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했던 시간들...

조성휘展 / CHOSUNGHUI / 趙星彙 / painting 

2019_0515 ▶︎ 2019_0521

조성휘_사람의 모습 중에서_145×112cm_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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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9_0515_수요일_05:30pm

기획 / 선생님을 기억하는 동양중학교 제자들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41-1 5층

Tel. +82.(0)2.736.9365

www.insaartcenter.com



실존주의적 자의식을 통해 본 인간, 동물성, 욕망, 그러므로 존재 - 시대적 징후와 증상 ● 졸업을 하고 「표상 83」이라는 그룹을 만들었다. 아무도 그렇게 그리자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런 그림을 배우지도 않았지만 그런 그림을 그렸다. 놀랍게도 모두 인간에 대해, 삶에 대해, 시대에 대해 발언하고 있었다. 풍자하고 있었다. 조성휘는 불상과 탱화를 모티브로 한 「사람의 모습 중에서」 시리즈로 자신을 알려나갔다. 결국은 모두가 자화상인 다양한 부처의 표정이 마치 천불상을 그린 탱화처럼 화면을 가득 채우는 그림이었다. 나도 조성휘를 대표하는 작품들로 기억하고, 조성휘의 작품들 중에서도 귀중한 작품들이라고 생각한다. 민중미술이라는 조직적 운동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지만, 그들과 우리의 생각이 크게 다르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장명규, 조성휘를 추억하며. 2018.12) 



조성휘_사람의 모습 중에서_145×112cm_1984


국내적으로 1980년대는 현실참여를 표방하는 민중미술과 모노크롬과 추상으로 대변되는 제도권미술의 이념대립이 첨예했던 시대다. 이 시기에 민중미술에도 제도권미술에도 속하지 않는 일군의 경향과 작가들이 있었고, 조성휘는 그 작가군에 속했다. 그러면서도 종래에는 어떤 작가군에도 속하지 않는 자기만의 독특한 형식을 열었다. 민중미술과는 다른 것이었지만, 포괄적 의미의 형상 혹은 신형상미술로 범주화할 수 있는 것이었다. 현실참여가 주체와 외계가 직접 대면하고 충돌하는 사회적 장이라고 한다면, 작가의 그림은 외계현상을 자기 내면으로 불러들여 내재화한, 그리고 그렇게 내재화된 현상이 속에서 파열하면서 자기언어를 얻는 실존주의에 가까운 것이었다.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조건에 가까운 것이었다. 억압적인 현실과 분열적인 자기가 긴밀하게 맞물리면서 서로 반영하고 강화하는, 그런 그림이었다. 처음엔 현실인식으로부터 그리고 이후 점차 실존적 조건이라는 보편적이고 주관적이고 존재론적인 층위에로 옮아가고 심화되는, 그런 그림이었다. 인간실존과 삶의 질에 대한 보편적 현실인식에 연동되고 견인된 것이란 점에서 보면 차라리 객관적인, 그런 그림이었다. 




조성휘_사람의 모습 중에서_106×91cm_1989

이를테면 네거티브와 역광 같은 광선 혹은 조명을 심리적이고 내면적인 효과를 불러내고 극화하기 위한 미학적 장치로 사용하는, 그런 그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내면으로부터 발원한 기로 자기 주변에 방벽을 쌓거나 사악한 기운을 떨쳐내는 사람, 더러 무덤(아니면 폐허? 어둠 자체?)에서 걸어 나오거나 관을 깨고 나오는 사람과 같은 시대적 징후를 암시하는 알레고리와도 같은, 그런 그림이었다. 그에게 시대는 때론 중얼거리고, 분노하며, 냉소적이고, 절망에 찬 증상을 온몸으로 앓는 것이었고, 그렇게 앓으면서 내뱉는, 차라리 속으로 삼키면서 웅얼거리는 화술이 우회하면서 아우르는, 그리고 그렇게 심부를 파고드는 알레고리의 화법과도 통하는 것이었다. 그 자체 이미 알레고리인 암흑시대를 인간의 실존적이고 보편적인 삶의 조건을 반영하는 거울로 본, 정치적 현실을 인간실존을 비추는 거울로 본, 그런 그림을 그렸다. 실존적 인간에게 모든 시대는 암흑시대다. 그러므로 암흑 자체는 환경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 자의식에 속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 그림이, 내적으로 응축되고 속에서 파열하는, 그래서 외부적으론 다만 정적으로 보일 뿐인 그림이 「사람의 모습 중에서」라는 주관적인 자의식으로 표출되고 보편적인 주제의식으로 승화된 것이었다



조성휘_사람의 모습 중에서_140×70cm_1990


얼굴과 머리 ● 얼굴을 해체해 그 밑에 숨겨진 머리가 솟아나도록 하거나 다시 찾는...얼굴을 분해하고 지우면서 그 대신 머리가 솟아나게 하는...얼굴 없는 머리...인간의 머리가 동물에 의해 대체되는...인간인지 동물인지 구분할 수 없고 명확히 할 수 없는 영역...인간이 동물이 되는...신체적인 숨결이고 동물적인 것...고통 받는 모든 인간은 고기다. 고기는 인간과 동물의 공통 영역이고 그들 사이를 구분할 수 없는 영역이다. 비구분의 영역인 것. 고통 받는 인간은 동물이고, 고통 받는 동물은 인간이다. 인간과 동물의 객관적인 비결정의 영역...때로 몸 전체가 머리로 대체되는...입은 더 이상 특수한 기관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몸이 빠져나가고 살이 흘러내리는 구멍이다(질 들뢰즈, 감각의 논리) 



조성휘_사람의 모습 중에서_162×130cm_1992



그리고 작가의 그림에 부처와 불화가 들어온다. 만다라와 단청이 차용되고, 조사상과 금강역사가 재해석되면서 작가의 그림은 전기를 맞는다. 대략 1990년대 들어서의 일이다. 그리고 여기에 마치 뭉게구름 같이 몽실몽실한 얼굴들, 근육들, 흐르는 신체, 이행 중인 신체, 비결정적인 신체, 뭉개진 신체가 중첩되고 병치된다. 현실상황 그러므로 어쩜 실존상황과 전통불화가 하나의 화면 속에 오버랩 된다. 그렇게 오버랩 된 화면이 어떤 잠정적인 움직임이며 운동성을 암시한다. 평면적으로 처리된 부분과 묘사부분이 대비되는, 그리고 그 위에 드로잉 같은 선이 흐르는, 그리고 그렇게 구획된 화면이 화면 내에 인위적으로 구축된 어떤 공간을 암시하는, 아마도 내면적이고 심리적인 공간을 암시하는, 심리적인 억압상태를 암시하는 마치 고립된 방과도 같은 추상공간을 떠올리게 만든다. 



조성휘_사람의 모습 중에서_150×150cm_1994



여기서 다시, 실존적 인간에게 모든 방(그리고 어쩜 모든 공간마저도)은 고립을 의미하고 추상적 공간이 된다. 그러므로 고립 자체는 심리적인 것이지만, 그러나 이때의 고립은 동시에 방으로 추상화되고 객관화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추상화된 현실, 그러므로 어쩜 창출된 현실, 자족적인 현실을 통해 현실을 본다. 그 현실, 그 현실인식이 이해할 수 없는 낯선 세계에 내던져진 소외의식(하이데거)을 상기시키고, 스스로에게마저 낯선 자기소외(이방인의식)를 상기시키고, 억압된 것들의 귀환(프로이트)을 상기시키고, 억압적인 현실과 무의식적 현실의 돌발적인 출현, 실재계의 예기치 못한 출현(자크 라캉)을 상기시키고, 인간내면의 또 다른 실재를 인정한 카니발과 그로테스크리얼리즘(미하일 바흐친)을 상기시킨다. ● 그리고 특히 뭉개진 얼굴이 지워진 얼굴 뒤편으로 동물성이 드러나 보이는 프랜시스 베이컨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여기에 베이컨에 대한 질 들뢰즈의 분석, 특히 얼굴과 머리의 비교분석 부분은 마치 미지의 작가를 위해 예비해놓은 것만 같다. 얼굴은 가면이다. 페르소나다. 사회적 신분이며 제도적 인격이, 그리고 요새로 치자면 정치적 권력이 표정으로 그리고 기호로 상영되는 스크린이다. 인간이 제도화되고 사회화되고 문명화되면서 제도에 사회에 문명에 걸맞게 길들여지고 틀 화된 표면이다. 그 표면 밑에 길들여지지도 틀 화되지도 않은 자기가 억압되는데, 그렇게 억압된 자기가 머리다. 그렇게 억압된 탓에 너는 나를 결코 본 적이 없고 볼 수도 없다. 그러므로 알 수도 없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마저도 그렇다. 



조성휘_사람의 모습 중에서_50×50cm_1994



그게 뭔가. 동물성이다. 고기로 환원된 고통이고 육화된 고통이다. 고통의 몸이다. 야성이고 야생이다. 본성이고 천성이다. 숨결이고 생기다. 주술이고 신비다. 결핍이고 잉여다. 미처 언어화되지 못한 침묵이고 웅얼거림이다. 차라리 의미 없는, 그러므로 사실은 의미들로 팽배한 침묵의 소리다. 이성의 이름으로 한 번도 호명된 적이 없는, 그러므로 심지어 자기 이름마저도 없는 타자다. 들뢰즈는 다시 찾아진다고 했는데, 그렇게 잃어버린 것들이다. 그렇게 작가는 얼굴을 지워 인간이 동물이 되는, 고기가 되는, 고통이 되는, 인간과 동물이, 고통과 고기가 경계 너머로 넘나들어지는 비구분의 영역, 비결정의 영역을 그렸다. ● 이로써 들뢰즈는 비록 「동물_되기」에 대해 말할 것이지만, 이는 그대로 작가의 그림에서 「부처_되기」로 환원해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는 인간과 동물이, 동물과 부처가, 부처와 인간이 경계 너머로 넘나들어지는 비결정성의 차원을 그렸다. 개념 이전의 실재차원 자체를 그리고, 의미 이전의 생성차원 자체를 그렸다. 여기서 프랜시스 베이컨은 사람들은 항상 이론에 의해 그림을 이해하지, 그림 그 자체로 그림을 평가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이론에 대한 불만과 한계를 지적한 것이지만, 그리고 이 글 또한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이론으로 작가의 그림을 덧칠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여하튼 작가는 이론 이전의 그림 자체를 그렸다. 이론에 의해 추동되고 견인되고 평가되는 그림이 아닌, 그림 자체가 현실이 되고 존재가 되는 그림, 그러므로 어쩜 매번 다른 읽기(흡사 롤랑 바르트의 작가적 텍스트에서와도 같은)를 강요해오는 그림을 그렸다.



조성휘_사랑잔치_145×112cm_2003



발랄한, 불온한, 건강한 에로티시즘 ● 제도적 사회에서 욕망은 억압된다. 출구를 찾을 수가 없다. 그 출구는 제도 밖에 있고 내면에 있다. 속에 있고 안에 있는 것, 은폐돼 있고 숨겨져 있는 것, 그렇게 그림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욕망의 운명이다. 제도에 의해 억압된 탓에 태생적으로 반제도적이고 반사회적이다. 욕망이 에너지가 되고 동력이 되는, 기능이 되고 변혁의 도구가 되는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건 억압된 탓에 실재보다 더 발랄하고 더 불온하고 더 에로틱하다. 억압이 실재를 부풀리고 상상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그렇게 억압된 욕망은 내면에서 화려하게 개화한다. 어쩜 프로이트가 승화라고 부르는 것일 수도 있겠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삶의 충동과 죽음충동이 하나로 결합된 이율배반적인 그리고 자기모순적인 욕망의 개화라고도 볼 수가 있겠다. 작가는 그렇게 내면의 꽃밭에 만개한 꽃을 그렸다. 욕망을 표상하는 꽃을 그렸고, 욕망하는 꽃(핑크 프로이드의 벽에서 보는 것과 같은)을 그렸다. 2000년대 이후의 일이다. 



조성휘_사랑잔치_2003



작가는 이 일련의 그림들을 「사랑잔치」라고 부른다. 그동안 「사람의 모습 중에서」로 일관했던 주제가 처음으로 바뀌는 것인 만큼 또 다른 전기를 예비하고 있다. 사랑잔치답게 색채사용이 눈에 띠게 다채로워지고 색채감정이 풍부해졌다. 현란한 원색사용과 대비에 거침이 없어서 그런지 그림 자체는 식물을 그린 것이지만 보면 볼수록 살아서 꿈틀거리는 동물성이 엿보인다. 꽃과 동물, 식물과 동물, 에로티시즘과 동물, 욕망과 동물이 경계를 허물고 넘나들어지는, 그렇게 자유자재로 변태되면서 건강한 생명력으로 약동하는 꽃들의 환희를 보는 것 같고(사랑은 기쁘다), 선혈처럼 붉은 상처 위로 피어난 꽃들의 소리 없는 절규가 들리는 것도 같다(사랑은 때로 아프다). 때로 파란 하늘을, 더러 붉은 대지를 배경 삼아 부유하듯 그려진 꽃들은 꽃이면서 꽃이 아니다. 성적 메타포다. 욕망의 메타포다. 상처의 메타포다. 그리고 죽음의 사신이다. 동양의 경우 화무십일홍이 그렇고, 서양의 경우 바니타스 정물화가 그렇다. 그렇게 꿀이라도 바른 듯 번들거리는 입술 사이로 불쑥 내민 혀가 꽃잎을 희롱하고 꽃술을 희롱하고 꽃의 질을 희롱한다. 마치 욕망이 저 갈 길을 잘도 알아서 찾아가는 것 같은 분방한(아님 방자한?) 그림이 「쾌락의 정원」의 또 다른 버전을 보는 것 같다. 



조성휘_사랑잔치_150×150cm



그렇게 작가는 시대적 징후와 증상을 온몸으로 앓는 실존주의적 자의식을 그렸고, 머리 위로 솟아난 동물성(그러므로 어쩜 잃어버린 본성, 그리고 억압된 욕망)을 그렸고, 억압된 욕망의 발랄하고 불온하고 건강한 분출을 그렸다. 그 중에서도 작가의 대표작이랄 만한 불교도상과 실존상황을 결합한 일련의 그림들은 무속과 시대극을 결합한 박생광의 그림(이를테면 명성황후와 같은)에 비교할 만하다. 그렇게 비교되면서 또 다른 지점을 짚어내는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말년의 꽃그림은 꽃그림에 대한 선입견을 바꿔놓을 만큼의 기폭제가 될 수도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 고충환



Vol.20190515c | 조성휘展 / CHOSUNGHUI / 趙星彙 / painting










BLESS YOU
정은숙展 / JUNGEUNSOOK / 鄭恩淑 / painting
2019_0501 ▶︎ 2019_0506



정은숙_그대와 둘이서_장지에 채색_117×91cm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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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INSA ART CENTER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41-1 B1~1층Tel. +82.(0)2.736.9365www.insaartcenter.com


인간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꿈꾼다. ● 아마 과거에도 미래에도 인간의 행복에 대한 욕망은 변함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급속도로 발전하는 과학기술로 도시와 사회조직이 거대화 되었고, 급변하는 사회 문화 구조 속에서 우리는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아간다. 그로 인해 인간의 이기심은 고조되고 세상의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현대인은 정신과 물질의 이중구조 속에서 내적 억압을 받고 인간적, 사회적 갈등을 겪으며 소외 되고 있다. 급변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현대인들은 쫒기는 삶 속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고 소외의 불안감은 더욱 커져서 심리적 방어기제인 내면의 울타리를 스스로 만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이러한 현대 사회에 속한 본인 또한 그 속에서 타인과 같은 소외를 겪으면서 본인 작업을 통해 단절된 소통으로의 회복을 시도해 보고자, 서민들이 즐기던 예술로로 그들이 소망, 사랑, 바람, 건강, 부귀영화를 누리길 염원하며 그들의 삶에 녹아 들었던 '민화'를 차용하여 작업을 하게 되었다.


정은숙_그대를 본다Ⅰ_장지에 채색_91×73cm_2019


정은숙_그대를 본다Ⅱ_장지에 채색_91×73cm_2019


정은숙_그대를 본다Ⅲ_장지에 채색_60.5×73cm_2019


정은숙_내 안에서 함께_장지에 채색_91×117cm_2019

민화는 정해진 회화형식에 비해 자유롭고, 표현적 실재감 보다 그림에 담겨있는 뜻을 더 중요시 하는 그림이다. 또한 동시대의 사회성을 반영 하고 있는데 이러한 표현방식과 민화의 조형적 특성인 단순성과 평면성, 그리고 민화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를 본인 만의 감성으로 재해석하여 동화적 감성으로 풀어내고자 한다. 화면의 색채는 선명하게 하고, 화면을 채우고 있는 모티프들은 과장하거나 생략하고, 평면적이고 단순하게 표현하여 모티프를 극대화 시켰다. 작품 속의 모란은 부귀와 행복을 상징하고, 나비는 부부애를, 학과 장수를, 거북은 장수와 부귀를, 용과 호랑이는 벽사와 용맹을 상징한다. 이 모티프들은 길상적인 모든 상징적 가치들, 즉, 번영, 부귀영화, 행복, 무병장수, 건강, 다복, 사랑, 가족의 화목 등을 표상하고 있다.



정은숙_너에게로_장지에 채색_91×117cm_2019


정은숙_사랑_장지에 채색_91×117cm_2019


정은숙_사랑의 울타리_장지에 채색_53×45.5cm_2019


정은숙_우리 함께_장지에 채색_91×73cm_2019

정은숙_지금 이대로_장지에 채색_117×91cm_2019

작품 속에서 작은 집을 지키고 있는 새는 현대인, 그리고 현대인 중 하나인 본인을 의미하고 집은 우리가 소중히 생각하는, 지키고 싶은 그 무엇이다. 집과 새로 상징되는 우리는 각박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현실 안에서 행복해지고 싶다는 이율배반적 감정 속에 산다. 이에 새는 현실을 떠나지 못하고 날개를 접은 채 앉아있다. 이런 새를 지켜주는 것이 작품 속의 모피프들이다. 각각의 모티프들은 새를 옆에서 바라보면서, 혹은 자신의 몸 위에 올려두고 그들을 보호한다. 그리고 모티프들은 각각의 길상적 가치를 지니며 그들을 보호함과 동시에 축복을 건넨다. ● 또한 오방색을 주로 사용하는 민화와 달리 본인은 파스텔톤을 주로 사용하여 동화적이고 감성적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파스텔 컬러가 주는 부드럽고 따뜻한 동화적 감성은 지친 현대인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을 것이다. ● 부적과 같은 역할을 했던 민화 속 모티프와 본인 작업의 동화적 표현을 통해 현대인들이 현실의 불행한 상황 속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를 염원해 본다. ■ 정은숙


Vol.20190502g | 정은숙展 / JUNGEUNSOOK / 鄭恩淑 / painting





도연 임미령展 / LIMMIRYOUNG / 濤延 林美齡 / painting


2019_0313 ▶︎ 2019_0318


도연 임미령_R. Roa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1×131cm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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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 임미경 블로그_blog.daum.net/limshome



초대일시 / 2019_0313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41-1 1층 전관

Tel. +82.(0)2.736.1020

www.insaartcenter.com



임미령의 회화-삶에 대한 우리의 또 다른 꿈1. "무의식은 언어구조와 같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주장이다. 보통 무의식은 알 수 없는 것인데 그 무의식이 언어구조처럼 명쾌하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런데 소쉬르는 대상을 지칭하는 언어가 사실은 대상의 본질과는 상관이 없으며 심지어는 무의미한 약속 기호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언어는 그 대상의 의미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언어는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구조도 무의식처럼 명쾌하지 못하다는 것인가? 그러나 소쉬르는 기존의 언어학이 역사적인 진행과정 만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언어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대신 현재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말의 의미는 계속 변하는데 그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현재의 사회·문화적 맥락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연구하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처럼 우리의 의식을 통해서는 이야기하기 힘든 부분이고 현재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인 것이다. 대신 그것은 명확한 질서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우리의 의식적인 현재를 지배하는 또 다른 세계이다. 진실은 저 너머에 있는 것이다.


도연 임미령_G. Roa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1×131cm_2018


임미령은 강렬한 색채를 바탕으로 우리의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그런데 그 세계는 표면적인 현재의 일상이 아니다. 작가는 일상이나 의식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세계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 또 그 세계는 혼탁하고 어두운 세계가 아니라 새로운 희망의 세계이며 우리의 염원이 숨겨져 있는 세계이다. 임미령은 그러한 세계를 꿈꿔 왔고 그의 작업은 그 세계에 접근하기 위한 매개물이다. 화면에는 꽃, 나무, 지구 등 다양한 이미지들이 배치되고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화면의 중심은 색채이다. ● "임미령의 작품을 보고 우선 느끼게 되는 것은 강렬한 색채의 작렬이다. 이 느낌은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닐 것이며, 그처럼 대담한 색채를 쓰는 화가, 그것도 젊은 여류화가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경우가 아닌가 생각된다" (미술평론가 이일, 1988) ● 초창기 작업부터 임미령은 강렬한 색채로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조금 어두운 느낌이 드는 초기의 작업 이후 색채는 더욱 강렬해지고 다채로우며 화면을 풍부하게 만들고 있다. 그렇지만 그 색을 구사하는 어법은 처음부터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임미령의 색채는 장식적인 의미를 넘어서는 것으로 작가가 세계를 대하는 방식이며 그의 내면의 투영이다. 또한 단순히 배경으로 남기보다는 화면을 새롭게 구성하고 의미를 확대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색채는 작가가 이야기하는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열쇠이다.



도연 임미령_B. Roa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1×131cm_2018


2. 임미령의 최근 작업들은 '남김과 제거를 통한 오버랩'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강렬한 색채의 율동들이 화면을 채워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남김-제거-오버랩'은 현재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재 없어진 것들 즉 부재(不在)가 중요하다. 진정한 삶은 여기에 부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 안에 있다. 그래서 예술적 사유, 시적 성찰이 생겨나는 것이다. 임미령의 방식은 결국 시적 성찰로 향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면의 이미지들은 하나의 고정된 형태들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요동치는 색채에 따라 변화하게 되는데, 조형적으로도 보는 이의 각도에 따라 다른 이미지들이 시각적으로 변화한다. 이러한 임미령의 작업은 즉흥적인 방식이 아니라 치밀하게 계획된 화면 구성 때문에 가능해진다. 단지 그러한 구성이 최종적으로는 우연한 효과로 나타나는데 이마저도 계획된 측면이지만 그 종결점은 찍지 않는다. 존재의 진정한 처소는 끊임없는 움직임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 "흔히 기원인 색인 원색들, 특히 오방색을 기저로 화면 전면을 덮은 후에 마스킹액을 사용해 드로잉하고, 부분적으로 남기고 다시 물감으로 덮고 뜯어내기를 여러 번 반복하며 유기적인 형태들로 '또 다른 세계'(another land)를 표한한다."(2018 작업노트 중) ● 색을 칠한 후 위에 또 다른 화면이 중첩되고 처음의 흔적들을 드러내기 위해 화면을 뜯어내는 방식은 시간의 흐름을 왜곡한다. 지금 망각된 기억의 흔적들은 덮고 뜯어냄의 과정을 통해 현재 표면으로 드러난다. 그러한 흔적들은 명확한 것이 아니라 아픔일 수도 있고 잊고 싶은 기억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기억들은 우리의 본래적인 모습을 찾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이다. 임미령의 화면에서 그러한 기억들이 서서히 드러나 우리들에게 많은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임미령은 우리에게 그 소리에 귀기울이라고 한다. 그 이야기들은 서두도 없고 단락도 없다. 단지 메아리처럼 울려 퍼질 뿐이다.


도연 임미령_The Roa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260cm_2017


3. 임미령의 이러한 작업은 '밖으로 나가기'로 설명할 수 있다. "여기서 밖은 기존 사회의 제도 관습, 현실의 삶을 벗어난 곳을 의미한다. 여기는 작가 자신의 내부 깊숙이 숨겨진 무의식의 세계로, 훼손되기 이전의 진정한 자아가 보존되어있는 곳이다. 그렇다고 이 세계를 현실이 만든 환상의 세계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현실의 자신의 균열과 불안정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회색빛의 무정형의 안개' 같은 환상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임미령의 '또 다른 세계'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마저도 넘어서는 또 다른 세계인 것이다. ● 이번 전시의 「Road」나 「춤추는 사람들」은 우주의 중심으로 비상하기를 꿈꾸는 존재의식을 지향한다. 「춤추는 사람들」은 현실의 억압과 구속의 공간에 해방되기를 염원하는 몸짓을 보여준다. 특히 「Road」의 마치 지도처럼 보이는 색의 연결고리들은 모든 것을 구분하고자 하는 현대인이 이분법적 사유 방식을 존재의식의 세계로 치환하고 현실 세계로 환유하고 있다. 「earth」, 「숲」, 「산」 등에서는 인간의 근원적인 세계를 자아화 하여 현실을 초월하고 우주와의 일체를 이루는 존재의식을 추구하는 시적 성찰을 보여준다. 임미령의 색채의 울림은 숲으로 산으로 길로 끊임없이 나아간다. 이 여정에는 '끝'이란 있을 수 없다. 더 넓고 아름다운 '밖'을 위해서 그 울림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도연 임미령_Sound of Fores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82×228cm_2018


4. 임미령의 작업은 현재 포천의 작업장으로 옮긴 후 더욱 자유로워졌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작가도 그 동안의 치열한 삶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자신의 작업을 지속하겠다는 말을 한다. 작가로서나 인간적으로나 완숙한 삶에서 시작되는 또 다른 그의 여정은 더이상 불안과 상실의 갈림길에서 머뭇거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 김진엽


도연 임미령_The Hors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82×228cm_2018

무지개... 길따라... ● 삶이라는 굴레는 고통이나 아픔을 준다. 지난날의 삶의 흔적들은 가시와도 같이 몸속 깊이 박혀있다. 나의 그림은 이러한 흔적들을 걷어내고 인생 본연의 아름다운 꿈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 나에게 있어 '색(色)'은 참 중요하다. 색은 꿈이요 희망이다. 거기에 무지개면 더 좋겠다. 특히 오방색은 무지개와도 같다. 나는 꿈과 희망을 오방색에 담아 유희를 즐긴다. ● 캔버스 위에 일차적으로 다양한 색들을 가득 채우고 마스킹액을 사용해 '남김(Save)'을 위한 드로잉을 한다. 다시 다양한 색들로 덮고 남김을 여러 번 반복하며 입힘이 부족하면 흘림의 과정을 더한다.


도연 임미령_Roa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82×228cm_2019


캔버스에 묻어둔 지난날의 흔적들은 뜯어내어 '제거(Remove)' 함으로써 나의 손끝으로부터 하나씩 드러난다. 마치 실타래를 풀어가듯 드러나는 유기적인 형태는 미로의 '길(Road)'들로 이어진다. 그 길들은 겹겹이 중첩(Overlap)된 이미지들로 '또 다른 세계(another land)'가 된다. ● 마치 상처의 흔적들이 뜯겨져 나가고 속살을 드러내듯 숨어있던 색들이 드러날 때면 저만치 무지개 길이 보인다. 나는 오늘도 여전히 인생의 근원을 찾아서 끊임없이 해체와 조립을 반복하며 '또 다른 세계'를 향해 그 길을 따라간다. (2019) ■ 도연 임미령



Vol.20190313c | 도연 임미령展 / LIMMIRYOUNG / 濤延 林美齡 / painting




고은당 수집한 이방자 그림·칠보·글씨 등 170여점 전시

[스크랩]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작업 중인 이방자 [고은당 제공=연합뉴스]



다양한 예술 활동을 즐긴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1901∼1989)의 작품전이 10월 3일부터 15일 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고미술품 전문 갤러리인 고은당의 정하근 대표가 30여년간 수집한 그의 작품과 유품 170여점을 한자리에 모은 것이다.

고은당은 2년 전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 갤러리H에서 이보다 작은 규모의 이방자 작품전을 연 바 있다.



이방자가 그렸다는 그림 '한매쌍작' [고은당 제공=연합뉴스]



매화 가지에 앉은 새 한 쌍을 포착한 '한매쌍작' 등 회화 50점과 '국정민강' '근검애본' 등을 쓴 글씨 18점,

호산 안동오·도천 천한봉과 함께 빚은 도자 34점, 칠보 32점이 전시된다.



이방자가 1년에 걸쳐 제작했다는 칠보 혼례복과 결혼 기념엽서, 가구 등도 포함돼 눈길을 끈다.


입장료는 성인 5천 원. 문의 ☎ 02-735-2573.



낙선재에서의 이방자 [고은당 제공=연합뉴스]

ai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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