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는 인사동에 볼만한 전시가 너무 많았다.

아르떼 숲에서 열리는 세계적 오염으로 말썽을 일으키는 후쿠시마 조삼모사전을 비롯하여

나무화랑의 구경숙전 마킹스’, 그리고 김경서의 스스로 살아 숨 쉬는 젖은 땅’,

정복수의 자궁으로 가는 지도등 보아야 할 전시가 한 둘이 아니었다.

 

연휴가 끝나는 지난 4일은 서둘러 인사동에 나갔다.

십여 년에 걸쳐 해왔던 일 중의 하나가 인사동 전시 안내하는 일인데,

월말에 나오던 서울아트가이드소식지가 나오지 않아 몇 번을 헛걸음친 것이다.

 

  연휴라 그런지 인사동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무슨 볼거리가 있는지, 북인사마당은 구경꾼들이 진을 쳤다.]

 

  '아르떼 숲'에서 열리는 '후쿠시마 조삼모사'전에도 관람객이 몰렸다.

방류하는 일본보다, 동조하는 윤정부 대응에 더 분노하는 분도 있었다.

 

  삼일이나 지나서야 서울아트가이드가 나왔는데,

인사동 간 김에 네오록에서 보았던 구경숙의 마킹스보러 나무화랑에 갔다.

 

  전시 보는데, 차 빼라는 전화가 걸려 와, 다 보지도 못하고 나왔다.

 

  정복수씨 전시가 열리는 6일에서야 다시 인사동에 나갈 수 있었는데,

마침 전시 작가인 구경숙씨도 만날 수 있었다.

 

  마킹스는 건강을 잃은 작가가 긴 치유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신체적 반응과 살아야 하는 절박함을 형상화한 작품이었다.

먼저 몸의 흔적을 판각하고 탁본 기법으로 찍은 뒤,

이를 한지로 릴리프 하여 육체와 정신의 이중성을 드러냈다.

복잡하고 힘든 과정을 거쳐 만들어 낸 노작이었다.

 

 전시장에서 내려와 정복수씨 전시가 열리는

조계사 아래 올미아트스페이스를 가기 위해 인사동 11길로 들어서다

토포하우우스앞에 붙은 김경서의 젖은 땅전시 포스터를 보게 된 것이다.

 

  아는 분이기도 하지만, 한때 몰입했던 늪에 관한 전시라 눈이 번쩍 뜨였다.

90년대 환경사진가회에서 일할 때, 전국 늪지를 찾아다니며 우포늪 사진집을 발간한 적도 있었다.

더구나 우포늪은 고향에서 가까워 어릴 때 자주 드나들던 곳이 아닌가.

 

  전시장에 올라가 보니 작가인 김경서씨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걸린 작품들은 사진인지 그림인지 헷갈릴 정도로 사실적이었다.

사진처럼 재현했지만,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늪의 웅성거림이 들리는 것 같았다.

현장 재현에 머물지 않고, 늪이 숨 쉬는 표현의 영역으로 끌어 올린 것이다.

그리고 전국에 산재한 늪지를 탐사해 낸, 늪에 대한 내공이 대단했다.

 

  문제는 매달 인사동 전시 소개에 공을 들여 온 내가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정보지에 사진전문갤러리를 비롯한 많은 갤러리의 정보가 등제 되지 않아

레오록이나 페이스북 등 여기저기 뒤져 찾아내기도 하지만,

볼만한 전시를 추려 올리는 과정에서 '인사아트센터''경인미술관', '토포하우스'

대관 위주의 갤러리는 경력 작가들이 잘 찾지 않아 소홀했던 점이 문제였다.

 

  내가 인사동에 관한 기록을 하게 된 것도 어언 40여 년이 되었다.

변해가는 인사동이 안타까워 옛 풍류객을 찾아다니며,

인사동에 관한 전시나 행사를 추진하기도 했으나, 흐르는 물길은 되돌릴 수 없었다.

17년 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창예헌이 창립되어,

창예헌카페를 개설한 것이 체계적으로 기록한 시작이었다.

 

  그 뒤 창예헌이 해체되어 이름을 유목민으로 바꾸었는데,

그마저 유목민이란 주점이 생기면서 유목민카페도 폐쇄되었다.

대신 인사동 사람들블로그를 개설하여 중요한 기록들은 옮겼으나,

그 과정에서 많은 자료를 잃어버린 안타까움도 남는다.

 

  다음블로그 인사동 사람들을 운영하기 시작한 십 년전 부터 '인사동과 서울강북지역 전시안내'를

매월 초 올려가며 인사동에 관한 이야기와 전시리뷰를 포스팅해 왔는데,

특정 전시 리뷰를 청소년 유해물로 판정해, 한 달 동안 로그인을 못 하게 하는 갑질에

네이브블로그인 인사동이야기를 새로 개설한 것이다.

 

  그러나 인사동을 비롯하여 사진에 관한 포스팅이 무려 6,300건이 넘어 옮길 재간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두 곳의 블로그를 같이 운영하게 되었는데,

두 블로그에 매일 한 꼭지씩 올린다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자료를 블로그에서 찾을 수 있으니, 내에게는 족보나 마찬가지다.

김경서씨 작품 이야기하다 삼천포로 빠졌는데, 다시 전시 이야기를 하겠다.

 

  정복수씨 자궁으로 가는 지도를 보기 위해, 조계사 아래 '올미아트스페이스'로 발길을 옮겼다.

 

  정동지와 오후 5시경 전시장을 찾았는데, 이미 2층 전시실은 먼저 온 분들이 술판을 벌였다.

 

  주인공인 정복수씨를 비롯하여 장경호, 장석원, 임정희, 조준영, 한상진,

김수길, 전강호, 조해인, 이재민씨 등 많은 분이 모여 있었다.

 

  전시장에 걸린 작품들은 인간 본능의 원초적 욕망이 이글거리는 투시도 같았다.

바로 병들어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이었다.

 

  이번 개인전 제목은 자궁으로 가는 지도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자궁으로 간다는 것은 돌아갈 수 없는 지도가 아니던가?

순간적으로 존덴버 노래 ’Take Me Home, Country Roads‘가 떠올랐다.

시골길이여 나를 집으로 데려가줘요. 나의 보금자리로...”가 아니라 어머니 뱃속으로...

 

  신비한 자궁의 세계에 온 것이 아니라, 사주 보는 점집에 온 기분이었다.

손금과 눈이 그려진 손바닥 그림 몇 점이 부각 되었는데,

마치 너 자신을 알라는 듯, 묵시적 가르침의 뉘앙스도 풍겼다.

 

  인간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출발했으나,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길이었다.

어찌 보면 길 잃은 인간을 안내하는 지도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처음 보는 작가의 자화상도 걸려 있었다.

 

  혼잡스러워 뒤풀이 집으로 정한 부산식당으로 옮겼더니,

전시장에서 뵌 분 외에도 최석태, 황준연, 구경숙씨도 와 있었다.

 

  그런데, 그 많은 손님의 술값이나 식사비를

뒤늦게 나타난 올미아트스페이스황순미대표가 계산해 버렸다.

 

  여지껏 수많은 전시 뒤풀이에 다녀 보았으나, 갤러리 주인이 뒤풀이 값 내는 곳은 흔치 않았다.

 

가난한 예술가들을 위해 돈을 쓰면 반드시 돌아갈 것으로 확신한다.

 

정영신사진

와인을 주는 대로 마신데다 소주까지 섞었으니,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간다는 말도 없이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사진, / 조문호

 

미처 소개하지 못한 전시나 상세한 전시리뷰는 아래의 인사동사람들블로그를 참고하세요

인사동과 강북지역 갤러리, 202310월 전시 일정

https://mun6144.tistory.com/6866

33인이 불 지핀 후쿠시마 조삼모사핵 오염수 투기를 당장 중단하라!”

https://blog.naver.com/josun7662/223223369414

구경숙'마킹스 Markings'

https://blog.naver.com/josun7662/223225682853

김경서'스스로 살아 숨쉬는 젖은 땅

https://blog.naver.com/josun7662/223230335687

정복수의 자궁으로 가는 지도를 찾아가다.

https://mun6144.tistory.com/6868

 

정복수의 자궁으로 가는 지도-1’전이 106일부터 30일까지 인사동 올미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다.

 

화가 정복수는 반평생을 억눌린 인간의 본성이나 실존에 대한 문제를 인체 구조로 표현해 온 작가다.

 

그는 탐욕의 인간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육체라는 믿음으로 인간의 절단된 몸을 그려 왔다.

 

오래전 그의 작업실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하나의 충격이었다.

마치 종합병원 정형외과에 온 것 같았다.

작업실에는 사방에 해체되고 절단된 인체가 걸려 있었다.

팔다리가 잘려 나간 형체나 표정에서 사악해지는 인간의 실체를 보는 것 같았다.

 

한편으론 짐승 같은 인간 본능의 원초적 욕망이 이글거리는 생존을 그린 투시도 같았다.

바로 병들어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이었다.

 

이번 개인전은 자궁으로 가는 지도라는 제목이 붙었다.

이건 돌아갈 수 없는 지도가 아닌가?

갑자기 존덴버 노래 ’Take Me Home, Country Roads‘가 떠올랐다.

"시골길이여 나를 집으로 데려가줘요. 나의 보금자리로..."가 아니라 어머니 뱃속으로...

 

신비한 자궁의 세계를 엿 볼 기회라며 들어갔는데, 마치 사주 보는 점집에 들어 온 기분이었다.

손금과 눈이 그려진 손바닥 그림 몇 점이 다가왔는데,

마치 스스로를 알라는 듯 묘한 뉘앙스를 풍겼다.

 

인간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출발했으나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인간 회귀의 욕망을 부추겼다.

어찌보면 길 잃은 인간들을 안내하는 지도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처음 보는 작가의 자화상도 걸려 있었다.

작품에 대한 해설은 미술평론가 김진하씨 서문으로 대신한다.

 

영원한 청춘일듯하던 인생도 종국에 는 맞닥뜨리는 게 있다. 생명체라면 모두 피할 수 없는 운명, 생장해서 성숙해지 는 만큼 소멸이 가까워지는 게 세상 이치다. 생명의 끝 지점. 자궁으로부터 출발 했으나 결코 자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그런 회귀 불가능은 더욱 회귀에의 욕망을 증폭시킨다. 그 도저함의 사막에서 마지막 한 방울 생명수가 모래 사이로 스 며들어 버렸을 때, 마침내 우리의 모든 기억에서 자궁이 지워지는 암전 상태가 된 다. 페이드 아웃. 디 엔드. 이름하여 죽음.

 

정복수의 그림엔 항상 무엇인가 하는 인간들이 즐비했다. 50여 년의 화력을 돌이켜보면 초지일관 무엇인가 행위 하는 인간을 그렸다. 뱉고, 욕설하고, 먹고, 마시고, 싸고, 싸우고, 자위하고, 섹스하고, 거부하는 인간들. 그야말로 본능의 상태에서, 짐승과 같이 생존의 원초적인 욕망이 가득한, 생래적으로 죽음과는 거 리가 먼 듯한 살아있는 인간들의 생존경연장이자 투기장이었다.

 

그 숱한 공격적 동사형의 인간을 그리던 정복수도 이제는 그의 그림의 출발 지점인 10대 시절보다 좀 더 먼 과거를 유영해보려는 모양이다. 출생의 기표인 지문과 손금이라는 나침반을 꼼꼼히 분석하면서, 또 타고 난 눈빛과 얼굴과 성정을 참조하면서, 성장하면서 경험했던 사건들과 섭취했던 온갖 욕망을 하나 둘 해체 하며 자궁으로 가는 지도를 그리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생은 회갑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는 미래에 의 욕망과 그에 비례하는 기억의 축적이 느리게 진행되고, 그 이후에는 과거로의 회귀 욕망의 증대와 추억을 망각하는 속도가 빨라지는 생태성으로 구성된 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를 화 두로 삼았으되, 결국은 그 중간 지대인 현실에서의 번뇌와 고통과 헤맴으로 인해, 자궁으로 회귀하는 길을 찾지 못하는 것 일게다.

 

그래선가, 이번 근작들에선, 정복수 특유의 이빨, 성기 노출, 사정과 같은 이미지들은 많이 소거 됐다. 대 신에 자궁으로 가는 지도’, ‘깊은 인생’, ‘너무 깊은 생각’, ‘생각의 입’, ‘생각의 핏줄’, ‘을 찾는 방법’, ‘인간 은 무시무시한 벌레등과 같은 철학적 사유를 동반하는 제목들이 등장한다. 화가도 인간인 이상 그의 나이 에 비례해서 자기 존재성이나 내면을 반영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또 그만큼 삶에 대한 내밀한 관념 과 인식을 화면에 드러내게 된다. 정복수의 근작도 이런 경향을 여지없이 반영한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정 복수의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여전히 치열하다. 힘을 빼려는 자의, 힘을 빼는 과정에 집중하는 치열성이라고 해야 하나. 그림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채굴하고, 다시 묻고, 또 그 옆의 구멍에 천착해서 관통하고 나간 뒤 근처에서 돌아오기 위한 구멍을 다시 판다. 그림 그리기에 대한 정복수의 기본적 태도다. 버리기 위해서 버 리는 것에 더 깊이 몰두하는 습관이나 체질과 같은 태도 말이다.

 

한편, 그 치열한 자궁으로의 회귀 욕망과 기억과 기록을 더듬는 정복수의 진술은 남은 삶에의 욕망이자, 더불어서 죽음의 길을 순연하게 찾기 위해 작성하는 지도다. 정복수에게 그림은 그 지도를 제작하는 것으로 부터 그 지도에 표기하는 메모와 주의사항들을 꼼꼼하게 형상으로 확인하는 절차이기도 하고. 자궁에서 나 왔을 때부터 그의 의식에 지문처럼 새겨진 죽음에 대한 메멘토 모리를 통해 끊임없이 의심-저항-확인-수 용해온 지난 50년의 작업적 변증이, 정복수에게는 자궁으로 돌아가고픈 그의 본능과 의지의 생산 과정이었 다고 하겠다. 기실, 그게 화가의 일이다. 그가 출발해서 떠나왔던 자궁 입구를 찾기 위해 그리는 삶과, 마침 내 그곳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그리기를 멈추는 것 말이다. 그 궤적을 그림으로 기록하고 표현하는 게 바로 작가적 삶과 죽음의 표지일지니, 여적 그리고픈 인간이 많다는 정복수에게 자궁으로 가는 지도는 또 새 로운 인간 유형을 탐색하는 길을 열어 줄 것이다. 67년을 걸어온 만큼 회귀하는 길 또한 만만치 않게 길 터 이니, 그가 그릴 인간들은 아직 많이 남았을 것이다. 다만, 이제는, 격렬한 본능보다는 존재를 사유하고 탐 색하는 깊은 인간형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 유추해본다.“ 김진하(미술평론)

 

전시 개막 시간을 밝히지 않아 정동지와 오후 5시경 전시장을 찾았는데,

이미 2층 전시실은 먼저 온 분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주인공 정복수씨를 비롯하여 장경호, 장석원, 임정희, 조준영, 한상진,

김수길, 전강호, 조해인, 이재민씨 등 많은 분이 모여 있었는데,

혼잡스러워 뒤풀이 집으로 정한 '부산식당'으로 옮겨야 했다.

 

'부산식당'에는, 전시장에서 뵌 분 외에도 최석태, 황준연, 구경숙씨도 와 있었다.

그 많은 손님들 마신 술값이나 식사비가 만만 찮을텐데,

뒤늦게 나타난 올미아트스페이스 황순미씨가 계산해 버렸다.

 

여지 껏 수많은 전시 뒤풀이에 다녀 보았으나,

갤러리 주인이 화끈하게 뒤풀이 비용 내는 곳은 처음 보았다.

"돈은 이렇게 기분 좋게 쓰면 되돌아 가는 거야!"

 

정영신사진

와인을 주는 대로 마신데다 소주까지 섞었으니, 버텨 낼 수가 없었다.

정동지를 담보로 간다는 말도 없이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사진, / 조문호

 

 

 

한국현대도예 1세대 작가 한봉림, 흙-불 다뤄 물질 상상력 속 조형 시각화

한국현대도예 1세대 작가 한봉림 초대전이 '전북도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한봉림씨는 '영원한 운동’ 작가와의 대화에서

"작가는 쓸 데 없는 것을 만드는 게 예술이고 도예"라고 말했다.

도예는 늘 실용성과 관계지워져 왔기에 현대 도예는 ‘용도’를 벗어나 예술을 추구하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작가는 1979년 공간예술대상전에서 현대 도예로 대상을 수상함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당시 그의 작품은 두터운 천이 주름잡힌 모양새의 조형성으로

자연스러운 굴곡을 형성하면서도 전통적인 색감과 미감을 곁들여 주목을 끌었다.

그의 시도는 한국 현대 도예의 새로운 장르를 여는 것으로 촉망을 받았다.

 

1974년 원광대학교에 도예과를 창설하면서 내려 온 그는

한국 최고의 도예과로 부상시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자비로 1992년부터 개최했던 국제도예캠프는 96년도까지 이어지는데,

이는 제자들과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 주는 것과 동시에 국제적 방향으로

현대 도예의 길을 개척하겠다는 강렬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2015년 전북도립미술관 아시아현대미술전 당시 그는 높이 2m 쯤 되는 ‘장승’ 작품을 출품하였다.

그것은 칼라풀하고 불규칙한 크기의 사각 형태를 2개의 수직 기둥으로 쌓아올린 작품이었다.

또한 매우 현대적인 동시에 전통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영원한 운동>, 1986, 조합토, 망간유, 물레 성형, 62&times;130&times;90 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그의 작가 정신은 장르를 초월하는 성향을 갖는다.

그는 현대 도예의 성향을 도예라는 카테고리에 담아두기를 원치 않는다.

 

2017년 전북도립미술관 원로작가전 때에는 20여 개의 대형 평면에

즉흥적으로 뿌린 단청 물감의 흔적을 내보여 흥미를 끌었다.

순간적인 물감의 튀김과 번짐, 흘러내림을 그는 자유로운 예술 행위로 표현하고 있었다.

 

전북의 미술을 각성시키자는 취지로 펼치는 AX 그룹 운동에도 참여하면서

젊은 작가들 못지 않게 새롭고 열정적인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영원한 운동-7>(1986), 47*48*45, 조합토, 판 성형,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윤영필 학예사는 “한 시대를 앞서 간 외국 명문대학은 대부분 지역에 있고 전공에 따른 명문학과 역시 대체로 지역 도시에 존재한다. 한봉림의 열정은 일찍이 원광대에 부임해 도예 명문학과를 만들고 역량 있는 예술가들을 배출했다. 전문가로부터 도예과 하면 거론될 정도로 한강이남 최고의 명문 도예과를 만들었다. 전라도에서 흙을 만지고 도예를 배웠다면 그의 손길을 안 거쳐 간 사람은 없다. 그는 끝없이 갈구하며 도예를 진화시켜 나갔다.”고 설명했다. 도예가 한봉림(韓鳳林)은 홍익대 공예과를 졸업하고 공간대상 도예상(1979)을 받은바 있으며 원광대 미술대학 명예교수이자 한국현대도예 거장이다.

 

이애선 전북도립미술관장은 “이번 전시를 통해 그만의 예술적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전북과 한국 현대 도예에서 잘 평가되지 않은 작가의 도자 세계와 현대 도예에 대한 관심이 촉발되고, 나아가 한국 도예의 동시대적 의미를 재고하는 계기가 되기를기대한다”고 밝혔다.

 

<무제>(1979), 36*80*36, 조합토, 판 성형, 개인소장

전시 리뷰 대부분을 '전북도민일보'에 게재된 미술평론가 장석원씨의 글을 옮겼는데,

그는  전시 개막식 축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번 전시는 전북 현대 도예사에서 지울 수 없는 기념비적 족적을 남기는 것이지만,

더 나아가서 한국 현대 도예사에서도 전무후무한 작가 정신을 온전히 보여주는 전시로 기록될 것이다.

그가 시도해 왔던 현대 도예로서의 창의적 정신은

예술이 우리 가슴에 살아 있는 한 지속적으로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도예가 한봉림

이 전시는 2023년 3월 5일까지 열린다.

 


출처 : 전북도민일보,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금천뉴스, 시대일보, 뉴스1

 

한국일보 / 장병욱 선임기자 aje@hk.co.kr

 

 

  • 눈 내리던 날 딸의 작업실에서 이뤄진 인터뷰 후 아버지는“너무나 행복했다”는 메일을 보내왔다. 홍인기기자 hongik@hk.co.kr
  • ● 아버지의 '순수'는 어떤 풍경
    1980년 파격적 행위예술 무대
    삼일로 창고극장상 등 일찍이 일가 이뤄
    결혼 때 '혼인 이벤트'도 장안의 화제

    ● 장맑은 "누드는 수행의 도구"
    서울 생활 방편으로 누드 모델 나서
    모멸감 들때 독서·명상으로 자아 찾아
    민중 엔터테인먼트도 수행의 한 방법

    ● 따로 또 같이
    사회적 통념·일상에 삐딱한 시선
    "미디어에 의해 거세돼 있는
    인간 본연의 감각 되살리고 싶어"


    상업 자본이 흥건히 괴어 있지만, 이른바 홍대앞은 여전히 해방구이자 실험 공간이다. 15일 막 내린 나흘간의 전위 예술 축제 '2013 한국실험예술제'는 상업자본의 범람과 침식을 용케 버텨낸 예술의 힘을 보여주기 족했다. 아주 약간의 물기와 햇빛만 있으면 돋아나는 민들레 같은.

    오래 전, 그'홍대앞 아이들'이었던 행위예술가 장맑은(33)씨는 지금 남영동 한 켠의 작업실에서 꿈을 이어가고 있다. 입구에는'흑표범 스튜디오'라는 옥호가 조그맣게 달려있다. 흑표범이란 그녀의 애칭이다. 그 작업실로 아버지 장석원(61ㆍ전남대 미대 교수ㆍ미술평론가)씨가 모처럼 찾아 왔다. 수개월 만에 만나도 이들은 또 작품 이야기다. 그들이 말하는 작품이란 캔버스도 화랑의 전시장도 아닌 현장이다. 비일상적인 상황들을 범상한 일상 속에 던져주고 호기심 어린 시선들을 온몸으로 감내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

    2007년 홍대 앞 다원예술공간에서의 행위다. 당시 거리에 널브러져 있던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끌고 나와 나체로 있던 자신에게, 장맑은은 샤워 하듯 쏟았다. 그녀에 의하면 처음으로 진지하게, 자신의 작업에 대해 고민한 결과였다. 당시 그 광경을 지켜 본 아버지의 q반응은 이러했다. "됐다. 이제 내가 더 이상 개입 안 해도 되겠다."

    두 사람은 "우리는 가족이라기보다는 친한 친구, 아니면 예술 동지"라는 데는 일치한다. "1년 만에 만나도 작업 이야기만 한다"는 점에도. 그러나 속내는 판이하다.

    2011년 7월 전남 광주시 옛 도청 앞 분수대에서 벌인 개인전이자 시위 퍼포먼스'정오의 목욕'은 이 시대 행위예술의 존재 방식을 증명하는 자리였다. 얼룩말 무늬 같은 과녁을 몸에 그린 뒤 분수대에 들어가 목욕한 것이다. 각지에서 쇄도한 기자들의 모습에 오히려 본인이 놀랄 지경이었다. 실시간 인터넷 검색 최고를 기록한 '사건'이었다.

    역사의 무게를, 더께를 그녀는 걷어내고 싶었다. 1980년 당시 정오에 애국가가 울려 퍼지며 발포는 시작됐지만, 30년 뒤 그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현재의 일상이었다. 역사의 무게에 눌려있던 바로 그 현장에서, 여성의 몸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모습에 주목할 것을 파격적으로 요구한 것이다. 그 해 10월 부산 비엔날레에서 철조망을 닮은 훌라후프를 몸에 두르고 돌린 것 또한 비슷한 맥락이다.

    10대에는 래퍼가 되려 했던 딸. "우리 집에 딴따라는 안 된다"며 17세 딸의 튀는 행보를 반대하던 아버지. 당신의 반대는 '순수'에 집착했기 때문이라는 딸의 해석이다. 그렇다면 아버지 장석원씨의 '순수'는 어떤 풍경일까. 자신이 전시 기획실장으로 활동했던 2000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중국작가 마류명(馬六明)이 행했던 퍼포먼스를 보자.

    중장년 남성이 앉아 있는데 옆에는 한 여인이 나체로 널브러지다시피 해 앉아 있다. 바로 마 작가다, 수면제를 먹고 와 서서히 잠든다는 의도였는데 관객들이 비명 지르는 등 일대 혼란 상황이 빚어졌고 운집한 국내 미술인들은 사진 찍느라 여념 없었다. 곯아떨어진 마 작가를 친구가 업고 나가기까지 15분 걸린 '작품'이었다. 일상의 틀을 깨고, 신식민주의적 상황에서 정신을 각성시키자는 메시지를 아주 과격한 방식으로 전달한 셈이다. 시인 김수영의 표현을 빌면 그것은 '침을 뱉는 시(詩)'였다.

    그는 1980년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전위적ㆍ파격적 행위 예술 무대 '장석원 이벤트'를공연해 삼일로 창고극장상을 받는 등 일찌기 일가를 인정 받은 행위예술가다. 1977년 4월 결혼 당시 펼쳤던'혼인 이벤트'는 장안의 화제였다. 인사동의 한 화랑에서 그 같은 이벤트를 한다고 알린 뒤 운집한 관객, 즉 하객 앞에서 예비 부부가 혼례식을 올리는 행위 예술이었는데 그것이 곧 자신의 실제 결혼식이었던 것이다. 일체의 과정은 미리 녹음테이프에 따라 실행됐다. 그 명령에 따라 키스도 치러졌다. 당시 주례는 덕담 대신 현재의 예술 이야기만 잔뜩 펼친 자리였으나 엄연히 진짜 결혼식이었다(20년 후 이혼 했지만).

    호남대 미술학과 출신인 장맑은은 10대서부터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던 소녀였다. 가수 되겠다며 두 번 가출한 것은 통과의례였다. 머리에 노란 물 들이고, 청바지는 칼로 찢어 친구들과 도심을 휘젓고 다녔다. 당시 나이를 제목으로 딴 비디오 작품이자 졸업 작품 '스물넷'은 아버지의 구식 캠코더로 촬영한 또래의 일상이었다. 당시 부모의 이혼으로 받은 복잡한 심정을 다양한 자화상의 몽타쥬와 콜라쥬로 표현한 그 작품은 그를 이해하는 첫 단서이기도 하다.

    서울로 와 만든 영상 작품 'What's Art?'에서 그는 현대 도시의 일상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8㎜ 비디오 캠으로 찍은 60분짜리 영상물 30여 개로 홍대앞 군상의 모습을 무작위로 찍은 뒤 하나의 의미를 이루게 편집했다. 예술에 대한 의심을 유발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몸에 대한 시선은 부녀를 경계 짓는 구분선이다. 스튜디오에는 지난해 2월 전시한

    '털 달린 첼로'가 놓여 있다. 검은 깃털을 촘촘히 두른 첼로를 안기도 하고 내던져 두기도 하면서 2010년 펼쳤던 행위 전시회 'Black Jaguar'에서 선보인 작품이다. 악기라는 기하학적 물체를 무의식적인 것, 동물적인 유기체로 치환하고 싶었다는 딸의 말은 무표정한 사물에게도 몸의 온기를 투여하고 싶었다는 설명이다.

    벗은 몸은 사실 생활의 방편이었다. 서울에 처음 왔을 때의 '알바'였다. 생계에 도움 될까 해 홍익대 등지에서 누드 모델로 나서기 전, 아버지에게 의견을 물었고 "모델 일 하면서 너를 객관적으로 보기 좋게 하라"는 별난 허락을 얻었다. 동생들은 "언니는 게을러서 잘 맞을 것"이라며 뒤에서 킥킥댔다. 일 많을 때는 1주일에 대여섯 번까지 나가, 20분 포즈에 10분 휴식이라는 별난 일상을 '수행'했다.

    모욕감을 느끼게 되는 등 너무 하기 싫을 때도 닥치지만 그는 독서와 명상으로 자아를 찾았다. "나만 정좌해 있는, 아주 독특한 상황이잖아요?" 그는 모델 일을 하면서 가장 책을 많이 봤다. 쉬는 시간에,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김영하, 밀란 쿤데라 등의 작품을 그렇게 독파했다. 일제시대에서 한국전쟁까지를 서정적으로 그려낸 이범선의 '갈매기(1958년)'에 감명 받았다. 좋은 책들을 만나게 된 계기가 모델 일이었고, 책으로부터 현실을 인식했으니 누드는 수행의 도구였던 셈이다

    "딸의 전위성, 실험성, 전도된 생활 개념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아버지는 해석한다.그는 딸에게 한번도 뭐가 되라 한 적이 없다. 특히 작가와 평론가의 관계 같은 내밀한 문제 같은 주제는 꺼내지도 않는다. 당사자들은 극구 부인하지만 두 사람은 아무래도 매우 특별한 동지인 것 같다. 아웃사이더적 전위 의식으로 사회를 바꿔보려 하는, 참으로 예외적인 부녀이리라. 어버지의 말에 첨언이 없는 걸 보면 동의하는 눈치다.

    이들은 사회적 통념과 부대끼고, 그것도 모자라 역린을 거스르기까지 한다. 때로 그것은 결과론이긴 하지만 외설적이다. 행위 예술은 선정주의와 어떻게 다른가? 부친은 철학과 예술의 가장 민감하고도 극단적인 부분을 몸에서 찾는다. 연습도 않고 감상자를 의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퍼포먼스와도 구분되는 행위다. 시인 김 수영이 "온몸을 온몸으로 밀고 간다"고 했듯 삶과 예술의 합일이라는 것이다.

    딸은 좀 다르다. 스마트폰이 젊은 사람들의 감각을 마비시키고 있는 현재, 미디어에 의해 거세돼 있는 인간 본연의 감각을 되살리고 싶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있던 비장함이 거세됐다. 그는 예술가만의 특권인 양 행세하는, 아우라라는 말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본다. 이제 일상적으로 그런 것들을 많이, 다양하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바로 자신의 예술이 현실과 접합하는, 시쳇말로 소통하는 통로에 대한 고민으로 직결된다.

    다시, 그녀는 '수행'에 대해 말했다. 4대강 살리기 시위, 장애인 시위의 현장을 찾아가 그녀는 시위자들과 흥겹게 노래한다. 레게풍으로 판을 돋우는 가수 한받 등이 상징하는 민중 엔터테인먼트는 유효한 통로다. 크게 보아 민중 예술의 새로운 버전이며, 작게는 딸의 수행법이다.

    이 지점, 둘은 또 대립한다. (한 10년 뒤에는) 소소하게 일상 속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것이라는 딸의 말에 아버지는 발끈한다. 사회적으로 알려지건 말건 끝까지 가서 돌아오는 것, 그것이 성공이라며.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이 아마 저러다 나뉘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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