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자궁
정복수展 / JUNGBOCSU / 丁卜洙 / painting


2015_1105 ▶ 2015_1201 / 월요일 휴관



정복수_화가의 자궁-번식_캔버스에 유채_193.9×259.1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41015c | 정복수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트렁크갤러리TRUNK GALLERY

서울 종로구 북촌로5길 66(소격동 128-3번지)

Tel. +82.2.3210.1233

www.trunkgallery.com



정복수의 손-자궁 ● 70년대 후반부터 '기괴한' 혹은 '기이한' 몸을 그려왔던 정복수는 최근 매우 다른 몸을 그리고 있다. 보는 이들을 당혹하게 만들던 그의 저 '벌거벗은 신체'들은 매우 우아하고 아름다운 형태로 자족하고 있다. '보기에 좋구나, 더불어 노닐고 싶다' 웅얼거릴 정도다. 부분기관으로 종횡무진 날아다니거나, 종으로서의 인간 증식을 위해 외롭고 숙명적인 계열체의 한 사슬로 존재하던 이 신체들은 이제 온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뱀들과 교감하며 부드럽게 유영하고 있다. 어떤 첫 탄생의 순결과 평화, 온유함이 은은하게 번진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정복수_뱀과의 하루 캔버스에 유채_91×116.8cm_2011


정복수_뱀과의 하루 캔버스에 유채_91×116.8cm_2011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 변화가 그렇게 급작스럽거나 이상한 건 또 아니다. 80년대의 소위 '검은 그림'을 거쳐 90년대에 그가 끊임없는 변주로 그려 보인 신체들을 떠올려보자. 입/혀에서 성기로, 입/혀에서 항문으로, 또는 입/혀에서 발로 이어지는 내선들만으로 이루어진 그의 기관 없는 신체-인간들은 즉물적이고 원초적인 동물성이나 최소한도로 축소된 사회성을 가리키기보다는 오히려 유기체로 이해되는 신체 '너머', 그 신체를 특정 방식으로 조립하고 규정하는 이데올로기적 사유 '너머'의 해방과 자유를 증명한다. 그가 그린 무수한 부분 신체들은 또 어떠한가. 평자들은 부분신체로 존재하는 그의 인간 이미지들을 주로 '절단'이라는 말로 포착했지만, 절단의 부정성보다는 오히려 '분절'의 해방과 향락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꽤나 많았다. 그렇다, 예를 들어 ♀를 찾아 (신체 없이) 저 홀로 붕붕 날아다니는 ♂는 흥미롭게도 페니스 파시즘의 경쾌한 자기 조롱이고 자기 해체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는 전체주의적 폭력과 억압의 남근이성중심주의를 짊어질 수 없으며, ♀ 또한 모멸을 견디는 수동적인 신체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분절된 팔이나 목에서 내뿜어지는 저 힘찬 줄기는, 사람들이 말하듯 절단과 훼손의 핏줄기가 아니라 해방의 내파가 진행 중임을 알리는 에너지 줄기다. 하늘로 비상할 때 우주선 꽁무니에서 내뿜어지는 에너지가 연상되는 기운이다. 슝~~ 어디론가 날아간다. 어디로? 안 알랴 주징~~. 이렇게 정복수는 고통스런 종의 규범적 생존 연대기에 장난기 많고 제멋대로인 욕망의 풍경을 잇댄다. 이제 신체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아예 신체가 된 기억들은 더 이상 일그러진 억압의 풍경으로 정박되길 거부한다. 남근의 폭력적인 권력을 주장하는 ♂들의 허망한 즉물적 성욕을 폭로하던 80년대의 검은 짐승-신체인간은 서서히 타자를 품고 이야기를 만들어간 시간의 기억으로 변태한다. 이 부분신체들 혹은 기관 없는 신체들은 더 이상 제도와 규범의 강제 위에서 자기동일성을 구축하는 주체가 아니다.


정복수_몸의 초상#4_패널에 색연필_170.5×44.5cm_2015

이러한 변화는 2000년대에 들어와 더 한층 발랄한 기운을 품게 된다. 아마도 이 시기는 화가 정복수가 아버지가 되는 시기가 아니었을까. 「인간의 기쁨」 4개, 「혀의 추억」, 「기쁨의 원형」 4개, 「생의 일기」는 그의 그림 전부를 통틀어 무엇보다 밝고 희망에 차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이 이미지들에서 이빨은 물어뜯기 위함이 아니고, 혀는 독설을 내뿜기 위함이 아니다. 길게 입 밖으로 뻗어 나와 날름거리는 붉은 혀는 기쁨을 노래하기 위해 저 스스로 소리를 내는 풀피리 같다. 몸통도 팔도 잘렸지만 그 부분 신체로 이 인간들은 웃음 속에서 행복 하느라 여념이 없다. 혀들은 상대방을 향해 쏘아댄 폭력적 판단의 독화살 말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가능케 했던 사랑의 밀어를 추억한다. 이렇게 그의 신체 이미지는 다양한 느낌을 담으며 다양한 몸의 지도, 인간의 구조, 마음의 지도, 인생의 일기를 펼친다. 일관되게 더 밝고 더 긍정적이며 더 아름다운 삶을 향해 전진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러나 그의 인간들은 암컷을 향해 달려드는 수컷에서, 단지 수컷 단지 암컷에서, 뉘앙스가 있는 짐승-사람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정복수_얼굴_패널넬에 색연필_28×22.5cm_2015


정복수_손_패널에 색연필_40.5×74cm_2015

이번 전시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인간들은 밝고 은은하고 평화로운 기운 속에서 뱀과 함께 어떤 시작을 알리고 있다. 뱀은 신화와 종교, 정신분석의 세계에서 지혜와 사악함 (즉 선악의 분별과 그것에 따른 판단), 부활과 치유, 그리고 여성의 (유혹하는) 섹슈얼리티와 남성의 (욕망하는) 섹슈얼리티를 가리켰다. 그리고 정복수가 이제까지 보여준 신체 그림에서 입/혀에서 성기로, 입/혀에서 항문으로, 또는 입/혀에서 발로 이어지는 내선들은 저 모든 의미로서의 뱀이었다. 이 뱀이 밖으로 나온 것이다. 첫 생성과 창조의 시공간을 연상시키는 그림에서 (더 이상 성별을 구별할 수 없는) 보살을 닮은 사람이 뱀과, 뱀이 사람과, 또 뱀이 뱀과 이야기를 나누며 유유자적 공존한다. 기관 없는 신체에서 이제 아예 내부가 없는, 아니 내부를 외부로 지닌 신체가 등장한 것이다. 새로운 말 걸기다. 다시 시작해보자는 것이다. 폭력 아닌 말 걸기로, 사악한 판단 아닌 지혜로운 인식으로,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상서로운 잇기로 새롭게 탄생시켜 보자는 것이다. 무엇을? 그건 중요하지 않다. 유기체적 신체-삶의 목표는 이미 버린 지 오래고, 목적은 여정이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날름거림'으로 진행되는 이 탄생의 여정이 어떤 경이로운 미의 세계로 우리를 데려갈지, 정복수의 손-자궁이 어떤 형상들을 잉태할지, 참으로 궁금하다. ■ 김영옥



Vol.20151105b | 정복수展 / JUNGBOCSU / 丁卜洙 / painting






정복수 ‘화가의 자궁’전’이 ‘트렁크갤러리’에서 열렸다.

지난 5일, 이른 시간부터 정복수, 김진하, 정영신, 조 우 등 여럿명이 국립현대미술관 정원 잔디밭에 자리 잡았다.

김진하씨가 사온 막걸리만으로도 충분한데. 박영숙선생께서 안주까지 내다주니 황송하기 그지없었다.

맞은편으로 보이는 ‘트렁크갤러리’와, 창에 배치된 작품의 조화도 일품이었다.

한 밤중에 몰래 와, 트렁크를 통째 들고 가면 되겠다 싶었다.
서늘한 바람과 낙엽 속의 술 맛에 가을은 서서히 저물어 갔다.

오후5시에 열린 개막식에는 작가를 비롯하여 박영숙관장, 신학철, 장경호, 박불똥, 곽대원,

박 건, 이인철, 백창흠씨 등 많은 분들이 오셔서 전시를 축하해 주었다,

전시 뒤풀이는 오후6시경, 삼청동의 모 안가에서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생고기 전문집인데, 고기보다 더 반가운 것은 창문만 열면 자유롭게 끽연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막걸리와 와인을 섞어 마신데다 소주까지 사양 않고 마셨더니, 너무 취해 깜빡 잠이 든 것이다.


그 사이에 별일이 다 있었던 모양이었다,

박불똥씨는 10,26사건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조합해 페북에 올리기도 했다.

심지어 이인철씨가 사진 찍는 모습을 확인 사살하는 장면으로 둔갑시키기도 했다.

졸지에 쪽팔리는 사진이 페북을 도배하게 되었는데,
난 그 곳에서 이미 사망 처리되었으니, 이제 사람이 아니라 유령이다.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혼을 쏙 빼가는 몽달귀신을 아는지 모르겠다.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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