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복作, 사라진 꿈, 153 x 208cm,장지에 아크릴, 2023

‘나무아트’ 기획전 ‘무장지대’ 2부가 지난 17일 개막되었다.

 

2월 6일 부터 16일 까지 열린 1부에서는 강재구(사진),김진하(사진), 송창(설치), 이태호(입체), 임종업(대성동마을 스냅+르뽀), 정기현(영상, 설치) 작가가 참여했다.

 

김진하_망각의 한 방법-소원에 대하여_사진몽타_61×182cm_2023
강재구_private#1~3_젤라틴 실버 프린트_각 70×55cm_2002
송창_大兄-바라보기_스팽글, 필름출력_설치, 232×546cm_2020
이태호_분단풍경_여러가지 재료_100×85×168cm_2021
임종업_대성동-DMZ의 숨겨진 마을_르뽀_도서출판 소통_2021
정기현_topos_도라전망대 설치전경_2021

지난 17일 부터 오는 26일까지 열리는 2부에서는 이명복(회화), 류연복(목판화), 손기환(회화), 이동환(회화+입체),  이인철(디지털 회화) 김억(목판화) 작가가 참여한다.

 

류연복_꽃 한송이_소멸다색목판화_97×72cm_2018
손기환_DMZ풍경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20×200cm_2015~21
이동환_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같은 풍경_장지에 목탄, 먹, 안료_60;134cm_2023

지난 15일 전시장에 들렸으나 아쉽게도 문이 잠겨 1부를 놓쳐버렸고, 2부는 정영신 동지와 함께 개막시간에 맞추어 찾아 간 것이다,

 

이인철_파주2_디지털 회화_2023
김억_DMZ-백령도에서 고성까지_목판화_2020

김진하관장을 비롯하여 제주의 이명복씨와 김 억, 류연복, 손기환, 이인철씨 등 참여 작가를 두루 만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이승미, 김 구, 장경호, 김은태, 강욱천, 성기준, 정기현씨 등 여러 명이 전시를 관람한 후 '산골물'에서 조촐한 뒤풀이를 가졌다.

 

손기환작

아래는 전시를 기획한 김진하관장의 ‘무장지대’ 서문이다.

 

"1953년 유엔사와 북한의 휴전 협정에 의해 한반도 허리를 가로지르는 군사 분계선과, 그 선을 기준으로 남북 2km의 남방한계선/북방한계선에 의한 비무장지대(DMZ)가 설정되었다.

 

비무장지대. 말 그대로 무장이 해제되어야만 하는 곳. 그러나 현재 동서 256Km, 남북 4Km인 이곳엔 수백 만 개의 지뢰가 설치되어 있을 거라고 전해진다. 게다가 북한 G.P는 북방한계선 남쪽 1.6Km, 남한의 G.P는 남방한계선 북쪽 1.2Km까지 진입된 곳도 있다. 그러니까 양 G.P간 실 거리는 기껏 1Km의 거리. 모두 중화기로 무장한 긴장된 상태다.

 

이인철작

일촉즉발 상태인 이곳이 어찌 비무장지대라고 할 수 있겠는가. 더불어 『비무장지대』라는 네이밍에 근거하자면, 폭 4Km의 이 공간을 제외한 북과 남쪽 국토 전체는 역설적으로 『무장지대』란 뜻이 아닌가.

 

지난 70년 간 우리는 분단 현장 남측 『무장지대』에서 분단 정치, 분단 문화, 여타 분단 이데올로기에 의한 온갖 부조리한 현실을 온 몸으로 겪으며 살아왔다. 국토 어디를 가더라도 만날 수 있는 벙커, 참호, 철조망, 그리고 우리들 일상에 존재하는 군사 시설들... 뿐인가, 과거 교련을 위시한 반공과 군사 교육, 관제 행사 동원, 여타 학술과 문화 예술과 대중문화에까지 드리웠던 검열과 블랙리스트의 기억까지 소환된다.

 

김억 작

그 레드 컴플렉스의 작동은 최근에도 남북 관계를 더 경색 시키고, 한발 더 나가 전쟁 위기까지 부추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 사회적 의제에서 한반도 분단 극복과 무장지대 탈출을 위한 지성적 담론과 사회 문화 운동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이동환작

이런 현실에서, 평소 사회 역사적 주제로 작업을 하던 작가들이 정체된 분단 논의에 파문을 일으키려 함께 이 전시에 참여했다. 이 작가들이 직접 체험한 『무장지대』에 대한 예술적 발언이, 지금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는 분단 논의에 던져 지는 짱돌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 김진하

 

오는 2월 26일까지 열리는 '무장지대'전을 많은 관람바랍니다.

 

류연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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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 정오 무렵, ‘류가헌’에서 황규태 선생을 뵙기로 약속했다.
점심같이 먹자는 선생의 연락에 찾아 나섰는데, 좀 늦어버렸다.
그 곳에서 황규태선생 전시가 있는 것으로 여겼으나, 문선희씨 '묻다'란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전시장엔 아무도 없었는데, 의외의 사진을 보며 차분히 감상할 수 있었다.





문선희씨에 대해서 아는바가 없어나, 사진가의 문제의식이 돋보였다.
조류 인플루엔자로 살 처분된 가축의 매몰지를 찾아 다니며 찍었는데,
섞어가는 땅의 디테일이 마치 한 폭의 추상화처럼 아름답기도, 섬뜩하기도 했다.
인간의 잔혹성과 환경오염 현장을 재확인하는 자리였는데, 사진이 그 답을 묻고 있었다.

12월 3일까지 전시가 열리니, 시간내어 한 번 볼만한 전시다.



 


황규태선생을 찾아 2층에 올라가니, 거기서 기다리고 계셨다.
메시지를 보내고 계셨는데, 전화번호를 잘 못 알아 남의 전화에 메시지를 계속 보냈다.
황송하기 그지없었으나, 멋쩍은 웃음만 흘릴 수밖에 없었다.
마침 한정식 선생께도 연락되어 같이 자리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황규태 사단장의 멋진 찝에 편승할 기회가 생겼다.
내 좋아하는 음식을 아신 듯, “돈까스가 좋으냐 중국집이 좋냐”고 물었다.
두 선생님 계신데 내가 결정하는 것이 난처했으나, 빼갈 생각에 중국집이 좋겠다고 말했다.
동네의 가까운 중국집에 갈 줄 알았는데, 세검정의 ‘하림각’으로 가셨다.





지름길인 청와대 길로 들어섰는데, 언제나 드라이브 코스로는 멋진 길이다.
문정부 들어서 쓸데없는 검문을 폐지해 시민들의 호응을 얻고 었으나,
아직까지 청와대 주변에 서성이는 기관총 든 경찰의 모습은 여전했다.






위협적이고 꼴 볼견 풍경이 지나 칠 때마다 걸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한정식선생께서 그 문제를 지적하셨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얼마든지 방위할 수 있지 않냐?’는 거다.
지켜보는 국민만이 아니라, 경호받는 당사자도 기분 좋은 풍경은 아니다.






하해와 같은 사단장님의 은혜로 고급 청요리집에서 오랜만에 목에 때 벗겼다.
유산슬 에다 빼갈까지 곁들인 과분한 점심을 먹었다.
커피는 ‘류가헌’에 와서 마시라는 조예인씨의 배려에 다시 돌아왔다.
난 자판기 스타일이라 커피 맛은 잘 모르지만, 냄새는 죽였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탁자에 두 권의 사진집이 올려졌다.
이한구씨의 ‘군용’과 박종우씨의 ‘DMZ’로 모두 국방부에서 소장해야 할, 질 높은 사진이었다.
이한구씨의 ‘군용’사진집은 오래 전에 본 사진이지만,
이번에 독일에서 출판 된 박종우씨의 ‘DMZ'사진집은 두 선생께서도 감탄하셨다.
12월 26일부터 ‘류가헌’에서 열릴 박종우씨의 “DMZ'사진전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의미 있는 전시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사단장께서 입 호강, 눈 호강 다 시켜주면서, 하사금까지 내려주셨다.
다들 겨울의 쪽방이 추워 고생하는 줄 알지만, 사실은 겨울보다 여름이 더 힘들다.
겨울은 방이 작아 전기장판과 담요만 있으면 걱정 없지만,
더운 여름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30만원을 주시며 오리털 침낭을 꼭 사야한다고 당부하셨는데,
그 돈으로 동자동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실까 걱정스러우신 모양이다.
그러나 침낭은 그 날 오후 ‘나누미’에서 쪽방주민들에게 나누어 주기로 되어있었다.
침낭은 쪽방 사람들 보다 노숙하는 친구들이 더 절실한 물건인데 말이다.






그 날 나누미 행사장에서 침낭을 받아 깔아보니 사이즈가 내 침대와 똑 같았다.
그러나 담요 덮고 자유롭게 자는 것이 좋지, 굳이 침낭에 묶여 잘 필요는 없는 듯 했다.
노숙하는 친구 중에 옷이 제일 허술한 친구에게 건네주기 위해 챙겨두었다.





그러나 사단장께 받은 하사금 사용처를 아직까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오리털파카’를 사 입는 게 뜻을 받아들이는 거지만, 옷은 있는 옷만 해도 죽을 때까지 입고도 남는다.






그 돈으로 정영신씨와 장터 여행이나 떠났으면 좋겠으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엉뚱한 일이 생겨버렸다.


오래전부터 고환에 통증은 있었으나 잠간 잠간이라 견뎠는데,
이젠 통증이 심하게 지속되고 붓기까지 해 병원에 가보아야 했다.
여지 것 병은 모르는 게 약이라며 모든 검진 자체를 거부해 왔는데, 걱정스럽다.
난치병이라면 진통 치료만 받을 작정이다.

아무튼 별일 없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1984년 6월26일 서울 경운동 아람미술관에서 열린 현실과 발언의 다섯번째 주제전 ‘6·25전’ 출품작으로 첫선을 보인 <디엠제트>는 작가 김용태의 대표 걸작이자 마지막 작품이다. 당시 사진콜라주라는 새로운 형식과 ‘기지촌 여성들과 미군의 사진’을 내건 강렬한 주제의식으로 문화계 안팎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사진은 훗날 재전시회 때 원본이 아니라 저장해놓은 사진 파일을 활용해 만든 것으로 사진작가 고 김영수가 찍었다.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6번째 이야기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는 지난 5월 작고한 김용태(그림) 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이사장이 끝내지 못한 구술을 그와 더불어 한 시대를 헤쳐온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대신 들려주는 기획이다.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필진 가운데 20여명이 기꺼이 나섰다. 여섯번째로 조각가 이태호씨가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의 주제전 ‘6·25전’에 출품해 큰 반향을 일으켰던 작가 김용태의 대표작 <디엠제트>(DMZ)를 소개한다. 이어 고영직, 문영태, 박인배, 심광현, 유홍준, 이애주, 이종률, 임진택, 조성우, 홍선웅, 황석영씨 등이 필진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사진 190장 콜라주 작품 ‘DMZ’
사진속 한국 여성과 미군 통해
휴전·분단이라는 우리의 현실을
호소력있게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훗날 “여성들에게 미안하다”며
사진들을 없애 원본은 이제 없다
‘DMZ’는 마치 불꽃놀이처럼
하늘위에서 폭발하고 사라졌다

 

■ ‘현실과 발언’의 청년시대

 

 

1980년은 내 생애에서 가장 흉흉하고, 불길하고, 우울했던 해로 기억된다. 기억 속에서는 내내 계엄령 아래서 살았던 것 같다. 5·18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지만, 그 엄청난 소식도 ‘카더라’와 소문에 의해 더듬더듬 알게 됐다. 김재규가 사형당하고, 친구들이 어디론가 잡혀갔고, 갑자기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했다. 이어 체육관 선거에 의해 새 대통령이 선출되는가 했더니, 곧바로 전두환 대통령이 등장했다.

 

 

그해 12월 말 밤늦은 귀갓길에서 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다리가 부러져 두 달 가까이 깁스를 하고 지내야 했다. 병원에서 누워 있던 그때 ‘현실과 발언’의 최민과 성완경 두 분이 찾아왔다. 회원으로 같이 활동해보자 했다. 두 분의 방문 자체가 황송해 나는 앞뒤 생각도 없이 무조건 “예”라고 답했다.

 

 

‘미술은 현실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라는 게 당시 미술인 대부분이 인정하는 정답이었다. 미술은 냄새나고 구차스런 현실을 떠나 어떤 고상한 것, 어떤 아름다운 것과 함께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현발’은 그 이름에서부터 정답을 무시하고, ‘현실’ 뿐만 아니라, ‘발언’까지 들고 나온 미술그룹이어서 당연히 내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그 창립전이 ‘촛불전시회’가 되고, 결국 취소되는 사태를 겪은 뒤 나는 현발과 거리를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나는 꼼짝없이 모더니즘에 의해 만들어진, 개인주의와 작가주의에 찌든, 이리저리 집단으로 몰려다니거나, 누굴 대표해 발언하거나, 또 그런 일로 쓸데없이 주위의 주목받는 것을 싫어하는, 나름 깐깐한 미술쟁이였으니까.

 

 

하지만 생각과 달리, 나는 현발과 함께하기 시작하면서 나도 모르게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때 내가 참여하고 있던 여러 미술그룹 가운데, 현발은 확연히 달랐다. 거기에는 ‘학벌’이니 ‘동문’이니 하는 게 없었고, 강요되는 ‘선후배 서열’도 없었다. 아니, 그런 것이 없는 게 아니라, 그런 것보다 훨씬 중요한 주제들 앞에서 그런 것들의 존재감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무엇보다도 현발은 재미있었고, 지적 자극과 도전이 있었다. 회원들은 음주가무에 있어서도 탁월했지만, 토론과 의견 개진에도 누구 하나 뒤처지는 일이 없었다. 특히 다른 곳에서는 만날 수 없는 ‘현실’에 대해 연구하는, 그리고 미술이 그것에 어떻게 대응하고 반영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모색하고 실천하는 연습장이자 경기장이었다.

 

 

나도 그러했지만, 많은 회원들이 당시 미친 듯한 속도로 ‘산업사회’로 변모하고 있는 한국사회 현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일부는 그러한 현실을 강요하거나 주도하는 정부 혹은 대기업 등 권력에 예리한 관찰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현발의 주제전 ‘제2회 도시와 시각전’과 ‘제3회 행복의 모습전’은 그런 배경에서 가능했다.

 

 

그리고 4회전의 주제는 ‘6·25’로 정했다. 민족국가 형성 이후 6·25는 최대의 사건이었지만 한국 미술에서 그것을 다룬 작품은 실로 미미했다. 그러한 한국미술사의 기이한 현상을 두고 자성하는 의미의 토론을 하다가 ‘6·25’가 그 해 전시의 주제로 정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 김용태의 작품 ‘디엠제트’의 폭발

 

 

그 ‘6·25전’에 김용태는 작품 <디엠제트>(DMZ)를 내놓았다. 이 작품은 단번에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김용태는 동두천과 의정부 등 미군부대 주변의 사진관을 찾아다니며 손님들이 촬영한 뒤 찾아가지 않고 있는 사진들을 구해 왔다. 그리고 검은색 배경 위에 그 사진들을 이어 붙여 영어 대문자로 ‘DMZ’를 만들었다. 모두 800여 장을 수거해 왔다는데, 최종적으로 작품에 사용된 사진은 180여장으로, 크기는 3×5에서 11×14인치까지 다양했다.

 

 

되돌아보니, 작품 ‘디엠제트’를 나는 3회에 걸쳐 각각 다른 장소와 시간에서 만났다. 맨 처음은 역시 현발의 <6·25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84년 인사동 아람미술관에서였다. 그리고 두번째는 88년 뉴욕의 아티스츠 스페이스에서 열린 <민중미술전>(민중 아트-어 뉴 컬처럴 무브먼트 프롬 코리아)에서였다. 바로 한국의 민중미술을 세계 미술의 중심부에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전시회였다. 그리고 마지막은 2012년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현실과 발언-30년전>이었다.

 

여기서 작품 <디엠제트>의 특징과 내 느낌을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그 감동은 낯설고 도전적인 작품의 형식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사진들은 작가가 직접 촬영한 작품이 아니다. 또한 존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 작품처럼 작가가 이미지를 기술적으로 조작하거나 합성해서 만든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제작된 사진을 김용태 작가가 발견해 수집한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발견된 사물’이다. 그 사진들은 원본 자체에는 아무런 조작 없이, 작가에 의해 디엠제트라는 글자로 배열됐을 뿐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차용’ 방식이다.

 

 

그 사진들이 한국에 있는 미군부대 주변의 사진관에서 제작됐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것은 80년대 한국이라는 독특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역사적, 장소적 맥락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런 점을 ‘장소 특정적’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말도 모더니즘의 ‘보편성’의 개념에 대응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용어라 할 수 있다.

 

 

둘째로는 작품의 주제와 내용이 지닌 호소력과 설득력이다. 그 작품은 물건으로서의 미술품이라기보다는 개념과 기호로 소통하고 공감을 나눈다. 그래서 작품 <디엠제트>는 일종의 ‘개념미술’이다. 그것은 한국의 당장의 현실을 얘기할 뿐만 아니라, ‘비무장지대’라는 추상어를 구체적 이미지로 보여준다. 전쟁이 끝나지 않은, 휴전과 분단 상태에 있는 우리를 일깨우는가 하면, 우리가 여전이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의존상태에 있음을 확인시킨다.

 

 

그 사진에서 우리의 시선은 미군 병사의 모습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과 함께 있는 한국의 여인들과, 병사의 배경에 있는 풍경들에 관심을 간다. 사진 배경에는 한국의 기와집과 초가집 등 그들에게 이국적인 풍경이 있는가 하면, 국적 불명의 고층 빌딩이 즐비한 대도시도 있다. 그야말로 모두 ‘키치’들이다.

 

 

하지만 그런 배경 앞의 미군 병사들이 비선택적으로 한국에 와서 삶의 한동안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미국의 시골 출신이 많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리고 “나는 지옥에서 시간을 보냈으므로 천국에 갈 것을 확신한다”는 배경의 글에서 한국을 지옥이라 했다고 분노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에도 나는 그리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 글에서 한국은 우리가 사는 한국이 아니다. 군 복무로서 한동안 보내는 그들의 시간과 공간일 뿐이다. 솔직히, 우리들도 제대 뒤 흔히, 근무하던 부대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런 차원일 것이다.

 

 

그 사진들이 내게 의미있는 이유는 병사들의 포즈나 배경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여기에 있어야만 하는 이 세계, 그 구조를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진들 중에 특별히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한 한국 여인이 흑인과 백인 아이를 함께 안고 있는 사진이다. 완전히 다른 피부색의 두 아이를 가진 그 여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면서 가슴이 짓눌리는 듯한 통증을 느끼는 것은 결코 나만의 체험이 아닐 것이다.

 

 

지난 ‘현실과 발언 30년전’의 인터뷰에서 김용태 작가는 전시회 이후 생각해보니 자신이 그 사진에 나오는 여인들에게 몹쓸 짓을 한 것 같다고, 미안하다고, 그래서 그 사진들을 모두 없애버렸다고 말했다. 그래서 작품 ‘디엠제트’의 원본은 이제 세상에 없다. 그것은 불꽃놀이처럼 하늘 높이 날아올라 폭발한 뒤 사라졌다. 지금 우리가 보는 그의 작품은 사진작가 김영수의 사진 복사본이다. 이는 개념미술가로서의 김용태를 잘 드러내는 일면일지도 모른다. ‘작품=물건=상품=매매’라는 도식이 그의 머리에는 없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 ‘디엠제트’ 이후, 미술 현장을 떠났다. 그 대신 삶의 현장으로 갔다. 문화를 통한 사회변혁이 그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보였다.

 

 

■ ‘디엠제트’를 입체작품으로 세우자

 

 

김용태 작가가 투병중일 때 나는 작가에게 작품 ‘디엠제트’를 입체로 제작해 세울 것을 제안했다. 그것은 미국의 팝아티스트 로버트 인디애나의 입체작품 <러브>(LOVE)를 보면서 갑자기 든 생각이었다. 그는 영어 ‘LOVE’란 글자를 회화로뿐만 아니라 입체작품으로도 만들어 세계 여기저기에 세워놓고 있었다. 작품으로서의 가치는 ‘디엠제트’가 ‘러브’보다 못할 게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 조각가인 내가 도와드릴 테니 어서 병석에서 일어나 함께 일도 하고 재밌게 살아보자는 취지에서 한 말이었다.

 

 

그런데 김용태 작가가 세상을 떠난 이제 이 제안은 수사를 넘어 하나의 필수 사업이 돼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꿈꾼다. 통일되는 그날을 위해 그의 작품 ‘디엠제트’가 기념비로 서는 것을, 그리고 마침내 통일이 되어, 철조망도 사라지고, 그래서 디엠제트도 사라진 뒤, 그 땅 한가운데에 김용태의 ‘디엠제트’ 기념비가 서는 것을.

 

 

이태호 / 현실과 발언 동인·경희대 교수

 

 

1984년 ‘6·25전’ 출품작 <디엠제트>에 쓰인 실사 사진 가운데 일부.

 

 “우월감 젖은 미군의 점령군 행세 폭로한 것”

 

용태형이 말하는 ‘DMZ’

 

 

“다섯번째 주제전 ‘6·25’을 2개월 남짓 앞둔 1984년 4월의 어느 일요일, ‘현실과 발언’ 회원 일행은 동두천행 시외버스에 타고 있었다. 봄이었으나 을씨년스런 날씨였다. ‘동두천 기지촌’에라도 가보자는 한 회원의 제안에 따른 길이었다. ‘아직 많은 미군기지가 있는 곳이므로, 어쩌면 특수한 문화 형태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들을 품고서였다.”

미술작가로서 마지막 작품이자 대표작인 ‘디엠제트’(DMZ)의 창작 과정과 ‘6·25’전의 의미에 대해 고 김용태 선생이 직접 기고한 글의 한 대목이다.(<현실과 발언>, 열화당 펴냄

 

 

4월 동두천 기지촌 답사 때 처음 보고 충격을 받은 김용태 선생이 사진관을 순례하며 수집한 주한미군과 한국 여성들의 기념사진들이다.

 

 

 

사진속 체념한듯한 여성의 사진
뇌리에 깊게 남아 작품 만들어
미군 장교들이 사진 뜯어내기도
“진정한 작품 이해 없었다”고 회고

 

 

 

“버스에서 내려 약 15분간 걷다 보니 ‘내국인 출입 금함’이란 팻말이 붙어 있는 골목에 당도했다. … 우리의 시선을 유난히 끌었던 장면은 사진과 진열창 속의 많은 컬러사진이었다. … 그 사진들 중에서 국제결혼한 한 쌍의 부부를 볼 수 있었다. 사진 속의 두 사람은 웃고 있었으나 특히 여자의 표정은 삶을 체념한 듯한 우울한 느낌이었다. 이 느낌은 계속 나의 뇌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동두천을 다녀온 지 한달이 넘었으나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 어느 날 중앙청 앞 신호등에서 멈춘 출근 버스 속에서 본 풍경이 자꾸만 아롱거렸다. … 조선조 태조 4년에 창건된 광화문, 그 지붕의 잿빛 기와와 화려한 단청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이 쓴 ‘광화문’ 현판, 그 아래쪽 붉은 대문, 노랑머리의 키 큰 외국인과 곱슬머리의 젊은 한국 여인, 해태상, 동상마냥 서 있던 전투경찰의 자세, 일제 때 지어진 중앙청 건물, 그 뒤쪽의 장엄한 인왕산 등등.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역사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한 충격이었다. 동두천 사진관에서 느꼈던 ‘분단의 현실’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날 이후 김용태는 혼자서 동두천을 여러 차례 오가며 진열창 속의 사진들을 하나둘씩 수집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사진관 주인과 장기·바둑·화투를 놀아 주고 때로는 막걸리를 대접하며, 한 장에 300~500원씩 흥정하거나 1천~2천원까지 지불하며 모두 800장을 모았고, 그 가운데 190여장을 골라 출품했다.

 

 

마침내 그해 6월26일 아람미술관에서 열린 ‘6·25’ 주제전에서 당시로는 파격적인 사진 콜라주 형식의 ‘디엠제트’는 전례없는 “대박”이 났다. 하지만 정작 김용태는 관객의 반응을 두고 “내 작품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관심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되었다. 다만, 왜 이런 사진들이 미술전시회에 나와 있는가란 의구심과 6·25란 역사적 주제와 이 사진과의 관계는 무엇이냐라는 질문은 많이 받았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에이에프케이엔>(AFKN)의 프로듀서였던 테리 크라우제의 제안으로, 85년 2월 한달간 미8군 영내에서 ‘2인전’이 열렸는데 첫날부터 일부 미군 장교와 대부분 한국인인 그 부인들의 항의로 사진들이 떨어져 나갔고, 특히 미8군 최고층은 “미국인이나 한국인이나 서로 좋은 이미지를 줄 수 없을 것”이라고 불쾌해했다고 전해지기도 했다.

 

 

김용태는 “동두천 사진들은 그들이 우월감에 젖은, 즉 점령군이란 명목 아래 과시해온 많은 행위들 중에 하나의 표시를 폭로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라고 기고문을 마무리지었다.

 

 

[한겨레신문]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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