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한 주말을 보내던 지난 25일, 인사동 마당발 노광래씨가 처들어 왔다.

냉면이나 한 그릇 하자는 전화에 나갔다가 송추 전강호씨 화실까지 실려 간 것이다.

 

가는 길에 냉면 사리와 술 안주까지 사들고 갔다.

여러 지인들도 호출한 모양인데, 다 사정이 있는 모양이다.

요즘 같은 코로나 비상시국에 많이 모여 좋을 것 없다.

 

전강호씨 송추 작업실은 천혜의 자연경관을 끼고 있어, 가는 길이 피서객 차량으로 아수라장이었다.

나들이를 제한하는 거리두기도 푹푹 찌는 무더위에는 공염불에 불과했다.

 

오랜만에 만난 전강호, 이종순 내외가 반갑게 맞았는데, 이 얼마만이던가?

코로나가 시작된 후 첫 만남이고, 송추 작업실에 들린 적은 3년이 더 되었다.

 

연못이 조성된 정원에 술자리를 마련했는데, 자연 속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덥지 않았다.

이제 연꽃이 피기 시작한 연못에는 팔뚝만한 술 안주가 우글거렸다.

 

노광래씨가 술자리를 만든 것은 오는 9월경 민병산선생 33주기를 맞아

인사동에 관한 책을 출판할 생각인데, 사진을 좀 제공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나 역시 인사동 책 낼 출판사 약속으로 코가 석자지만,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일은 개인의 일이 아니라 인사동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많은 정보와 자료를 수집해 알찬 책을 만들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 날 술자리에서 오래된 인사동 추억담이 숱하게 쏟아져 나왔는데,

미리 녹음기를 준비하지 못한 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다.

 

좋은 추억담도 많았지만 한 때 인사동에 사무실을 둔 모 시인의 추잡한 비행까지 나왔다.

그 자가 요즘 뜨거운 감자로 떠 오른 ‘예술원’ 회장을 하지 않았던가?

미성년자를 건드린 그 일이 다시 불거지면 사회매장은 물론 바로 구속감이다.

 

사실 예술원은 전면적인 개혁을 하거나 아니면 없애야 할 조직이었다.

철옹성 같은 벽으로 쉽게 들어갈 수도 없지만, 의식 있는 작가는 오라 해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작가가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지낸바 있는 이시영시인이다.

 

1954년 "반공 문예 조직의 국가적 공적에 대한 물질적 보상이자 권리 주장”이라는 설립 성격도 웃기지만,

아무것도 하는 일 없는 회원들에게 매달 180만원의 정액 수당과 각종 회의 수당을 지급하고 있다.

그런데 예술원 문학 분과 회원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회원이 대학교수 출신이라 연금을 받는데,

이중으로 국고를 낭비할 필요가 있는가?. 차라리 그 예산으로 젊은 예술가들을 지원해야 한다.

 

프랑스와 미국, 독일 예술원의 경우는 회원들에게 지급되는 정액 수당이 없으며, 미국은 오히려 회원들이 연회비를 낸다고 한다.

다들 예술원 회원 자신들보다는 젊은 예술가를 지원하는 데 사업 방향이 맞춰져 있다고 한다.

‘대한민국예술원’은 하는 일도 없지만, 국민들도 뭐 하는 곳인지 잘 모르는 분이 더 많다.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알고 있으나, 다들 마음 상할 필요 없어 입 다물고 묵인해 왔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문학, 미술, 음악분과와

연극·영화·무용을 합친 4개 분과로 구성되어있는데, 사진 분과만 빠졌다는 점이다.

사진 뿐 아니라 아동문학이나 희곡 분야 회원도 없고, 남성 회원이 압도적으로 많다.

 

오래전 일이지만, 지금은 작고하신 원로사진가 임응식선생 생활이 어려워

이명동선생을 비롯한 원로작가 몇몇 분이 나서서 선생을 입회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 있다.

지금 생각하면 세금이나 축내는 경노단체에 안 들어 가신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얼마나 패거리 의식이 심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며칠 전 소설가 이기호 교수가 예술원을 비판하는 단편 소설을 발표하며

'대한민국예술원'의 전면 개혁을 요구하는 국민청원을 올려 화제가 되고 있다.

이 문제는 당사자들이 스스로 탈퇴하는 것이 덜 쪽 팔릴 문제다.

 예술가들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결단을 부탁드린다.

 

사진: 전강호,조문호 / 글: 조문호

 

 

'대한민국 예술원을 폐지하라'

 

한겨레 [시론]

이순원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이기호 작가가 대한민국예술원을 비판하는 소설 ‘예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발표했다. 대한민국예술원은 예술의 창작·진흥에 공로가 큰 원로 예술가를 문학·미술·음악·연극 분야별로 선정해 우대하고 예술창작활동을 지원하는 기관이다. 긍정적인 역할보다 자신들의 잇속을 채우는 집단 이기주의적인 모습으로 오히려 젊은 예술가들의 창작 의욕을 꺾는 일들이나 하기에 뜻있는 사람들은 일찍이 폐지를 말해왔다.

 

문학회원의 경우 원로 문인으로 귀감이 되기는커녕 부끄럽고 추하게 자신의 ‘생사당’을 짓듯 살아서 자기 이름의 문학관을 짓는 모습들과 후배 예술인을 위한 창작 지원 활동보다는 자신들만의 특권 확보에 더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여왔다.

 

우리는 춘천에 있는 김유정문학촌이나 안동의 이육사문학관이나 문학관은 작가 사후에 후대의 사람들이 그의 작품과 문학정신을 선양하고 기리어 짓는 것으로 알아왔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어 자기 문학관을 국가 예산까지 끌어들여 짓는 모습을 보고, 또 어떤 이는 문학관을 짓는 것에 더해 지역 시민의 재산인 공적 재산 수백점을 탈취해 가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저런 자들이 예술원의 회원이 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대한민국예술원의 한해 예산은 32억6500만원으로 예술원의 문학 분과 회원 26명이 받는 수당만도 4억6800만원이다. 여기에 비해 2021년 아르코청년예술가지원 사업으로 문학 부문 청년예술가에게 지원된 예산은 7명 선발 4000만원에 불과했다. 예술원 회원이 되면 자신들이 받는 연금 외에 월 180만원, 연간 2160만원의 수당을 받는다. 대부분 다른 고액의 연금을 받는 이들이 감액 없이 받을 수 있는 금액이다. 이런 특권적 지원이야말로 창작 지원이 절실한 청년예술가에게 돌아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오죽하면 이기호 작가가 “나라 예산으로 명예를 세우지 마십시오. 제 또래의 부장급 과장급 작가들도 밥벌이가 따로 있으면 지원금 같은 거 신청 안 합니다”라고 말하겠는가. 누구보다 지원이 절실한 전업작가들도 남보다 조금 더 알려지면 자기보다 어려운 동료 후배 작가들을 생각해 지원 신청을 자제한다. 그러나 예술원은 이제까지 오히려 자신들의 이득과 탐욕을 키워왔다.

 

과거 2005~2006년 ‘우수예술인발굴지원’ 하던 것을 폐지하고, 2006년부터 2021년까지 자신들의 잇속을 채우기 위해 예술원 회원만의 예술활동 지원을 시행해왔다. 그나마 외부 작가에게 주는 ‘대한민국예술원상’도 올해 문학 부문은 예술원 회원의 동생에게 1억원을 주었다. 이쯤 되면 특권이 아니라 나라 세금에 대한 범죄 수준이 아닌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기호 작가가 공개한 글에 이시영 시인이 댓글로 이들이 ‘수당 180만원을 200만원으로 인상하고, 행사 시 국가 의전서열 제일 앞에 예술원 회원을 배치하고, 해외여행 시 공항 귀빈실 이용 및 1등석 등을 요구하고 있다. 후진 예술가들의 가난과 고투 등은 눈 밖이며 오로지 예술 원로로서의 자기 보신이 제일 사업이며 청와대가 예술가들을 초청해 밥을 안 먹는 것도 항의하고 있다’고 했다. 정말 어느 정도까지 추해질지 끝이 없다.

 

회원은 예술원 회원이거나 예술원이 지정한 예술단체가 후보를 추천하는데, 예술원 회원 중 출석위원의 3분의 2가 동의하면 회원이 된다. 자격도 임기제에서 종신제로 저희끼리 바꾸었다. 이러다 보니 예술원 회원이 되기 위해 누가 어떤 로비를 펼쳤는지 온갖 추문이 흘러나온다. 존경받는 회원이 왜 없겠는가마는 명단을 보면 어떻게 저런 사람이 예술원 회원이 되었나 싶은 이름이 왜 저렇게 많은지 절로 이해가 된다.

 

어떤 사람들은 개선을 말하지만, 조직 자체가 이기적이고 탐욕적으로 운영되어 개선해봐야 마찬가지다. 무보수 명예직이라 하더라도 그 허울을 차지하기 위해 다시 추한 몰골을 보일 것이 뻔하다. 문학으로 예술을 하는 우리 자신을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저런 단체는 해체와 폐지가 답이다. 그 전에 부끄러움을 알고 스스로들 물러나길 바라나 이제까지의 특권적 모습을 보면 이 또한 무망한 일이다. 정녕 문학을 하는 우리가 부끄럽다.

 




인사동 사람들이 모처럼 서울 도심을 벗어나, 송추에서 뭉쳤다.

무슨 미련에 못 떠나는지, 인사동 주변을 기웃거리는 예술가들이다.
매월 셋째 수요일마다 인사동에서 만나 대포 한잔하기로 한 것도,
위안거리를 만들기 위한 방편이나 몇 나오지도 않는다.






지난 셋째 수요일 만남에서 송추로 소풍 한 번 오라는 화가 전강호씨의 초대가 있었다.
개천절인 3일 정오 무렵, 송추에서 만나자는 조준영시인의 연락으로 찾아 나선 것이다.
송추유원지 부근에 있는 전강호씨 자택에서 모처럼 자연과 벗이 어울린 호젓한 시간을 보냈다.






전강호씨는 산을 눈앞에 두고 있어 천혜의 자연경관을 누리고 산다.
가 본지가 10년도 넘어 좀 헤맸는데, 주변이 많이 바뀌었더라.
처음 보는 건물들이 많아 낮 설었지만, 집에 들어가니 산을 정원처럼 끼고 앉은 옛날 그대로였다.






그 날은 날씨마저 받혀주어. 따스한 햇살에 온몸이 노글노글 했다.
전강호, 이종순 내외는 물론 조준영, 박윤호, 김민경, 유진오씨가 먼저 와 있었고,
민영기씨 승용차에는 김수길, 공윤희씨가 도착해 내리고 있었다.






인삿말에 동네가 많이 달라졌다고 했더니, 땅값도 몇 배나 올랐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사는 집값이 오르면 기분이야 좋겠지만, 그 집에서 살아야 할 사람에게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지천에 늘린 밤도 줍고, 연못에서 노니는 물고기 모이를 주는 등, 술만 마신 게 아니었다.
뒤늦게 화가 정순겸씨 자매와 사진가 하형우씨도 왔고, 한 때 인사동의 ‘풍류사랑’을 운영했던 최동락씨도 오셨다.






이 반가운 술자리에 노래 한 자락 없어서야 되겠는가?
소리꾼 김민경씨 노래야 여러 차례 들어 잘 알지만, 유진오씨 노래는 처음들었다.
마치 “여자의 일생”을 살아 본 것처럼 처절하게 웃겼다.






그러나 안타까운 소식도 전해졌다.
다들 무세중선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넘어져 갈비뼈가 부러졌다는 것이다.
병문안이라도 가야 했지만, 다들 술 마신 상태라 들리기가 좀 그랬다.
요즘은 기초생활수급자 혜택으로 간신히 사신다는 이야기도 전해들었는데,
한 분야 획을 그은 예술가의 여생이 이러하니,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화가 전강호씨는 인사동과 연을 맺은 지가 어언 30여년이 넘었다.
작가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목발로 어지간히도 인사동 주막을 누비고 다녔다.
그동안 강용대, 김종구, 적음스님, 신원섭씨 등 술로 이승을 떠난 친구도 여러 명이다. 



 


유신시절에는 사마귀 작가로 불릴 만큼, 사마귀 그림에 집착하기도 했다.
곤충의 군림자 같은 사마귀 형상에서, 작가의 시대적 저항을 읽을 수 있다.
그 이후에는 버려진 폐자재를 활용하여 다양한 작업들을 했으나, 돈과는 연이 닿지 않았다. 
그렇지만 돈에 연연하지 않고 힘겹게 주워 모은 폐자재들로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여름과 겨울 일 년에 두 번씩 술과 외출을 자제하고 수행하는 모습은 스님을 닮았다.





그는 한쪽 다리가 없지만, 건강한 사람보다 더 부지런하다.
그림은 물론 집 주변의 조경이나 모든 것들이 그의 손길 안 닿은 곳이 없다.
텃밭을 가꾸며 직장에 다니는 아내 뒷바라지까지 다 한다.
부지런한 생활에서 예술을 찾아내는, 삶 자체가 예술이다.






푸짐한 안주 덕인지, 아니면 가을 날씨 때문인지,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차를 가져 온 민영기씨 일행이 일어나, 나도 일어나야 했다.
버스타기 번거로워 끼어 탔으나, 많이 아쉬웠다.

술과 안주도 남았지만, 남아 있는 벗들이 더 눈에 밟혀서다.





아무튼, 전강호씨 내외 덕에 가을 소풍 잘 다녀왔다.
손님 맞느라 애쓴 두 내외분께 거듭 고마움을 전한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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