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초상사진 찍다 별 일을 다 겪는다.

노숙하거나 쪽방에 살면 누구던지 찍는 것이 아니라

찍을 대상의 기준을 정해두었으니, 마땅한 대상을 찾기가 쉽지 않다.

 

가난하게 살아도 당당하게 사는 사람이 흔치 않은데다,

술 마시지 않은 온전한 정신 상태에서 본인이 요청해 오기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다.

더구나 일체의 연출이나 보정 없이 있는 그대로를 노출하는 사진이라 잘 나서지 않았다.

 

대개의 사람들이 사진 찍히기를 싫어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다.

'모든 것을 지우고 싶은데 사진은 남겨 무엇 하냐?'는 것이다.

그리고 쪽방주민들은 대부분 영정사진을 만들어 놓은데다,

노숙인은 사진 둘 곳이 없어 찍어 줘도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접근방법을 달리하여 찍어달라고 할 때까지 기다리며, 스스로를 광고했다.

그동안 언론사 인터뷰 요청까지 거절해가며 동등한 위치임을 자랑삼았으나, 쪽팔려도 약력을 까 발렸다.

기존 영정사진과 달리 한 장의 초상사진으로 영원히 남기겠다는 각오로 임했다.

아무리 사람을 찍어 왔지만, 짐승보다 못한 인간은 찍지 않는다며, 어깨 힘도 주었다.

 

어차피 전시가 끝나면 사진은 본인에게 돌려줄 것 이지만,

이중으로 돈 들여 사진 찍는대로 인화해 준 것이 소문이 난 것 같았다.

요즘은 나의 뜻에 동조하는 사람이 하나 둘 늘고 있다.

아무리 모델로서 그럴싸해도 자격을 갖추지 않으면 찍지 않았다.

 

그리고 이 일은 지속적으로 해야 할 일이라 서둘 일은 아니었다.

량이 아니라 질이 중요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작품성보다 당사자의 정신력이 더 중요하다.

 

며칠 전에는 음악이 좋아 통기타 하나 챙겨들고 떠돌다

쪽방에 입주한 위수범씨를 우연히 만났는데,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사진보다 자신의 삶에 자긍심을 갖는 일이 우선이라 길바닥에 퍼져 앉아 이야기부터 나누었다.

 

거지처럼 사는 것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며,

돈 번 사람보다 돈을 벌지 못했기 때문에 더 잘 살았다는 위안에 그만 울고 말았다.

울음을 멈춘 후 사진을 찍었으나 슬픈 표정 즉 감정이 노출되어 실패했다.

사진은 나중에 다시 찍으면 되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잘 살았다는 자긍심을 갖는 게 초상사진 찍는 목적이기 때문이다.

초상사진은 당당하게 스스로를 내 세울 수 있어야한다.

 

그 다음 날은 김상진씨를 만나 찍었으나, 그 역시 눈물이 고였다.

돈 때문에 가족을 잃었지만, 잘못 산 인생은 아니라는 것이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돈벌레 보다 얼마나 인간적이냐?

 

사진이야 다시 찍으면 되고, 그것도 아니라면 만족할 때까지 찍으면 된다.

돈 벌기 위해 하는 일이라면 할 수 없겠지만, 이렇게 사는 것이 좋다.

일이 아니라 나의 놀이며 내가 가야 할 길이다.

 

사진, 글 / 조문호

 


고종 초상 사진. 제공-국외소재문화재재단 © News1



(서울=뉴스1) 박창욱 기자 = 한국 근대 서화가이자 사진가인 김규진(1868~1933)이 1905년 경운궁(덕수궁)에서 촬영한 황제복식 차림의 가장 오래된 고종황제 초상 사진이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조사를 통해 확인됐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안휘준)은 지난 4월 미국 뉴어크박물관(Newark Museum)에 소장된 한국문화재에 대한 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 박물관에 소장된 고종황제 초상 사진이 지금까지 알려진 한국 사진가가 촬영한 대한제국 황실 사진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5일 밝혔다.

이 고종황제 초상 사진은 1905년 덕수궁에서 김규진이 촬영해 미국 외교사절에 제공한 것으로 촬영 장소와 시기, 그리고 사진가 이름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어 큰 의미를 갖는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사진뿐 아니라 사진이 부착된 앨범과 이 앨범이 보관된 목제 상자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아울러 이 사진은 입수 경위도 명확하며 복제본이 아닌 오리지널 프린트라는 점에서 매우 가치가 높아 우리나라 근대사 연구 및 사진사 연구에 있어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김규진은 그동안의 연구에서 대한제국 황실의 사진가로 활동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 전하지 않았다. 이번 발견으로 김규진이 황실 사진가로 활동하였음이 증명되었을 뿐 아니라, 1907년에 천연당(天然堂) 사진관을 열기 이전부터 사진가로서 활동하였음이 확인됐다.

또 이 사진이 덕수궁 중명전(重明殿) 1층 복도에서 촬영되었다는 점도 밝혀졌다. 사진 아랫부분을 보면 서양식 타일이 있는 바닥에 카펫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는데 타일 문양을 비교해 보았을 때 현재의 덕수궁 중명전 1층 복도의 타일과 일치하고 있다.

이번 조사에 참여한 장진성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고종 초상 사진은 여러 점이 전하지만, 뉴어크박물관 소장 고종 초상 사진은 연대와 작가가 함께 작품에 기록된 유일한 예”라며 “단순히 왕의 초상이라는 미술사적 가치를 넘어 1905년 격동하던 한국근대사의 양상을 알려주는 역사적 가치도 지니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 사진은 미국의 철도 및 선박 재벌이었던 에드워드 해리먼(1848~1909)의 소장품이었던 것을 그 부인이 1934년 뉴어크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해리먼은 1905년 당시 대통령 루즈벨트(1858-1919)의 지시로 증기선 만주호(SS Manchuria)를 타고 아시아 각국을 순방했던 미국의 대규모 외교사절의 일원이었다.

그는 1905년 9월 대한제국 황실을 예방하였다. 고종 초상사진을 비롯해 그가 갖고 있던 한국문화재들은 당시 황실에서 선물로 받은 것으로 보인다. 유사한 초상사진이 미국의 프리어-새클러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는 고종이 순방단의 또 다른 일원이었던 루즈벨트의 딸 앨리스 루즈벨트(1884-1980)에게 선물하였던 것이다.

당시 고종은 일본의 한국 병탄 의도가 날로 드러나는 가운데, 미국의 도움을 얻고자 순방단을 극진히 대접했다. 그러나 미국 사절단은 한국 방문에 앞선 일본 방문에서 일본과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상호 인정하기로 한 상태였다.

해리먼이 뉴어크박물관에 기증한 한국문화재는 이외에도 갑주(甲?) 일괄품과 조선 말기 화원화가였던 석연(石然) 양기훈(1843-1919 이후)의 노안도(蘆雁圖)도 두 폭이 있다. 갑주 일괄품은 한말 한국에 왔던 외국인들에 의해 많이 수집되었던 고급 갑주로써, 잃어버리기 쉬운 투구의 첨대와 술장식까지 거의 모든 구성품이 완전하게 남아있다. 전용 칠기 보관함과 함에 담는 의향(衣香)까지 그대로 남아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두 유물 역시 해리먼이 대한제국을 방문했을 당시 고종의 초상사진과 함께 황실에서 선물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뉴어크박물관에서 조사한 한국문화재 자료를 모두 정리하여 도록 형태의 보고서로 간행할 예정이다.
cup@

 

 

‘우리시장 기 살리기 운동인 ‘장에 가자’ 인사동 전람회가 이제 후반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동안 우리시장을 사랑하는 관람객들에게 초상사진을 찍어 이메일로 보내드리기로 했으나
작업량이 많아 계속 지연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정리할 틈도 없지만,

찍힌 분들의 성함이 헷갈려 계속 혼돈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인상착의를 대충 기록해 두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네요.

부득이 지난 2일부터 앱숀 휴대용 프린트를 준비해 두고 현장에서 직접 뽑아드리는데,
사진을 받은 모든 분들이 너무 좋아하셔서 일하는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오는 17일까지 이어지는 ‘장에 가자’ 전람회에 들려 좋은 추억을 남기시기 바랍니다.

 




 

고) 홍수진 (시인)

 

김용문 (도예가)

 

김창숙 (탈랜트)

 

장경호(서양화가)

 

박구경 (시인/보건진료소장)

 

황명걸(시인)

 

김정남 (피리 연주가)

 

이유나 (춤꾼)

 

박중식 (시인)

 

김상현 (뮤지션)

 

정기호 (서양화가)

 

강 민 (시인)

 

무세중 (행위예술가)

 

김명성 (시인/사업가)

 

이목일 (서양화가)

 

고) 최영해 (시인)

 

송상욱 (음유시인)

 

강찬모 (서양화가)

 

신명덕 (목공예가)

 

이강용 (서양화가)

 

김덕수 (사물놀이꾼)

 

안재희 (연극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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