터 오리무중의 의미를, 카오스 자체를 그려놓은 것만 같다. 그렇다면 카오스는 현실성이 없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환상일 뿐인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현실에 대한 반응이 될 때 환상은 은유가 되고, 무분별한 이미지는 알레고리가 된다. 이를테면 비이성적인 시대에 대한, 어리석은 시대에 대한, 억압적인 시대에 대한 유비적 표현이 된다. 출구 없는 시대에 대한 시대감정을 표현한 것이 된다. ● 이 그림들에서 이미 자본주의를 예고하고 있는 징후들이, 특히 사물에 대한 달라진 관념이 발견된다. 사물초상화이며 사물인격체가 그것이다. 사용가치가 끝나는 지점에서 사물의 교환가치는 시작된다. 사용가치의 바깥에서 본 사물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자본주의는 사물의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로 전환시키는 메커니즘에 의해 작동한다. 여기서 사물의 교환가치는 사용가치와는 무관한 영역과 범주에서 작동한다. 상품들의 아우라며 물신주의가 그것으로서, 여기서 사물은 스스로 신성한 상품으로, 물신으로, 주체로, 남근으로, 기표로 등극한다. 쉽게 말하자면 사물이 사람을 부린다. 울리고 웃긴다. 구속하기도 하고 자유를 주기도 한다. 현실을 악몽으로 바꿔놓기도 하고, 지상낙원을 약속하기도 한다(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유토피아는 없다. 그 말 속에 이미 현실에 대한 부정, 장소에 대한 부정, 그러므로 어쩜 자기에 대한 부정이 들어있다). 다시, 환상파 화가들은 자본주의가 첨예화된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심리학, 사회학, 욕망학, 의미론, 기호학, 그리고 바깥의 사유(모리스 블랑쇼)와 행간의 유령들(아감벤)과 관련한 인문학적 담론의 지평을 열어놓고 있다.


임현정_Landscape with Eggs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130×89.5cm_2016


작가는 이처럼 북유럽르네상스 거장들의 환상적인 그림을 차용한다. 그리고 그렇게 차용된 이미지를 개인적인 경험과 기억의 지층으로부터 되불러낸 이미지와의 접합을 시도한다. 차용된 이미지와 개인사를, 의식과 무의식을 날실과 씨실 삼아 하나로 직조해내는 것. 이를테면 영국 저택의 도자기로 만든 굴뚝이나 일본의 잡화상점에서 본 생활오브제들 그리고 독일 함부르크의 날씨와 기후에서 받은 인상과 같은 여행지에서의 기억들, 고향 앞바다에서 본 풍경과 같은 현실의 일상적인 풍경의 편린들이 차용된 이미지와 무분별하게 놓이고 엮이고 재구조화된다. 작가만의 현실성을 획득하기 위한 방법이고 문법이지만, 그 경우는 특히 세월호를 참조할 때 좀 더 분명해진다. 그러나 이때의 현실성은 지역성과 지엽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는데, 개인사나 사사로운 층위에서 의미 부여된 사건의 경우에 이에 대한 정보가 인지되지 않은 상태에서 보면 그림의 의미는 그저 오리무중이고 무분별해보일 따름이다. ● 더욱이 차용된 이미지 자체도 그렇지만 작가가 기대고 있는 방법론, 이를테면 자동기술법, 자유연상기법, 의식의 흐름기법에 의해 하나로 놓이고 엮이고 재구조화된 이미지의 의미란 기본적으로 열린 것일 수밖에 없고, 우연적이고 가변적인 것일 수밖에 없고, 이에 대한 모든 해석을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것으로 만들어 놓는 것일 수밖에 없다. 어차피 의미가 결정되는 지점은 저자가 아닌 독자 쪽이다(저자의 죽음). 미셀 투르니에는 책을 절벽에 그리고 활자를 흡혈박쥐에다 비유한다. 책장을 여는 순간 절벽에 붙어 잠자고 있던 흡혈박쥐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독자들의 피를 빨면서 독자를 울리고 웃긴다. 잠재적인 의미가 비로소 진정한 의미로 개화되는 그 극적인 순간이며 장관에 저자를 위한 자리는 없다. 독서를 안내해줄 매뉴얼도 없다. 그저 잠재적인 의미(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의미)가 독자 앞에 던져질 뿐. 독자의 처분에 맡겨질 뿐. 그렇게 독자는 저자가 부재하는 장소에서 읽고, 저자를 가로채면서 쓴다(작가적 텍스트).


임현정_Night Walk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130×164cm_2016


여기서 작가에게 주문하고 싶다. 혹 그림의 의미가 횡설수설하고 오리무중이며 무분별하게만 남겨지지는 않을까, 현실성을 담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미적 장치 혹은 개연성을 위한 장치 정도는 마련해두어야 하지 않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그렇게 염려하는 순간 전형이며 클리세의 기획(모든 무분별한 것들을 분별하려는 기획)에 발목 잡히고 만다. 어차피 모든 무분별한 것들은 분별되기 마련이고, 모든 무의미한 것들은 의미로 전화되기 마련이다. 나아가 아예 분별한 것들이 있는 만큼이나 무분별한 것들도 있고, 의미보다 더 의미가 있는 무의미한 것들도 있는 법이다. 그래서 어쩌면 무분별한 것들을 부여잡는 것, 무의미한 것들을 물고 늘어지는 것만이 유일한 전략일 수 있다. 여하한 경우에도 말이 안 되는 것은 없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미 현실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비현실도 포함된다. 그렇게 의미들이 저절로 생성되고 변질되고 스스로 폭발하도록 내버려두라는 거다. ■ 고충환



Vol.20160728a | 2016 OCI YOUNG CREATIVES-임현정_오세경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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