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1일은 돌아가신 어머니 기일이었다.

20여 년 동안 정선 만지산에 어머니를 모셔 두고 제사를 지냈는데,

묘지 벌초하는 모습을 지켜본 조카의 만류도 만류지만,

거리가 멀어 자주 올 수 없다는 가족들의 원망에 손을 들고 말았다.

 

어머니 유골을 일산 '하늘문 납골당에 모신 후, 제사마저 인천 형님 댁으로 옮겨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인천 형님 댁에 제사상을 차려놓고, 한쪽에서 예배를 보았으나

그 다음부터 아예 제사상을 차리지 않고 예배만 보아 발길을 끊은 것이다.

밥 한 그릇만 떠 놓아도 혼자 제사 지내는 게 속 편했다.

 

, 무신론자로 제사마저 부질없는 줄 알지만,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제사로 어머니를 기리고 싶은 것이다.

결국 융통성 없는 기독교 교리가 가족 간의 마음을 상하게 한 촉매 역할을 한 셈이다.

 

이번 기일에는 어머니를 모셔 둔 하늘문납골당에서 가족들이 모이기로 했다.

누님 조영희를 비롯하여 형님 조정호, 동생 조창호, 조진옥, 매제 김종성,

그리고 정영신 동지를 비롯한 조카 박홍전, 조아라, 조은겸 등 10명이

 한자리에 모여 어머니를 기리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다들 사는 게 그렇게 바쁜지 집안에 길흉사가 없으면 일 년에 한 번도 만나기 어렵다.

모두 수도권에 살면서도 어찌 남보다 못한 이 지경이 되었는지,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모처럼 집안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건 아니다 싶었다.

형수가 아파 병원에 입원했다는 연락마저 퇴원을 앞두고 한 것이다.

그리고 막네 조카 은겸이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도 주었다.

은겸이는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끔찍이도 끼고 돌아, 누구보다 어머니께서 좋아하실 것 같았다.

 

또 하나 놀라운 소식은 막내 여동생 진옥이가 화가라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우연히 매제 김종성씨가 집사람이 상을 받았다며, 휴대폰으로 이미지를 보여주는데,

수상작보다 자신의 색깔이 뚜렷한 일련의 그림 이미지에 더 놀란 것이다.

남편 뒷바라지나 하며 자식을 키운 아낙으로 살아 온 줄 알았는데,

긴 세월동안 동생이 뭘 했는지도 모르고 살았으니, 귀가 막힐 노릇이었다.

 

하기야! 나 역시 여태 사진집을 출판하거나 여러 차례 전시를 열었지만,

한 번도 식구들에게는 연락하지 않았으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다.

스스로를 내 세우기 싫어하는 집안 내력인 것 같았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릴 때 잠깐 문 닫았던 진주청국장 그만 두겠다는 조카 홍전의 말에 또 한 번 놀랐다.

진주에서 여의도로, 여의도에서 서초동으로 옮겨가며 돈을 많이 벌었으나, 미련 없이 손을 털기로 했단다. 

누님은 자신이 만들어 온 독특한 경상도 음식 맛이 사라질까 아쉬워하지만,

조카 홍전의 쉽지 않은 결단에 존경심이 일었다.

고생하는 어머니를 편히 쉬게 하려는 효도에서 비롯되었지만,

벌면 벌수록 강해지는 돈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욕심은 무섭기 때문이다.

 

모처럼 이산가족이 한자리에 만나는 즐거운 시간이 되었는데.

도대체 누굴 위해 사는지, 산다는 게 뭔 지 모르겠다.

고향도 가족도 잊은 채, 어찌 이리 비정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사진, / 조문호

 

 

 

안애경(64)씨가 광주에서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답니다.

 

안애경씨는 예술감독이며 디자이너, 전시기획자이며 작가로 다양한 재능을 갖고 있다.

그동안 펴낸 서적으로는 '핀란드 디자인 산책', '북유럽 학교 핀란드' ,

'북유럽학교 노르웨이', '북유럽 디자인' 등이 있다.

 

며칠 전 '보안여관'에서 북 콘서트 열 때 가보았더라면 이렇게 안타깝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은 열심히 놀고 일할 때지만, 떠나는데 무슨 순서가 있겠는가?

너무 슬프다.

 

고인을 알게 된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오년 전 인사동 통인가게김완규회장이 초청한 오찬 모임에서 처음 만났는데,

동자동 빨래줄 전시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한 번은 허리가 아파 고생한다는 소문을 듣고,

핀란드 목공예가 세 사람을 데려 와 쪽방에 맞는 침대를 만들어주기도 했고,

쪽방촌 잔치에서 빨래줄 전시가 열리면 찾아 와 힘을 보태주기도 했다.

 

그러한 사람에 대한 인정에 앞서 뛰어난 예술적 감성으로

자연을 끌어안는 삶의 방식은 늘 귀감이 되었다.

 

강연도 몇 차례 들어 보았는데, 생각이 앞서니 모든 게 앞섰다.

오죽하면 우리나라 문화 담당 공무원을 대상으로 순회 강연하라고 부추겼겠는가?

 

떠난 사람이야 천국에서 또 다른 세상을 살겠지만,

귀한 인재를 잃은 마음이 더 슬프다.

부디 극락왕생하시길 빕니다.

 

, 안애경 (64)

 

상주

자매 : 안병애, 안혜경, 안은경

조카 : 조아라, 조아름

조카사위 : 이정훈

 

빈소 : 이대목동병원장례식장 10호실

발인 : 2022 10 10 (월요일) 오전9

장지 : 벽제승화원

 

그동안 찍은 고인의 모습을 모았다.

 

 

 

 

 

 

 

 

 

 

 

 

 

 

 

 

 

 

 

 

 

 

 




양재동에서 ‘진주청국장’ 밥 장사하는 조영희 누님께서 엊그제 팔순을 맞았다.
옛날 같으면 고려장에 들 연세지만, 아직도 주방에서 고군분투하신다.
한 평생을 진주에서 여의도로, 양재동으로 옮겨가며 청국장만 끓여 왔다.
이제 딸 박홍전이에게 식당을 맡겨놓고, 주방에서 맛만 지키신다.
한편으론, 그 지긋지긋한 일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사니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팔순을 맞아 점심이라도 같이 먹자는 연락을 받았는데, 가게 옆 일식집으로 오란다.
‘진주청국장’은 손님이 많아 편하게 드시지도 못하지만, 외식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것도 전 가족이 모이는 팔순잔치가 아니라, 남매만 모이는 오붓한 자리였다.
형님 조정호와 동생 조창호, 조카 조아라, 동지 정영신씨 등 여섯 명이 함께 한 것이다.
작은 누님은 몇년 전 돌아가셨으나, 여동생 조옥희가 급한 일이 생겨 오지 못했다.






평소에는 만나기 힘든 형님께서 나와 반갑기 그지없었는데, 지난 년 말 퇴임 하셨단다.
팔순을 이년 남겨두고 일손을 놓았지만, 시원섭섭한 모양이시다.
재벌총수 댁 집사로서 남의 살림을 도맡아 살다보니, 식당 누님처럼 변변히 노는 날도 없었다.






누님과 형님께선 돈 걱정 안하고 살지 모르지만, 내가 볼 때는 불행하기 짝이 없었다.
좋아하는 취미생활 한번 즐기지 못한 채, 평생 돈에 끌려 다닌 게 아니던가?
동생 창호는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며 산전수전 다 겪었으나,
이젠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생활에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사실, 우리가족은 노는 데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들이다.
형님은 젊은 시절엔 한량이었다. 사교 춤과 당구 등 재주가 다양한 분이라 말씀드렸다.
“이젠 ‘완 투 쓰리 카바레”도 가시고, 당구장도 열심히 다니며 즐겁게 사시라”고...






아직도 철이 안 들었다고 탓할지 모르지만, 돈은 없어도 내가 제일 잘 살았다.
나처럼 꼴리는 대로 살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 아니던가?
가족을 고생시킨 무책임은 면할 수 없지만, 오히려 돈의 노예가 되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팔순을 축하하는 술잔을 들며 나눈 대화는 요즘 사는 이야기는 뒷전이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추억을 먹고 산다 듯이, 다들 옛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어린 시절의 잊을 수 없는 사연들이 줄줄이 나왔는데,
한국전쟁 때 불바다가 되었던 고향, 영산 이야기도 나왔다.






낙동강전투의 마지막 방어지역인 영산은 피비린내 나는 전장의 한 복판이었다.
내 나이 세 살 때라 기억이 흐릿하지만, 딱 한 가지만 생각이 또렷하다.
남산 밑의 미나리꽝을 지나가는데, 총 맞은 군인이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물 달라 통사정하고,
옆에 선 군인은 그냥 가라며 총부리로 위협했다.





등에 업힌 나를 돌려 업고 도망치던 엄마의 거친 숨소리는 아직도 생생하다.
왜 위험한 전쟁터를 지나가야 했는지 이해되지 않았는데. 가게 된 사연을 누님께서 들려주었다.






식구들은 모두 안전한 곳으로 피난하였는데,
동네가 불바다가 되는 바람에 집에 숨겨 둔 패물이 걱정되어 가셨다는 것이다.
당시 도정공장을 운영할 때인데, 쓰임세가 큰 아버지 몰래 자식들을 위해
패물을 사모아 두었다는데, 그게 걱정되어 가지러 가셨다는 것이다.
좌우지간, 그 놈의 돈이 무엇이기에 목숨까지 걸어야 했는지 모르겠다.






다음에 시간나면 녹음기 챙겨 다시 와야겠다.
누님 돌아가시면,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가족사는 영원히 파 뭍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젠 형님이 한가해졌으니, 정선 만지산에 계신 엄마 산소에서 봄놀이 한번 하자고 제안했다.
가족과의 봄놀이도 이제 몇 번이나 더 할 수 있겠는가?






술이 얼큰하여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차 한 잔 하러 ‘진주청국장’으로 몰려갔다‘
식당은 바쁜 시간이 끝나 한가했고, 조카 홍전이도 한 숨 돌리고 있었다.
이제 오십에 가까운 조카가 시집도 가지 않은 채, 일에 파묻혀 사는 것을 보니 불쌍했다.
술김에, 늙은 외삼촌과 결혼하자는 흰소리를 지껄이며 낄낄대기도 했다.






누님께선 틈만 나면 맥주 드시는 것이 낙인지라 식사에 소홀한 것 같았다.
우야튼, 밥 잘 챙겨 드시고, 백세까지 팔팔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노세 노세 젊어 노세”가 아니라 “노세 노세 늙어 노세”로 노래도 바꾸자.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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