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맞아 미국계신 매형이 귀국하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귀국모임에는 사정에 의해 만날 수 없었지만,

지난 6일 어머니를 모신 일산 추모공원 하늘문에서 만난 것이다.

 

누님 조미희는 암에 걸려 8년 전 세상을 떠나셨다.

누님 생전에, 미국으로 이민가기 위해 모든 가산을 정리한 적도 있었다.

당시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던 매형께서 직장까지 그만두고 준비를 했으나,

출국장에서 제동이 걸려 이민을 포기해야하는 불상사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몇 년 뒤 다시 이민 길에 올라 외로운 이국생활에 적응해 갔으나,

느닷없는 병마를 만나 오랜 세월 키워 온 행복의 꿈이 풍비박산 난 것이다.

혼자 미국에 남게 된 매형은 지난 해 까지만 해도 직장에 나갔으나, 팔순을 맞은 올해부터 일손을 놓았단다.

 

누님께서 세상을 떠날 때와 3년 전 귀국 때 뵙고 처음인데, 건강은 여전하셨다.

나보다 두 살이나 많은데도, 내가 더 늙어보였다.

매형과 일산 사는 동생 조창호를 추모공원에서 만나

납골당에 계신 어머니를 찾아뵈며, 오랜만의 해후를 풀었다.

 

  인근에 있는 식당 강강수월래로 옮겨 회덮밥에 소주 한잔 했다.

5년 후에 살아 있다면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받았으나, 아무래도 마지막인사가 될 것 같았다.

부디 건강하시길 빕니다.

 

사진, / 조문호

 

장소가 생각나지 않는데, 지난 번 귀국 때 찍은 사진같다.

 

 둘째 누님 (조미희(69) / 세실리아)께서 지난 15일 세상을 떠났다.

 

전시 준비로 문병을 미루어오다,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은 14일에서야 서둘러 부산으로 내려갔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던 누님께서 잠시 나를 알아봤을 뿐,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얼마나 간절한 기도를 올렸으면, 손에 쥔 십자가가 묵주처럼 매끄러웠다.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지난 세월의 아련한 추억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계속되는 전시 스케줄에 쫒겨 이틀 날 아침 부랴부랴 상경하였는데,

서울 도착하기가 무섭게 임종하셨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16일 오후10시 무렵에야 도착한 부산 성모병원 장례식장에는

매형 조한길씨를 비롯하여 조카 조은상, 조가을, 동생 조창호, 조진옥, 매제 김종성씨 등

가까운 가족들만 침통한 표정으로 모여 있었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누님의 장례미사는 17일 오전9시 무렵,

성모병원 영결식장에서 장엄하게 치루어졌다.

 

 유골은 납골당이 있는 김포 사당에 안치했는데,

매형께서 일가 유골을 한 곳에 모실 수 있는 사당을 만들어 두어,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설날인 삼오제에는 모두들 김포사당에 모여 제를 올리기도 했다.

 

“고생만 하다 떠나버린 불쌍한 누님! 부디 영면하시어 편안히 쉬십시요.”

 

 

 

 

 

 

 

 

 

 

 

 

 

 

 

 

 

 

 

 

 

 

 

 

 

 

 

 

 

 

 

 

 

 

 

 

 

 

 

 

 

 

 

누님 이야기

 

누님은 어린 시절 부모님의 사랑을 제대로 받고 자라지 못했다.

9남매 중 6번째로 태어난 여식이라 교육에서부터 모든 순위가 다른 형제자매에 밀렸던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형님이 집어던진 나무토막에 눈을 맞아 실명 위기를 맞기도 했다.

아버지께 운동화를 사 달라며 조르던 형님께서 따라오는 동생을 쫓으려 목제소에 나딩구는 나무토막을 던졌는데,

그게 하필이면 누님의 눈에 맞았던 것이다. 실명은 면했지만, 여성으로서 치명적인 상해였다.

 

그래서 인지 누님은 어릴 적부터 자립심이 남달랐다.

일찍부터 낯설은 서울로 올라가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형제자매 중 가장 먼저 자립하여 사당동에 대궐 같은 집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이르기까지 근검절약은 물론 자린고비처럼 돈을 쓰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들이 편히 쉴 때, 누님은 일 했고, 남이 배부를 때, 누님은 배를 곯았다.

 

한 때는 미국 이민가려 모든 가산을 정리한 때도 있었다.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던 매형께서 직장까지 그만두고 이민을 준비했으나 

출국장에서 크레임이 걸려 이민을 포기해야 하는 불상사가 생겼던 것이다.

 

몇 년 뒤 다시 이민 길에 올라 외로운 이국생활에 적응해 나갔으나, 세상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고생을 너무 많이 한 탓인지, 중병에 걸려 지난 여름 급기야 귀국하게 된 것이다.

이국 땅의 근거를 놓치지 않으려고 매형까지 미국에 남겨 둔 채 말이다.

 

병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궁암에서 방광암으로 전위되고, 급기야는 폐암으로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다.

그까짓 돈이 대관절 무엇이길래...

 

사진,글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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