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맞아 미국계신 매형이 귀국하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귀국모임에는 사정에 의해 만날 수 없었지만,

지난 6일 어머니를 모신 일산 추모공원 하늘문에서 만난 것이다.

 

누님 조미희는 암에 걸려 8년 전 세상을 떠나셨다.

누님 생전에, 미국으로 이민가기 위해 모든 가산을 정리한 적도 있었다.

당시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던 매형께서 직장까지 그만두고 준비를 했으나,

출국장에서 제동이 걸려 이민을 포기해야하는 불상사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몇 년 뒤 다시 이민 길에 올라 외로운 이국생활에 적응해 갔으나,

느닷없는 병마를 만나 오랜 세월 키워 온 행복의 꿈이 풍비박산 난 것이다.

혼자 미국에 남게 된 매형은 지난 해 까지만 해도 직장에 나갔으나, 팔순을 맞은 올해부터 일손을 놓았단다.

 

누님께서 세상을 떠날 때와 3년 전 귀국 때 뵙고 처음인데, 건강은 여전하셨다.

나보다 두 살이나 많은데도, 내가 더 늙어보였다.

매형과 일산 사는 동생 조창호를 추모공원에서 만나

납골당에 계신 어머니를 찾아뵈며, 오랜만의 해후를 풀었다.

 

  인근에 있는 식당 강강수월래로 옮겨 회덮밥에 소주 한잔 했다.

5년 후에 살아 있다면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받았으나, 아무래도 마지막인사가 될 것 같았다.

부디 건강하시길 빕니다.

 

사진, / 조문호

 

장소가 생각나지 않는데, 지난 번 귀국 때 찍은 사진같다.

지난 26일은 정선 만지산에 계신 어머니를 하늘문납골당에 모시는 이장 날이다.

하루 전 정영신과 함께 정선 귤암리로 갔으나, 쉼 없이 내리는 비 때문에 걱정이 태산 같았다.

13년 전 어머니 장례 때도 장대 같은 비가 내려 난장판이 된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비에 가려 지척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 딸이 타고 오던 승용차가 개울에 빠져 병원에 입원 하는 등 한 바탕 난리를 쳤다.

쏟아지는 소나기를 뚫고 산 위까지 시신을 옮겨야 하는 상여꾼들의 고생은 말할 것도 없고, 흙 또한 흙이 아니라 찰떡이었다.

찰흙이 장화에 달라붙어 발이 떨어지지 않아 걸음조차 제대로 옮길 수 없었다.

어떻게 장례를 치뤘는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고향 선산을 두고 정선 만지산에 안장할 것을 제안한 나는 가족 볼 면목도 없었다.

어머니께서 생전에 내 죽으마 절대 너거 아부지 옆에 묻지 마라입버릇처럼 하신 말씀을 믿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미워 한 말을 곧이곧대로 옮겼으니 하늘이 난리법석을 친 것 같았다.

어머니 말씀을 거스를 수도 없었지만 가까이 모시고 싶은 욕심도 한 몫했다.

 

오래된 이야기를 새삼 꺼내는 것은 그때처럼 비가 내려 걱정이 되어서다.

날씨 때문인지 오기로 한 가족들도 당일 새벽에 오거나 원주 화장터로 바로 오겠다며 일정을 바꾸어 버렸다.

아무튼, 일할 분들이 오기로 한 아침에라도 비가 그쳐주길 바랄 뿐이었다.

 

만지산에 오후 세시 쯤 도착했으나, 불 난 집은 보기도 싫어 곧바로 창수네 집부터 들렸다.

이선녀씨는 비 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란 노랫말처럼 일터에 가지 않고 술판을 벌여 놓았다.

집안 버팀목이었던 창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창수마저 오락가락하고 있으니 일하기 싫은 모양이다.

그 많은 자기 땅을 놀려두고 다른 집에서 일해주며 사는 것도 사람이 그리워서다.

술 한잔하며 하는 하소연에는 반가운 소식도 있었다.

새처럼 중국까지 날아간 꿈을 꾸었는데, 중국 군중들로부터 큰 환대를 받았단다. 꿈마저 그녀 이름처럼 동화적이다.

그 꿈을 꾼지 얼마 후, 창수 아버지가 농어촌공사에 남기고 간 빚 2억을 갚을 수 있었다고 한다.

방치한 역전 땅이 공원 부지로 바뀌며 정선군에서 보상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금방 찐 옥수수를 안주 삼아 막걸리를 권했으나, 차 때문에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늦기 전에 머물 방을 부탁해 놓은 최영규씨 댁으로 옮겨가야 했다.

아랫만지로 내려가니 지척이 보이지 않았는데, 그때까지 읍내 나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민박집에 가기위해 후진을 하다, 오래전 딸이 빠진 개울 가림막에 부딪혀 뒤 범프가 찌그러졌다.

 비에 대한 징크스 액땜이라며 스스로 위안했다.

 

몇 년 만에 들어가 본 최연규씨 민박집은 놀부 대궐집처럼 지어 놓았다.

방이 네 개인데다 마루 한가운데 노래방 기계와 술상까지 있으니, 모여 놀기 딱 좋은 공간이었다.

일찍부터 잠잘 준비를 하는데, 차 소리가 나며 최영규씨 내외가 들어왔다.

정선에서 오는 길에 술과 안주까지 사 온 것이다. 술잔에 만지산 비화를 담아 낄낄거렸다.

 

난, 최영규씨를 대궐 같은 놀부집에서 흥부같이 사는 사람'이라 말한다.

동년배기도 하지만 만지산 사는 분 중에 유일한 친구다.

오래전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시어 전화로 묏자리 좀 빌려 달라 했더니, 두말없이 마련해 주었다.

상여꾼 모으는 일에서 부터 그 초상집 난장판 정리를 다 해준 사람이다.

내가 해줄 수 있었던 것은 사진 작품 한 점 선물한 것뿐이다.

그날도 민박 사용료를 주었더니, 가족이 오지 않아 받을 수 없다며 돌려주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보니 다행스럽게도 비가 그치고, 앞산에 걸린 구름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반겼다.

좀 있으니 동생 창호가 도착했고, 뒤이어 이장을 맡은 업체에서도 도착했다.

 

 

산신제와 어머니께 간단한 예를 올린 후 땅을 팠으나, 비에 젖어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만약 육탈이 되지 않았다면 원주 화장장까지 가야 하는데, 화장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마침 한순식씨가 일하러 가지 않아 굴삭기를 불러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다.

굴삭기 사용료를 주었으나, 기어이 받지않겠다고 우겨 식사라도 하라며 운전석에 묻어두었다.

 

관을 열어보니 다행스럽게도 육탈이 완전하게 되어 유골만 남아 있었다.

일하는 분이 정성스럽게 유골을 수습하여 현장에서 간이화장을 할 수 있었다.

 

급히 가족들에게 원주 화장장으로 오지 말고 일산 납골당으로 오라는 연락을 했다.

시간이 줄어들어 서둘 필요도 없이 천천히 고양시 하늘문납골당으로 갈 수 있었다.

가는 길에 '횡성한우직매장'에 들려 아침 겸 점심을 동생이 샀는데,

부드러운 육질의 쇠고기가 입에 착 달라붙었다. 횡성한우가 왜 비싼지 이해되었다.

 

납골당 하늘문을 찾아가는 긴 시간은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그 동안 한 달에 두 번씩 갈 때마다 어머니를 보살피기는 했으나 아무도 찾지 않는 외딴곳에서 얼마나 외로웠겠는가?

가족들도 일 년에 한 차례는 어머니 뵈러 왔는데, 생전에 지극히 좋아한 막네 손녀 은겸이의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남달랐다.

가족들도 처음에야 강변길 따라가는 정선 풍경이 좋았겠지만, 서너 시간의 운전 길이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다들 운전 하느라 정동지가 유골함을 안고 가는 것도 편치 않았다.

 

납골당 하늘문에 도착해 보니 많은 가족이 나와 있었는데, 이 얼마 만의 반가움인가?

누님 조영희, 형님 조정호, 동생 조진옥을 비롯하여 형수 김순화, 매부 김종성, 조카 조향, 조웅래, 조은겸,

박홍전, 박유정 등 일이 있어 못 온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와 있었다.

예쁜 녀석들이 아줌마가 되어버린 조카들 모습에서 세월의 빠름을 절감했다.

 

진주청국장‘하던 누님이 장사를 접었다는 소식도 전해 주었다.

진주에서 여의도로 여의도에서 강남으로 옮겨 온 수십 년의 사업이지만 건물 개축으로 밀려났다고 한다.

코로나 시국인지라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않고 당분간 폐업에 들어갔단다.

식당 일이 진저리가 날 만도 한데, 누님은 일이 없으니 몸이 편치 않다며 불만이다.

 

매년 기일마다 납골당에서 모이기로 약속하는 걸 보니, 가까이 모신다고 해서 자주 뵙는 것도 아니었다.

, 납골당 마저 가족들이 추억하기 위한 공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자연과 융화된 육신 따라 유골도 자연으로 돌려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토록 혼줄이 났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리 삐딱한 생각만 하는지 모르겠다.

 

어머니를 안치하며 차례대로 영원한 안식을 기원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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